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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나라 마지막 황제 - 의종 숭정제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 生沒 1611~1644, 在位 1628~1644)■ 숭정제의 생애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으로 1610년(萬曆 38) 12월 24일 광종(光宗) 태창제(泰昌帝)의 다섯째 아들로, 현비(賢妃) 유씨(劉氏)의 몸에서 태어났다.) 의종은 묘호(廟號)이고, 숭정제란 그 치세가 숭정이라는 연호를 가졌던 데 근거한 호칭이다.)숭정제는 후사(後嗣)가 없던 이복형 희종(熙宗) 천계제(天啓帝)의 뒤를 이어 1627년(天啓 7) 8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숭정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아까운 군주라는 긍정론 이면에는 망국(亡國)을 자초했다는 혹평이 존재하는데, 물론 둘 다 근거가 있다.숭정제의 치적숭정제는 능력도 있고 중흥의 영주가 되려고 나름 노력을 하였다. 숭정제가 즉위할 당시 명나라는 연일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는 상태였다. 그는 먼저 황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천계제의 총애를 받아 국정의 전횡했던 환관 위충현(魏忠賢) 세력을 제거하였다.또한 국정의 침체와 기존의 낡은 방법으로는 후금(後金)의 침략조차 막아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숭정제는 서양 과학기술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 천주교인이면서 수리(水利), 목화, 농업 등의 농정(農政)에 능통한 서광계(徐光啓, 1562~1633)로부터 수업을 받으며 과학지식을 배웠다.1629년(崇禎 2) 5월 일식(日蝕)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예측이 당시의 대통력(大統曆)과 회회력(回回曆)으로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였으나 서양 역법이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역법을 바로 잡기 위해 역국(曆局)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서광계의 감독아래 독일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hall, 湯若望, 1591~1666) 등 각국 선교사들을 대거 초빙하여 역법을 수정하였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숭정역서(崇禎曆書, 1635)』이다. 특히『숭정역서』를 편찬하는데 큰 공로가 있던 아담 샬은 역국에서 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조부 신종 만력제를 빼다박았다.조정에서는 돈이 없어서 전비 마련에 진땀을 흘렸지만, 숭정제의 개인재산인 내탕금(內帑金)은 어마어마했다. 숭정제는 이자성이 자금성에 돌입할 때 궁내에 백은 3700만냥,황금 150만냥이 있었지만 은자 100만냥을 아껴 북경에 근왕병(勤王兵)을 불러오지 못한 기막힌 수전노(守錢奴)였다.또한 숭정제는 의심이 많았다(疑心暗鬼)).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기인하는 신료(臣僚)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불신이 국정 운영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숭정제는 자질구레한 일로 대신을 자주 갈아치웠는데, 재위 17년 동안에 내각학사를 50명이나 교체하였다. 각 성(省)의 장관에 해당하는 상서(尙書) 역시 마찬가지로, 형부상서 17명, 병부상서 14명, 총독 7명, 순무(巡撫)) 11명이 파직되거나 예의를 잃고 추태를 보였다는 이유로 책망을 받아 처형되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음을 당한 장군은 부지기수였다. 이처럼 가혹한 처우를 받게 되면 신료 측에서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군주에 대해 냉담해지지 않을 수 없고, 민심은 떠나고, 국가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자 하는 자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또한 숭정제는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고, 체면을 목숨이나 나라보다 더 중시했다. 이러한 숭정제의 성격으로 인해 야기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원숭환 처형, 후금과의 의화, 남천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숭정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명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원숭환 처형 사건(袁崇煥寃案)원숭환(1584~1630)은 원래 문관이었으나 관직에 오르기 전부터 군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후금과의 국경 지대인 요동(遼東) 방위에 자원했는데, 산해관(山海關) 외곽에 성벽의 높이와 두께가 약 10m에 이르고 4개의 문을 갖고 있는 영원성(寧遠城)을 축성했다. 또한 네덜란드로부터 홍이포(紅夷砲, 컬버린포))를 들여와 이를 영원성에 설치하고 조대수(祖大壽) 등 투항하였고 이로 인해 영원성을 잃어버린 명나라는 점점 후금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처럼 홍타이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청(淸))과의 의화(議和))남송(南宋)의 악비(岳飛)와 진회(秦檜) 사건으로 인하여 이후의 왕조에서는 북방오랑캐와의 의화는 매국(賣國)으로 간주되었다. 