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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화
    을화는 1936년 5월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단편 무녀도를 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을화를 쓰게 된 동기는 샤머니즘 세계를 더욱 자세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일과, 아울러 샤머니즘에서의 죽음과 삶에 관한 문제점을 한국군학, 나아가서는 세계문학에 제의해 보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무녀 을화의 집과 말 못하는 그녀의 딸 월희의 소개로 소설은 시작된다. 영검으로 알려진 을화는 보수를 중요시 하지 않는 무당으로 소박하게 살아간다. 을화에게는 월희와 성이 다른 영술이라는 아들이 있다. 영술은 10여년전 기림사라는 절에 불도를 배우러 갔다 예수교인이 되어 돌아온다.옥선(을화의 옛 이름)은 16세 가난하고 토속적인 삶속에서 이웃집 총각 성출과 사랑을 맺고, 처녀의 몸으로 영술을 임신하여 마을에서 쫓겨난다. 옥선이 19세 되는 해 후실 자리에 들어가게 되지만 2년도 되지 않은 해에 남편이 죽게 된다. 그러다가 영술이 병이 나서 빡지무당을 찾게 되었다. 영술은 나았지만 옥선은 무병을 앓다가 신이 지펴 무당이 되었다. 이때 빡지 무당으로 부터 을화라는 이름을 얻고 큰무당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 후 을화는 빡지 무당의 작은 박수인 방돌과의 정을 통하여 딸 월희를 낳게 된다. 방돌은 영술을 친자식처럼 가르치고 돌보았다. 하지만 영술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고 무당이라는 신분으로 떳떳하게 배우지 못하는 영술을 기림사라는 절에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월희는 음식을 못 먹고 말을 잘 못하게 되었다. 성 밖으로 이사를 가게 된 후, 두 부부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을화가 술집에서 남자들과 정을 통하고 이에 방돌을 을화를 떠나게 된다.을화의 아들 영술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기가 누리게 된 행복을 같이 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찾아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심정이 예수교와 먼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신타파를 굳게 다짐한 영술은 교회를 찾고 거기서 박장로를 만나게 된다.박건식(박장로)은 양반가문의 기독교 장로로, 독립운동에도 가담하고 계몽운동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박건식의 큰아들이 병을 얻어 태주 할미라는 무당을 찾게 된다. 태주할미는 자신의 생존방법으로 명도점을 하기 위해 어린 생명을 희생시킨 것이 알려지면서 마을에서 쫓겨난다. 이를 알게 된 박건식은 미신타파에 예수교가 빠르다 해서 개종을 하게 된다. 태주할미 이야기는 영술에게 박건식의 내력과 지금 그의 어머니인 을화가 살고 있는 귀신집 내력을 한 번 더 인식 시켜 준다. 영술은 당장 미신타파는 어려워도 박건식으로 인해 든든함을 느낀다.영술은 월희를 교회에 데려가 보려 하는데 을화는 이를 반대한다. 을화는 영술을 사랑하나, 예수교를 죽도록 싫어했다. 영술도 무당에 대해 싫어했고 미신타파를 통해 을화와 월희를 구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로 하여금 월희를 무당귀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영술의 목적이었다. 영술은 월희의 말문이 틔이게 된 것도 예수교에 대한 기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동생을 교회로 이끌어 내어 귀신을 몰아내고 말문을 열어주면 어머니에게도 회개할 기회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에 월희가 굿도 보고 예수교 두 곳을 가보고 좋은 쪽을 결정내리기로 한다.월희와 함께 을화의 오구굿을 보게 된 영술은 그동안 미신으로 만 느껴진 굿에 대해 다르게 느끼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저승으로 곧장 건너가지 못해 귀신이 된 경우 그 귀신에 대한 굿을 통해 저승으로 안전히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무당인 것을 안게 되었다. 군중사이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이 필요하다고 영술을 느끼게 된다. 이승과 저승사이의 영역에서 죽은 자가 생전에 풀지 못한 원한이나 욕구를 풀어주고 모든 죄업을 씻어주면서 천도하는 의식이라는 점에서 공감을 가져온다. 오구굿을 하는 중에 정부잣집 아들이 월희의 미모를 보고 첩으로 들이려 하자 을화는 반가워하지만 영술은 이에 반대한다.영술을 따라 교회에 나간 월희에 대한 주위의 관심으로 영술의 과거사가 다 들어나게 되었다. 영술은 자신의 아버지가 방돌이 아니라는 것과 자신의 어머니가 처녀의 몸으로 자신을 가져 자신의 생부인 성출과 함께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술이 다니는 교회의 신자로 영술 생부의 어머니와 부인이 다니고 있었고, 그의 생부인 성출은 자식이 없어 대가 끊길 위기에 있었다. 이에 영술을 입적시켜 가문을 이어가고 싶어 했다. 을화는 아들이 생부를 찾은 사실을 알게 되고, 아들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강하게 분개한다. 영술을 자신의 생부 집에 들어가 자신의 형편대로 살면서 어머니와 동생을 구원하기로 한다. 이성출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는 영술을 찾은 것에 대해 더없이 기뻐한다.몇 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영술은 월희가 굿에 쓰이는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자 눈물을 흘린다. 정 부잣집 아들의 후실로 들여보내는 것도 다시 강하게 반대하면서 월희의 손을 잡고 기도한다. 기도 중에 을화가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들이 닥친다. 을화와 월희의 생활과 사고는 선교사의 손에서 자라며 예수교를 믿고 자라온 영술의 사고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을화는 영술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신들을 모독하기 일쑤였고,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신앙이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다고 여겼다.을화와 강력한 대립 후 영술은 집을 나와 월희의 생부인 방돌을 찾게 된다. 방돌은 을화가 자신의 세계가 아닌 상태에서 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살기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 했다. 방황하던 영술은 어머니에 대한 사과의 마음과 월희에 대한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집으로 돌아간 영술은 예수교를 핍박하고 제거하기 위해 어지럽게 차려진 굿을 보게된다. 영술이 집을 나간 이후로 을화는 금식하고 굿만 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해 영술은 나흘간 집을 나섰던 일에 대해 사과의 마음을 가진다.
