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미라보’라는 이름을 센 강에 있는 다리이름으로 안 것이 아니라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신 한 아파트의 이름으로 처음 접했었다. 그때에도 아파트 이름이 상당히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작년 다른 전공시간에 잠시 이 시에 대해서 배웠을 때, 그저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에 대한 간략한 것과 시를 한번 읽어보기만 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라보다리 라는 예쁜 이름의 다리아래에서 시인이 센 강을 보며 ‘센 강의 아름다움’과 시인의 감상을 노래한 시 인가 보구나, 생각했다. 정말 그것은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이 시는 미라보다리에서 바라보는 센 강의 흐름을 통해 세월의 흐름과 사랑이 흘러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저 흐르는 강물일 뿐 인데, 그 강물의 흘러감에서 세월과 사랑의 지나감을 생각하며 애잔했을 시인의 마음을 생각하니 나또한 애잔함과 쓸쓸한 마음이 든다.
소설 독후감 소설은 6,25이후 한국에 미군이 들어선 시기를 그리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비롯 미군기지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인간군상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 다양한 삶속에는 비도덕적, 불법적인 것 투성이지만 쇼리 킴은 자신이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쇼리 킴은 그저 철부지 아이이다. 고작 11살의 나이에 매춘 중개라는 최악질이자 밑바닥인생을 살면서도 전혀 그에 대한 의식이 없다. 쇼리 킴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제대로 분간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쇼리 킴은 누군가에게 안 맞고, 안 굶고 사는 것이 제일이다. 쇼리 킴은 자신보다 어수룩해 보이는데도 하우스 보이를 해먹고 있는 딱부리를 질투한다. 하지만 질투할 뿐, 딱부리의 하우스보이라는 위치를 빼앗기위한 권모술수를 쓸정도로 닳지는 않았다. 찔뚝이가 엠피에게 따링누나를 밀고해 돈을 빼내는 것과 같은 잔머리를 쓰지는 않는 것이다.딱부리 또한 쇼리 킴과 별반 없는 철부지 아이이다. 쇼리 킴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남자흉내를 내보려 따링 누나와 관계를 맺으려 시도한다. 이모습은 딱부리 개인이 얼마나 비순수한지, 세상에 찌들어버렸는지를 나타내주기보다는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시대, 미군이 주둔하고 그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이 그들에게 빌붙어 매춘과 폭력에 노출되어 살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씁쓸하게 바라보게 만든다.딱부리와 쇼리 킴은 둘 다 객관적 입장에서 봤을 땐 비도덕적, 밑바닥삶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은 자신들이 그런 삶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쇼리 킴과 딱부리의 삶이 더 불쌍한 것이다. 이 둘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삶을 시작했다. 자신들이 밑바닥에 있는지도 모르며 그저 하루하루 맞지 않고 굶지 않으려 양키들에게 굽신 거리고 매춘 중계를 하며 사는 것이다.찔뚝이를 죽이고 나서 쇼리 킴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미군기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깨닫는다. 한국인 쯤 한 두명 죽어도 아무 죄책감이나 처벌 없이 사는 미군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자신에게 초코렛이나 달러를 좀 주며 웃을 때는 몰랐던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소설 독후감 ‘나’는 날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겨우 ‘파리’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파리’가 자신의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에 사랑을 느낀다. 그만큼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없는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자, 날아다니는 것을 굳이 파리라도 잡고 싶어하는 세속적 욕망을 지닌 인물이다.‘나’와 ‘안’은 근본적으로 대화가 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나’는 꿈틀거림을 여자의 아랫배가 호흡하며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역시나 세속적인 욕망을 표출하고, ‘안’은 꿈틀거림에서 ‘데모’를 연상하며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는 말을 한다. 