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기독교에서 안수가 주는 의미 연구(디모데 서신에서 나타난 안수를 중심으로)목 차Ⅰ. 서 론Ⅱ. 성서에 나타난 안수1) 안수의 어원적 의미2) 구약에 나타난 안수3) 신약에 나타난 안수Ⅲ. 디모데 서신에 나타난 안수의 의미1) 디모데의 목회적 상황2) 디모데에게 베푼 안수의 의미Ⅴ. 결 론Ⅰ. 서 론안수의식은 성경에 근거해 내려오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권위가 부여되는 전통이다. 초대교회의 일반적으로 목사나 장로의 직책에 어떤 사람을 임명할 때 손을 얹음으로 행해지는 안수의식은 뚜렷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온 하나의 의식이다. 동시에 안수를 행하는 구체적인 의식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사역으로 시작해서 안수는 중요한 영적인 권위가 부여되는 중요한 영적인 의식이 되었다. 사도시대 이후에 계속하여 교회가 구체적인 직책수행을 위하여 안수를 행해왔다.현대 교회에서도 안수의식은 중요한 역할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원시 기독교에서 안수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특별히 디모데서신을 통해서 저자는 디모데에게 안수에 대한 언급이 왜 필요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성서에 나타난 안수1) 안수의 어원적 의미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안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dy: &m's(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용법은 손을 얹는 것, 즉 안수를 뜻하는데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축복의 맥락 안에서는 "손을 얹다"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신약성경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안수하다 (ceivr ejpitivqhmi)라는 동사로 사용된다. 그리고 명사형인 ejpivqesi" tw'n ceivr는 명사형으로 ‘손을 올려놓는 것’ 즉, 안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 단어들은 모두가 손을 머리에 얹는 안수를 표현하는 용어들이다.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서 안수를 하는 예들이 여러 번 발견되는데 그 내용이나 대상 그리고 시기 등이 다르지만 안수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근본 의미는 내용상의 의미로 하나를 이룬다. 즉 안수는 안수를 하는 자가 안수를 받는 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는 의미로 시행된다는 말이다.일반적으로 안수는 능력의 위임으로서 행하진 의식이었다. 희생제사의 절차로서의 관계, 형벌과의 관계, 축복의 관계, 치유로서의 안수, 성령의 은사로서, 성직 수임식(授任式)을 행할 때 안수하였다.2) 구약에 나타난 안수안수는 구약의 전통에서 부터 시작된다. 먼저 안수는 축복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야곱은 요셉의 자녀들에게 안수하여 축복하였다(창48:14).그리고 구약성서의 제사 의식 중 번제와 속죄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희생제물을 죽이기 전에 그 제물들의 머리에 손을 얹도록 되어 있었다(출29:10,15, 19, 레1:4, 3:2, 8, 13, 4:4, 15, 24, 29, 33, 8:14, 18, 22, 16:21, 민8:10, 12, 27:18, 23, 신34:9, 대하29:23). 이러한 안수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를 희생 제물에게 전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신성 모독자는 온 회중이 돌로 치기 전에 증인들의 손을 그 머리에 얹게 했다(레24:14).여기에서 안수의 의미는 확실한 증인으로서의 표시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어서 오염된 사람들이 당사자에게 안수함으로써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었다는 상징과 유사하다(레16:8)그리고 구약성서에서 안수를 통해서 행해지는 특별한 의식은 성직 임명이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여호수아를 임명할 때 안수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민27:18, 23, 신34:9). “이 의식은 후대 랍비 임명식에 도입되었고, 기독교의 성직 임명식의 근거가 되었음직하다.”3) 신약에 나타난 안수예수께서는 부활 후 승천할 때에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였다(눅24:50). 또한 어린아이에게 안수함으로 축복하였다(마19:15, 막10:16).또한 안수할 때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다. 예수께서 안수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행하시며 귀신을 내쫓으셨다(막5:23, 6:5, 7:32, 8:22-26, 눅4:40, 13:13). 그리고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이 안수할 때 병을 고칠 것을 말씀하셨다(눅16:18).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안수함으로 시력이 회복 됐으며(행9:12,17), 바울도 멜리데 섬에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안수하여 낫게 하였다(행28:8). “이러한 행위의 근저에 있는 관념은 영적인 통전성과 육체적인 생명력의 전이인 것처럼 보인다.”그리고 사도행전의 안수는 성령을 전달하는 중요한 것이었다(행8:18-19, 19:5-6). 그 영적인 생명력의 결과로서 표현되는 것은 보통 방언이나 예언 같은 외적인 변화이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안수는 침례를 받을 때 안수를 주는 경우와 안수할 때 성령의 임재의 성령을 받는 경우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몇몇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를 했고, 이들은 성령을 받았다(행8:14-17). 에베소에서 바울도 안수를 하자, 같은 결과가 일어났었다(행19:6). 이곳에서 신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했었다. 디모데 또한 바울의 안수를 받음으로써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딤전4:14, 딤후1:6).또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안수의식 가운데 구약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안수함으로 직임 임명식을 했던 경우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사도들도 안수로 예루살렘에 있는 일곱 집사들을 성별하기도 했으며(행6:6), 안디옥에서도 바나바와 사울이(행13:3) 안수로 성별되었다.Ⅱ. 디모데 전 후서에 나타난 안수디모데 전 후서에서 안수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곳은 3곳이다(딤전4:14, 5:22, 딤후1:6). 바울은 서신에서 안수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에베소에서 열두 사람에게 안수를 했고(행19:1-7). 