    독후감/창작| 2009.11.02| 3페이지| 3,000원| 조회(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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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은 아름다워
    Ⅰ. 들어가며Ⅱ. 본론1. 줄거리2. 인생은 아름다워 속 아이러니3. 귀도의 힘Ⅲ. 나가며Ⅰ. 들어가며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 영화 제목을 처음 보고 나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내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며 살고 있다보다는 매일 비슷한 일상 속에서 단지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을 뿐이다.“인생은 아름다워”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30년대 말을 배경으로 나치의 유태 말살 정책이라는 현실의 비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 = 나치의 유태 말살 정책 영화제목과 영화내용으로나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현실에서도 아름다운 인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데 1930년 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발견할 수 있던 것일까? 제목은 나타나는 단어의 뜻과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왜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상황을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을 보았을까? '비참한 현실을 너무 왜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대개의 유태인 학살을 그린 영화들이 무거운 반면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느낌이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이야기를 코믹하면서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Ⅱ. 본론1. 줄거리1938년 파시즘)과 극우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이탈리아. 시골청년 “귀도(Guido Orefice: 로베르토 베니니 분)”는 친구함께 도시로 상경한다. 그러던 중 운명처럼 초등학교 교사인 “도라(Dora: 니콜렛타 브라스키 분)”를 만난다. 도라에게 첫눈에 반한 귀도는 신분을 뛰어넘는 열렬한 구애 끝에 운명이라고 생각한 귀도는 그녀와 함께 마을을 도망친다. 귀도의 순수하고 맑은 인생관과 꾸밈없는 유머에 이끌렸던 도라는 그와 결혼하여 아들 “조슈아”를 얻는다.죠수아를 낳고 책방을 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어느 날, 유대인인 귀도는 아들 죠슈아와 함께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따라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귀도와 죠수아를 사랑하는 도라는 자신이 유태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원하여 자신도 뒤를 따른다.귀도는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어린 조슈아에게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실은 하나의 신나는 놀이이자 게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귀도는 자신들이 특별히 선발된 사람이라며 1,000점을 제일 먼저 따는 사람이 1등상으로 진짜 탱크를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탱크를 좋아했던 조슈아는 귀가 솔깃하여 귀도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셀 수도 없이 넘기며 끝까지 살아남는다. 마침내 독일이 패망한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귀도는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 시키고 아내 역시 구하려 하지만 독일에게 들켜 목숨을 잃는다. 독일군이 수용소에서 물러가고 아버지의 죽음을 모를 조슈아는 연합군의 탱크를 보고 아버지가 말한 1000점의 선물로 생각하고 기뻐한다.연합군 탱크를 타고 가던 죠수아가 수용소에서 나와 터벅터벅 걷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모자 상봉이 이루어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2. “인생은 아름다워”속 아이러니아무리 영화를 다시 봐도 주인공 귀도에게나 도라에게나 아들 조슈아에게나 인생은 아름답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였을까?영화 속에서 아이러니는 극명하게 보여준 상황은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상점 앞으로 지날 때 조슈아가 아버지인 귀도에게 왜 저런 게 붙어 있느냐고 묻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그 가게 주인은 유태인과 개를 싫어한단다."라며 다른 가게에서는 중국인과 캉가루를, 또 다른 가게에서는 말과 고트족은 출입금지라고 붙여놓았다고 거짓을 가르쳐준다.??