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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정부론] 개인정보보호(공인인증서, G-ISMS, I-PIN)
    개인정보보호개인정보보호에 취약한 현실개인정보보호를 위한 정부의 노력공인인증제도공인인증서의 발급절차 1 . 사용자 ( 개인 / 법인 ) 가 공인인증기관이나 등록대행기관을 직접 방문 하여 인증서 발급을 신청하며 이 때 신원확인서류를 제출 . 2. 공인인증기관 / 등록대행기관에서는 신청자의 신원 확인 후 , 참조번호와 인가코드가 기재된 등록확인서를 전달 . 3 . 사용자는 공인인증기관 / 등록대행기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인증서 관련 응용프로그램 ( 플러그인 ) 을 내려받아 자신의 PC 에 설치 . 4. 공인인증서 발급메뉴를 선택하여 안내에 따라 참조번호와 인가코드를 입력 하고 , 인증서 저장매체 선택 , 비밀번호 설정 등을 수행하여 공인인증서를 설치 .공인인증제도의 장단점 장점 단점 ∙ 신원의 인증 : 전자서명은 송수신자의 신원 증명을 용이하게 해주며 , 이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간의 거래에서 중요 ∙ 부인방지 : 전자서명은 문서 또는 메시지가 변경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공하므로 송신자나 수신자가 문서를 보내고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함 ∙ 효율성 : 전자서명은 거래의 속도와 정확성을 높일 수 있으며 , 종이를 대신한 전자문서는 문서저장비용과 공간의 절약을 가능하게 하여 효율성을 높임 ∙ 사용의 불편함 : 공인인증서 발급에 필요한 절차가 복잡하여 이용자들이 불편함 ∙ 보안의 취약점 : 공인인증서는 단순한 파일 형태로 존재하고 , 복제가 가능하며 , 모든 PC 에서 그 위치가 동일하다 . 따라서 해커는 사용자에게 스파이웨어 용 ActiveX 를 설치하게 하고 사용자의 정보를 가져갈 수 있음 ∙ 전자문서 활성화와 전자거래의 걸림돌 : 공인인증서는 ActiveX 를 기반으로 하는 환경에서만 설치 및 사용이 가능한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이런 구조는 모바일 환경뿐 아니라 , 다른 산업으로의 파급효과에 제약 요인이 되고 있음관련기사G-ISMS ∙ G-ISMS 란 전자정부 정보보호관리체계 . ∙ 행정기관이 정보보호를 위해 필요한 관리적 · 기술적 · 물리적 기준에 적합한 정보보호관리체계를 갖추었는지 심사하여 인증기준에 따라 적절히 운영하면 인증서를 부여하고 지속적으로 사후관리를 수행하는 제도 .G-ISMS 의 필요성G-ISMS 의 목표 체계적인 대응 , 지속적 관리와 함께 전사적 , 균형적 보안을 구현하여 궁극적으로 전자정부 서비스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 이다 . 단편적인 대응방안으로는 보안에 큰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정보보호관리체계를 활용하여 다양한 대책가운데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 그것을 구현하며 , 이를 체계적으로 지속하고 운영 ∙ 유지할 수 있다 .G-ISMS 의 기대효과 정보보호관리체계의 수립을 통해 경제성 , 안정성 , 사회성과 같은 기대효과를 볼 수 있다 .관련기사I-PINI-PIN 의 특징 및 장점I-PIN 의 이용효과I-PIN vs 주민등록번호 I-pin 인증 주민등록번호 실명확인 검증방법 주민등록번호 실명확인 + 신원확인 주민등록번호 + 이름 일치 여부 확인 주민등록번호 저장 웹사이트에 저장 안됨 개별 웹사이트에 저장 유출위험 주민등록번호 외부노출 가능성 적음 I_PIN 노출 시 페지 / 신규발급 가능 주민등록번호 외부노출 가능성 많음 주민번호 노출 시 변경 불가능 사용방법 신원확인 후 본인 확인기관에서 I-PIN 발급 웹사이트에서 본인 확인 시 주민번호 사용 웹사이트에서 본인확인 시 I-PIN 아이디 / 비밀번호 사용관련기 사결론 우리나라 전자정부 수준은 세계 1 위를 자랑하고 있지만 보안에 대한 인식이나 수준은 낮은 편이다 . 우리나라의 보안 의식은 무사안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 이러한 의식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 사례가 끊이질 않고 있다 . 따라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다양한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며 , 또한 근본적으로 보안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자료 http://i-pin.kisa.or.kr/ http://www.ytn.co.kr/_ln/0102_*************70456 http://blog.naver.com/cocogirl81?Redirect=Log logNo=23011308 http://jentshin.new21.org/v2006/bbs/view.php?id=study no=794 http://cafe.daum.net/of2030/5R9W/429?docid=1AFjZ|5R9W|429|*************9 q=%B0%F8%C0%CE%C0%CE%C1%F5%C1%A6%20%B9%AE%C1%A6%C1%A1 http://cafe.naver.com/90path.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38 http://www.etnews.co.kr/201104080039 http://www.cyworld.com/pure_sunding/3912082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160634003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131699001 http://www.etnews.co.kr/201104080039 http://www.boannews.com/media/view.asp?page=1 gpage=1 idx=24979 search= find= kind=0 http://news.donga.com/3/all/20110412/36341339/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 mid=tvh oid=214 aid=0000175186 http://100.naver.com/100.nhn?docid=88518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 mid=tvh oid=052 aid=0000232064{nameOfApplication=Show}
