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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의종을 멸시하여 받는죄
    왕하 2:23-24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제목 : 주의 종을 멸시하여 받는 죄본문을 살펴보니까 엘리사가 한 성격 하는거 같아요, 어떻게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저주하며 곰들이 찢어죽게 했을 까요? 우리도 흔히 대머리를 보면 놀리지 않습니까? “엘리사도 참 참을성이 없네” 이렇게 성경을 보시면 그냥 있는 그대로 성경을 본 것이지요. 이런 분들은 한 번더 유심히 살펴보세요, 오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의 놀림으로 이런 일이생긴것은 아닙니다.놀림을 당한 엘리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불수레와 불말과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엘리야의 후계자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의 갑접을 부여받은 선지자입니다. 처음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택할 때 엘리사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네 소12겨리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소 12겨리면 24마리인데 상당한 부농이죠...또한 자신이 직접 12겨리를 움직여 밭을 가는거 보니까 힘도 장사였던거 같아요...하지만 엘리야를 보자 마자 즉시 모든 것을 제쳐두고 따르게 됩니다.엘리야가 승천하자마자 엘리사는 어떤 기적을 행합니까? 네 여리고에서 나쁜 물을 좋은 물로 바꾸는 수질개선을 하죠... 그러면서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었어요.벧엘에는 선지생도학교가 있었죠...그 곳에 올라가는 길에 아이들이 나와서 막 놀리는 거에요....이 아이들도 벧엘에 사는 아이들인데 벧엘은 어떤 곳이었어요...예 그렇습니다. 여로보암왕때 금송아지를 세운 곳이지요 즉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입니다. 참 아이러나하게도 선지학교와 우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지요...이 벧엘 주민들은 선지 학교를 참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연스레 이 동네 사람들이 선지학교와 선지자와 선지생도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보는 아이들도 어른들을 따라 행했을 것입니다.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한 것은 엘리야도 하늘로 올라간것 처럼 너도 올라가라...엘리야도 없어졌으니 너도 없어져라 하면서 비하하는 놀림이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입니다. 엘리사를 놀리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만 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역대상 16:22에 하나님의 기름부은자를 만지지 말며 하나님의 선지자를 상하게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놀림을 당하는 순간 이것을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나와서 42명의 아이들을 찢어 죽인것입니다.아이들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는 못할 망정 하나님의 선지자를 놀렸습니다. 이는 분명 평상시 어른들이 선지자를 대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하게 마련이지요...이만큼 이 벧엘이라는 동네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곳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곰두마리를 풀어 아이들을 죽이게 한 것이지요...아이들을 죽이므로 해서 어른들의 슬픔을 배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 애굽의 슬픔을 더한 것 같이 엘리사와 하나님의 선지자를 멸시하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진노하신 것입니다.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자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하찮다고 해도 그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입니다.민수기 12장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것에 대해 미리암이 비방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짓을 했어도 주의 종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다윗은 철천지 원수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름부은 받은 자를 해하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자를 공경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윗도 하물며 하나님의 종을 두려워하며 공경할 줄 알았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의 종 보기를 우습게 보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아무리 못난 주의 종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형편없고 못난 주의 종일 수록 우리는 더 공경하며 예를 표하여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훌륭한 주의 종을 섬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주의 종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는 일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말라 하였습니다.하나님께 기름부은 받은 주의 종을 섬기는 일은 대단히 중요해서 그 자녀들한테도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들이 주의 종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자녀 또한 주의 종을 똑같이 대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엘리사를 놀리는 행위는 단순한 아이들만의 장난이 아닙니다. 만약 아이들의 장난이었다면 엘리사는 그냥 넘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욕행위는 그 곳의 어른들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주의 종을 대할 때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7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주의 종에 대한 의무(17절) : 이것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종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하며 자기들이 아주 현명하고 선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망상을 버리고 겸손히 주의 종에게서 배우며 그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의무를 져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의 종은 그리스도인들을 다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의 직분에는 그럴 수 있는 참된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해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합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하늘나라에 가게 하는 모든 기회를 선용하고자 힘씁니다. (3) 주의 종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지를 지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한 지도를 베풀기를 기뻐합니다. 만일 주의 종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충성과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의 종들이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 슬픔에 빠진다면 그것은 주의 종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손실이 될 것입니다.
