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천재가 된 홍대리를 읽고.......이 책은 내가 회계원리 과제로 회계관련 책을 읽고 서평을 해오라는 교수님의 명을 받고 도서관에서 회계관련 서적을 검색하던 도중 책 제목과 표지가 눈에 띄어서 읽게 되었다.회계천재가 된 홍대리는 형식이 소설형식이라서 책 읽는 동안에 지루함 없이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회계내용이 적고 내용이 많이 쉬워 다소 아쉬웠지만 회계지식이 얕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영업에 소질이 없던 홍대리가 경영지원팀으로 와서 회계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인데, 딱히 홍대리만의 업무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회계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 알려준다. 그래서 여러 가지 비즈니스 상황이 나온다. 회계에 대한 얘기를 요약해보면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회계란, 회사의 경영활동을 기록하여 이해관계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종합한 기업활동의 흐름표이다. 물론, 기업 정보의 투명성이라던가 자산과 비용의 차이에 대하여도 여러번 강조되지만 주요한 것은 위의 두 가지가 아닌가 한다.책의 많은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건, "부자는 자산을 사고 빈자는 비용을 지출한다" 는 말이다. 자산은 이익을 남기는데 도움이 되는, 투자와 같은 것이고, 비용은 한번 지출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는 회계의 필요성과 회계의 유용함을 알게 해준 말이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돈을 모아야 한다던 주인공 홍대리의 대사, 회계는 현장에서 확인하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만 실수나 비리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등등. 회계 공부가 꼭 답답한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도록 만드는 책이다.책을 읽고 난후 몇가지 아쉬움을 느꼈는데, 아무래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 만큼 그 자세한 방법이나 요점까지 정리해 주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내용이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성공소설 같은 내용이여서 재미는 있었지만 뭔가 내용상의 아쉬움이 남는다.그래도 나에게 회계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책이라서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속편인 회계천재가 된 홍대리 2편을 빌려볼까 한다.회계천재가 된 홍대리 책소개책의 분야경영/경제 > 기업실무관리 > 회계관기 > 기업회계책 소개회계의 ‘회’자도 모르는 홍 대리, 그가 회계의 정수를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회계 천재로 거듭난다. ?회계천재가 된 홍대리?는 회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홍 대리가 회계의 기초부터 고급기술까지 단계적으로 밟아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그려나가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회계원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특히 이 책은 ‘회계’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회계가 누구에게, 왜 필요한가를 조목조목 설명해 CEO에게는 회계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자료임을, 회계 관련자들에게는 회계의 중요성과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일반인들에게는 회계가 생활의 일부임을 전달한다.또한 코너를 통해 본문에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전달하기 힘들었던 고급 회계원리를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회계가 내 삶의 가까이에 있다는 기본적인 회계 마인드를 깨닫고 생활에 임한다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캐나다2. FTA 체결시 한국의 장점3. FTA 체결시 한국의 단점4. 현재 한-캐 FTA 진행과정Ⅲ.결론한국 - 캐나다 FTA에 대하여Ⅰ. 서론FTA는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의 약자로 국가간의 무역에서 관세를 크게 줄이거나 아예 없앰으로써 더 많은 종류의 상품을 더욱 싸게 서로 사고 팔수 있도록 하자는 국가간의 협정이다. FTA 발효로 관세가 철폐 또는 인하되면 해외 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수출증대 및 생산, 고용증대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준다. 대기업의 생산 및 수출이 증가하게 되면 협력관계에 있는 중소기업도 매출이 늘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 또한 소비자 측면에서도, FTA 발효로 수입상품과 국내 상품의 가격을 인하시켜 물가가 안정이 되고 선택 폭이 확대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상대국과의 경쟁우위가 약한 제품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산업이 쇠퇴할 수도 있는 점에서 볼 때 FTA 체결전에 각각 나라에 맞는 적절한 세부 조항들을 조율하여 FTA맺는 나라 모두 윈윈 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칠레, 싱가포르, EFTA, 인도, EU, 페루, 미국, 터키와 체결을 맺은 상태이며 이번에는 협상진행중인 캐나다와의 FTA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Ⅱ. 본론1. 캐나다FTA의 성공적인 체결을 위해선 상대국가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캐나다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에 있는 국가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며, 전체 면적이 9,984,670㎢에 달하는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다. 