1641년(崇禎 14) 홍승주(洪承疇, 1593~1665))가 송산(松山)을 지키고 있었지만 송산과 금주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다. 이에 숭정제는 병부상서 진신갑(陳新甲, ? ~ 1642)의 건의를 받아 청나라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몰래 화의를 논의한다.그러나, 이 일이 어떻게 바깥으로 새어버렸고, 신하들의 여론이 분분했다.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숭정제는 자기의 결백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모든 책임을 진신갑에게 미루었고, 비밀리에 화의를 주도했다는 죄명을 씌워 진신갑을 죽여버린다.이로써, 명나라는 양쪽의 전선에서 모두 적을 대응해야 하는 국면을 종식시킬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후 계속하여 명나라는 양외(壤外, 청나라와의 싸움)와 안내(安內, 이자성 등 농민군과의 싸움)의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하다가 결국 피로가 누적되어 멸망하고 만다.* 남천(南遷)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이래로 명나라의 재정은 적자에 허덕였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하여 재정 지출이 커졌으며, 동북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요향(遼餉), 각지의 민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초향(剿餉),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연향(練餉), 이른바 삼향(三餉)을 징수하였다. 이러한 각종 전비(戰費)의 지출로 인해 농민들의 부담은 갈수록 늘어나 오히려 민란이 확산될 뿐이었다. 민란을 일으킨 이들은 군대의 도망병, 반란을 일으킨 변병(變兵), 파직된 역졸(驛卒), 기민(飢民) 등의 유민으로 ‘유구(流寇)’ 또는 ‘유적(流賊)’이라고 불렀다. 설상가상으로 가뭄, 수해, 심각한 기근까지 겹쳐 도시에서는 폭동, 농촌에서는 반란이 빈발하였다.)이러한 반란군 중, 북경은 이미 이자성의 맹공에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숭정제는 문무백관회의를 소집했는데, 신하들은 서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 속수무책이었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신하들을 보면서 탁자위에 "문신들은 하나하나 다 죽일 놈들이다"라고 쓴 후, 뒤에 있는 사례감(司禮監) 태감에게 보여준후 지워버렸다. 이것은 문신들이 그의 남천에 반대했던 것에 대한 항의였을 것이다.숭정제는 체면을 따져 남천하지 않았고, 이로써 숭정제의 명나라, 이자성의 농민군, 후금세력의 삼각구도가 조기에 붕괴되어 버린다. 명나라가 강남으로 천도했다면 적어도 삼분구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나, 숭정제가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다.숭정제의 최후명나라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 비극에 견줄 만하다. 숭정제는 3월 18일 밤 세 명의 황자들을 변장시켜 피신하게 하였다. 자신의 죽음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황통(皇統)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적군의 손에 욕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빈과 공주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3월 19일 새벽, 북경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환관을 시켜 대신들을 소집하는 종을 울렸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미 흩어지고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환관 왕승은(王承恩)만이 그의 옆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황제 스스로가 자신을 부를 때, ‘고(孤)’, 또는 ‘과인(寡人)’이라 하는데 이당시 궁정에 아무도 없었으니 숭정제는 진정한 ‘고’, ‘과인’이 된 셈이었다.숭정제는 자금성(紫禁城) 뒤의 경산(景山))으로 올라가 수황정(壽皇亭) 누각 앞의 괴목(槐木, 홰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때 황제를 따라 죽은 이는 충직한 환관 왕승은(王承恩)뿐이었고, 나중에 그는 명13릉의 숭정제 능 옆에 묻혔다. 한편 숭정제의 옷깃에는 다음과 같은 유조(遺詔)가 있었다고 한다.“짐이 17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동인(東人, 여진족)이 세 번 내지를 침략하고, 역적이 곧바로 경사(京師, 북경)에 육박하였다. 짐은 덕이 박하고 신체가 허약하여 위로 하늘의 꾸짖음을 구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이자성이 아니라도 그때 이미 그의 뒤에는 이자성보다 더 강력한 청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은 태종 홍타이지 사후 순치제를 섭정하던 숙부 도르곤(多爾袞, 睿親王)이 중국 통일의 야망에 불타 하루하루 산해관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그런데 이러한 오삼계가 민족을 버리고 청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자성의 부장인 유종민(劉宗敏)이 북경에 있는 자신의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그러자 오삼계는 마음을 바꿔 즉시 청나라의 섭정 도르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고, 마침내 청 태종 홍타이지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산해관 성문은 청나라를 위해 비로소 열리고 말았던 것이다.