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루먼 쇼’ 감상문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면? 영화 ‘트루먼 쇼’는 자신의 일상 생활이 전 세계에 생방송되는 줄도 모른 채 30년을 살아온 주인공 트루먼의 얘기다. 그를 제외한 모든 주변사람은 이 쇼에 투입된 연기자일 뿐이다. 모든 것이 거짓되고 연출된 현실 속에서 진실한 자유를 찾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희극화한 휴먼 드라마이다. 물론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많은 인권 운동가들의 항의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한 번 쯤은 생각해봤을 만큼 현실은 대중화되고 상품화되기도 하였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트루먼 쇼에서는 트루먼의 24시간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24시간이 노출된다면 어떨까? 수많은 버라이어티쇼를 보며 가끔 해 봤던 생각이다. 트루먼 쇼처럼은 아니지만 내가 봤던 많은 프로그램도 이와 같은 성격들을 띤 것이 많이 있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주제를 담고 인기가 있는 연예인이 아이를 키운다거나, 영어를 배운다거나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그러낸 프로그램들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프로그램을 원하고 즐기고 있다. 나도 TV 속 그들의 인생을 몰래 들여다보고 즐거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프로그램과 트루먼의 쇼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이 방송된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게 행동했을 것이지만 트루먼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만의 공간조차 사람들은 알고 있다. 내 삶 전부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굴 만나도 당당하고 자신 있는 내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영화를 보다보면 심심치 않게 세계 각 국의 시청자들을 볼 수 있다. 이 쇼가 끝날 때의 그들의 반응은 다양한 인종만큼 다양했다. 트루먼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감동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쇼의 종영을 마냥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트루먼 쇼가 끝나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트루먼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섬, 시헤븐을 나서는 순간의 감동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 새로운 자극적인 소재의 쇼프로를 찾을 것이다. 트루먼의 일생에 그렇게 눈물 흘리고 웃음 지으며 시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점차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나 역시 많은 방송프로그램을 봐왔지만 그 때 뿐이었다. 그렇게 트루먼은 한때의 재미거리, 이슈로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 질 것이다. 트루먼의 진지하고 진실된 인생이 그들에게는 단순한 쇼에 불과한 것임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현대사회의 대중 인을 보여준다. 대중매체의 상품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삶까지도 말이다.언제나 밝고 유쾌한 트루먼으로 그려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트루먼의 삶은 훨씬 불행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삶이 실체를 알았을 때의 트루먼을 진지하고 어둡게 그려낼 수도 있었다. 적어도 나였으면 그랬을 것 같다. 내가 트루먼이었고 그 사실을 알았다면, 트루먼처럼 밝은 모습으로 시헤븐을 떠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주변 마을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 친구들조차 그를 배신했다. 자신의 소중한 30년이 허망한 것이었다. 트루먼이 그 섬을 떠날 수 없도록 폭풍 속에서 아버지도 잃게 했다. 사랑하는 첫사랑과도 이별해야 했다. 트루먼은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 쇼를 위해 자신의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고 잃어야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원망이나 복수, 좌절보다는 자신의 새 삶을 위한 도전에 나선다. 아버지를 삼켜버렸던 그 두려운 폭풍을 이겨내고야 마는 것이다. 트루먼은 시헤븐의 출구를 나서는 마지막 순간에도 예의 그 따뜻한 미소와 깍듯한 인사는 잊지 않는다. 트루먼의 마지막 인사는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배신당한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인생을 허락없이 엿봐온 사람들에게까지 안부를 전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그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긍정적인 인간상이 이 영화와 영화 속 주인공 트루먼이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즐겁다. 무겁고 진지한 소재가 될 수 있었던 영화를 진지하지 않지만 가볍지 않은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묵공’ 감상문피와 혼돈의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는 봉건제 국가였던 주나라 제후들이 독립을 하면서 제각기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시기로, 중국 대륙 전체는 전란에 휩싸이고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사상인 ‘묵가’이다.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조나라 대륙의 10만 대군은 마지막 길목에서 인구 4,000명밖에 되지 않는 소국인 양 나라의 양성 함락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양나라는 '묵가'에게 지원 부대를 요청하지만, '묵가'에서 온 지원군은 단 한 명 혁리뿐이었다. 홀로 양성을 찾아온 혁리는 전략적으로 조나라의 공격을 막아내어 양성의 사람들이 혁리를 따르게 되고 그러자 위협을 느낀 권력자들은 혁리를 내쫓으려고 모함을 한다.사실 묵가사상은 유가나 도가사상에 비해 낯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화 마지막에 혁리가 ‘겸애사상’을 널리 알렸다고 하는 부분에서 고등학교 때 ‘묵자는 겸애’라고 외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긴했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묵자의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또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묵가와 묵가의 사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묵가의 “어떠한 침략전쟁에도 반대한다”(非攻)는 사상을 이 영화에서는 잘 표현해주고 있다. 