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사의 북리뷰로 평소 궁금해 했던 일본 근대사에 관한 책을 찾다가 일본근대사를 통찰해 놓은 책으로 읽기에 좋을 것 같아 이 책을 선택했다. 읽으면서 여러 가지 일본 근대사에 관해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한자도 해석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여서 읽는데 편했다.책의 처음 부분은 일본사의 배경과 특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먼저 지리적인 요인과 풍토적 배경과 특질에 관해 지나가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일본의 섬이라는 요소는 선진 문물을 자신들이 스스로 소화할 여유를 갖게 해 줬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해 보호받아 문화보존의 여건에서 더 나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섬나라이기 때문에 폐쇄적인 속성이 나타나고, 동질성이 형성되지만 배타성으로 되기 쉽다고 한다. 불교사상도 일본에서 일본형으로 변질되어버리는 등 일본의 독특성을 강조하다가 외국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변질시킨 것이다. 인종과 사회문화적 특질에서는 우리와 다른 가족관을 들고 있다. 근친혼을 인정하는 점이나 혈연과 무관한 능력본위의 양자들이기를 예로 들고 있다. 정치적 특질에서는 일본은 신분이동이 불가능한 신분질서가 있었고, 이런 요인으로 인하여 과거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과거제도를 채택하지 않았다고 한다.고등학교 때 읽은 어떤 책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가 거의 다르게 된 것이 원나라의 침공을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의 차이라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보니 그것보다는 일본과 우리나라만의 특질적인 요소들에 의한 것이 더 크게 작용하여 각 나라만의 역사전개가 이루어 졌다고 생각된다.천황제의 기원도 섬나라라는 특성상 일찍부터 동질성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중국에 대해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려는 노력에서 나타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천황 칭호가 인정되지 않았고, 중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국내적으로 천황을 정점으로 한 ‘소천하관념’을 키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천황은 9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세속적 지배권한이 쇠미해지고, 막부정권 등장 후에는 막부의 견제와 감시 속에 실질적 지배와는 무관한 존재로 화했다. 천황은 종교적인 권위와 일본인으로서의 동질성을 위한 구심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천황제는 일본사에서 끊임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이 서양의 압력을 받으면서 국가 통합에 필요한 존재로 천황이 부각된다. 명치정권은 막부 지배를 부정하기 위해 천황의 통치의 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따라서 천황의 존재는 신격화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일본의 명치시대 이전 도쿠가와시대는 1600~1867년까지 계속 되었다. 도쿠가와에 앞선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도쿠가와에 앞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병농분리를 하였다. 전국적으로 무기 회수명령을 내리고, 사무라이들이 토지에 기반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성하정에 무사들을 모여 살게 하였다. 성하정은 다이묘의 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도시로서 군사행정의 중심지였다. 도쿠가와 역시 병농분리정책을 계승하여 기본적인 평화와 질서유지를 도모하였다. 무사들은 다이묘의 하급무사가 되기 때문에 행정관료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고, 다이묘들은 자기가 장악하고 있는 토지로 무사들을 먹여 살렸다. 일본의 봉건체제는 봉건분할체제이면서 동시에 중앙집권적인 막부가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시대를 이른바 막번체제라고 한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전국의 통일을 무너뜨리지 않게 했다. 일본이 섬나라이고 분할통치를 인정하고 있어 외국과의 교섭을 중앙정부가 다 감시·간섭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쇄국정책은 서양을 대상으로 한 쇄국이고, 네덜란드와는 규슈의 나가사키에서 교역을 인정했다. 나가사키는 도쿠가와막부에 직할되는 도시로 서양과의 교역을 막부가 조정할 수 있었다.