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논리1. 중동분해의 시나리오1978년 4월 27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소련의 원조에 의해 수립되어 5년이 지속된 다우드 정권은 무너지고 공산당정권으로 대치되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군이 일으킨 것으로 가장되었으나, 사실은 소련군이 몇 년을 계획하여 직접 개입해 감행하여 꾸민 일이었다. 다우드 대통령이 소련을 멀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에 뺏기지않게 하기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조 약속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소련인 파일럿에게 폭격으로 살해되었던 것이었다. 또 소련은 쿠바군을 이용해 앙골라와 이디오피아를 점령 하였다.이것은 소련의 ‘ 하틀랜드에서 림랜드로. ’ 라는 오랜 러시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 이었다. 하틀랜드는 심장을, 림랜드는 변두리 지역을 뜻하는 말으로 대륙의 심장부에 있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을 거쳐 인도양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말한다.소련은 히틀랜드를 지배하는 나라로서 ‘ 히틀랜드에서 아프리카로 ’ 라는 오랜 꿈을 갖고있었다. 마킨더는 ‘ 하틀랜드를 제압하는 자는 전세계의 섬을 제압한다. ’ 고 말했다. 전세계의 섬이란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합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틀랜드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회랑이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소련은 우선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머스캣오만, 예멘, 소말리아, 이디오피아, 앙골라에 걸친 회랑을 형성하고 싶어한다. 이어서 이를 연장하여 아프리카 남단, 인종차별로 유명한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에 의한 혁명을 성공시켜 이것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어 케이프타운의 끝까지 소련의 회랑에 편입시켜, 하틀랜드=아프리카 회랑을 형성하고 싶어한다. 그후에는 오만 해방전선을 원조하여 여기에 공산주의정권을 세우고 팔레스타인을 독립시켜 공산화하면 하틀랜드=아프리카 회랑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해협, 즉 페르시아만의 입구인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 입구인 베베르만데브 해협을 소련이 완전히 봉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석유의 루트가 단절될 뿐만 아니국은 최종적으로 소련의 유군이 터키에 대거 침입할 경우, 도저히 방위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 1979년, 필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터키 내부에 혁명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며, 터키 정권이 친소적인 정권으로 변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최정적인 방위선은, 페르시아만에서 쿠웨이트, 레바논을 연결하는 선, 즉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선을 육상의 방위선으로 하고, 지중해를 지나 아드리아해를 거쳐 이탈리아의 북부에서 나토 제국 및 덴마크,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선을 지키는 것이 미국의 본심이 아닌가 한다. 일반 병력에서는 압도적으로 소련이 강세에 있으므로 만일 소련이 나토군을 공격하면 약 2주일 안에 영, 불 해협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전에 독일은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소련과 국굘르 조정하는 쪽으로 나가, 나토에서 탈퇴하여 중립적 경향을 띠고, 즉 이란처럼 나토,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버리고 중립적인 경향을 취하여 소련과의 군사적인 대결을 피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되면 나토에서 독일을 따라 프랑스도 탈하게 되고 소련은 싸우지도 않고 독일과 프랑스를 얻게 된다.이런 소련의 팽창 상황은 징기스칸 제국과 비교 할 수 있는데 동남아시아에서 몽고군이 인도네시아까지 침입했듯 소련이 베트남이라는 앞잡이를 시켜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를 제압할 가능성도 충분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말래카 해협을 방위하려고 하지않고 뉴기니에 이르는 선만을 지키려 할지도 모른다.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오랫동안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화해했다. 이것은 미국의 카터대통령이 1979년 직접 현지를 방문하여 ‘ 미국이 기본적으로 방위할 수 있는 것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선이며 이란과 터키는 기본적으로 이미 방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력 대립을 계속 할 것인가? ’ 라고 설득했던 덕이었던 것 같다. 