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청나라와 산해관의 반역군 오삼계의 공격을 동시에 받게 된 이자성 군은 허겁지겁 다시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황제에 오른지 불과 이틀 만에 다시 북경을 버리고 서안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 후 이자성 군은 남쪽으로 철수해 있던 ‘남명 정권’과 연합해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이자성의 죽음과 남명 정권의 멸망으로 끝내 소멸하고 말았다.반면에 도르곤이 이끄는 청나라 군은 이자성이 북경을 떠난 다음날인 1644년(順治 元年) 5월 1일 북경에 입성했고, 명나라 문무백관들은 새로운 이방의 권력자가 북경에 입성하는 것을 맞아들여야만 했다. 도르곤은 명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의병’이라고 칭하면서 북경으로 들어갔다. 이에 명나라의 신하들은 성 밖 5리까지 나와 청나라 군대를 환영하였다. 도르곤은 조양문으로 들어가 무영전에서 축하를 받고, 병사들에게 민가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시하였다.그리고 숭정제를 황제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자신들의 입관(入關)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이자성을 역적으로 몰아 토벌(討伐)하려는 명분을 얻으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청나라 군대는 이자성을 비롯하여 사천(四川)의 장헌충(張獻忠, 1606~1646) 등을 토벌하는 한편 북경으로 천도할 준비를 하였다.도르곤이.
    인문/어학| 2011.05.24| 9페이지| 2,000원| 조회(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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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조사 봉투 문구 양식
    경조사 문구와 봉투 양식입니다.
    생활서식| 2011.05.18| 1페이지| 500원| 조회(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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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 - 명나라 효종 홍치제
    홍치중흥(弘治中興) : 효종 홍치제(孝宗 弘治帝)■ 생애(생몰 1470~1505, 재위 1487~1505)효종 홍치제는 명나라 제9대 황제이며, 성은 주(朱), 휘(諱)는 우탱(祐?)이다. 헌종 성화제의 셋째 아들로 1470년(성화 6) 7월 30일 태어났다. 홍치제의 생모 기씨(紀氏)는 요족(瑤族)) 출신으로 성화제가 요족의 반란을 토벌했을 때 포로로 잡혀 후궁(後宮)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성화제의 승은을 입어 홍치제를 출산했지만, 성화제의 총애를 받던 만귀비의 질투로 독살되었다. 만귀비는 질투심이 강하여 그녀 이외에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갖은 수를 동원하여 죽였기 때문에 홍치제는 환관이 몰래 양육을 하였다.)그래서 6세 때야 비로소 부친을 대면할 수 있었으며, 이복형이 요절(夭折)한 관계로 황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 되어서도 늘 만귀비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흉악한 만귀비의 위협으로 인해 극적인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홍치제는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은 홍치제의 영민한 성품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힘이기도 했다.명나라의 황제 수업은 강학(講學)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홍치제는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착실하게 황제 수업을 받았는데, 이러한 장기간의 황제 수업은 그가 명나라 후반의 준비되지 않은 황제들과는 다르게 관용과 인내심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1487년(성화 23) 만귀비를 잃은 슬픔에 비통해하던 성화제가 죽자 홍치제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대신들이 만귀비의 만행을 징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홍치제는 그냥 없던 일로 넘겼다. 대신 생모를 태후로 추존하고 모친의 고향인 광서에 모친을 기리는 사원을 세웠다.홍치제가 황제로 등극했을 때 온 나라에 위기가 감돌고 있었고, 국력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했고, 홍치제 자신도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성화제가 중용했던 도사(道士)와 승려(僧侶)를 추방하였다. 이들은 조정에 어떤 공헌하는 일도 없이 녹(高祿)을 받았던 사람들로, 나라의 큰 골칫거리였다. 특히 수괴인 방사(方士) 이자성(李孜省), 승려 계효(??) 등에 대해서는 사형을 내려 도사, 승려, 환관의 부정을 엄격히 단속하여 바로잡았고, 전봉관(傳奉官) 2천 여 명을 해산시켰다.또한 실력없고 권세만을 탐하는 대학사 만안(萬安)과 윤직(尹直) 등을 파면하였다. 이외에도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해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지른 환관과 외척 등 많은 무리들을 치죄(治罪)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였다. 황실의 친척들과 권문세가가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조세를 탕감 또는 면제했으며, 이재민들을 구휼하고 생산을 발전시킴으로써 정국을 비교적 안정시켰다.