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 여진 베일 (Veiling Veil)c 베일의 종류와 역사 베일에 싸 인 베일 ONTENT 베일 속 이념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 베일을 착용하는 국가들베일의 종류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부르카 ( Burka ) 가림의 정도가 가장 심한 옷 . 아프칸 여성들이 주로 입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린다 . 눈 부분만 망사로 가리고 나머지는 완벽하게 가리게 된다 .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니캅 ( Niqab ) 눈을 가린 망사부분이 없는 부르카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차도 르 (Chador) 얼굴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가리는 검은색 옷 부르카에서 얼굴부분만 오려냈다고 보면 된다 . 주로 이란에서 많이 착용한다 .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히잡 ( Hijab ) 히잡은 원래 이슬람어로 ' 가리다 ' 라는 뜻으로 포괄적으로 가리는 옷의 종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협의의 의미로 머리와 목 부분을 가린 의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베일의 역사 베일은 중동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토착 풍습 가운데 하나였다 . 베일은 성별에 상관없이 남녀 모두에게 씌워졌고 , 베일의 의미도 각각 자치권 , 평등 , 계급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 베일 착용은 이렇게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문화적 이유에서부터 형성된 것 이며 , 실제로 그 이유에서 오랜 시간 계속적으로 전래되었다 .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이러한 베일은 고대국가가 생겨나고 국가의 힘과 경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성의 파워와 군사력 수 있었다 . 로마 여성은 사회적 , 공적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고 결혼과 동시에 여성의 재산은 남편에게로 귀속되었으며 여성 자신은 남편의 재산이나 노예로 간주 되었다 . 인도 여성의 사회활동기회 , 재산권의 박탈은 물론이고 기혼여성은 그 남편이 사망할 경우 그 시체 위에 함께 태워졌다 .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이슬람시기의 세계 여성 지위 중국 여성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아 그 어떠한 권리도 누릴 수 없었다 .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낙원을 상실하고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존재로서 여성은 언제나 사탄에 버금가는 나쁜 피조물로 묘사 되었다 . 따라서 성서에 손을 대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 여성은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 여성은 어떠한 권리도 누릴 수 없었고 ,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재혼을 할 수 없었다 . 한국 조선시대 여성들은 일체의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했음은 물론 ,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 축첩제 , 그리고 국가 적으로 장려된 ‘열녀’ 개념에 묶인 삶을 살아야 했다 . Veil’s history kinds Veil in Veil Ideology in veil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에 싸인 베일 (Veiling Veil ) - 이슬람과 베일의 결합과정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아내를 살펴보면 이 베일과 이슬람의 결합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 ‘ 카디자 ’ 는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 경제력도 지니고 있었으며 , 이 재력은 무함마드가 포교활동을 하고 이슬람을 전파시키는데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 이 시대만 해도 여성의 경제권이 인정 이 되었으며 , 여성의 주체성과 인권이 상당부분 인정 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 즉 , 이때만 하여도 강력한 부계 중심적인 이슬람이 형성되지 않았다 .베일적 베일 착용 - 남성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성은 베일을 써야 하되 , 노예는 베일 착용을 해서는 안 된다 . - 이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다른 여성을 차별하는 매우 모순적인 여성 차별 구조 를 만들었다 .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베일에 싸인 베일 (Veiling Veil ) - 서구에서의 베일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서구인들이 접한 이슬람 여성의 정보는 대부분 아랍어 텍스트 이해가 부족한 기독교 성직자 , 여행을 다니는 서구 남성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 19 세기말 유럽의 Ethnocentrism 동양을 타자화 시켜 지배하고 재구성하는 수단 서구인들에게 히잡 = 서구 여성들이 착용하던 코르셋과 거들 ( 여성 신체에 대한 억압으로 규정 ) 문명화의 경계선 밖에 있는 식민지 사회의 남성들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며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여성에게 억압적 이라고 여겼다 . 