    경영/경제| 2014.03.10| 20페이지| 2,500원| 조회(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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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담스미스-국부론] 경제학원론
    R E P O R T< 그것이 알고 싶다... >- 국부론 A. Smith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A.Smith의 ‘국부론’에 대해서 먼저 언급을 하게 된다. 그만큼 국부론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는 경제학의 시초이자 경제학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즉, 경제학이 지금까지 이렇게 존재하게 할 수 있게 된 토대이자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 저술이 된 것이다. 1776년에 발간하자마자 많은 경제학자에 의해서 국부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일단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 언급을 하자면 그는 1732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출생을 하였다. 이 후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적 철학과 관련해서 교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의아했던 것이 아담 스미스는 처음부터 경제학자가 아니었고 10년을 넘게 도덕과 관련된 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강의를 한 철학자였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경제학자가 되어서 경제학의 시초인 국부론을 탄생 시켰는지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아담 스미스가 강의 하는 내용 중에는 편의론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경제학과 같은 맥락의 이론을 강의함으로서 경제학이 낯설지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담 스미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생산 부문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 당시에는 농업으로 인한 국가 생산력이 증대 하였고 농업의 결과물이 식량을 통해서 수출하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농업이 주를 이루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공업은 기껏해야 직물 공업 정도이지만 그것도 생산기구가 단순하기 때문에 발달이 되지 않았다. 여러 국가들은 중산주의 정책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하고 수입을 억제함으로 생산 활동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통제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고 좀 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원하고 있었다. 그 경제 활동의 시초이자 토대를 만든 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이다.국부론은 경제인의 경제행위에 따른 자연적 질서의 확립이라는 사상 하에서 저술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부란 그 국가의 국민이 매년 마다 생산해낸 생산물이자 그 생산물의 원천은 노동이라고 하였다. 즉, 국부론에서의 국부는 사람이 어떤 생산물에 대해서 유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함으로서 부가 생긴다고 주장을 하게 된다. 그 주장은 국부는 유통과정에서 생겨나는 부라고 하는 중상주의와 다르게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이 생산하는 생산물을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크게 분업과 생산 노동의 증가를 주장했다.특히 분업의 결과는 노동 생산력의 가장 큰 개선과 그것이 적용되었을 때의 숙련도와 솜씨, 판단력의 대부분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분업을 강조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 시대에는 기계로 인한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아직 산업혁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서 생산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보다 빨리 보다 많이 생산물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분업이다. 분업을 함으로써 분업을 하기 전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고 많은 시간을 절약함으로서 노동 생산력의 증가가 일어날 수 있다.즉, 아담 스미스는 분업을 노동 생산성 향상의 최고의 수단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 분업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사회적 분업과 기술적 분업으로 나누게 된다. 먼저 사회적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 기업들 간의 생산물의 교환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로 인해서 생산수단의 소유가 분산된다. 