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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컴퓨터 교재 비교
    1. 교재 단원? 교과서명 : 컴퓨터 일반? 대 상 자 : 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 출 판 사 :① (주)두산 Ⅲ. 컴퓨터의 원리3. 논리 회로② (주)지학사 3. 컴퓨터의 원리2. 컴퓨터의 뇌세포③ (주)미디어코프 Ⅲ. 컴퓨터 원리1. 불 대수와 논리 회로2. 교재 단원 소개‘컴퓨터일반’ 교과는 상업 정보 계열의 공통 필수 과목으로서 정보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인으로서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더불어 정보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올바른 가치관을 기르도록 구성된 과목으로, 컴퓨터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능을 습득하여 정보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올바른 태도를 기르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내가 이번에 비교할 단원은 ‘컴퓨터의 원리’ 파트에서도 ‘불 대수와 논리 회로’라는 단원이다. 이 단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컴퓨터의 여러 부품들을 통해 설계자의 의도대로 논리적인 작동을 하도록 하는 회로도를 알아봄으로써, 회로의 기호와 그 기능에 대해 학습하는 것이다.각 교과출판사마다 각기 다른 단원구성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을 ASSURE모형에 따라 비교해보고 평가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한다.( 제7차 교육과정상의 내용 체계 )단 원영 역내 용현대사회와 컴퓨터정보화 사회컴퓨터의 이해컴퓨터 시스템컴퓨터 시스템의 구성하드웨어 시스템소프트웨어 시스템컴퓨터의 원리자료의 표현과 연산진법 변환데이터 표현불 대수와 논리 회로불 대수논리 회로가산기컴퓨터의 활용운영 체제소프트웨어의 활용컴퓨터 통신프로그래밍프로그래밍의 개요프로그래밍의 절차프로그래밍 언어프로그래밍의 실제컴퓨터의 이용 기술이용 기술의 발달컴퓨터의 이용 분야컴퓨터 과학의 미래3. 단원 내용 구성(주)두산Ⅲ. 컴퓨터의 원리3. 논리 회로불 대수란불 대수2가 상태2가 상태와 2진법기본 논리 회로논리 게이트논리곱 회로(AND 게이트)2개의 입력을 갖는 논리곱 회로3개의 입력을 갖는 논리곱 회로논리합 회로(OR 게이트)2개의 입력을 갖는 논리합 회로3개의 불 함수로 변환회로도 그리기4. 단원 내용 연구1) 학습자 분석? 일반적 특성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로써, 대부분 30여명이 한 반을 이루고 있다. 학교의 특성상 컴퓨터의 이해와 활용에 관련된 교과를 많이 학습함으로써, 대부분의 학생들은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취업을 위주로 수업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관련 자격증을 소유한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으므로, 학생들 중에서도 학습의 이해도와 활용도에 관련하여 수준의 차이가 존재한다.? 구체적 출발점 능력대다수의 학생들이 컴퓨터를 쉽고, 많이 접할 수 있으므로 컴퓨터에 관한 기본원리를 대다수 인지하고 있다. 이 단원 ‘불 대수와 논리회로’에서 불 대수의 선수학습요소는 바로 앞단원이였던 ‘자료의 표현과 연산’의 교과내용이며, 바로 연결되어진 내용이므로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논리회로는 불 대수를 이해한 학생이나 하드웨어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던 학생이라면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학습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교재별 선수능력을 표로 나타내었다.교 재선 수 학 습(주)지학사제시- 전기 회로에서 스위치를 켰을 때와 껐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자.- 전기 회로에 사용되는 스위치의 상태는 몇 가지가 있는지 알아보자.평가이 교재에서는 전기 회로를 예시로 들면서 ‘불 대수와 논리회로’ 단원의 내용을 미리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기 회로도는 초등학교 과학교과에서부터 다루어지므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에 빗대어 이번 단원에서 배우고자 하는 내용을 스위치의 상태인 켰을때와 껐을때(0과 1)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있을 것이다.(주)두산(주)미디어코프제시- 교재상에 구체적인 선수학습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평가이 두 교재에는 구체적인 선수학습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단원을 들어가기 전에 학습을 안내하는 문구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수업의 길잡이 안내를 해주고 있다.? 학습 스타일학생들은 이론적인 학습내용의 습득보다는 활동적이고 역. 불 대수와 논리 회로- 불 대수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논리회로를 구성하는 기본 회로의 작동 원리를 설명 할 수 있다.- 논리 회로의 기호를 이해하고 회로도를 해독할 수 있다.2. 2진 가산기- 2진 가산기의 연산 원리를 설명 할 수 있다.- 가산기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주)미디어코프- 불 대수와 불 함수를 알고 기본 논리 회로를 이해할 수 있다.- 불 대수의 법칙과 정리를 설명하고 불 함수를 간략화할 수 있다.- 조합 논리 회로를 설계하고 직접 회로도를 작성할 수 있다.? 목표에는 방법과 매체를 적절히 선택하고, 목표의 성취도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도와야한다. 또한 개인차를 고려하여야 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평가를 해보고자 한다.