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합리적ㆍ정서적 상담(RET: Rational-Emotive Therapy))6 -1) Albert Ellis(1913∼2007)-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동기는 부모의 소홀한 양육과, 나쁜 건강상태,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3가지 특징이 있다.- 부모의 소홀을 강한 독립심과 자율성으로 이겨냈고, 나쁜 건강상태로 인해 거친 운동을 못하는 대신에 지적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극도로 내성적이기는 하나 그의 지적능력과 학교성적 등에서 오는 호의적인 사회의 반응 때문에 자아존중감이 낮지는 않았다. 그는 어려운 시련을 통해 발휘할 수 있었던 자신의 능력이 문제해결자로서 역량을 가지게 해주었다고 회고한다.- 1947∼1953 고전적 정신분석을 시행하였으며 분석 심리적이었다. 후에 정신분석학이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치료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다른 여러 접근법을 시도하였다.- 1955년 인간주의적 치료와 철학적 치료 그리고 행동주의적 치료를 혼합하여 RET를 창시한다.- 1959년 RET 전문가 양성기관을 설립했다.- 2007년 93세에 자연사.2) 기본개념(1) 인간의 신념이나 생각 등 인지적인 면들이 정서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비합리적인 생각이 부적절한 정서로 이어지고, 또한 부적절한 정서는 결국 부적절한 행동으로 이어지므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도록 하여, 그러한 합리적인 생각이 적절한 정서와 행동으로 바뀌도록 하는 것이 RET의 핵심이다.”(2)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나 행동은 사실 그 자체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3) 내담자의 비합리적인 생각을 합리적인 생각으로 대치시키거나 최소화시켜서 보다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인생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3) 비합리적인 신념- 타고난 경향성에다 사회문화적 영향이 첨가되어 성격발달, 특히 이상 성격의 발달을 초래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비합리적인 사고로 특정 지어지는 신경증적 경향이 있다.(1) 자신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 한다.(4) 일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파멸이다.4) 비합리적인 사고의 특징(1) 파괴적이고 자기 패배적 행동에 이르게 한다.(2) 타인이나 자신에게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인 고통과 괴로움을 지속시킨다.(3) 인간의 성숙과 발전을 저해하고 불필요한 정체나 퇴보를 초래한다.5) 상담의 목적(1) 내담자의 자기 파괴적 신념을 줄인다.(2) 내담자가 보다 합리적ㆍ현실적이고 관대한 신념과 인생관을 갖게 한다.(3) 결국 융통성 있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내담자를 돕는다.6) 상담의 과정- RET의 상담과정은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인 생각과 그 생각에 근거한 자기 언어를 찾아서 이의 비합리성을 확인하고 논박하며 합리적 생각과 자기언어로 바꾸고 이를 토대로 적절한 정서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1) 기본절차RET의 기본절차는 ‘ABCDE 모형’으로 설명된다.Antecedents내담자가 노출되었던 문제장면 또는 선행사건Belief문제 장면에 대한 내담자의 관점 또는 신념Consequences선행사건 A 때문에 생겨났다고 내담자가 보고하는 정서적·행동적 결과Dispute비합리적 관념에 대한 치료자의 논박Effect내담자의 비합리적 관념을 직면 또는 논박한 효과이 모형에서의 핵심은 내담자를 정서적으로 곤란하게 하는 것(C)은 선행사건(A)이 아니라 말로 표현되는 내담자의 신념(B)라는 것이다.(2) 구체적인 과정1단계: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문제점을 질문한다.RET를 사용하는 상담자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함으로써 내담자의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는 치료방식을 사용한다. 그리하여 “무슨 문제로 오셨지요”와 같이 질문한다. 내담자의 문제점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에는 상담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본다. 이때는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2단계: 문제점을 규명한다.내담자가 자신의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가운데 상담자와 내담자는 함께 내담자의 문제를 분명히 밝힌다. 특히 그 게 됨으로 어떤 소득이 있는가를 평가해보도록 한다.4단계: 선행사건(A)을 찾아내고 평가한다.구체적으로 내담자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를 간단하게 집약적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사건씩만 다루도록 한다.5단계: 이차적 정서문제를 구명한다.때로는 내담자가 안고 있는 일차적 정서 문제에 대해서 이차적 정서문제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내담자가 대중 앞에서 실수한 이후로 매우 불안한 감정을 경험하였다(1차적 정서의 문제). 그런데 발표를 하려고만 하면 다시 불안해질까봐 걱정하여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2차적 정서의 문제). 이와 같은 경우에는 이차적인 정서 문제부터 다루어준다.6단계: 신념(B)-결과(C)의 연관성을 가르쳐준다.상담자는 교육자로서 A-B-C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내담자에게 가르쳐준다.7단계: 비합리적인 신념(B)을 평가 확인한다.기본적인 비합리적 신념 중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예컨대,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친구 사귀는데 소극적으로 임할 때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등의 질문을 내담자에게 던진다.8단계: 비합리적인 신념체제(B)와 결과(C)를 연관시켜 비합리적 신념을 확인시킨다.상담자는 B-C(비합리적 신념으로 인한 부적절한 정서와 행동)의 연관성을 내담자가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내담자에게 비합리적인 생각과 대치되는 합리적 생각과 정서를 지니도록 자기언어로 진술해보도록 한다.9단계: 비합리적 신념을 논박한다.부적절한 정서와 관련된 생각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밝힌다. 이 경우 비합리적 생각에 대해 의문문으로 진술한 후 그 근거를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기어코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내담자가 있다면, ①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②세상의 모든 사람이 성공하고 있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③기어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함으로써 야기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등을 질문한다.10단계: 합리적 신념체제를 내담자가 학습하서와 행동을 경험하게 하는 비합리적 생각과 대치되는 합리적 생각과 이러한 합리적 생각에 근거한 합리적 자기언어를 짧은 문장으로 구성하여 진술해 보도록 한다. 