    인문/어학| 2009.12.28| 3페이지| 1,000원| 조회(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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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산조용기목사의 신학과 목회를통한 교회성장전략
    Ⅰ. 서론A. 문제제기와 연구의 목적한국교회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는 성장과 함께 개신교 인구가 1000만에 이르렀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한국교회 또한 그 부흥기를 같이 했다. 눈부신 발전과 함께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그 성장을 멈추었고 급기야 현재에 이르면서 현격한 감소 추이를 보이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5년 현재 개신교 인구는 861만6천명으로 전체인구의 18.3%이다. 이 수치는 1995년도 인구조사와 비교 했을 때 14만4천명이 줄어든 수치이다. 반면에 가톨릭 인구는 514만6천명으로 전체인구의 10.9%이며 이는 무려 219만5천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수년 내에 개신교 인구가 가톨릭 인구에 역전을 당할 것이다.이러한 한국교회의 침체 원인은 세속주의에 의한 교회 정체성 상실, 외형적 몸집 부풀리기를 통한 교회권력 과시, 재물과 명예욕 등에 있다고 수많은 문제점을 제기한다. 한국교회는 외형적 교회성장에만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서 내실 있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겉모습에만 집중해서 이러한 폐단을 가져왔다고 본다. 아직도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교계의 모습도 보이지만 확실히 침체기는 분명하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교회에 관련된 세습 문제, 세금문제, 헌금 문제, 부동산 문제 등의 언론보도를 이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현재의 한국교회의 침체의 원인이 교회 성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성장은 필요하고 교회 성장은 계속해서 진행되어져야 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이 외형적 규모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내실을 함께 다지는 교회 성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맥가브란은 오늘날 교회는 계속 성장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교회성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의 성장은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한다.교회성장은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바탕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은 성령의 역사에 중축복은 이론, 교리를 실천하는 실제와 적용이다. 조용기 목사 초기에 주장한 삼중축복음의 원래 명칭은 삼박자 구원이었다. 하지만 삼박자라는 음악적 어휘 요소 때문에 각 교계에서 반응이 좋지 못했던 탓에 이후에 삼중축복 혹은 삼중구원으로 불린다. 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의 구원의 메시지는 요한3서 2절을 연결시킨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건강한 축복을 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삼중축복은 영의 구원뿐만 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 전반적인 생활과 육신의 건강을 포함한 전인적 구원의 실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삼중축복의 원리는 조용기 목사가 스스로 개발한 신학이 아니라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생활 전반에 걸친 축복이 있어야 신앙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의 원리는 성도들로 하여금 축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쉽게 깨닫게 해준 축복의 실제 적용이었던 것이다.B. 4차원의 영성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있어서 영성을 중요시 한다. 특히 순복음의 신앙은 영성의 신앙이라 불릴 정도로 영성의 깊이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이란 말을 사용하면서도 영성의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영성이란 말이 기독교적 전문용어는 아니다. 영성이란 말이 영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영적인 세계를 믿는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되어지는 말이다. 영성이란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영이란 자기의 육체를 지배하고 주관하는 정신체계이다. 자신의 삶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인도하고 가치관을 알게 하고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생명의 요소이다. 이 영성의 주체를 어디 두느냐가 인간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우주에는 세 가지 형태의 영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성령, 서 건지고 더 나아가 큰 선교의 일을 담대히 해나가기 위해 인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목회자의 가장 큰 첫 번째 사역은 말씀 선포이다. 설교란 택함 받은 설교자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이 진리를 회중의 삶에 적용함이다. 이것은 반드시 성령님의 감화하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목회자는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목회자는 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구해야 한다. 또한 기도는 목사가 솔선수범을 하지 않고서는 성도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목회자로서 모든 교회 사역에 있어서 기도로서 준비해야 한다.조용기 목사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소그룹 구역 목회를 중요시 하게 생각한다. 소그룹은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다. 소그룹의 본질적 의미는 초대교회의 모임과 같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와 교제에 있다.영산 조용기 목사의 목회를 설교, 기도 그리고 구역소그룹 목회를 통해서 생각해 보고 또한 조용기 목사의 목회를 통하여 세계 최고의 교회로 성장한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성장 원인과 동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A. 조용기 목사의 설교조용기 목사는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좋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 설교의 비중이 크다는 것은 대다수의 목회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조용기 목사가 항상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설교를 준비할 때도 강단에 들어서도 ‘성령님을 의지하라’ ‘성령을 인정하고, 모시고, 환영하라’ 이것은 설교자 조용기 목사의 마음의 기초이다. 조용기 목사는 “교회 성장을 크게 성공 시키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마음에 교회 성장을 담대히 추진할 수 있는 마음의 기초, 즉 철학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교회 성장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한 설교자는 그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설교하는 설교자는 성령과의 교제가 다른 어떤 요소보다 앞서야 한다.설교자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힘입었으면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전(前) 과학기술처 장관 정근모 박사는 어려운 난관을 접할 때마다, 항상 기도를 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을 계속하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인간으로서 항상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찾았다.”라고 말한다. 