캐나다의 경제 및 산업을 보자면 캐나다는 지리 위치상 미국의 경제에 상당히 의존하는 편으로 미국과 많은 교역을 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규모이며 나라 면적이 세계 2위인 캐나다는 각 주마다 특성을 이용한 산업이 활발한 편으로, 각 주마다 주요 산업이 다르다. 특히 2007년 시점에서는 앨버타 주의 오일 샌드에서 원유가 채굴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매장업, 컴퓨터 산업, 소프트웨어 제작, 게임 제작, CG, 애니메이션이다.이 중 주요 산업은 임업, 수산업, 광업, 농업이며 각각 살펴보자면, 임업과 그 관련 사업은 캐나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으며, 전수출액의 3할 가까이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펄프, 제지업은 생산액, 취업자수, 수출액에 있어서 캐나다 최대의 산업이며, 신문 용지는 세계 수용의 1/2을 공급하고 있다. 수산업은 캐나다 최초의 산업이며, 새우,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서양 연안에서는 청어,정어리 등을 중심으로 35%를 차지하며, 오대호에서는 10%에 불과하다. 광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한 산업으로서, 특히 서드베리 부근의 니켈, 퀘벡 주 남부의 석면은 독점적인 지위에 있다. 그 밖에 백금, 금, 우라늄, 은, 구리, 아연 등 세계 유수의 광산물 수출국이다. 또 수력 발전은 미국 다음 가는 세계 제2위의 발전 능력을 지니며, 보크사이트를 수입하여 정련하는 알루미늄 생산국이기도 하다. 금속 자원의 경우 우라늄(1만 톤, 1위, 세계 시장 점유율 29.2%), 염화 칼륨(820만 톤, 1위, 세계 시장 점유율 30.9%), 유황(903만 톤, 2위), 철광석(1980만 톤, 3위), 은(1309톤, 3위), 텅스텐(2750톤, 3위), 니켈(16만 톤, 3위), 아연(100만 톤, 4위), 코발트(4304톤, 5위), 염화 나트륨(1335만 톤, 5위), 납(15만 톤, 5위), 금(141톤, 7위), 안티몬(143톤, 8위), 구리(56만 톤, 8위)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마그네슘, 인 등도 채굴되고 있다.캐나다는 광물 자원을 타고나서 세계 10위에 들어가는 광물이 17종류가 있다. 이하 수치는 2003년 시점의 통계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다. 유기 광물 자원은 천연가스(6565천조 줄, 3위), 연료가 되는 갈탄(3695만 톤, 9위)외에 석탄(2954만 톤)과 원유(9111만 톤)의 산출량을 가지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산출량도 1120만 캐럿에 이르러 세계 제6위이동뿐 아니라 베네수엘라와 북해에서도 들여온다. 2006년 기준 하루 평균 27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했고 85만 배럴을 수입했다. 캐나다의 원유 조달 구조가 이처럼 기이한 것은 이 나라 원유 자원의 자연적 특징 때문이다. 원유는 보통 지하의 유정(油井)에서 뽑아내는 방식으로 생산되지만, 이 나라 원유는 오일샌드(oil sand) 형태로 부존하기 때문에 생산 방식이 전혀 다르다. 캐나다의 농업은 취업 인구의 3.4%(1999년)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노동생산성은 급속히 상승하고 있다. 곡류, 감자 등의 농산물 중에서도, 평원의 3주에서 생산되는 경질 밀은 단백질의 함유량도 많아 질이 좋으며, 생산량의 3분의 2를 수출하고 있다. 또한 낙농과 가축 사육도 왕성하다. 온타리오 주와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에서는 온실(green house) 농업이 발전하는 추세에 있다.다음으로 캐나다의 무역을 살펴보자면, 캐나다 무역의 기본적인 형태는, 밀, 신문 용지, 목재, 펄프 등의 원재료나 반제품을 수출하고, 기계, 자동차 등의 완성품을 수입하는 후진적인 형태였지만, 자원이 풍부하고 자본을 유리하게 도입할 수 있었으므로 중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관련 제품의 수출 비중이 높아졌다. 교역량은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수출·수입 모두 60% 이상으로 매우 높다. 미국과의 교역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미국 경기 동향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는 중국·멕시코·영국이 주요 교역 상대국이며, 특히 중국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를 계기로 멕시코와의 교역도 늘어났으며,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도 적극적인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기계·기기, 정밀 기기, 석유, 천연 가스, 금속, 임산품, 농산품, 어류(연어, 연어알, 참치 등)이다. 캐나다의 수출은 에너지와 목재 등 1차 산업 품목이 전체 수출의 32%에 달하고, 대 미국 수출이 75%를 차지해 국제 에너지·원자재 가격 및 미국경제차의 대캐나다 수출이 부진한 반면 한국산 자동차의 점유율은 꾸준히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FTA 체결후 관세가 철폐된다면 수출 증대 및 점유율 상승세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무선통신기기의 경우 우리나라의 대캐나다 수출이 급증함과 동시에 점유율도 크게 상슨하여 캐나다 수입시장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산과 중국산 무선통신기기의 점유율이 상승함에 따라 미국의 점유율은 대폭 감소 하였다. 하지만 현재 캐나다로 수출되는 한국산 무선통신기기는 무관세를 적용받고 있어 관세철폐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나 현재 우리나라 스마트폰의 우수한 기능과 인지도 상승에 따라 성장세를 지속될것으로 판단된다. 캐나다 타이어 수입 시장에서 한국산 타이어는 점유율이 확장되고 있는 시점인데 현재 관세율을 적용받고 있기 때문에 FTA 체결로 관세가 철폐될 경우 캐나다 시장에서 우리나라 타이어의 점유율은 더우 확대될것으로 보인다. 한국산 의류가 캐나다에서 중국산 의류에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섬유 및 의류에 대한 관세율이 다른품목에 비해서 상당히 고관세율이어서 만약 세율이 낮아진다면 중국산 의류에 대한 경쟁력을 갖을것이라고 판단된다. 영상기기의 경우 캐나다 주택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TV 및 홈시어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관세가 철폐되면 수출량이 증가할것으로 예상된다.3. FTA 체결시 한국의 단점캐나다와 FTA 체결시 예상되는 한국의 단점으로는 역시 농수산물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농수산물산업이 워낙 취약하여 현재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는데에 비해 캐나다는 세계적인 농수산물 강국이어서 FTA 체결시 국내 농업에 심각한 타격을 줄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캐나다와의 농축산물에 대한 무역수지가 연간 2억달러 규모 적자인데, FTA 체결될시 3~5년 사이에 약 700억원의 농업부분에 피해가 갈것이라고 전망을 하고 있다. 