또 요르단과 사우디는 내심 찬성했기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 정보기관덕에 사다트 대통령은 볼 때 남태평양으로 세력을 펼치기위한 최고의 지역이며 솔로몬 군도 또한 일본이 수군기지로 이용했을 만큼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장차 일본에 소련의 압력이 강하게 가해질 경우,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의 남쪽인 미크로네시아로부터 뉴기니, 솔로몬 군도,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친 광대한 해면을 방위 공간으로 생각하고 대륙으로 부터의 소련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의미 에서도 솔로몬 군도와 일본은 극히 친밀한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다.시베리아 출정에 이어 만주사변, 인지사변에 걸쳐 일본은 방대한 국방예산을 대륙 내부에 낭비해 버린 셈인데, 이렇게 대륙 내부의 작전에 쓴 돈을 해군력을 더 한층 충실히 하고 조선소의 확장, 제철소의 정비, 기술혁신, 상선대의 정비, 석유의 비축 등에 사용했더라면 일본이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남태평양을 제압하는 건 쉬운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솔로몬 군도 결전에서 미군의 물량에 압도해 패배했지만 무기의 여유와 미드웨이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미군은 구아들카낼 반격 상륙작전을 감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그 후의 형세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고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지는 것이 아니라 물량의 다소에 관계없이 그때 그때의 형세라던가 시간의 운, 혹은 전쟁 지도자의 단호한 결의 등에 의해서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남지나해를 제압하는 자는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압한다란 스파이크만의 테제는 남지나해에 소련 해군이 들어오면 마침내 인도네시아가 베트남이나 소련의 수중으로 들어가 공산화될 경우 일본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된다면 중동의 석유 수입을 말라카 해협이나 론복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없어 오스트레일리아 남쪽으로 우회하여 미크로네시아를 경유해야만 하고 이로 인해 다시금 솔로몬 군도와 미크로네시아군도의 중요성이 부각된것이다. 일본상선 호위능력이 갖춰지지서서 중소의 대립이 심화되어 중소의 무역이 감소일로를 보인 점. 넷째, 맥나라마 미 국방장관이 제창한 투자효용론이 국가계획위원회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현재 세계에서 철강생산6천만톤 이상인 국가는 미국, 소련, 일본 3개국뿐이다. 이 3개국이 앞으로의 세계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증거이다. 또 이것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선 새로운 정보관리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며 그것이 21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브레즈네프 코시긴 정권이 내놓은 제 8차 5개년 계획은 유전개발에 주력하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가깝고 투자효력이 좋은 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유전개발에 주력하는 이유는 유럽 러시아와 동유럽에 에너지 부족 문제 때문이다. 에너지 수급의 균형을 되찾아 다시 영향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소련은 츄메니 유전지대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지금까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석유공급은 소련이 독점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련의 동유럽 지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브레즈네프 코시긴 정권은 극동지역에 투자를 대폭적으로 삭감하고 모스크바에 가까운 우랄산맥근방에 집중했다. 이것은 하틀랜드 개발보다 림랜드에 군사적 진출을 본격적으로 지향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제 9차 5개년 계획의 특징은 에너지와 정보에 중점을 둔 것 이다. 경영 정보 부문에 대규모 컴퓨터를 투입하겠다는 점이었다. 소련이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사이버네틱스나 조직공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이는 미국과 소련의 컴퓨터 시스템 수준의 현저한 차이의 원인이기도 하다. 국가를 지배하는 데에는 획기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은 국민군을 편성하여 유럽을 석권했고 독일은 합동참모부 시스템을 개발하여 나폴레옹 시대의 개인이 주도하는 전쟁이 아니라 집단이 주도해는 조직적인 전쟁을 시행해 당시 유럽 최강의 육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제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정보화 컴퓨터화를 통한 비밀 전략기구이다. 고도로 조직는 것은 모두 소련의 영토다’라는 선상이론으로 북빙양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하였고 북극 방면에 방공군 50만, 방공전투기 3천 5백대, 레이다 4천기, 대공 미사일 1만발을 갖추었다.