그리고 그 상징은 ‘ 히잡 ’ 이었다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에 싸인 베일 (Veiling Veil ) - 서구에서의 베일 백인 우월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이슬람의 여성 : 히잡으로 인해 자유를 박탈당하고 남성들로부터 격리되어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 히잡을 벗기는 것이 근대화 , 문명화의 목표 최근 히잡의 문제는 프랑스의 공립학교 내의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금지 한다는 규정에서 드러나고 있다 . 서구인들은 히잡의 착용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문화권의 강요로 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에 싸인 베일 (Veiling Veil ) - 이슬람내에서의 베일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의 이슬람 , 히잡에 대해 이슬람 학자들은 오히려 여성의 위치가 향상 인 것이다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에 싸인 베일 (Veiling Veil ) - 내가 생각하는 베일 밖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 즉 가슴을 가리는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의 부모 , 자기 부모 , 자기 자식 , 자기의 형제 , 형제의 자식 , 소유하고 있는 하녀 ,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 그리고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이외의 자에게는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되니라 . ( 꾸란 24:31)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552 ( 히잡을 강요하지 않는 무슬림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 속 이념 (Ideology in veil) - 베일 벗기기와 베일이 안 벗겨지는 이유 이슬람의 진보 계몽 주의자들의 베일 벗기기는 여성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 서양 사회의 모방이라는 정치적 이유 에서 시행됨 서구는 중동 지역을 식민지화 하면서‘ 여성 인권’이라는 명목 하에 그들의 민족성의 상징인 베일을 벗기려 함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서구의 ‘베일 벗기기’가 단지 ‘여성 인권’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침략 행위 였고 , 서구는 이를 ‘인권’ 으로 교묘하게 포장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 속 이념 (Ideology in veil) - 베일 벗기기와 베일이 안 벗겨지는 이유 서구에 반대하는 이슬람 내부의 보수 진영의 민족의식 고취 운동 이 진보 지식인에 반하여 활발하게 일어남 이슬람 내부의 보수 민족주의자들은 중세에 세계를 제패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예가 서구의 침략 하에 처참하게 짓밟혀 바닥까지 내려간 사실에 통개했다 . 이들의 민족적 자긍심은 매우 커서 서구에 대한 저항 의식도 매우 성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 . 베일을 일단 벗고 나서도 여성은 사회적으로 여성이기를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성을 획득하기 위한 큰 산을 넘어야 한다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 속 이념 (Ideology in veil) - 베일 논쟁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베일 속 이념 (Ideology in veil) - 어떻게 베일을 벗어야 하는가 베일에 관련되어 가장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은 여성인데 , 그 문제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 베일의 밖에 있는 남성들이다 . 결론적으로 ‘ 무슬림 여성에 의한 베일 벗기’ 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 이러한 여성에 의한 혁명은 지금의 이슬람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워 보인다 .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이를 위해서는 내부적 으로는 이슬람 내부 여성들의 의식 구조 각성의 노력과 외부적 으로는 서구의 지원이 필요하다 . 단순히 이권 취득을 위한 정치적 속셈으로 무슬림 여성의 베일 벗기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 .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외부적 강요가 아니라 이슬람 내부로 들어가서 그 여성들을 도와야 한다 . 이를 위해서는 이슬람에 대하여 진정한 앎을 가지고 있는 서구 지식인들의 반성과 각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 이권이 아닌 인권에 초점을 둔 서구의 외교 방향의 근본적인 전환 도 이루어져야 한다 . 베일 속 이념 (Ideology in veil) - 어떻게 베일을 벗어야 하는가Veil’s history kinds Veiling Veil Ideology in veil 닫 는 말 아라비안나이트 에서 여성 억압을 가장 잔혹하게 자행했던 샤흐라야르 왕의 무지몽매함을 일깨워주었던 것은 바로 천일야화로 유명한 샤흐르자드였다 . 그녀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슬기롭고 지혜롭게 그 여성 억압의 현실을 이how}