혁리는 양성을 구하기 위한 전쟁을 하러 온 인물이다. 하지만 전쟁영화에서 혁리는 전쟁을 막으려고, 피하려고만 한다. 심지어 자신의 승리에도 기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군의 승리 뒤에는 적군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군의 시신을 보며 슬퍼하는 혁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전쟁 영화들을 봤지만 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적군의 시체가 쌓여있는 그 전쟁터에서 자신은 승리했으나 적이 많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병사나 장군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영화 ‘300’에서는 적군의 시체로 성벽을 쌓고, 쓰러져 있는 병사를 확인사살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묵공’에서는 침략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방어전투에 나섰지만, 어떤 명분으로든 전쟁은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는다는 딜레마를 풀지 못하는 혁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참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권력자로서의 힘과 영웅으로서의 면모가 아닌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혁리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조군의 노예로 양성에 들어오게 되었던 한 남자를 몸 아껴 살려주고, 그의 충고 듣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귀족과 노예의 구분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자세에 감탄했다.그렇다면 일반 서민뿐만 아니라 공자(양왕의 태자)까지도 그를 따르게 만들었던 묵가의 사상은 왜 역사 속으로 소멸하고 말았을까. 영화 중후반쯤 되자, 그의 사상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권력자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해 모두 죽게 된다. 혁리는 묵가의 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하여 세상을 변화하려고 했지만, 세상의 이기심과 무지는 그 변화를 몰살시키고 만다. 어쩌면 영화에서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묵가사상이 현존하지 않게 된 아쉬움을 표현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묵가사상이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된 유가사상과 같이 널리 전파되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얼마나 달랐을까? 모든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수는 없어도 최대한 불필요한 전쟁까지는 존재하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개인의 이기심’이 경제를 조절한다구요?들어가기 전에박지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이용후생(정덕)학파로, 정덕을 위한 이용후생을 강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에서는 개인의 이기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경제가 발전하고 국익이 증진된다는 주장이지요. 이용후생의 목표로 ‘정덕’을 강조한 박지원의 입장에서 개인의 이기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연암이 아담스미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설정하여 국부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개인의 이기심이 박지원에게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연암 박지원이 아담스미스에게.안녕하세요. 아담 스미스씨. 당신이 저술한 잘 읽었습니다. 당신의 글은 많은 인용과 다양한 실제에의 적용이 있어 당신과 전혀 다른 문화에 살고 있는 저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더군요. 아, 저에 대한 소개가 빠졌군요. 저는 당신과 같은 18C에 살며 를 저술한 연암 박지원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선에 살고 있는데 유학자인데, 조선이라는 나라를 당신이 알지 모르겠네요. 나 또한 당신과 같이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 당신도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지 않을까 싶어 나의 저서 도 이 편지와 함께 보내니 한 번 읽어보길 바랍니다.물론 나는 당신이 비판한다는 중상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부분에서 중상주의를 비판하는지 자세히 읽어보았더니, 당신이 비판하는 중상주의는 내가 주장하는 중상주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내가 주장한 중상주의는 상공업의 발전을 통하여 사회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상업을 장려한 것 입니다. 상공업을 기술적인 발전으로 생산을 촉진시키고 수레나 배와 같은 교통수단을 발전시켜 국내외에 있어서의 상품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경제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중상주의는 한 나라의 부 중에서 화폐와 금, 은만을 중요한 재산으로 여기고 이것을 축적한다는 관점으로서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최대화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게 있지요. 당신이 비판한 중상주의와 내가 주장한 중상주의적 입장이 다르다는걸 아시겠나요?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가장 먼저 이 얘기를 꺼낸것이랍니다. 당신 책을 읽다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있더군요. 어떤 부분이냐구요? 당신이 국가의 개입을 줄여야한다는 부분에서요. 나는 “옛 사람이 시장의 흐름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상인은 싸게 물건을 취해 비싸게 팔게 마련이며,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는 상인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장사해 이익이 남지 않는다면 상인은 장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들이 어찌 물건 값을 내려서 팔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이 명령(곡물가격의 억제와 매점매석의 금지)을 시행하려고 한다면 서울의 상인들은 장차 곡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또한 매점매석을 막는다면 서울로 오는 전국 각지의 곡물 상인들이 그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반드시 다시는 경강(京江: 한강 일대)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한양의 식량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질 뿐입니다.”