축산업에서도 현재 쇠고기 관세에 관련하여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쇠고기 뿐만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낙농등에도 대규모 피해가 예상된다.4. 현재 한-캐 FTA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계기 양국 정상회담 및 통상장관회담에서 자유무역협정 예비협의 개최에 합의2005년 1월 25일 ~ 2005년 1월 26일 : 제1차 예비협의 개최*양국의 자유무역협정 정책 및 협정문 각 챕터(chapter)별 구성요소 등에 대해 협의2005년 3월 31일 ~ 2005년 4월 1일 : 제2차 예비협의 개최*양국의 상호 보완적인 교역구조와 협력의 잠재성을 감안할 때,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이 양국간 경제협력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킬 수 있는 유용한 정책수단이라는 데 인식 공유2005년 5월 6일 :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공청회 개최*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추진에 관한 업계, 학계 및 일반 국민들의 의견 수렴2005년 5월 10일 :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민간자문회의 개최*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추진에 관한 업계, 학계 자문위원들의 의견 수렴2005년 5월 21일 :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추진위원회 개최*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 문제 심의2005년 5월 23일 : 대외경제장관회의 개최*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협상 공식 출범 승인2005년 6월 1일 : 한국·캐나다 통상장관간 전화회담*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출범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빠른 시일 내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개시하기로 합의2005년 7월 11일 : 한국·캐나다 통상장관 회담 개최-중국 다롄(大連)*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협상 출범 합의(2005년 7월 15일 공식 발표)2005년 7월 28일 : 제1차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최*협상 추진일정, 협상분과 등 향후 협상 추진체계(framework) 논의2005년 9월 27일 ~ 2005년 9월 30일 : 제2차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최-서울*상품, 서비스, 투자 등 세부 분야별 통합 협정문 축조심의 작업 진행2005년 11월 28일 ~ 2005년 12월 2일 : 제3차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최-오타와(Ottawa)*울
조선시대 시기별 산수화의 변화산수화란 산과 강의 자연풍경을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을 뜻한다. 산수화는 동양화의 한 분야로써 중국에서 일어나서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를 살펴보자면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로부터의 전통을 계승하고 명나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면서 이 시대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발전시켰다. 초기에 궁정의 도화서 화원인 안견등이 이곽파의 화풍을 섭취하였으며 강회안, 이상좌 등은 명대절파의 영향이 현저하다. 조선중기의 산수화는 조선 초기에 형성된 화풍의 전통을 계승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초기의 안견파 화풍과 남송 원체화풍이 계속되면서 절파 화풍이 크게 유행되었던 점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정을 거쳐서 17세기에는 정선이 진경도를 그려서 한국풍 산수화가 성립되었다 . 조선후기 산수화는 대개 몇 가지의 다른 화풍들이 함께 공존하였던 앞의 시대들과는 달리 조선 말기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남종화 일변도의 경향을 띠었다. 윤두서ㆍ심사정등이 중국 청초의 개성파 문인화의 영향을 받는다.첫 번째로 볼 산수화는 안견의 ‘사시팔경도’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세기 중엽에 안견이 견본담채로 그린 작품으로 안견이 그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 봄부터 늦은 겨울까지 각 계절마다 2폭씩 8폭으로 짜여져 있다. 사시팔경도의 구도 · 공간개념 · 필법은 조선시대 수묵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각 폭에 각각 이른 봄과 늦봄, 초여름과 늦여름, 초가을과 늦가을, 초겨울, 늦겨울을 표현하였다. 즉 사계의 변화를 차이가 큰 필법과 묵법으로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봄을 묘사한 그림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곡선을 섬세하게 사용하여 그려낸 것을 볼 수 있다. 여름은 그림에 폭풍우를 묘사하며 장마철을 암시하며 여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가을은 가을의 이미지인 고요함을 살려서 안개등을 표현하고 배한척을 띄워 그려 놓음으로서 적막함을 부각시켜 가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겨울은 눈을 표현함으로써 겨울이라는 이미지를 나타내었다. 두 번째 작품은 이상좌의 ‘송하보월도’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비단위에 담채화로 그려져 있다. 전경에는 바위산이 대각선으로 놓이고 소나무가 화면 위 오른쪽 모퉁이를 향하여 솟아 있다. 