홍치제는 사치와 호화를 반대하고 근검절약을 제창해 몸소 이를 실천한 황제였다. 그는 성화제 때의 폐정(弊政)을 바로잡고,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였다. 적시에 정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조조(早朝)와 만조(滿朝) 외에 평대소대(平臺召對)를 늘렸는데 이것은 대신과 만나 문제를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형 집행에 있어서도 신중했고, 세금을 줄여 민생 안정에 힘썼다.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를 반포하였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개편하는 등 법규를 정비하여 내정에 치적을 쌓았다.북쪽의 다얀 칸(達延汗, Dayan Khan, 1464~1524))에 대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으며, 동북의 건주여진(建州女眞), 서북의 하미(哈密)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홍치제 통치 하의 명나라는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홍치제가 명나라의 중흥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에는 이 시기 상당히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말한다. 유건(劉建), 사천(謝遷), 구준(邱濬), 이동양(李東陽) 등의 대학사와 왕서(王恕)를 비롯해 6부의 수장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재들이 차지하였다. 이런 점은 성화제의 만귀비가 뽑아 놓은 무능한 인물들과는 비교되는 점이기도 하다.홍치제는 각신(閣臣, 내각대학사))의 자문에 귀를 기울였고, 정사를 꼼꼼하게 처리했으며, 좀처럼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았다.또한 신하들에게 넓은 마음으로 온화하게 대했는데, 어떤 관원들은 황제를 보면 긴장하여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혹은 땀을 많이 흘려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어느 겨울밤 효종은 궁 안에 앉아 어둡고 추운 곳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관원들을 보고 그들이 집에 갈 때 넘어질까봐 걱정하여 호위병들로 하여금 집에까지 데려다 주도록 하였다. 궁중에서 관료에서 정장(廷杖)의 벌을 내려 굴욕감을 주는 일도 없었고, 무술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홍치제는 유학에 능통했고, 시화와 각종 문예에도 높은 소양을 지녔다(아쉽게도 홍치제의 서화나 시는 현재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소실되었다).이처럼 그의 치세는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평온했다. 영민한 황제와 재능있는 신하들, 잠잠한 외적의 침입, 그리고 경제적 호황 등이 홍치제의 치세 기간 동안 계속 되었다. 만약 그가 10년 정도만 더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면 명나라는 더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철없는 황태자의 방탕은 그가 마지막으로 걱정했던 기우(杞憂)였는데, 이것은 진짜 나중에 현실이 되었다.■ 원만했던 홍치제의 가정사(家庭事), 하지만 파멸을 낳다.황궁 안에는 한 명의 황제를 두고 정실 황후 외에 수십명의 후궁들이 함께 했다. 이들은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썼고 그들간에는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가 벌어지곤 했다. 이런 현상은 단 한 명의 황제를 제외하고 언제나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 한 명의 황제가 바로 홍치제였다. 홍치제는 명나라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후궁을 들이지 않았으며, 역대 중국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일부일처제를 지킨 황제였다.1487년(성화 23) 홍치제는 장씨(貞仁敬皇后張氏, 1470~1532)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고, 홍치제가 황제에 즉위한 후 황후로 책봉되었다. 이들 부부는 매우 금슬이 좋았는데, 꼭 민간의 평범한 부부처럼 매일 함께 생활하였다. 이런 모습은 중국 황실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이러한 원인은 홍치제가 어린 시절 받았던 황궁 안에서의 여인들의 암투 속에 자신이 겪었던 심리적 갈등, 오랜 시간 유학을 기본으로 한 인간 본성에 대한 훈도, 장황후의 남편에 대한 구속), 그리고 후궁을 뽑을 시기를 놓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1488년(홍치 원년) 당시 황궁에는 성화제의 장례와 관련되어 무거운 분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유명한 홍치제는 후궁감으로 몇몇을 뽑아놓았다는 말을 듣자 삼년상도 끝나지 않았는데 후궁 선발은 때가 아니다라고 하며 이를 물렸다. 하지만 이것은 홍치제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명나라 황실에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홍치제는 장황후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하지만 두 아들 가운데 한 명은 요절하고 장남 주후조(朱厚照, 뒷날의 武宗 正德帝)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주후조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번왕의 아들인 주후총(朱厚?)