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을 취재하다.학번 :이름 :만보산 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기림성 만보산 지역의 관개수로 공사여부를 둘러싸고 한·중 농민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내부에 살펴보면 한·중의 문제 뿐 아니라 일본까지 합쳐진 국제적 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보의 취재진들은 이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만보산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19세기 말부터 우리 농민들은 만주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때 조선 정부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그들에게서 세금을 걷기 시작하였는데 청의 관리들은 이를 알면서도 그들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말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서 북간도 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고자 했으나 자국민의 비협조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은 청령을 경작하는 사람이면 모두 청 국민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간도영유권 분쟁으로 승화되었다. 간도 영유권 분쟁에서 양 측은 백두산 정계비를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여 갈등을 벌인다.이러한 가운데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 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재만 조선인에 대한 국적 및 관할권 문제를 청국에 귀속시킴으로써 논란을 끝낸다. 하지만 문제는 한일합방 후에 다시 일어났다.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이라 규정지은 일본은 1915년 만몽조약을 통해 사실상 토지 소유권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맺은 간도협약에 의해 재만 조선인들이 중국의 관할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침략을 확장하는데 있어서 불리하게 되었다.결국 일본은 만몽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간도협약이 무효가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반면에 중국은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 측은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은 모두 일본신민이 되었으므로 만몽조약에서 규정된 토지상조권은 그들에게도 유효가 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자연적으로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간도협약은 특정민족과 특정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만몽조약과 별도로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재만조선인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일제의 침략에 선봉역할을 한다는 오해를 받았으며 일제는 계속해서 재만조선인의 간도정착을 지원하면서 대륙침략정책에 이용하고자 한다. 결국 중, 일 그리고 그 속에 낀 재만조선인들의 갈등 속에서 만보산사건이 일어난다.만보산사건은 간도의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 속에서 벌어지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조작 된 것이다. 일본이 사건을 조작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원래 간도 지방은 우리 민족의 무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된 곳이다. 20년대에 존재하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는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원으로 3부통합운동을 실시하지만 결국 결렬된다. 결국 삼부가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나뉘는데 혁신의회는 나중에 한국독립당이 되고(1930) 그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둔다. 또한 국민부는 조선혁명당(1929)으로 바뀌면서 조선혁명군을 그 산하에 둔다. 이 두개의 군이 중국군과 합작을 하려고 시도한다. 한국과 중국의 연대 항일 무장 투쟁을 두려워하던 일본은 둘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을 모색하고 그 해법의 일환으로 실행 된 것이 바로 만보산사건이다.만보산 사건은 중국인 학영덕이 장롱 도전 공사의 명의로 길림성 장춘현, 이통하 동쪽 삼성보 관황둔 일대의 중국인 지주 소한림 등 12호의 토지 500상을 10년 기간으로 조차한 후, 다시 이 땅으로 조선인 농민 이승훈 등 9명과 전조계약을 체결한 데서 발생하였다. 땅을 빌린 조선인 농민들이 개간지를 수전으로 만들기 위해 수로를 파자 중국인 지주들은 수로가 자신들의 토지에 손상을 준다고 주장하며 수로 공사를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농민들이 일본 경찰의 호위 하에 계속 수로 공사를 진행하자 수백 명의 중국인이 수로를 파괴했으며, 이에 일본경찰은 그들에게 사격을 가했으나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커다란 유혈사태를 부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조선인과 중국인 양측 모두 커다란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침략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관동군에서는 이 사건을 이용하기로 하고 장춘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허위 보도하도록 한다.