그 자신도 두 번이나 안수를 받았으나(행9:10-18, 13:1-3), 디모데 전 후서를 제외하고는 안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은 안수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그렇다면 디모데 전후서가 바울의 친저가 아닌 것으로 볼 때 바울의 이름으로 디모데 전, 후서를 기록한 저자가 유별나게 안수에 대한 강조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역사적 상황에 따른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의도인 것을 볼 수 있다.1) 디모데의 목회적 상황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가운데 여러 가지 계속된 어려운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디모데에게는 다음과 같은 목회적인 약점이 있었다. 디모데는 자주 육체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연약함 가운데 있었다(딤전5:23). 또한 그는 선천적으로 소심하여 겁이 많았다(고전16:10).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연소한 사람이었다(딤전4:12 ; 딤2:22). 마지막으로 중요한 당시의 상황은 목회의 대적자들이 악날하고 단호한 상황이었다(딤전1:3-7,19,20 ; 4:6-7 ; 딤후2:1-19,23). 그러한 상황에서 또한 당파의 난립으로 디모데는 목회적인 위기 상황이었을 것이다(고전1:12 ; 3:4).사도바울의 죽음으로 인하여 디모데 사역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교회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목회적인 권위의 상실로 강력한 리더십으로 교회를 이끌 수 없는 상황이 디모데서신이 그 배경이 된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죽은 뒤, 그의 교훈과 가르침의 유산이 점차 소멸되고, 교회의 성장과 함께 많은 직제자들의 생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파벌이 생겨났음은 자명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디모데 서신의 저자는 디모데의 목회의 위기에 힘을 불어 넣어 주고 당시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바로 잡기 위해 바울의 영적인 권위를 빌려 당시의 영적 혼란을 잠재우려고 했던 것이다.2) 디모데에게 베푼 안수의 의미딤후1:6에서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의 저자는 디모데의 임직시 안수 받았을 때를 상기시키고 있다.디모데는 안수를 통해 교회를 다스릴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다. 디모데 전서4:14에는 안수가 장로들의 권위에 근거되어있는데 반해 디모데 후서 1:6절에는 사도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 즉, 디모데의 안수가 바울의 권위에 의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을 떠맡아 수행해 나가야 했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바울의 소원이었다. 그러므로 디모데 서신의 저자는 바울의 권위로 안수했을 때 성령의 은사가 당시에 불일 듯 일어났던 것을 상기시켜 하나님의 권위로 올바른 안수가 집행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당시 잘못된 안수가 있었음을 딤전5:22에서 암시하고 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이 말은 당시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경솔한 안수를 받고 교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상황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권으로 인한 안수를 디모데에게 시행했음으로 디모데에게 영적인 권위가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목적으로 딤후1:6을 언급했을 것이다.Ⅴ. 결 론안수는 성서적으로 보면 영적인 권위의 전달이다. 구약으로부터 시작된 중요한 영적인 권위의 전달로서 영적인 의식이다.
2008년 2학기 목회현장론 담당교수:이순목사님제출자: 이동희(Th.M 4차)독서보고서: 교회성장 계획서"복음혁명을 주도하는 세계 17대교회"를 읽고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목 차Ⅰ. 들어가는 말Ⅱ. 교회 성장에 대한 고찰A.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B. 교회 성장의 정의C.교회 성장의 다양성1. 양적 성장2. 질적 성장3. 확장 성장4. 봉사와 증거의 성장Ⅲ. 교회 성장과 목회자의 역할A. 리더십과 지도력B. 리더십의 학문과 신학C. 리더십의 인격D. 목회자와 설교E. 목회자와 영성F. 목회자의 평신도 훈련Ⅳ. 결 론참고문헌Ⅰ. 들어가는 말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사명을 띠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끊임없는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무리들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긴장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교회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 어떤 목표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또 여기에 교회의 목회 지도를 위해 부름 받은 사역자의 영향은 지대할 것이다. 리더십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도록 영향을끼치는 것이다. 리더십은 우리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성취하는 것이다. 세계 17대 교회를 읽고 느낀 바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리더의 중요성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리더십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즉 리더십은 여러 집단의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들 혼자서는 시도하지 않았을 자리에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예수님도 리더십의 즐거움과 그에 요구되는 책임감을 우리에게 친히 말씀해 주셨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 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 에게는 많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Ⅱ. 교회 성장에 대한 고찰A.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교회는 하나님이 특별하신 계획에 따라 불러 주심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또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수행하기 위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또 성경에서 "카할"이란 말과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쓸 때 교인들이 모이는 어떤 건물을 의미한 적은 없다. 도리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했다.성경에는 이 교회에 대한 성격을 여러 가지로 제시한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관에 대한 성격을 분석하고자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바울은 수차례에 걸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와 인간적 모임이나 조직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게 설명하고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12:12-31절이다. 