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쓰가루 해협은 평소에 얼음이 얼지 않아 안전하지만, 유사시 일본에 영해라 봉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제 2차 대전 후 스탈린이 훗카이도 진주를 요구한 것이며 후카이도 주민들에게 소련의 호적등본을 마련하는 등 지속적으로 이곳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북빙양 항로의 중요성을 알고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쓰가루해헙을 제압하는 자는 북해를 제압하고 북빙양 항로를 제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소련이 훗카이도와 한국을 점령하면 미국도 막아낼 수 없으므로 일본은 이런 중요한 위치의 훗카이도를 잘 지켜내야 한다.7. 동북아시아 지정학20세기 초엽에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시행하여 만주와 한반도로 남하했고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또다시 남하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데 그것은 극동과 동시베리아만으로는 도저히 동아시아 지배가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주를 지배하는 것이야 말로 경제적으로 보아 동북아시아를 제압하는 절대 조건이다. 러시아가 메이지 유신 전에 쓰시마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을 보면 이러한 남하는 한반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동남아시아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만주를 제압하는 자는 동북아시아를 제압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청나라와 몽고제국, 만주에 근거를 둔 세력들이 동북아시아와 동아시아 전체를 제압하는 선례가 있기 때문에 타당한 말이다. 러시아처럼 군사 능력이 강한 민족이 만주를 제압했을 경우 당연히 동북아시아는 그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만주는 동시베리아나 극동지역에 비해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그리고 일본이 남겨둔 공업적 기반을 갖고 있어 경제적으로 매우 가능성이 큰 곳이다. 만주를 차지하면 지하자원뿐 만 아니라 러시아가 원하는 여순 대련 항구와 같은 부동항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동북아 있다.
설탕과 권력얼마 전 팬시 가게에서 동생의 학용품을 산 후 공정거래커피라고 적혀있는 핸드폰만한 봉투를 하나 받았다. 몇 해 전부터 ‘커피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나라에는 커피 붐이 일었다. ‘스타 벅스’라는 커피숍을 시작해 ‘커피프린스1호점’이라는 드라마까지.하지만 이 공정거래커피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커피는 국제시장에서 석유 다음으로 많이 거래되는 품목이다. 허나 석유유전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갑부지만, 커피를 재배하는 사람들은 빈민층이다. 우리가 지불하는 커피 가격에서 생산 농가의 몫이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이다.이것은 주요 커피생산지의 시장구조가 취약해 중간업자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팔리는 커피 가격에서 우간다 커피농가의 몫은 0.5%에 불가했다는 옥스팜의 보고도 있었다. ‘공정 거래 커피’는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커피 거래제도이다. 이것은 커피 거래가격의 최저선을 정하고 중간 유통마진을 줄여 커피 생산자에게 정당한 몫을 배분한다.이 커피생산의 문제점이 꼭 설탕과 권력의 이야기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에서는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저자인 시드니 민츠가 말한대로 우리들 중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쓴맛, 신맛, 매운맛, 짠맛 등과 달리 단맛은 문화권의 차이를 넘어 인간이 날 때부터 선호하는 맛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입맛조차 사회문화적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설탕은 소금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 온 사물. 수백년 동안 축적돼 온 삶의 양태와 변화를 추적하는 단서로 설탕을 설정한 것이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에서부터 이후 20세기까지의 역사를 설탕을 근거로 풀어나가고 있다.이 책에서 시드니 민츠라는 인류학자는 설탕이라는 음식이 인류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해 들어오고 어떻게 인류를 길들여왔는지를 보여준다. 설탕은 지난 500년 동안 가장 가파른 소비량의 상승곡선을 그린 식품이다.지은이는 1650년 이전에는 귀족들의 사치품이던안 설탕은 왕과 귀족들의 특별한 취향과 권위를 나타내는 사치품이었다. 그런 설탕이 어떻게 서민층의 식탁에 오르게 됐을까. 그리고 대체 단맛이란 게 뭔가. 그것에 대한 수요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연스러운 것일까.인간이 배척할 수 없는 유혹은 흔히 ‘단맛’으로 비유된다. 