인류학과 지역연구 - 정병호교수님사할린강제이주 그리고 새로운 이산가족의 탄생조사지역조원안산시 상록구 사3동 고향마을-조사단 명단조사일정조사일조사내용조사원2011년 4월 28일인포먼트 인터뷰-2011년 4월 29일인포먼트 인터뷰-2011년 5월 6일인포먼트 인터뷰-2011년 6월 17일인포먼트 인터뷰-조사방법사전조사는 사할린이주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참고문헌과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서 사할린이주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을 대할 때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그리고 나서 현장에 나가서는 최소한의 질문으로 그들의 생애사를 듣는 방식으로 최대한 그들의 감정이나 사실적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했다. 마침 현장에서 만난 인포먼트와 라포를 쌓는 과정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그분의 집에 가서 컴퓨터를 가르쳐드리는 만남을 가지게 되어 지속적인 조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속적인 인터뷰와 관찰로 현장에서 얻은 자료를 통하여, 조사자가 중점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예정이다.1. 조사주제 및 목적먼저 사할린강제이주에 대해서 설명하면, 사할린 동포들은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의 강제징용에 의해 남사할린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사할린 동포들의 공식적인 모국 방문은 1989년 한국과 일본 양 국가 적십자간에 결성한 '사할린 거주 한국인 재회지원 공동사업체'가 실시한 일시방문 및 영주귀국사업을 통해 시작되었다.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던 영주귀국은 한·일정부의 영주귀국 시범사업인 고향마을 임대아파트 활용정책에 따라 2000년부터 본격화되었다.현재 국내에 귀향한 사할린 동포는 총 2천262명으로 인천에 총 720여명을 비롯해 안산시 고향마을 827명과 시립전문요양원 21명, 서울 강서구 등촌 4단지 및 등촌 9단지 136명, 춘천 사랑의 집 21명이 생활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및 후손들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 하나 없는 상태다. 이에 지난 2005년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받아 일부 동포들에 대한 영주귀국 사업만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1905년 일본이 한반도를 점련한 이후 1937년 만주전쟁에서의 군대 보장을 위한 산업에서 비롯된 노동력 부족으로 1939년부터 모집하기 시작해 1942년 관알선, 1944년부터는 조선인들을 강제징용 형태로 사할린으로 연행하기 시작하였다.사할린으로 연행된 사람들은 대개 탄광, 비행장, 도로 건설에 투입되었고, 1944년부터 군수공장의 해상 연료 사업이 어렵게 되자 자국영토내의 석탄생산량을 증가 시키기 위해 사할린에 있는 조선인 탄부 1만명 이상을 일본으로 파견하게 된다. 소위 이중징용을 시키게 된 원인인 것이다.대략적으로 사할린 강제징용은 조선인 15만 명이 추정되며, 1945년 8월 러일 전쟁의 시발로 일본일반공민으로 노인과 여성, 아이들의 피난으로 시작돼 1946년 말부터 미·소 협정에 의해 일부는 일본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한반도 출신인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일본공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할린에 방치해두고 사할린 북방 소수민족인 아이누족 인들을 귀환시켰다.“일본이 패전한 다음에 일본 사람들 데려가니까 우리도 데려가겠지 했지. 일본 사람한테 말하고 싶은 것은 일본, 한국은 한 일본사람이다 했는데, 우리를 그냥 던져두니까, 일본 사람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이는 1943년 카이로 협정에서 맺은 연합국 정상들이 조선인민들의 자유와 해방을 제동한 것이 원인이었고, 1945년 포츠담회의로 한반도에 자유국가가 형성 됨에도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들은 사할린이 소련의 영토가 됨으로 해서 또는 일본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귀환시킬 조치를 취하지 않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일본국적도 상실하게 된다. 조선인들의 귀환은 1946년 미·소협정에 따라 귀환자가 이루어져야 했으나, 일본은 27만명 자국민만 귀환시켰고 일본 임시정부의 명부에 실린 조선인 귀환자 4만3천명은 일본국적상실이라는 구실로 사할린에 방치하게 되었다.4만3천여명의 사람들이 최종 강제 징용자 되었다.두 번째 인포먼트(장경수. ??. 남)는 노인정에서 ‘안맹환’씨를 기다리던 도중 만나게 되었다. 먼저 요구르트를 건네면서 조사자에게 무엇을 하러 왔냐는 질문에 “고향마을에 사할린동포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분들 얘기 들으면서 공부하고 싶어 왔다.”