아버지는 5살 난 아들에게 거짓말로 삶을 속이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아버지가 자식에게 거짓을 가르쳐준다고 슬퍼하거나 그 아버지를 지탄하지 않는다. 아들은 어른이 아닌 불과 다섯 살의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강제수용소로 옮겨진 뒤에도 아버지 귀도는 아들에게 1,000점을 얻으면 탱크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임이라고 속인다.3. 귀도의 힘영화 속 귀도는 위대한 아버지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녀의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미극적인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희망 안에서 사랑이 피워난다. 독일군이게 잡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귀도는 그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희망과 웃음 준다. 사랑하는 아들 조슈아를 위해 죽어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귀도의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생각된다.귀도는 어떠한 어려운 역경이 와도 절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아마도 이렇게 긍정적인 귀도의 생각과 행동에서 인생은 아름답게 느껴진 듯하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가 암살되기 직전에 남긴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말에서 제목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예체능| 2009.11.02| 4페이지| 3,000원| 조회(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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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지니스 안 깨진 유리창의 법칙
    독후감비즈니스 안 Ⅰ. 들어가며Ⅱ. 본론1.깨진 유리창의 힘2.깨진 유리창의 사례3.깨진 유리창의 수리Ⅲ. 나가며Ⅰ. 들어가며사람들의 소비에는 과거 자신들의 경험과 기업의 이미지(서비스, 물건의 품질)들이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고객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선 기업의 자신들의 이미지 관리뿐만 아니라 과거 고객들이 나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이에 대한 복구도 필요하다.얼마 전, 매스컴에서는 농심 “새우깡”(일명 생쥐깡)에 대한 보도가 소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농심이라는 기업이 판매하는 식품에서 생쥐머리가 발견된 것이다.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남녀노소가 즐겨먹는 과자에서 생쥐머리가 나왔다는 것에 대한 소비자들은 크게 실망하였고 이를 숨기려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분노하였다. 생쥐깡에 대한 보도가 나간 후, 그 전에도 농심의 식료품 안에서 이물질이 발견 되었으며 농심에서는 이를 숨기려고만 했으며 전반적인 복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주의를 가지지 않았고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내버려둔 농심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깨진 유리창은 범죄학자인 제임스 Q 월슨과 조지 L 켈링에 의해 깨진 유리창 이론으로 발표 되었다. 깨진 유리창 이론 (Broken Window Theory)이란 낙서, 유리창 파손 등 경미한 범죄를 방치하면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범죄 심리학의 이론 중 하나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형사행정학뿐 아니라 경영학 분야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고객이 겪은 한 번의 불쾌한 경험, 한 명의 불친절한 직원, 정리되지 않은 상품, 말 뿐인 약속 등 기업의 사소한 실수가 결국은 기업의 앞날을 뒤흔든다는 법칙이다. 사소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면 이는 비즈니스를 망치는 일이고 회사 존립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친다.오늘날 기업들은 미래의 경영 전략 신제품 출시 등에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비용을 투자 하면서도 현재 자신들의 기업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것, 즉 깨진 유리창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저자는 비즈니스나 조직에 있어 어떻게 그리고 왜 깨진 유리창이 발생하고, 또 이 깨진 유리창을 어떻게 수리해야 하며, 신속히 처리할 방법은 무엇인지 기업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비즈니스에 있어 깨진 유리창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깨진 유리창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깨진 유리창이 기업경영과 조직 관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저자가 제시한 사례를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겠다.Ⅱ. 본론1. 깨진 유리창의 힘매일 들른 단골 커피전문점에서 문득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을 보았다면? 처음 간 레스토랑 직원이 매우 불친절했다면? 첫 번째 경우, 커피전문점의 위생 상태를 의심했을 것이고 두 번 째 경우, 불친절한 직원으로 인해 다시는 그 레스토랑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비즈니스에서 고객의 첫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단 한 번의 실수, 사소한 문제의 경험으로 통해 고객은 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게 된다. 