- Audience(청중)세 교과의 경우, 모두 대상이 누군지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교재가 상업계 고등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교재를 접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Behavior(행동)학습이 끝난 뒤에, 학습자들이 갖게 될 새로운 이해능력과 지식, 또한 작성능력이 학습목표에 제시되어 있다.- Condition(조건)(주)두산의 경우, 관찰되어야할 조건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알 수 있다’라고만 되어있다.(주)지학사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설명할 수 있다’라고 하여 개념의 이해를 중시하는데 반해,(주)미디어코프의 경우, ‘간략화할 수 있다, 작성할 수 있다’라고 하여 위에 교재보다 더 구체적인 학습목표를 나타내고 있다.- Degree(정도)세 교과 모두, 교재내용을 학습 한 뒤에 이를 이해하여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습득된 내용을 활용할 수 있도록 목표를 두었다.3) 교수방법 및 매체선택? 교수 방법교 재교 수 방 법(주)두산- 이 단원의 선수학습요소인 ‘자료의 연산과 표현’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피드백을 제공하고, 단원내용에 대해 설명을 한다. → 강의법- 그리고 교사의 설명보다는 컴퓨터를 이용한 회로도의 구현을 시범보이고, 학습자들이 이를 보고 참고 문제를 해결을 하도록 하여, 학습자들끼리 서로를 도움으로써 수업을 진행하도록 한다. → 동료교수법, 협동학습? 교수 매체 및 자료교 재교 수 매 체(주)두산- 강의식 수업은 학습내용의 요점들을 정리한 PPT를 사용하고, 이를 위해 컴퓨터와 프로젝트를 활용한다. 또한 칠판을 이용하여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학습내용을 제공한다.- 그리고 교수자가 학습자들에게 시범을 보일 때도 마찬가지로, 컴퓨터와 프로젝트를 이용하여 학습자들이 쉽게 따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학습내용와 관련된 동영상을 보여줄 때에는 Internet을 통하여 학습내용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한다.(주)지학사- 역시 PPT를 사용하여 컴퓨터와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에게 학습단원을 소개하고 판서를 통해 깊이 있는 수업을 진행한다.- 질문지를 이용하여 학습내용의 이해를 돕는다.(주)미디어코프- 컴퓨터와 프로젝트, 그리고 칠판의 판서를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강의내용을 전달한다.- 모둠끼리 해결해야할 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컴퓨터와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발표할 수 있도록 한다.4) 매체와 자료 활용? 교수방법과 교수매체를 기반으로 각 교재별로 매체를 어떻게 활용할 지 알아본다. 학습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대해 고려하고, 수업내용전개에 효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체를 적극 활용하여야한다. 아래의 표는 각 교재별로 매체와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고자 했는지를 나타내고있다.교 재매체와 자료의 활용(주)두산- PPT는 ‘불 대수와 논리회로’ 단원의 개요와 요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시한다.- 칠판에서는 PPT의 기본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회로도와 진리표를 그려가면서 학습자의 이해를 돕도록 제시한다.- 컴퓨터와 프로젝트를 이용하여 학습자들에게 PPT내용을 전달함으로써 수업을 한다.- 동영상을 이용하여 학습자들의 예습 또는 복습을 유도한다.(주)지학사- 마찬가지로 PPT에 학습내용을 요약하여 학습자들이 한눈에 배우고자하는 단원의 개요를 알아 볼 수 있게끔 하고, 이를 기반으로 수업을 진행함으로써 학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교과서별로 제시해놓은 특징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교수자가 어떠한 수업을 진행하고 학습자들이 이러한 수업을 통해 어떠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교 재참 여 유 도(주)두산- 단원이 시작되기 이전에 ‘컴이의 생활 엿보기’라는 코너를 통하여 어떠한 학습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들을 학습자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시켜 말함으로써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만화를 삽입하여 간략한 수업내용을 제시하여 학습내용의 방향을 안내한다.- 배우고자하는 큰내용을 간략하고 눈에 띄게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네비게이션역할을 제대로 하고있다. 또한, 각 내용에 대해 질문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학습자들에게 학습내용에 대한 안내와 함께 궁금증을 유발시켜 관심을 끌고 있다.- ‘앞선 발자국’이라는 코너를 통해 배운 학습내용을 정리하고 다음 수업내용을 제시하고 있으며, ‘스스로 평가해보기’와 ‘해보기’를 통해 학습자들에게 피드백을 제공하고 있다.(주)지학사- ‘컴퓨터의 뇌세포’라는 제목과 그에 적절한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학습자들의 관심을 끌도록 하고 있으며, 전기회로사용을 예로 들면서 학습자들에게 선수학습 요소를 전달한다.- 전기회로의 2가지 반응을 2진법에 관련시켜 학습하는 선수학습요소로 보고 있으며, ‘기초다지기’를 통해 학습내용을 습득하고, ‘탐구과제’를 통해 학습내용의 피드백을 제공한다. 또한 ‘진단해보기’를 통하여 자신의 이해수준에 대해 알도록 하여, 스스로의 학습이 가능하도록 한다.- 학습자료의 여백에 공간을 둠으로써, 그곳에 학습내용에 대한 보충내용, 또는 빈공간을 두어 학습자들이 필요한 정보를 기록해 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학습자의 편리를 배려한 것 같다.(주)미디어코프- 이 교재는 ‘불 대수와 논리회로’를 ‘자료의 표현’단원의 뒤에서 학습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학습자들이 논리회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큰제목을 들어갈 때마다 학습내용에 대한 입문문구를 제공함으로써 학습자재한다.