둘의 대화는 끊어진다.이 소설 속에서 모든 인간관계는 이렇듯 서로 다름을 발견하고 마는 것이라고 보여준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으려는 관계의 노력 따윈 없다. 그저 서로 다름을 발견하곤 ‘결국 그런거군’, ‘서글픈 기분’을 안고 관계를 끝내고 헤어진다. 1964년 서울에는 이러한 관계의 단절만이 난무할 뿐이다.‘안’은 이런 단절된 관계의 연속을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다만 그 진실이 서로에게 공유되지 못했고 공유하려는 노력조차 없었다는 것이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자고 말하고 다시 이어나가는 대화에서는 아예 철저하게 서로의 공유를 무시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사실을 나열한다. 자신만이 나는 사실들을 나열함으로써 그것들을 서로 공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각자 ‘이야기를 떠벌리는 것’이다.‘나’와 ‘안’은 다른 이유로 밤거리에 나온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일지라도 둘은 한 지점에서 만났다. 하지만 한 시, 한 곳에서 만났다는 일은 중요치 않은 듯 여전히 대화는 밤거리에서 부유하고 있다. 둘의 존재도, 밤거리에 나온 이유조차 상실된 채 부유하고 있다.술집에서 ‘사내’를 만나 밤거리로 나온 세 사람에게 약 광고와 소주광고가 눈에 띈다. 게으름을 피우는 약광고판과 달리 소주광고판은 열심히 빛을 내고 있다. 단절된 관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술을 먹고 취하는 일뿐이다. 약을 먹는다는 삶에의 ‘적극적인 태도’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하룻밤 술을 마시고 취하고 잊는 것이다.어떻게든 아내의 시체를 팔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내는 돈을 쓰려고 한다. 돈의 사용처는 ‘아무렇게나’다. 눈에 보이는 데로 들어가서 넥타이를 사고 아내는 귤을 좋아했다며 귤을 사고, 택시를 타고, 불을 보다가 돈뭉치를 던져버린다.불을 보며 나는 안에게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둘이서 함께 보고 있는 일에 대해 공유하며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다. 하지만 안은 거절한다. 그 어떠한 것도 공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또한 간판에 불이 붙는 과정을 혼자만 알기를 바라며 유심히 불이 붙는 것을 보고 있다.하지만 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자 취소해버리는데 이는 뒤에 사내가 죽고 나서 개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재빨리 피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지 않다. 싱싱하게 살아서 움직이며 삶에의 적극적인 태도 또한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겨울의 계절처럼, 겨울의 풍경처럼 죽어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것, 살아 움직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멀리 한다.
1. 사교적 역할: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강화시켜 준다.(예)를 들어 인사, 작별인사, 담소에 사용되는 언어의 기능이 사교적인 언어의 측면이다. 영어 표현에서의 ‘Hello, how are you?' , ' Have a nice day', 우리말의 ’안녕히 주무셨어요.‘ 등이 사교적인 언어 사용의 예이다.2. 지시적(directive) 역할: 화자가 청자의 행위를 바꾸는데 목적이 있는 역할이다. 명령형 어미를 사용한 직접 명령, 간접적인 명령문 그리고 사회 집단이 만든 법률, 각종 규칙, 단체 협약, 광고문, 요청문 등이 이에 속한다.3. 수사적(rhetorical) 역할: 청자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 위한 기능이다. 화자는 함축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설득을 한다는 것에서 단순한 지시적 역할과는 다르다. 논리적인 호소를 도와주기 위해 생생한 그림이나 사진을 덧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건을 파는 광고나 장기가 필요하지 않은 죽은 사람들로부터 장기를 기증받기 위한 연설은 수사적 언어 기능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4. 인지적 역할: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이다. 이 인지적 역할에는 지시적 역할이 있기도 하다. 논리적이고 지적인 것을 전달하거나 보존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의사소통에서 언어의 기능에 대해 논하는 지금 이 부분이 인식적 언어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5. 