또, 생산물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사회적 교환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관계는 느슨하였다. 그에 반해서 기술적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 기초한 분업으로서 생산수단을 분산시키는 사회적 분업과 달리 생산을 한 자본가에게 집중된다. 또, 기술적 분업은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하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다. 쉽게 말해서 사회적 분업은 공산주의로 지칭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생산물을 생산하고 그것을 똑같이 나눔으로서 소유가 분산되는 것이다. 반면에 기술적 분업은 민주주의로 지칭되며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그 생산수단 또한 자신이 소유하게 되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분업을 통해서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함으로서 그로 인해서 서로 간의 교환이 가능하게 된다. 그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화폐가 등장하게 된다. 화폐를 통해서 상품의 가치에 대해서 아담 스미스는 설명하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게 된다. 분업에 기초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생산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산물과 교환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얻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는데 자신이 생산물을 생산했을 때의 가치와 자신이 필요한 생산물을 다른 사람의 생산물을 통해서 바꿀 때의 그 가치와 동일하냐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 가치를 수치적으로 따져서 교환을 할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자신이 교환 할 가치의 척도를 노동의 가치라고 주장을 하게 된다.즉, 자신의 바꾸려고 한 생산물의 가치는 자신이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투입한 노동의 가치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담 스미스의 주장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담 스미스는 농업 사회 다른 말로 1차 산업에 기초한 가치를 주장하였다. 그 말은 사람이 생산을 할 때 꼭 자신이 생산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을 해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 가치에 대해서 알 지 못했다는 것이다.자신이 생각했던 가치에 비해서 고용을 통해서 지출된 비용이 추가적으로 생산 된다면 그 가치는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스미스의 주장은 1차 산업인 농업 사회에서 이용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또 아담 스미스는 분업 이외에도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생산적 노동이란 부가가치가 뛰어난 노동, 그리고 그 상품을 팔거나 교환할 가치가 되는 노동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비생산적 노동은 한마디로 서비스 노동이라고 정의 했다.즉, 상품을 파는 역할을 하는 노동이 아닌 서비스를 위한 노동이 비생산적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비판할 수 있는데 서비스적인 것이 꼭 비생산적 노동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비스를 통해서 추후에 상품을 팔 수 있고 부가가치가 창출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서비스 노동이 무조건적인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아담 스미스는 생산적 노동을 통해서 동시에 자본이라는 개념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화폐의 개념을 공업과 상업에 확장 시켜 자본과 이윤을 연관시켜서 자본이 이윤을 통해서 나오는 수단이라고 정의를 했다.아담 스미스는 크게 분업과 가격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업을 통해서 자본을 이용한 이윤 창출의 극대화이라고 생각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많은 기업들이 이윤 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적게 주거나 토지의 지대가 싼 곳에 입지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재화의 가격이 영향을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윤 창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많은 기업들이 아담 스미스에 국부론에 의거하여서 경영을 하는 것 같다. 또, 아담 스미스는 경제의 여러 체계를 설명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통제와 독점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경제적인 원리상 통제와 독점보다는 자유와 경쟁을 통해서 보다 나은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경영/경제| 2014.03.10| 5페이지| 1,500원| 조회(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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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의 리더십 내용요약