도쿠가와체제를 지켜오던 가장 중요한 기반인 쇄국이 개항을 하면서 무너지게 되고 일본에서의 근대사 시작은 개항으로 본다. 일본의 개항은 1854년 미국과의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시작된다. 일본의 개항은 미국이 강제로 시킨 것이었다. 도쿠가와 말기에 쇄국을 주장한 사람들은 일본이 강해진 다음 개국하자는 의미에서 쇄국론이었다. 개항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어느 정도 있었다. 일본은 개항 후 순순히 시장을 개방하지는 않았다. 1858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에서 시장이 개방되었지만, 이는 불평등조약이었고 그 아래서 실제로 국가적인 독립을 유지한다는 것은 힘든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불평등조약과 서양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였다. 일본은 부국강병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고 이와 함께 여러 제도·의식·생활수준 등을 개화하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의 부국강병 추진에는 관료제적 효율 위주의 방법이 채택되었고, 부국강병을 위해 천황의 이념을 강요하고 일본의 독특성을 내세우는 특수주의적 입장을 내세웠다.1868년 정권이 바뀌면서 나타난 새로운 지도층의 핵심멤버들이 1871~1873년 동안 세계 일주를 하였다. 사절단은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에 들러 이들의 장단점을 관찰하고 돌아와서 일본의 국책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절단은 일본에 돌아와 실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프러시아적인 방향을 택하려고 하였다. 또한 귀국 길에 인도, 중국을 들렀는데 이런 지역에서 식민지화를 문화적인 격차로 인하여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열강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절단이 돌아왔을 때 일본 내에서 정한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들을 정권에서 내몬다. 정한논쟁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국회개설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을 일으킨다. 사절단 세력에서 주도세력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1889년 헌법을 만들고 1890년 의회를 개설한다. 명치헌법은 근대국가의 헌법으로서는 이상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천황대권이라는 것이다. 현재 재위중인 천황보다는 만세일계의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의 주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또한 군부가 천황에게 직속되어 있다. 내각 속의 군부대신을 통해 군부가 민간인 내각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사절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개혁세력은 당시 우리나라의 개혁세력으로 불렸던 이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반대파의 주장도 포용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자세를 보여주지만, 우리나라의 개혁세력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국정을 독단적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도 양국의 근대화 성공/실패의 요소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명치정부는 신속하게 근대화를 추진하여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하였다. 산업발전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초기 명치정부는 ‘식산흥업’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정책은 재래산업과의 연계에는 실패하고 일부 선진공업 부문에서만 성공할 수 있었다. 국가목적이 우선하고 국가자본이 주도하는 산업진흥책에 따라 산업의 여러 부문 간에는 균형이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일본은 대외적으로 첫 전면전쟁인 청일전쟁 전부터 해외침략의 싹을 키우고는 있었다. 일본 명치체제의 지도자들이 생존권이 걸린 문제로서 항상 한반도문제를 거론하고 있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일본에서 한반도의 정치적 독립에 대한 옹호세력이 없어지는 것은 1882년경이다. 또한 탈아론이 주장되면서 해외침략에 비판적인 세력이 점차 없어지고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한다. 