이 부분을 통하여 각 교회 공동체는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묘사한 몸에 대한 견해는 일치와 성장, 은사의 다양성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유기체적 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인들 이 모인 공동체이다.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자라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라나야 하며, 내적으로는 신앙과 인식과 사랑의 성장, 외적으로는 새로운 지체들의 탄생으로 성취된다. 각 지체들은 그 분으로부터 그들의 기능을 얻어내고 있다. 모든 지체들은 그들의 생명을 하나의 공통된 근원으로부터 얻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상호 의존되어있다. 몸의 이웃에서 표현된 그리스도와의 연관은 생동적(vital)이며, 영적이고, 인격적이다. 이것을 "몸의 성장은 집합적 진행(collective pro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직 아무런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더불어 교제를 가지도록 해주며 책임 있는 교인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데 관련 된 모든 사항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교회 성장'이란 개인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인 수가 증가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책임적인 존재 즉 제자가 되는 과정을 통틀어 말한다.C. 교회 성장의 다양성과거에는 교회성장을 양적 성장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개념이 계속 발전되어서 교회 성장에 대한 다양한 차원을 찾게 된다.1. 양적 성장양적 성장이란 외적으로 나타나는 개체 교회의 교인수의 성장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교인들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증거 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짐에 따라 새로운 교인들이 늘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장에는 4가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는 생물학적인 성장이다. 이것은 부모의 신앙을 계승해서 자녀가 자동적으로 입교해서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둘째는 이동 성장(Transfer Growth)이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이사 와서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전인성장에는 생활터전의 이전으로 인한 것도 많지만 교회 프로그램 때문에 교회를 옮겨감으로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셋째는 회심 성장(Repent Growth)이다. 이것은 비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와 성도가 되는 것으로, 가장 바람직한 성장형태이다. 이 회심 성장은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 세계 방방곡곡에까지 전파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성장이기 때문에 이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은 복음적인 교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다. 회심성장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교회야말로 건강한 교리로 진정한 양적 성장을 이룩하는 교회인 것이다.2. 질적 성장질적 성장이란 이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말한다. 이것은 회중들의 신앙적인 면에서의 깊이와 질적인 발전을 뜻한다. 교인들이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할 수 있 아니하여야 한다. 다만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려는데 목표를 두고 세계복음화에 힘쓰는 교리가 되면 교회성장에 균형을 이루면서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즉 교회내부의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힘쓰면서, 끊임없는 전도로 결신자를 얻어 교회의 양적 성장을 이룩하고, 양적. 질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면 교회는 즉시 교회를 개척(선교)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런 교회가 될 때 바람직한 성장의 균형화로 교회는 계속 성장하게 될 것이다.Ⅲ. 교회 성장과 목회자의 역할A. 리더십과 지도력'교회는 목회자 이상 클 수 없다', '목회자가 가는 대로 교회가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교회 성장에 있어서 목회자가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측면을 강조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종종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다. 교회내의 문제의 경중을 따진다면 목회자에게 귀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교역자 자신이 문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곧 지도자인 목회자의 리더십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교회 성장의 제일 중요한 요인을 효과적인 지도력으로 본다. 목회자가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요건이 몇 가지 있다.그 첫째가 지도력에 방향 제시가 분명해야 한다. 지도자는 배의 성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키를 잡고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분명한 푯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둘째로 지도력에는 장단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있어야 한다. 단기적인 계획뿐 아니라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셋째로 그 지도력이 그 교회에 잘 맞아야 한다. 그 지역의 특수한 상황, 교인들의 문화, 생활정도에 따라 그 교회에 알맞은 지도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넷째로 지도자는 자기와 함께 혹은 자기를 따라오도록 다른 사람을 설득하든지 감동을 주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다섯째로 지도력은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 고자세의 지도력은 효과적인 지도력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급변하는 사회에 있어서 그때그때의 문제와 사건을 포착하고 분석한 후 성서의 진리에 근거해서 교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석해 주어 바른 신앙생활로 인도해 주는 사명을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목회자 자신의 바른 신학의 정립과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올바른 신학의 안내를 받아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할 때만이 그 목회자의 목회지도를 받는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다.C. 