    이순신의_리더십.hwpREPORT『이순신의 리더십』과 목:리더십론학 과:제 출 일:담당교수:학 번:이 름:< 목 차 >◈ 책머리에◈ 프롤로그Ⅰ. 조.일 7년전쟁의 하이라이트1. 무승부의 7년전쟁2. 일본군의 잔학상과 우리의 영토 수호 의지3. 명군의 양전음무4. 이순신과 명 수군간의 갈등 및 협동5. 조.일 7년전쟁을 통해 본 한국전쟁의 교훈Ⅱ. 이순신이 치른 8대 해전1. 옥포해전2. 당항포해전3. 한산도해전4. 부산포해전5. 용포해전6. 제2차 당항포해전7. 명량해전8. 노량해전Ⅲ. 이순신의 리더십 진수1. 면주선등의 마지막 결단2. 살신순국. 망신국활의 표본3. 어폭보민과 충성의 군인정신4. 일부당경. 족구천부의 승전비결5. 지(知), 신(信), 인(仁),용(龍),엄(嚴)의 장재(將材)6. 하마. 악수. 개유의 대민자세7. 지기지피의 전투정보 획득8. 완벽한 전쟁원칙 적용9. 내부적 안보위험 극복의 교훈10. 사기양양, 단결심 배양, 기강확립의 으뜸11. 수신. 제가. 치국의 도에 합당한 리더Ⅳ. 이순신의 리더십 현대적 원칙에 재조명1. 너 자신을 알라2. 업무에 정통하라3. 자기행동에 책임을 지라4. 솔선 수범하라5. 건전하고 적시적인 결심을 하라6. 과업이 이해.완수.감독되는지 확인하라7. 부하를 알고 복지를 도모하라8. 부하에게 잘 알려 주라9. 부하를 단체의 일원으로 훈련시켜라10. 부하를 능력에 준하여 사용하라11. 부하의 책임감을 육성하라Ⅴ. 보충자료1. 이순신의 세보 및 약력2. 이순신의 평가 및 동서양 영웅과의 비교3. 서양문헌의 일부 내용 소개4. 조.일 7년전쟁과 조선 수군의 8대 해전 연표◈ 에필로그◈ 독후기◈ 책머리에이순신은 조선의 진정한 대장부요 불세출의 민족적 영웅이다. 그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을 뿐만 아니라 선비 위품을 갖춘 장수이기도 했다. 그는 지성, 양심, 봉사를 원리로 하는 자유인, 성실인, 사명인 이었다. 그의 이런 인간상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접근해 보자. 첫째, 자유인으로서의 이순신은 주인정신을 진리로 의 고향으로 보내어 안장해 주고, 그들의 처자에게는 특별한 위로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부상자에게는 약을 주어 치료하게 하는 동시에 부하장병에게는 공정한 논공행상을 시행함으로써 사기진작과 단결심 함양에 유의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정2품 자선대부로 승격시켜 이순신은 오늘날의 장관급의 장수가 되었다.이순신은 당항포 해전의 승리와 스스로의 승급에 만족하지 않고, 적을 무찌르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는 마음을 다음 시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외로운 신하때 못한 것이 한이로다!소매 속엔 적을 꺾을 법 있건만가슴속엔 백성을 전질 방책이 없네.3. 한산도해전한산도해전은 한산대첩(閑山大捷)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조?일 7년전쟁 중 권율의 행주대첩 및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더불어 흔히 3대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순신은 옥포해전과 당항포 해전에서 압도적인 해상세력우위를 입증함으로써 일단 상실한 영남해안의 대부분 해역에서 제해권은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지상전투는 패전의 연속으로서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승승장구의 일본군은 서울, 개성, 평양 점령에 이어 일단 추월공격 하느라 남겨 둔 지역인 전라도는 수륙병진 공격으로 점령하여 서울에서 합류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0여척의 일본 수군은 가덕도와 거제 부근에 전진배치 되면서 통영 쪽으로 점차 접근해 오고 있음이 1592년 6월 말경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이억기 함대와 하루 늦은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여 통합함대는 7월 6일 여수를 떠나 당포에서 결진한 다음 경야 중 척후선으로 정탐한 바에 의하면 적은 이미 견내량 남단에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집단 정박하고 있었다.(1)한산도해전(7월8일)견내량은 여러 개의 섬이 중간에 가로 놓여있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 다수가 기동하기에는 제한이 많은 곳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견내량 북쪽에 결진하고 있는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의 대형을 취하면서 방향을 180도 전환하면서 적을 V자로 양익 포?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것이다.그러나 그의 한산도 생활은 3년 만에 투옥? 삭탈관직? 백의종군이란 청천벽력 같은 불행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초대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됐지만 제2차 당항포 해전에 장기간 출전하고 있는 중이라 본인에게는 두 달 후에 교서가 전달되었다.그런데 이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의 8대 해전에 포함되지 않는 해전으로 단 1척의 적선도 싸워서 격파하지 못했던 거제도의 장문포 및 영등포 해전이 있었다.이때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로써 대함대를 거느리고 싸웠으나 부끄럽게도 전과를 전혀 얻지 못했는데 이는 한마디로 원균의 하극상 때문이었던 것이다.특히 작전 기간 중 원균은 이순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함선을 운용하고 행패를 부리는 등 하극상의 본을 보였다.더욱이 사전에 주도면밀한 계획과 준비는 물론 상륙작전 능력도 갖추지 않은 채 재인(才人)들로 구성된 핫바지들을 동원하여 오늘날 해병대 역할을 맡겼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이 작전을 강행한 윤두수는 문책을 당하여 좌의정에서 파직되자, 그 화살을 지휘관인 이순신에게 돌렸다.