목회자는 사역 전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조용기 목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교회를 성장 시켰으며 전세계가 주목하는 목회자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 조용기 목사 자신의 역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조용기 목사는 늘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다. 교회 성장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기도는 교회의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들은 이룰 수 있으며 하나님의 그 뜻을 알 수 있다. 조용기 목사는 기도의 중요성을 언제나 강조한다. 사역 초기서부터 지금까지 그의 목회 사역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기도에 열정을 쏟고 기도에 헌신하며 하나님의 의중을 언제나 확인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조용기 목사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 성장을 원하는 많은 뜻있는 사람들에게 본받을 만한 모습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와 또한 오산리 금식 기도원에서의 뜨거운 기도는 한국은 물론 세계를 흔드는 기도가 되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뜨거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물론 내 자신의 삶까지도 그 영역을 넓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는 확실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로버트 콜리어는 “기도는 이 세상에서 이른바 ‘자연의 법칙’을 극복하는 유서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요, 자기들은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계약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카할은 구약에서의 회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한다.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주로 한 지역의 그리스도인 회중을 의미한 것이고 건물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본래 이방인의 어법에서 채택한 것이든 아니면 유대인의 어법에서 채택한 것이든 간에 그 말이 조직이나 사회보다는 모임을 가리킨다는 것은 확실하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에는 지역의 개념이 들어 있다. 하지만 한 지역의 에클레시아가 보다 넓은 에클레시아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교회는 많은 교회의 합병이나 연합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형태에 속하지 않고 부활하셔서 높이 되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영역에 속한 하늘의 실체였다. 교회는 회중들 즉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거듭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 할 목적으로 성령님에 의하여 예배, 교육, 교제, 선교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이다.2. 교회성장의 의의교회 성장을 원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출석 인원수의 증가를 원하는 교회 성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의 교회 성장의 초점이 양적인 성장에 초점을 두고 이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교회 성장 전략이 마케팅 전략적 측면으로 흘러 마치 목회자는 CEO가 되고 부교역자와 행정직 임원들은 기업의 간부처럼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교회 성장은 수치상의 증가로 평가 되어 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치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수치인지 교회 성장을 원하는 목회자들은 생각해야 한다. 조용기 목사는 “무엇 때문에 교회 성장을 원하는지, 정욕적인 동기가 아닌지에 대해 항상 질문을 하며 영혼 구원에 그 목적을 두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도널드 맥가브란은 “정상적으로 살아있고 건강한 다.
    인문/어학| 2009.12.28| 29페이지| 2,000원| 조회(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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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관한 소논문 평가A+최고예요
    1. 들어가는 말1-1. 연구목적복음(Good News) 즉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다. 죄인으로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여서 대신 피흘려 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어 사망권세를 깨뜨리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백성이 되는 복을 받게 되는 구원의 열쇠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기쁜 소식을 열방에 전하는 사명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다. 복음은 영적으로 생동하는 능력이요, 힘이요, 기적이다. 죽은 영혼을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고통을 치료하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순복음의 복음은 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의 오중복음이다. 중생은 거듭남을 의미한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생이다. 순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중복음의 기초인 중생의 복음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중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교회 새가족에게 있어서 중생의 의미는 크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주는 의미를 모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단계로서 중생을 이해하고 또 체험한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사명을 알게 된다. 중생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중생의 복음을 체험한 성도들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성력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도록 기도하며 승리하는 삶과 능력을 행해야 한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령은 ‘지, 정, 의’의 인격체를 가지신 성령이시다. 오순절에서 성령에 대한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인치심이며 능력과 체험의 역사로서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결한 삶을 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있다.누구나 성도들은 복받기를 원한다. 영혼 구원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중생, 곧 거듭남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구원에 크게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영역은 영적 구속(Spiritual Redemption)으로 “네 영혼이 잘됨같이” 이며, 둘째 영역은 생활적 축복(Daily Blessing)으로 “네가 범사에 잘되고”, 셋째 영역은 전인적 치료(Fully Health)로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이다. 또한 구원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 칭의(Justification)의 단계(엡2:8), 둘째로 중생한 자가 말씀과 성령에 의해 점차적으로 거룩해지는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빌2:12), 셋째로 하늘날에 갈 때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는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롬8:23)가 그것이다.)2-2. 성령충만예수님을 믿고 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머리로만 알 뿐 심령 깊숙이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고 질문한 것이다.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성령 충만을 체험하지 못해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중생의 체험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으나 이는 별개의 체험이다. 