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프린스턴 대학교 출신의 유능한 수학자, 그는 주인공 존 내쉬입니다. 그는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낮은 사교성 때문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불편하고 어색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그에게 찰스 허스만이라는 그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남자가 그의 룸메이트로 등장합니다. 그와 룸메이트가 되면서 도움과 격려를 받게 되고 그 덕분에 ‘균형이론’을 발표하면서 결국 자신이 원했던 ‘월러 연구소’에 들어가게 됩니다.5년 후, 그는 국방성에서 개인적으로 암호를 해독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여기서 미국정부 비밀 첩보 요원인 윌리엄 파처와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파처는 존에게 소련 비밀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부탁했고, 존은 이를 수락하면서 기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됩니다.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강의를 듣는 수강생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수업을 듣던 물리학도 알리샤와 사랑에 빠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둘은 결혼까지 골인합니다. 존은 알리샤와의 결혼 후에도 암호 해독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하곤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 스파이가 자신을 미행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도 아내에게 끝까지 자신이 하는 일을 비밀로 부치지만, 이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내쉬 본인 내면의 망상으로 결론지어지고 맙니다. 정부 비밀요원 파처와, 절친한 친구 찰스와 찰스 조카는 모두 조현병에 의한 환상 속 인물이었고, 소련의 암호 해독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도 본인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입니다.이러한 망상으로 인하여 존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고, 후에 자신의 아이를 목욕시키며 죽일 뻔한 상황에 놓이면서 환상의 존재가 허구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환각 속 인물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몇 십년 동안의 노력으로 조현병을 극복하고 결국엔 ‘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누리게 됩니다.2. 주인공에게 나타난 심리·행동 특성존 내쉬는 조현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신간호학에 따르면 흔히 망상, 환각, 와해된 언어, 긴장증적 행동, 무논리증 등의 증상 중 두 가지 이상의 증상이 보이는 경우 조현병으로 진단하는데, 존 내쉬의 경우 환각과 피해망상을 보이면서 조현병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환각에는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주인공이 겪는 환시와 환청 총 다섯 가지가 존재합니다. 존 내쉬가 실제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룸메이트 찰스, 그의 조카 미시, 국가정보국 요원인 파처는 실제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존 내쉬를 괴롭히는 환각의 존재입니다. 극 중 존 주변을 맴도는 세 인물은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것이지만 끊임없이 존 앞에 나타나고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찰스의 경우 그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대범하고 방탕한 인물로서 그의 사교성 결여를 대변해주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찰스의 조카 미시의 경우 본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본인에게 의지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지막 인물 파처는 존에게 새로운 도전거리를 던져주고, 포기를 하려는 존을 비난하며 공격적인 성향을 끌어올렸던 인물입니다. 존은 환각 속 인물들을 통해 본인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 심리적 위안을 얻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또한 존은 윌러 연구소 재직시절 소련 암호 해독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수행한 후부터 잡지나 신문 등에서 암호를 찾아내어 소련의 미국에 대한 핵 공격의 목표지점을 알아내야 한다며 자신의 사무실에 잡지나 신문의 조각들을 어지러이 붙여놓고 매일 단서를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 부분을 통해 존의 과대망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국가기밀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소련의 스파이들이 알고 자신을 감시하거나 미행하며 피해를 주고 있다고 믿고 자신의 강연회 도중 찾아온 정신병원의 의사와 직원들을 소련의 암살자들로 생각해 강연회를 도중 뛰쳐나가는 장면 또한 망상 때문에 일어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또한 중반부에서 본인의 망상을 일리샤가 믿어주지 않는다는 생각과 솔이 본인을 미행했다는 사실에 우울과 분노를 느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본인을 자해하는 극단적인 행동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3. 