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4
검색어 입력폼
  • 허균 연구
    Ⅰ. 서론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선조2~광해군10)은 다방면의 출중한 재능만큼이나 다채로운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유가의 권위주의적 체제와 규범이 일상의 삶을 완강하게 틀 지우던 조선중기에, 당대로서는 예사롭게 생각할 수 없었던 사상과 정서와 행동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적인 삶과 문학세계를 이루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도록 시대의 반항아 ? 이단자로 일컬어지는가 하면,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 선각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허균이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중세의 지배질서 체제가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사회 전반에 걸쳐 변혁의 움직임이 움트던 시대였다. 격화된 당쟁과 임진왜란에 이어 광해군 즉위를 둘러싼 정쟁이 계속되면서,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민생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특히 중하층에서 변혁을 갈망하는 기운이 점차 확산되고 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허균은 다방면의 서적들을 섭렵하며 생각의 폭을 넓히고 감성을 담금질해 나가면서, 당시로서는 선뜻 내보이기 어려운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키워나갔던 것으로 보인다.허균은 박학다식하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파격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때문에 당대 사회질서와 가치의식에 결부된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숱한 탄핵과 파직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하여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박학다식에 문학적 재능이 출중했고 그것을 당대 사회에서 두루 인정받았던 데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허균은 경국제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부심한 유가 사대부)이면서도 사대부 사회에서 이단시하던 도가사상에 탐닉하는 것은 물론,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한때 불도(佛徒)를 자처한 적도 있다. 특히 불가의 경전을 탐독하고 숭불의례까지를 일삼는다는 탄핵을 받아 몇 차례 파직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자신은 정통 사대부가 출신의 적자면서도 서얼 출신인 이달(李達)을 본 연구와 함께 허균의 문학사상 전반에 관한 논의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문학사상 중에서도 시론(詩論)을 중심으로 한 연구도 있었다. 특히 허균의 산문 문학에 관한 연구로는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중심으로 한 작품론) ? 작자론),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실린 '전(傳)'을 중심으로 한 연구) 등으로 비교적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그러나 허균을 문학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문학사상을 정면으로 다루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상이야말로 창조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훌륭한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기왕에 허균의 문학사상과 관련하여 이룩된 몇몇 논문들은 그 나름대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조동업(趙動業)은 1971년에 '許筠 詩論'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이 밖의 주요한 업적으로는 조동일(趙東一, 1971)의 「許筠의 文學思想」, 김진세(金鎭世, 1977)의 「許筠論」, 안병학(安炳鶴, 1980)의 「許筠의 文學論 硏究」, 이상익(李相翊, 1980)의 「許筠의 文學理論」 등이 있다.이상익(李相翊, 1980)의 논문)은 먼저 허균의 생애와 시대상, 허균의 문재(文才)에 대해 연구한 후 본질론(本質論) ? 작가론(作家論) ? 비평론(批評論)으로 분류하여 허균의 문학사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안병학(安炳鶴, 1980)의 연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먼저 허균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현실 비판 의식을 연결시켜 설명한 후 허균 문학론의 특징을 '創意와 個性', '體驗과 修練', '言語意識' 등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위와 같은 연구의 결과로 인해, 허균의 당대적 상황과 개인사적 맥락 하에서의 그의 사상, 문학관의 특이성은 비교적 소상히 밝혀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창작의 결과론적 면에서의 통시적인 연구나, 문학 작품으로서 가지는 내적인 구조의에 있다고 할 것이다. 허균이 살던 시대는 사상적으로 주자학이 권위주의화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국정의 문란과 민생의 피해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현실을 보고 그는 당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주자주의, 예교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허균은 원래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자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았으며, 스스로 '나는 어김없이 유자(儒者)다'하고 자처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시에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이와 같은 방향전환은 그 자신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는 데 있어 전통적인 유학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자각함으로써 이루어졌다.허균은 스스로 '不與世合'이라고 하여, 자신이 세계와 화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주자학적 윤리규범과 봉건적인 통치 질서에 따라서 지배되는 세계였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은 우선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당시에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게 된 것도 그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이 주자주의의 독점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예교적(禮敎的)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허균은 예교니 윤리니 하는 것은 사람이 저마다 타고난 자연스러운 정을 왜곡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고, 정을 제어해서 본연지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 도학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맞섰다. "예교 어찌 방랑을 구속하리요. 