    교육학| 2008.12.05| 9페이지| 2,0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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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인물 장료
    장 료(張 遼) 평 가< 목 차 >>Ⅰ. 장료는 어떠한 인물인가?Ⅱ. 세 군주를 섬긴 충신Ⅲ. 뛰어난 용맹심Ⅳ. 용맹의 밑거름, 침착함Ⅴ. 인덕을 지닌 지도자Ⅵ. 조조가 인정한 장군, 장료? 현재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은 삼국지를 읽고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쉽게 삼국지를 접할 수 있는데, 그 예로 책과 만화로 연재된 삼국지, 게임으로 만들어진 삼국지 등이 좋은 예가 된다. 이를 통해서 삼국지라는 한 역사적 이야기에 접근하고, 인물들을 만남으로써 어쩌면 그들이 우리 생활 속에서 연관되어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게임을 통해서 많은 영웅호걸을 알게 되었다. 그 중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영웅호걸들에게 가려져있던 장료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되었고,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Ⅰ. 장료는 어떠한 인물인가?장료(張遼, 169~224)는 자가 문원(文遠)이고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懸) 사람이다. 본래 섭일(?壹)의 후예인데,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다. 그는 젊어서 군리(群吏)가 되었다.동한(東漢) 말,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은 장료의 무예와 힘이 다른 사람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불러서 종사(從事)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수도로 가도록 했다. 하진(河進)은 또 그를 하북(河北)으로 보내 병사를 모집하도록 했는데, 천여 명을 모았다. 수도로 돌아왔을 때, 하진은 환관에게 패하였으므로 장료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탁에게로 귀의했다.동탁이 환관들에게 실패한 후에는 장료는 병사를 이끌고 여포에게로 귀의했다. 여포가 이각에게 패하자, 장료는 여포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서주(徐州)로 달아났다.조조가 하비성에서 여포를 무찌르자, 장료는 그 병사들을 인솔하여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그 이후 관도전투에서 장기를 베고, 저곡과 오환족의 답돈을 베어 북방 등 공을 세워 조조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하비를 수비하며 오나라의 손권과 여러번 전투를 벌이는데 군사 8백을 이끌고 10만의 오군을 기습하여 마침내 합비(合肥)를 포위하고 있 간음, 학살을 만행함으로써 반동탁세력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결국은 왕윤의 계책으로 연환지계에 빠진 동탁과 여포는 위기를 맞았으며, 여포가 동탁을 죽임으로써 장료의 군주 또한 바뀌게 된다.2) 여포장료는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이각에 패하여 도망을 할 때에 그를 따른다. 이것은 위에서도 나타나듯이 일차적으로는 우정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여포를 따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군신관계라는 명분 하에 그를 따른다. 하지만 여포는 하비전투에서 부하 송헌의 배신으로 조조, 유비 연합군에 의해 죽고, 장료는 그 병사들을 인솔하여 조조에게 투항하였다.하비전투에서 관우가 장료에게 "그대와 같은 자가 어찌하여 역신(逆臣)인 여포 밑에서 일하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는데, 이 물음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역신인 여포의 수하인 장료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장료는 지식을 겸비하고 무력 또한 강하였기에 큰 인물이 될 바탕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포와 함께 다니면서 그를 돕고 따른다. 이는 친구이자 자신의 군주인 여포에 대한 의리와 충성이 아닐까. 두 번째는 진수가 장료의 충성심을 관우로 하여금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3) 조조여포가 죽은 후 장료는 조조에게 귀의한다. 조조와는 반동탁 세력의 확장 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장료는 항상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고민하던 인물로써 동탁의 수하로 있으면서 많은 혼란감을 겪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조와 같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일깨워주는 군주를 만난 장료는 조조의 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조조에게 충성을 다한다. 다음은 한 일화를 통해 조조에 대한 충성심을 볼 수 있는 일화이다.하우연과 동해(東海)에서 창희(昌?)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장료가 직접 창희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항복을 권한다. 이에 창희는 투항하기로 하고, 장료는 단신으로 삼공산(三公山)에 올라 창희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만났다. 창희는 매우 기뻐하며 그를 따라가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창희 그의 신중하고 깊은 생각에 감탄을 한다.한 평생 여러 주군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며, 충신이라면 행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료는 인간적인 정과 의리를 중요시하는 장군으로써 자신의 군주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장료는 비록 여러 주군을 섬기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주군을 열심으로 섬기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였고, 이로써 자신의 군주에게 깊은 신뢰와을 얻게 된다.Ⅲ. 뛰어난 용맹심장료의 뛰어난 무력과 용맹함을 「장료전」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몇 가지 예를 찾아보면,진란(陳蘭)?매성(梅成)이 저족(?族)의 거주지인 여섯 현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매성은 그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진란에게로 달려가 첨산(?山)으로 돌아 들어갔다. 첨산 속에는 높이가 20여리나 되는 천주산(天柱山)이 있는데 길이 좁고 험난하여 걸어서만 통과할 수 있는 곳이다. 진란 등은 산 위에 진영을 설치했다. 장료가 나아가 공격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병사들도 적고 길 또한 험난하여 위험하다고 만류한다. 이에 장료는 “이것은 한 사람 대 한 사람의 전투요. 용맹한 사람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소.”) 라고 하며 공격을 진행한다. 결국 산 아래로 진군하여 진영을 두고 공격하여 진란과 매성을 죽이자, 그들의 부하는 전부 포로가 되었다.