그동안 기업에 대해 긍정적 경험을 해왔어도 한 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고객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사소한 문제, 깨진 유리창은 미리 예방하고 올바르게 복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비즈니스 문제로 어느 한 사람이 호텔에 숙박하기로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Check-in부터 저녁식사까지 호텔의 모든 서비스가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다음날 모닝콜을 부탁하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부탁한 모닝콜은 서비스 되지 않았고 그 사람의 비즈니스는 물거품이 되었다.작은 실수 하나만으로 기업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부정적 인식으로 변하였다. 고객은 그동안의 서비스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함으로써 기업을 떠나게 될 것이다.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기업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으로 변한 것이다. 깨진 유리창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깨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유리창이 깨져 버렸다면 이에 대해 부인하거나 변명하지이에아야 한다. 기업이 고객에게 변명을 일삼는다면 유리창은 더 많이 금이 가게 될 것이다. 기업은 문제를 인정하고 문제와 부딪쳐서 극복해야 한다.깨진 유리창을 발견하고, 진단하고, 수리 계획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일은 깨진 유리창을 예방하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을 예방한다면, 깨끗하고 친근한 기업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2. 깨진 유리창의 사례① 코카콜라기업이미지에 있어서 브랜드 바꾸기는 큰 위험을 가져온다. 1980년대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브랜드 중 하나였던 코카콜라는 주력상품을 ‘뉴 코크’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코카콜라는 핵심고객들의 반응을 중시하지 않았고 고객들은 분노했고 등을 돌리게 되었다. 단지 작은 실수로 끝난 게 아니라 거대한 재앙을 가져왔다. 뉴 코크의 등장으로 코크 피플은 분노했고 펩시에게는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뉴 코크 계획은 코카콜라라는 대기업의 깨진 유리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코카콜라의 경우처럼 브랜드와 관련된 깨진 유리창은 체인점 한 곳이나 특정 제품과 관련된 깨진 유리창보다 기업을 빠르게 몰락시킨다. 몰락시키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기업 전체를 뒤흔드는 위험 요소가 된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바꿀 계획이 있다면 깨진 유리창이 생기지 않도록 특히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고객과의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결정해야 할 것이다.② VIPS우리 주위에 깨진 유리창은 없을까? 생각해보다가 외식업체에서 깨진 유리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외식업체로 아웃백(Out Back)과 빕스(VIPS)는 경쟁구도로 놓여있다. 하지만 얼마 전 빕스에서는 단 한명의 종업원의 실수로 기업이미지에 큰 피해를 입었다. 물을 서비스 해달라는 고객에게 세제를 서비스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빕스에서는 기존의 충성스러운 고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고객까지 잃게 되었다. 나 역시 매스컴 보도를 보고 난 후, 빕스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다. 경쟁구도에서 이러한 깨진 유리창은 기업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빕스는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기 위해 고객에게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거듭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신속한 조치를 취해도 고객은 부정적인 인식을 지우지 못할 수도 있다. 빕스에서는 먼저 깨진 유리창이 발생한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빕스에서 깨진 유리창은 직원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직원들이 강박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반복되는 실수를 용납해서 안 된다. 직원들이 항상 고객의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야 하며 이러한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경고나 징계를 확실히 해주어야 한다. 또한 필요하다면 직원교육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독후감/창작| 2009.11.02| 5페이지| 3,000원| 조회(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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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책사례연구 - 청계천 복원사업