주인공은 이상심리·행동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조현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물치료와 재활치료가 두 가지가 이루어졌습니다. 조현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을 제대로 복용했을 경우 증상이 좋아지지만, 영화에서 존의 병이 다시 재발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조현병 환자들은 재발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약은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조현병 환자의 경우 자신의 질병에 대한 인지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약을 복용하는데 소홀해질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존이 약물을 복용한 이후 수학 연구에 어려움을 느끼고, 알리샤와의 부부 관계에서도 순탄치 않았던 것처럼 약물에 의한 부작용 또한 크기 때문에 환자 스스로 약물을 중단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조현병 증상은 쉽게 재발되고 마는데, 그렇기 때문에 조현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물치료 뿐만 아니라, 사회복귀를 위한 재활치료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약물치료를 제대로 받더라도 조현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무기력, 대인 관계 문제 등은 개선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뷰티풀 마인드’가 후반부로 갈수록 존과 알리샤는 집과 병원이 아닌 사회로 나가 자연스런 환경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병을 치료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영상 속 유일한 가족 알리샤의 든든한 후원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존은 큰 결심 후 자신의 모교였던 프린스턴 대학교로 돌아갔고, 처음에는 이상한 행동들로 인해 학생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 연구실을 제대로 얻지 못해 도서관에서 연구를 시작하지만, 도서관에서 여러 학생들을 자연스레 만나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고, 학문에 대한 토론 등을 시작하면서 조현병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사회성을 되찾게 됩니다. 영화에서처럼 조현병은 약물치료만으로 해결되는 질병이 아닌, 주위 사람의 관심과 지속적인 사회복귀훈련이 병행되야 한다는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4. 영화를 보고 정상행동범주와 구별되는 이상심리·행동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쓰세요.
REPORT우리동네 문화유산:공민왕 사당과 목 명 :담당교수 :학 과 :학 번 :성 명 :제 출 일 :알아볼 문화유산 : 공민왕 사당선 택 이 유 : 제가 사는 곳인 마포구에 위치하지만 평소 가보지 않았던 문화재를이번 기회에 알아가 보고자 선택하였습니다.주 소 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21길 13 (창전동, 공민왕 사당)공민왕 사당은 어떤 문화유산인가?종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231호명칭 : 서울 창전동 공민왕 사당 (서울 倉前洞 恭愍王 祠堂)분류 : 등록문화재/기타/종교시설지정일 : 2006년 3월 2일광흥창의 안전과 서강마을 주민의 번창을 위해 공민왕을 모신 사당(직접 방문하여 찍어본 공민왕 사당 전경)서울 창전동 공민왕 사당은 조선왕조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곡물을 저장하고 있으면서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광흥창을 지을 때 처음 마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 건물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전쟁 직후 주민들이 스스로 건축한 건물로 전후 민간 전통 건축술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자료로 평가된다. 사당임에도 불구하고 전면이 3칸이 아닌 2칸인 것이 특징적인 건물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있다.광흥창 터에 대한 설명. 사당은 코로나로 출입불가여서 밖에서 찍어본 전경. 전면 2칸.kbs 한국사전-『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편』 캡쳐 (출입불가로 인해 캡쳐화면 대체)kbs 한국사전-『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편』 캡쳐 (출입불가로 인해 캡쳐화면 대체)부부가 함께 모셔져있는 사당의 모습.먼저 공민왕 사당에 대해 알아보자.공민왕의 왕릉은 개성에 있는데, 광흥창에 공민왕 사당이 지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와 연관된 2가지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왕조는 풍저창과 더불어 세금으로 받아들인 곡식을 서울로 운송하여 보관하던 창고인 광흥창을 마포강가에 마련하게 되었다. 이때 마포 서강동에 사는 노인에게 고려 제 31대 공민왕께서 현몽하여, "이곳에 나를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 창고와 서강 일대가 편안하고 번창할 것"이라도 하였다. 