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의사소통 과제< 영화‘Dead Man Walking'을 보고 >과 목 : 글쓰기와 의사소통담당교수 : 김경복 교수님학 과 : 국어교육과학번이름 : 2008111061제출일자 : 2008년 10월 29일※ 영화 ‘데드 맨 워킹 (Dead Man Walking)’을 보고- ‘글쓰기와 의사소통‘ 수업에 영화 감상을 하다니 신선했고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학교에서 보여주는 영화가 대게 그렇듯 이번 영화도 감동적이거나 교화적 줄거리를 지녔다고 생각하니 그다지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데드 맨 워킹이라... 죽은 자가 걷고 있다는 건가?’ 평범한 시사 영화로 보기에는 제목이 이상했다. 제목 그대로 좀비가 나오는 공포영화 같기도 했고 ‘데드맨’ 이라는 것이 죽은 자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비유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를 감상하다보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헬렌수녀의 옷차림이 촌스러워.’, ‘메튜? 이름이 왜 저래? 아무리 봐도 저 남자가 범인 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저 사람은 표정이 왜 저래?’ 잡생각을 다 떨쳐버리고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 최대한 집중하여 그 내용과 영화 자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했다.내가 생각 한 이 영화의 중점은 ‘사형제도의 폐지’가 아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단순한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죽였다. 그 죽인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인간을 죽인다.’ 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관객들에게 묻는 것이다. 로빈스감독이 영화에서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목소리는 ‘헬렌 수녀’라는 인물을 통해 대신 전해진다. 그녀는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을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위로 하지 않는다. 살인자를 향해서 지나치게 질타하지 않는다. 또한 사형수를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죽인 죄를 죽이는 것으로 벌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할 뿐이다. 영화는 메튜의 사형 집행시간 전, 다시말하면 영화의 결말부부터 매튜가 주사를 맞고 난 후까지 살인 장면을 교차 편집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박탈하는 것은 개인이 행하건 사회가 행하건 살인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에 동감한다. 어째서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고, 전쟁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는 것인가. 또 사람을 죽인 죄를 벌하려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당하게 사형을 집행한다고 해도 결국에 그 살인자를 죽인 것은 사람인데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범죄, 살인을 저지른 자의 죄가 가볍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죄를 저지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지만 그 죄를 다스리는 그 방법은 그가 저지른 것과 똑같은 살인은 아니 여야 한다. 사형제도로 인해 실제로 범죄가 줄어든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낳을 수 있다고 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행하는 복수의 한 수단일 뿐인 사형, 즉 또 다른 살인으로 피해자가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는 행위는 옳다고 말 할 수 없다. 그 누구든지 막론하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살인으로 칭한다면 결국은 그들도 살인자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 영화에서는 사형수들이 사형을 집행하면서 느끼는 죄책감과 고통을 그대로 담아냈다.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을 가진 인간일 뿐인데 같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면 사람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또 사형을 집행 한 후에는 오판이라 판결이 나도 되돌릴 수 없다. 항상 재판의 결과가 옳은 것만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집행된 사형은 되돌릴 수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근거가 있지만 결국 중점적인 내용은 결정하고 벌하는 사람도 어차피 같은 인간일 뿐인데 인간이 인간을 죽인 죄로 다시 인간의 삶을 앗아간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악순환의 반복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교육사회학 리포트< 한국교육의 문제점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의 실태와 창조성교육 >과 목 : 교육사회학담당교수 : 김지현 교수님학 과 : 국어교육과학번이름 : 2008111061제출일자 : 2008년 11월 28일< 목 차 >Ⅰ. 머 리 말Ⅱ. 본 론1. 우리나라 암기교육의 생성원인 및 배경2. 암기위주 한국교육의 현재 문제점3. 