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 「파리대왕」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핵전쟁이 일어나서 인류가 거의 멸망한 상태다. 당신은 의사, 농부, 배우, 정치인, 눈먼 소년, 수녀.... 들 중에 몇을 선택해서 성숙한 사회를 재건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굴 선택하시겠습니까?이런 질문은 우리가 성숙한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무너진다 해도 우리가 다시 성숙한 사회를 건설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규약할 법이 없는데 순전히 이성에 따라 혹은 건전한 감정에 의해서만 행동할 수 있을까? 내 의문은 ‘내가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가’다. 한 두 사람쯤은 성숙한 사회 구성원에 걸맞은 정신을 온전히 지닐지도 모르겠지만 다수가 다 그렇지 않다면 성숙한 사회 건설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파리대왕에서 주인공과 돼지는 올바른 정신의 역할을 사이먼은 선각자 역할을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뚜렷한 가치관에 의해서 행동하기 보다는 타인의 의사에 따르는 일반 군중의 역할이다. 오로지 단 한사람 존만이 주인공과 돼지가 만들어낸 법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주인공과 돼지가 소년 집단의 리더가 되어서 소라를 불면 모이는 것이고 발언은 소라를 쥐었을 때만 한다는 규칙이라든지 구조받기 위해 산꼭대기에 연기 피우기 당번 정하기, 집짓기 등을 하며 성숙한 사회 구성원 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결국 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존의 무리가 세력이 커지고 돼지는 사고로 죽고 결국 모두 존의 무리가 되고 성숙한 사회를 지키려 주인공 혼자 맞선다. 그 주인공 조차 살해당하기 직전에 어른들로부터 구조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렇게 된 것은 존이라는 단 한사람 때문이었다.
지난 방학 때 함께 책읽기 스터디를 같이 했던 미영이가 다소 읽기 불편하긴 하지만 읽으면 좋다면서 추천해준 책이 「추락」이다. 읽기 전에 먼저 손영미 교수님께 어떨지 여쭤 봤는데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아주 좋습니다.” 사실은 「추락」만 물어본 게 아니라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여쭤 본 거지만 내 느낌상 「추락」 때문에 “아주”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 같다.「추락」에는 워즈워드나 바이런이 자주 언급된다. 그 중 바이런은 주인공이 자신의 그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로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인물들이 19세기 영시에 나오기 때문에 교수님께서 아주 좋다고 하신게 아닐까.간략한 이야기는 이렇다. 영문학 교수인 주인공은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본능에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본능은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여잘 밝힌다.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윤락녀와 만나오다, 그녀가 그만두자 맘에드는 학생에게 접근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어쨌든 그녀와 관계를 맺긴 맺었으나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일이 커졌다. 결국 그녀 쪽에서 학교에 고소했고, 여차여차해서 주인공은 학교에서 쫓겨나 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스캔들 사건으로 주변에서 떠들어 대는 게 싫어서 농장에서 살고 있는 딸에게 찾아 갔는데 마침 그 얼마사이에 괴한들이 찾아와 그를 공격하고 딸은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주인공은 그들을 찾아내서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딸은 그냥 묻어 두자고 이것이 이곳에 살고 있는 대가라며 순응하려고 하기 때문에 의견 대립이 생겨 마찰을 빚어내고 결국 순응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역시 읽는 동안 불편한 소설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 다 제쳐 놓고 날 가장 불편하게 만든 인물은 딸 루시였다. 내 사고방식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순응이란 이해할 수 없다. 순응을 택하기 전에는 괴한들만이 악당이지만, 순응을 택한 순간 나는 루시 조차 좋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권리를 지킬 생각이 없는 사람은 동정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문화와 백인의 침략을 묘사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었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의 반목의 역사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하긴 하지만 왜 그 후손들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까. 피해자의 순종? 인간이 다른 인간을 폭력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더욱이 육체적으로 약한이를 육체로 농락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작가는 혹 괴한을 백인에 딸을 아프리카에 빗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학창시절에 날 괴롭힌 애가 있다고 나중에 그 녀석의 세 살 짜리 애를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다. 