고 대답하자 “자신은 국회의원도 했었고 사할린동포지원법 개정안도 제출했다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선뜻 말했다.”이러한 인연으로 이분의 연락처를 받고 제2의 이산가족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할린동포지원법’에 대해서도 연구하고자 두 번째 인포먼트로 설정하였다.2) 사할린으로의 이동사할린강제이주의 형태는 크게 2가지로 나타난다.첫 번째 형태는 일본 정부의 국가총동원 체제에 의한 강제이주의 형태이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을 매듭짓지 못한 상태에서 1941년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은 청년 상당수를 전장으로 동원함으로써 발생한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1938년 4월에 발효된 국가총동원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해서 남사할린의 경우 1939년에서 43년까지 단 4년 동안에만 집단으로 이입된 조선인 노무자는 16,113명이고, 그 가운데 석탄 생산에 종사한 노무자는 65%에 해당하는 10,500여명이다. 탄광 이외에 조선인 노무자들은 삼림벌채 및 제지공장, 수산업 등 전략적 의미를 갖는 주요 자원들의 생산 현장과 군용 시설을 포함한 각종 인프라 건설과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토목건축 현장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해방전에 저 사할린 우리는 강제는 아니지만은 강제로 간 사람은요 아...참 저 모 말을 다 하기 바쁜데 일도 제일 드긴한데(힘들긴한데) 탄산에 굴속에 탄광에 간 사람들, 우리는 그런일이 없었지만은 그래가주구 아침에 7시 출근이니깐 6시에 일나가주구 잡곡밥 한 그릇 요만한 그릇에 담아가주구 절반은 아침에 먹고 절반은 굴속에서 먹으라고 그거 다 먹어도 배가 안차는데 한참에(한번에) 먹어버리지 그래 이제 굴속에 가가주구 12시간노동이니까 저녁 8시에 나오는데 아침에 나눠준 보리밥 등이 다시 공제됨으로써 적은 돈만을 지급받았다. 임금은 대개 일당제로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작업을 쉴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노동복이나 장구까지 개인의 임금으로 구입하게 하였다.그래 카가주구 벌인돈(벌은돈) 자기한테(일본인한테) 돈 맽겨 놓으라고 5원만 해가주구 담배 값해가주구(5원정도 담배값만주고) 느그들 무슨 뭐 조금 쉬고 나머지는 내한테 맡기놓으라 그래. 가주구 죽자고 일해가주구 한달에 30원 25원 맡겨놓은거 2년 맡겨놓은거 얼마 되요 그거 1년에 300원 2년에 600원에 그거 100배로 돌려준다하는디 얼마라 6만원이지 그놈한테 맡겨 놓은게 그사람이 전쟁 간다고 나서 그사람이 흔적이 없어 그거 가주구 도망가 버렸어. 그러니간 내가 누구하테 돈있다고 말하겠소 있엇다고,형님이 가게 생겼으니까 내가 대신 갔지. 500명쯤 조선 사람들 동고동락 했지. 일본사람은 1층, 조선사람은 2층, 도망 갈까봐.. 6개월 약속하고 갔는데 1년만 더 있다가라. 어쩔 수 없이 잡혀있었는데 일전한 푼도 못 받았어. 또한 징용자들은 함바라 불리는 합숙소에서 통제된 생활을 강요당하였고, 여러 탄광에서 타코베야(문어방)라 불리는 벌처를 운영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다.우리 그 그 뭐라카요 이민증. 그거 우리 조선사람은 다른걸 줘가주구 그러니깐 여기서 중앙에 못갔어. 불러가주구(일본인이) 뭣입니까 하면 ‘니 여기서 못 살지’ ‘저 정류까진 니가 못간다 니가 상록수 못간다 거기 중간까지 가도된다.’ 이렇게 해가주구 잡아 있었네. 노란거 붙여가주구, 다른 사람은 흰데, 노란건 한눈에 보일 수 있소.(따로 표시를 통해서 조선인을 구별함) 개는 마음대로 댕기는데, 사람은 잘 못다녔다. 허허.. 마을을 나가지도 못했어요. 몇 키로 밖에 나가면 벌금물고 때리고 잡혀가고..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민족적 기쁨임에 틀림없는 사건이었으나 사할린 거주 조선인들에게는 새로운 아픔의 시작을 의미했다. 해방 직후에 사할린의 각처에서 한인들은 일본인들에 의한 무차별적린동포로 불리게 되었다. 기계적이고 폭력적인 민족 정체성, 국적 구분의 강요로 내면화된 체험은 그들의 삶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른바 정통성이라는 이분법적인 한국정부의 태도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정부에서는 러시아 국적 포기에 5년의 기한을 두고 5년 후에는 자동적으로 러시아 국적이 포기된다는 점을 영주귀국의 조건에 포함시키고 있다. 무국적, 실향의 정서가 내면화되어 있는 그들에게 어디에 속한다는 문제는 자신의 실존과 관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이들에게 체제는 적어도 조사자가 느끼기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느끼기에 사회주의나 제국주의나 그들의 삶을 편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똑같이 힘들었으며 차별받고 구별 지어졌다. 단지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편히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노후를 보내는 그런 마음의 안식처를 의미한다. 또한 고향이라고 하는 곳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어느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을 의미한다.이들은 사회체제를 2번이나 겪었고,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들에게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제2의 이산가족의 형태를 겪게끔하고 있다. 즉,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귀국한 이들에게 우리는 자식들과 따로 살게 하는 제2의 이산가족의 형태를 겪게 하는 것이다.4) 또 다른 이산가족사할린동포들이 2000년 안산 ‘고향마을’ 아파트 단지로 입주를 시작한 이후 5년이 지났다. 안산 고향마을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간 뒤 일본의 2차대전 패전 후 그곳에 버려진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 영주귀국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고향마을은 한국 정부가 땅을 제공하고 일본 정부가 32억 엔을 지불하여 만들어진 아파트 단지이다. 사할린에 가족과 친구들을 두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반인들이 무심코 지나쳤을 안산 고향마을은 일제 식민시기 강제동원과 냉전, 가슴 아픈 시킨다.