창조성 계발에 대해 증대되는 관심, 필요성4. 창조성 계발을 위한 교육의 구상Ⅲ. 맺 음 말Ⅳ. 참고문헌Ⅰ. 머 리 말우리는 지금까지 제도권 내의 교육, 입시 위주의 교육을 통해 암기교육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요즘 암기교육이라 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통하는데 그 이유는 현재 교육이 지향하는 바인 창의성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암기교육은 무엇이며 학습에서 필요한 것인가? 암기의 정의는 주어진 문제의 뜻을 파악하지 않고서 명기했다가 재생시키는 일을 말한다. 즉 정확하게 기록했다가 다시 꺼내는 것이다. 암기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을 위해 흔히 하는 '벼락치기'의 예를 들 수 있다. ‘벼락치기’란 짧은 시간에 시험이라는 것에서 요구하는 내용들을 단순히 외우고 난 후 답안에 그것을 쏟아 붓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지에 내용을 쏟아 붓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는 백지가 되어버리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암기교육은 학습자로 하여금 상당한 강박관념을 심어준다. 정해져있는 분량을 일정 시간 내에 외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학습자는 수동적으로 사고하고 그들의 생각을 제한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학습을 기계적으로 만들고 학습자에게 좌절감을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암기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이기보다는 일시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암기는 이해하고 그것을 응용 할 수 있는 학습이기보다는 의식적으로 잊지 않고 달달 외우고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암기가 필요한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암기가 학습에 있어 주를 이룰 만큼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회적 지위상승을 위한 자격 획득에 두는 경향이 강하다. 말로는 흔히 덕성, 인격, 적응력, 창의성의 형성과 같은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진학과 취업, 지위상승(또는 출세)와 같은 교육의 수단적 가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지위 상승의 중요한 관문이 일류대학 진학이고, 일류대학의 입학시험에서는 흔히 단편적 지식의 암기력이 주요한 평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창조적 사고능력과 같은 고차원의 능력을 키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교육자들도 교육에 관한 이러한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여 현행 입시제도의 잘못된 틀 안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의 주입을 위한 입시교육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의 학교가 이런 기계적일 수밖에 없는 암기위주의 교육을 실행 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적인 원인과 배경은 이 뿐만이 아니다. 암기교육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육이 급격히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해방 후 학생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각급 학교가 크게 비대화되고 학급이 과밀화되었다. 사실, ‘콩나물교실’의 대집단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개성과 개인차의 발견, 자발성과 독립성의 고무, 지적 모험의 권장, 독창적 활동의 자극, 확산적 사고의 촉진, 개별화 지도 등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가 구름 위에 뜬 비현실적인 주문이 된다. 학생 인구의 갑작스런 증가는 입시 경쟁을 치열하게 하였다. 단편적 지식의 암기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일컫는 ‘입시지옥’이라는 말도 생길 정도였다. 이런 대중교육의 상황에서는 많은 수의 학생을 다루기 때문에 학력평가 방식도 주관식보다는 객관식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객관식 평가방식이라도 출제자의 전문적 능력에 따라서는 고등정신 영역을 측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 영향이 그대로 이어져 단편적 지식이나 단순한 이해력만을 재는 객관식 평가가 주를 이루며 일반화 된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다.그 동안 권의 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 교육행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의 암기위주교육방식을 지지하는데 육은 학생으로부터 하여금 학습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고 사고력을 획일화 시킬 뿐 아니라 상황주도력을 잃게 만든다. 한 나라의 교육체제는 그 사회의 창조적 힘이 샘솟는 원천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체제는 젊은이들의 창조성을 오히려 위축하고 말살하는 역기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 중에는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예술인들, 노벨상 수상에 근접해 있는 자연과학자들, 기업의 생산기술 개발에 창조적으로 공헌하고 있는 기술자 등 우수한 자기개발능력을 지니고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의 세심한 배려와 정성어린 후원, 학교 밖에서의 집중적 훈련, 외국 교육기관의 힘을 빌리고 기업의 혁신적 조직 분위기 등에 의해 창조적인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경우가 많다. 