이에 노인이 밖에 나가보니 과연 공민왕의 영정이 있어, 그곳에다 공민왕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또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 사당을 건립하게 된 과정에서 서강나루 인근 광흥창에서 곡물의 관리를 담당하던 고지기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그 설화에 따르면 광흥창 고지기의 꿈에 위엄 있는 의장을 갖춘 행차가 나타나고, 이들 가운데 한 관원이 다가와 "이 어른은 고려조의 공민왕이시다. 부복하여 삼가 말씀을 받들어라." 하였다. 이에 고지기가 부복하자 공민왕이 "과인이 젊었을 때 여기에 와 저 훌륭한 서강의 풍경을 감상한 일이 있었느니라. 이제 지나가는 길에 실로 오래간만에 다시 찾아와 보니 과연 서호팔경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마침 성실한 너를 만났으므로 한 마디 이르노니 다음부터 과인이 여기에 오면 잠시 쉬어 갈 자리를 저 언덕 위에 마련하도록 하라. 그러면 마을이 크게 번창하고 평안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꿈속에서 말한 그곳에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모셔왔다고 한다.따라서 공민왕 사당은 한강 조운이 활발하고 서강나루가 번창했을 때 이곳 주민들에게는 서강 선착장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져 뱃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곳이었다.공민왕의 사당에는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공주를 주신으로 하여 공민왕을 호위하였고 무속의 주요 신앙대상이 되는 최영장군과 왕자, 공주, 옹주 등의 화상인 무속화 6점이 모셔져 있다. 따라서 공민왕 사당은 조선왕조의 태조인 이성계를 신하로 거느리고 있었고, 고려 말 개혁정치를 추구했던 공민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 된다. 그리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서강동민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왔는데, 2004년부터는 양력 10월 21일에 모시고 있다.현재 공민왕 사당 앞 광흥창 터 뒤에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에 둘러싸여 있어 그 오래된 역사를 살필 수 있게 한다.이번에는 공민왕의 인생역정에 대해 알아보자.공민왕은 반원정책을 기치로 내걸고 고려의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왕이다. 공민왕은 내정개혁을 통해 왕권과 국권을 신장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원나라에 결탁된 세력을 비롯한 권문세가들의 토지 탈취와 겸병을 막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과 결탁하여 원나라가 차지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그 영토를 되찾았다.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충혜왕의 동복 아우로 몽골 이름은 바이앤티무르이다. 공민왕의 어머니는 덕비 홍씨로 원나라 공주가 아닌 고려 여성이었다. 1330년에 태어난 공민왕이 전례에 따라 볼모로 원의 연경에 간 것은 12살 때였다. 이후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어 1351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약 10년을 연경에서 살았다. 공민왕에게 연경의 삶은 외롭고 힘든 볼모생활이었다. 원은 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즉위, 폐위시키면서 고려 왕권의 존엄함을 짓밟았다. 그 사이 두 차례의 왕위계승에서 실패하는 아픔을 겪다가, 21세 때 원 위왕의 딸 보타시리 즉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면서 왕위계승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감성적 코드가 잘 맞았다. 공민왕은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전해져온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하다. 그 실력은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렵도라고 불리 우는 천산대렵도에서 그 생동감과 정교함을 관찰할 수 있다. 공민왕은 그림과 음악에 조애가 깊었고, 고려의 다른 왕들과 기질이 달랐다.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의 내정을 환히 꿰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원나라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신하들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과감히 변발을 풀어헤치고 원나라 옷을 벗고 고려 복색을 갖추었다. 우리의 풍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공민왕은 재위 초반 고려의 자주독립과 여러 개혁정치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치가로서의 운명은 불우했다. 원나라와의 갈등, 친원세력들의 횡포를 비롯한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반란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피난행렬 등은 공민왕의 왕위를 위태롭게 하였다. 급기야 원나라 공주였지만 고려 자주성 회복에 큰 힘이 되었던 사랑하는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왕이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정치적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그 생활도 나락에 빠져들었다. 공주가 1365년 난산으로 사망하고,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보게 했다. 신돈을 통해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졌고, 타락하고 말았다. 공민왕이 가장 의지했던 신돈의 이중인격적인 모습이 탄로나 그를 참살하고, 자제위를 설치한다.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집단인 자제위만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이한 왕비는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이 무렵부터 고려사는 공민왕을 정신이상으로 보고 있다.