리더십의 인격목사는 하나님의 소명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기꺼이 응답한 사람이므로 어느 정도의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직분인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대한 자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는 객관적으로도 누구에게든지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첫째로 목회자는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목사는 많은 영혼들을 인도하는 자이므로 경성하지 않으면 많은 영혼들은 죽음의 자리에 빠뜨리기 쉽다.둘째로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목사가 가정에서조차 목사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가정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다. 목사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토대로 하여 올바른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다.셋째로 목사는 대인관계가 원만해야 한다. 목사는 언제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므로 대인관계에 있어서 원만하지 않으면 직무를 효과적으로 감당하기가 어렵다.넷째로 목사는 이웃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목사는 양무리를 돌보는 임무도 있지만 동시에 무리 밖에 있는 불신자들 곧 이웃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야 할 사명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불신 이웃으로부터도 인정받고 존경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D. 목회자와 설교설교는 개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목사에 대한 교인들
에클레시아의 어원적 의미들어가는 말에클레시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로서는 먼저, 에클레시아에 대한 어원적 고찰을 고전 희랍어 중심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구약성경에 나타난 용어,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용어들을 살펴봄으로서 에클레시아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은 한자어 “敎會"(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성격은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교회가 지적인 모임이요 전문적인 종교 지도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단체인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 킬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클레시아) 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A.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에클레시아의 어의에클레시아(εjkklhsiva)라는 말은 “부르다"(to call)를 뜻하는 칼레오(kalevw)에서 유래한 에크-칼레오 (εk-kalevw)에서 파생되었는데 에크(εk)는 “ ... 으로부터”라는 전치사요 칼레오(kalevw)는 “부르다”, “소환하다”라는 동사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 으로부터 불러내다”라는 어원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에겐 이 말의 의미가 분명했다. 시민들은 에크-클레토이(ejk - κλητοι), 곧 전령에 의해 불림을 받아 함께 소환된 자들이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지칭했다. 이렇게 볼 때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원래 하나의 개별적인 공공적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지 어떤 공동체의 질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말은 아니었다. 교회의 공동체 생활의 특수한 성격과 차원들을 표현하려고 의도했던 곳에서는 다른 용어들이 보다 유연선이 있고 의미를 노출시킬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런 다른 용어들과 비교할 때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중성적이고 특성 없는 것이 며 그 자체로서는 신학적 의미를 거의 지니지 않는 것 이었다.B. 구약성경의 용어들에클레시아라는 말은 희랍적 배경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적 배경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구약성경의 배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카할(???)과 에다(???)라는 두 가지 히브리 용어들을 발견하게 된다.1. 카할(???)에클레시아라는 말은 70인 역에 100회나 나오는데 히브리어 카할(???)이나 그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카할이란 말의 본뜻은 “부르다”라는 말에서 만들어진 말로 단순히 총회, 회집, 회중을 뜻한다. 그리고 이 낱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낱말은 악한 모의를 꾸미려고 모인 모임을 가리키며, 백성들의 문제로, 전쟁이나 침공을 위하여, 포로에서 돌아오는 동행에 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종교적 총회에 참석하려고, 혹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모인 모임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낱말은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천사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며 단순히 모인 대중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의 연속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카할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일종의 전문용어가 되었으며 그 뜻 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종종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신약 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구약 이스라엘의 연속체라고 보았던 것처럼, 이 의미는 에클레시아의 신학적 용법에 대한 진짜 배경을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2. 에다(???)에다(???)