원균으로 하여금 허위보고를 조작하여 장계에 올리도록 하였던 것이다.이때부터 이순신 죽이기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봉쇄? 차단하고 일본군의 서진을 막음과 동시에 차후 작전을 위한 준비에 사력을 다하였다.7. 명랑해전이순신이 1593년 8월15일,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후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여 견내량 이서로 일본 수군이 진공하지 못하도록 봉쇄?차단하고서 차기 작전을 위한 부대 재정비?강화에 전념한 기간은 1597년 2월26일까지의 3년 6개월여 동안이었다. 그가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미움을 받은 결과 일본 장수 가또오를 제2차 침공 시 요격 못했다는 것을 구실로 파직당할 때까지 이룩한 초인간적인 업적은 그 이전의 6차례에 걸친 대 해전에서 거둔 무적함대의 위업에 못지않은 엄청난 군사력 건설 및 대민지원 성과였다.그가 체포 구금되고 나서 원균이 3도 수군통제사 자 구차스레 제 목숨 보존한 자들은 저 나뭇잎 위해 붙은 먼지와 다를 것이 없어서 이것으로서 저것에 비긴다면 하늘의 은총이 또한 풍족하다고 할 것이다’이는 이순신이 ‘평소에 지녔던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확고부동한 사생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순신은 전쟁 첫 해인 1592년 5월, 6월 그리고 7월에 연이어 사생결단으로 일본 수군과 싸워 빛나는 전과를 수립한 바 있으나, 맥없이 무너지거나 도망치는 관군의 지상전 때문에 적은 불과 상륙 20일 만에 서울을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정부가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는 햇볕정책은 정확한 위협평가에 의한 국방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국가안보 위협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며, 군사적 위협은 피아 군사능력과 의지 그리고 취약성을 비교, 분석, 평가함으로써 판단하게 된다. 주한 미군은 비록 한수 이남으로 재배치되지만 한반도의 전쟁을 억제하고 억제 실패시 평화를 회복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다. 첫째, 빗장 기능이다. 북한군이 휴전선을 뚫고 남침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문의 빗장과 다름없는 구실을 주한미군이 담당한다. 둘째, 인계철선 기능이다. 비록 소규모의 전진배치 세력이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서태평양에 있는 미 해,공군력이 투입되고 이어서 동태평양의 미 중원군이 후속 투입되도록 되어 있다.3. 어폭보민과 충성의 군인정신율곡 선생은 임진왜란 발발 10여년전에 선견지명을 갖고 일본의 도요도미가 전국을 통일한 후 팽창하는 전력을 대륙침략으로 연결시킬 것이란 것을 간파하여 병조판서 재직중 임금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시급히 조치해야 할 6대 당면과제를 시무 6조로 건의하였다.1) 양군민율곡 선생은 한반도 주변정세를 정확히 평가한 결과 국가안보를 위해 서울에 2만명, 8도에 각 1만명의 상비군 10만명을 육성, 배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족재용율곡은 국방자원 관리 합리화를 국방의 으뜸으로 꼽았다. 특히 그는 1년분의 군량미를 비축하고 1년간의 재정 수입, 지출 균형을 재개를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그의 하마, 악수, 개유란 겸손과 온유의 대민자세로 일관함에 온 백성이 감동, 감화되어 기대이상의 대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서진하는 적의 함대를 저지, 격퇴하지 않았다면 적군의 수군이 한강으로 진입하여 서울을 협공 포위하여 능히 함락시켰을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이순신을 존경하고 순복한 부하는 물론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관할해역의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이다. 원균처럼 강제로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고 말 안 들으면 처형하는 그러한 우매한 포악한 짓을 이순신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7. 지기지피의 전투정보 획득정보와 전투작전의 관계를 잘 모사한 불후의 명언은 일찍이 나폴레옹이 말 위에서도 읽었다는 손자병법의 모공 편에 나오는 지기지피 백전불태란 말이 아닌가 싶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실전감 있는 군사철학의 ABC이다.비록 현대군대의 지휘 및 참모활동 절차나 작전계획 작성과정대로 이순신의 의사결정이 행하여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출전에 대비하여 정보판단이나 상황판단에 근거한 작전계획을 발전시켰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그는 적과 지형, 수로조건 그리고 기후에 대하여 세밀한 연구, 분석을 하여 승전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첫째. 척후병과 탐망선의 사용이다. 이들은 정찰이나 수색수단으로 전투지대 내외의 적과 지형, 기상을 미리 알아서 작전계획을 세우거나 작전활동을 개시하기 위한 사전조치 수단이라 하겠다. 그 당시엔 교통수단이 원시적인 상태였던바 시-공간적으로 정확성과 신속성, 보안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싸우기 전에는 정보획득을 필수적인 선행조건으로 삼았던 것이다.둘째. 지형지물과 지상조건 선용이다. 이순신은 남해안의 도서, 항로, 조류, 기상, 해저장애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부단한 연구에 대한 작전시 이용으로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노젓는 배를 수십 척씩 이끌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항해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 당시에 암초많은 유한다.