에게 황제의 자리가 넘어갔다. 이 때문에 주후총이 홍치제를 정치적 아버지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고 이 때 발생한 정파간의 알력은 두고두고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大禮議)).■ 홍치제 아들을 걱정하며 죽다.1505년(홍치 18년) 5월 홍치제는 감기 몸살에 시달렸다. 어의가 가져온 약을 먹고 코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당시 황태자 주후조의 나이는 15살이었는데 워낙 여자와 노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성격이 황당하고 제멋대로여서 홍치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려서부터 주후조는 환관 유근(劉瑾)과 함께 지냈는데, 이는 마치 할아버지 영종(英宗)이 왕진(王振)과 늘상 붙어다닌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인문/어학| 2011.04.26| 3페이지| 2,000원| 조회(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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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 - 명나라 헌종 성화제
    內治의 時代 : 헌종 성화제(憲宗 成化帝, 생몰 1447~1487, 재위 1464~1487)■ 성화제 영정(影幀)과 연표성화제 시기 연표1464년 하남·호북·섬서의 三省交界 지역에서 유민에 의한 대규모 반란 일어남(형양의 난)1466년 형양의 난 주모자 劉通 처형, 반란 진압됨1470년 다시 형양의 난 발생. 유민들을 현지에 附籍시키는 정책을 취함1474년 萬里長城을 수축 보수1476년 철기를 女眞으로 반출하는 것을 금함1477년 西廠을 설치(태감 汪直이 통솔)1478년 요동에 馬市를 엶. 十段法 시행1481년 타타르 침공1483년 勢戶로서 鹽의 판매에 종사하여 鹽商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들의 활동을 금지시킴.■ 황제 즉위 前헌종 성화제는 명나라의 제8대 황제이다. 헌종이라는 것은 묘호(廟號)이고, 성화제란 그 치세가 성화라는 연호를 가졌던 데 근거한 호칭이다. 성은 주(朱), 휘(諱)는 견심(見深)이며, 초명은 견준(見濬)이다. 영종 정통제의 맏아들로 1447년(정통 12) 12월 9일에 태어났다.1449년(정통 14) 오이라트의 수장 에센(也先)이 침입하자 영종은 병부시랑 우겸(于謙) 등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환관 왕진(王振)의 말만을 귀담아듣고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다. 토목보에서의 패전과 함께 북경(北京)마저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자 손태후(孫太后))는 재빨리 영종의 이복 동생 성왕(?王) 주기옥(朱祁鈺)을 제위에 앉혔는데 이 사람이 바로 경태제(景泰帝)이다.경태제는 영종의 맏아들인 주견심을 황태자로 삼고, 포로가 된 영종을 태상황(太上皇)으로 높이고 다음 해 연호를 경태로 고쳤다. 경태제는 우겸과 함께 에센의 침입을 훌룡하게 막아냈는데, 이를 북경보위전(北京保衛戰)이라고 한다. 에센은 한나절이면 북경을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명나라 군사들의 철통 수비와 일반 백성들의 가세로 인해 오히려 퇴로마저 막힐 지경에 이르자 결국 철수하였다.원래 에센은 경태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 자신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 또한 황태자에게 폐위되자 이러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복벽을 추진했고 일부 야심가들이 그에게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이런 관점에서 12세기 송 왕조가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뒤의 형세를 연구해보면 당시 조구(趙構, 高宗)가 그의 형 조환(趙桓, 欽宗)의 귀국을 거부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조환이 귀국한 다음 영종처럼 정변을 일으키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제주의 정치체제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매듭이었다.1457년(景泰 8년) 역사적인 ‘탈문의 변(奪門之變)’이 일어났다. 경태제가 병으로 쓰러진 틈을 타서 새벽에 태감 조길상(曺吉祥), 석형(石亨), 서유정(徐有貞), 양선(楊善) 등이 개인 군대와 집안의 일꾼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영종을 옹립하고 나섰다. 남궁의 벽을 부수고는 영종을 어련(御輦)에 태워 봉천전(奉天殿)으로 이동해 복위식을 거행했다. 아침이 되어 문무백관들이 입궐했는데 옥좌(玉座)에 앉아 있는 사람이 옛날 군주 영종임을 발견하고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영종은 복위한 후 연호를 천순(天順) 원년으로 고치고, 맏아들인 주견심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한다. 한편 경태제는 성왕으로 강등시키고 유폐시켰는데, 울화가 터져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얼마 못 가 죽었다(일설에는 영종에게 독살당했다고 함). 그런데 경태제는 ‘불효(不孝), 부제(不悌), 불인(不仁), 불의(不義)한 놈’이라며 폐위당한 것도 모자라 생전에 만들어 놓은 능(陵)까지 영종이 철거해버리는 바람에 명13릉에도 묻히지 못하였다.한편 일단 복벽(復?)을 하긴 했지만 영종의 꼴은 매우 우스웠다. 어차피 따로 황태자도 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서 경태제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다시 황제가 되는데 굳이 이런 탈문의 변까지 일으킬 필요가 있었을까? 