잠길락뜰락 다만 정에 맡길 뿐. 그대는 그대 법을 써야 할 게고. 내 스스로 내 삶을 달해야 하네.")라고 하는 시를 읊었고, 마침내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요, 분별의 논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준 본성은. 내가 보건대, 비록 간결한 듯도 하고 웅혼한 듯도 하며, 심오한 듯도 하고 분방(奔放)한 듯도 하고 굳세고 기이한 듯도 하지만, 대체로 그 당시의 상용어를 가지고 바꾸어서 고상하게 만든 것이니, 참으로 쇳덩이를 달구어서 황금을 만들었다고 이를 수 있다. 후세 사람이 오늘날의 글을 볼 적에 어찌 오늘날 사람이 그 옛날 몇 분들의 글을 보는 경우와 같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하물며 도도 망망하게 한 것은 진정 웅대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옛것을 본받지 아니 한 것 또한 나름대로 우뚝 솟고자 한 것인데 무슨 자만이 있겠는가. 그대는 그들 몇 분을 자세히 보았는가? 좌씨는 스스로 좌씨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ㆍ반고는 스스로 사마천ㆍ반고이고,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 역시 스스로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이어서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을 배웠으면 하는 것이고, 지붕 밑에 거듭 지붕을 얹듯이 남의 문장을 답습하여, 표절했다는 꾸지람을 받을까 부끄러워한다.”)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허균은 좌씨(左氏)를 비롯한 중국 역대의 대가들이 남의 글을 답습하지 않고 일가를 이룬 사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의 글은 서로에 대해 독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독자적인 특성이 좌씨를 좌씨이게 했고, 장자(莊子)를 장자이게 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남의 글을 모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가를 이룰 수 있는 개성적인 문학세계의 구축을 염원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허균이 "저는 저의 시가 당시(唐詩)나 송시(宋詩)와 유사해질까 두려워하며,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건방진 생각이 아닐는지요.")라고 한데서도 그가 스스로 모방과 답습을 경계하는 한편, 일가를 이루기 위한 자신만의 개성과 독창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허균은 '좌씨를 비롯한 역대 중국의 고문은 모두 자기 시대의 상어(常語)를 사용해서 쇳덩이를 황금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창작을 했다'고 하였는데,다. 허균의 이와 같은 가치의식과 시적 지향의지의 단면은 자신이 살아가는 당대의 사회현실을 가감 없이 바라보고, 그 구체적인 형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려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Ⅳ. 문학사상과 창작과의 관계허균의 문학은 기존 질서를 옹호하거나 행동의 규범을 탐구하는 문학이 아니었고, 자기대로 세계와 부딪친 경험의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균은 현실에서 제기되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 경험적 진실성에 입각하여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은 허균의 시 「우회(寓懷)」의 일부분으로 허균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우회(寓懷)」)田畝略抛荒밭이랑은 대개 다 묵어버리고人民半死亡백성들은 절반이 죽어 없어져征?仍聚斂부세(賦稅)는 여전히 거둬들여라水旱更蟲蝗수재 한재 충재마저 덮치었구려政豈推高第정사 어찌 고제에 미룰까본가情還憶故鄕심경은 도리어 고향 그리네空慙二千石속절없이 이천 석이 부끄러워라不逮漢循良한 나라 순량에게 미칠까본가이 작품은 허균이 황해도 수안에서 고을 수령을 하던 때의 작품으로, 전란으로 온통 황폐화된 땅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수재와 가뭄, 병충해까지 겹쳐 민생은 말이 아닌데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수령이랍시고 국법에 따라 부세를 거두어 들여야 하는 자신의 참담한 처지를 그린 시다.이렇듯 사회와 맞섰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작품으로는 '주자주의적 사회관과는 달리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일어나는 항거로 인해 상하의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호민론(豪民論)」, '하층 백성 가운데에도 얼마든지 뛰어난 인재가 있는데, 하층 신분이라는 이유로 하늘이 낸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내용의 「유재론(遺才論)」 등이 있으며, 「홍길동전(洪吉童傳)」과 같은 소설도 이러한 생각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체험의 중요성 강조' 뿐만 아니라 '탈주자주의 문학관'과도 관련이 있다. 특히 「홍길동전」의 경우 '홍길동'이라는 주인공이 지닌 성격이 호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과, 하층 백성들의 힘을 인있다.
    인문/어학| 2010.12.30| 8페이지| 1,500원| 조회(255)
    미리보기
  • 프로메테우스 분석
    Ⅰ. 들어가는 글신화는 신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태고의 사람들이 자연과 어울리면서 현실적인 가치가 있는 모든 자연의 현상적인 진리들을 신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빌어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현대인들은 태고 사람들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도 없고, 태고의 신화가 지니고 있는 진리를 모두 부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서양의 많은 학자들은 신화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여 진리의 정체를 밝히려고 한다. 또한 신화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진리가 나타나고, 이러한 본질적인 진리들은 언제나 재인식되고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다.) 때문에 문학 세계에서는 고대 신화의 주제나 모티프를 작가의 문학적 의도에 부응하면서도 시대상에 부응하도록 변형한다.이 글에서는 그러한 많은 작품들 중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와 카프카 Franz Kafka의 두 개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서구문학, 특히 독일문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신화적인 인물이 시대 상황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Ⅱ. 