는 야아드(?? ), 곧 “정하다” “모이다” “택하다”로부터 파생된 여성 명사이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12:3에 최초로 나오며 구약에서는 145회나 나오고 70인 역에서는 127회가 쉬나고게(συναγωγη)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 명사 자 체가 모임의 목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벌떼(사 14:8)와 수소의 무리(시 68:30) 등을 가리키는가 하면 의인의 회중(시 1:5)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악인들(시 22:16) 또는 강포한 자들(시 86: 14) 그리고 경건치 못한 자들(용 15:34)의 회중을 가리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고라의 추종자들(민 16:5), 아비람의 추종자들(시 106:17-18)을 나타내는가 하면, 심판할 때에 하나님 앞에 모일 사람들의 회합(시 7:7)을 가리키기도 한다. 반면에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모임(시 82:1)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키는 에다의 용법은 구약에서는 매우 특정적인 것이다. “회중”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및 여호수아에서 70회나 나온다. 또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회중"(민 27:17 ; 민 31:16 ; 수 22:16-17'), "이스라엘의 회중"(출 12:3 ; 수 22:20), "모든 회중"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또 한 “이스라엘의 회중의 모임"(출 12:6)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의 모임"(민 14:5) 이라는 문구도 있다. 에다는 출애굽기 12:3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이스라엘의 회중"이 생겨난 것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애굽을 떠나라는 명령에서부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에다가 제의(cult)법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알 수있다.C. 신약성경의 용어들지금까지 에클레시아의 어원적 고찰을 위해 고전 헬라에 문헌에서와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를 살펴보았다. 이제 더욱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찾아보고자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두 개의 단어가 사용 된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모두 70인역에서 유래했다. 하나는 쉬나고게이며 다른 하나는 에클레시아이다. 이제 이 두 용어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1. 쉬나고게(συναγωγη)쉬나고게(συναγωγη)는 쉰(συν) , 곧 “ ... 와 함께”라는 전치사와 아고(αγω), 곧 “인도하다" “오다”라는 동사의 합성어로 “함께 인도하다”, “함께 오다”라는 어원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쉬나고게의 일반적 의미는 기본적으로 함께 모으는 것이나 수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모임, 책이나 서신들의 수집본, 곡식을 거두어들임, 군인의 소집 등의 의미로 쓰인다. 특히 열방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은다는 의미로 수반하는 종말론적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들의 모임과 그들에 의해 대표되는 공동체를 쉬나고게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유대인을 뿌리로 하여 발생한 집단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였고, 또한 적어도 초기에 이 집단은 그 자체가 유대교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쉬나고게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경직된 것이었기 때문에 개혁된 기독교 회중을 위하여 회당으로 부터 분리되었음에 틀렴이 없을 것으로 여 겨진다. 더욱이 이 낱말은 한글 개역성경에서 “회당”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유대인의 종교적 집합이나 혹은 공 예배를 위하여 모인 건물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2. 에클레시아 (ejkklhsiva)교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에클레시아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다른 어떤 용어보다 교회의 특성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이 낱말은 에크(εκ), 곧 “ ... 로부터”라는 전치사와 칼레오(καλεω), 곧 “부르다” 라는 동사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로부터 불러내다”라는 어원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무엇보다 뚜렷한 것은 이 단어가 마태복음 16:18과 18:1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 완전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를 23회 사용한 사실은 적어도 누가가 예수님의 지상 활동 시기에 속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이 단어의 표현 중 대부분은 단연 바울서선에서 나온다.에클레시아의 신약적 의미는 총회라는 단순 한 비전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완전히 전문 적인 용어로 발전한 것을 보여 준다. 총회를 뜻하는 동일한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의미가 이 말에 한정구(限定句)를 붙여 사용한 데서 나타난다. 이미 에클레시아 단독으로 그리스도인의 총회를 표시하는 곳에 발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바울의 초기 저술 가운데 몇몇 수식어가 붙어 있는 용법이 있으며, 이 용법으로 보아 이 용어 자체가 아직은 전문적인 의미로 완전히 발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첫 편지를 “하나 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의 교회에게"(살전 1:1) 보낸다. 그는 그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남의 교회들"(살전 2:14)이라고 쓴다. 반면에 사도는 그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며 역시 아주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같은 인사말을 사용한다.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살후 1:1). 이 구절들 은 에클레시아 자체가 “총회”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특별한 총회를 가리킬 때는 70인 역과 비슷한 한정사를 사용해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독서보고서 『신약 기독론의 기원』하워드 마샬이 책은 예수의 인격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주제가 방대하기 때문에, 논의는 필연적으로 이 주제의 한 측면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연구는 예수의 인격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된 칭호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는데, 특히 예수가 살아 계셨을 때와 신약성경이 기록된 그 사이의 기간에 이 칭호가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관심을 가져 왔다. 