REPORT조선시대역병의 유행과 대응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전염병이 돌았던 해는 무려 320년이나 된다. 전염병의 발생횟수를 왕조별로 살펴보면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小氷河期)였던 숙종의 재임기간(재위 1674-1720)에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재위 1724-76)때가 19회, 현종(재위 1659-74) 때가 13회로 그 뒤를 잇는다. 현종, 숙종, 영조가 재임하던 기간이 절정기라고 말할 수 있다.온몸에 피부발진, 고열로 사망했던 당시 천연두가 얼마나 심하면 조선시대 초상화 중 약 14%에 천연두 흉터자국이 남아있고,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호환=호랑이", "마마=천연두"를 의미한다. 명칭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이 병을 가져오는 두신(痘神,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천연두를 앓게 한다는 여자 귀신)을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불렀는데, 마마가 왕과 왕비 등에게 붙이는 극존칭의 언어임을 생각해볼 때 그만큼 치사율이 높은 두려운 전염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국립중앙박물관, [신통박통 3편] 조선, 역병에서 살아남기 편 캡쳐화면-1774년(영조 20)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한 특별 무과 시험의 합격자 18인을 기념하여 제작한 초상화첩인 「등준시무과도상첩」의 유진하, 김상옥, 전광훈의 초상화를 보면 마맛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시대 선조들은 각종 병에도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전염병 또한 귀신의 소행으로 여겨 원인 불명의 돌림병이 돌면 으레 역귀(疫鬼)의 조화로 받아들였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성 미생물’을 발견하기 이전이기에 기상이변, 음양의 부조화,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기(元氣)와 잡귀(雜鬼)의 소행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질병은 두창(痘篇, 천연두)과 마진(麻彦, 홍역)이었다.사람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속신앙?무속신앙을 활용(동원)하기도 하였다. 천연두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한 것이다. 예로부터 무격(巫現, 무당과 박수)의 주요 기능은 치병(治病)이었으며, 구병(救病)전염병을 퍼뜨린다고 믿는 신)에게 정해진 날짜에 제사를 드려 이들을 미리 달래기도 했다.조선시대 사람들은 미생물이나 바이러스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했지만, 현대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전염병을 단지 미신적인 것으로만 치부해 버린 것이 아니라, 전염병을 막기 위해 조선에서는 최대한의 의료 지식과 기술을 동원했다.첫째, 의서의 편찬이다. 우선 전염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서는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특히 의서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여 보급했다.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면 사람들의 인식과 대처는 자연히 미신적으로 흘러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기존에는 중국의 의서를 수입하여 사용해왔다. 그러나 중국과는 자연환경, 자라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 여러 환경이 다를 뿐만 아니라 중국 의서 자체에 잘못된 내용이 많고, 문장도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저 책은 저렇게 말하는 등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 임상에는 사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이를 인식한 세종은 ‘백 리나 천 리쯤 떨어져 있으면 풍속이 다르고, 초목이 생장하는 것도 각기 적당한 곳이 있으며, 사람의 좋아하는 음식도 습성에 따라 달라서 옛 성인들은 많은 초목의 맛을 보고 각 지방의 성질에 순응하여 병을 고쳤다.’고 말하며 일반 백성들은 값비싼 중국 약재를 구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환경이나 상황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약재만이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풍부하고 값싼 약재들을 활용하도록 향약(鄕藥) 장려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자생한 약초로 조선의 풍토와 조선 백성들의 체질에 맞는 우리만의 약재, 즉 향약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기존 약재와 보태고 효능의 종류를 구분하여 약재를 쉽게 구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의볼 수 있게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하도록 허준(許浚, 1539-1615)에게 명하였다. 