    들어가며본론Ⅰ 청계천의 역사Ⅱ 청계천 복원사업의 배경Ⅲ 청계천 복원사업의 타당성Ⅳ 청계천 복원사업의 단계Ⅴ 청계천 복구공사과정Ⅵ 청계천 복구사업에 대한 성과마치며들 어 가 며청계천 복원 사업의 이명박 서울 시장의 공약이었다. 앞으로의 시대는 친환경적인 경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였기에 이명박 시장의 공약은 빌딩과 공해 숲 속에 사는 서울 시민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공약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현가능성에는 어려움을 나타냈었던 것이 사실이다.청계천은 경제적ㆍ도시학적인 측면 뿐 만 아니라 정치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초에 청계천 복원사업은 고가도로의 위험성이 문제였을 뿐 하천의 복원이라는 것은 큰 이슈가 아니었다. 단순히 고가를 철거하는 것만으로 정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청계천 복원이라는 문제로 확대가 된 것이다. 이명박 시장의 공약이었기도 했던 청계천 복원사업은 경제적인 문제 분 만아니라 청계천 주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성공여부를 확신 할 수가 없었다.과거 또는 현존의 정책이 있었다면 정책결정자들이 현실적으로 고려하는 정책대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다른 국가에서 먼저 행해진 정책이라면 공간과 문화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책의 결과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사업은 선례가 없었다. 청계천 주변 노후주택의 재개발, 청계천에 자신의 생계를 건 종합상가 사람들의 상권과 노점상의 생존권, 고가도로를 철거함에 따라 발생될 교통 혼잡과 복원후의 범람의 위험 등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 때문에 시민이나 공무원들 모두가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또 기존의 보수공사를 바꾸는 것이 이명박 시장의 과시 지향적인 모습이라는 비난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청계천에는 물이 흐르고 나무와 풀이 자라나는 아름다운 개천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 되었다. 비현실적인 선거 공약을 이루어 낸 것이다.청계천 복원 사업도 눈에 보이는 모습은 만족 할 만 하나 그 반대편에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공존하고 있다. 청계천 주변상인을 넓히고 양안에 석축을 쌓았으며 수로를 직선으로 하여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약 14개 지천이 청계천으로 합류되어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청계천을 중심으로 약 86개의 다리가 설치되었다. 청계천은 4대문 안 즉 도성내의 하수도로성의 기능뿐만 아니라 도성문화의 중심지와 생활터전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이후 일제시대에 오늘날의 명칭인 청계천으로 변경하였다. 청계천에 대한 복개는 1934년 일제에 의해 이른바 ‘대경성 계획’이라는 이름하에 구상된 이후 1940년말에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통교까지의 제한된 구간에 대한 복개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해방 이후 1958년부터 다시 복개가 진행되어 1978년 말에 청계천 복개가 완성되었다. 이와 함께 1967년 8월에 시작하여 1971년 8월에 청계고가도로가 완성되었다. 특히 청계고가도로는 도심에서 마장동까지 신호를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최초의 고가도로로 서울도심 교통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Ⅱ 청계천 복원사업의 배경청계천은 1990년대 들어서 고가도로의 안전성문제가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성수대교붕괴 등 수많은 안전 불감증 피해를 받아 온 서울시민으로서는 건설한지 30~40년이 지난 고가도로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을 가지게 되어 사회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2002년 8월부터 10개월간 1,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보수공사를 실시하기로 정책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장후보였던 이명박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복원문제가 정책의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Ⅲ 청계천 복원사업의 타당성(청계천 복원사업 홈페이지)1) 지속가능한 도시 패러다임으로의 변화최근 국제사회에서는 개발과 보전의 조화를 통한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보편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계천복원사업은 서울을 개발 위주의 도시, 차량 중심의 도시 이미지에서 사람 중심의 도시,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 이미지로서 21세기 새로운 도시 관리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려는 흐복원사업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인 광통교 등 역사유적을 복원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는 사업이다.5) 지역 간 균형 발전청계천 주변지역은 대부분 4ㆍ50년 이상 된 건물들이 밀집해 있어서 상주인구 감소는 물론 도시환경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강남권과 강북권의 불균형문제 해소는 서울시 균형발전의 과제이기도 하다.청계천복원으로 주변지역을 국제금융, 비즈니스 중심, 첨단정보와 고부가가치 사업지구로 재편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노후지역의 개발이 활성화되고 성장잠재력도 높아지면서 강북권이 활성화 되고, 그로 인해 서울시 균형발전은 물론 고부가가치 사업이 청계천 주변으로 자리 잡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Ⅳ 청계천 복원사업단계제 1단계는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선거기간까지제 2단계는 이명박 서울시장이 당선 이후부터 사업의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2003년 3월까지제 3단계는 기본계획이 수립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되는 2003년 7월1 단계청계천복원사업에 논의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다(박명현, 2004: 89). 