본서에서 채택하고 있는 논의 방식은 신약성경에서 제공하는 증거를 살펴보며, 또한 이를 그 자체의 관점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역사적이고 비평적인 연구 방식이다.제1장에서는 서론과 개관으로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가르침이 성경학자들에 의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리든(Liddon), 부셋(Bousset), 로울린슨(Rawlinson), 테일러(Taylor), 쿨만(Cullmann), 한(Hahn)등의 견해를 소개함으로써 기독론에 대한 논의와 연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제2장 초대교회제럴드 다우닝은『교회와 예수』(The Church and Jesus, 1968)에서‘역사적인 초대교회’와‘역사적인 예수’모두는 후기 시대의 문헌을 통하여 굴절되어 있다고 주장한다.한과 풀러가 초대교회에서 기독론의 여러 발전 단계 이론 중 3단계 구분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우닝은 이러한 절차에 비판적이다. 주도적인 학자들(퀨멜, 쿨만, 맨슨)은 헬레니즘적 유대교와 이방인 교회를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제3장 예수는 기독론을 가지고 있었는가?슈미델은 복음서 전승 안에서 전승 그 자체의 전망에 거슬리는 것을 찾아내려고 했고, 이러한 방식으로 확고한 과학적 근거 위에 구성된 예수의 생애를 위한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일련의 본문을 분리시켰다< 막 10:17ff, 마 12:31ff, 막 3:21, 13:32, 15:34, 8:12, 6:5ff, 8:15, 마 11:5>. 복음서에 있어서 실제 인간으로서 예수의 지위는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주장했을 지위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께서 ‘아멘’과 ‘아바’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슐리어의‘아멘’의 연구는 예레미야스에 확증된다. 또한 예수께서 ‘아바’라는 아람어 용어를 사용하신 것에 주목한다. 이 낱말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있어 친밀성을 나타내며,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예수에 의해 사용된 용어이다. 우리는 ‘아멘’과 ‘아바’ 이 두 단어에서 예수께서 그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의식하고 계셨다는 간접적인 암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께서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주장한 것은 다른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그의 태도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위치에서 행동하고 계셨음을 함축하고 있다.이제 칭호의 문제를 살펴보면 캐제만은 예수께서 자신을 선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 그 자체를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생각했다는 견해를 확증한 후에, 그는 “이것은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이해했음을 의미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교회의 기독론의 기원은 예수 자신이 기독론을 사용하셨다는 것에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제4장 인자는 누구인가?‘인자’라는 칭호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동일한 말씀의 병행 형태를 제외하고도 50회가 넘게 나올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는 어떤 특별한 사람(예를 들면 에스겔; 겔2:1과 기타 구절) 혹은 인류일반(시8:4)을 지칭하기 위해 ‘벤-아담’(ben-'adam)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유대교 문헌에서 인자라는 인물이 묵시적 문맥 속에서 나타나는 곳은 단지 세 곳뿐이다(다니엘 7장; 에스라 4서 13장; 에녹 1서 37-71장). 유대교 문헌을 통해 볼 때 다니엘 7장에서 새로운‘집합적’해석이 가능하다는 암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원래‘개인적인’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지배적인 견해이다. 레이비스테드(R. Leivestad)는 버미스와 의견을 같이 하여 ‘인자’가 유대교 문헌에서 칭호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예수님은 단지 자기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제5장 네가 그리스도냐?예수에 대한 칭호의 연구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말씀하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인자’는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만 거의 배타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밖의 칭호들은 나타나 있다 해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드물게 등장하지만, 초대교회가 흔히 사용한 필요수단이었다.‘크리스토스(Christos)’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어 명사 ‘마쉬아흐(mashiach)’,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으로 발전했지만(예를 들면, 롬5:6, 8; 고전 1:12, 17; 히3:6; 9:11), 이 말은 기본적으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어떤 사람에 대한 묘사나 칭호이다. 이들은 구약성경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이다.복음서에서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약 여섯 번 정도 나온다. 이들 중에 두 번은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마태가 명백하게 하려고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마16:20; 막8:29-10; 마24:5; 마24:23; 막13:6), 나머지 구절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경고하실 때(막13:21)와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실 때(막12:35),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자에게 상급을 약속하신 구절과(막9:41),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마23:10)고 말씀하신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제6장 예수는 주이시다‘주(헬라어로 kyrios)’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재산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능력과 권위를 지닌 사람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에게‘주’의 의미는‘하나님’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주’로 지칭하셨는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주’로 지칭하시는 말씀들이 매우 드물다. 