특히 궁벽한 시골에는 의원과 약이 없고, 향약을 잘 몰라 요절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약재의 중국 명칭이 아닌 우리나라 이름을 표기하여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 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의서 편찬 작업이 중단되자 선조는 왕실이 소장한 고금(古今)의 의서 500여 권을 허준에게 내어주면서 이를 자료로 하여 혼자 찬집(撰集)하라고 하교(下敎)하였다. 책의 절반을 편찬하기도 전에 선조가 승하였으나, 이후 광해군 때에 완성, 간행되었다. 이 책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동의보감』은 권위가 있는 동양 의학서로 간행된 지 115년 만에 일본에서 전권이 출판되었으며,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일곱 번이나 거듭 출판되었다.허준은 “하늘이 인간에게 병을 주면서 그 병을 고치는 약도 주었다.” 라며 “어떤 약은 나무뿌리에 숨기고, 어떤 약은 곰 발바닥에도 숨겼는데 사람들이 노력하여 찾아 쓰면 된다.”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전염병 치료를 위해 물은 반드시 끓여 먹게 하였고, 옷가지를 삶아서 입고,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고여 있는 물을 퍼내어 깨끗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고여 있는 썩은 물에서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대처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마늘과 생강 등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면역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두 번째, 사회적 격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적 격리에도 애를 썼다. 전염병은 왕족과 고관들도 피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종은 등극 첫해인 1399년에 3개월 동안 이질을 앓았고, 마찬가지로 이질에 걸린 태종은 1411년 7월 2일 조회 때 신하들의 보고를 받지 않았다. 신하들에게 이질이 전염될까 염려되어 거리두기를 한 것이다. 정조의 첫 아들인 문효세자도 6세에 전염병(麻彦, 홍역)으로 훙서(薨逝)했다.세종은 1434-35년 두 곳에 마련된 진제장(賑濟場,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어주거나 죽을 쑤어 먹이던 곳)에 천여 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두 곳에 집단수용을 한 것이 후에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전염병이 이 급식소에 모인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가슴을 치면서 “대체 지금 이곳에서 사망자가 왜 속출했는지 그 사유를 낱낱이 기록하라.”라는 명을 내렸다. 7년 후인 1444년에 또다시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분산수용하고, 역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라고 전염된 자들을 격리시킬 것을 지시했다. 또한 수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관리에게 맡겨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으며, 관리들이 전염병 환자들을 제대로 구호하는지 감찰단을 파견하여 낱낱이 파악하였다.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마과회통』(麻科會通)에서 천연두의 예방을 위해 종두를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병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 태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의 “관질”에서는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의 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현재의 비말전파, 공기전파를 의미하는 듯하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의 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와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외부 사람들이 함부로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 밖에 금줄을 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의 용어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매우 유사한 예방법이었다.『하와일록(1798)』에 따르면 천연두로 인해 "마마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하여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정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치료제가 없어 모임을 금지하고, 외지인이 마을을 출입하는 것을 막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조선시대에도 수행하고 있었다. 유교적 성 비싼 약제를 전 지역에 풀어버린다. 