만약 그들의 배움이 우리나라 현 교육에만 치우쳐져 있었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그들은 한국의 학교 교육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학교 교육에도 ‘불구’하고 창조적 능력을 키우고 자기개발을 한 사람들이다.현재 우리나라 학교 교실을 보자. 교실에서의 학생지도나 학습평가에서 학생들은 창조적 경험을 체험 할 기회가 아주 적으며 오로지 읽고 쓰고 외우는 교육을 통해 학습결과에 대한 평가에서도 학생 개개인의 개성과 창조력 은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암기위주의 교육은 일방통행방식 강의와 집단수업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므로 토론이나 탐구 수업, 과학 실험, 창작 활동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시간 낭비적인 교육활동이 된다. 그저 적힌 것을 읽고 받아 적고 그것을 따라 외우기만 하면 끝이 나는데 말이다.또 이런 시대착오적인 암기교육은 우리 사회 전반적인 발전저하 및 경기침체를 가져왔으며 뿐만 아니라 교육본래의 목적도 잃게 만들었다. 합리적인 사고를 지연시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자립성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결과의 옳고 그름도 제대로 판단 할 수 없게 만드는 암기식교육. 계속 이렇게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교육을 진행한다면 우리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초기 산업화를 이룰 때만 해도 그리 높은 수준의 창조성이 요구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세계의 각국 간에 기술보호주의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선진국을 앞질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경제체제를 효율화, 첨단화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창조적 능력을 가진 고급 인력을 양성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적 계발은 경제적 이유 뿐 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이유에서도 절실히 요구되어지고 있는데 한국 사회가 산업사회로 진전하면서 사회구조와 기능이 복잡화, 다양화 되어가고 복잡한 여러 사회문제가 야기 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합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사회적 상상력과 창의성이 요청되며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거치고 있는 번혁의 시대에 한국사회가 적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 해 내어야 한다. 어떤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이나 기능보다는 문제 해결력, 탐구력, 창의력과 같은 고등 정신 능력이 특별히 더 요청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여유 있는 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되면 사회의 문화적 욕구가 크게 증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가 이러한 기대가 높아질수록, 일반 국민들이 질 높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도 현재 사회는 높은 창조성이 요구된다.4. 창조성 계발을 위한 교육의 구상1) 창조성 교육의 기본 전제효과적인 창조성 교육을 시행하기 전에 전제하여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먼저 창조성 또는 창의성이라는 말은 새로운 것을 창출 해 내는 개인의 인지적인 능력과 그와 관련 된 정의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은 개인의 행동변화를 일차적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이 곳 에서의 ‘창조성’은 개인의 창조성만을 일컫는 말이다. 또 창조적인 것은 아이슈타인이나 베토벤이 창조해 낸 위대하고 거대한 창조물이 아니라, 그 개인을 기준으로 하여 과거보다 새로운 것을 생각 해 내거나 만들어 낸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은 지금까지의 교육지침에서도 수 없이 반복해서 강조되어 온 교육목표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강조되는 창조적 교육이 실제로 효과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 교육의 현실은 암기위주의 주입식교육에 의해 키워줘야 할 학생들의 창조성을 오히려 위축시키고 말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창의적 생활’, ‘창조적 인간’이라는 말들은 한낱 죽어있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한국의 학교가 창조성 계발을 위한 교육력을 기르려면 창조성 배양을 제약하는 교육제도나 여건을 개선하고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창조적 교육의 목표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정의해야하는 일이다.교육의 목표는 상세히 진술되는 것 만 으로 충분 치 않다. 