성령세례는 주님께서 중생한 성도에게 맡기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님께 사로잡혀 영적 능력을 힘입는 체험이다.(요14:16-17) 성령세례는 주의 종에게는 능력 있는 목회 사역을 위해서 평신도에게는 신앙생활의 승리와 성공을 위해서 꼭 받아야 하는 영적 체험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행1:8)순복음교회는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별되는 제2차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며 이것을 계기로 해서 계속 성령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성령 충만 이라고 인식한다.2,28)과 물질적 번창(창 13: 2; 24: 35), 원수를 무찌르는 능력(창 24: 60; 27: 29; 민24: 17-19), 삶을 성공시키는 능력으로서의 지혜(출 35: 35; 왕상4: 29; 단 9: 22)등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 나타난 복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언약의 백성이 되어 개인적, 국가적, 환경적, 물질적으로 창대케 되며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장수하는 것으로서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신약의 축복은 구약의 축복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야웨의 축복이 온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의 축복으로 바뀌어졌으며 신령한 영적 복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마 6: 24; 고후4: 18) 그러므로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경의 축복은 영적 축복인 구원뿐 아니라, 범사에형통하는 축복이며 내세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현세적인 축복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축복의 복음은 물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물질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교회사 전체에 걸쳐서 중요한 문제였으며 시대마다 다르게 평가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용기 목사는 성경적인 물질관으로서 구약 성경은 재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지만(잠 10: 3; 전 5: 19), 그 재물을 의지하지 말 것과 불의로 치부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시 62: 10; 잠 11: 28; 렘 17:11)고 보았다. 신약 성경도 우리에게 의식주의 해결을 약속하고 있고(마 6: 25; 마 6: 11), 우리의 쓸 것이 채움 받고(빌 1: 9),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한 삶을 약속하고 있지만(고후9: 8) 재물과 부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막 10: 25; 마 6: 24; 딤전 6: 10)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물질과 부 자체보다도 물질과 부요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눅 12: 22)고 보았다.)조용기 목사의 축복의 복음의 신학적인 구조는 신유의 복이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난을 짊어지신 예수의 생애와 저주를 청산하신 그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타락의 결과로 핍절하게 되고 뒤틀려 버린 인간 삶의 범사환경이) 변화되어 창조시 복의 근원이며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예비하신 환경의 본래적인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참된 축복은 죄의 대속과 영적 구원을 전제한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현세의 복에만 집착하지 않고, 윤리적이며 내세적인 근본 지향성을 갖는다. 요행이나 주술 대신 하나님과의 계약과 약속에 근거를 두기에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순종과 믿음을 중요시한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위대한 권능의 역사를 위해 믿음의 법칙의 적용을 통한 인간의 적극적인 동역을 원하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행진을 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는 통로가 된다.) 믿음과 함께 ‘정직, 성실, 근면’의 기본적 자세가 요청된다.) 복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국 ‘우선권(Priority)의 문제요, 사용 방법의 문제’ 라는 것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올바른 지적이다.) 먼저, 범사에 잘되는 축복은 고난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마귀의 시험으로 오는 고난은 단호히 물리쳐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유익한 고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산을 위한 고난은 회피하지 말고 잘 감당해야 한다고 조용기 목사는 강조한다.)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풍성한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게는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 가 뒤따른다.) 이웃을 향한 복음 증거가 특히 영적인 측면에서 타자를 향해 열린 사랑의 삶을 실현하듯 환경적 축복의 나눔 역시 성도의 삶을 이러한 신적 개방성의 삶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다.성경은 예수님의 가난의 대속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 8시는 언어란 다름 아닌 영적인 언어이므로 위와 같은 문화의 변화는 결국 영성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순복음의 성령세례의 체험은 삶에 대한 근본적이고 문화적이고 영성적인 변화를 체험케 해 주는 것이다.5. 삶의 적용을 위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통합체요 전인적 존재이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는 전인적 구원이 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수많은 현실적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인간 삶의 포괄적 문제들과 무관할 수가 없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좋으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당면한 삶의 현실 문제를 어떻게 다루시며 그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하도록 보여준다. 성서적으로 구원은 창조원형으로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회복은 출애굽기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비극적인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실제적으로 구출해 내는 하나님의 개입과 도움이 그 시작점이 되고 있다.)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 10)”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 구원의 목적은 풍성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인데, 그러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전인적이고 통전적인 복을 받아야한다. 성경자체도 인간에 필요한 다양한 복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와 필요를 채워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마6: 8, 32). 삼중축복에서 강조되고 있는 세 가지 영역은 인간 삶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그 차원이 포괄적이고 통전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혼과 범사와 육의 문제를 동시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원론적인 사상과는 구별된다. 배현성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삼중축복은 내적이면서 외적이요, 초월적이면서 역사적이며, 신적이면서 인간적인 개념을 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의 신학은 본래 구원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주창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을 삼박자 구원이라고 불렀다. 즉 구원에 있어서의 영혼, 육체, 환경을 포.