영종은 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모면하기 위해 모든걸 우겸에게 덮어씌웠다. 우겸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있던 서유정은 영종에게 “우겸을 죽이지 않시절의 부정을 바로잡았다.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부당하게 처벌당한 우겸 등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경태제의 제호(帝號)도 부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재해민(災害民)들을 구휼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등 사회 모순을 제거하고 정무에 힘을 쏟았다.이 시기에 군제를 개편하여 12만 명의 정예군으로 이루어진 12개 단영(團營)을 편성하고 수도를 호위하게 했는데, 여기서 환관이 각 단영을 통솔하고 무기를 감독했다. 이 새로운 군대는 1471년과 1479년 사이에 몽골족(蒙古族) 및 여진족(女眞族)과 벌인 전투에서 힘을 발휘하고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 군사적 지위를 개선했다. 북부에서는 만리장성이 복구되었다. 또한 류큐(琉球), 하미(哈密), 타이(暹羅), 투르판(土魯番), 사마르칸트(撒馬?罕) 등지에서 조공(朝貢)을 받쳤다.그러나 성화제가 가무(歌舞)와 여색(女色), 개사육(犬飼育), 승마(乘馬), 신선불도(神仙佛道)에 빠져버리자 조정은 그의 아버지 영종 때보다 더욱 부패하게 되었다. 성화제는 음악과 연극을 애호하고 서화에도 능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자기 감정가로, 명(銘))의 사용을 부활시켰다. 성화요는 오채(五彩) 자기로 유명했는데, 취상품은 비취와 같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성화제는 이부(吏部)의 심사와 추천도 거치지 않고서 직접 많은 관리를 임명하였다.) 심지어 사례감(司禮監)의 일개 장인(匠人)을 문사원 부사(文思院副使)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명예와 이득을 위해 파리처럼 돌아다니는 자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황제 주위의 측근들에게 많은 돈으로 접근하였다. 실제로 이런 자들이 관리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환관들의 기세도 덩달아 높아졌다.또한 성화제는 부처의 말을 지극히 숭배하여 승려(僧侶)와 도사(道士)들을 좋아하고 가까이 두었기 때문에 많은 승려와 도사들이 출세를 꾀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법왕(法王), 불자(佛子), 국사(國師), 선사(禪師) 등으로 봉한 승려들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1476년(성화 13) 성화제는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 외에오씨가 그녀를 숨겨 주고 아기의 출생도 비밀로 했다.1475년(성화 12) 어느 날 성화제는 자신의 후계자가 없음을 한탄했을 때 측근 환관이 만귀비 몰래 키어온 아들이 있음을 알리자, 성화제는 기뻐하여 아이를 궁궐로 불러 들였고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 아이가 바로 주우탱(朱祐?)으로 훗날의 효종 홍치제(孝宗 弘治帝)였다. 홍치제는 부친에게 기쁨을 안겨 주지만 만귀비는 곧바로 홍치제의 모친을 살해한다. 이와 같이 잔인한 행위를 일삼던 만귀비는 1487년 60세의 나이로 분사(憤死)했는데, 성화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성화제 자신도 얼마지나지 않아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성화제는 홍희제(洪熙帝)와 선덕제(宣德帝) 이래의 조종법도를 어기고 천수산(天壽山) 능역 서남쪽 소산(蘇山) 아래에다 만귀비의 원침(園寢)을 건설하였다. 이는 영락제 이후 천수산 능역에서 후궁의 원침을 건설한 첫 선례(先例)가 되었다.이러한 황실의 탐욕과 통제력의 결여는 곧 공공 도덕의 붕괴로 이어졌다. 음화(淫畵)와 최음제(催淫劑)를 취급하는 불교, 도교,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작위를 받았고, 환관과 관료들이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았으며, 홍무제 시대에는 소규모였던 황실의 경작지(皇莊)도 16세기 초에는 8만 헥타르에서 300만 헥타르로 증가했다. 또한 권호(權豪)들이 한전(閑田)을 요구하자 전지(田地)를 빼앗아 장전(莊田)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했다.)민간의 불만은 극에 달하여 형양(荊襄)의 유민들과 광서(廣西)의 요족(瑤族)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하투(河套)에 들어와 살던 달단(??) 부락들이 더욱 거세게 공격해 들어오기도 하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유민의 난 : 형양(荊襄)의 난제1차 형양의 난형주와 양양 지방은 삼림이 울창해 예로부터 도적이 많은 지역이라 하여 주원장(朱元璋)은 이 지역에 백성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하였다(禁山區). 그러나 백성들의 살림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유민들은 이 곳으로 도망가 황무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는데 1460년여 봉기군에 맞섰는데, 총독 항충은 이호자를 산으로 몰아내고 포위하여 봉기군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호자가 사로잡힌 후에는 유민들이 개간한 땅을 모조리 황무지로 만들고 이 지역 150만명의 농민을 추방하는 등 강경책으로 악명을 떨쳤다. 항충은 난을 진압한 후 평형양비(平荊襄碑)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과시 하였으나 백성들은 이 비석을 타루비(唾淚碑, 눈물을 흘리게 하는 비석)라 불렀다. 