딸의 순응은 정도가 지나쳤다. 선조들이 죄를 지으면 후손들은 속죄하려는 맘을 갖고 아프리카인들과 화해하고 도우면 될 것 아닌가.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죄를 계속 지고가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스탕달 「적과흑」가끔씩 세상이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가 있다. 적과 흑을 충격적으로 읽고 난 다음 세상은 내게 주인공 소렐이 바로 너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독서실에서 두 번째로 적과 흑을 보고 있는 즈음에 내 옆에 누군가 앉았는데 그 사람도 적과 흑을 빌려서 보고 있어서 놀랬다. 적과 흑이 유명한 고전이긴 하지만 현재 베스트셀러도 이렇게 나란히 앉아 보기 힘든데 참 대단한 우연이다. 바로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은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는데 소설 초반 부분에 아니나 다를까 「적과흑」이 나왔다. 남자 주인공이 제일 아끼는 책이란다. 소렐하고 안 어울릴 것 같은 스타인이 「적과흑」을 가장 좋아했다니 이것 때문에 「적과흑」과 「생의한가운데」를 엮어서 고민을 해결하기도 했다. 아무튼 「적과흑」은 내게 무언갈 말하고 싶어 했다.소렐은 나폴레옹을 맘속의 우상으로 삼고 있는 청년으로 머리가 좋다. 라틴어 성서를 그대로 암기할 정도다. 당시 프랑스 상류 계층을 증오하고, 하층민들의 가난에 가슴 아파 한다. 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혁명가가 되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단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다. 큰 인물이 될 수는 있는 재능을 가졌지만 주변인들에게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한다. 목재소를 하는 자신의 집을 증오하고, 사랑을 자신의 능력의 구현 정도나 출세의 도구로 여긴다.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가르치는 어린 아이의 애정조차 상류사회의 동정이라고 여길 정도로 생각이 꼬여있다. 이 얼마나 불쌍한지. 결국 그는 처음 애정을 나눴던 레날 부인의 투고로 자신의 입지가 무너지게 되자 분노를 못 이겨 권총으로 그녀를 공격한 일로 처형당하고 만다.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렐의 심리 묘사다. 내게 「적과흑」만큼 읽으면서 마저 읽지 못하고 자주 덮었던 책이 없다.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어떻게 이렇게나 나랑 생각하는 게 비슷한지. 절대 좋은 내용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기가 부끄럽다. 나랑 이렇게나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파렴치한 녀석이라니 내가 그렇게 파렴치한 짓들을 하는 것 같아서 책을 안 덮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면서 파렴치한 녀석이 아닌 긍정적인 인물인 슈타인의 생각도 나랑 무척 비슷하단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소렐은 나였고 나는 또 슈타인이었다. 소렐을 「생의한가운데」에 집어넣으면 슈타인이 되고 슈타인을 적과 흑에 집어넣으면 소렐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슈타인이나 소렐이나 소설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자기의 실현 가능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소렐은 계급사회에서 재능을 갖고 태어난 하층민의 자식이었고, 슈타인은 그나마 자신의 능력대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여서 교수가 된 것이다. 가끔씩 내가 천사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곧 악마가 될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던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실현되는 내 안에 있는 여러 실현 가능성들 때문이었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싯다르타는 카스트 최상위 계층인 바라문의 아들로 부족한 게 없고 배움에서 언제나 앞서있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만족 시키지 못하고 그는 이대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집을 떠나 떠돌며 고행을 하는 사문이 된다. 단식, 고통 잊기, 영혼 이입 등 자아를 잊는 수련을 하지만 결국에 자아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다는 걸 알고 이 길도 아님을 안다. 그 때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어서 그의 동행자 고빈다와 함께 부처를 만나고 그가 진짜 임을 알지만 부처가 얻은 깨달음은 가르침으로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빈다를 남겨두고 그는 떠난다. 명상하기 단식하기만을 가진 채 어느 도시에 도착한 그는 상인의 밑에 들어가 상인이 되고 카밀라를 만나 쾌락을 배운다. 처음엔 자기 시험적 성격이었던 상인되기가 쾌락 배우기였지만 그는 점점 거기에 빠져들어 도박을 하면서 희로애락에 사로잡힌다. 이미 마흔이 넘어 그렇게 변해 버린 자신을 깨닫고 자괴감을 느낀 채 홀연히 그곳을 떠난다. 강가의 뱃사공을 만나 그에게 강으로부터 배우는 법을 배우고 머물면서 점점 그와 닮아 간다. 어느 날 카밀라와 싯다르타가 몰랐던 그의 아들이 그곳에 찾아오게 되지만 카밀라는 그 곳에서 독사에 물려 죽고 그의 아들은 싯다르타를 못 견뎌하고 떠나가 버린다. 