'83 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테러 사건 위기관리 연구론#1. 개 요 아웅산 묘소 폭파테러사건 前 가 '80. 9. 1. 전두환 , 11 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및 취임 1 '83. 10. 8. 전두환 대통령 , 동남아시아ㆍ오세아니아 국가 순방 차 출국 2 원격 조종이 가능한 고성능 , 소이탄 폭탄 ( 인마살상 및 증거 인멸 用 ) * 80 년대는 북한과 외교 전쟁 중으로 제 3 세계 노선 중립국과의 외교를 위해 국가 순방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 이 당시 버마는 군사 독재 세력이 집권 및 사회주의 성향 정부로 외교부 및 안기부에서는 순방을 반대하였음 . 北 , 순방계획을 대통령 출국 3 주 前 입수 , 암살 목적 인민무력부 소속 인원 3 명을 버마로 파견 3 파견인원 : 인민무력부 소속 소좌 김진수 , 상위 신기철ㆍ강민철 등 3 명 ㄱ 83. 9. 15. 김진수 소좌 등 3 명 , 버마 도착 後 , 버마 內 북한 대사관에 은거 他 17 일 폭탄 입수 ㄴ 10. 6. 남한 보안요원으로 신분 위장 후 아웅산 묘소에 잠입하여 기념관 지붕에 폭탄 (3 개 ) 설치 ㄷ 인도ㆍ호주ㆍ뉴질랜드ㆍ스리랑카ㆍ브루나이 +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테러 당일 나 '83. 10. 9. 전 대통령 , 버마 외무장관의 차량고장 , 영접인원 격려 등으로 폭탄테러 당시 차량 이동 中 1 버마 외무장관 ( 유 칫 흘랭 ) , 차량 고장으로 영빈관에 4 분 지연 도착하였으며 , 외무장관을 기다리던 전 대통령은 영접인원 격려 등으로 예정 시간보다 총 9 분 가량 지연 출발 (10:24) ㄱ 주한대사 ( 이계철 ) , 전 대통령 인사 後 , 영빈관에서 출발하여 10:26 분경 행사장 도착 ㄴ 주한대사의 인상착의 , 의전차량 및 예행연습으로 인한 나팔 소리를 행사 시작으로 인지한 北 요원 은 10:28 폭탄테러 감행 ㄷ * 주한대사 등장 時 전두환 대통령과 유사한 인상착의 ( 대머리 , 안경착용 등 ) , 의전차량 ( 검은색 벤츠 , 모터 싸이클 컨보이 ) 등과 도착 후 본 행사 前 예행연습 실시 4 - 1 * 폭탄테러로 경제수석 ( 김재익 ) , 비서실장 ( 함병춘 ) 등 16 명 즉사 , 재무차관 ( 이기욱 ) 은 치료 중 사망#1. 개 요 아웅산 묘소 폭파테러사건 後 다 폭파 테러 후 전두환 대통령은 바로 대한민국으로 복귀 1 11. 4. 버마 최종 수사 결과 , 北 군부 에 의한 테러 입증 2 * 美側 , F-15 4 대로 1 호기를 호위하는 한편 , C-9( 의료 수송기 ) 를 파견하여 이기백 합찹의장 등 부상자를 필리핀으로 후송 4 - 2 **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버마와 북의 공조를 의심하였으나 ,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국가 위기관리 테러 이후 현장에서 생포된 강민철 상위의 자백으로 랑군 內 北 대사관 의 직접 개입 여부 입증 ㄱ 버마 側 , 이후 북한과 외교단절 및 北 대사관 요원 출국 명령 ㄴ 국내 , 전국적인 北側 의 테러 규탄ㆍ성토대회 ㄷ UN 등 전세계 69 개국에서 北側 의 테러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 코스타리카 , 서사모아 등도 北 과 외교 단절 ㄹ * 北側 의 외교적 고립과 무역ㆍ국가 이미지 타격에 결정적인 계기#2. 위기관리 조치사항 국내 조치사항 가 테러 이후 我 보복 공격 未 실시 1 버마 현지조사 및 최종 수사 결과 , 全 세계 규탄 성명 등 반향에 대한 홍보 및 이슈화 2 국외 조치사항 나 이성적인 대응으로 한미동맹 공고화 및 지대지 미사일 개발 등 실리적인 이익 추구 1 주한 美 대사 ( 리처드 워커 ) , 테러 발생 이후 보복공격에 대한 반대 표명 / 11.12. 美 대통령 ( 레이건 ) 방한 및 최전방 시찰 ㄱ 전 대통령 , 美側 과 협상을 통해 당시 개발을 못하게 되어 있던 ‘ 지대지 미사일 ( 백곰사업 ) ’ 사업 추진 → 현재 우리 軍 의 ‘ 현무 미사일 ’ 탄생 ㄴ * 이 결과 , 당시 5 ㆍ 18 운동 및 전두환 대통령의 개인적인 비리 관련 여론이 수그러드는 부가적인 현상 식별 4 - 3 테러 이후 전방 지휘관 層 , D- Ⅲ 발령 및 “ 북한에 대한 대응 보복 공격을 감행해야한다 ” 고 주장하였으나 , 전 대통령은 “ 귀국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 ” 고 지시한 後 전방을 방문하며 지휘관들을 안심시켰음 . ㄱ 최종 수사결과 및 전 세계 반향에 대한 홍보로 자국민들이 반공정서로 뭉치게 되는 계기 마련 ㄱ 北 의 외교적 고립을 위한 정책적 결정으로 南 ㆍ 北 외교전 승리 2 동북아 전쟁 , 제 3 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으나 , 보복 공격 未 실시 및 규탄 성명 발표 등 침착한 외교대응 ㄱ 테러 이후 北 은 테러국가ㆍ불량국가로 낙인 찍혔으며 , 무역 및 국가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외교적으로 고립 → 80 년대 南 ㆍ 北 외교전 승리 ㄴ#3. 시사점 및 교훈 감정적 대응이 아닌 이성적이고 침착한 대응을 통해 실리적인 이익을 추구 나 4 - 4 리더는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떠한 방법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국가 또는 조직에 이익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여 가위키백과 중앙선데이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 #4. 참고문헌 참고문헌 가{nameOfApplication=Show}