본격적인 정책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9월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일명 청계천포럼)의 결성 및 일련의 활동과 함께, 2002년 서울시장선거에서의 쟁점화로 볼 수 있다.청계천포럼은 제1회 청계천 살리기 심포지움이 2000년 9월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학관에서 개최된 것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이어 2001년 4월에 제2차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이들 심포지움에서는 청계천 복원의 역사성, 물처리 방식, 환경영향 평가 그리고 교통영향분석, 경제성 평가, 주변지역 개발계획 및 비용 산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한편, 청계고가는 완공된 지 30년 가까이 되면서 이에 대한 안전과 보수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94년부터 1999년까지 1차로 남산1호 터널에서 청계4가까지 2.03km에 대한 상판, 교각 그리고 들보에 일련의 쟁점사항들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복원사업의 비용편익문제, 이 과정에서 교통문제 그리고 주변상가의 재개발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청계천의 복원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야당후보인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일단락되었다.2 단계서울시장에 당선된 이명박은 당선 후 첫 일성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즉각적으로 추진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어 서울시장 인수위원회에 청계천복원추진위원회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편, 인수위에 청계천포럼 회원들을 대거 참여시킴으로서 복원사업의 본격적인 정책추진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서울시는 신임시장이 취임 당일 2002년 7월 1일 ‘청계천복원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가 설치되고, 이어 7월 2일 ‘청계천복원지원단(이하 지원단)’이 구성된데 이어, 9월 18일에는 각계 전문가, 학계 그리고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이하 시민위)’가 구성되었다. 이로서 청계천복원사업은 이들 3개 조직을 중심으로 한 추진체계가 마련되었다.청계천 복원사업에 대해 당초 회의적이었던 주변 상인들은 추진체제가 구성되고, 사업이 본격화하려하면서 조직화를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청계천복원반대와 공사연기를 목표로 8월 12일 청계천상권수호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12월 서울시에 보낸 진정서에서 ‘청계천 주변상인들의 생존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계획’이라며 복원공사추진의 중단을 요구하였다.한편, 서울시는 2002년 2월 11일에 청계천복원사업 기본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이의 주요 내용으로는 우선 공사구간을 3단계로 구분하고, 사업시기를 2002년 7월 1일부터 2005년 12월까지 복원사업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와 함께, 교통대책으로 일방통행제, 가변차로제, 버스중앙차로제의 실시, 주차요금의 인상 등의 실시안을 발표하고, 상가대책으로 상가밀집지역에 대한 교통흐름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영업환경을 최대한 보장하고, 보도(3m) 외에 2.5m의 조업주차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계획안계천 복원사업의 연기를 주장하였다.이익집단의 반발에 대해 서울시의 대응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교통대책을 들 수 있다. 복원사업에 따른 청계고가와 복개도로의 철거로 인한 교통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로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것에 영향을 받는 대상은 크게 불특정 다수로서 시민과 대책위원회와 의류대책위원회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이들 도로의 철거로 인한 교통의 분산이 서울시내의 교통난의 가능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대책의 문제이고, 후자는 철거과정에서 이들 지역 내방객의 감소로 인한 피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먼저 시민과 관련한 교통대책으로는 자가용 이용의 억제와 대중교통체계 개선의 제시를 통해 정책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도심 및 청계천 주변지역의 불법 주정차 단속, 일반통행로의 확대, 중앙차로제의 확대, 승용차 자율5부제 등을 통해 승용차의 운행을 억제함으로써 교통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주변 상인들과 관련한 교통대책으로는 37개 청계천 버스노선의 변경, 청계천 주변 무료셔틀버스의 운행, 청계천 상가 고객 무료주차혜택을 부여함으로써 교통 불편으로 인한 내방객 감소를 방지하고자 하였다.둘째, 주변상인들의 영업권과 관련한 문제이다. 주변상인들은 장기간의 복원사업과 주변지역의 재개발과정에서 영업 손실 보상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기본적으로는 영업 손실에 대한 보상은 하여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한편, 대신 영업 불편 최소화, 재개발등을 통한 상권 활성화 그리고 새로운 이주 지원책의 마련 등을 통해 주변상인들의 정책불응을 관리하고자 하였다.셋째, 노점상과 관련한 문제이다. 노점상들은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우, 자신들의 영업장이 실질적으로 고사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기본적으로 노점상들에 대한 대응은 이들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청계천 복원공사가 노점상들에게 영업상의 큰 피해를 자져오지 않을 것이며, 또한 노점상들의 영업은 불법영업으다.