여기에 부족한 예산은 왕실의 임금 전용 금고인 내탕금에서 충당을 할 정도로 '선제대응'을 잘 한 왕으로 뽑힌다. 또한 환자들이 한 곳에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역별로 담당 의료기관을 나누고(예를 들면 북서쪽은 전의감 담당, 동남쪽은 혜민서 담당), 의료진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경증 환자는 직접 진찰하지 말고 상담만 진행하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1786.4.27~5.2 피크를 찍던 홍역은 5.15~5.19 눈에 띄게 감소세를 보였고, 6월 말에 종식하게 된다.넷째, 사회공동체적 협력방안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정에서는 굶주리고 병들어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진제장을 전국에 설치하여 그곳에 오는 자는 출신지와 신분을 묻지 않고 먹거리를 공급했다.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하여 진휼(賑恤)을 거부하는 관리는 엄중 처벌했으며, 수령들의 지방행정을 평가할 때에는 얼마만큼 많은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구제했는가를 반영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구휼(救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함)과 진휼(賑恤,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줌)을 통하여 구호에 힘을 기울였다. 각 고을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병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가정을 위해 대신 농사를 지어주는 등 공동체 문화를 한껏 강화하며 장려하였다.버려진 아동을 위한 구호대책도 존재하였다, 1783년(정조 7)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늘어난 고아들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있는데 「자휼전칙(1783)」이 그 것이다. "음식을 구걸해 먹는 열 살 이하 아이들에게 쌀과 미역을 지급하라.", "세 살 이하의 버려진 영아들에게 젖 먹일 수 있는 유모를 찾아주도록 하라.". "매월 말 아이들이 먹은 내역과 영양 상태를 점검하여 보고하라." 고 기록이 남겨져있다.이 외에도 가난과 질병으로 죽은 백성들을 위하여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 억울한 원혼을 없게 하여 전염병을용했다.
REPORT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 아동학대◆목차◆1. 문제 선정 이유2. 아동학대의 정의, 유형 및 사례, 통계3. 아동학대의 원인(세가지 이론의 관점으로)4. 학대아동을 위한 보호 현황(국내)5. 학대아동을 위한 처벌규정 현황(국외)6. 아동학대 발생을 줄이기 위한 내 의견 제시문제(아동학대)를 선정하게 된 이유MBC PD수첩 1282회 누가 10살 서연이를 죽였나 2021년 4월 6일 방송이 기사화된 것을 읽었고, 10살 밖에 되지 않는 여자아이의 몸에 멍과 물고문 흔적까지 발견되었으며, 죽음까지 이르게 한 범인이 다름 아닌 서연이의 이모 A씨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또한 2020년 양천구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으로 정인이 사건은 아동학대 사건 중 가장 큰 이슈와 아픔을 준 사건입니다. 양부모의 학대로 16개월이 되었을 때 죽음에 이른 정인이의 죽음을 통해 아동학대에 대한 큰 심각성을 느꼈습니다.과거 제가 병원 근무를 했었던 6년 전, 입원환자 중 몸에 멍이 많이 든 여성 환자가 입원하게 되었고 그 당시 주치의가 학대의 소견이 보인다며 각종 검사를 진행해보자 하였습니다. 간단한 혈액검사 상에서도 학대 정황의 비정상 수치를 보였습니다. 물론 이 환자분은 성인이셨고 아동학대와는 다른 가정학대 케이스이긴 하지만, 성인보다도 더 연약한 아이들이 학대를 당할 때의 아픔과 죽음까지 연결되는 현실에 대한 먹먹한 책임감을 느끼며 아동학대 문제를 바라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문제의 주제로 선택하여 과제를 시작하고자 합니다.아동학대 정의, 유형 및 사례, 통계로 알아본 아동학대 현황*아동학대범죄의 정의*가.「아동」의 정의(아동복지법 제3조 제1호) : 18세 미만인 사람나.「아동학대」의 정의(아동복지법 제3조 제7호)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아동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ㆍ정신적ㆍ성적 폭력이나 가혹행위를 하는 것과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을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것다.「아동학대범죄해하는 모든 행위예시 : 유기(아동을 보호하지 않고 버림, 시설 근처에 버리고 감)물리적 방임(기본적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음, 불결한 환경에 아동 방치, 출생신고 하지 않은 경우교육적 방임(의무교육을 제공하지 않음, 무단결석 허용, 아동의 교육적 욕구 및 의무에 대한 방치행위,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는 행위)의료적 방임(필요한 의료적 처치 거부 등)[사 례]친모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수개월간 집안 청소를 하지 않고 아동을 화장실 바닥에 용변을 보도록 하는 등 생활쓰레기가 가득찬 집에 방치친부가 경제적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데려간 후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고 pc방 등에 방치하는 등 교육적 방임친모가 생활고를 이유로 생후 18일된 영아를 주택가 대문 앞 노상에 유기 후 도주☞ 아동복지법 제17조(금지행위) 6호(방임) 5년↓징역 또는 3천만원↓벌금마. 