그것이 교육자의 가르침과 학생의 학습경험에 투영되어야 살아있는 교육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3) 창조성 교육을 위한 학습지도외국의 학교나 기업에서는 학생 개인의 창조성 계발을 위한 별도의 교과나 프로그램을 개발, 실시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러나 현 우리의 사정을 감안 할 때 창조성 계발식의 교육을 위해서는 창조적 사고에 관한 특정한 내용이나 기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모든 교육이나 교과목에서 창조성 배양을 촉진 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의 각 교과목에서 효과적으로 배양 될 수 있는 창조적 사고의 특성은 상당히 다르다. 한국의 학교에 있어서 현재의 교과 체계나 교과목의 수를 고려 할 때 창조성 교육을 위한 별도의 교과를 설치해야 한다는 논리는 옳지 않다고 본다. 창조성 계발을 위한 방도가 하나 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교과나 학습 주제에 따라 창의적 사고 능력을 증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거나 고안해 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역할 놀이, 브레인 스토밍(brain-storming), 시넥틱스(synectics), 집단 과제연구, 도서나 매체의 활용, 의사결정 연습, 문제 해결, 미래 같다.
- 현진건의 와 은희경의 의시대상을 고려하여 비교한 연구 -< 목차 >Ⅰ. 들어가기 전에Ⅱ. 「빈처」의 시대상과 사회문화적 배경1. 현진건의 「빈처」사회문화적 배경 -1920년대. 1) 자본주의의 등장. 2) 핵가족의 등장...2. 은희경의 「빈처」사회문화적 배경 -1990년대. 1) 탈산업사회의 등장. 2) 다양한 가족 구조. 3. 두「빈처」의 비교Ⅲ. 나오는 말.※ 참고문헌과목명현대소설교육론교수님명형대 교수님학과국어교육과학번2008111061이름제출일2009년 3월 30일Ⅰ. 들어가기 전에현진건은 1900생으로 대구에서 태어나 1920년 《개벽》지에 단편소설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사실주의(寫實主義)를 개척한 작가가 되었고 김동인(金東仁)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대표문인이자 선구자가 되었다. 현진건이 쓴 소설 중 《빈처(貧妻)》는 1921년 1월, 개벽 7호에 실린 작품이다. ‘빈처‘는 1921년 ‘ 개벽 ‘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창작 능력을 문단에 인식 시켜준 사실상의 데뷔작이며 정신 가치 지향의 가난한 무명작가의 고민을 1인칭 자전적 서술 방식으로 묘사하였다. 은희경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이중주》가 당선되어 등단,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풍부한 상상력과 능숙한 구성력, 인간을 꿰뚫어보는 신선하고 유머러스한 시선, 감각적 문체 구사에 뛰어난 소설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은희경의 《빈처》는 그녀의 단편집인 '타인에게 말걸기(문학동네, 1996)' 에 실린 작품이다.작품의 제목은 같지만 현진건의 《빈처》는 1921년에 은희경의 《빈처》는 1996년 각각 다른 시기에 발표되었다. 이로써 후에 지어진 은희경의 소설이 현진건의 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추론 해 볼 수 있다. 또 분명 소설 속의 세대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았다. 굳이 소설을 분석하지 않아도 소설이 주는 감동이 조금이라도 덜해진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로써 한 편의 소설이 지닌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은이도 시대적인 배경도 다르지만 ‘빈처’라는 같은 제목과 의미를 가진 소설이기 때문에 두 작품의 시대상을 고려하여 비교함으로써, 소설 《빈처》의 작품세계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Ⅱ. 「빈처」의 시대상과 사회문화적 배경비교1. 현진건의 「빈처」사회문화적 배경 - 1920년대1) 자본주의의 등장현진건이 를 발표한 1921년은 근대초기로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자본주의 사회로 변해가는 시기라고였다. 경제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며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물질적인 추구를 넘어 욕망, 부만이 전부라는 의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전통적 의식은 약화되어져만 가고 그야말로 192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암울한 것이었고, 작가들은 울분과 저항을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한 채 정신적 자아 분열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때마침 도입된 자유시와 낭만주의는 시대적 절망감을 토로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고, 절제되지 못한 비탄의 감정으로 센티멘탈이즘에 젖어들고 있었다. 여기에 상징주의가 몰고 온 세기말 풍조, 데카당스가 합세하면서 20년대 한국 시단은 눈물과 감상, 퇴폐의 직설적 토로로 점철되었다. 현진건의 《빈처》에서도 이런 전통적 의식의 약화나 지나친 물질추구현상 등이 나타나는데 전통적 문사가 사회의 존경이 대상이 아니라 부정적인 대상이며 돈을 별로 벌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무시당하고 주로 화제 거리가 물질적인 이야기이며 돈을 얻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을 감수하는 등의 내용들이 이것이다.2) 핵가족의 등장1920년대는 근대화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흔히 나타나는 핵가족이 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가문의 계승만이 혼인의 주원인이 되었지만 근대사회에서는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결혼의 주된 이유가 된다. 