    사회과학| 2009.10.27| 8페이지| 3,000원| 조회(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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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불운아, 흥선대원군
    들어가며한국 근현대사에서 흥선 대원군(이하응)하면 대원군이 남긴 업적 보다는 근대화를 늦춰서 오게 된 문제점과 쇄국정치를 한 인물로써 비춰진다. 만약에 흥선 대원군이 서구의 문물을 일찍이 개방했더라면, 우리나라가 일본 보다 먼저 근대화를 앞당겼다면 그리고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도 다른 역사적인 미래가 쓰여 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일본보다도 훨씬 발전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강력한 근대의 신식 무기를 받아들였더라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 대신에 우리가 일본을 식민지화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대로 준비되지 않은 근대화로 백성들의 혼란이 가중되어 정국이 불안정해 졌을지도 모를 것이다.중ㆍ고등학교 국사를 배울 때에도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막은 인물은 흥선 대원군이라고만 배워왔다. 나 역시 흥선 대원군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막은 인물로써만 생각해왔고 근대화를 앞당기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게 생각해왔다.하지만, 역사는 시대에 따라 변화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그 시대에서는 근대화보다 더 우선시 될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기회를 통해 흥선 대원군의 조선시대의 상황과 흥선 대원군의 정책을 맞추어 가면서 그의 정책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가? 아님 옳지 못한 것이었는가? 를 다시 정립할 계기로 만들고 싶어 흥선 대원군이라는 인물을 선택하게 되었다.흥선 대원군의 생애1820년 출생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된 1841년에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하에서 불우한 처지를 보냈다.철종 때에는 안동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광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그에 대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난세의 뛰어난 정략가로 장차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소지하고 있었던 그는 왕궁내의 최고 어른으로 익종비였던 조대비와 연줄을 맺고 있었다.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친조카 승후군 조성하와 친교를 맺고, 그 자신이 조대비와의 인척관계를 내세워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장차 후계자 없이 돌아갈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그의 둘째아들 명복 (고종)을 지명하기로 묵계를 맺어두었다.1863년 12월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하고,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의 발의를 채납하여,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흥선군은 흥선 대원군으로 봉하여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다.조선말기의 국내 정세19세기 중엽 조선의 전통 사회는 커다란 변화와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안의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대항하여 민중세력이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 다시 안동김씨로 거듭되는 외척들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엉망이 된 국정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세도정치라는 수렁에서 조선의 정치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삼정은 문란하고 백성들은 착취와 궁핍에서 허덕이고 세도가와 양반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지지 않고 법과 백성위에 군림하여 호의호식만을 즐기고 있었다. 또,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이 밀려오고 있었다.고종의 즉위와 함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흥선 대원군은 정치적인 야심으로 고종을 즉위 시킨 후 수렴청정을 통해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당시 세도정치로 권력의 핵심이었던 안동김씨를 없애고 개혁을 꿈꾸던 대원군에게 외척을 철저하게 미뤄내고 싶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집안세력이나 가솔들이 가장 약한 집안에서 왕비를 간택하였고, 그 사람이 명성황후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도정치가에 의해 문란해진 인사에 대한 개혁이었다. 흥선 대원군은 세도 가문의 인물들을 몰아내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였다. 안동 김씨 한 가문이 모든 권력을 독식하던 분위기가 사라짐에 따라 다른 가문에서도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많은 인재가 등용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세도정치의 권력독점으로 인해 약해졌던 왕권이 회복 될 수 있었다.2) 경복궁 재건왕권이 회복되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경복궁의 증건 같은 개혁으로 왕실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겠지만 무리하게 추진된 개혁에는 문제가 당연시 하게 발생될 수 밖 에 없다. 일반 백성과 종친들에게서 원납전이라는 이름 하에 기부금을 받고, 부역에도 신중을 기하여 민원을 크게 사지 않으면서 공사를 진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차츰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큰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왕릉의 목재도 베어야 했고 점점 비용이 증대하면서 당백전이라는 이름 아래 돈을 훨씬 더 많이 걷어 들여야만 했다. 