이때 합리적 생각과 자기 언어의 합리성을 내담자 자신의 논리로 상담자에게 설명해 보도록 한다. 즉 내담자의 자기언어가 그 나름의 논리성을 갖추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상담자가 내담자를 도와주어야 한다. 상담자가 일방적으로 내담자에게 강요한 합리적 생각이나 자기언어는 내담자가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효과가 적을 가능성이 크다. 비합리적 생각과 대치된 합리적 생각과 그러한 합리적 생각에 근거한 합리적인 자기언어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한다. 즉,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기 전이나 도중에 합리적 생각이나 자기언어를 진술하면서 행동한다. 처음에는 큰 목소리로 하다가 점차 마음속으로만 한다.12단계: 합리적 인생관을 확립하게 한다.상담자는 내담자가 제기한 정서나 문제행동과 관련된 비합리적 생각이나 자기언어를 합리적 생각과 자기언어로 바꾸는데 그치지 말고, 이를 보다 일반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서 결국은 내담자가 합리적인 생각과 자기언어에 근거해서 자신의 삶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7) 상담의 기법(1) 인지적 기법① 비합리적 신념에 논박하기RET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인지적 방법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비합리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들이 어떤 사건이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지각과 진술의 성질 때문에 장애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상담자는 “너의 신념에 대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 “왜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나쁜 상황이 일어난다고 해서 정말로 그것이 끝장인가?” 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그 비합리적인 신념을 즉각적으로 공격한다. 일련의 반박을 통하여 상담자는 내담자의 의식을 보다 더 합리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으로 적어도 신념을 약화시킬 때까지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당연히 해야 한다.” 절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하는B-C-D-E 이론이 많은 일상생활 과제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된다.③ 내담자의 언어를 변화시킴부정확한 언어가 왜곡된 사고와 신념체계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상담자들은 사고는 언어를 조성하고, 언어는 사고를 조성한다고 보기 때문에 내담자들의 언어패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내담자들은 “해야만 한다, 당연히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절대적인 말들을 “그렇게 되면 더 낫다.”라는 상대적 말로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④ 유추의 기법을 사용항상 미루는 습관이 있다거나 지각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어떤 행동특성 때문에 나타나는지 추적해 보도록 내담자에게 촉구한다. 이 기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특성을 이해하여 불행한 습관의 원인들을 깨닫도록 해 주는데 있다.(2) 정서적 기법① 합리적?정서적 상상법내담자는 그들이 실제생활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것들 중 하나를 상상하는 방식과,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부적절한 혼란감을 느끼는 방식, 그리고 나서 경험을 적절한 감정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볼 수 있다.② 역할연기문제행동에 관련된 장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역할 놀이로써 그 장면의행동을 시도해 본다.③ 수치감 공격 연습사람들이 어떤 행동에 대한 비합리적인 수치감을 제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자신을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지 못하는 행동이 있으면 실제로 해 보도록 한다.④ 유머의 사용내담자가 너무 진지하거나 과장된 사로를 함으로써 겪고 있는 정서적 혼란에 대하여 일상생활에 대해 유머를 잃지 않도록 한다. 때때로 적절한 속담이나 유머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명심한다.(3) 행동적 기법- 이 기법은 내담자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여 그의 신념체계를 변화시키고 이 변화된 신념체계를 통해 혼란된 정서를 벗어나게 하며, 역기능적인 증상에서 보다 생산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
문학과 삶의 시적 만남1.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창비란 무엇인가로창비의 2008년 겨울호에 실린 백낙청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준 여파는 2009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이 원론적인 물음은 『창작과 비평』 스스로가 2008년 겨울호 「책머리에」서 밝힌 “위기의 시대일수록 참된 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고 방향감각을 일깨울 수 있으며, 그런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문학인들 스스로 발본적인 문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위기의 시대에서 문학이 나아가야할 방향 탐색을 위한 문학의 현재적 재조명을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특집과 관련되어 『창작과 비평』 2009년 봄, 여름호에서 연달아 이어진 논의들은 문학에 대한 원론적인 탐구라기보다는 백낙청과 한기욱의 글에 대한 비판을 위주로 분위기가 흘렀으며,) 여기서 더 애석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머지 3편의 글)이 서로 다른 논자들에 의해서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과 관련된 논의를 촌평에서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창작과 비평』 봄, 여름호를 통해 이뤄진 손정수와 한기욱의 논쟁은 그 내용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되나, 실상 손정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하려 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정 물어야 했던 것’)이란 제목을 통해 우회적으로 ‘백낙청, 한기욱 그리고 창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고 여름호를 통해 이어진 한기욱의 반론은 문자 그대로 ‘손정수에 대한 반론’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한기욱 자신의 글에 대한 입장과 손정수의 비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변론적인 글이 되었다.