독 후 감(‘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나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흔히 역사를 ‘미래를 보는 창’이라 한다. 과거는 반복된다는 옛 조상들의 격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이미 우리가 아는 역사들의 대부분이 반복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의 역사는 그 어떠한 부문보다 더 많은 반복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생기고 난 뒤 전쟁은 끊임없이 발생했으며, 식욕과 성욕과 같은 1차적인 욕구와 마찬가지로 파괴에 대한 본성이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가장 오래된 학문이 ‘군사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군사학에 포함된 ‘전쟁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분이고,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군인’으로써는 늘 살펴보고 고찰해야하는 부문이다. 더욱이 전쟁이 흔하지 않는 평화의 시대에서 ‘타산지석’의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고, 간접적인 전쟁 경험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단순히 과거 전쟁의 역사 속에서 군주로서 국가를 경영하는 방법, 기술에 국한된 기술서라는 단순한 생각을 버리고, 군인으로서 혹은 리더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본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군주론이 바티칸의 금서로까지 지정될 만큼의 충격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다른 군주에게 읽히고 싶지 않았던 과거 군주들의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이 책은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만 하다.책은 다양한 부문에 대한 챕터별 구성으로 역사 속의 사건과 해당 군주의 실패와 성공을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실에 근거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성’과 ‘진실성’에 대한 오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과거에 대한 미래의 예측이 용이하다. 또한, 책의 내용이 단순히 과거에 한정된 진부한 내용의 열거가 아닌 현대사회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 할 수 있을 만큼의 연결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분석할 가치가 다분하다. 더욱이 마키아벨리가 단순히 한 군주의 일생과 정치 방법에 대한 제한적인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각 국 군주들의 차이점과 공통점, 통치방법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밝히면서 쉽게 필요한 부분을 뽑게 해주었다. 얼핏 보면 손무의 ‘손자병법’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자병법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오로지 손무의 생각으로 쓰여진 병법서라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더욱 현실성 깊은 책이다. 이를 통해 나는 주관적으로 ‘군주론’에 대한 완성도가 손자병법보다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와 책에 대한 우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손무의 ‘손자병법’이 전쟁에서 사용되는 병력, 화력, 기동력, 첩보 활동에 관한 이용과 사용에 대한 전술서라는 측면이 강하고, 군주론은 국가를 다스리는 ‘국가경영’적인 측면에서 군령의 면이 강한 제도와 법률적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군주론’을 크게 삼등분하여 내가 느낀 점을 나타내보려 한다.첫 번째, ‘군주론’에서 나타난 국가의 형태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만 속성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가의 형태는 세습 군주국, 복합 군주국, 시민 군주국, 교회형 군주국으로 나누어진다. 근대사회에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상에서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1990년대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사회주의의 몰락이란 과정을 보면 당치 않는 과거이고, 역사일 뿐이다. 그러나 군주국에 대한 속성과 통치체제는 현재와 비슷하거나 똑같다고 할 만큼 차이점이 크지 않다. 특히 내가 집중해서 보았던 부분은 현대와 가장 비슷한 시민 군주국이었고, 가장 신선하게 보았던 것은 교회형 군주국이었다. ‘시민 군주국’은 시민이 주인이 되는 국가형태로써 현대의 민주주의와 닮은 모습이다. 