프로메테우스 신화괴테와 카프카의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내용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태고에 카오스가 정리되어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생성된 후 하늘에는 새가, 바다에는 물고기가, 그리고 땅에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이 각각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고등한 동물이 필요하여 티탄 족인 프로메테우스가 대지에서 흙을 취하여 물로 반죽하여 신들의 형상과 비슷한 인간을 만들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인간에게 직립할 능력을 부여했다. 이 덕택에, 다른 동물은 모두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보는데 인간만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티탄족인 프로메테우스는 인류가 창조되기 전부터 지상에 살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아우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부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에피메테우스는 갖가지 동물에게 용기, 힘, 속도, 지혜 같은 것들을 선물로 주기 시작했다. 드디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할 차례가 왔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몹시 당황한 그는 프로메테우스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우의 하소연을 듣고 난 프로메테우스는 여신 아테나의 이륜차의 불을 자기 횃대에 옮겨 붙여 가지고 내려와 이를 인간에게 주었다.) 이 선물 덕택에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감히 넘보지 못할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곧 인간은 이 불을 이용, 무기를 만들어 다른 동물을 정복할 수 있었고, 연장을 만들어 땅을 갈아먹을 수 있었으며 갖가지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제우스의 성미를 건드렸고 신들과 인간의 통치자인 제우스의 노여움을 초래했다.제우스는 사자에게 명하여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 위의 바위에 묶어 두게 했다.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산꼭대기에는 독수리가 있어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었다. 그러나 간은 독수리가 파먹을 때마다 새로 돋아났다.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이러한 고통은 만일 프로메테우스가 자진해서 제우스에게 복종을 맹세하기만 하면 언제든 끝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짓을 업신여겼다.)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메테우스는 오늘날까지도 부당한 고통에 대한 고결한 참을성, 포학에 항거하는 의지력의 상징이 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낭만주의자들은 프로메테우스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Ⅲ. 독일문학에 나타난 프로메테우스의 모습1. 괴테1773년 여름, 괴테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빌려「프로메테우스」라는 희곡을 쓰면서 동명의 시)를 완성했다.)1연에서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된다. ‘하늘’과 ‘산정(山頂)’은 제우스의 공간이며, ‘대지’와 ‘움막’은 프로메테우스의 공간이다. 이 연에서 프로메테우스는 “그대는 나의 대지를 내버려 두라!”(p. 196)며, 자신의 공간을 제우스로부터 보호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2연에서는 “태양 아래 그대들보다 더 가련한 걸 나는 알지 못한다, 신들이여”(p. 196)라며 제우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을 비웃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연과 2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관계는 엄격한 대립구도에 있음을 알 수 있다.)3연과 4연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젊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동안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으며, 5연에서는 제우스신의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제우스를 존경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마지막 연에서 괴테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아닌 ‘나’와 같은 형상의 인간을 만들고 있으며, 자신처럼 ‘제우스를 흠모하지 않는 인간’을 만들고 있다.이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프로메테우스는 전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작자인 괴테 역시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괴테의 이러한 관점은 그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독일에서는 18세기 말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들어온 계몽주의가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이성 만능 풍조를 낳았다. 계몽주의가 대두됨에 따라 유럽인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만사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시기에 유럽에서는 신화가 배척을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괴테의 시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적 인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2. 카프카카프카의 소설 중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등장하는 소설은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 두 편이다. 「프로메테우스」에는 신화의 주인공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며, 소설 「독수리」의 내용의 흐름을 감안해 볼 때, 이 소설에 나타난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등장하는 그 독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먼저 「독수리」를 살펴보자. 신화 속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었던 것과 달리 카프카 소설 속의 독수리는 ‘나’의 발을 쪼아댄다. 또한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날마다 새롭게 자랐던 것과 달리 소설 속의 ‘나’는 이미 장화와 양말은 헤졌으며, 이젠 독수리가 발까지 쪼아대는 통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소설 속에서 다만 ‘나’의 육체적인 고통을 나타내려 했던 것일까? 그렇게 보기보다는 카프카에게 가해졌던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독수리가 가하는 육체적인 고통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따라서 이 글의 독수리가 상징하는 바는 카프카를 억압하는 모든 힘, 즉 잔소리하며 강압적인 직장 상사, 사회적인 눈총,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 그에게 휴식을 거부하는 경제적인 압박)일 것이다.