《빈처》에서 나타나는 가족형태는 핵가족형태이며 과도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전근대적 원인과 방식으로 혼인하였지만 부부중심의 가족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2. 은희경의 「빈처」사회문화적 배경 -1990년대1) 탈산업사회의 등장은희경이 빈처를 발표한 1990년대는 탈산업사회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기인 산업사회와는 달리 후기산업사회는 정보화시대에 이르러 컴퓨터나 정보화로 인해 과잉 생산과 과소비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산업사회 이후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탈산업 사회화의 개념이다. 탈산업사회에서는 재화보다는 서비스에 기초한 미래지향적 경제체제이며 인터넷 등과 같은 전자 매체 산업의 발달로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절대적 가치가 약화됨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다. 건축에서 쓰이던 개념이었지만 80년대 이후에는 예술 전 영역에 걸쳐 쓰이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과의 단절· 반리얼리즘· 전위적 실험성· 비역사성· 비정치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 탈이념 이라는 정치이론을 낳고 후기자본주의사회의 특징인 대량생산· 대량소비와 결부하여 인간성 상실과 정신의 빈곤에서 오는 다양한 징후들을 변화와 실험이라는 양식으로 표현, 권위적 이성과 그에 따른 억압을 해체함으로써 인간을 문화적 속박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 이성 중심의 세계가 사라지고 다문화시대가 등장한 것이다.2) 다양한 가족 구조후기 산업사회에는 다양한 가족 구조가 사회에서 인정받게 되며 성별의 역할분업의 벽도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정보화에 따라 재택근무방식도 등장하였고 다양성과 특수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의식은 성별 역할의 탈분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성별의 역할분화에 대한 의식은 완전하게 없어진 것은 아니였으므로 많은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돌보는 일을 둘 다 겸해야했다. 은희경의 「빈처」에서는 여전히 가정의 역할 안에 머물러 있으며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하여 살아가야하는 여성의 상실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3. 두「빈처」의 비교현진건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남녀관계를 많은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면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변모양상을 보여주고 자신의 근대의식을 드러내 보였다. 1920년대 초반에 쓰여진 현진건의「빈처」는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부부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정신적 가치만을 추구하여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과 이로 인해 물질적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아내와 갈등을 종래의 종적인 부부 관계가 아닌 횡적인 부부관계로 변모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990년대의 여성작가들은 작품 속의 여 주인공들은 과감하게 집안에서 벗어나 거리를 활보하며, 이혼을 원하며, 때로는 참지 못하고 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면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련의 작품이 많이 써왔다. 그러나 은희경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 그 비참한 모습을 뒤로 감추고 위태롭게 견디고 있는 지식인 여성의 현실을 대변하는 소설들을 써 왔는데 이와같이 은희경의「빈처」는 바쁜 사회생활로 가족에게 소홀한 남편과 정신적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아내와의 갈등을 조용히 그려내고 있다. 남편의 경제적 능력이나 가정에서의 여성의 위치 등이 현진건의 소설과의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현대소설교육론 과제이범선「학마을 사람들」의 서사구조과 목 : 현대소설교육론담당교수 : 명형대 교수님학 과 : 국어교육과학 번 : 2008111061이 름 : dd'학마을 사람들'은 작가 이범선이 1958년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예로부터 학마을 사람들은 학을 신처럼 믿어왔다. 왜냐하면 학은 길흉의 전달자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 말의 암담한 민족현실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한민족의 수난과 비애를 통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살아가는 인간상을 깨끗하고 고고한 학을 매개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담담한 필치의 서경적 묘사 수법으로 토착 서민의 생활상을 표현하고 길흉의 미신 또는 무욕한 인간상을 다루며, 생활체험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또 특히 시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묘사로 단편소설의 새로운 수법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며, 학의 도래 여부와 학의 상태를 마을의 행 · 불행 및 운명의 길흉으로 믿는 속신에 우리의 현대사를 이에 병렬시켜 전개하고 있다. 