물론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 속에서 그 깊이가 더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손정수의 글이 창비에게 스스로를 되돌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들의 논쟁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글일 뿐이지 문학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에 관한 탐구라고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논쟁과는 별도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 물음인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라는 또다른 질문의 시작으로 접근하려는 평론이 있었다. 『창작과 비평』 2009년 가을호에 실린 강동호의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손정수와 한기욱의 논쟁이 인물로 치자면 백낙청을 중심으로, 이론을 중심으로 하자면 ‘시적인 것’에 대한 모호성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강동호가 백낙청의 주장에 대한 접근을 ‘시적인 것’을 통해 시도하였다는 점은 앞으로 살펴보게될 내용이나 접근하고 있는 관점의 면에서 위의 두 논의보다 본래의 취지에 더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2. 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다소 ‘기이하게’들린다. 시가 삶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시가 삶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쓸 수 있단 말인가? (…) 시를 삶에서 벗어나 유아독존하는 무슨 신비한 대상쯤으로 상정하는 믿음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은 ‘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재차 던지려 한다. (…) 그 물음은 시가 무엇을 써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 이전에 무엇을 쓰는 것이 가능하냐의 문제, 다시 말해 ‘시적인 것’의 존재론과 맞물려 있다.강동호의 평론「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의 시작은 위와 같다. ‘시는 무엇을 쓸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써야 시가 될 수 있는가’는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는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 묻는 물음으로 이어지고, 이 물음들이 삶과의 관계 속에서 묻는 물음이란 점을 고려해볼 때 결국 ‘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다시 세상에 관한 물음으로 이 자신이 스스로 문제의식 삼고 있는 진은영의 글과 이동욱의 글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80년대의 민중시들에) 깊이 공감했고 그 시대에 그 시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쓸 수 없었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다음은 진은영에 대한 이장욱의 공감이 묻어나는 부분인 동시에 강동호가 자신의 평론에서 인용한 부분이다.하긴 그렇다. 시민으로서의 사회참여가 곧바로 시인으로서의 시로 전이 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시의 무엇이 이 전이과정을 방해하는 것일까? 해답은 생각보다 자명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가 삶의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잠재적인)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은 아닌가? 김수영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온몸’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닌가? (…) 그곳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고 삶의 외부와 내부가 부딪친다. 그것은 미정형의 언어들이 시인의 몸을 통해 ‘사건’을 발생시키는 공간이 된다.)‘시가 삶을 쓸 수 있는가’란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강동호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시와 삶, 혹은 시와 사회참여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이다. 이 괴리는 어찌하여 생기는 것인가? 이장욱의 말대로라면 ‘시가 삶의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가 시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부면이 필요하다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의 모든 부면’이란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따라서 이장욱이 말하는 삶의 부면 중에서도 강동호는 ‘잠재적인’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잠재적인 부면’도 의미가 모호하다.‘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강동호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삶을 쓰려는 시인 참여시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견을 잃어버린 불변의 정적 텍스트로 고착화하기 때문이다. 즉, 참여시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적언어를 현실과 일대일로 대응시킴으로써, 삶의 표면적 부면만을 건드릴 뿐 잠재적 부면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에 시적이라 할 수 없다.일반적으로 시는 표면적인 삶, 즉 일상적인 삶에 대한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 생의 심부로부터 삶의 비밀을 길어 올려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가 삶의 잠재적 부면을 다뤄야 한다는 말은 일종의 시에 대한 진리와 같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여기까지는 별다른 무리 없이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3. 있음과 없음, 그 사이의 시적인 것잠재적 부면의 의미를 한 번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강동호가 말하는 잠재적 부면은 일종의 ‘잠재태/가능태(dynamis)’라 볼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 잠재태는 그저 현실태로부터의 미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잠재태는 현실태에 늘 잠재적으로 내장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장된 것이 현시될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으로 시적인 것’으로 가는 실마리가 열린다. 