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 기자는 일본의 꾐에 빠져 만보산 현지에 가보지도 않은 채 본사로 허위보도를 전송하였다. 보도에 신중을 기했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는 이를 7월 2일 석간과 3일 조간 호외에 실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 내에서는 중국인 배척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재만 조선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조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조선일보의 허위 보도로 인해서 국내에서는 반중국인 폭동이 일어난다. 그전부터 중국 관헌들에 의한 재만동포의 박해가 국내에 알려져 있었고 중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는 조선인들의 반중의식에 조선일보의 오보가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는 중국인들에 대한 습격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폭동의 피해는 어마어마하였다. 특히 평양에서 엄청난 수의 화교가 살상 당했다. 중국 국민당 평양지부장은 평양에서의 참사가 검은손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 단정을 지었다. 또한 이를 말려야 할 조선 총독부 측에서도 이 사태를 방관하여 결국 사태를 더욱 크게 만들었으며 뒤늦게 이 사건에 대한 조치로 중국인들을 격리시킨다.
화폐박물관은...한국조폐공사가 1988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전문 박물관입니다. 주화역사관, 지폐역사관, 위조방지홍보관, 특수제품관 등 우리 화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4개 전시실에 총 4,000여 점의 다양한 자료들이 시대별,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화폐에 대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체험공간도 마련되어 있답니다.화폐는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기 때문에, 그 나라의 문화․역사․풍습 등이 담겨져 있으며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자랑스러운 인물들과 희귀한 동식물, 유서 깊은 건축물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폐와 더불어 세계 각국의 화폐도 공부하며 재미있는 지식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체험이 되시기 바랍니다. < 중 략 >별전과 열쇠패란 무엇일까요?우리나라 별전은 조선시대 주전소에서 주화를 제조할 때 사용되는 재료의 품질과 무게 등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시주화, 또는 기념화로 기하학적 문양, 동․식물 문양, 좋은 글귀 등을 새겨 넣어 소장하였습니다. 열쇠패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공예품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워 집안에 걸어두고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염원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문제5] 조선시대 주전소에서 재질(재료)과 중량(무게) 등을 시험하기 위하여 아래 그림들과 같이 만들어진 시주화 또는 기념주화를 무엇이라고 하나요? ( )동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한국은행의 주문에 따라 주화의 발행년도, 액면표시, 발행은행, 소재와 크기, 문양이 결정되면 디자인 원도를 만듭니다. 원도에 따라 6배 정도의 크기로 조각을 한 후, 다시 석고를 이용하여 정밀하게 조각합니다. 이 조각 원판으로 수지판을 복제하여 축조기계를 통해 실제 주화 크기로 금속봉에 축소 조각하면 원극인이 만들어집니다. 원극인을 보존하기 위해 압사방식으로 여러 개의 똑같은 극인을 찍어냅니다. 이렇게 극인이 완성되면 압인기에 장착하고 주화의 재료가 되는 소전을 넣어 강한 압력으로 눌러 양면을 동시에 찍어냅니다.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를 읽고이 책은 1587년 명나라 말기를 다룬다. 1587년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 해는 제목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이다. 그저 대체적으로 평범한 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왜 별일 없었던 평범한 해를 주목하였던 것일까?이 책을 읽고 다른 책과 인터넷을 통해 1587년 중국이 아닌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1587년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1587~1588년 아르마다 전쟁을 유럽의 역사적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이를 통해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근대 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해였다.이렇게 유럽은 이 시기에 해양 진출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며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과연 로마시대 이후 세계의 부가 중국으로 귀속된다고 하여 ‘유럽 금궤의 묘지’로 알려졌던 동양의 중심의 중국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중국은 17세기 30~40년대부터 세계무역의 구조에서 퇴조를 맞게 되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이 명조의 말기부터 찾을 수 있으며, 그 퇴조의 상징적인 해를 1587년으로 보았던 것이다.