청일전쟁 후 중국 내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서양열강에 일본의 힘을 보여주고 일본을 동등한 나라라고 인식시키는 것이 목표로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했다. 또한 중국내에서 이권을 완전히 확보하자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만주를 놓고 일본을 견제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지만 국력을 거의 다 소비했고, 포츠머스 조약에서도 배상금은 못 받아내고 영토에서만 득을 보게 된다. 1912년 명치천황이 죽고 대정천황이 즉위했다. 이 시기에 정치는 힘을 가진 몇 개의 집단에 의해서 행해지게 되었다. 1913년 대정정변으로 혼란했던 정국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수습되었다.
날씨와 교통교통의 정의와 기능교통은 사람,물자의 장소적 이동을 뜻한다. 교통의 기능은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경제적 손실을 최소화 하는데 있다.날씨로 인한 교통피해(동영상)황사와 폭설로 때아닌 피해를 받고 있는 중국. 관련된 뉴스봄철 이상 폭설에 따른 동영상부실한 제설작업장마철 사건사고비 때문에 교통사고 난 뉴스장마철 차량관리장마철 차량 관리를 위한 동영상자료가을철의 딜레마, 안개와 단풍놀이안개 낀 날 교통사고 조심하세요! 부산에서 일어난 안개 소동 단풍놀이 가다가 교통체증이…빗물 코팅액발수코팅 와이퍼 안 에 코팅액을 넣으면 작동할 때마다 차 유리에 코팅액을 조금씩 흘려 보내 앞 유리에 묻어있는 빗방울을 자연스럽게 밑으로 흐르게 만든다.소금 제설차전북 정읍시가 염화칼슘 용액에 모래 대신 소금을 섞어 뿌리는 고속도로 방식의 제설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제설작업은 30%의 염화칼슘 용액에 소금을 섞어 살포기가 달린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뿌리는 방식으로 눈을 빨리 녹게 하고 녹은 눈을 영하 50℃에서도 얼지 않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미끄럼 방지 타이어20% 이상 덜 미끄러져 사고 위험 줄임 넥센타이어GPS현 위치를 정확히 계산. 위성항법시스템은 위도·경도·고도의 위치뿐만 아니라 3차원의 속도정보와 함께 정확한 시간까지 얻을 수 있음. 위치정보 제공 항공기·선박·자동차의 자동항법 및 교통관제 유조선의 충돌방지 대형 토목공사의 정밀 측량 지도제작 개인 휴대용에서부터 위성 탑재용까지 다양하게 개발GPS 원리끝까지 발표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발표 끝까지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nameOfApplication=Show}
유럽의 사육제 기원과 전개목 차1.사육제란?2. 유럽 축제의 특징3. 스페인 축제 -토마토 축제4.독일 축제 - 맥주 축제5.프랑스 축제 -니스 카니발사육제의 어원사육제를 지칭하는 Carnevale는 이탈리아어로 고기를 금한다 는 뜻입니다. 이 말은 carne(고기, 살)과 levare(없애다, 탈하다)로 구성된 합성어로서, 이 단어에서 불어 carnaval, 에스파냐어 carnaval, 영어 carnival, 독어Karneval 등이 비롯되었습니다.사육제는 엄격히 말하면 주의 축일부터 기름진 화요일까지의 기간을 의미하지만, 의미가 약간 변화하여, 이 기간 동안 열리는 다양한 행사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축제를 여는 것이 전통이 된 것은 이 기간이 끝나면 금육과 절제의 기간인 사순절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전에 '마음껏 먹고 신나게 놀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사육제의 기원유럽 축제의 특징유럽 지역의 가장 큰 공통성은 유럽 어느 나라에나 크게 성탄절과 부활절, 성령 강림절을 중심으로 한 교회력상의 절기가 통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 축제는 현재 유럽의 축제의 근간을 이룬다 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나라마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른 전통과 풍습으로 생긴 많은 민속축제들이 있습니다. 이들 축제 역시 살아 숨쉬는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들입니다.스페인 지역의 축제스페인에서는 매년 200여 개의 축제가 벌어지고, 축제의 시작은 3월에 열리는 성주간 축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스페인 전 지역에서 열리는 축제는 각기 문화적 전통과 지역적 다양성을 갖추고 벌어집니다. 스페인 축제는 독특한 환경과 문화적 특성을 살려서 세계적인 축제로 성장한 행사들이 많습니다.스페인 토마토 축제(La Tomaina)8월의 발렌시아 지방에서는 토마토 축제가 벌어진다. 기원 : 1944년 시의회 의원들에게 토마토를 던지며 항의해 시민들의 의사가 관철된 것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축제로, 서로에게 잘 익은 토마토를 던지며 시민 정신을 되새기는 축제이다. 한 때 금지되기도 했었지만, 70년대 중반 마을 사람들에 의해 재개되었다.스페인 토마토 축제(La Tomaina)축제의 시작은 '햄 따기'로 시작됩니다. 광장에는 기름을 잔뜩 바른 굵은 기둥에 햄이 매달려 있고, 햄을 따면 폭죽이 터진다. 