초대교회가 파루시아와 승귀하신 예수님의 현재적 활동과 관련하여 예수님을‘주’로 인식하는 것을 볼 때,‘주’라는 칭호를 신앙고백적으로 사용한 것은 기독론에서 후기가 아니라 초기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kyrios(큐리오스; 주)’를 처음으로 신앙고백적으로 사용한 곳은 세례와 관련해서이며, 이러한 사용이 보다 광범위하게 펴져 나간 점으로 볼 때, ‘주’는 부셋(W. Bousset)과 크레이머(W. Kramer)의 주장과 같이 팔레스타인 밖 헬레니즘적 이방인 교회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한 칭호가 아니라 아람어 용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많다.제7장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는지 그리고 초대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디모데전서의 직제에 관한 고찰서론디모데전서의 진정성 문제는 1802년 슈미트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이후 슐라이에르마허 그리고 바우르를 거쳐 다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홀츠만이 목회서신의 위명성에 대한 모든 이유들을 제시한 이후로 목회서신의 위명성은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이 서신은 특정한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그러나 이 개인은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치리하는 목회자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황상 저자가 바울이 아닌 바울 학파의 어떤 사람이라고 볼 때 왜 바울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수신자로 쓰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씀으로 저자가 가져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직제를 살펴보고자 한다.1. 교회직제의 발전 배경감독이라는 용어가 바울의 고별설교라고 볼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갑작스럽게 감독들이라고 부른다(행20:28).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직제가 발전하는 중요한 단계를 추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서열을 나타내는 것 보이며 그러면서도 기능상 세분화 혹은 그 역할에 대한 규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지도자를 목자라고 부르면서 그 직무를 감독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목자가 감독의 직무를 가지고 돌보는 공동체를 양의 무리라고 부른다.)이 양의 무리는 신약성서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교회”로 언급된다.) 이런 면에서 감독이라는 칭호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점차적으로 헬레니즘의 환경에서 많은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칭호는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서는 목자와 감독의 개념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벧전2:25).2. 디모데전서를 포함한 목회서신의 직제 이해디모데전서 저자의 직제 이해를 위해서는 시대적 정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에베소에서 일하다가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떠나고, 디모데는 계속 남아서 거짓교사들과 싸우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딤전1:3)딤전1나타나는데, 장로들과 감독들(딤전3:1; 5:!7; 딛1:5)은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안수를 통해 성직에 임명되었고(딤전5:22), 공동체의 사례를 받는다(5:17). 그 외에도 집사들(3:8)과 과부들(5:9)이 있다. 선택받은 직무 담당자들은 개체 교회 내에서 질서를 수호하는 자들이다. 장로들과 감독들이 모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가 될 필요는 없다(딤전5:17). 그럼에도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가진 감독들에 대해 매우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여 싸울 때에 주도권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딤전3:2; 딤후2:2; 딛1:9).) 이러한 필요에 따라 직제가 언급되고, 정통성의 권위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교회는 또한 계속해서 재림의 지연이라는 상황 하에 처해 있었다. 재림은 더 이상 임박한 것으로 기대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해 순응하는 것을 배워 왔고, 유대교와 로마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제도적인 규범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제도를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된 것이다. 스스로 존립해야 한다는 일련의 새로운 요구들을 갖게 되면서, 세상에서 존재하면서 제 기능을 하려면 하나의 조직 구조와 결정기고, 그리고 그 직제와 사역자들의 기능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교회는 안으로는 유대교적 영지주의의 점증하는 영향력으로부터의 위협과 밖으로는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으로 조직과 구조를 정비하게 된 것이다.3. 감독, 집사, 과부직의 세부적 특징 고찰디모데전서 2:1-3:16, 4:11-5:10에서는 교회 규칙을 언급하고 있는데, 교회규칙의 첫 부분에 해당하는 2:1-3:16은 교회예배와 직제를 다루고 있고, 특별히 3장은 감독과 집사의 자질, 그리고 교회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다.3-1. 감독(3:1-7절)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2절). “책망할 것이 없는”(?νεπ?λημπτο?)란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이 서터 왔다고 보며 저자가 감독이 자격조건에 적용할 때 받아들여졌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이교도 사회에서도 흔치않은 관습이고 1세기 말경의 유대교나 이교사회에서 그 증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세 번째 견해로는 딤전5:9절에서와 같이 재혼을 금지하는 말이라는 해석이다. 네 번째 견해는 ‘한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성실하고도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들을 종합해 볼 때,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은 사회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에서 해석해야 옳은 것이다. 