정신적으로 지친 자,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자,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자들은 그들의 분노를, 그러한 고통을 가져다주는 대상들에게 고스란히 전혀 주기를 원한다. 때문에 독수리로 대표되는 대상들을 목 졸라 죽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한 동물은 워낙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저항은커녕 자신을 방어할 수조차 없다.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제우스의 힘이 프로메테우스를 꼼짝 못하게 묶어 놓아 저항할 수 없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다음으로 「프로메테우스」를 살펴보자. 이 짧은 소설에서 카프카는 서로 다르게 구전되는 네 가지 전설을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비교, 대조시킴으로써 확고한 진리 체계로서 신화가 갖고 있던 가치를 상대화시킨다.)첫 번째 전설은 원래부터 전해져오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내용상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신화에서는 분명히 언급되었던 제우스가 익명의 신들로 대체되었고 독수리 또한 다수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프로메테우스를 박해하는 대상이 신들의 수장인 제우스가 아니라 익명의 초월적 지배기관임을 의미하며, 프로메테우스는 더 이상 위대한 창조적 영웅의 상징이 아니라 익명의 억압 권력에 의해 수모와 멸시를 당하는 개인이요 희생자이다.)두 번째 전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바위에 몸을 눌러 바위와 하나가 됨으로써 고통을 끝내려는 그의 개인적인 시도가 등장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두 번째 전설에서는 첫 번째 전설에는 부재하던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육체적 고통의 끝을 맞는다. 때문에 그는 첫 번째 전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희생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세 번째 전설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인류에게는 더 이상 기억할 가지조차 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렸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카프카는 신화의 전통을 유지할 능력을 잃어버린 동시대인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네 번째 전설에서는 세 번째 전설과는 달리 신화는 인간에 의해 낡고 고루한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그 존재 근거 조차 잃어버렸음을 보여준다. 이제 프로메테우스의 영웅적 행위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세 번째와 네 번째 전설을 통해서 카프카는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현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Ⅳ. 맺는 글신화는 오랫동안 문학 속에서 작가와 시대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키며 등장해왔다. 이 글에서는 괴테의 시와 카프카의 두 가지 소설만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 외에도 헤르더, 브레히트, 바이런, 바이스, 셸리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였다.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괴테의 프로메테우스는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한 계몽주의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며, 카프카의 프로메테우스는 작품에 따라 희생자 상(象)을 반영하기도 하며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대항하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인문/어학| 2010.12.30| 5페이지| 1,000원| 조회(753)
    미리보기
  • <히 러브스 미> - 사랑과 집착, 그리고 ‘소통의 벽’에 대하여
    “비록 나의 사랑이 병적이지만, 나의 이성은 내 마음 속 고통을 평온하게 한다.이것이 내게 속삭인다, 인내를 갖고 사랑을 붙들어라...”(Bien que mon amour soit fou, ma raison calme les trop vives douleurs de mon coeur en lui disant de patienter, et d'esperer toujours...) - 사랑과 집착,그리고 ‘소통의 벽’에 대하여과목명 : 프랑스 영화의 이해교수님 : 임혜경 교수님제출일 : 2009. 5. 15Ⅰ. 들어가는 말래티샤 콜롱바니가 연출하고 오드리 토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는 ‘소통의 벽’, ‘사랑과 집착’, ‘환상과 환각’ 등을 보여준다.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술학도인 안젤리끄는 유부남 심장전문의 로익을 사랑한다. 그녀는 그와의 사랑을 꿈꾸며 그녀의 생일을 그와 함께 보내고 싶어하고, 그와 함께 여행을 갈 계획을 세우지만, 그녀의 생각대로 일은 되지 않는다. 영화는 로익의 시점으로 바뀌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젤리끄와 로익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며, 안젤리끄 혼자서 환상과 환각에 사로잡혀 자신과 로익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안젤리끄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단지 자신을 괴롭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스토커일 뿐이다. 처음 안젤리끄의 시선으로 보았던 그 가슴아픈 로맨스가, 영화 후반부에는 어떻게 사이코 스릴러가 되는지 관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재미다.사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밸런타인데이 시즌이었고, 영화 포스터도 로맨스물인 것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극장을 찾은 많이 사람들은 ‘낚였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하게 ‘낚였다’라고 치부해 버리고 넘어가 버리기에는 아까운 영화다.내가 이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 시퀀스는 안젤리끄가 집주인의 요청에 따라 ‘특별한’ 선인장을 돌보는 장면이다.) 집주인의 말에 의하면 이 선인장은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유리병 안’에서만 자랄 수 있는 선인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선인장’은 안젤리끄에게는 곧 ‘로익’를 의미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젤리끄의 ‘환상 속’에 살아 숨 쉬는 로익다. 