가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얼마든지 존재할 수도 있고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의 사이에서 오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동시에 실연되는 시공간의 역장 위에서 존재하는 극적인 순간. 이것을 바로 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시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며 가까스로 실현된다.이 글의 주제는 문학과 삶을 관통하는 시에 대한 글이므로 여기서 참여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리대로라면 참여시는 현실과 시적언어를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는 만큼 ‘시적인 것’의 순간을 실현시키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잠재태/가능태가 이미 현실태로 실현되어 있기 때문에 시공간의 역장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여시는 결국 시적인 것에 다다를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진정한 시는 삶과 무관한 것이라야만 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강동호도 말하고 있지만 분명 한유주나 현대 시인들은 하나같이 ‘사라짐’에 주목 대해서는 이론이 생긴다.‘잠재태/가능태’가 시적인 것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카타르시스라는 일종의 미적 경지 혹은 시적인 것에 다다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부정되어야만 그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이미 있는 것(현실태)은 그 나름대로 사라지지 않기 위한 생존의식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치열함을 갖고 있다. 우리가 80년대의 참여시에 시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현실에 대한 치열함을 밀도 높은 언어들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당시의 시들이 참여시라는 이름아래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시들을 양산해 놓고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나 반대로 높은 수준의 참여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또한 현실태의 사라짐을 통한 잠재태/가능태로의 접근을 좀 다르게 생각한다. 한유주나 현대 시인들이 사라짐을 통해 잠재태로의 영역으로 육박하려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이다. 단순히 그들이 잠재태의 영역을 꿈꾼다고 보기는 어렵다. 잠재태/가능태의 의의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필자는 사라짐을 통한 잠재태/가능태로의 접근은 일종의 유행이라 생각하며 현실의 사라짐은 그것이 본래 잠재태/가능태로에 가닿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작가들에 의해 선택되어진 하나의 방법이라 본다.90년대 초반 기이한 죽음만큼이나 기이한 시들로 일종의 유행현상으로 까지 퍼졌던 기형도의 시들을 보자. 그의 시는 무너짐과 무너지지 않으려는 의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시적으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무너짐이란 현상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행위이다. 기형도는 무너짐의 작용을 받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현실태로 볼 수 있다. 그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 종이’에 글을 적어 ‘힘없는 책갈피’에 끼워 넣고 ‘미안하지만 이제 희망을 노래’하려 한다. 그는 분명 현실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무너짐과 무)
이야기 속의 논리와 철학- 무위자연을 주장한 노자조선왕조는 유교의 왕국이었다. 신흥사대부들은 유교 경전의 연구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건국체제를 확립하고 지배이념을 세웠다. 그들의 유교적 성향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성리학과 이기론, 성정론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적 담론이 오고갈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시조를 살펴보면 유교적 이념과는 다른 자연에의 흥취를 노래하는 시조가 많다.유교가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도리를 통해 정해놓은 수많은 격식들 때문이다. 격식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해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울타리 속에 가둬두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유교의 경우 이러한 격식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데, 특히 유교를 숭배하고 모범을 보여줘야 하는 사대부의 경우에는 이러한 격식에서 오는 피로와 부담이 매우 컸을 것이다.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 긴장을 이완시켜주었던 사상이 바로 도가사상이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노장사상’은 도교라고도 불린다. 동아시아의 표면에서 지배체제를 이끌어간 게 유교라면, 도교는 이면에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감을 주며 민간신앙을 통해 또는 설화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며 유교와는 또 다른 의미로 동아시아를 이끌어온 주요 사상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유교사회가 가지고 있던 갑갑한 지배와 격식과는 또 다른 여러 규범과 사회적 이해들이 오늘 날의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과학적 증명’이란 말로 대변되는 구체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꿈처럼 들릴만한 이야기들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노자의 사상에서 현대적 의미를 이끌어내기란 힘들 일이기만 할까?간단히 말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요즘 tv에서는 솔직함과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 각광받고 있다. 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만큼 현대사회는 인간이 가져야할 미덕인 진솔함과 순수함이 사라졌다는 반증이 된다.갈수록 혼탁해지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에게는 영혼의 도피처가 필요하다. 업무에 떠밀려 발길을 옮기는 것이 아닌, 나를 향하여 걸어가는 영혼의 발걸음이 필요하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이 필요하다. 