    인문/어학| 2009.12.28| 20페이지| 2,000원| 조회(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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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968-1834)의 신학 - 종교론 (1)슐라이어마허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현대신학의 시작과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작품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과 [신앙론]이다. 우선의 종교론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서 현대신학이 정초해 놓은 새로운 방향정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새로운 신학적 사상들은 슐라이어마허와의 비판적인 대화를 시도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날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칼 바르트 :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앞서 언급했듯이 현대신학은 계몽주의적 토양에서 자라나왔다. 계몽주의적 토양의 특징은 권위로부터의 자유이며 합리성과 자율성의 강조였다. 따라서 권위의 상징이었던 종교에 대한 당대의 비판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신학의 큰 과제 중 하나였다. 이 시대의 종교비판은 그러나 결코 대중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교양인들 즉 지식인들 사이에 기존의 종교관과 교회의 가르침이 미신적이고 강압적이며 무자한 것으로 이해되었다.넓은 맥락에서 보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형이상학적 세계, 인간의 현실 위에 있을 저 세상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이 시기에 무르익으면서 서서히 형이상학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었다. 영원보다는 현재가, 저 세상보다는 이 세상이 중요하며, 신과 영혼불멸이 아니라 현실적 삶이 화제가 되었다. 세상은 신적 존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자유에 의해 형성된다. 플라톤적 높이의 형이상학이 종말을 고하고 있었던 시기였다.1.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을 ‘주체’로 생각한 최초의 신학자이다.여기서 주체(Subjectum)는 모든 것을 지탱하는 근원을 뜻한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모든 삶과 사유의 중심이면서 모든 것을 바로 그 자신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종교란 외부적인 어떤 힘에 굴복하거나 순복하는 것이 .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성을 정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 목적을 무한한 자기 전개와 이를 자기화하면서 자기 안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는 두 가지 사태가 있다. 한편에서는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귀환한 강인한 사람들, 곧 자신을 개별화하는 존재들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것과 그에 마주 서 있는 것을 결코 다시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가 개체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보편성 속에서 개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즉 인식론과 관련해서 보면 전자는 주체와 객체의 뚜렷한 대립 속만 머무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욕구와 향유의 영원한 순환 가운데서 개별 사물의 지각을 결코 넘어가지 못한다. 후자는 주체와 객체의 분열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말하는 공허한 보편성은 사실은 ‘인간의 이상을 희롱하는 자연의 마술에 지나지 않으며 아주 드문 경우에 힘들게 성취된 자기 형성의 결과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무한성을 파악해야 하며, 이 무한성은 자신의 개체성과 무관하게 파악되는 추상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중재자 - 종교적 대가인간성의 본질은 바로 개체성과 무한성의 결합, 개체성 안에 내재한 무한성의 자각에 있다. 개체성을 넘어 무한성을 향하는 갈망이 인간 안에 있다. 그리고 이 개체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갈마을 불러일으키며 저 무한성과 맞닿도록 인도하는 자를 슐라이어마허는 ‘중재자’라고 부른다. 신은 바로 이러한 갈망에 상용하도록 ‘중재자’를 보내어 ‘극단과 중간이 생산적으로 결합되게’ 한다. “모든 시대에 걸쳐 이곳저곳에” 보내진 중재자는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을 활동적으로 제 것으로 삼는 저 고도의 인력을 자신의 본질에서 표현하지만 동시에 무한자를 향해” 나아가게 한는 자이다.유한과 무한의 중재자를 슐라이어마허는 다시금 “최고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설교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신에게 구현된 무한자의 인상을 다시금 “스스로 시인이나 사용되어야 하고 전통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두 번째 강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교는 우주의 영원하고 이상적인 내용과 본질에 대한 그리고 무한자와 시간적인 존재 가운데 있는 영원자에 대한 경건한 직관이며 느낌이다.’ 라는 종교의 본질규정이다. 즉 종교는 지식도 도덕적 의지도 아닌 감정과 연관한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종교, 도덕과 형이상학을 넘어서인간의 이성은 형이상학을 그리고 의지는 도덕을 형성하지만 종교가 싹트는 자리는 바로 감정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과 도덕, 종교는 서로 완전히 별개의 것인가? 슐라이어마허는 이 셋의 교차점을 분명히 한다. 형이상학과 도덕 그리고 종교는 모두 동일한 대상을 갖는다.