원납전의 증대와 부역의 증대로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열악해졌고 고난에 빠뜨렸다.현재 경복궁은 건축과 공예 미술 어느 한곳도 부족함 없이 웅장함을 자랑하고 뽐내고 있지만 당시 백성 뿐 만 아니라 왕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대상이 되면서 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추진한 것이 어떻게 보면 대원군이 몰락한 원인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된다.3) 서원정리대원군은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600여 개의 서원 가운데 47개만을 남기 채 철폐하였다. 붕당정치는 당시 당파싸움을 말하는 것으로 서원은 이 당파싸움의 기반이 되었다. 서원데 4교육을 받고 정치에 진출하여 자신의 당파를 만들었던 것이다.이러한 서원은 민중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조선 후기 민생을 피폐하게 하였다.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서원을 철폐하여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잘한 일로도 평가 할 수 있다. 또, 관학을 외면하고 사학을 선호하는 당시의 혁의 예인 학부제 역시 우려를 안고 인위적으로 행해짐으로써 문제를 발생시켰다. 학생들에게 조금 더 선택의 기회를 넓혀줄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행해진 학부제는 학과의 편중현상으로 인해 다른 학과의 존폐위기를 가져오는 결과를 만들기도 하였다. 몇 몇의 학교에서는 학부제에서 다시 학과제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인위적인 교육개혁으로 이러한 위험성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현재나 조선시대나 동일시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47개만의 서원을 남긴 채 모든 서원을 철폐한 것은 선비들의 불만을 샀었다. 그 이유는 전국에 자리 잡은 서원이 모두다 백성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는 서원이 아니었고 일부 악습서원 때문에 그렇지 않은 서원까지 피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악습서원만을 철폐하고 나머지는 재정비하는 조취를 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이렇게 시행했다면 선비들의 불만도 적게 살 수 있고 교육의 정신 또한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선비들의 불만으로 인해 정국의 불안과 혼란이 발생하는 부작용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4) 삼정 개혁흥선 대원군의 농민 봉기(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등)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세도정치시기 삼정)은 상당히 문란했다. 갓난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하고, 늙어 죽은 아버지에 대해서까지 군포를 징수하자 국민들의 반발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은 국가의 근본이자 농민생활의 근본이기에 이를 개혁하여 왕권강화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점에서 훌륭하게 평가될 만 하다. 흥선 대원군은 백성에게서 거두는 양을 줄이고 그 부족분을 양반들에게 거둠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흥선 대원군이 계급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것이 국민들의 생활을 다소 안정시킬 수 있었고 국고도 충실해 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5) 천주교 박해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통상 수속을 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약속을 거부해 버렸다. 흥선 대원군은 자존심에 다시 상처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신부들을 주이고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잇달아 제너럴셔먼호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일어나면서 서구열강들이 조선을 침략하자 그때부터 서구 열강에 대한 태도가 아주 배타적으로 변화했던 것이다.당시 천주교가 조선의 기본관념인 유교와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다는 것이 효를 부정하는 일이라 생각 했던 지배층들은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세상을 뒤바꾸고자 하는 무리들로 규탄하였다. 결국 순교자들은 형장의 이슬로 살아져 갔고 더 이상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는 수용 당시부터 민중의 글인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때문에 한문에 의한 지배층의 지식 독점화로부터 민중에 대한 지식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던 기회였는데 아쉬움이 남는다.6) 근대화흥선 대원군의 정치를 이야기함에 있어 근대화라는 빠질 수 없는 주요 초점 이다. 흥선 대원군 하면 쇄국정치로 인해 서구 문문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을 지체하였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근대화적인 발전을 늦추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흥선 대원군이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한 이후 이전 세도정치가에 의해 정치가 행해졌을 때 국민들의 상황에서 볼 때 에는 보다 좋아지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문란해진 사회를 과연 개화할 필요가 있었을 까?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당시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고 궁핍에 빠져있었는데 나라의 안위나 근대화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만약에 서구 열강이 아닌 세도 정치가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대에 서구 열강들이 개항을 요구 했더라면 과연 그들을 근대화를 앞장섰을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권력을 손에 잡으면 보.
    인문/어학| 2009.10.27| 6페이지| 3,000원| 조회(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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