이 전란의 상황은 매우 불리하고도 위험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료는 지형과 군사수의 불리함을 이겨내고 많은 포로를 얻음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이는 오로지 그의 뛰어난 용맹심 덕분이었으며, 이것은 그를 지지해주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것이다.또 다른 하나의 예로, 장료의 가장 큰 공으로 남는 합비대전에서 그의 용맹함을 엿볼 수 있다.조조가 한중을 정벌하러 갔을 때, 합비에는 장료와 이전, 그리고 악진만이 7천병사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에 손권이 침공하여 10만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자 여러 장수들은 선뜻 공격을 하려하지 않았다. 이에 장료는 용기 있는 병사들을 모아 8백 명의 정라는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기가 울음을 그친다." 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만큼 그의 용맹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으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많은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자신의 할 임무를 다하였다.이 밖에도, 여포의 휘하에 있을때는 여포에게 불같이 덤벼드는 하후돈의 창을 막아내었고, 황개에게 죽을 뻔한 조조를 구출해 내었으며, 적벽대전의 후방을 맡아 조조군의 장수들을 탈출 시키는 등 극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군주를 위해 침착함으로 일관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Ⅳ. 용맹의 밑거름, 침착함장료가 이처럼 많은 공을 세우고, 현재 위의 맹장으로 남게 된 연위는 모두 그의 침착함에 바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장료의 침착함으로 인해 오의 첩자를 잡아내는 한 일화이다.장료가 형주로 출발하려고 할 때, 군중(軍中)에서 어떤 자가 모반을 하여 밤사이에 군중은 혼란스러웠으며, 불을 놓았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불안해했다. 장료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망동하지 마라. 이것은 한 진영 전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반을 하려는 자가 있어 인심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일 게다.”) 그리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모반하지 않은 자들은 편안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 장료는 친히 병사 수십명을 이끌고 군영 중앙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을 평정시키고, 모반을 주동한 자를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이 때는 손권의 침공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로, 이 모반의 주동자로 재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때에, 장료가 이 모반의 진실을 침착하게 바라보지 않고 허둥지둥했다면, 성문이 열리고 오군이 침공하여 큰 화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료는 침착하게 주변의 상황을 정리하고, 이를 알아냄으로써 오히려 모반의 근원을 제거하였다. 이것은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있는 현대인에게도 많은 배움을 시사하는 점이다.Ⅴ. 인덕을 지닌 지도자장료는 침착하고 바른 성격의 소유자로 여러 인물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다.1) 조조앞서 본바와 같이 조조는 자신의 휘하에서 많은 공면, 군대를 지휘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안정되게 하고, 명령을 존중하여 받들고 군기를 어기지 않고, 적을 만나면 과단성있게 행동하는데 어떠한 실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공적을 논하여 기록하고 응당 각기 포상과 은총을 주어야 합니다.)이 내용은 「악진전」에서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조조가 헌제에게 장료, 우금, 악진을 칭찬하는 내용이다. 이 표(俵)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는 장료를 비롯한 장군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관우관우와의 인연은 여러번의 사건이 있었다.)먼저, 앞서 하비전투에서 관우와 장료의 대화에서 본 바와 같이 관우는 장료의 용맹을 크게 평가하면서도, 여포의 수하로 충성을 다하는 그를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후에 조조?유비 연합군에게 패하여 여포가 조조에게 죽으면서, 장료도 함께 죽이려고 한 것을 관우가 조조에게 간청하여 막는데 이것 또한 둘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마지막으로, 조조군에게 패하여 서주가 함락되면서 유비와 장비는 원소에게로 가고, 하비성을 지키던 관우는 조조군에게 항복하였는데, 이때에 관우는 유비가 죽은 것으로 알고, 유비를 따르기위해 자결하려고 한다. 이에 장료는 관우를 세가지 이유를 들어 만류하였는데, 이는 함께 조조의 휘하에 들어온 유비의 두 부인을 두고 자결하려는 점, 만약 유비가 살아 있을 시 의형제를 저버리는 점, 죽음으로 한나라에 공을 다하지 못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관우는 결국 조조의 휘하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유비가 나타나면 바로 떠날 것이라는 약속을 함으로써 후에 관우에게 적토마를 줌으로써 그의 천리행을 돕고, 이를 바탕으로 끈끈한 둘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3) 부하합비대전에서 단지 800명의 정예병만을 다스리고 손권의 10만 부대를 뚫어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포위 되었다. 장료는 좌우로 맹렬히 적을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었고, 부하 수십 명을 인솔하여 나왔는데, 남아 있던 사병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장군! 우리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
    인문/어학| 2008.12.05| 7페이지| 2,000원| 조회(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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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사시대유적지, 춘천 중도