소나무 밑에는 대나무를 비롯하여 몇 그루 작은 나무가 있으며 화면이 손상되어 대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중경에는 선비와 시동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고 원경에는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소나무 꼭대기에 가까이 거무스름한 것이 있는데 구름에 가려진 달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바람에 날리는 솔잎과 덩굴, 선비의 옷자락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세 번째 작품은 이경윤의 ‘산수인물도’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6세기 후반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매우 큰 그림이다. 이 작품은 인물을 중심으로한 전경은 인물을 중심으로 선비가 자연을 즐기고 있으며 다른 한명이 차를 달이고 있다. 중경에는 안개에 싸인 집들과 절의 탑이 보이고, 그 뒤 원경에는 산들이 멀어지면서 겹쳐지고 있다. 상단에 펼쳐진 산과 그 아랫마을은 옅게 그림으로써 거리감이 들어난다. 네 번째 작품은 이징의 ‘평사낙안’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견본담채로 그려졌다. 전경에는 바위와 정자에서 자연의 정취를 즐기는 선비와 소나무가 있고 중경에서는 산들이있는데 원경에 있는 산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색의 대조가 심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작품은 정선의 ‘금강전도’이다. 금강전도는 1737년에 겨울의 금강산을 그린 것으로 종이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져있다. 금강전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닌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정선이 조선후기 화가 중 한명이고, 수업시간에 금강전도를 흥미롭게 보아서 마지막 작품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금강전도는 정선이 금강산을 보고온 후 그린 진경산수화로써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봉우리들은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화면 중심으로는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숲을 이룬 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내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예수와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를 읽고...이 책을 읽게된 계기는 ‘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와 마찬가지로 과제물로 이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오는 것 때문에 읽게 되었다.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를 읽고 난뒤, 그동안에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이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되어 있었다.이 책은 ‘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의 후속편으로써, 예수와의 저녁식사를 한뒤 삶의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 닉의 부인인 매티의 이야기를 매티의 주인공 시점으로 다루고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으로는 어느날 갑자기 예수를 만났다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며 갑자기 기독교 광신도로 바뀌어 버린 남편 닉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이혼을 생각하며 여행을 떠나려고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우연찮게 옆자리의 남성과 대화중 그남자가 상담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털어 놓게 되는 과정을 통해 매티는 하나님을 알아간다.이 책에서 내가 가장 기억의 남는 내용은 상담사 제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썼다 하면서 매티에게 보여준 형식없는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내용으로는“나는 끝없는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해 왔습니다.거대한 산들이 흔들리고언덕이 들판으로 변해 사라진다 해도당신에 대한 나의 굳건한 사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내가 어찌 당신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내 마음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당신에게서 가슴벅찬 기쁨을 맛 볼 것이며,내 노래로 당신을 기쁘게 할것입니다.“인데, 나는 이것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느낄수 있었던 내용이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절실히 되찾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를 읽었을때도 그랬지만 책의 주인공인 매티가 마지막에 상담사의 존재가 예수님인 것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될 수 있는 계기가 나에게도 찾아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방법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원래 책을 한권도 안 읽는 나지만 ‘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와 ‘예수님과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라는 이 두권의 책은 나에게 너무나 흥미로웠고 이런 과제를 내어주신 교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결국 과제땜에 이 책들을 어쩔수 없이 읽게 되었지만 읽고나니 이 책들을 읽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1.영암 김응조에 대하여영암 김응조 목사는 한국 성결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96년의 생애(1896.1.26-1991.4.17)를 통하여 큰 발자취를 남기셨다. 개화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각자요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 운동가이자 문서선교사이며 순회부흥사로 한국교회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그는 다양한 은사의 소유자였으며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정력적 활동가였다. 