단맛이 워낙 널리 선호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단맛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을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이 책에서 인간이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을 예로 설명한 것 중 우리의 조상이 되는 사람들이 가장 잘 익은 과실, 즉 가장 단 과실을 좋아하도록 적응하였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 예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단 것을 좋아한다는 이론에 한층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 관심에 따른 상황의 차이에 따라서 ‘단맛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하게 될 수도 있고 약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선천적으로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설탕이라는 것에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 의미들은 연령, 성, 계급, 직업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적 신분의 차이들과 연결되었다. 또한 이러한 변화들은 국가 통치자들의 의지와 의도와도 연관되어 있었으며,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운명과도 연결된 것이었다.설탕은 1650년 이전에는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영국에서는 설탕이 귀족층 등 특권 계급에서는 사치품 및 호사품으로써 노동자 계층에게는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칼로리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17세기가 끝나기 전 아직도 설탕이 귀중하고 희귀했던 시절 설탕은 대부분이 영국인들에게는 거의 의미없는 것이었다. 설사 그들이 설탕을 먹어 본 일은 있고, 또 그것이 아주 맛있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였을것이다. 하지만 부자들과 세도가들은 설탕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강렬한 즐거움을 느꼈다. 설탕을 사 들이고, 전시하고, 소비하고, 여러 가지 형태로 소비하는 것은 사회적 인정, 소속, 차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장치는 비효율적이고 노동력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노동력 공급이었다. 당시 산토도밍고에는 아라와카어를 쓰는 타이노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공동체가 급속도로 파괴되면서 그들이 떠나 버려 금광에서 일할 인력도 부족한 마당에 실험적인 사탕수수 농장에는 당연히 일손이 달리게 되었다.17세기의 ‘벤처 기업’이던 사탕수수 농장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들의 땀의 결정이었다. 설탕이 서인도 제도에서 처음으로 생산되었을 때 , 영국인들은 곧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그것은 이미 귀족들과 부자들의 사치품으로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곧 유망한 투자 분야로 각광을 받았다. 노예 무역, 선박 운송, 농장 자체들 , 또 농장들과 노예들과 설탕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명예의 충족, 그리고 곧이어 나온 소매와 정제의 기회들, 이 모든 것들은 부유하고 용기있는 자들에게 보상을 해 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초기의 후원자들은 서인도 제도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게 되자, 그들은 국내에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설탕 소비시장의 잠재력이 엄청난 것이며 설탕값이 싸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권력을 다른 방식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권력행사 방식의 변화는 노예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들의 삶은 정말 고되고 비참했다. 일을 하는 기간 동안에 유일하게 쉬는 시간은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였다. 공장에서는 25명의 일꾼들이 하루 종일 그리고 밤에 몇시간 동안 또는 두 번째나 세 번째 날 밤 내내 교대로 일을 해야했다. 또한 제분기에 사탕수수를 밀어 놓는 자들은 특히 피곤에 지치거나 졸음을 이기지 못해 롤러에 손가락이 끼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즉시 팔이 들어가기 때문에 팔을 즉시 절단할 수 있도록 손도끼를 가까이에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건대 거기에는 분명히 작업자들의 팔을 잘라내 주는 일을 하는 감시인들이 있었을 것이되면서 점점 설탕 생산량이 늘어나서 설탕값이 떨어지게 되었고 권력자들도 노동자들의 설탕소비에 따르는 세금이나 이윤 등의 이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 "권력"의 상징이었던 설탕이 음식을 통해 신분을 과시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기호에 딱 들어맞게 되더라도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설탕이 무슨 권력의 상징이냐 하면서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없겠지만 서양사람들의 식습관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과도하게 단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잠시 미국에 놀러갈 기회가 생겨서 그곳에 가봤더니 그네들의 식단은 온통 단 것 투성이다. 특히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의 음식을 보면 온갖 쿠키, 케이크, 잼, 시럽, 소스, 캔디, 초콜렛 등으로 뒤범벅이 되어있다.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단 것을 좋아했다. 