    중 도이 유적 전시장은 약 2천년 전인 청동기 시대 말기에 이곳 중도를 중심으로 북한강 유역에서 이루어진 선사시대 문화유적을 모아 놓은 곳이다.유적의 내용은 옛 사람들이 살던 움집모형을 비롯하여 당시 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 돌무지무덤 등으로써 주로 중도에 있는 유적을 옮겼다던가 또는 학술적인 고증에 따라 실물과 같은 모형을 만들어 당시 생활의 한 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수천년 전 이곳에 터 잡고 살던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역사적 기념물에서 향토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주변의 문화유선을 더욱 소중히 하자.춘천시가지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는 중도는 호반의 정취를 만끽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도심 속 낭만의 섬이다. 특히 주변의 춘천댐, 소양댐, 삼악산, 구곡폭포 지역과 연계되어, 춘천권 종합관광단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중도는 지리적으로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에 모래가 쌓여 형성된 삼각주(三角洲)이다. 그래서 원래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의암호가 담수되면서 중도는 완전한 섬으로 변해 배를 타고서만 들어 갈 수 있었다. 중도는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서면지역의 뱃길을 개설하기 위해 섬의 가운데를 자른 것이라 하였다. 그 중 위쪽 섬을 상중도, 아래쪽 섬을 하중도라 부르는데, 관광지로 조성된 곳은 아랫섬인 하중도였다.중도유원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중도 선사유적 전시장이다. 이곳은 소유진, 박광현 주연의 드라마 '내인생의 꽁깍지'에서 고인돌 등을 배경으로 나왔으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에 이르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적이 고르게 발견된 선사유적의 보고(寶庫)로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존재하고 있는 유물로는 고산(孤山)), 신용연 용신제의 유래가 된 곳, 북방식 석관 무덤 4개와 선사시대 무덤으로 불리는 적석총을 포함해서 지석묘군 수혈식 주거 등의 선사시대 내륙지방의 문화유적이 많이 출토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졌거나 남아있지 않은 다른 한강 유역의 선사시대 유적들보다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고, 교육과 수련을 함께 할 수 있는 관광단지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중도의 유적지는 1985년 7~10월까지 복원사업이 이루어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약 2천년 전인 청동기 시대 말기에 중도를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의 선사시대 문화유적을 모아 적석총 2기, 고인돌 2기, 움집5동이 복원되어 있는데, 움집은 3년을 주기로 재정비한다고 한다.왼쪽사진은 중도의 입구에 중도의 선사유적전시장을 소개한 표지판이다. 사진을 보면 의암호가 있는 왼쪽에 유물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중도의 잔디밭이다. 많은 잔디와 나무로 상쾌한 공기를 만날 수 있었다.두 사진은 중도의 외곽을 두르고 있는 자전거도로이다. 양옆으로 나무들이 심겨져있었고, 그 옆으로는 의암호가 보인다. 경치가 정말 좋았다^ ^보물Ⅰ - 고인돌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로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만든 무덤이다. 이 같은 무덤인 고인돌은 지상에 4개의 판석을 세우고 덮개돌을 덮은 이른바 북방식 지석묘와 바둑판과 같이 덮개돌 밑에 몇 개의 돌을 고인다던가 또는 덮개돌을 전혀 고이지 않은 이른바 남방식 지석묘 등이 있다.이곳 전시장에 전시된 고인돌은 3기이며 그 중 북방식 지석묘 1기는 소양댐을 건설할 때 수몰지구 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고, 그 밖에 2기는 이곳 중도 북쪽에 자리하고 있던 것을 발굴 조사한 후에 이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 고인돌을 만든 시대는 기원전 2~3세기로 보며 덮개돌 밑에 마련된 매장시설 주위에 상당히 많은 강돌을 깔아 놓은 특이한 것도 있다.중도 내의 고인돌은 처음에는 땅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는데, 섬이 되고 침식되면서 고인돌이 형태를 나타냈다고 한다. 이를 1983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1호 고인돌의 덮개돌 형태는 삼각형이며, 규모는 길이 270cm, 폭 196cm, 두께 40cm에 달하는데 장축 방향은 동-서방향이라고 한다. 덮개돌 밑에는 강돌을 타원형 모양으로 둘러놓아 적석시설을 하였으며, 하부구조로는 길이 191cm, 폭 94cm, 두께 13cm의 판석과 길이 171cm, 폭 81cm, 두께 90cm의 판석을 이용하여 짠 석관이 발견되었다. 이 고인돌 내부에서 토기 조각과 돌도끼 1점, 야간의 숯과 뼈조각이 나왔다고 한다.2호 고인돌은 처음 발견됐을 당시 덮개돌까지 땅속에 묻혀 있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90cm, 폭 90cm, 두께 9~20cm에 달한다. 덮개돌 아래에서는 길이 56cm, 폭 40cm, 두께 17cm 크기의 뚜껑돌이 덥힌 석관이 발견되으며, 석관의 안에서는 10살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뼈조각과 숯조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첫 번째 사진은 중도의 고인돌이고, 두 번째 사진은 춘성추전리 고인돌이라고 한다. 언덕의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진기의 줌(Zoom)기능을 이용하여 찍을 수 있었다.중도의 고인돌, 보는 바와 같이 팻말과의 크기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생각했던 바와 많이 작은 모습의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세 개의 고인돌은 모양과 구성에서 각각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보물Ⅱ - 적석총강원도 기념물 제 19호이 돌무지무덤은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하나로, 시신 놓이는 곳을 마련한 뒤, 그 위에 냇돌과 깬돌을 쌓아 봉분을 만든 무덤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이곳에는 2기가 있는데, 1기는 1981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이 무덤은 모래 위에 만든 것으로, 시신을 나무곽에 넣고 그 위에 강돌을 쌓은 후 사이사이에 흙을 메워 봉분을 만들었다. 원래의 크기는 지름 14m, 둘레 44m, 높이 5m 정도였다. 이 돌무지무덤은 만주와 압록강 부근에 있는 고구려 계통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이 무덤에서는 청동으로 만들 귀걸이와 쇠칼, 쇠못, 쇠화살촉 등과 민무늬그릇 조각, 눌러찍은무늬그릇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약 2~3세기 춘천 일대에서 권력을 잡았던 지배계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나머지 1기는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적석총은 중도에 있는 원삼국시대 무덤이다. 중도는 옛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지리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어 선사시대 집자리와 무덤유적이 남아있다. 중도 남쪽 끝에 있는 2기의 돌무지무덤(적석총) 중 1981년 1기에 대해 발굴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4변의 길이 15m이고 높이는 4m로 강돌을 이용하여 벽을 만들었다. 내부는 모래와 흙을 얇게 깔고 그 중앙에 강돌로 널방(현실)을 만들었으며, 널방 위와 주변은 다시 돌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 내부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 조각과 청동제 귀고리, 작은 쇠칼, 쇠화살촉을 비롯한 철기제품이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편과 주변의 집자리에서 나온 토기편을 비교해 본 결과, 무덤주인은 2∼3세기경 이 지역 지배자로 추정된다.