학마을 사람들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성의 특징을 알았으니 이제 학마을 사람들의 서사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두메의 '학마을'이다. '관에서 뭐라고 이름 지었는지 몰라도' 스스로 학마을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학'이다. '학'의 비유는 이곳 사람들의 공동체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생불사의 전설을 간직한 학의 신화성과 학마을의 본원적 순진성은 이 마을을 지탱해가는 두 원리인 셈이다.먼저 소설 '학마을 사람들'의 줄거리를 소설의 기본구성으로 나누어보면,(발단) 병으로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학 이야기를 하며 학이 돌아오길 기다린다.(전개) 학이 돌아온 날은 마을의 잔칫날이었는데, 이장 영감이 44살 되던 해부터 학은 오지 않고 나라를 왜놈들에게 빼앗긴다. 학이 돌아온 해에 풍년이 들고 광복과 함께 손자들도 돌아온다. 덕이가 봉네와 결혼을 하자 봉네를 좋아하던 바우가 마을에서 사라진다.(위기) 6?25가 발발하고, 빨갱이가 되어 돌아온 바우는 학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마을을 떠난다,(절정) 1 ? 4후퇴로 인해 피난을 가게 되지만, 박 훈장만이 바우를 기다리며 마을에 남는다.(결말)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박 훈장과 이장 영감을 장사 지내고, 봉네가 작은 애송 나무를 하나 안고 산을 내려온다.로 나눌 수 있다.위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학마을 사람들’의 이야기흐름을 'Shyuzhet의 흐름'으로 분석해보자. 여기서 'Shyuzhet의 흐름'이란, '실제 소설 속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또 'Shyuzhet의 흐름'을 'Fabula의 흐름'대로 재정렬하여도 보자. 'Fabula의 흐름'이란 우리가 겪는 일상의 관습적 시간 순서를 이르는 말이다.⇒ 소설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석하기1. 자동찻길에도 가재도 오르는 데 십 리, 내리는 데 십 리, 또 그 밑의 골짜기를 삼십 리 더듬어 나가야 하는 마을이다.2. 학마을 이장 영감과 서당의 박 훈장은 오늘 아침, 면사무소 마당에서 일제에 억지로 손자들을 화물자동차에 실어 보내주고 되돌아오는 길이다.3. 두 노인은 흐린 눈으로 똑같이, 저 밑에 마을 한가운데 소나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옛 기억을 회상한다.4. 이장의 기억속의 학마을은 아름답고 포근한 마을이었다.5. 학마을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한 쌍의 학이 찾아와 노송에 새끼를 치곤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노송을 학 나무라고 불렀다.6. 학이 돌아온 날은 학마을의 가장 큰 잔칫날이었다.7. 이장이 마흔네 살이 되던 해였다.8. 씨 뿌릴 준비를 다 해 놓고 마을 사람들은 학을 기다렸지만 학은 계절이 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 해,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쳤다.9. 어느 날, 기다리던 비대신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으러 나왔다는 소문이 들었고 마을에 열병이 돌았다.10. 마을 사람들은 점점 떠나갔고 이장도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그는 번번히 떠나지 못했다.11. 그로부터 36년동안 학은 돌아오지 않았다.12. 옛 일을 회상하며 돌아오지 않는 학에 대한 의문점을 이야기 할 때, 마을에서 신호가 오고 학이 돌아왔다는 함성이 들려왔고 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렸다.13. 학들이 마을 안에 집을 틀고 새끼를 셋이나 낳자, 마을 사람들은 틀림없이 풍년일 거라 믿었다.14. 봄에 왜놈들에게 병정으로 끌려나갔던 이장네 손자와 박 훈장네 손자가 나라의 해방소식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15. 다음 해 봄에도 학이 돌아왔고 세 마리 새끼를 쳤다. 풍년이었다.16. 다음 해 봄에도 학은 왔고 이번엔 두 마리를 쳤다. 평년이었다.17. 그 해 가을엔 이장네 손자 덕이가 이웃에 사는 봉네에게 장가를 들었다.18. 덕이와 바우는 어려서부터 봉네를 좋아했다.19. 봉네는 덕이를 좋아했다.20. 덕이와 봉네가 결혼하자 봉네를 사모하던 바우는 아무도 모르게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21. 바우가 떠나고 나서야 이장영감은 바우의 마음을 알고 후회하였다.22. 그 해 봄에도 학이 찾아왔다. 집을 틀고 두 마리의 새끼를 깠다. 사람들은 기뻐했다.23. 학 새끼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 죽자 마을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24.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서 무서운 변이 마을을 흔들고, 누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해방시키려 왔노라고 하였다.25. 어느 날, 오른쪽 이마에서 눈썹까지 죽 굵게 흠이 그어진 바우가 소문도 없이 마을로 돌아와서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자신이 위원장라 하며 자기가 마을의 가장 높은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다.26. 마을 사람들은, 학이 새끼를 물어 떨어뜨리자 바우와 함께 온 이들은 학마을을 잘 되게 해 줄 사람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에 바우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27. 이 사실은 안 바우는 학나무 밑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반동은 숙청해야 한다며 총으로 학을 쏘아 버린다.28. 