그럼 왜 명은 세계무역의 구조에서 퇴조를 맞게 되는 것일까? 이를 잠시 보면, 농업의 중심지인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하게 되면서 막대한 양의 식량을 대운하를 이용하여 수도로 옮긴다. 또 북쪽의 오랑캐를 견제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건하고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주둔시킨다. 하지만 경제의 중심지인 강남으로부터 수도와 북쪽 변방까지 식량을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명조 초기 물자수송은 보통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과 대운하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이때 바다에는 해적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북쪽의 오랑캐만으로도 골치를 썩던 명조는 해적들을 두려워하여 바닷길을 통한 물자수송을 포기하고 대운하만을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명이 바닷길로의 항해를 금지시킨 것은 서양에 비해 발달되고 우수한 항해술과 배가 있음에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셈이다.또 명은 거대한 토지에서 나오는 방대한 양의 생산품으로 인해 충분히 자급자족을 할 수 있었기에 해외로의 진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이제 명조의 그 당시 사회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여러 인물들을 통해 보려고 한다. 우선 1587년 당시 9세의 어린 나이에 천자의 자리에 올라 가장 오래 명의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만력제, 그는 자신의 아끼던 덕비 정씨가 낳은 상순을 황태자로 세우고 싶어 하지만 관료들의 반대에 의하여 뜻이 이루어 지지 못한다.세자를 세우는 것 하나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관료들의 꼭두각시 같은 존재인 황제, 그는 거의 평생을 자금성에 갇힌 채로 외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적으로 대해준 적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황제는 친구 하나 없는 요즘 말로하면 소위 왕따였던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더욱더 덕비 정씨에게 집착하였던 것인지 모르겠다.인간적인 면을 부정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불쌍한 황제, 과연 그의 형식적인 천자의 자리가 그가 잃어버린 자유스런 삶을 보상해 줄 수 있었을까?그 당시 명조는 각종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는 적절한 입법, 사법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덕적인 원칙과 규범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명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단지 도덕적 원칙과 규율만으로 모든 분야를 통치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점들이 야기된다.그 당시 관리들의 관봉은 거의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소액이었기 때문에, 고급 관리들은 관봉만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그들은 지방관들로부터 상납을 받고 있었고, 한차례 상납의 금액은 보통 일년치 관봉의 열 배 이상이었다. 하지만 하급관리들은 관봉이 그들 생활의 주 수입원이었다. 그 소액의 관봉으로 는 자신들이 사는 집세조차 내기 어려웠다. 한 예로 황제의 외조부가 자신의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환관들과 세금 운송원들 사이를 중재하고 수수료를 챙겨 생활을 유지했던 것을 보면 그 당시 관료들의 어려웠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도덕적 원리와 규범을 준수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마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황제의 선생님 격인 대학사 장거정은 황제에게 모든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하고,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밝혀진 그의 실체에서는 장거정 자신은 엄청난 비리를 통해 모은 재산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장거정의 사후에 모든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를 어려서부터 선생으로 모시고 의지하던 황제가 느꼈을 배신감과 허탈감이 어떠하였을까? 이런 걸 두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만력제라면 그 배신감이 너무 커서 그 후 모든 관리들을 믿을 수 없고 정치에 대한 엄청난 회의에 빠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그리고 실제로 황제 역시도 1587년 이후로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정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모든 관리들이 현실 타협적이었을 때, 유독 해서만은 원리 원칙을 따르는 독불장군격의 인물이었다.도덕적 원리를 강조하고 또 실제로도 그러한 삶을 살려고 했던 그가 현실 속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다른 관리들과 달리 전혀 융통성이 없이 부정한 방법에 의한 수입은 한푼도 올리지 않았다.