그 때문에 싯다르타는 실의에 빠져 아들을 찾아 도시로 가지만 뱃사공의 권유로 다시 돌아온다. 그 뱃사공은 부처였다. 싯다르타는 혼자 남아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까지 그리고 그 다음 그 다음을 모습을 지니므로 시간에 파생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함을 깨닫는다.「싯다르타」를 읽고 나서 바로 불교에 관심을 갖고 법구경을 읽었다. 정말 향기가 났다. 깊은 가르침에 대한 향기가 정말 서려 있었다. 자기안의 목소리를 들을 것, 소가 모는 수레에서 소의 발자국을 바퀴가 밟게 되는 것처럼 생각이 반드시 내게 영향을 끼치므로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든지, 나 자신 조차 내가 아니므로 나의 편협한 감정을 내 것이라 착각할 필요가 없다든지 종교 때문에 계속 편협한 생각에 빠져있었다면 배우지 못했을 것들을 많이 배웠다. 이런 많은 깨달음을 놓치고 죽는다면 죽고 나서 얼마나 아쉬울까
조지 오웰의 「1984」는 읽어 본적이 없음에도 읽어 본 듯한 느낌을 주는 유명하다. 나는 최근에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사실 같은 제목이다. Q는 일본어로 9랑 동음이다)를 통해 조지 오웰의 소설을 상기 받았다. 난 여태까지 오웰이 빅브라더란 개념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에게 불러 일으켜줬다는 의의만을 들었는데 직접 책을 읽어 보니 소설 자체도 잘 썼다. 괴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문호의 글들을 읽을 땐 잘 썼다는 생각만 했지 천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오웰은 천재다. 오웰이 쓴 소설은 마치 예언서이거나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룬 역사서 같다. 「1984」의 사건들은 허구의 냄새가 나질 않기 때문에 가짜 같지가 않다는 않다. 게다가 작가는 그 사건들을 실제 겪어 본 듯한 탁월하게 심리묘사를 한다. 이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는 그가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천재겠는가. 마치 북한의 지배체제를 실제로 겪어보고 글을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나 그가 소설을 쓴 것은 6.25전쟁도 일어나기 전이었다.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가져온 혜택을 인정하면서 그것이 야기한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해결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왔다. 우리는 마치 5개 모으면 사탕으로 바꿀 수 있는 스티커를 받으려고 혈안 된 꼬맹이들처럼 현대인들은 종이 쪼가리에 혈안 돼 그걸 좀 더 모아 보겠다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 것의 환각효과는 강력해서 종이가 인간 보다 더 중요하다고 속였고 우린 그걸 세상에 원활히 유통 시키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아 불필요한 생산을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생산을 소비하기 위해 사치 또는 전쟁과 침략을 해왔다. 진짜를 위해서 피 흘렸다고 해도 가련한 우리는 가짜를 위해 그래 왔으니 얼마나 가련한지.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케인즈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경제학자 슘페터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전환 될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 것을 보고 앞으로 도래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슘페터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나 러시아나 북한식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슘페터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성숙이 선행하고 선거나 법을 통한 정당한 형태로 자연스레 이양 되는 것으로 이것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회주의이다. 이는 정권의 변화로 사회 복지 예산을 점점 증가시키는 선진국 유럽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허나 사회주의가 완전히 정착되고 더 이상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가지면 안 되는 상황이 온다면 아무리 먹고 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 한들 행복할까? 이런 모습은 「1984」의 모습에 경제적 풍요만 추가하면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선 내가 주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위에서 관리 받는 그런 객체에 불과하다. 이게 얼마나 끔찍할지. 순전히 다른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야할 것이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겠다. 「1984」의 끔찍한 미래상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님을 시사한다. 생각해보면 슘페터도 조목조목 자본주의가 어떤 문제점에 의해 어떻게 사회주의로 이양될 것이란 걸 지적했지만 그 사회주의가 가져올 병폐를 예견하진 않았다. 덕분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다른 답안이 있는지 찾아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