안젤리끄가 이 선인장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후에 선인장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왜 깨뜨리는지를 통해 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장면을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꼽았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퀀스는 안젤리끄가 친구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어렸을 때 난 우리 아빠의 작업실에서 살았었어.작고 오래된 작업실이었지.그리고 난 애완동물을 갖고 싶어 했지.아빠는 털이 그림에 묻는다고 안된다고 하셨어.그래서 나는 노끈하고, 양털하고, 단추로 고양이를 만들었어.발톱은 쌀로 만들었지.난 Mr. Cat이라고 불렀어.내가 슬플 때, 난 그것을 쓰다듬었어.사람들은 그걸 콜라주로 봤지만 나에겐 Mr. Cat이었어.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 로익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부분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장면으로 꼽아보았다.Ⅱ. 안젤리끄와 로익, ‘소통의 벽’을 보여주다안젤리끄에게 로익은 ‘서로 사랑하는 대상’이었지만 로익에게는 사랑하는 부인이 있으며, 안젤리끄는 지독한 스토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오해는 ‘소통의 벽’에 가로 막혀 서로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안젤리끄는 나름대로 로익에게 장미도 보내고 그림도 보내는 등 사랑을 표현하지만, 로익은 그것을 보낸 사람을 당연히 자신의 아내로 여긴다. 또한 안젤리끄가 자살을 기도했을 때 로익이 안젤리끄에게 인공호흡을 해서 그녀를 살려낸 사건 역시 로익에게는 단지 의사의 본분에 맞게 환자를 살린 것이지만, 안젤리끄에게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로익이 자신을 살린 것으로 각인 된다. 만약 안젤리끄가 로익에게 장미꽃과 그림을 보내면서 이것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혔다면? 또한 로익이 안젤리끄에게 인공호흡을 하여 그녀를 살린 이후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밝혔다면? 영화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둘은 ‘소통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의사가 서로에게 전달된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르게 상황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이는 안젤리끄가 선인장을 돌보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안젤리끄는 집주인이 6년전 결혼기념일에 받았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될 때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선인장을 로익이라고 여기며 돌본다.) 하지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유리병’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선인장은 안젤리끄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로익이면서 동시에 ‘유리병’이라는 ‘소통의 벽’ 때문에 안젤리끄와는 ‘소통의 불일치’를 보인다. ‘유리병 속’의 선인장은 ‘집주인이 아끼는’ 선인장에 불과 하지만 ‘유리병 밖’에서 안젤리끄가 바라보는 선인장은 ‘안젤리끄’의 선인장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인 ‘로익’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로익이 ‘자신과의 사랑을 저버리고 아내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안젤리끄는 그 ‘선인장’을 유리병째 집어던져 죽여 버리고 만다.Ⅲ. 안젤리끄,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다일부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듯이 영화 속에서 안젤리끄는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든 리빙스턴은 그의 책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에서 사랑과 집착의 경계에 대해 “로맨틱한 사랑과 집착은 그 경계선이 희미해서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집착은 혼자만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집착은 혼란을 일으키는 거짓 믿음인 망상과 가까운 사촌지간입니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안젤리끄는 자기 혼자만의 감정을 사랑으로 혼동하고 로익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위협적 존재로 생각되는 사람, 즉 로익의 부인에게 보복행위를 하는 등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행동을 한다. 게다가 로익을 스토킹하기까지 한다. 안젤리끄가 자신의 감정을 사랑으로 혼동하고 로익에게 집착하는 모습은 앞서 두 번째로 중요한 시퀀스로 들었던 장면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콜라주에 불과하지만 안젤리끄에게는 Mr. Cat이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젤리끄가 로익을 스토킹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안젤리끄에게 그 모든 행위는 로익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환상과 환각, 망상 속에서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버린 안젤리끄에게는 더 이상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만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통의 벽’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안젤리끄 혼자만의 사랑과 집착은 그렇기에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문/어학| 2010.12.30| 4페이지| 1,000원| 조회(396)
    미리보기
  • 잡지 『신여성』에 나타난 `새로운 여성관`
    잡지 『신여성』에 나타난 '새로운 여성관'- '서구 문물 이입사'와 관련하여과목 : 비교문학론담당 교수님 : 이진아 교수님제출일 : 2008. 11. 28Ⅰ. 서론1. 들어가는 말『신여성』은 천도교 계열의 잡지사였던 개벽사에서 1923년 9월 말경부터 발간한 여성 잡지이다. 『신여성』은 1921년에 폐간된 『신여자』의 뒤를 이어 발행된 잡지로, 『신여자』의 발행자와 필자가 대부분 여성인데 반해, 『신여성』의 발행자는 박달성, 방정환이었으며 필진은 대부분 남성이었다.원래 『신여성』은 월간지를 표방한 잡지였으나, 창간 이후 매월 꾸준하게 발행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제때 발간하지 못함을 사과하는 글이 편집후기에 자주 실렸는데,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한편 1926년 8월, 식민 당국의 탄압으로 『개벽』이 폐간을 당하자, 개벽사는 '취미 잡지'라는 명목 하에 정치성이 덜한 잡지로 『별건곤』을 창간한다. 『별건곤』과 『신여성』의 유사점 때문인지 『신여성』은 1926년 10월에 정간되고, 대신 『별건곤』에 '신여성의 란'을 대폭 보완한다는 공지를 내보내어 기존의 『신여성』 독자들에게 대신 『별건곤』을 구독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다 1931년 『신여성』이 속간되는데, 20년대의 『신여성』과는 사뭇 다른, 상업성이 짙어진 잡지로 재탄생된다. 성격이 달라져서인지 30년대의 『신여성』은 별 어려움이 없이 거의 매월 발행되었고, 1934년 8월에 폐간된다. 20년대(23년 9월~26년 10월) 모두 31호, 30년대(31년 1월~34년 8월) 약 42호, 도합 73권 내외가 발행되었다.)1920년대 초기의 『신여성』에는 논평 ? 