내 생각에 관리로써 해서의 행동은 이상적이고 바른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융통성이 없는 유별난 관리라고 하기보다는 엄청난 의지력과 도덕성을 지닌 진정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관리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대중적 영웅이 되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1587년 정해년이 저물어 갈 때 그는 죽었고, 북경의 조정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며 비리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대로 비리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슬픈 명나라 말기의 시대상이 아닐 수 없다.또 음력으로 정해년 12월 20일, 명이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군사력을 현대화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로 변방의 오랑캐를 평정하고 명의 군사제도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가 장거정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문관들의 견제와 시기로 뜻을 이루지 못한 고독한 장군 척계광의 죽음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또한 편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이유는 그 시대에 문관만을 중시하고 무관은 천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심지어 군사를 통솔하는 군관들의 재량권마저 거의 문관들이 가지고 있었으니, 명의 허약하고 비효율적인 군사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아마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에 누르하치와의 싸움에서 명의 무기력한 군사력으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질 때에서야 군제개혁의 절실함을 느꼈을 것이다.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관우그는 왜 신이 되었을까?서론중국에서 관우는 사람이 아니라 신입니다 중국인들은 관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관공, 관성대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후세에 우리가 부르는 관우와 역사 속 관우는 차이가 확연하지요. 그의 모습인 수염이 길고 얼굴이 대추빛은 관우는 신인관성대제이고 역사속의 관우는 수염만 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염이 긴 대추빛의 관우가 어째서 13억 중국인의 존경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 궁금증을 해소 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본론⑴ 관우는 누구인가?자(字)는 운장(雲長)이며,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穆侯)이며,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公)이라고도 불렸다. 죽은 뒤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성제군(關聖帝君)’이나 ‘관제성군(關帝聖君)’이라고도 불린다. 간단히 ‘관제군(關帝君)’, ‘관제(關帝)’라고도 한다.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인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湖)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도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폭리를 취하는 염상(?商)을 죽이고 유주(幽州)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과 이름도 바꾸어 관우(關羽)라 하였다고 전해진다.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관우는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 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소설에서 창작된 내용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200년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잡혀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귀순을 종용 받았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이때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하였으나 조조는 그들을 만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208년 적벽전(赤壁戰)에서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護法神)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伽藍菩薩)’로 숭배하기도 한다. )⑵ 관우는 왜 신격화가 되었을까?1) 당대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관우가 본격적으로 신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시기 때부터였다. 형주와 해현 지역의 지방 토착 신으로 숭배되던 관우 신앙이 점차 중국 전역으 로 확산되었고 왕조에서 직접 관우를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휘종은 관우에게 작위를 내 리면서 신격화에 박차를 가했고 이후 남송 정권에서도 관우에게 작위를 내리기 시작하였다.송대에 이르러 관우의 신격화가 본격화된 것은 송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 다. 송은 5대 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 왕조를 수립했지만 공교롭게도 요동과 초원 일대에서 거란, 여진 등의 비중국계 북방 세력들이 흥기하고 중국을 본격적으로 점령하기 시 작하였다. 