원래 인간이 고대에도 단맛을 좋아하긴 했지만 서양의 식생활에서도 단맛이 차지하는 비중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늘 미미했고 설탕조차 처음에는 향신료나 의약품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서구인들의 단맛 탐닉은 유래 없는 일인 것이다. 설탕에는 권력의 달콤한 맛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설탕이 가진 "의미"의 힘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설탕의 대량소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설탕이 가진 "의미"때문이었고 그 의미를 은연중에 부여했던 귀족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이득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적절히 활용했던 "권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왠지 서글퍼지는 것이 있다. 오늘날 설탕을 통해 "권력"을 맛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권력자들은 다른 고급 음식으로 자기들을 드러낸다. 설탕값이 떨어졌다고 기뻐하며 열심히 "권력"의 맛에 달려들었던 기억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설탕은 우리에게 비곗살을 남겨 놓았다. 미용식이나 건강식이 상류사회의 표준 식단을 차지하고 또다시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격차를 느껴야 하는 오늘의 보통사람들. 다음 세기에는 듣도보도 못한 건강식품이 영양학적 균형을 무시하고 우리 식작하고 있는 새로운 지역에서든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은 여전해 게일 중요한 일이었다. 본토의 자본가 계급들과 식민지의 농장주들 사이의 갈등은 외형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동노동 시장에 의지함으로써 어는 정도는 해소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서인도 제도의 설탕에 대한 세금차별화라는 형태로 존재했던 보호주의의 패배는 노동력 수입면에서의 승리라는 뒷받침이 있었다. 노동력 수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으면 이주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금도 있었다. 서인도 제도의 노동자들은 그렇지가 못했지만 서인도 제도의 설탕은 그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설탕이 영국인의 삭탁에서 어떻게 하여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다시 이야기의 첫머리로 돌아가자. 앞으로 우리는 설탕이 처음으로 영국에 소개되던 때로부터 17세기 말까지 제한된 물 생산과 선택의 폭이 좁았던 당시 사람들의 식사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탕의 소비가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본적인 식단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설탕과 몇몇 다른 새로운 품들은 영국인의 식단에서는 주요하게 추가되는 부식일 뿐이다. 이러한 특수한 추가 현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영국인들이 설탕 먹는 법을 배웠던 방식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향신료에서 감미료로 용도가 바뀐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으며, 따라서 영국에서 설탕의 용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되어서야 비로소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설탕은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향신료로서의 인기는 이미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레스터의 백작부인은 1265년에 유명한 7개월 간의 기록을 남겼는데 거기에선 설탕이 자주 거론된다. 한 귀족에 대한 묘사한 것을 보면 “설탕은 중세기 말엽까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단맛을 내는 데 오로지 꿀을 썼다고 생각해 왔으나 기록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13세기 중엽에 이미 아주 부유한 집안들에서는 설탕이 지속적으로 소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수입.
몸을 옴기다, 우리는 누군가우리는 세계적이 되되, 자주성을 잃지 말아야한다. 나는 한비야가 소개해준 알고 싶지 않았던 ‘두려운 관습’이 있는 모소족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중국으로 간다.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비행기를 타자 무거원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곤명에서 관광을 하고 1박 후 루그호의 려강가는 비행기를 탔다.고성에서 묵는 동안 모소족 소녀를 만나 춤추다 여관에 데려와 사놓은 모소족 사진을 보여주자 ‘남자는 취하지 않는다. 여자는 시집가지 않는다.’ 라는 말을 적었다. 그 말에 다시 한 번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 다음 날 아침 려강에서 헌숙 도균 명애와 함께 버스를 탔다. 4시간 후 단랑에서 인구 백만의 이족의 옷 색감에 삼탄한다. 그리고 루그호로 갈 개인승합차를 빌려 탔다. 3시간 후 루그호에 도착하여 한번도 가보지 못한 땅에 대한 설렘에 가슴이 터질 듯 했다. 그리고 루그호의 죽은 물고기와 끼무여신의 이야기를 되새겼다.호수와 여신산의 광경에 감동하고 노래 부르는 여자들의 배를 타고 리거다오로 갔다. 