“만약 여러분이 형이상학과 도덕의 최고 관점에 선다면 여러분은 이 둘이 종교와 함께 동일한 대상인 우주와 이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종교는 이 재료를 젼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며 이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다르게 표현하거나 취급해야 하고 다른 처리 방식이나 다른 목적을 가져야 한다.”형이상학이 우주의 본질과 그 기본 원리를 파악하여 존재하는 것의 근거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리고 도덕이 이 본질로부터 유출되는 의무적인 도덕법칙을 명하고자 한다면, 종교는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형이상학과 도덕이 갖는 이론과 실천의 관련성은 종교와는 무관하다.- [종교론]보다 몇 년 앞서 출간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는 ‘종교란 우리의 모든 의무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각주에서 칸트는 자신이 종교개념이 기존의 종교에 대한 많은 오해를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에 있어서는 이론적 인식과 신앙고백에 관하여서는 어떤 확연적 지식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초감성적인 대상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그와 같은 단언적인 신앙 고백은 이미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종교는 자기 안에 어떠한 법전도 지니지 말을 유의하라 그런데 이 우주는 살아있다. 움직인다. 나를 직시하고 있다.“우주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매 순간 우리에게 계시된다. 우주가 산출하는 모든 형식, 삶의 충만에 따라 각별하게 현존하는 모든 존재자들 우주가 그 충만하고 늘 풍성한 품에서 쏟아내는 모든 사건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우주의 행위이다.우주의 무한한 계시적 행위는 반드시 제약된 매개를 통해 일어나나다. 이때 무한자와 개별자의 융합이 일어난다. 종교는 바로 여기서 출발된다.“이렇듯 종교는 모든 개별자를 전체의 부분으로 모든 제약자들 무한자의 표현과 서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슐라이어마허에게서 우주는 인간주체와 대립되어 그저 관찰될 수 있는 단순한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활동의 지평이며 환경이며 인간과 더불어 관계하는 포괄적인 생동하는 공간이다. 형이상학과 도덕이 단지 우주를 객관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규정과 관련해서 우주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생동하는 무한한 힘으로 파악한다. 이 점에서 우주를 단지 인간의 유한한 인식의 소유물로 전환시켜 버린 관념론의 환상과는 달리 우주의 무한성을 사랑한 스피노자를 그는 한껏 예찬한다. 그러나 우주는 단지 인간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과 관계하는 한 인간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다. 즉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인간 안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유한성 안에 있는 무한성을 파악하게 된다.“ 종교는 다른 모든 개발자와 유한자 가운데서 무한자를 보는 것에 못지않게 인간 속에서 무한자를 보며 그 각인된 흔적과 연출을 본다.”‘직관’이란 단지 인간의 인식적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직관은 우주의 활동에 상응하는 대응적 행위를 뿐이다.“모든 직관은 직관되는 존재가 직관하는 존재에 끼치는 영향으로부터 출발하며 직관하는 존재의 본성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종합되며 파악되는 직관되는 존재의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행위로부터 출발한다.”심지어 슐라이어마허는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기울여 들을 것여러분에게 나타난 종교의 계시로 본다.”종교를 통해 개별자는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맞보게 된다. 그러나 이 참된 자아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다. 개별자가 각자가 동일할 수 없듯이 참된 인간성 역시 동일할 수 없다. 개별자 각자에세 계시된 인간성의 참 모습을 따라서 상호 보완적이며 상호 소통적이다. 종교는 개별적인 것이면서도 결코 개별적인 것만은 아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고유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모든 사람은 이 순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이 순간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규정에 이르고 소집된 삶의 힘은 이 순간을 향해 다시금 가라앉는다.”“모든 개인은 그 내적 본질상 인간성의 완전한 직관을 위한 필수적인 보충 부분이다.”역사속에 전개된 다양한 종교들 - 본래적인 의미에서는 개별적인 종교체험들과 그 안에서 보여진 참된 인간성의 형상과 변화들은 결국은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에 결코 낯선것이 아니며 바로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겨노디는 것들이다.“종교는 이제 인간성이 속한 전 영역을 편력한 뒤 더욱 예리한 감각과 더 교양 있는 판단을 가지고 고유한 자아로 돌아오며 이렇게 하지 못했을 때 외부에서 모아지던 모든 것을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다. 여러분이 만약 자아로 돌아온다면 여러분은 자신 가운데서 최고의 미와 가장 저급한 특징을 발견할 뿐 아니라 인간성의 개별적 측면인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서 느껴온 것인 최고의 우아함과 가장 경멸할 만한 것의 특징을 발견한다.“여러분은 이 모든 다양한 형태들을 여러분의 고유한 질서 가운데 실제로 체험한 것이다. 여러분 자신은 인간성의 편람이며 여러분의 인격은 어떤 의미에서 전 인간적 속성을 포괄한다.”“종교가 이렇게 다시금 내면으로 되돌아오고 여기서 무한자가 발견되며 이 무한자에게서 종교가 완성되는 사람은 인간성을 직관하기 위해 매개자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 스스로가 다른 많은 사람을 위한 무한자일 수 있다.”슐라이어마허의 종교는 바로 이 인간다.