기존의 절도사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문치주의를 표방하던 송 왕조로서는 비중 국계 북방 세력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송 왕조는 여진 금 왕조에게 화북평원과 수도도 개봉을 빼앗기고 회수 이남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특히 관우에 대한 국가적 신격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휘종 시기는 대외적으로 요와 금의 대대적으로 침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 다. 휘종은 중국 예술사에서도 명화가로 알려질 정도로 예술적 능력이 탁월했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전혀 형편이 없었고 낭비벽이 심했다. 그 결과 채경, 동관 등의 간신들이 전횡을 일 삼았고 휘종의 낭비벽을 충족시키기 위해 각지에서 막대한 공물과 조세가 징수되었다. 결국 이러한 송 조정의 정치 문란으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민란이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산 동 지역에서 일어난 송강 일파의 반란과 강남 전역으로 확대된 방랍의 반란이다송 왕조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피지배계층의 힘을 국가에 결 집시킬 통 왕조로 인식 되었다. 사마광의 도 조위 정권을 정통으로 기술하였다. 하지만 북송 말엽부터 남 송 대에 이르면서부터 "촉한정통론"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는 송이 여진의 금에 화북을 빼 앗기고 강남 지역으로 후퇴한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송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북 의 북방 세력에 대한 증오와 한인 문화에 대한 보호의식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화북 지 역을 점령하고 한 왕실을 무너뜨린 조위 정권보다는 사천 지역에서 한을 계승한 촉한이 정 통 왕조라는 역사의식이 대두되었다. 촉한정통론은 주희에 의해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강화되 었고 그에 따라 관우의 신격화도 탄력을 받게 되었다.송 대의 도시 발달도 관우의 신격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송 대에는 수도인 개봉, 혹은 항주 지역 뿐만이 아니라 운하를 따라 상업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도시에 인구가 몰 려들면서 도시 인구들을 위한 각종 오락거리가 발달되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있었던 오락거 리는 전문 이야기꾼에 의해 전해지던 영웅담이었다. 관우를 비롯한 의 영웅들 역시 인기있는 이야기 소재였는데 북송 시대 명문장가 소식의 글은 삼국시대 영웅담의 인기를 잘 보여준다."아이 놈들이 귀찮게 굴어 돈 몇 푼을 주어 내쫓으면 놈들은 그 돈으로 이야기 꾼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으로 몰려간다. 유현덕이 패하면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물을 줄줄 흘리 가다도 조조가 패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표정이 되어 이야기 꾼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신이 나서 따라 부른다."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소동파 당시 민중들이 촉한에 대해서 상당히 동정적인 시각을 보내 는 한편, 조조에 대해서는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는 점이다. 소동파는 을 지은 사 마광과 동시대의 인물인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여전히 조위를 정통왕조로 보았던 사대부 지식인들과는 달리 민중들은 촉한에 대해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송 대 도시문화의 발달과 이야기의 성행, 민중들의 촉한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은 송대에 민간에서 의 관우신앙을 중국 전역으로 남에게 두터운 신뢰를 보냈죠.관우의 의리론에 관해서는 현재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그 일례는 관우의 의형제인 유비, 장비의 일로부터도 알 수 있습니다.유비가 지방말단의 관리로 부임한 후, 여색에 빠져 사치향락을 즐기자 그것을 못마땅히 여긴 장비는 유비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관우가 이를 막습니다. "정 네 뜻이 그러하 다면 형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자." 장비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도 형님께서 정신을 못차리시다면 어쩔꺼유?", "깨우쳐 드려야지."저러한 반응은 왠만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기 힘듭니다. 사람은 본래 자신이 믿던것이 깨 진다면 저렇게 깨우쳐 드리기는 커녕 자신까지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관우는 남을 믿 고 믿음을 받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장면이 가능했습니다.(2) 관우는 매우 충신이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흠이라 할 수 있는 조조에게 잠시 항복한 사 실. 그것 또한 충절을 지키며 자신과 조국의 이익을 챙긴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습니다.조조와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삼형제는 뿔뿔히 흩어집니다. 관우는 하비성을 지키다가 적 장의 유인계에 걸려 대패를 하고, 끝까지 도망치다가 아주 약간의 병사만을 데리고 산으 로 후퇴합니다. 