라는 글을 과정록에 적었답니다. 또 “상인은 관청에서 조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조정하면 물건 값이 묶이고, 물건 값이 묶이면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면 상업 거래가 마비되는 폐단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란을 겪고 궁색해지며, 백성들은 생계수단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상인들이 값이 싼 곳에서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다 파는 상업 활동은 진실로 풍족한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곳에다 더해주는 이치와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물밑의 가벼운 모래가 출렁거리는 물결에 따라 고르게 처져서, 솟아 나오지도 않고 움푹 패지도 않게 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라고도 주장하였구요. 그런데 을 읽다보니 당신이 정부정책에 대해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 이 ‘경제라는 기어’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부분이 있더군요. 당신이 말하는 자유방임이란 정부가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모두 개인에게 맡겨 두라는 것이지요? 물론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는 모든 부분에의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느 정도의 국가의 개입과 정책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도 넓이가 수천 리나 되는 나라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다.”라고 일신수필에 적어놓았듯이 국가가 수레의 장려와 같은 제도나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상업 활동을 통제하는 지나친 시장 개입은 유통경제를 심각하게 위축시켜 산업 전반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때요, 당신의 생각과 비슷한가요?이제 슬슬 내가 당신에게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얘기해볼까요? 나는 유학자로서 정덕을 이루기 위해 이용을 강조해왔습니다. 정덕이란 조선시대 부자·형제·부부간에 지켜야 할 유교적 윤리체계로, 우리나라의 정치 이념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정덕을 최우선이라고 삼고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다음에야 정덕(正德), 즉 올바른 다스림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용이 되지 않으면서 후생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겠는가.”라고 의 도강록에 저술해 놓았듯이, 먼저 국민이 백성들의 살림을 살피는 것이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이고 이용과 후생이 이루어진 뒤에 정덕도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경제활동의 진정한 목표는 정덕을 이루는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영화 ‘후 아 유’를 통해 본 사이버 문화 공간-제 남자친구를 소개할게요. 그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이름이 특이하죠? 이름만큼 감성적인 남자랍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그는 락커예요. 그가 기타를 들고 저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면 저의 마음이 얼마나 콩닥콩닥 거리는지 모르실거예요. 그의 감미로운 노래 소리 한소절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가 노래하는 내내 귀를 쫑긋하고 들었답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만났어요. 뭐, 따지고 보면 소개팅으로 만난거지만……. 원래 제 소개팅 상대는 그의 친구였거든요. 그런데 그의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가 대신 나온 거예요. 그가 나중에 얘기한 건데,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왔다가 저를 만나게 돼서 너무 기쁘다고 말하더라고요. 우리는 대학로에서 자주 만나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버거킹 앞에서 서로를 기다리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서로 맥주 한 잔씩 마시며 대화하는 게 우리의 주된 데이트 코스에요. 우리가 자주 가는 와바라는 호프집이 있는데, 너무너무 자주 가서 사장님이 우리 커플을 알아 볼 정도예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아늑하고 전망 좋은 그곳이 좋아요. 고단한 하루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란. 와~ 생각만 해도 시원하네요. 사장님 인심도 좋아서 서비스도 많이 주신답니다. 가끔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공원을 산책하기도 해요. 특히 여의도 공원을 자주 가요. 그는 나리라는 말티즈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서 가끔 공원에 나리를 데리고 나와요. 그와 같이 자전거도 타고, 오리보트도 타고. 그와 함께 있으면 정말 행복해요. 지난 주말엔 바다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바다는 세상에서 처음 봐요. 그 곳이 어딘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가 무작정 데리고 간 곳이거든요. 대신 그가 우리가 찾은 바다의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티티카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 이름이래요. 이름 참 예쁘죠? 저는 그의 센스에 감동받고 말았죠.난 그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하루 종일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그는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만날 수 있거든요. 보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전화도, 문자도 할 수 없어요. 약속된 시간이 아닐 때 그에게 얘기하고 싶다면 쪽지를 이용하면 되요. 