    인문/어학| 2008.10.08| 16페이지| 2,000원| 조회(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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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크 포웰의 사도행전신학 서평 평가C아쉬워요
    사도행전 신학신학과 3학년20053107박 주 열서 론사도행전 신학은 신학의 첫걸음을 내딛는 나로서는 정말 까다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지금 현재의 신학적 지식으로 읽어내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이러한 책들과 또한 이것보다 더 어려운 책들을 읽어 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적 고찰을 요구하는 이런 난해한 책을 일찍 접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사도행전 신학이 갖고 있는 사도행전의 이해와 평가를 통해서 나는 사도행전의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사도행전이 이러한 책이다 정도는 알고 싶다. 너무나도 어렵기에 멀게만 느껴지는 사도행전이 이 기회를 통해 조금이나마 가깝게 다가서길 기대한다. 그동안 성경을 통해서만 잠깐 잠깐 읽었던 사도행전 그러기에 바울의 사역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사도행전이 이 책을 통해 좀더 저자, 문학작품, 역사서로서의 기능을 이해하도록 노력 할 것이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접할 생각을 해보니 벌써부터 가슴에 무언지 모를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오름을 이 시간에도 느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이 책을 놓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심을 바라며 이 책에 대한 평가에 들어가고자 한다. 사실 책을 평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같이 지식수준이 미달인 학생이 이런 책을 평가한다는 자체가 저자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신학적 지식 성장과 비평의식 수준을 높이려면 해야 할 작업이기에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정말로 나에게 얻는 것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한가지 깨닫는 사실은 정말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겠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지금 시작하고 있는 이 사도행전조차도 손에 꼽을 정도로 5번도 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사도행전에 대한 신학과 사도행전의 평가를 하려 한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 먼저 사도행전에 대한 충분한 배경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실, 환경등을 먼저 파악하는게 순서지만 과제가 과제이니 만큼 사도행전 신학을 먼저 접해보는 것이다. 앞으로는 정말로 성경을 많이 일고 또 많이 생각하며 그 진리를 깨닫도록 노력할 것이다. 또한 아울러 이러한 신학 서적을 통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도 배가시키길 원한다.나는 사도행전 신학 서평을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전개해 나갈 것이다.먼저 사도행전 신학에 나타난 저자 누가에 대한 분석을 종합해 평해보고 그 다음으로 사도행전 신학에 나타난 사도행전의 기능을 분석한 부분을 평가해 볼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신학의 종합적 평가로서 마무리 하고자 한다.사도행전의 저자 누가(Luke)사도행전의 저자를 누가라고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알다시피 누가복음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일치성이 발견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한 작품이 아니냐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에 따르는 학자들의 견해를 살피고 또한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헨리 캐드버리, F.브루스, 마이클 파아슨, 로버트 오툴은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저자 같고, 사상적 배경과, 사건 기록 또한 유사점을 보이고 장르와 정경으로서 기능 또한 일치 된다는 주장과 함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일치성을 주장한다.반대로 스티븐 무어, 제임스 도지등의 학자는 형태상으로 불일치를 보이고 있음을 주장한다.나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모두 읽어본 독자로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서 무엇이 일치하는 점이고 무엇이 불일치하는지 모르겠다. 단지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라는 말을 들었고, 누가복음의 저자도 누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결과로만 나는 두 작품의 저자를 누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느끼는 점이 저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저자 누가가 어떤 사람인가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기에 이 사도행전 신학에서 나타난 저자 분석으로는 내가 저자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좀더 저자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저자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싶다. 그래서 누가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를 찾아 읽어 볼 생각이다.