끝까지 버티고 있을 때, 관우의 벗이자 조조의 장군인 장요(장료)가 찾아 옵니다. 그는 갑옷도, 창도 갖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관우가 말합니다. "그대는 나를 조조 에게 항복시키려 찾아온 것이오?" 안타깝게도 실제로 항복시키려 찾아온것입니다.다만, 무력이 아닌 회유로 말입니다. 장요가 말하길 "형수님들은 조조님께서 털 하나 건 드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관우는 속으로 깊이 감명합니다. 그리고 세가지 조건을 내세우 며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 항복하겠다고 합니다. 이 세가지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유비형의 생사와 위치가 확인되면 바로 떠나겠다입니다. 이 말인 즉슨 지금은 항복하지만 영원히 항복한게 아니란 뜻이 됩니다. 두가지 조건을 듣고 모두 수락한 조조는 세번째 조건에서 뜸을 들입니다. 그 때 장요가 조조를 설득합니다. "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무슨 일인지는 왠만한 분들은 눈치를 깠을 겁니다. 그는 오나라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오 히려 손권을 깎아내리며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관평과 함께 충절과 의리로 살았던 한 평생을 마무리 짓습니다.(3) 몇몇 사람들은 관우가 자만심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그 일례로 부하의 말을 안듣다가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한 것, 적장을 깎아내리는 것 등을 드는데요.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부하의 말을 안들은 것은 결 과가 나빠서 그렇지, 관우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좋았 다면 그들은 관우를 깎아 내릴 수 없습니다.또 적장을 깎아내리는 것은 적장을 깎아내림으로서 아군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고, 이는 전쟁의 승패와도 연관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무효 라고 볼 수 있습니다.⑷ 관우와 관련된 장소1) 관림하남성 낙양시 중심위치에 2킬로메터가 떨어진 관림진에 자리잡고 있다.낙양 관림은 북쪽에 수, 당대 낙양성 유적지가 있고 남쪽에 용문석굴이 있고 서쪽에서 낙용대도로와 이어지고 동쪽에 이하강이 있다. 해내외 3대 관우 사당의 하나다. 중국에 유일한 “총,묘,림” 3가지 제사형식을 하나로 한 고대 전형적이고 영향력이 비교적 큰 건축물이다.관림은 관우 수급을 묻쳐 있어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 관우와 관련된 글짜가 많고 백나무가 많고 황궁처럼 보여 농후한 관공 문화 분위기를 만들었다. 명나라 만력20년(1592년)에 한대 관우묘 원자리에서 면적이13000평방메터나 되고 마당수가 4개가와 건축물이 150칸이 있고 백나무를 천여 그루를 심는 확장 공사를 했다. 앞 광장에 있는 “천추감루”라는 건물은 옛날에 극장 무대 소재지다. 정문양쪽에 있는 명대 돌사자는 씩씩하고 기세가 당당하고 위엄 불가침 모습이다. 대문에 박은 못이 81개가 있어 관림의 높은 등급과 관우의 사후 영예를 드러낸다. 의문양측에 서 있는 무게가 3000여근이 달하는 철사자는 명대 신도자들이 관우를 모시는 공덕 유다.
을 통해서 본 청말 산서상인의 운명청조 말기에 상인들의 실화를 영화로 제작된 ‘백은제국’을 통하여 그 당시에 상인들이 어떤 물건을 취급했는지 청말 유명한 상인이었던 것만 알았던 나에게 그 집단들의 내막을 알 수 있게 해준 영화였다. 그들이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뜻이 있고, 그들만의 방식이 있고, 그들에게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산서상인은 명나라 때부터 청나라 중기까지 전성기라 할 만 했다. 명·청시기에 지역 경제의 번영과 도시 발전을 촉진하고 국내의 무역을 확대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북방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흥성하게 된 것도 진상의 상업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산서상인의 경영 범위는 매우 넓어 )주단(綢緞)에서 파·마늘까지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 없었다. 또한 표호를 만들어, 환업무와 예금, 대출 업무까지 담당하여 상업과 무역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산서상인의 활동 범위는 전국으로 되었다. 국경을 넘어 일본과 조선, 동아시아 및 아랍 국가에까지 경영 활동이 이어졌다. 또한, 진상은 일부 금융 업무에서 황상(皇商)의 기능까지 도맡았다. 청 중기에는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을 대부분 전문적으로 조달했고, 정부의 )경향(京餉)과 각 성의 관세 및 해안 방어, 철도, 하천 공사 경비, 구휼 비용 등을 모두 진상 표호에서 태환했다영화를 보다보면 그들이 운영하는 은행에는 규칙이 있었고 고리대업으로 불법으로 백성들의 돈을 횡령한 자를 처벌하는 장면이 나온다.그들은 거래에서 닦아진 신용을 기초로 하여, 윤리가 침투하면서 상대방까지도 신용할 수 있는 상인으로까지 성장하였다. 산서상인의 강가네 조상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그 윤리는 매우 오랫동안 길러져 자신들의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상인도덕을 존중하였고 과거 자신들이 철과 양모로 축적된 자본을 가지고 쌀, 소금, 비단, 후에는 목면 등 주요 화물의 중간 매매로 거대화되고, 금융업에 세력을 차지하여 정부자금까지 취급하기까지 모든 악덕과 타락을 경험했을 것이다. 상업적 이윤이 교활한 지혜의 근원이 되고, 독점과 고리대가 여러 악의 뿌리라는 괴로울 정도로 보고 들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상인들은 어느 정도의 축적이 일반화하면서부터 신용에 의하지 않으면 실제의 운영이 파탄해 버린다는 사실을 몸에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관을 만들어 타향에서의 객고를 달래는 것 외에 동향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상호간의 지나친 경쟁을 조정하는 역할도 했다. 