    인문/어학| 2008.12.05| 6페이지| 1,500원| 조회(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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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물을 통해 본 가야 평가A+최고예요
    유물을 통해 본 가야Ⅰ. 서론Ⅱ. 본론1. 가락국 = 금관가야1) 알터2) 고분벽화3) 산성2. 반파국 = 대가야국1) 고분1) 수로왕릉1) 구지봉Ⅲ. 결론Ⅰ. 서론가야(伽倻)는 백제(百濟), 신라(新羅)와 함께 동시대에 건국되어 6세기까지 독자적인 문화와 주체적인 역사발전 속에서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사료로는 가야를 삼국 시대의 틀에 의해 백제와 신라 사이에 존재하다가 병합되어버린 작은 소국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나는 가야지역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가야민족의 문화와 우수성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가야는 많은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중 큰 세력을 가진 소국은 5~6개 정도로 압축되었다. 소국들은 소규모의 독립국가로 이들 5~6개 국가 주위에 인접해 있으면서 큰 국가를 중심으로 몇 개의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때 형성된 세력권은 김해의 본가야권, 고령과 대구중심의 대가야권, 함안 · 진해 · 창원 · 칠원 중심의 아라가야권, 충무 · 고성 중심의 소가야권 등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1~4세기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큰가야’였고, 5~6세기에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였다. 가야사에서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1. 반파국 = 대가야국대가야는 경상북도 고령을 도읍지로 했다. 고령군 지방은 안정적인 농경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에 걸치는 청동기시대 주민들이 살아온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많다.1) 알터암각화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대가야의 전신인 변한 ‘반로국’의 초창기 국읍이기도 했던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의 알터마을 입구에 있는 알터암각화는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바위이다.알터암각화에는 여러 개의 동심원과 네 개의 구획으로 구분된 직사각형 등의 문양들이 새겨져있다. 이것은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태양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으로, 태양 숭배가 행해졌던 청동기시대에 농경에서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락국기에 나오는 계절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알터’에 이 바위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후한(後漢) 광무제때 구간(九干)이 귀지봉에서 노래를 부르자, 6개의 알이 든 금궤가 하늘에서 내려와 뒤에 옥동자가 탄생, 가야국을 다스렸다는 건국설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 지방에 형성된 정치 세력의 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가야산 산신과 하늘 신이 감응해 두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가야산 줄기를 타고 하천으로 흘러 내렸다는 것. 그중 하나는 이 곳 회천에서 껍데기를 벗고 나와 대가야의 1대 이진아시왕이 됐고, 다른 하나는 낙동강을 타고 경남 김해까지 흘러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암각화 주변 일대에서는 민무늬 토기 및 간석기가 출토된 적이 있어 암각화가 이들 유물과 같은 청동기 후기의 유적임을 알 수 있고, 청동기시대에는 개진면 양전리 일대가 고령군의 문화중심을 이루면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2) 벽화고분고아동고분벽화는 동서길이 25m, 남북길이 20m, 바닥에서 봉토 정부까지 높이 6.5m로, 벽화고분의 구조는 현실과 연도를 갖춘 횡혈식 석실분이며 봉분 천장에는 활천장을 하고, 굴식돌방무덤에 부부로 추정되는 2기의 관이 동쪽과 서쪽에 놓여 있으며, 바닥에는 수로를 만들어 놓은 특징이 있다.벽과 천정에 회로 미장을 한 뒤에 벽화를 그렸는데, 천장의 축조방법이나 바닥의 도랑 등은 백제지방 무덤 방식과 비슷하여 가야지방이 6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후원을 받으며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던 대가야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고,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아 매장문화에 큰 변화가 왔음을 알 수 있다.벽화는 회칠을 한 뒤 벽화를 그렸으며 현재는 대부분 탈락되고 석실과 천정에 적색, 녹색, 갈색을 사용하여 그린 연화문이 12-13개와 구름무늬 일부가 남아 있다.연꽃은 죽은 사람이 극락세계로 가서 살 수 있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그려진 것으로 불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지배층의 내세관까지 영향을 받아 출현하였고, 고아동벽화고분의 주인공은 그 의미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즉, 가야에 불교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3) 산성대가야 도읍지와 왕궁을 지키던 산성이었다. 성의 구조는 산의 가장 높은 곳과 동쪽의 능선을 따라 둥글게 흙으로 쌓은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시작하여 타원형으로 돌을 쌓은 외성으로 된 2중 성벽을 가지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계곡 쪽으로는 견고하게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외성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먼 곳에서 전체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며, 성 안에 우물터와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 있다. 외성의 서남쪽에 연결된 봉우리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성이 딸려 있다.성내에서는 인근의 지산동 고분군에서 나오는 것과 유사한 각종의 가야 시기 토기편과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및 조선시대 유물도 출토되고 있어서 성의 사용 기간이 매우 길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이 산성을 중심으로 가야의 왕궁터로 추측되는 연조리 성지의 주변에는 가야 시기 이래의 규모가 작은 성터들이 외곽에 많이 분포하고 있고, 이 성터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능선 위에 대규모의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어서 대가야의 왕성과 관계가 깊다고 여겨진다.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로 토기를 만들고, 철을 교역하면서 ‘가라국’으로 우뚝 선 대가야는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영토를 넓혀 밖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적으로부터의 방어망 구축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400년대 후반부터 궁성의 1차 방어를 위해 주산성을 쌓은 대가야는 고령읍 본관리산성, 장기리 망산성, 운수면 운라산성, 성산면 풍곡산성 등 궁성의 외곽 방어망도 잇따라 구축했다.따라서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고,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령주산성은 도시가 곧 국가였던 가야의 500년 역사를 지키려는 대가야의 최후의 요새였다.2. 