학 중에 한 마리는 떨어져 죽고 한 마리는 놀라 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장영감은 노여움에 차 쓰러진다.29. 다음 날, 바우는 마을 사람들더러 학 나무 밑으로 모이라고 하지만 한 사람도 응하지 않는다.30. 화가 난 바우는 '반동'을 외치며 마을을 떠났고 박 훈장은 병석에 눕는다31. 바우가 군대에 쫓겨 북으로 달아났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한 마리만 남은 학은 새끼를 키우더니 새끼가 날 수 있게 되자 가을에 떠나 버린다.32. 겨울이 되고 중공군(오랑캐)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난생 처음으로 고향을 등지고 피난을 떠난다. 바우어머니와 박훈장은 학마을에 남기로 한다.33. 힘들었던 피난살이에서 돌아와 보니 학나무는 타 버렸고, 그 속에서 박 훈장의 시체가 나오자 이장 영감도 눈을 감는다.34. 두 사람을 장사 지내고 산을 내려온 덕이와 봉네는 위패와 함께 학 나무로 키울 흰 보자기로 뿌리를 싼 조그마한 애송나무 하나 안고 내려온다.⇒ 일상의 관습적 시간 순서에 따라 분석하기1. 자동찻길에도 가재도 오르는 데 십 리, 내리는 데 십 리, 또 그 밑의 골짜기를 삼십 리 더듬어 나가야 하는 마을이다.2. 이장의 기억속의 학마을은 아름답고 포근한 마을이었다.3. 학마을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한 쌍의 학이 찾아와 노송에 새끼를 치곤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노송을 학 나무라고 불렀다.4. 학이 돌아온 날은 학마을의 가장 큰 잔칫날이었다.5. 덕이와 바우는 어려서부터 봉네를 좋아했다.6. 봉네는 덕이를 좋아했다.7. 이장이 마흔네 살이 되던 해였다.8. 씨 뿌릴 준비를 다 해 놓고 마을 사람들은 학을 기다렸지만 학은 계절이 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 해,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쳤다.9. 어느 날, 기다리던 비대신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으러 나왔다는 소문이 들었고 마을에 열병이 돌았다.10. 마을 사람들은 점점 떠나갔고 이장도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그는 번번히 떠나지 못했다.11. 그로부터 36년동안 학은 돌아오지 않았다.12. 학마을 이장 영감과 서당의 박 훈장은 오늘 아침, 면사무소 마당에서 일제에 억지로 손자들을 화물자동차에 실어 보내주고 되돌아오는 길이다.13. 두 노인은 흐린 눈으로 똑같이, 저 밑에 마을 한가운데 소나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옛 기억을 회상한다.14. 옛 일을 회상하며 돌아오지 않는 학에 대한 의문점을 이야기 할 때, 마을에서 신호가 오고 학이 돌아왔다는 함성이 들려왔고 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렸다.15. 학들이 마을 안에 집을 틀고 새끼를 셋이나 낳자, 마을 사람들은 틀림없이 풍년일 거라 믿었다.16. 봄에 왜놈들에게 병정으로 끌려나갔던 이장네 손자와 박 훈장네 손자가 나라의 해방소식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17. 다음 해 봄에도 학이 돌아왔고 세 마리 새끼를 쳤다. 풍년이었다.18. 다음 해 봄에도 학은 왔고 이번엔 두 마리를 쳤다. 평년이었다.19. 그 해 가을엔 이장네 손자 덕이가 이웃에 사는 봉네에게 장가를 들었다.20. 덕이와 봉네가 결혼하자 봉네를 사모하던 바우는 아무도 모르게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
< 입 론 서 >논제 : 태아는 인간존재인가5조 반대입장(인간과 태아의 사전적 정의는 각주를 참고)반대논거1 : 생명이 있는 존재가 가지는 기초적 필수 요소는 호흡이다. 태아는 스스로 호흡 할 수 있는가?설명 : 우리는 인간)을 언제 죽었다고 판단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더 이상 호흡을 할 수 없을 때이다. 모든 생명의 기초는 호흡이며 자가 호흡, 즉 스스로 숨을 쉴 줄 아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생명체로 인정될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태아는 탯줄에 의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 받는다. 다시 말하면, 태아)는 태어나기 직전까지 모체에서 떨어지면 숨을 쉴 수 없다. 그래서 제 달을 못 채우고 나온 아기들을 과학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인큐베이터라는 것에 넣어 살리지 않는가? 태어나서도 제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간혹 있지만 그것은 장애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는 태아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따라서 자가 호흡을 할 수 없는 태아는 결코 인간의 존재라 인정 할 수 없다.반대논거2 : 태아는 한 국가에서 인간의 존재로써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권리능력이 있는가?설명 : 인간이라면 분명 한 나라나 집단의 소속 되어 있으며 그 일원으로써 권리를 부여받고 법의 보호와 지배를 받게 된다. 법적으로 인간의 권리를 갖는 것은 출생 후, 완전노출설과 관련하여 정확히 산모에서 태아가 완전 노출되는 시점이다. 즉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 태아는 태아 소유의 재산도 갖지 못 할뿐더러, 어떠한 법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감시의 대상도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를 한다 해도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고, 임신 중의 산모를 살해해도 산모를 죽인 살인죄는 성립되나 ‘태아살해’라는 죄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가끔 법으로 태아에게 ‘사람’인 것을 인정해 주는 측면도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다만 태아가 아직은 아니지만 태어나서부터 장래에 존엄과 가치를 가질 사람이 될 태아이기 때문에 일부 권리능력을 인정하여 주는 것일 뿐이다.