논설류의 꼭지가 많았으며, 그런 유의 기사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여성으로 거듭나야 함을 부르짖는 논조의 글로 대개는 책의 첫머리에 놓였다. 또는 당시 시빗거리였던 주제를 설정해서 여러 지도층 인사에게 의견을 묻는 꼭지도 매호(號) 중요하게 다뤄졌다. 여학생의 풍기 문란이나 첩 문제, 수학여행 시비, 단발 시비 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구 한편으로 독자들의 참여도 적극 독려하여 1926년 8월에 '독자문예'라는 이름으로 독자문예란이 처음 등장하고 1932년 3월의 '독자문단'에는 독자의 수필이 8편이나 실릴 정도로 확대되었다.)하지만 『신여성』이 여성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필자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은 20% 안팎이었고, 회가 거듭될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때문에 『신여성』은 부분적으로는 『신여자』의 뒤를 이어 당대 신여성)의 의견을 대변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여성'을 주변화하고 타자화 하는 역할을 하였다.)2. 연구 과제 및 연구 방법『신여성』지는 주로 '여학생'을 겨냥하여 기획된 잡지로, 1923년 창간 때부터 1926년 10월호까지, 그리고 1931년 복간된 이후 1934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호(號) 빠짐없이 여학생 관련 기사들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도 여성 교육과 관련된 논설에서 여성 교육 현실에 대한 진단까지, 또한 여학생의 규범에 관란 담론에서 여학생의 진로에 관한 제안까지, 나아가 각 학교의 방문기에서 학교 교사들에 대한 스케치까지 광범위하다.본고에서는 『신여성』지에 나타난 여성관 중 『신여성』지에 나타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관'에 대해 다룰 것이다. '새로운 여성관' 중 특히 서구 문물 이입사와 관련된 기사를 조사하였으며, 그 중 '애국자로서의 여성관'과 '여성 운동가로서의 여성관'), '타국의 여성들과의 비교를 통해 바라본 여성관',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성으로서의 여성관' 등을 조사하였다.연구를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신여성』지를 분석하여 서구 문물에 대한 이입사를 조사한 후, 그 중 '새로운 여성관'과 관련된 자료들만 따로 뽑아냈다. 『신여성』지를 분석한 표는 본론에서 첨부하도록 하겠다.Ⅱ. 본론1. 애국자로서의 여성관1920년대 말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자 일제는 체제 내의 모순을 조선에 집중 전가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노동계급은 이중 삼중의 수탈을 받게 되었고, 일제에 저항하는 각종 사상운동과 노동자 ? 농민들의 계급투쟁이 한층 고양되었다. 여류혁명가이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선상의 투사였다. 반혁명폭도의 손에 붙들려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독일 무산계급 운동이 낳은 최고의 맑스 주의자로서 투사인 동시에 시적 정서가 풍부하였다. (『신여성』, 「세계여류운동자?로? 」, 1931, 11.)? 사로지니 나이두는 여류시인으로 유명함. 비록 시인이지만 투쟁적이었다. 간디씨와 어깨를 맞이하는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배울 점은 시인이란 이름으로 영국에 그의 이름을 날리었으나 호화로운 문학생활을 떠나 인도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다. (『신여성』, 「세계여류운동자?로? 」, 1931, 11.)? 전소란이 살던 시대에 중국은 혁명진영에 수많은 부인 투사들이 갑부에 가입하여서 생명을 내걸고 용감히 활약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전소란은 16세의 소녀로서 공산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사형을 받았다. 다행이 보석되었다. 전소란은 혁명운동의 수단으로 결혼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전쟁에 훌륭히 성공하고 남북교통을 차단할 수 있었다. 후에 사형을 당했다.(『신여성』, 「소녀혁명가전소란 -중국-」, 1931, 11.)? 클라라 쳇트킨은 프로레타리아 운동가이다. 독일에서 기회주의자 사회주의자와 맹렬한 대립투쟁을 하면서 폴스비키화를 위하여 무한한 노력과 희생을 하였다. 무산계급운동에 예리한 비판과 제한을 한 여성이다. 일생을 혁명가로 지냈다. (『신여성』, 「세계여류운동자푸로?」, 1931, 12.)? 알렉산더 ? 코론 타이부인은 정객으로 계급운동의 투사로서 뜨는 문인이다. 세계의 첨단이란 칭호를 받는 것이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사회민주당에 들어가서 사회운동선상에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처녀혁명가였는데 당시 전적으로 모든 활동을 계급투쟁에 바쳤다. 부인노동종합운동의 역할을 망명지에서 하고 있다. 고국의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비상한 활동을 했다. 그는 문단에 있어서도 훌륭한 문사이다. (『신여성』, 「세계여류운동자푸로?」, 1931, 12.)? 추근여사(女士)는 청조가 어지러울 당시에 남의 아내가 의 사상에 대해 알아봄.문제의부인『때』의여성 -투사쿠라라,체토킹여사1925년 10월호 p.45혁명 운동에 열렬히 참여하는 여성 운동가 소개글.위인의연애관-에렌케이의 연애관-연애는 영육일치1926년 1월호 pp. 31~32엘렌 케이의 연애관 소개(여권운동의어머니인)「엘렌케이」여사에대하여박관생1926년 6월호 pp.36~37엘렌 케이의 생애와 사상 소개.[표 ]『신여성』지는 1926년 1월호에서 「위인의 연애관」이라는 기사를 통해 엘렌 케이의 '자유연애론'을 전달하고 있다. 이 기사는 엘렌 케이의 '자유연애론'을 통해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고 양성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회가 개조될 수 있다고 하였다.이외에도 길만부인과 타벨부인, 쿠라라, 체토킹여사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엘렌 케이는 '자유연애의 사상'을 제창하는 사상가로, 길만부인 ? 타벨부인 ? 쿠라라 ? 체토킹 여사 등은 '여성 해방 운동'을 제창한 사상가로 분류할 수 있다.[표 2]에 나온 기사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여성』지는 여성 운동가들의 기사를 통해 자유연애와 남녀평등을 통한 정치적 ? 사회적인 '여성 해방 운동'을 중요성을 알리고, 조선의 여성들이 해방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타국의 여성들과의 비교를 통해 바라본 여성관『신여성』지는 조선의 여성들과 타국의 여성들, 특히 타국 여학생들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 여성이 나아가야 할 바를 알리는 기사들이 많이 실렸었다.기사명작가(필자)번역자출처비고듯든 말과 다른 朝鮮新女性김성1923년 11월호 pp.29~32타국 여성들과 조선 여성들을 비교 /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 갇혀 사는 조선 여성들의 생활상 비판.부자ㅅ집?님도苦學을하는佛蘭西의女學生生活일기자1924년 4월호 pp.21~25프랑스 여학생들의 생활(취미생활/여가/결혼 등)을 상세하게 소개. 조선의 여학생과 프랑스 여학생 비교.淸雅하기?이업는瑞西의女學生들cwp1924년 6월호 pp.11~16서서의 여학생들의 생활상 소개 - 일을 잘함(각자 직업을 갖고 있음), 일요일 한다. 이런 점은 『신여성』지의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4.