인위적인 조작을 통하여 편하게 하는 것보다 때로는 불편한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무위, 즉 마음을 비우는 일을 강조하는 노자의 사상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물질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노자의 사상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고 인위보다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사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의 물화현상은 어느새 우리 깊숙이 자리 잡아 우리가 의식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사람의 인간성마저도 값어치로 매겨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스스로의 인간성마저도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야 한다.자연환경에서 사람에게까지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야 하는 세상. 우리는 이미 생체기계가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위(작위)가 아닌 무위를 강조하는 노자의 사상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요약문도가는 유가, 묵가 등 다른 사상을 비판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도가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고도의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철학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상이라 할 것이다.도가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핵심을 이루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논하는 ‘노자’라는 인물의 생존 년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물이 남아있지 않아 불확실하다. 노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들에서는 그에 구체적 행적 등에 관한 언급보다는, 그의 사상만큼이나 신비스럽고 추상적으로만 기술해놓고 있다. 심지어 ‘사기’로 유명한 사마천의 경우는 노자를 신선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노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듯이, ‘노자’라는 책을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작자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도덕경’으로도 불리는 ‘노자’는 ‘장자’, ‘주역’과 함께 삼현, 즉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지금 전해지는 ‘하상공본’은 ‘상경’과 ‘하경’의 두 권으로 나뉘어 있고, ‘상경’이 37장, ‘하경’이 44장, 도합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필본’에는 제1장에서 37장까지 ‘상편’을 ‘도경’이라 하고, 제38장에서 마지막 제81장까지 ‘하편’을 ‘덕경’이라 하여 ‘노자’를 ‘도덕경’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처럼 ‘도’와 ‘덕’으로 붙인 왕필의 주석으로 말미암은 듯하다.상편인 ‘도경’에는 우주의 근본원리로서 ‘도’에 관한 설명이 많고, 하편인 ‘덕경’에는 그 도의 작용 또는 도에 따르는 행위를 뜻하는 ‘덕’에 관한 설명이 많이 보인다. 즉 ‘도경’에는 도가의 우주론 또는 본체론에 속하는 설명이 많고, ‘덕경’에는 인생에 관련된 정치 설명이 많이 보인다. 도가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뜻하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도’를 주시하기 때문에 ‘도경’을 더 중시하여 앞에 먼저 놓은 것이다.노자는 도라는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철학의 최고 범주로 삼았다. 그의 학파를 도가, 그의 학문을 도학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도가의 ‘도’는 사람이 올바로 살아나가고 세상을 옳게 다스릴 수 있는 올바른 ‘도’ 또는 ‘진리’ 같은 것을 의미한다.유가와는 달리 노자의 도는 자연적인 존재법칙으로 설명된다. 공자는 도의 개념을 인식의 차원에서 도덕의 가치기준으로 설정한 반면에, 노자는 이것을 자연으로 설명하여 존재법칙으로 이론화 했다.노자는 도와 천도의 일반적 의미를 수용하여 사물의 존재 생성과 변화의 가장 보편적인 원리로 삼았다. 노자에 의하면 도는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또 우주와 만물이 존재하고 변화하는 데 작용하는 섭리이다. 즉, 세계와 만물을 생성하고 존재와 발전을 결정하는 섭리인 것이다. ‘도’라는 것은 이렇듯 세상에 작용하는 것으로,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사람의 지각으로 인지할 수 없으며 또한 지식으로 올바른 표현을 할 수가 없다.만약, 이러한 도를 어떠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절대적인 도, 근본적인 진지로서의 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의 ‘침상의 비유’와 같이 침대의 이데아가 현실에 존재하는 침대로,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침대로 변하는 순간 침대의 이데아가 점점 왜곡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요약하면, 노자가 말하는 도는 감각이나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식을 초월한 실재인 것이다.도의 특징은 ‘무’와 ‘유’의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자는 이런 도에 대해 다음고 같이 설명했다.“도는 오직 황홀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황홀하지만 그 가운데 형상이 있다. 황홀하지만 그 가운데 실재물이 있다. 도는 막연하고 어두운 것이지만 그 가운데 생명력이 있다. 그 생명력은 참으로 진실 되니,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도라는 이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그 사실로부터 사물의 시초를 인식할 수 있다.”도의 작용은 간단히 말해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무엇이든지 정점이 있고 정점이 지나면 하락세를 면치 못한다.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탄생하고 자라고, 늙고 죽음으로써 다시 본래의 상태로 모두 돌아간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다.노자에게 있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유’보다는 ‘무’이다.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것은 본래 그 근원이 ‘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인지 능력도 동적인 것보다는 정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바른 것도 먼저 느린 것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싱고, 앞서는 것도 뒤에 서 있는 것에서, 화려한 것도 소박한 것에서 그 시작의 중요성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만물이 비록 다 같이 생겨나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끝내는 ‘허’와 ‘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허’는 도의 성격이고 ‘정’은 도의 작용이다.