    독후감/창작| 2010.12.06| 39페이지| 3,000원| 조회(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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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크노폴리 개념지도
    1장. 타무스왕의 판정타무스문자는 기억력 약화거짓지혜테우스수,계산,기하학,문자 발명비판기술도착자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가능성 외면능력만 과신타무스왕이야기프로이트기술과 과학의 진보의 혜택과 안좋은점기술의 긍정적 측면을 바탕으로 기술에대한 비판강조자신이 만든 도구의 도구로새로운것들이 오랫동안 특정의의미를 담아온 기존용어를 변형ex) 정치토론,뉴스 → TV정보 → 컴퓨터진리,법칙 → 문자(인쇄)테크노폴리 (Technopoly)∴ 새로운 기술은 생각하는 것을바꾸고 특징을 변화시킴전락해가는 사람들2장. 도구사용문화에서 기술주의문화로마르크스 - ‘철학의 빈곤’기술의 사람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새로운 방식창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정신적 삶의 이해문 화Culture테크노폴리(thechnopoly)∴ 사람들이 기계문명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결국엔 도구문명 삷과 바꾸진 않는다기술주의 문화(중세유럽기원)종세세계의 신학과 형이상학을날려버릴 사람들(∴기술주의문화의 토대를 마련, 정작자신들은 도구문화속에 사는 사람들)⇒코페르니쿠스-책(지동설)/케플러-궁정 점성가갈릴레이-망원경도구사용문화→ 긴밀히 통합되어있는 어떤 문화적 신념들의 다발속에 파고들 수 있는 저력ex) 사무라이-무사도/ 풍차/ 석궁/ 안경*붕괴 - 샤를 마르텔→등자시계(종교의식도구→기업영리도구)3장. 기술주의문화에서 테크노폴리로18세기후반 영국 - 제임스 와트 [증기엔진]기술문화의 출현1779년 - 애덤 스미스 [국부론]전성기18세기후반 - 리처드 아크라이트 [공장제도 발명]어떻게 발명하는가를 알게 되면서 왜 발명하는가에 소홀19세기우 리이식 와해진보의 사상 전통적 관계전통적 세계관기술적 세계관테크노폴리(Technopoly)탄생→둘중의 하나 사라짐테크노폴리의 출현 - 1910년 테일러 시스템 사건미국에서 왜 번창? 미국적 특성(새로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자본가의 천재적 자질과 대담성기술의 편안함, 풍요로움 → 다른 것 요구X[절제에 대한 불신/개척정신/기술의성공/전통적신념 천시]∴ 미국의 기술주의문화 ⇒ 테크노폴리(공존,대립)4장. 불가능할 법한 세계16세기초 인쇄기술의 발명17세기 현대적 학교19세기 전신 Telegraph 발명테크노폴리(Technopoly)∴ 정보과잉사회반정보결핍증후군20세기 정보→ 상호연관성X즉시성흥미성컴퓨터(5세기혁명)방 송기원 -5장. 무너진 방어체계테크노폴리(Technopoly) - 문화의 양태정신의 양태기술의 신격화⇒ 정보과잉을 막는 방어체계가 무너졌을 때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대학교의 카탈로그가족제도의 발전정보통제예종교 / 국가⇒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ex)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발터 벤야민 [상품자본주의]⇒ 관료주의 / 전문기술 / 기술기구제도6장. 기계의 이데올로기 - 의학기술미국의 의학적 공격성청진기검안경 / 후두경 / 엑스레이의 학 기 술⇒ 20세기 - 의학에 기술의존도↑(1940년대 진단기술 발달 / 항생제개발)⇒ 기술은 의술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다⇒ 기술은 스스로 요구사항을 창조 및 사회제도를 구축한다⇒ 기술은 의사역할을 재규정 및 초점과 관심을 재정향, 관점의 재개념화예결론7장. 기계의 이데올로기 - 컴퓨터 기술노버트 위너 - 명령과 통제의 기술로세프 웨이젠바움 - 보편성앨런 튜링 - 지능성매카시 - 생각테크노폴리 지배를 강화하는기능을 수행정보/직업/권력/지연과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제안→ 우리시대 규정컴퓨터 기술(Computer Technology)⇒ 테크노폴리의 권력인간 → 정보처리기계자연 → 처리될 정보∴ 인간이 컴퓨터 문화를 통해 기술과 전통을 잃게 되는 것을 우려특성8장. 보이지 않는 기술언어(Language)⇒ 순수한 이데올로기인간의 내부 / 직접적 / 가감없이 / 중립적 / 비정치적기계 (Industrument)인간의 외부 / 기계적 재창조통계학의 등장⇒ 새로운 현실인식물화 - 추상적 관념을 사물로 바꿈서열화 - 배치를 위한 기준 필요편향되고 제한된 생각을 인식하지 못함개념의 근복적 주관성X / 객관적 숫자 그 자체가 물화?정보홀대현상∴ 테크노폴리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기술의 기원과 영향을 깨닫지 못한다.9장. 과학만능주의자연과학의 방법론 → 인간의 행동사회과학이 사회의 이성적, 인도적구성의 필요한 원리를 생산⇒ 기술적 수단과학이 인생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포괄적 신념체계를 제공과학 만능주의과학(Science)⇒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탐구작업경험적 관찰사회과학 ≠ 과학ex) 뻔한결론 / 이야기성10장. 상징의 대고갈자주사용할수록 위력↓ex) 교육분야 - 목적이 아닌 수단상징⇒ 무한반복해도 고갈되지 않음전통상징의 평범화∴ 테크노폴리는 전통적 서사와 상징을 버리고 기술, 전문지식, 소비쾌락을 제시11장. 사랑으로 무장한 저항투사저 항 투 사의미론⇒ 의미를 생산, 해석인간의 상승⇒ 과거와 현재를 결합테크노폴리 실험⇒인간의 경험과 감정의 통일성, 연속성의 사례문제점 - 고유의 역사와 독창성, 인간성X문제의 실험적 제안 제시예술표현⇒ 기본으로 돌아가는 과정∴기술적 세계관의 공격을 중단시켜주는 저항투사는 바로 예술표현!