비록 규모면에서 현대사회와 비교하기에는 큰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더욱이 이때부터 선출과 대표성이라는 이름아래 군주가 결정되어 시민이라는 권력지지층을 기반으로 국가를 꾸려나가는 정치체제의 완전성이 놀라웠다. 또한, 국민 즉, 시민의 기반을 무시하는 군주의 모습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외면, 왕권에서 쫓아내는 시민의 힘은 여전히 가장 큰 힘이라고 느꼈다. 이를 통해 리더의 지침서라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던 것처럼 정치인들 역시 이 책을 통해 자기를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교회형 군주국’은 앞서 말했듯이 신선했다. 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제3국을 비롯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소 규모의 부족국가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국가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선조가 그랬듯이 애니미즘, 토템이즘 등을 숭배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그 규모가 커진다면 얼마든지 신흥 국가로써 결속력 있는 집단으로의 힘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로 대변되는 ‘종교형’ 국가는 그 사상이 있는 한 영원불멸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국가가 무너짐에 따른 종말보다 생명력이 길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구교,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와 같은 종교가 시간이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으며, 지금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신흥 사이비 종교의 영향력도 무시 못 할 만큼 커지는 것을 볼 때 ‘교회형 국가’는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국가의 형태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국가는 이념이 살아있는 한 그들의 목적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쟁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로서 국가를 통치하고 리더로서 인간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국가형태의 중심이념이 무엇이고, 통치 원리가 무엇인지 인지해야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두 번째, 다양한 국가의 군대 종류와 용병에 관한 것이다. 국가의 군대는 자국군, 외국군, 혼성군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용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용병은 손자병법에 나타나 있듯이 위험한 것이라는 손무의 의견이 마키아벨리 역시 인정하고 주장하고 있으며, 사례를 들어 더욱 자세하게 구체화 되어있다. 나 역시 이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없는 ‘군대’로 인한 국가의 위기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시대에 각 지방 호족의 사병조직으로 인한 국력 저하와 왕권과의 대립을 통한 내부결속의 부실을 우리는 직접 경험했다.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가 몽고에 의해 굴욕을 당했던 과거는 우리 역사의 치욕으로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주장인 자국군 양성은 나에게 깊게 인식되었다. 북괴의 도발로 전쟁 발발이 피부로 느껴 질 수 있는 ‘바람 앞의 촛불’인 대한민국이 꼭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장에 대한 반대 생각도 가지고 있다. 바로 외국군과 혼성군에 대한 절대적인 반대이다. 현대사회에 들어 이들의 개념은 ‘동맹’이라는 관계로 발전되었다. 이마저 외국군의 사례를 들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극단적인 배제 대상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세계 초 강대국과의 동맹관계를 통해 우리의 주적인 북괴와의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와 미국의 관계는 중요시되고 있으며, 양쪽모두 이득을 얻는 관계 즉, WIN-WIN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복잡해진 국가의 세력 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국가만의 존재는 살아갈 수 없으며,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보내는 독자노선일 뿐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이들의 관계는 이미 필수적인 세계의 정세이므로 외국군과 혼성군, 용병에 대한 개념인식을 다시 해야 되며, ‘온고지신’의 자세를 견지하여 과거의 폐해를 해결하고, 새로운 용병의 개념으로 이끌어 가는 정책과 보장을 정립해야 될 것이다.