낮 12시. 대포 소리와 함께 토마토를 무기로 한 전쟁(축제)이 시작됩니다. 남녀 노소,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향해 토마토가 날아다닌다. 광장과 거리 가득 울려퍼지는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가득하고, 그 누구도 이 토마토 세례를 피할 수는 없다고 한다.독일의 축제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는 일년 중 각 지방의 특색에 맞춰 전국에 걸친 맥주 축제가 열리는데 그 중에서도 뮌헨 맥주축제(Oktoberfest)가 가장 유명하다. 독일에서의 맥주는 1516년 발표된 맥주 원료 순수령으로 그 품질이 계속 유지되었으며 국민적 음료로 사랑 받아왔다. 또한 사육제·부활절 축제·종교 행사 등에도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독일 맥주 축제(Oktoberfest)기원 : 1810년 10월 바이에른공국왕국의 초대 왕인 빌헬름 1세의 결혼에 맞추어 5일간 음악제를 곁들인 축제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883년 뮌헨의 6대 메이저 맥주회사가 축제를 후원하면서 4월 축제와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축제로 발전.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 정오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16일간 열리며, 독일 국민은 물론 전세계에서 7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다.독일 맥주 축제(Oktoberfest)맥주 축제의 개회는 뮌헨 시장의 축포 신호와 함께 선언한다. 맥주통을 가득 싣고 화려하게 꾸민 마차를 거느린 시장은 대회장의 중심 Hof Brewery에서 맥주통으로부터 그 해의 새로운 맥주를 높이 쳐드는 것이다. 또한 거리의 큰 퍼레이드도 있는데 선두는 시장 마차이며 그 뒤로 뮌헨의 심벌 컬러인 검정과 황색의 승복을 입은 마상의 여성들, 맥주통을 산처럼 쌓아 올린 마차와 민속 의상을 입은 각 지역 그룹들이 따른다.프랑스의 축제프랑스는 라틴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융합되어 서유럽 문화의 집산지라고 할만큼 다양한 문화가 모여있는 나라로 예전에는 축제가 많았다. 반 종교개혁 운동과 오랜 중앙집권에 의해 많은 지방문화가 말살되었다가 1980년 지방자치법의 변화로 인해 각 지방에서 정체성 살리기의 한 방편으로 많은 축제들이 신설 혹은 부활되었다.니스 카니발(CARNAVAL de NICE)기원 : 18세기까지 카니발은 지금의 니스 구시가에서 열리던 가면 무도회와 열광적인 춤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성직자들이 통제하면서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니스 카니발은 베니스 카니발의 영향으로 살롱과 가면 무도회인 '베글리오니'가 주로 열렸다가 18세기에 이르러 거리로 나가게 되었다. 1873년까지 거리에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변장하고 서로에게 색종이, 밀가루, 달걀 등을 던지며 축제를 즐기다가 1873년 2월23일 현대의 카니발이 시작되었다.니스 카니발(CARNAVAL de NICE)니스 카니발의 주 내용은 갖가지 꽃들로 장식된 꽃마차의 행렬과 다양한 가장 행렬을 비롯하여 총 7개의 대형쇼이며, 마지막 날 낮에는 GrandParade 가 진행되는데 바로 여기서 모든 참가자들이 함께 모이는 거대한 꽃마차 행렬이 약 2.5Km에 걸쳐 진행된다. 밤이 되면 전통에 따라 가장행렬 속의 왕이 행렬을 끝낸 후 바다에서 행해지는 모의 화형식을 거행하게 되고 불꽃놀이가 성대하게 펼쳐짐으로써 이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nameOfApplication=Show}
인문지리학 레포트주제 : 인구 이동에 관한 조사인구 이동의 정의 : 경제적·문화적·지리적·인구학적 요인에 의해 인구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국제연합(UN)은 인구이동을 '지리상의 단위지역에 있어서의 지리적 유동성, 즉 공간적 유동성의 한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출발지에서 목적지로의 주소변경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따라서 이 정의에 따르면 통근이나 계절이동, 품팔이, 단기간의 여행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인구이동은 전출과 전입을 포함하는 국내 인구이동과 이주를 포함하는 국제 인구이동으로 구별된다.