또, 우리나라 민법 제 3조에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라고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생존한 동안이라는 것은 태어나기 전의 태아상태일 때부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권리와 의무를 가짐을 의미하는 내용이다.반대논거3 : 의학계에서는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가?설명 : 현재 의학계에서도 아직 확실한 이론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다수의 의견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태아는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태아의 단계에 있는 존재는 잠재적인 인간으로, 후에 인간이 될 수 있는 생명일 뿐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간됨을 인정 할 수 있는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 의학계가 가진 입장이다.반대논거4 : 태아는 제대로 된 뇌의 기능과 자의식)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설명 : 인간됨의 요소 내지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의식기능의 여부인데, 뱃속의 생명이 인간이라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뇌가 조성되고 뇌의 기능이 시작되는 단계, 즉 최소한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은 지나야 된다는 것이다.이러한 견해는 철학과 일부 신학적 인간관에서도 주장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됨의 기준은 '자의식'의 여부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 됨이란 의식이 있고 사고 활동이 시작될 때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인데,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면 뇌가 완전히 생성되고 기능하게 되는 인간의 존재와 그 전의 태아단계의 존재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뇌의 기능 이 없는 태아는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잠재적인 인간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시기의 낙태도 윤리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최종발언 : 아직도 태아가 사람인지,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언제부터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무수한 주장들과 논거들만 존재 할 뿐 명확히 정해놓은 사실은 없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된 직후부터가 사람일지, 아니면 수정란이 완전히 착상되고 난 뒤일지, 특정한 신체의 일부분이 형성 될 때부터인지, 모체의 몸에서 완전하게 분리되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때인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국어를 가지고 표현하며 사고해 인격을 가지고 도구를 쓸 줄 알 뿐 아니라, 그것을 발전시키고 창조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등의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은 어느 동물이나 식물과 뚜렷하게 구분 되는 기준이다. 이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 중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는 태아가 과연 인간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태아 그 자체의 존엄성은 인정해야하지만, 그것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잠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가지는 존엄성 일 뿐이다. 1주된 태아나 9달 된 태아에게 영혼이 있을까? 사고 할 수 있고 인격이 있을까? 태아는 모체의 자궁에서 벗어나 완전하게 탄생되기 전까지는 몇 개월의 얼마만큼 모습을 갖춘 태아라 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태아는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찬성 쪽 예상 논거와 그에 대한 반박 >예상논거1 : 그렇다면 왜 6개월 지난 태아의 낙태는 법으로 금지시키는가?답변 : 6개월이 지나면 낙태가 금지되는 이유는 태아가 인간이라서 라기 보다 모체의 자궁 속에서 웬만큼 몸집이 커진 태아로 인해 낙태수술을 하는 산모의 생명이 위험해지고, 이미 인간의 형상을 어느 정도 갖춘 태아의 낙태된 모습이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예상논거2 : 태아는 수정 후, 자기분화와 발달을 위해서 적절한 영양과 환경 또 일정한 기간의 경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이것은 태아가 자의식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답변 : 그러나 이것은 태아의 연속적 성장 과정 속에 있는 것일 뿐이지, 태어나고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의식과 사고의 기능을 시작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진입하고 인간이 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