독 후 감(‘강대국의 흥망’을 읽고나서...)□ 강대국의 흥망- 들어가면서역사가 있어온 이래 우리는 수많은 강대국들의 흥망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동전의 양면처럼 국가의 흥망은 늘 함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 역사가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강대국들 사이의 흥망에 대해 폴 케네디의 저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이 책은 1500년부터 2000년까지의 다섯 세기에 걸친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기존의 연구가 정교하지만, 군사, 경제, 외교 같은 해당 분야의 단선적인 입장에서 이 주제를 다룬 반면, 『강대국의 흥망』은 종합적인 국력의 배분, 특히 군사력과 경제성장에 대한 투자의 균형을 중심으로, 기술발전, 정치적 변동, 지정학적요인 등을 고려한 분석을 제시한다.- 강대국의 흥망처음 이 책의 표지를 보고 받은 인상은 ‘열강의 나눠먹기’ 였다. 개정판의 표지에는 영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국기를 가슴에 단 다섯 사람이 공중에 떠 있는 지구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제국주의 시절을 풍자하는 열강들이 중국 지도를 향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나누고 있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던 그림이었으니 지구 나눠먹기란 인상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먼저 1~2 장을 읽으면서 왜 서유럽 지역이 다른 지역을 누르고 부상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도상의 서유럽은 아주 작은 크기였으며 천연자원이 그다지 풍부한 것도 아니었고 이전에는 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기적”으로 까지 표현한 유럽의 부상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분산된 권력과 그에 따른 호전적 분쟁, 그리고 많은 변화는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표현된 유럽의 세력 균형이란 이미 여러 수업 시간에 거쳐 학습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여러 유럽 국가들의 노력이란 실로 눈물겨울 만큼 필사적으로 보여졌다.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논지가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관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강대국의 흥망을 좌우하는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그 점을 중점적으로 논한다면 다음과 같다.폴 케네디는 최근의 미국을 비롯해 과거의 수많은 강대국들은 기술발전과 경제성장을 통해 그 지위를 획득하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국력의 더 많은 부분을 점점 군사비에 돌리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에 치중하는 나라만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면서 경제력과 군사력 사이의 균형 맞추기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한 쪽의 덜 갖고 더 가진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 “명백한 것은 장기화된 강대국 전쟁(보통 동맹전쟁의 형태였다)에서 승리하는 쪽은 대체로 더욱 활기찬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거나 또는 스페인 장교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했듯이 아직도 자금이 남아있는 쪽이다.” 라고 주장하는 등 어느 정도 경제 결정론적인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이 책의 요지나 다른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나름대로 이 책의 문제점이랄까 혹은 폴 케네디의 한계랄까, 개인적으로 의문스러운 점을 몇 가지 나열하고자 한다. 우선 제국의 흥망성쇠를 2개항으로 국가의 재정 그리고 군사력, 군사비 지출, 이 두 가지 항으로만 설명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말한 대로 지정학 (geography), 군사 조직 (military organization), 국가의 기율 기강 (national morale), 동맹국가 관계 (the alliance system) 등도 그 변수에 포함되어야 한다. 실은 그 뿐만은 아니다. 한 체계의 위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이루는 하부체계들의 위기와 더불어, 그 참여자, 내부 참여자들의 '위기'에 대해서, 그 위기관리 능력이 왜 쇠퇴하게 되었는가도 밝혀야 한다.그리고 소련 패망 이후, 미국의 국제정치 헤게모니가 더 강화되고, 미국의 재정능력과 군사비 지출과의 관계에서, 후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미국체제는 더 공고하게 되고 있다는 점에서, 폴 케네디의 '가설' 아니 테제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군사비 지출을 늘리고, 군비확장을 해도, 그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 물론 '장기적으로 over the logner term' 이라는 단서를 폴 케네디가 달기는 했지만 말이다. 2003년 미-영 동맹의 이라크 침략- 에너지 확보 전략과 유럽-아시아(중국) 견제책-에 대해서, 분명 폴 케네디는 자기 입장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과연 조지 부시 II 는 이러한 폴 케네디의 테제 (국내 재원 조달 능력과 군사비 지출과의 긴장관계) 를 해결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