국내 인구이동은, ①이동자의 집단성에 의하여 단신이동·가족이동·집단이동으로 구분되고, ②이동지역에 따라 지역사회 내 이동·도시농촌 간 이동·도시 간 이동으로, ③이동시간에 따라 정기이동·계절이동으로, ④이동목적에 따라 직업이동·연유이동·취학이동 등으로 구분되나, 근대사회에는 직업이동에 따른 단신 혹은 가족단위의 반영구적인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추계방법에는 센서스의 출생지별 인구수에서 이동량을 추계하거나 생존율법에 의해 이동순량(전출과 전입의 차를 나타낸 것)을 추계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는 연령별·성별의 이동순량을 추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또 동태 통계를 이용해서 이동순량을 추계하는 방법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UN은 인구이동의 요인으로, ①경제적 요인, ②인구학적 요인, ③문화적 요인, ④지리적 요인을 들고 있으나, 그 중 하나로써 이동요인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많은 경험적인 연구가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인구이동에 관한 법칙이라는 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 것은 인구이동이 그만큼 복잡하며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많은 요인이 복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상으로 나타난 민족의 대이동에는 4∼5세기의 게르만족의 이동을 비롯하여, 핀족의 유럽에의 이동, 7∼8세기의 노르만인의 이동, 17세기 초 종교적인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의 이동이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인구이동은 경제적인 발전을 위한 것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신대륙으로 이동한 것이 좋은 보기이다. 각 나라의 국내에서 인구이동도 많아 미국·캐나다의 동부에서 서부로 향한 개척인의 이동,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개발하기 위한 동쪽으로의 이동, 중국인의 허베이 지방에서 둥베이 지방으로의 이동, 등과 각국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농촌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현상도 국내인구이동에 속한다.인구의 흡인 요인(pull factor)과 배출 요인(push factor)세계의 인구이동1. 산업화 이전의 인구 분포남서부 평야 지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북동부 산간 지역은 인구가 희박한 모습을 보여준다.2. 산업화 이후의 인구 분포수도권과 남동 임해 공업지역 도시, 지방 광역시 등 대도시 지역 인구 과잉 현상이, 농어촌 및 태백, 소백 산간지방, 도서지역은 인구 과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3. 우리나라의 인구 이동일제강점기만주 쪽으로의 인구이동이 크게 난다. 일본 쪽으로 빠져나가는 인구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일제가 농토를 빼앗아 만주로 이주해가는 인구와 국내에서는 살기가 힘들어 일본으로 막노동을 하려 떠나간 인구도 꽤 많았다. 농촌이 피폐화되면서 도시의 공장지대로 취업하러 나온 여성인구, 항구나 도시의 막노동판으로 이동하던 인구, 일제 말기에는 징용으로 일본이나 동남아까지 끌려갔던 청장년 인구, 학도병 등으로 군대에 끌려간 청년인구, 정신대나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여성인구 등으로 위의 것은 일제시대의 해외로의 인구이동이다. 국내에서는 북부 지방에 광공업이 발달하여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 토지 조사 사업 이후 농민들이 북부나 간도 지역으로 이주가 활발해졌다.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북부의 공업도시를 개발하기 시작하여 북부로의 인구이동이 많았고, 병참기지화 정책은 한반도를 일제의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기지로 활용하려는 정책으로 군수 공장 건설, 지하자원 수탈, 전쟁 물자 수탈 등이 이뤄졌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인구증가는 한반도 중에서도 특히 중부 이북지방에서 현저하였다. 즉 1925~1944년간 중부이북지방의 인구증가율은 전국의 평균치를 모두 상회하였는데, 관북지방은 같은 기간에 전국 총인구 증가수의 약 17%를 차지하였던 바, 이는 전국각지에서 많은 인구가 함경도로 이주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이 기간 중에 경기도는 전국 총인구 증가수의 16.7%를, 관서지방은 16.5%를, 황해도와 강원도는 각각 8.6%와 8.2%를 차지하여 중부이북 7개도의 총인구 증가 수는 전국의 67%를 차지하였고, 이것은 일제시대 중반 이후부터 중부이북지방의 광공업이 급속도로 개발됨에 따라 남부지방의 인구가 이 지역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광복직후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꽤 들어와서 큰 인구이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남북한이 갈라지면서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남북한 간의 오고감이 쉬워서 이동이 잦은 편이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남북한 간의 이동은 완전히 단절된다.한국전쟁기피난민의 대규모 남하가 일어나게 되고 이것도 상당히 큰 규모의 인구이동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