가정을 다스리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린 후에 가능하며 교회를 다스리기 원한다면 먼서 자기 가정을 다스린 후에야 교회를 다스릴 수 있다고 본다. 감독의 직분을 맡게 될 사람이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건전한 부부생활을 영위하여 모든 이들의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그 외의 덕목들도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태의 덕목들로 소개되고 있다. “절제있는”(νηφαλιο?)이라는 말은 목회서신에서만(딛2:2)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대체로 ‘술’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3절에 ‘술을 즐기지 않고’ 라는 말과 연결하여 이해될 수 있다.또한 3절에 나타난 내용들과 관련지어서 “모든 형태의 과도함, 욕망, 무분별함을 멀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단정한”(κοσμιο?)이란 말은 “아담한”이란 말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이고도 고차원적인 처신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그 당시 자주 사용된 표현이었다.) 이를 직영하면 ‘질서가 있으며 잘 정돈된’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내적인 마음의 안정이 외적으로 표현되어 안정되고 조화를 이룬 인간성을 나타내는 좋은 품성의 좋은 외모로 품위있는 안정된 성품을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있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초대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되던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φιλοξενια)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나그네를 사랑하는’이란 의미이 참는 것,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 양보, 이해를 통한 남의 주장을 용납함을 의미한다. 여러 형태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요구에서 관용이 감독의 자격에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다투지 않아야 한다”(αμαχον)는 ‘싸움을 삼가라’는 뜻으로 분쟁을 싫어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라는 세 가지 요건은 아마도 거짓 교사들의 처신을 고발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언급된 것일 수 있다.) 6:3-5절과 딤후 2:22-26에 나타나고 있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분쟁과 다툼을 유발시키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는 그들과는 달리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하는데, 심지어는 거짓 교사들에게조차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2:23-25).“돈을 사랑치 않는”(αφιλαρ?υρον)은 6:5-10절에서도 계속 강조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교회 지도자의 자격을 규정하는 본문들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물질을 대표하는 돈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랑을 위한 도구이어야 함을 뜻한다. 감독은 공공의 관리책임자로써 공익재산 또는 공익 이익에 종사하는 직책이므로 물욕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저자는 4-7절에서 교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요건을 추가시킨다. 모범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4-5절), 새로 입교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며(6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목회서신의 저자는 마치 아버지가 가정을 잘 다스려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도 남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듯이, 교회 지도자 역시 한 가정의 가장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치리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디모데전서의 저자는 이상과 같은 특징의 감독의 직분을 서신을 통해 바울의 교훈으로서 제시하고 있런)와 ‘κερδο?’(이득)의 합성어로서 정당하지 않고 ,문제성이 있는 돈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더러운 이(利)”란 불로소득 또는 성스러운 일을 수행하면서 수고비를 받기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9절의 ‘비밀’이라는 단어는 엡4:6에서와 같이 예전에 알지 못하다가 이제는 알 수 있게 된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질 혹은 교회의 기본 진리를 나타내는 말로 이미 공식 문구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바울은 고전2:6-16절에서 그것을 복음의 핵심, 즉 구원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사용했다.)목회서신 저자는 “믿음의 비밀”이라는 표현을 “믿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저자는 집사들이 깨끗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집사들은 이 ‘비밀’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양심을 버림으로 믿음에 파산하고’(1:19) 계속해서 양심을 저버림으로써 ‘양심에 화인 맞은’(4:2)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를 진실하고 강한 확신으로 꼭 붙잡으면서 ‘깨끗한 양심’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10절의 “시험하여 보고”(δοκιμαζεσθωσαν)는 본래 금속의 순수성을 시험해 보고 동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충분한 함량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는 어떤 구체적인 시험을 통해서 선별하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인 도덕적 평가기준들을 통해서 집사를 임명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이미 6-7절을 통해, 일반적인 도덕적 요소가 그 지준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절과 13절을 통해서 우리는 집사가 되려는 사람은 일정한 자격은 물론, 일정한 ‘견습 기간 또는 시험 기간’ 동안에 오늘날 말하는 ‘자격 심사’를 거쳐야만 했음을 알 수 있다.11절의 대상에 관한 문제는 그 대상이 특별히 구별된 여집사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집사의 부인을 의미하는 것인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는 저자가 전통적인 임무 목록을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