그가 내 쪽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수신 확인도 가능하답니다. 거의 매일 저녁 함께 만나지만, 가끔 연락도 없이 그가 나를 바람맞힐 때면 초조하기도 해요. 그 사람이 지금 뭐하고 있을까 상상해보려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그래요, 제 남자친구는 사이버 속 남자친구랍니다. 그의 실제 이름도, 전화번호도 알 수 없죠.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나 전지현이 아닌 또 다른 나 ‘이브’의 남자니까요.사이버 속 가상의 남자친구.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사이버 속 가상(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상상하여 만들어진 상황이나 물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일 뿐 인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윗글의 전지현 그녀가 인터넷 속에 또 다른 인물을 만들어 냈듯이, 그녀의 남자친구 또한 김철수라든지 김민수 같은 현존하는 한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일 뿐이다. 그와 그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아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예컨대 그가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 낸 자신의 분신처럼 곱상한 외모나, 훤칠한 키를 가지도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영화 ‘후 아 유’에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간단하게 내용을 소개하자면 63빌딩, 30층에선 게임 개발 중인 지형태(ID멜로)는 게임 소감을 올린 네티즌을 인터뷰하기 위해 건물 아래에서 수족관 다이버 서인주(ID별이)를 만나게 된다. 처음엔 게임에 깊숙이 빠지게 할 목적으로 ‘멜로’라는 아이디로 그녀와 파트너가 되는데, 점점 갈수록 온/오프라인에서 상반된 그녀의 모습에 끌리게 되는 내용의 영화다. 서인주는 과거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청각장애를 앓게 되어 꿈을 포기하게 되면서 세상에 문을 닫고 살아가는데, 그런 그녀에게 형태, 아니 게임 속 멜로는 투명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옆에서 힘이 되어 주는 그런 친구 말이다.[ID/멜로]투명인간 친구란 말 알아?만나는 것도, 전화도 안 돼. 이 약속을 지켜야 돼.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어. 그래도 힘이 되는 친구…….누군가에게 투명하게 솔직해 지고 싶은 날,하고 싶은 말이 터져 나오는 날…….투명친구를 찾아.난 늘 니 곁에 있다.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형태가 인주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형태는 인주가 멜로와 실제의 자신을 같게 바라봐주길 원하지만 인주는 멜로만이 특별하게 자신을 알아주는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멜로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이다. 그런데 형태를 멜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형태는 게임제작자지만 멜로는 락커라고 했다. 형태는 말도 잘 못하고 표현도 잘 못하지만 멜로는 편안하고 따뜻한 말로 인주를 감동시키곤 한다. 형태는 회사에서 매일같이 밤을 새느라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어 꾀죄죄하지만, 형태의 아바타는 말끔한 얼굴에 깔끔한 옷을 입고 있다.이 곳, 사이버 공간은 그렇다. 실제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건 새로운 모습으로 창조될 수 있다. 학교생활이 어려운 왕따라도 사이버 공간에선 퀸카, 킹카로 거듭날 수도 있고, 반대로 유명 연예인이 사이버 공간 속에선 평범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건 원치 않던 모습이건. 물론 가상의 나를 현실의 나와 똑같이 설계할 수도 있다. 그건 개인에게 달려있다. 영화 속 인주도 세상에는 문을 닫고 사이버 공간에서만 자신을 보여주었다. 실제 그녀와 상반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결국 형태는 자신이 멜로라는 사실을 밝히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데, 이 결론에 대해 로맨스 영화로서는 괜찮지만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시각으로는 그리 좋은 결론이 아니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분명 현실에서 친구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친구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사이버 친구는 사이버 친구로서 남을 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만남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 현실에서의 만남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영화 속에서 지형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사이버 공간 속 멜로는 별이를, 그리고 서인주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점에서 지형태와 멜로는 서인주 그녀에게 다른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지막에 둘이 만나지 않게 되기를 은근히 바랬었다. 투명친구에게 가진 환상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멜로는 별이에게 투명친구로 영원히 남을 수 있고, 지형태와 서인주는 앞으로 좋은 만남을 갖는 것이다. 물론 인주가 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형태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인주에게는 좋은 남자 하나와 좋은 친구 하나 그렇게 둘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 친구라는 것은 인주의 또 다른 자아, 별이의 것이지만 말이다. 둘은 만나서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었지만) 서로의 또 다른 자아의 친구들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보기에 리프킨, 도킨스가 각기 어떤 방식으로 어떤 차원에서 아담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활용하였는가?1. 제레미 리프킨의 에서* 예문의 페이지는 제리미 리프킨(2001), 소유의 종말. 민음사를 참고.리프킨은 소유의 시대가 가고 접속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에서 스미스의 자본주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글의 서두인 제 1장에서부터 그런 예문이 나오는데 재산과 시장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팔아치우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담금질한다.