다섯채의 집이 있었는데 그 중 아쟈처얼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어머니 아쟈 소나르마, 쉰네살의 큰아들 꾸뛰, 46살의 둘째아들. 45살의 큰딸, 38살의 둘째딸, 31살의 막내딸이 있었다.모소족의 집 구조는 통나무로 벽을 두른 기역자 모양이었다. 다섯 남매가 아버지가 다를 것이라 예상했다. 모소족은 남녀가 평등하고 여자에게 고된 일을 시키진 않는다며 어머니를 존경하는 맘을 아들들은 자랑스럽게 여겼다. 음식은 두루 두루 입에 맞았지만 버터차와 모차는 입에 대지 못했다.루그호로 돌아오다.배를 타고 막내딸의 아들인 따쉬와 동행해서 모소산장으로 갔다. 소개받은 왕룡과 일행인 도균과 함께 용린에 있는 왕룡의 집으로 갔다. 용린은 새로운 방식으로 탈바꿈되는 중이라 보기가 좋지 않았다. 왕룡의 어머니는 친절했지만 루그호를 보고파 저녁은 먹지 않고 나왔다. 아쟈의 집으로 돌아가 아쟈 가족들과 술을 마시고 한껏 취해 도균은 뉴질랜드 아가씨들과 온천약속을 했다. 도균과 단둘이 한방에서 아무 내색 없이 잤지만 조금 불편한건 사실이었다.마음 한켠의 집밤새 비가 내려 자주 잠에서 깼다. 자연 속에서 대변 보는 것에 대해 세상과 우주와 자신이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으며 따쉬에게 큰어머니집과 아들과 딸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따쉬는 이해하지 못했다. 도균도 이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 아쟈 소나르마가 우리가 남긴 옥수수밥을 먹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가정에서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머니의 존재란 이런 것이었다.뉴질랜드 처녀들이 먼저 떠나버려 도균과 얼처와 함께 온천에 갔다. 가는 동안 우리의 단군신화와 같은 모소족의 차득로의익 신화와 꺼무여신 신화를 떠올렸다.온천에 도착해 초라한 모습의 온천을 보고 실망하지만 탕 안에 있을 수 록 온천이 정겨웠다. 집으로 돌아와 아쟈가족들과 또 술을 하고 모소말을 공부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루즈라쵸의 아들이 삼촌인 따쉬에게 아버지에게 하는양 무릅에 앉고 매달렸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그리고 우리네의 불편하고 무서운 공권력으로 가득찬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는 머리가 아파 조금 누워 있다가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시간은 둥글다.늦잠을 자 모소족의 취산제에 가지 못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꺼무 여신을 만날 수 있었다. 몸과 얼굴을 씻고 예쁜 모소족의 옷을 골라 입고 말 등에 탄 채 꺼무여신을 경배하러 취산제가 열리는 산으로 가는 내가 누굴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그러자 시간이 둥글게 느껴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덩어리 인 채 둥글게 엉킨다는 것,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지구도 하나, 그런 것들이 둥글다는 것만이 진실인 것이다.1000년 전의 나, 2000년 전의 나, 5000년 전의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루그호의 어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가는 길에 얼쳐와 그의 연인의 모습에서 순수함을 느끼고 그것이 너무나 부러워졌다. 그리고 모든 불순한 감정을 버리면 자연의 생명을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취산제에 도착했지만 그 장소의 정경과 풍경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꺼무여신당 앞에서 꺼무여신의 초상화를 구경하고 주변의 사람들, 즉 남자들은 절을 하고 소나무 가지를 태우고 곡물을 뿌리고 여자들은 깃발을 꼿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웃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상점가 같은 곳에 가 음료수를 먹고 가지고 온 향을 다발채 묻고 불을 붙였다. 나의 기원이 하늘과 혁명 여신, ‘꺼무여신산’에게 닿을 것이라 믿었다. 주변에 관광 온 다른 외국인들과 차이나는 ‘리코’라는 일본인을 소개 받았다. 그리고는 풀밭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균의 댄스파티가 없다는 말에 급격히 실망하였다. 바뀌어버린 상업성에 물든 취산제에 회의를 느끼고 축제가 끝난 후 쓰레기 더미들만이 남겨진 모습을 보고 리코와 나는 더욱 큰 실망과 허무함에 빠져들었다.
◆김동인190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 - 1951년 1월 5일김동인은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 근대소설의 개척자요 선구자였다. 김동인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하고 이를 통하여 5가지 분야를 개척했다고 조연현은 말한다. 첫째는 구어체 문장을 확립하고 둘째는 구체적 문예운동을 전개하고 셋째는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순문학 정신 및 근대 사실주의를 도입하고 넷째는 근대적 단편소설을 개척하고 다섯째는 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김동인은 자신의 소설에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구체적 특징으로 첫째는 '-더라','-이라'등의 구투에서 탈피 둘째는 현재법 서사체에서 과거법 서사체로 개혁 셋째는 대명사 '그'의 사용 넷째는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김동인의 문학사적 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근대적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의 '배따라기'는 근대 단편소설로서의 기본적 형태를 구비한 한국 소설사상 단편소설의 최초의 한 규범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김동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적은 그가 근대적인 문학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전대 혹은 이광수의 목적문학에 반대. 