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성으로서의 여성관『신여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꼽으라고 한다면 '자립'이라는 단어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애국자로서의 여성관'에서 보았던 일본으로부터의 자립, '여성 운동가로서의 여성관'에서 보았던 남성으로부터의 자립 등 『신여성』에는 자립과 관련된 기사들이 많이 실려 있다.당시에는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시 조선 사회에 꽤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기사들 또한 다수(多數) 실려 있다.기사명작가(필자)번역자출처비고부즈런한자여당신의일홈은「조선녀자」외다김기전1924년 6월호 pp.2~5부지런히 일하는 조선여자야말로 강한 자이다.淸雅하기?이업는瑞西의女學生들cwp1924년 6월호 pp.11~16조선 여학생들은 남에게 돈 받고 일 해주는 것을 천하고 나쁜 일로 알고 있지만 스위스의 여학생들은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관념을 갖고 누구나 스스로 돈을 번다.女子解放과 우리의必然的要求 길만夫人과타-벨女史의意見上建-解放을부르기보다먼저생각할問題-경성 이경숙1925년 1월호 pp.75~81조선 여성의 해방을 "정신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으로 구분하고 후자가 훨씬 실제적이며 긴요한 사안이라고 주장.처녀독본 (弟2科 結婚)주요한1931년 4월호 pp.28~30여성의 경제적 해방이 선행되어야만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표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성으로서의 여성관'과 관련하여『신여성』에는 발간 초기 즉 1923년부터 1924년에 이르는 시기에 "기생충", "매음녀", "거지색기"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를 동원하여 여성의 직업 생활을 설득한 글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1925년을 고비로 해서는 글의 논조가 바뀌기 시작하는데 소위 사회주의적 분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글들은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여성을 탓하기에 앞서 여성으로 하여금 '기생충'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 ? 역사적 조건-
    인문/어학| 2010.12.30| 12페이지| 2,000원| 조회(174)
    미리보기
  • 이규보 연구
    Ⅰ. 서론이규보(李奎報)는 국문학계에서 작가론(作家論), 작품론(作品論) 등을 통해 다양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본고에서는 이규보의 문학관(文學觀)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그의 문학적 생애(文學的 生涯)에 대해 개관(槪觀)해 본 후, 그의 문학 사상인 신의론(新意論)과 민족자주의식(民族自主意識)을 살펴보고, 이인로(李仁老) ? 김부식(金富軾)의 사상과 비교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Ⅱ-1. 이규보의 문학적 생애1170년(의종 24) 보현원에서의 난을 계기로 시작하여 1270년(원종 11)까지 꼭 100년간 계속된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시대. 문신들과의 비교와 차별을 견디지 못했던 무신들이 난을 통해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서면서 이 시기에 많은 문신들은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무신 집권기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문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던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규보(李奎報)였다.1168년(고려 의종 22) 12월 16일에 이윤수의 아들, 인저(仁底)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이규보는 11세 때에 이미 글쓰기에 능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으며 14세 때, 당시 사학(私學) 12공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최충의 성명재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세부터 20세까지 계속해서 그는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가 과거문을 익히기 보다는 풍월을 즐기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22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였고, 이름을 이규보로 개명하면서 드디어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이규보가 24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슬픔과 실망을 안고 천마산으로 입산하여 스스로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하였다. 이때 그는 등의 많은 시와 과 을 지어, 자신의 호처럼 거리낌 없이 물외에 자적하고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 후 그는 31세에 당시 무신정권의 실세였던 최충헌의 도움으로 전주 사록겸서기(司錄兼書記)로 순탄한 벼슬길을 (詩論的) 입장과 작품상의 경향에서 연유하지만, 용사라는 용어가 시평어(詩評語)로써 널리 활용된 것은 최자(崔滋)의 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최자는 『보한집(補閑集)』 卷中에서 이인로가 용사에 능했던 시인으로 평한 바 있다.學士 李仁老는 말마다 格이 높고 古事를 인용한 솜씨가 神과 같아서 옛 사람의 밭두둑을 밟기는 했지만, 鍊琢(연탁)의 공교로움은 청출어람의 재주를 보였다.)위의 자료에서 최자는 학사 이인로가 고사를 인용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 옛사람의 글귀를 밟기는 했어도 연탁의 공을 가한 솜씨가 옛사람의 수준을 능가할 정도로 매울 훌륭하다고 평하고 있다. 또한 최자는 『보한집(補閑集)』 卷下에서 시인은 빌려 쓰는 것, 곧 용사(用事)를 귀하게 여기나 빌려 쓰는 것도 공교롭지 못하면 뜻이 뒤집히고 말이 생소해진다)고 하면서, 고사의 인용이 정절(精切)하지 못하면 용사(用事) 자체가 군더더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의 시는 이인로의 精切(정절)한 用事(용사)를 보여준다.『竹醉日移竹』(죽취일에 대를 옮겨 심으면서))古今一丘? 예와 지금은 한 언덕의 담비요天地眞?廬 하늘과 땅은 진정 여관집이로다此君獨酩酊 차군(대[竹]) 홀로 취하여兀兀忘所如 정신 없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네江山雖有異 강산은 비록 변했지마는風景本無殊 풍경은 예와 다름없다不用更醒悟 다시 술에서 깨어날 필요없으니操戈便逐儒 창을 들고서 술 못 먹게 하는 도학자를 쫓으리라司馬嘗客遊 사마천도 일찍 먼 데 놀았고夫子亦旅寓 공자도 또한 나그네 되었었네新亭相對泣 신정에서 마주 대해 울었거니數子眞兒女 그들은 실로 아녀 같았네此君恥匏繫 차군 박처럼 매달려 있어 부끄러워하여所適天不阻 어디 가도 하늘이 막지 못하네何必登樓吟 구태어 누에 올라信美非吾土 실로 아름다우나 내 땅이 아니다고 읊조릴 것 없느니위의 시구 중 "古今一丘?"는 한(漢)나라 양운(揚?)의 “진(秦)나라가 충량(忠良)한 신하를 죽여서 멸망하더니, 예와 지금이 한 언덕에 사는 담비와 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옛날이나 현재나 어진 신하를 내고려가 망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自從大阿倒柄後"에서는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고사를, "中原鹿死何人手"에서는 진(秦)나라 조고(趙高)의 고사를 인용한 괴철(?