    인문/어학| 2010.12.12| 11페이지| 1,500원| 조회(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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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처럼-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REPORT제목 : 세종처럼과 목:리더쉽론학 과:제 출 일:담당교수:학 번:이 름:< 목 차 >◈ 프롤로그‘왜 지금 세종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여는 강의‘마인드맵으로 읽는 세종 리더 쉽’제1부.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제1강. 세종의 '습관노트‘- 제2강. 태종의 위대한 선택- 제3강. 왕의 조건- 제4강. 정치비전- 제5강. 성공적 왕의 승계자 태종의 행복제2부. 세종식 경영- 제6강. 인재충원- 제7강. 강점경영- 제8강. 혁신경영- 제9강. 독서경영- 제10강. 토론의 힘- 제11강. 세종의 열린 수업제3부. 세종의 비전경영- 제12강.창조와 문화국가비전- 제13강. 영토 비전- 제14강. 법 제도의 존립이유 - 제15강. 마음 경영제4부. 어록으로 보는 세종리더쉽- 제1계명. 밥은 백성의 하늘 이다.- 제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 들에게 헌신하라.- 제3계명. 인재를 기르고 선 발하고 맡겨라.- 제4계명. 싱크탱크를 활용하 고 회의를 잘하라.- 제5계명. 억울한 재판이 없 게 하라.- 제6계명. 외교로 전쟁을 막 고 문명국가를 건설하라- 제7계명. 영토는 한치도 양 보 할 수 없다.- 제8계명. 합리적으로 사고하 고 온 힘을 기울여 실천하라.- 제9계명. 자기관리를 철처히 하라- 제10계명. 사회적 약자를 우 선적으로 배려하라.◈ 에필로그 ‘다시 세종처럼’『세종처럼 - 소통과 헌신의 리더쉽.hwp◈ 여는 강의 : 마인드맵으로 읽는 세종 리더쉽7. 감동경영① 사대부- 경청- 설득- 세종식 화법② 백성- 노비 출산휴가- 경로의 정치- 의녀제도1. 인간세종① 가족관계 : 아버지 태종, 형 양녕 대군, 왕비 소현왕후 심씨② 교육과정 : 스승이수, 경연관변계량, 자녀교육(세자,왕자)③ 건강과 성격 : 체중과 운동, 군사 훈련, 질병세종의 국가 경영 마인드맵2. 인재경영① 인재관- 인재정의(인재는 나라의 보배다)- 강점경영② 인사행정- 인재선발- 검증절차- 배치와 재교육③ 인재쓰기 사례 : 황희,조말생, 김윤수, 설순6. 창조경영① 과학기술- 발명과 활동- 기술종은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궁선발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좋아하는 여성관은 덕스러운 용모에 신중한 성품 그리고 부지런한 여성을 좋아하였습니다.4. 화법☞ 세종은 신하들과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말을 일단 수긍함으로 마음을 푼 다음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경우가 적었으며, 상대방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되,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닌 회의의 종착지까지 토론의 배를 이끌어나가곤 했습니다. 가끔 궁지에 몰리면 엉뚱한 논리로 상대방이 당황해하는 사이에 다음 항구로 슬쩍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제2강. 태종의 위대한 선택 - 세종시대를 위한 길 닦기 >“총애하던 넷째 아들 성녕은 사망하고 왕세자인 맏아들 양녕은 반항하다”세종처럼 - 소통과 헌신의 리더쉽.hwp☞ 태종 이방원(1367~1422)의 일생 최대의 업적은 성공적인 왕위계승 작업입니다. 사실 태종 재위 말년인 1417년까지도 아무도 충녕대군이 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에 들어서 성녕대군이 사망하고 태종이 정치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세자 양녕이 반항하는 사건으로 기대를 포기하게 되는데 그 즈음에야 충녕대군으로의 왕위계승이 점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충녕대군의 왕위계승에서 가장 큰 고비는 민무구 형제입니다.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지 않는 한 제3,제4의 ‘왕자의 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태종은 전위를 미끼로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였습니다.“종사만년의 대를 이를 후계자 맏아들인가, 어질고 현명한 아들인가”안정되고 성공적인 왕위계승을 위한 태종의 두 번째 조치는 1418년 세자와 국왕 사이의 갈등 대립을 보며 고민하던 고위 신료들은 마침내 양녕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는 상소를 올리고 세자를 폐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교체될 세자후보의 의견에서 가장 큰 기준은 바로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기준에 걸맞는 사람이 충년대군이었습니다. 세자교체 후 태종의 교육방식도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서 세조2년(1456년)에 폐지될 때까지 37년간 운용되었으며, 그 사이에 집현전에 근무했던 학사와 관원은 10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조선 전기의 학문과 정치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었고, 세종 치세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선 후기 정조 때의 규장각이 그렇듯이 집현전 역시 세종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있던 것을 세종이 활성화시킨 제도라는 사실입니다.집현전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째는 집현 즉, ‘인재를 모아서’기르는 기능입니다. 세종은 집현전을 창설해 ‘국가의 인재가 모인 터전’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서적의 수집과 보관, 그리고 편찬 기능입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치국에 도움이 되는 서적을 편찬하는 일은 물론이고, 국가의 일을 기록하고 보존하도록 하였습니다. 나 , 같은 책이 그 예입니다. 이 중에서 인상적인 책은 인데 이 책의 내용은 대략 첫째, 병의 치료법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고 지방마다 다르다. 각 지방 초목의 생장과 사람의 식성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 둘째, 우리나라는 병을 치료할 약재를 골고루 갖고 있다. 다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며 얻기 어려운 중국 약만 구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그 땅에 나는 약초를 가지고 그 지역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따라서 임금께서 전국 각자의 약을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게 하되 향약방을 보완하게 하셨다. 