노자는 도의 작용 중에서 약한 것을 가장 강조한다. 약한 것이 ‘무’나 ‘자연’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유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도 하였고, “유약함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고 하였다.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물을 가장 많이 애용했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에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물을 대체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은 것을 이긴다는 것을 세상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그것을 능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부드러움이 삶의 법칙이라면, 강함은 죽음의 법칙이다. 노자는 또한 최선의 선을 물과 같다고 하면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 다투지 않고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함으로써 그 효용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무위자연을 따르는 것과 같다 하였다.도는 안하는 일이 없이 모든 큰일을 하면서도 어떤 작위도 없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만든다. 그러므로 작위를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의 위대한 작용이나 존재는 의식할 수 없다. 도가 이처럼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않고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무위無爲’라 하고, 그러한 상태를 ‘자연’이라고 부른다. 도가의 이른바 ‘무위·자연’의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이러한 ‘무위자연’은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노자는 사람이란 무릇 무위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말했다. 마치 물처럼,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상대방과 어울려 참된 융화를 이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를 잊고 무위함으로써 외물과의 대립 갈등이 해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뿌리 깊은 교육을 바라며-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중심으로‘교육열 올바로 보기’라는 제목을 음미해 보자. 책 제목대로라면 우리가 기존에 바라보던 교육열에 대한 시각은 잘못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자신의 주장 4가지, 첫째 ‘교육열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둘째 ‘교육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셋째 ‘교육열 정책에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넷째 ‘학부모 클리닉이 필요하다’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첫째, 둘째 주장과는 다르게 셋째, 넷째 주장은 책의 주된 흐름과 별도로 다루어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책의 구조와도 연관된다. 책의 2/3이상이 교육열의 정의와 속성에 관련된 내용이며 중간 중간 셋째, 넷째 주장이 간략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각 주장별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책을 관통하는 흐름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저자의 논리적 흐름에 따라 글을 전개하겠다.자신감이 가득한 제목의 책에 드러난 저자의 주된 논리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교육열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교육열과 과잉 교육열 현상은 엄연히 다른 것으로 봐야하며 과잉 교육열 문제에 대한 답은 교육제도 안에서만 구하려 하지 말고 사회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 논리에서 드러나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기존의 색안경을 벗고 교육열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재조명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교육열 현상의 원인과 속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결과로 나온 교육열 현상의 목적인 학력 혹은 학벌을 통해 교육열 문제를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관점으로 이끌어 내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밝히자면 나도 이와 같은 흐름을 따르며 생각한 바를 적어 보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저자가 말하는 능력주의에 관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부분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비평해보았다.과잉 교육열 현상 이야기는 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교육열과 교육열 현상을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열과 과잉 교육열 현상(이하 한국교육열)을 구분지어 놓고 각각의 정의를 통해 성격과 의미를 분명히 한 다음 논지를 펴나가는 저자의 전개 방식은 한국교육열을 올바로 보기 위한 초석이라 볼 수 있으며, 그 결과물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 교육열은 나에게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한국교육열에 대한 정의를 마친 뒤의 결론 중에서 ‘교육열에 대한 비난의 부당성’에서 펼치는 논리는 다소 문제가 있었다.간단히 언급하면, ‘교육열은 에너지이며 욕구인데 이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당연한 작용이다. 그러므로 교육열 보다 교육열을 삐뚤어지게 만드는 사회구조와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다’ 정도인데, 이것은 ‘넌 삐뚤어졌으니까 나도 삐뚤어질래’ 정도 되는 유치한 논리라고 감히 단언하겠다.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과 충동을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허용이 되는 범위 내에서 이성을 통해 조절하기도 해왔지만, 제도와 법 등을 통해 이성의 불완전함을 보완해 왔다. 그런데 그런 ‘제도와 법이 잘못됐으니까 나도 그렇게 하겠다’ 라는 식의 논리는 아이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으며 매우 위험한 사고라고 나는 확신한다.