(P.10)”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특별히 인용 구절이나 주석을 달지 않았지만 읽는 이 모두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리프킨은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받던, 스미스가 주장하던 자본주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시장이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잃어가고, 접속을 통한 소유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 이전인 자본주의 시대의 시장을 언급한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제 2장에도 수록되어 있다.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이런 상거래 기법은 산업혁명의 시대의 지배 이념으로 군림했던 애덤 스미스의 강령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중략) 스미스가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남을 배제하고 어떻게 해서든 재산을 끌어 모아 가진 사람이 시장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 (P.32-33)" 중략한 부분은 스미스의 이론이 직접적으로 인용된 부분인데, 리프킨은 스미스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끌어와 인용해놓고서는 시대에 동떨어졌으며, 전혀 다른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분명히 리프킨은 스미스를 비판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둘은 바라보는 시대가 다르다. 예문에도 보면 ‘산업혁명의 시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했던 애덤 스미스의 강령’이라는 구절이 있다. 리프킨이 말하는 지금은 산업혁명 시대가 아니다. 사이버시대가 오고, 네트워크 경제가 살아나는 새로운 시대이다. 따라서 리프킨은 스미스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스미스가 주장한 시대와는 달라지고 있음을 스미스의 이론을 통해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에 스미스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구절이 한 부분 더 있다. 제 5장에서가 바로 그것인데 제 5장에서는 근대적 소유관념을 소개하면서 로크의 자연권 이론과 스미스의 재산 교환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스미스는 소유물의 교환을 지배하는 경제적 원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살피면서 시장을 관장한다고 주장했다.(P.121)” 그러나 곧 그는 새로움 힘이 등장하여, 재산의 생산과 교환을 통한 자본주의 시장이 무너져 간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새로운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 힘을 결국 사유 재산 관계, 그리고 이 관계와 더불어 성장해 온 정교한 사회체제를 훼손하기에 이른다.(P.124)" 그가 앞서 설명했던 경제 체제, 즉 스미스가 말한 상품의 교환이 중심이 된 시장체제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리프킨이 스미스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주장하고 시대가 다른 것일 뿐이다. 오히려 리프킨은 근대시대에는 이러한 경제 원리로 시장이 유지되어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며 독자들에게 이전까지는 소유와 재산을 통해 경제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리프킨과 스미스의 이론은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리프킨과 스미스의 생각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리프킨이 스미스의 이론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대가 달라졌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주장을 이전의 자본주의 시대, 즉 재산과 소유가 중시되었던 시대와 지금의 소유와 접속을 통한 네트워크 시대를 비교하기 위해 스미스의 이론을 끌어와 활용한 것이다. 리프킨이 그의 이론을 인용한 것에는 암묵적으로 이전의 시대에는 스미스의 이론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 된다. 적어도 과거(리프킨이 말하는 자본주의 또는 소유의 시대)에는 말이다. 그 시대를 설명하는데 스미스의 이론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프킨은 아주 직접적인 방법으로 스미스의 이론을 끌어왔으며, 스미스의 도움을 받아 자본주의 시대를 설명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으며 자신이 주장하는 접속의 시대와 이전의 소유의 시대를 비교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2) 리처드 도킨스의 에서* 예문의 페이지는 리처드 도킨스(2006),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를 참고도킨스와 스미스의 공통 코드는 ‘이기적’이다. 스미스의 ‘이기적’ 코드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이익 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 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 시킨다”에서 알 수 있다.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의 조절작용을 통해 공급과 수요가 적절하게 만들어짐으로써 국익이 증진되고 사회가 번영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킨스도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기적’이라는 코드로 유전자를 설명하고 있다.유전자는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자연선택 속에서 진화해나간다는 것이 도킨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자면 먼저, 유전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순은 없다. DNA의 진정한 ‘목적’은 생존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P107)" 그리고 생존이라는 ‘목적’은 가진 유전자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유전자는 생존 중에 그 대립 유전자와 직접 경쟁하고 있다. 유전자 풀 내의 대립 유전자는 다음 세대의 염색체상의 한 자리를 놓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대립 유전자를 희생하여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 기회를 증가하도록 행동하는 유전자는 어느 것이든, 동의 반복적인 의미에서 오래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P.95)” 마지막으로 자연선택과 진화의 문젠데, 이는 먼저 스미스가 다윈의 진화론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