가락국 = 금관가야김해지방을 도읍으로 하는 가락국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패총 등의 유적을 통해 보인다. 이들은 빗살무늬토기를 제작하고, 주로 어로 생활을 통해서 생업을 이어왔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지석묘 가운데에서도 김해 무계리 지석묘처럼 청동화살촉과 의례용 간돌검이 부장된 것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지석묘 축조 세력 상호간의 우열의 차가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1) 고분1세기 말의 유적인 양동리 55호 고분에서는 검, 경, 옥의 조화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제정 일치적 지배자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으나 경제적인 부나 무력 독점적인 권력은 충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양동리 162호분은 가야의 대형 목곽묘로서 묻힌 사람은 세형동검에서 발전한 쇠단검 6자루와 길이 60센티미터의 대형 쇠투겁창을 비롯하여 다수의 쇠투겁창을 소유하여, 강력한 권력을 가진 신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는 당시의 화폐로서 부의 상징인 판상철부를 목관 네 모서리에 다량 깔고 있고, 주술적 힘의 상징이라고 보이는 청동기거울과 많은 구슬을 꿰어 만든 화려한 목걸이로 치장되었다. 그러므로 양동리 162호분의 주인은 주술적인 힘과 재력 및 정치적인 권력을 모두 갖춘 소국의 수장이었음을 알수 있다.2) 수로왕릉서기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금관가야)을 세운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이라고도 한다. 그 규모는 지름22m, 높이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과 숭안전, 안향각, 신도비각 등이 배치되어있다.홍살문은 주로 능이나 궁전, 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으로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두 줄의 대로 기둥을 고정시키고 가운데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대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홀수로 세우는데, 이는 신성지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인문/어학| 2008.12.05| 6페이지| 1,500원| 조회(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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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해군과 인조, 노무현과 이명박
    미래를 내다보는 역사1. 광해군과 노무현1) 광해군2) 노무현3) 공통점2. 인조와 이명박1) 인조2) 이명박3) 공통점3. 노무현과 이명박역사 속에서 우리는 선조들의 생활과 지혜를 엿볼 수 있고, 돌고 도는 역사의 순환 속에서 지금 현재의 모습을 바로보고 조망할 수 있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인조대와 정치적인 모습에서 비슷한 면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정부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양란과 같은 국란을 겪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가운데, 그 모습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고, 현재의 실태를 알아보고자 한다.1. 광해군과 노무현1) 광해군광해군은 선조의 대를 이어 조선의 왕에 오른 임금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 오를 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 주된 이유는 후궁의 아들로 선조의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장자가 미처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몽진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총명함을 인정받고 있던 광해군은 비록 자격이 충분치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위기 상황이 해소되고 선조의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인목대비의 몸에서 뒤늦게 태어나고 세자책봉 문제에 대해 인목대비 측의 공격이 만만치 않아 어려움을 겪지만 선조의 죽음으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 마침내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하지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이들의 존재는 광해군에게 항상 위협이 되었고, 왕권 안정을 위해서 이들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폐했다가 증살하고(살제), 인목대비도 대비 자리에서 쫓아내 서궁에 유폐했다(폐모). 그리고 당시 중국대륙에서 명이 쇠퇴하고 청을 세우는 후금이 흥기하던 때였는데 광해군은 후금에 대해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통해 중립외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정세력들은 오랑케를 섬기는 짓이고,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준 명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해서 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이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아 1623년 서인들이 광해군을 체포하였학교 졸업 후 사법고시를 치르고 대전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의 변론을 맡으면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또한 6월 항쟁이 앞장섰으며, 대우조선사건 때 이석규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치 처분을 받는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부산에서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날카로운 질문과 정연한 논리로 전국적 지명도를 획득한다. 그리고 통합민주당 대변인, 대통령 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후에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 지구당 위원장, 해양수산부장관,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해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임기 중에는 대통령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에 대해 거절하자, 2004년 3월 국회는 본회의에서 193대 2로 탄핵소추를 의결하여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되었고, 고건 국무총리의 권한대행 체제로 들어섰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5월에 열린 탄핵심판 선거공판에서 기각결정을 내려 탄핵사건은 종결되었다.3) 공통점첫째, 먼저 민심의 의견을 중요시했다.광해군은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고, 노무현 전대통령은 서민출신이다. 따라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데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선시하였다. 이같은 점은 광해군이 왜란으로 파탄난 경제 살리고, 도탄에 빠진 민생 구제책의 일환으로 당시 인민들에게 엄청난 폐해를 끼치고 있던 공납제도의 대혁신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이 대동법인데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적인 제도였다.둘째, 왕으로의 입지가 불안정하고, 주변 환경이 크게 다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으로 임기를 마침으로써 노무현 전대통령의 개혁적인 정치를 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임기 내내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인 ‘기득권 카르텔’에 의해 공격받고 상처받았다.