해방 이후 민족의 혼란기에는 재림의 신앙으로 겨레의 영혼을 일깨운 목회자요 대부흥사로, 강단에서는 설교를, 교단에는 강의를, 그리고 서재에서는 저술활동을 쉬지 않고 계속했던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었다. 그가 남긴 족적은 성결교회는 물론, 한국 교회사에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서울신대의 전신, 경성성서학원 재학 시절에 이미 목회를 시작하여, 북부지방, 호남지방, 서울지방 감리 목사로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했다. 또한 아현교회, 목포교회, 독립문교회 비롯하여 본 교단에 속한 여러 교회를 담임하여 목회사역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그의 활동영역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로 넓혀 초교파적 부흥사로 활동했다. 또한 근 10년간 서울신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응조목사는 수많은 교회의 개척 및 담임 목사, 초교파적 부흥사, 교단 총회장, 저명한 성경 주석가, 서울신학대 교수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여, 성결교회사는 물론 한국 교회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나 서울신학대학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거나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김목사가 조명 받지 못한 근본 이유는 그가 노년에 서울신학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교단을 떠나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한편, 성결대학교를 설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신학자의 학문체계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보는 장악할 때였다.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지 25년 되는 해로서 영암의 신앙은 한국교회 초기신앙이라 할 것이다. 이때 영암의 선친 김원섭씨는 온 가족과 함께 입신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구한말의 뿌리깊은 유교의 전통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침략자 일본에게는 적대적 위치에 있던 서양 기독교를 온 가족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3) 영암 김응조 목사는 체험적이자 실천적 신앙의 소유자이다.① 일찍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 구원의 확신을 가짐(1911년 4월15일)14세가 되기까지 7년간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선친의 남다른 교육열에 힘입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가난한 살림에 논을 팔아 아들을 경산에 있는 계동학교로 유학 보낸 아버지의 결단은 그 당시로 보아 일찍이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은 개화의식과 전진사상에 의한 것이다.영암의 신학문 수업은 그에게 신앙의 성숙과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그 때 그의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여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공부해서 모세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모세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은 영암에게 일평생 영향을 미쳐 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새끼 모세"라는 표현을 즐겨 할 정도였다. 2년간의 계동학교 유학시절은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기도에 눈 뜬 시대이기도 하다.영암은 기도의 사람으로 무장한 가운데 1911년 15세 되던 해 4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피득 목사"라고 영암이 기억하는 유태계 선교사였는데 중요한 것은 수세의 순간에 영암이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영암은 계동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영해읍 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다음 대구에 있는 미션계통의 계성중학교에 입학 하여 계속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때가 1913년, 영암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땅파기, 지게지고 농사하기, 벽돌 운반하기, 기계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호별 전도라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한국 신학생 가운데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는 학생을 선발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암이 청소년기에 일본어를 특별히 공부한 것도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하여 예비시킨 일이었다. 영암을 미신으로 가득한 일본 사람들의 배타심과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③ 당시 영적 불모지였던 일본 전도여행 중에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은혜를 체험함- (1917년 9월 13일).영암에게 있어 일본 전도여행이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가 이방지역에서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영암은 자신의 재림에 대한 환상을 1917년 9월 13일 체험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흰 구름을 타고 수많은 천사들의 나팔소리 중에 오시는 예수님을 환상 중에 본 것이다. 그와 함께 "요한1서 3장 3절" 말씀을 받았는데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도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성결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튿날 밤에는 골방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낱낱이 드러나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다. 