또 동향 관리들과의 모임을 통해 중간 대리인인 아행의 부당한 요구나 사기, 현지인들의 텃세에 대항하기도 하고 장사에 실패한 사람을 돕거나 갑작스런 사고로 숨긴 사람의 후사를 돌보아주었다.그리고 영화를 보다보면 한 집 마당에 모여 “선인들을 기억하며 천지에 인사하니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대의를 하늘에 바칩니다.”라는 말과 함께 의례를 하고 커다란 자판을 일사분란하게 꺼내어 계산을 시작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그들은 4년에 한번 모여 4년 동안의 환전 저금 대출의 영업 총액등을 산출하였다. 치밀하고 실속 있는 경영을 통해 그들은 성공적인 경영 방법을 갖추게 되었고, 끊임없이 경영규모와 경영 범위를 확대하여 상방 가운데 가장 역량이 뛰어난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500여 년 동안 최고 상방의 자리를 지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영화를 보던 중 수많은 은화가 오고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장면들을 보여 궁금점이 생겼다. 바로 화폐로 취급을 하던 중요한 은화를 다루는 주체가 정부가 아닌 것 같았다.은화를 생산하는 주체는 누구였고?, 도량형을 통일시키기 어렵다고 들었던 중국은 과연 은화 통일을 시켰는지? 등 은화유통에 관한 궁금점이 생겼다.청대 상인은 종래 상인이 경험한 바가 적었던 은 사용이 새로운 요소로 첨가 되었다. 은이 사여와 뇌물의 형태로 퇴장되고 있었던 사이에는 그 순도와 중량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활발한 유통이 일어나면 이것이 화폐로서 기준이기 때문에 일상 작업에 그 측정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 정부는 어떠한 지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전국 공통의 도량형도 없고, 순도의 기준을 정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제하면 그 편리함보다도 번잡함이 커지고, 자치에 맡겨 정부가 비난을 뒤집어쓰는 것을 피하는 쪽이 현명하다고 청 조정은 생각했고 원래 이해와 수지타산을 따지는 것은 정부의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듯이 상인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자신들이 처리했다고 한다.은을 취급하는 것은 순도 1천분의 1까지 육안으로 감정할 만큼 숙련이 필요하다. 전문 환전소와 금융업자만이 아니라 그것을 취급하는 상인에게도 요구되는 자질이다. 그들은 지방마다 다른 형기의 눈금을 환산하는 것도 신속하게 하고, 품질이 다르고 중량이 다른 은괴의 거래 등 모든 대응을 준비했다.)청대에 익숙했던 은감정의 기술서인 『은수총론』에서는 ‘은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먼저 색이 죽었는가 살아 있는가를 살피고, 두들겨서 소리가 청명한가 탁한가를 듣고, 표면 은의 주름이 두꺼운가 엷은가, 밑변의 구멍의 크기와 깊이, 주변에 윤기가 있는가, 도검을 이용하여 푸른 기가 보이는가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망라했다’고의 내용이 나온다.영화를 보면 그들의 경영전략을 알 수 있는데 산서상인은 시종일관 상업의 신의를 으뜸으로 삼았다. 신용을 제일로 여기는 상업 신조는 인격에도 반영되어 충성과 신의를 가장 중시했다. 또한 성실함과 신용을 근본으로 삼아 몇 백 년 동안 전승되면서 하나의 집단적 의식을 이루게 되었다. 신용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또한 합작 경영 방식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이는 상호 신뢰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합작 경영에 투자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과도 합작 관계를 맺고 이윤을 나눠가졌다. 이에 직원들은 항상 주인의식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다. 그들은 검소하고 소박하며 부지런하였다. 산서 지방은 풍속이 소박한 곳으로 근검절약하는 기풍을 최고로 여겼다. 이를 상업 경영에서도 계속 살려나간 것이다. 산서상인은 장사를 잘하려면 일을 꼼꼼히 해야 하며, 작은 일부터 잘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믿었다.그들은 또한 뛰어난 안목과 관대한 인품을 정신적 토대로 삼았으며 성공할 수 있었던 정신적 기둥이었다. 원대한 안목으로 형세를 내다보면서 예민한 관찰력으로 상업 기회를 간파하고 제때에 기회를 틀어쥐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호간 협동을 중시하면서 남에게 관대하고 업무갈등과 직원 간 갈들을 잘 조절했으며 넓은 아량과 대법한 기풍이 있었다. 그리고 시장의 변화에 따라 제때에 그에 대응하는 책략을 썼다. 상계의 사소한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는 데 능했으며 정세의 변화에도 발 빠르게 대처해 대비책을 꾸미는 데도 능수능란했고 물건을 판매할 때 융통성을 발휘했다. 시장의 흐름을 간파하고 상황에 따라 변화를 꾀했으며 고객이 많이 소비하는 물건들을 시급히 조달하여 구입과 판매가 모두 원활하게 이루어졌다.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였던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힘들어하는 캉산이 생각이 난다.아버지는 세상을 알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며 영어 과외를 시켰고, 과외 선생님으로 온 여자와 결국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어머니라고 불러야 되는 힘들 상황에 처해졌다. 그리고 형제의 잇달은 불행으로 자신이 행단을 이끌어야 된다는 책임감이 요구되는 상황이 그를 현실에서 도피할 수도 없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