문학의 예술성과 구조를 논하는 형식주의적 비평의 길을 개척하였다.김동인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연주의이다. 그의 문학의 자연주의적 특성은 물질주의적, 결정론적 인간관과 반도덕성 등으로 그의 문학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그의 유년기에 형성된 쾌락주의적 인생태도에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배따라기’는 그의 쾌락주의적 인생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이 작풍에서 작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비극의 주인공이 된 한 사나이의 스토리를 통하여 비극적, 숙명적 인생관을 구현하며 결론적으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충족에 의한 쾌락이 최고의 선이며 그것의 최대의 성취가 인생의 목표라는 그의 원시적, 쾌락주의적 반도덕적 인생관을 표명하고 있다.그 후 유미주의 혹은 탐미주의 경향으로 전개된다. 그 현해탄.1897년 9월 19일(음)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신극운동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근대적 지식층이 직면한 문제에 도전하여 그 해결에 고뇌한 끝에 패배한 예로서 시대를 대변한 희생자였다.1924년 3월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6년 8월 4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정사하기까지 그에게는 시 40여편?희곡 5편?번역 3편과 수편의 평론과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조명희씨에게 보낸 편지 중 7편이 남아 있다. 그의 5편의 희곡 중 처녀작으로 생각되는 희곡 1막 극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고 나머지 4편은 1925년 - 1926년 사이에 쓴 작품이다. 다음이 (3막 1925년 9월), (1막 1925년 12월), (3막 1926년 7월)의 순서가 된다.김우진이 처한 1920년대는 완전한 연극적 불모지가 아니었다. 비록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서 연극 환경이 뒤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비단 1920년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1920년대는 타 장르에 비할 때, 학생극 운동에 이어 토월회를 비롯한 신극 단체들의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었으며, 연극 비평 분야도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즉, 1920년 벽두부터 제시된 윤백남의 ?연극과 사회?(『동아일보』, 1920.5.4.~16)에 이은 현철의 일련의 연극 비평은 바야흐로 신파극에서 신극으로의 전환 과정에 제기되는 이론적 대응에 손색이 없으며, 희곡 창작에 있어서도 조명희, 김정진, 김영팔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작품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는 문학 청년이나 지식 청년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김우진도 제 1차 세계대전후의 사조로 민주주의 사상과 ?니체?의 초인사상이나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점차 ?버나드쇼?에 사숙하게 되어 ?입센?이래의 서양 근대극을 배웠고 또 가장 숭배하고 깊이 연구한 것은 ?스트린드베리?였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서구 근대극을 제대 불철저한 피상적, 향락적 사상과 문예 밧게 안 나오게” 된다고 했다. 김우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민지 조선의 민중에게 필요한 예술이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김우진은 예술가들에게 자기자신이 선택한 이념과 창작 방법 등등에 대해 의심하면서 검토해볼 것을 요구 했다. 김우진의 표현을 빌면, “추상으로나 개념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감촉하는 것(to get through theemotion and feeling with consciousness), 이것이 참의 앎이다.” 라는 설명으로 그의 입장을 요약 할 수 있겠다. 그는 “진리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내가 지금 네의 모(母)와 간(姦)하라 하면, 그 말을 들은 이는 곳 칼을 들고 이러나서겟지요. 그러나 몃 시대 후엔 그것을 되려 정당한 자식의 길로 알 때가 아니 올 쥴이야 누가단언하겟소.”라고까지 말했다. 김우진도 그러하지만,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문단의 주류는 일본 유학생 출신 작가들이었다. 그들이 일본에서 학습하거나 체험한 문학은 일본이 소화시켜 제공한 서구 문학이었으며, 그것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 그 당시의 형편이었다. 