부지중에 "주여,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통회의 연속이었다. 이윽고 "내가 너를 깨끗케 하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마음이 유리같이 맑아지면서 기쁨이 충만했다고 한다. 이처럼 영암은 일본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던 중 재림의 확신과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④ 일제에 항거, 학생대표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자 선각자임- (1919년 3월 5일 가담, 1년 6개월 옥고).1년간의 일본 전도를 마치고 1918년 4월 귀국하여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기미독립 운동에 영암은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3월 1일 애국지사 33인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에서 온 국민이 일제히 독립의 함성을 외쳤다개 지방 가운데 제일 큰 지역인 북부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받아 5년 동안 한반도 북부지방 교회를 순회 감독하며 사역하였다. 그러던 중 영암은 34세 무렵부터 건강을 해쳐 급기야는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남쪽 따뜻한 지방인 목포교회로 임지를 옮겨 요양하면서 목회를 계속하였다. 몸은 점점 쇠약하여 신경쇠약, 소화불량, 피풍, 신경통, 치질, 폐렴 등 여섯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의 고통과 절망감을 영암은 "빨리 죽는 것이 축복이요 하루 더 사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했다" 표현했다. 이런 가운데 영암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영암은 마지막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기 위해 백일 작정으로 유달산 반석 위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기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10일, 기도 후 노곤하여 잠시 잠이 든 순간 앉아있던 바위가 갈라지는 환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갈라진 바위틈에서 백옥 같은 생수가 터져 나오더니 자신을 둥둥 띄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 자신의 몸이 보여졌는데 몸이 유리알처럼 맑아 있었다고 한다. 깨어보니 기이한 환상이었다. 이것이 영암 김응조 목사의 생애에 있어 유명한 신유의 은사 체험이자 심령의 변화체험으로 기록된다. 그때부터 자신의 아호를 "영암(靈巖)"(고전10:4)이라 하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한 생애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 셈이다.영육간에 엄청난 은혜를 체험한 후 영암은 새로운 능력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1931년 호남지방 감리목사, 1936년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활동하면서 1937년에는 서대문 독립문교회 당회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 졸업과 함께 외쳤던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 그대로 영암은 우리 나라 전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일하게 된 셈이다.3. 사역1) 영암 김응조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지켰다.그러나 영암에게는 1937년을 전후하여 매우 어려운 시험을 겪게 된다. 1937년 4월 18일 일본 천장절행사가 배재학당에서 있었는데목사로 임명하여 대전교회에 주재케 하였다. 그는 1931년부터 1936년까지 호남지방회를 맡아 사역하는 중에 신개척 39개소, 교회당 건축 36처소, 신자의 증가 4,000명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는 1936년 4월 연회에서 중부지방(서울, 경기도, 강원도) 순회이사로 전도의 명령을 받아 지방교회 순회에 몰두하며, 독립문교회를 겸임하기도 했다.3) 영암 김응조 목사는 문서선교의 개척자로, 일제 암흑기에 민족의 비전을 제시한 초교파 부흥사로 공헌하였다.공직을 떠난 영암의 생활은 피폐해 질 수밖에 없어 집에서는 학생 하숙을 치면서 자비량 전도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때의 전도계획으로 시작된 것이 초교파적인 전국 순회부흥회와 문서전도지인 「생명지광」 발행이었다. 영암의 사역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문서선교인데 이 「생명지광」의 반포가 사실상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배달 3천부 정도 발행하여 국내는 물론 만주와 일본에까지 독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 주된 내용은 설교와 성경강해, 신학사상, 전기, 신앙간증, 설교법, 예화 등이었다. 한 달에 세 곳 이상 집회를 인도하면서 기차 안에서, 혹은 집회 후 여가를 이용하거나 밤을 새면서 집필하고 발송을 하는 등 영암의 초인적인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잡지는 1943년 폐간 될 때까지 6년 이상 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3년 12월에는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었으며 영암은 계속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문서선교와 함께 시작한 전국 순회부흥회는 가는 곳마다 부흥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으니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회까지 사임한 신세였으나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암은 전국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목회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영암이 평소 "나는 교파에 속하였으나 교파주의자는 아니다" 라고 말한 것도 이때 교파를 초월하여 순회부흥전도자로 활동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45년 영암의 나이 50세에 이르러 조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