대인관계 규정의 역할(이름 짓기): 사람들의 각기 다른 계층과 각기 다른 개인적 유형을 고려하여 그에 따라 언어 형태를 선용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경우, 또는 임의적으로나 친밀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대인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형식이다. (예)를 들어 법관 윌리엄 헤더링튼 3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이러한 공식적인 명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그저 윌리엄 헤더링튼 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또한 가까운 친구들은 ‘빌’이라고, 그리고 그의 모친은 여전히 ‘빌리 보이(Billy boy)'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름 짓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역할은 사람을 규정하고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치며 대인관계를 확립하고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소설 독후감 영희와 정애, 성식, 아버지가 사는 집은 답답하고 또 답답한 공간이다. 그들에겐 가족 특유의 유대감정이 없다. 그들이 가족으로서 유대관계를 느낄 때에는 오직 큰언니를 기다릴 때뿐이다.하릴없이 그저 집에만 있는 성식은 번뜩거리는 안경과 콜라, 신문으로 대변되는 폐쇄적 인물이다. 생의 활기 따윈 없고 격정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는 듯하다. 그저 무심하게 신문을 바라볼뿐이다. 동생 영희의 쏟아지는 말들을 듣다 잠깐 안경알을 번뜩이다가도 다시 자신의 갇힌 공간 2층으로 올라가 버린다.정애는 그런 남편처럼 또한 활기 없는 정적인 인물이다. 대신 정애는 정이 넘친다. 남편과 그리도 소원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에게는 살뜰히도 잘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모두 방바닥으로 가라앉듯 소통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유일무이한 ‘사건’ 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큰언니를 기다리는 일 뿐. 오로지 큰언니를 기다리는 일을 위해 이 가족은 서로 모여 있는 듯 하다. 큰언니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이들에게 가족이란 이름을 허락하는 것 같은 것이다.답답하고 또 답답하기만 한 영희는 이렇게 오빠내외와 모일 때면 항상 이야기를 꺼낸다. 헤어지자, 서로 갈 길을 가자고. 영희에게 집은, 가족은, 혈연과 정으로 다져진 끈끈한 유대관계의 것이 아니다.영희가 집안에 있을 때는 꿍당꿍당 소리가 아주 크게, 신경 쓰이게도 들린다. 하지만 선재를 만나기 위해 집밖으로 나와 들어보면 꿍당꿍당소리가 그리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송곳처럼 쑤시는 듯한, 마치 집안 벽 틈서리를 쪼개는 듯한 그래서 기어이 이 집을 주저앉게 만들 것 같은 꿍당꿍당 소리는 오히려 밖에서 들을 때는 따뜻한 초 여름밤의 기운자락을 띄우는 가락으로 들린다. 꿍당꿍당 소리의 문제가 아닌 그 소리를 듣는 공간-집의 문제였다. 끊어진 가족간의 유대관계와 활기 없는 일상, 무기력함이 집안을 온통 감싸 안아, 몇 몇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 하거나 근육 좋은 사람이 두드리며 내는 오 월 밤의 쇠붙이 소리가 마치 집을 무너뜨릴 것만 같이 들린다.영희는 사회활동을 하려는 염도 없이 집에만 있는 오빠 성식을 채근하지만 자신도 결국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무기력한 삶의 노선을 걷는다. 선재와의 맺음또한 처음에는 선재가 불결하고 천티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결국은 이렇게 낙착되는구나.’ 하고 별다른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그렇게 낙착 되는대로 산다. 그리고 말한다. ‘이왕 그렇게 될 걸 뭐, 어차피 이제 이런 형식으로 될밖에 없잖수.’집은 물론이고 영희, 정애, 성식, 아버지 모두 그렇게 무기력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활기와 싱싱함은 오히려 두려운 것이다. 영희는 꿍당꿍당소리에서 마치 싱싱하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자신들을 삼킬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꿍당꿍당소리는 이 집의 식구들과는 다른 살아있는 소리이다. 근육 좋은 사람이 두드리는 살아 있는 소리. 싱싱한 소리. 이 집의 사람들은 마치 모두 눈만 껌벅이며 사는 듯하다. 영희가 그나마 이를 부수려 하지만 본인도 결국 ‘그렇게 그런 형식으로밖에 될 수 없잖수-’하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