김우진은 식민지 조선의 예술가들에게 일본에서 공부한 그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검토해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학습하고 체험 했던 서구 문학과 일본 문학이 그 자체로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미래 문학을 위해 소용이 될 때에야 가치가 있다는 입장이겠다. 연극으로 좁혀 설명하자면, 김우진은 1910년대 신파 연극인과는 달리 “식민지 지배 이념에 동일화하는 착한 주체”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 그가 식민지 조선의 신파극을 부정하고, ?토월회?의 신극까지 비판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오늘?지내온 가위 우리네 신극 운동이란 그 효과가 태무(殆無)하엿다. 재래의 신파를 질기든 관중의게는 실망과 냉소를 주고새로운 연극적 정열을 바라느니에게는 조 전쟁 때 북한공산군에 끌려간 후 사망했다.1933년 의 편집고문으로 있을때, 이상의 시를 실어 그를 시단에 등장시켰으며, 1939년 을 통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의 청록파를 등장시켰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 작품으로 시 ,,, 등과 시집,이 있다.정지용의 시세계정지용은 우리 현대 시사에서 언어네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의 대다수 시인이 감정의 분출에 의거하여 본능적인 시를 썼다면 1920년대 초반에 작품 발표를 시작하여 1930년대 대표적인 시인으로 군림하게 된 정지용에 의하여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 내는 시가 씌어진다.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정지용이 철저히 인식했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절제된 언어의 구사는 정지용의 시에서 일관되는 특성이지만 그의 시게계가 그리는 궤저은 몇 단계의 변모 과정을 보인다. 정지용의 시의 전개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①1923년경부터 1933년경까지의 서정적이며 감각적인 시②1933년이후 1935년경까지의 카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인 시③1937년 이후 1941년에 이르는 동양적인 정신의 시 등이 그것이다.◆이육사1904년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 - 1944년 1월 16일이육사는 목표는 독립운동이었는데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시를 썼다. 비록 그가 다른 시인에 비해서 짧은 시작 생활을 했지만「절정」,「광야」,「청포도」,「꽃」같은 우수한 시를 남겨 우리 시사를 빚내주고 있다. 이육사가 신석초와 더불어 시사『자오선』에 가담하여 시를 쓰던 때는 우리 시가 카프나 모더니즘에 현기증을 느끼고 한참 시가 생명의식을 중히 여기던 때였다. 특별히 이육사는 시 표현에 있어서 상징적인 표현을 중시했다. 시 형식에서는 짧은 시 형태를 취했다. 이육사의 특질을 몇 가지로 추출해내면 다음과 같다.첫째, 실향의식과 더불어 향토의 서정을 중시했다. 이러한 시는 T.S 엘리엇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지주의 이미지즘의 성격을 가짐. 그는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 시들이 빠져있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함. 그 역시 초기에는 자신의 이론에만 충실해 조각난 이미지만이 존재하고 시적인 구체성은 없었으나 이후 그러한 결점들은 회복하게 됨. 평론의 측면에서는 조선일보에서 로 시작하여 영미의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시켜 한국 시문학계의 전환을 만들었다고 평가됨.이기영- 189년 충남 아산 출생. 1924년에 《개벽》 현상문예에 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함. 1925년 카프에 가입한 이후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함.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농촌과 농민에 관련된 내용으로 그들의 가난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주된 관점임. 이것은 작가의 경험과 이어진 것이며 다른 카프의 문학가들이 농민보다는 노동자에 편중해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에서 그의 특징을 잘 알 수 있음. 이러한 농민 중심적 이야기는 이후 경향 소설의 가장 큰 기능미라고 불리 우는 을 만들어 내게 됨. 은 전형적인 식민지 시대의 농민을 표현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그것을 통한 삶의 총체성을 확보하고 있음.김동리- 1913년 경북 경주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 입선하는 것으로 문학 생활을 시작함. 순수문학의 사상에 입각한 그의 행보는 초기에 민족주의적 문학가들과 카프 문학가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이후 40년대 친일문학 시기에는 절필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지켜냄. 이후 광복 후에는 새로운 휴머니즘에 입각해 작품을 만들어냄. 이러한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인 , 등이며 이러한 작품들에게서 깊게 나타나는 주제는 운명임.이광수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 - 1950년 10월 25일1910년대 대표작가. 초기 민족주의적 노선 → 민족개조론으로 사상적 변모친일적 행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음긍정적 평가: 신문학기 최고의 작가부정적 평가: 설교 문학, 위선의 문학, 통속 문학일본 유학 후 선각자적 지향의 면모를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