사도행전 신학의 저자에 대한 부분에서 장르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솔직히 장르를 논하기에 사도행전이라는 정경의 한 부분이 관심을 그런 쪽으로 두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에 나는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사도행전을 집필한 저자의 목적을 살펴보기로 하자.나는 사도행전 신학이라는 책 제목에서 말해 주듯이 신학적 목적에만 관심을 두겠다. 한스 콘첼만은 초대 교회의 삶에 나타난 신학적 위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집필했다고 보고 있고 H. 마셜, 폴 슈베르트 등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고 약속과 성취라는 주장으로 접근하고 있다.나는 신학적 목적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예수 영접한 사람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한 신학적 지식 또한 탁월하고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라고 본다. 저자 누가는 바울과의 동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신학이 바탕이 되어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집필하므로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랑을 받는 것이다.사도행전의 기능사도행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사도행전을 역사서로 본다거나 문학 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의 흥밋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나는 그래서 절대적으로 역사서로 사도행전을 본다거나 문학작품으로 보는 견해에 동참할 수 없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이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 일으키려고 쓴 소설로서 평가되어야 하는가는 이렇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사도행전을 잘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사도행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맥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회심전과 회심후의 2부로 나눌 수 있다.하지만 마크 포웰의 사도행전 신학은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키 포인트를 놓치고 엉뚱한 부분에서 논쟁하고 있다. 특히 종말론 부분에서 사도행전의 기능을 잘못 이해한 그 정점을 말해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복음을 얻어야 하는데 아직 복음도 제대로 전달 안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종말론으로 논쟁하며 사도행전 신학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사도행전 신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울에 대한 사상과 전도 여행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없는 사도행전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통해 전개되는 전도여행의 대서사시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서사시라고 표현한 것은 위대하다는 말을 표현하는 것이다. 역사서로서의 기능, 문학 작품으로서의 기능 모두 불필요한 논쟁거리이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 승천후 제자들에게 명하신 지상최고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사도들의 노력이 담겨 있는 책이다. 특히 바울을 통한 사역이 눈부시다. 실상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들이 바울에 비하면 그 비중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바울을 최고로 언급하는 것이 무리는 아닌 듯 싶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신학은 바울에 대한 사상과 전도 여행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물론 사도행전이 비단 바울 한 사람으로 국한 시키기에는 전도, 선교적인 측면에서 많은 어패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통해서 언급된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리라 본다. 사도행전이 갖는 그 오묘하고 신비한 성령의 사역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상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사도행전이 물론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를 평가할 때 또한 역사 연구에서 필요한 것이지 사도행전에 대한 신학을 논할 때 굳이 역사성까지 따져가면서 논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점이다. 또한 가장 잘못된 부분이 문학으로서 기능을 평가한다는 부분이다. 사도행전이 문학작품이면 누가는 문학작가이고 성경은 문학전집인 것인가? 아니다 정말로 이 부분에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사도행전 신학이라 제목까지 붙이고 문학에 대해서 평하다니 저자 마크 포웰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나는 또 저자 마크 포웰에 대해 앞으로 시간이 나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다.사도행전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노력을 스펙타클하고 현장감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생각할 때 비로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8.09.26| 5페이지| 2,000원| 조회(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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