집현전의 기능 중에서 셋째는,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역시 경연 등에서 국왕과 함게 학문적 토론을 하고, 정책적 자문을 하는 것이다. 세종은 형식적이던 경연은 본격화하고 국정 토론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반역자의 아내와 토굴에서 간통하던 황희 세종을 만나 청백리 재상으로 거듭나다”☞ 세종의 인재쓰기 사례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황희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대표적인 성군과 현신으로 꼽는 세종과 황희의 만남도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황희는 충년대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하였습니다. 세종에게는 황희는 보하고, 백성들의 불편을 줄이려 한 것입니다. 세종은 재위 5년 종래 30개월의 수령 임기를 60개월로 늘리는 구임제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태조가 처음 30개월의 수령 임기를 정하고 근무하게 해보니 수령들이 제대로 엄무파악도 못하고 끝나는 점, 그리고 잦은 수령의 영송이 민폐를 끼친다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령 임기를 60개월로 바꾸었습니다.“조선시대 승진 인사고과 -근무기관과 근무평정점수”☞ 조선시대의 인사고과 제대에서 관리가 승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 하나는 ‘사만승자’ 즉 근무기간이 차서 한자리씩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무평정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입니다. 근무성적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려면 출근일수와 업무수행능력이 우수해야 했는데 특히 임기가 만료된 관료들은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한 )도목정때의 평가가 중요했습니다. 즉 출근성적과 표폄성적을 점검하여 인사에 반영한 인사고과가 승진여부를 좌우한 것입니다. 수령들은 그 지역의 농사를 얼마만큼 잘 짓게 하느냐, 얼마나 인구를 늘렸느냐, 얼마나 공부를 많이 시켰느냐, 얼마나 일을 고르게 잘 시켰느냐, 소송을 얼마나 최소화시켰느냐, 간사한 세력들을 없앴느냐 하는 7가지가 있었습니다.처음에 수령육기제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는데 그들의 반대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조종(祖宗)이 이루신 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령들이 가장(家長)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육기제가 근거 없는 제도일 뿐만 아니라, 외직만 계속 맡게 되는 관리에게 불공평한 제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반박하는 자들은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로 조종이 이룬 법제를 말하는데 육기제 역시 태종 때부터 의논되었던 선현의 법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수령이 가장 역할을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사로운 것이고 수령의 짦은 임기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영송(迎送)의 폐단은 공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을 보면 요순시대엔 9년 임기제를 했다고 반박하였 아름답게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효첨의 말을 들어보니 그 말이 타당하게 느껴졌지만 끝내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진행하였습니다. 이렇듯 청계천 명당수 준천 논쟁은 풍수지리와 유교정치의 하나의 대립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제3부. 세종의 비전 경영< 제12강. 창조와 문화 국가 비전 - 훈민정음 창제 >☞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가 가장 위대한 업적인가 하면 첫째, 영토를 넓히거나 제도를 정비한 군주는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도 있었지만 백성들을 위해 문자를 만든 임금은 세종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음이 창제됨으로써 다른 모든 업적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되고 더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정음 창제의 필요성이라는 차원에서 세종 이전의 글자생활에는 첫째, 향가(鄕歌)의 표기 글자입니다. 일찍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한자를 들여왔습니다. 둘째, 이두(吏讀)문자입니다. 이두는 신라의 설총이 만든 한문 차차표기법을 가리키는데, 말 그대로 관리들에 의해 법률 및 행정문장 기록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그조차도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세종의 초특급 비밀 프로젝트 - 훈민정음 창제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는 첫째,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옥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세종은 문자라는 권력을 백성에게 주어서 백성의 수준을 높이려 했습니다. 셋째, 용비어천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왕조 개창의 정당화도 중요한 창제 동기였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이 비밀리에 부쳐졌는 이유는 중국과의 외교적인 갈등 및 최만리 등 정음 반대 집단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종은 ‘국지어음(國之語音)이 이호중국(異乎中國)’ 하는 말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며, 중국문자로는 백성들의 마음이 서로 어울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세력의 반대상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훈민정음 ; 공동체, 문화적 상상력, 계층간 소통다.
    독후감/창작| 2010.12.06| 19페이지| 3,000원| 조회(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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