항충이 2차 형양의 난 진압 과정에 벌인 이러한 강경책은 유민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하였고 정덕(正德) 연간에도 유민들은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끝까지 명 정부를 괴롭혔다.■ 황제의 여난(女難) - 어머니성화제는 전황후는 황태후로, 어머니인 주씨를 태후로 높였다. 1468년(성화 4) 전황후가 죽자 영종의 무덤인 유릉(裕陵)에 합장하려고 했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지금까지 황릉에는 모두 한 명의 황제와 한 명의 황후가 안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태후에게 아주 큰 압력이었다. 이런 식으로 전황후와 영종을 합장하면 자기가 죽으면 안장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은 황제인데 자신을 유릉에 합장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속이 상하여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그래서 전황후를 다른 길지(吉地)에 안장하고 자기를 영종과 합장하고자 하였다. 성화제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전황후와 영종을 합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종의 유언도 위반하고, 또 예법에도 맞지 않아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대신들은 뜨거운 햇볕과 무더위 속에서도 동화문(東華門) 밖에 엎드려 주청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압력에 성화제와 주태후는 할 수 없이 대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여전히 전황후의 관곽을 지하궁전의 동쪽 전안에 놓고는 주전(主殿)과의 통로를 막아 버린 것이다.1504년(홍치 17) 주태후가 죽고 그의 손자 홍치제가 장내(葬內)를 참배할 때 이 일은 상례(常禮)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되고, 원칙적인 예법에 따라 관곽의 위치를 바꾸어 안장하였다. 또한 능은전(稜였다.
    인문/어학| 2011.04.26| 7페이지| 2,000원| 조회(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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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연구 수업 지도안 및 자료 - 선사 시대의 생활(구석기)
    Ⅱ. 국사 교육의 목적 및 목표1. 국사 교육의 목적 국사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의 실체를 밝혀 주는 과목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함양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국사 교육은 우리 민족 문화의 전통을 확인시켜 민족사 전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정신을 길러 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활동상을 민족사적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 상호 관련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10학년의 국사 교육은 역사 의식이 상당히 심화된 학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저학년에서 학습한 인물사, 생활사, 사건사를 토대로 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류사 중심의 역사를 학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 수준별 교육 과정을 도입하여 우리 민족의 활동상을 분류사 체계로 구성하여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역사상의 중요한 문제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있게 탐구하고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각 시대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종교, 교육, 예술, 과학 등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왔다. 국사 교육은 이와 같은 민족사의 다양한 역사 전개 과정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학습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능력을 기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2. 국사 교육의 목표 ․ 우리 역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민족 정체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를 주체적으로 이해한다. ․ 우리 역사는 현재의 뿌리이며 미래를 전망하는 단서이기 때문에 이를 발전적으로 파악한다. ․ 우리 역사는 우리 민족의 삶의 총체이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파악한다. ․ 역사 자료를 분석, 비판, 종합하는 능력을 길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운다. ․ 우리 역사를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여 새 문화 창조와 사회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가진다.
    교육학| 2009.12.03| 21페이지| 5,000원| 조회(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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