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책의 주된 논리적 흐름을 도식화하면, 과잉 교육열의 해결을 ‘능력주의 ← 투명한 인사관리 체계 ← 학력·학벌주의 해소 ← 과잉 교육열 해소’ 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교육열의 특징 중 하나는 ‘입시욕’, ‘학력욕’ ‘학벌욕’과 같은 결과지향성이다. 책의 저자는 한국교육열의 결과지향성이 학벌주의와 학력주의의 만연에서 온다고 보며 학력·학벌주의의 근본원인을 사회의 투명하지 않은 출세구조로 본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능력주의를 통한 인사관리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하는데 심하게 말하면 능력주의 사회를 유토피아로 보고 있는 듯 한 인상을 풍긴다.과연 능력주의는 그 자체로서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개념인가? 능력주의와 투명한 인사관리 체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사관리 체계를 넘어서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오직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이며 저자 또한 능력주의를 시대적 요구와 국가경쟁력과 밀접하게 관련시키는 것을 볼 때 해결책으로 제시한 능력주의 또한 오로지 경쟁적 능력만을 강조한다고 판단 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긍정적으로는 개인 및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간에 불신을 싹틔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매우 씁쓸한 실례도 있었다. 대입이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내신을 준비하는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간, 기말 시험기간만 되면 서로를 의심하고 교실문에는 타반학생 출입금지를 큼직하게 부쳐놓는 모습들. 분명 우리가 바라는 모습은 이런 모습들은 아닐 것이다.또한 능력주의로 인한 인사관리 체계의 확립이 학벌주의 해소에 얼마나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나는 다소 비관적이다. 능력주의는 오히려 이미 학벌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무리의 권리를 대변하는 논리로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능력주의, 즉 경쟁적 능력주의가 사회의 주류 논리로서 자리 잡게 되면 이런 사고가 가능하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내가 그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네가 이 자리에 있지 못하는 건 네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야’라는 생각마저도 가능해진다.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가난한 자의 가난은 곧 그 사람의 무능력의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는 편견을 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능력주의 시대에서 개인의 능력이 곧 그 사람의 지위나 권력과 관계되는 것인 만큼 가난한 자는 무능력한 사람과 같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면 사회의 약자를 더 이상 돌봐줄 필요도 없다. 물론, 가난과 무능력은 무관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불우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비롯해 오늘날 인간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인물들을 살펴본다면 가난이 곧 무능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유명한 화가 고흐는 미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살아가는 내내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잠시 과잉 교육열 문제의 주된 원인을 사회로 보고 있는 저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보는 교육열로 돌아와 보자.우리가 바라보는 기존의 교육열, 그러니까 과잉 교육열 현상이 비난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저자의 네 가지 주장중 세, 네 번째인 교육정책의 대 전환과 학부모 클리닉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낡아서 힘이 없는 나머지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공교육제도와 학부모들의 자식사랑이란 이름아래 행해지는 과도한 사교육이다. 사교육을 막는다는 이유 아래 방송으로 과외를 시키는 공교육과 아직 말도 잘 못하는 아이 영어 잘하게 만들겠다고 혓바닥 수술시키는 학부모나 모두 그 원인을 사회로 돌리기에는 개개의 잘못된 점을 무시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거대함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공교육과 전통적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 제반에서 오는 학부모의 교육열까지 모두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과잉 교육열 현상을 일으키는 문제들이다.따라서 과잉 교육열 해소라는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어느 하나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개개의 문제점과 해결책이 가지는 한계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판단하여 최선책을 찾아야 한다. 교육이란 것은 사회로 나갈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사회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반영된다. 그러므로 사회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제 그것에서 부수적으로 파생되어 나온, 혹은 잠재해 있다가 어느 촉매를 계기로 터져버린 개개의 문제들 또한 무시 못 할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교육열’이란 커다란 문제를 한 번에 해결 하겠다고 그 답을 찾아내는데 너무 강박관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무턱대고 절대적인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문제점에 대한 파악과 해결을 통해 노하우를 쌓고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교원노조의 쟁의권 논란과단체교섭대상의 범위에 관한 문제1. 사건의 개요전교조 인원 3명이 NEIS 관련 쟁의 행위에 가담하였다가 고소된 사건이다. 문제가 됐던 점은 위원장의 지침에 따라 학교장의 연가 승낙을 받지 않고 무단결근하여 동국대학교 만해과장에서 개최된 “전교조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폐기 촉구를 위한 대회”에 참가하여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쟁의 행위를 하고, 같은 일시·장소에서 서울 동국대학교측에서 전교조의 만해광장 사용허가를 불허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음에도 학생회와 합의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교조 소속 조합원들과의 집회를 갖는 등 동국대학교에서 관리하는 건조물 내에 집단으로 침입하였으며, 또한 무단결근을 통한 쟁의참가로 인해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였다는 점이었다.2. 