셋째, 두 지도자의 자주적이며 실리주의적 외교 전략이 인상적이다.광해군은 국제관계에서는 기미자강책으로 나타나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펼쳐나감으로써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권이 강화되어 정치질서가 바로잡혀 갔으며, 후금에 대해서도 세련되고 융통성이 있는 정책을 폈다. 노무현 전대통령 또한 임기 동안에는 이라크파병이 있었는데, 이것은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 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간의 동맹관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파병을 함으로써 다시 관계를 다질 수 있었고, 이것은 석유가 많이 있는 이라크 재건사업에 동참할 수 있음으로 국익을 장려한 것이다.네 번째, 인조반정과 노무현탄핵을 뽑을 수 있다.광해군은 정치적으로는 대북세력이 독주하면서 폐모살제라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나아가 서인과 남인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반정세력에게 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리고 노무현 전대통령은 기득권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가지 법안을 마련했지만 결과는 조중동의 악날한 반대와 이를 옹호하는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상당수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적 기반이 없던 두 지도자는 개혁을 추진하다 기득권 세력에 밀려 낙마했다는 점에서 같다는 의미다.다섯 번째,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광해군의 나라는 수없이 변화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지만 폐모살제와 외교정책으로 인해 성리학적 예와 충을 저버린다. 이것은 유교적 논리에 이데올로기 되어있던 민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되었으리라. 노무현 전대통령의 시대에는 많은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정작 서민들을 위한 경제민주주의 실현을 하지 못하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수구기득권세력에 의해 부족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버리지 못했다.하지만 광해군의 재평가가 활발해지면서 정치세력 있다. 이들은 결국 성공한 지도자가 아닐까 생각된다.2. 인조와 이명박1) 인조반정군이 옥새를 거두어 선조의 계비로 왕실의 제일 어른이었던 인목대비에게 바치고, 그 인목대비의 권유라는 형식을 빌려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가 바로 인조이다.인조대의 정치는 서인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인들이 일부 등용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광해군대에 정권을 장악했던 북인, 특히 대북세력들은 대부분 죽거나 축출되었다. 인조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조선 후기 내내 집권세력으로 이어진다. 반정 주체세력과 그 후예들이 조선 후기 내내 권력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반정에 대해서는 주체세력의 입장에서 내린 ‘반정’이란 평가가 일방적으로 전파, 전래되어왔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세력들은 대외관계나 사회경제정책에서는 광해군대의 정책을 계승?발전시킨 부분이 적지 않아 결국 지배세력의 교체에 불과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2) 이명박노무현 전대통령의 뒤를 이어 1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있을 때 6·3사태를 주도해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이듬해 현대건설(주)에 입사해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인 35세에 최고경영자가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별칭을 얻었다. 1992년부터 정계에 몸담아 제14·15대 국회의원을 거쳐, 한나라당 후보로 민선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해 같은 해 7월 1일 취임하였다. 그 밖에 해외건설협회 업계 대표회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대한수영연맹 회장, 6·3동지회 회장,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운영이사회장 겸 부회장, 한국청년실업인협회 회장, (재)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제15대 대통령선거 신한국당 서울시 선거대책본부장, 한나라당 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 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2007년 8월에 경선을 통해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대선에서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CEO출신으로 많은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 하지만 그 지지율이 무색할 만큼 많은 국민들을 이뤄낼 수 있을지 주목되어진다.3) 공통점첫째, 시작이 성급하고 서툴렀다.인조대에는 정권 교체 초기에 서인들이 광해군 때의 것이라면 모조리 개혁하고자 하고 폐지해서는 안 될 것도 고치고자 했다. 하지만 위에도 설명하였듯이 지배층의 교체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으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높은 경제성장을 이뤄낸다는 국민들과의 약속아래 부작용이 훤히 보이는 대운하, 한국인의 체질상 광우병이 100%로 감염된다는 쇠고기 수입, 사교육비를 줄인다면서 영어교육의 전면화, 자유경쟁체제로 국민 괴롭히는 의료민영화, 공무원감축 등의 실시는 벌써부터 커다란 시련을 예고한다. 우리 국민을 위하고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큰 포부로 시작한 것은 좋지만, 그것이 국민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결국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둘째, 기득권 세력들은 정치보다 개인적인 이권을 챙기고자 하였다.개혁은 하고자 하는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수구기득권이 하는 개혁은 그 전보다 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쪽으로의 개혁이죠. 즉 인조대에 서인들은 총 53명에 달하는 인조의 공신들은 광해군 정부의 인사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이명박이 꼭 기득권 세력들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 펼치려고 하는 정치들을 보면 서민들을 죽일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의료민영화를 들 수 있다.셋째, 외교적 전략에 실패했다.인조대에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청)과의 외교를 경시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우방과의 관계회복을 집권의 명분으로 걸었던 인조로서는 광해군의 균형 중립외교를 그대로 지속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진행되면서 실패한 외교전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 또한 친미주의로 나아가는 듯 하다. 쇠고기 수입과 대북관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명분과 실리 사이의 균
    경영/경제| 2008.12.05| 6페이지| 2,000원| 조회(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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