徹)의 말을 인용하였다."태아(太阿)의 자루를 거꾸로 잡은"이라는 말에서 태아는 보검(寶劍)의 이름으로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상소(上疏)에, “태아를 거꾸로 쥐고서 칼자루를 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고 한 말을 용사한 것으로, 임금이 정권(政權)을 남에게 맡긴 데 비유한 말이다."중원의 사슴은 누구 손에 죽었던고"는 진(秦)나라 간신(姦臣) 조고(趙高)가 임금에게 사슴을 몰고 와서 말[馬]이라 속였는데, 그 뒤에 변사(辯士) 괴철(?徹)이, “진나라가 사슴을 놓쳤으매 여러 사람들이 쫓는데 발이 날랜 자가 먼저 얻는다.” 라고 하였다는 고사를 쓴 것이다. 이것은 조고(趙高)의 사슴에 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진나라가 나라를 잃은 데에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이인로는, 유향과 괴철의 고사를 인용하여 장차 고려 왕조의 운명이 위태로움을 드러내고 있다."江女空傳玉樹花"와 "春風幾拂金堤柳"에서는 진(陳)나라 후주(後主)와 수양제(隋煬帝)의 고사가 인용되고 있다."강가의 여자들은 속절없이 옥수화(玉樹花)를 전하는데"라는 말은 당나라 두목지(杜牧之)의 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진(陳)나라 후주(後主)의 일을 근거 삼아 표현한 시구이다. 진나라가 망할 때에 후주가 밤낮으로 술과 여색에 미혹하여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음란한 곡조를 불렀다 한다. 이런 옛일을 당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가 그의 고도(古都)를 지나다가,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恨)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정화를 부른다[尙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라는 시를 지으며 인용하였고, 또 이인로도 『반월성』에서 고려의 망함을 그에 의탁하여 표현하고 있다."봄바람은 몇 번이나 금제의 버들을 떨쳤던가"는 수양제의 고사를 인용한 구절이다. 수양제(隋煬帝)가 변하(?河)에 행궁(行宮)을 짓고 강 언덕에 버들을 많이 심고서 음란하게리 웅장하고 깊더라도 이미 쓴 사람이 있으면 평범해지는 법이고 아무리 천근(淺近 - 지식이나 생각 따위가 깊지 아니하고 얕다)해도 새로 개척한 것이면 깨우칠 만하다.」)고 말하여 모두 이규보의 시가 고인을 도습하지 않고 신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그런데 이규보는 자신이 신의에 의한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을 고인의 글에 익숙지 못하여 그 체(體)를 본받지 못하고 부득이 신의를 내세우게 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 의문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그 중에 이른바 ‘어의(語意)를 창조했다’는 것은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옛사람과 다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세가 부득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옛사람의 체를 본뜨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의 시를 습독(習讀)한 후에 본받아 따라가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표절(剽竊)하기도 오히려 어려운 것입니다. 비유컨대, 도둑이 먼저 부잣집을 엿보아 그 문호(門戶)와 담장이 익숙해진 뒤에야, 그 집 장에 슬쩍 들어가 남의 물건을 훔쳐 자기 것을 만들면서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머니를 더듬고 상자를 들치기 전에 반드시 잡히는 것이니, 재물을 훔치게 되겠습니까. 나는 젊어서부터 철없이 방랑하며 글 읽음이 그다지 정밀하지 못하여, 비록 육경(六經)ㆍ자사(子史) 같은 글도 섭렵(涉獵)만 하였을 뿐 근원을 궁구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제가(諸家)의 장구(章句)를 다룬 글이겠습니까. 이미 그 글에 익숙하지 못하면서 그 체(體)를 본뜨고 그 어구를 표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부득이 새 조어(造語)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규보가 고인의 글에 익숙지 못해 그를 모방할 수 없으므로 신의를 창조하였는가하는 것이다.먼저 그가 정말 고인의 글에 익숙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은 다음 글로서 쉽게 풀릴 수 있다.제가 아홉 살 때부터 비로소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시(詩)ㆍ서(書) 같은 육화를 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도둑질에 불과한 것이며 참된 글이 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이규보는 당시의 시인들이 시를 짓는데 있어 고인들의 글과 생각에 구속되어 용사(用事)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시인 자신의 진실과 독창성, 참신성을 찾을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시를 지을 때 사어(辭語)와 성률(聲律)에 치중하였고 그 내용의 참신성이나 진부성을 따지는데 소홀하였기 때문에 이규보는 시의 존재 가치를 크게 상실했던 반 문학적 현상을 타파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발전적인 취지에서 나온 것이 시적대상에 대한 관조와 신어, 신의(新意)를 중시하는 신의론인 셈이다.⑵ 민족자주의식(民族自主意識)가. 창작동기이규보가 창작한 일련의 歷史時 중에서 동명왕의 일대기를 소재로 하여 1193년(26세) 4월에 천마산을 오갈 때에 지어진 은 신화적 요소를 재구성한 영웅서사시이다. 우리는 이규보의 서사시 을 통해 그의 역사관을 알 수 있는데, 우선 그가 을 쓰게 된 동기를 살펴 보고자한다. 창작동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의 방향을 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12세기 당시에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외세의 압력에 대한 저항과 특히,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대한 사대적인 외교에 반대하며 민족적 주체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신라의 부흥을 외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임을 강조하는 국가의식의 표출로 본 것이다.) 셋째는 첫째 견해에서 심화된 것으로, 이규보가 반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요나라와 금나라에 대한 사대적인 외교만이 아니고, 그보다 더욱 광범위한 현상 즉 중국문화에 대한 추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라 이래의 구 귀족이 중국문화를 추종하고 주체성이나 자주성을 저버린 태도를 비판하고,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수립하기 위하여 창작된 것으로 해석)한 경우이다. 여기서는 조동일 저자의 셋째 견해를 수용하여, 민족자주의식(民族自主意識)이 나타난 부을 천하
    인문/어학| 2010.12.30| 13페이지| 2,000원| 조회(40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2
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06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