고발사실피의자들은 모두 초등학교 교사로, 박○주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증산초등학교 분회장직에 있는 자, 피의자 이○덕은 전교조 조합원인 자, 피의자 정○용은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서부지회장직에 있는 자인바,(1) 2003. 6. 21. 13:00경부터 17:00경까지 전교조의 연가 투쟁을 하기로 결정된 사안을 바탕으로 위원장의 지침에 따라 학교장의 연가 승낙을 받지 않고 무단결근하여 서울 동국대학교 만해광장에서 개최된 “전교조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폐기 촉구를 위한 대회” 에 참석하여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쟁의 행위를 하고,(2) 집회 장소인 서울 동국대학교측에서 전교조의 만해광장 사용허가를 불허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음에도 학생회와 합의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교조 소속 조합원들과 집회를 갖는 등 동국대학교에서 관리하는 건조물 내에 집단으로 침입하고,(3) “전교조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폐기 촉구를 위한 대회”에 무단 결근을 하고 참가함으로써 학생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학교의 학사관리업무를 방해한 것이다.3. 교원노조의 쟁의행위와 단체교섭의 대상 범위1) 쟁의행위노동조합과 그 조합원은 파업·태업 기타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일체의 쟁의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제8조:벌칙 제15조). 학생의 학습권 보호를 위하여 쟁의행위는 일체 금지된다. 이는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2) 단체교섭의 대상 범위제6조 1항에 「노동조합의 대표자는 그 노동조합 또는 조합원의 임금·근로조건·후생복지 등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에 관한 사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서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추상적 개념인 ‘경제적·사회적 지휘향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와 관한 것이다.4. 교원의 쟁의 행위와 단체교섭의 대상 범위에 관한 여러 입장1) 교원의 쟁의 행위 - 학생의 학습권과 교원의 쟁의권의 충돌 여부기본적으로 교원노조는 학생의 학습권의 보호를 위해 쟁의권이 제한되어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서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먼저 이 두 가지 권리의 양립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양립설은 교원의 쟁의권 행사와 학생의 학습권 관계에서 이 두 권리가 상호 양립할 수 있다는 견해로 진보적인 노동법 학자와 전교조 측의 주장이다. 교원노조는 일반노조와 같은 쟁의권 인정을 주장하고 있지만 진보적인 노동법 학자는 위 문제에 대하여 “헌법 제33조 1항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이 반드시 헌법 제33조 1항 및 6항의 학습권 보장에 모순이 되지 않는다. 다만 교원들이 수업기간 중에 단체행동권을 행사하여 파업을 하는 경우에는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으므로 교원의 단체행동권의 절차를 합리적으로 제한할 필요성이 있다.”는 절충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양립부정설은 교원의 쟁의권 행사와 학생의 학습권 관계에서 이 두 권리가 상호 양립할 수 있다는 법적 견해이다. 헌법재판소의 사립학교 법 제55조에 대한 합헌결정문의 요지는 “교원의 근로의 내용인 교육활동은 일반 노동행위와는 다르다. 일반기업의 경우에는 근로자의 쟁의 행위에 대하여 사용자측에게도 직장폐쇄 등 대응수단이 인정되고 있지만 학교는 학교폐쇄라고 하는 대응수단도 사용할 수가 없다. 교원에게 쟁의행위까지 인정하는 경우, 무고한 희생자는 학생들이고 결국은 국민전체를 위한 교육제도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할 것이다(헌법재판소, 1991).”2) 단체교섭의 대상 범위에 관한 일반적 판단기준교육인적자원부(現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원노조와의 단체교섭 대상의 일반적 판단기준은 아래와 같다.가. 교육부장관, 시·도 교육감이 처리 또는 처분할 수 있는 사항이어야 한다.나. 집단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다. 교원의 근무조건 등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이 판단 기준에 따르면 교육정책·교육과정·기관의 운영 등에 관한 사항은 교섭대상이 아니다. 이 밖에 다른 의견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무적 교섭대상이라고 보는 경우에는 교원의 전문성을 근거로 두고 있다. 둘째, 임의적 교섭대상이라고 보는 경우에는 교육정책은 사용자의 결정권한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교육정책을 사용자의 전권으로 보는 이들은 교섭금지대상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법원의 경우 셋째 주장에 가까운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교육정책을 사용자의 전권으로 보고 그것을 일종의 경영권이라 할 때, 경영권의 본질적 부분은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도 의무교섭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4. 판 단1) 쟁의행위에 관하여교원의노동조합설립및운영등에관한법률(이하 ‘교원노조법’이라 한다) 제8조는 “노동조합과 그 조합원은 파업ㆍ태업 기타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일체의 쟁의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할 뿐, 교원노조법은 쟁의행위를 따로 정의하고 있지 않다. 다만 교원노조법은 이 법에 정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다(교원노조법 제14조 제1항).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교원노조법 제8조의 ‘쟁의행위’ 의 개념은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의 규정에 따라 정의된다고 할 것이다.2) 단체교섭대상의 범위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제2조 제6호는 “쟁의행위”라 함은 파업ㆍ태업ㆍ직장폐쇄 기타 노동관계 당사자가 그 주장을 관철할 목적으로 행하는 행위로서 여기에서 그 주장이라 함은 같은 법 제2조 제5호에 규정된 임금ㆍ근로시간ㆍ복지ㆍ해고 기타 대우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노동관계 당사자 간의 주장을 의미한다고 볼 것이므로, 위와 같은 근로조건의 유지 또는 향상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는 쟁의행위는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의 규제대상인 쟁의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