아동매매아동을 매매하는 행위[사 례]친모가 인터넷을 통해 미혼모들에게 접근, 병원비 명목으로 20~150만원을 지급하여 아동들을 매매한 후 자신의 자녀로 출생신고 후 양육함 (충남 논산)☞ 아동복지법 제17조(금지행위)1호(매매) 10년↓징역*통계로 살펴본 아동학대사례 유형(중복학대 별도 분류)*중복학대를 별도로 분류하여 아동학대의 유형을 살펴본 결과, 중복학대가 14,476건(48.2%)으로 가장 높았다. 정서학대 7,622건(25.4%), 신체학대 4,179건(13.9%), 방임 2,885건(9.6%), 성학대 883건(2.9%)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중복학대 중 신체학대·정서학대가 11,611건(38.6%)으로 가장 높았고, 정서학대·방임이 1,007건(3.4%), 신체학대·정서학대·방임이 909건(3.0%), 모든 학대 유형이 함께 발생한 신체학대·정서학대·성학대·방임은 198건(0.7%)이었다. (보건복지부, 2019년 아동학대 주요통계)*통계로 살펴본 학대행위자와 피해아동과의 관계*2019년에 아동학대로 판단된 30,045건을 바탕으로 학대행위자와 피해아동과의 관계를 살펴본 결과, 부모 22,7순 노무직 16.5%로 나타났다. 이러한 직업 유형은 고용 상태도 불안정,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스트레스가 학대의 유발 요인이 될 수 있다.둘째로, 유교적 전통도 아동에 대한 교육적인 체벌이나 훈육을 통한 폭언 등을 용납하고 오히려 장려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미운 아이는 떡 하나 더 주고, 귀여운 아이한테는 매를 준다.’, ‘사랑의 매’와 같은 문구는 훈육을 위한 체벌을 용인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통적인 태도의 지속은 그 사회의 아동들에게 특히 신체적 학대와 정서적 학대로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3. 상징적 상호작용론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시각을 공유하는 낙인이론에 따라서 아동학대의 원인을 찾아보자면, 고정관념화 프레임을 씌어 이혼/재혼 가정=아동학대를 강조, 계모=아동학대로 낙인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2016년 3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원영군의 아동학대사건보도에 나타난 언론의 문제점을 찾아보았다. 채널A 3월 11일 보도내용에 따르면, “[단독]계모 “전처 아이 키우기 싫었다.””에서 ‘계모’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고정관념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다. MBC의 3월 13일 "평택'신원영 군 계모' 김 씨, 게임에 빠져 생활”은 제목에서부터 '계모'를 강조했고, 게임에 빠진 사생활을 비난했는데 이는 아동학대와 관련성이 적을 수 있는 내용도 함께 첨가하여 고정관념화 프레임과 감정적 단죄 및 선정적 프레임들이 함께 작동한 것으로 해석된다.아동이나 가해자의 개인적 특성을 강조하는 발달론적 관점과 정신병리학적 관점, 그리고 아동과 부모, 가정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의 특성을 강조하는 사회심리학적 관점, 사회문화적 관점 및 생태학적 관점 등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아동권리와 복지, 2016, 학지사 참고)관점발생요인참고발달론적 관점아동 자신의 특성 : 까다로운 기질, 어린나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 등아동학대가 아동과 가족을 둘러싼 사회 환경과 불안정한 애착관계와 같은 부모-자녀관계 요인과도 밀접하게 연관, 학대아동에 대한 응급조치를 의무화하였다.다섯째, 학대행위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였다.이후, 2014년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 이후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및 그 절차에 관한 특례와 피해아동에 대한 보호절차 및 아동학대행위자에 대한 보호처분을 규정함으로써 아동을 보호하여 아동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함을 목적으로 국회에서 새로이 법률을 만들었다. 2020년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이 법의 개정 요구가 거세지면서 2021년 1월 8일 이 법의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2021년 3월 16일 일부 개정되어 현재 시행 중이다.*국내의 아동학대 사후 서비스*1)신고 및 접수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학대특례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아동학대 범죄를 알게된 경우나 그 의심이 있는 경우에는 아동보호전문기관 또는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고 신고의무자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아동학대 범죄를 알게 된 경우나 그 의심이 있는 경우에는 아동보호전문기관 또는 수사기관에 신고하여야 한다. 또한 아동학대 범죄를 알거나 의심만 되어도 신고하여야 하며, 신고하지 않은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신고의무가 강화되었다. 신고인의 인적사항을 공개·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함으로써 2012년 8월부터는 신고인의 신원을 보장하고 있다.아울러 신고의무자의 자격취득과 관계되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아동학대 예방 및 신고의무와 관련된 내용을 자격취득 과정이나 보수교육 과정에 포함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아동학대를 근절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동학대처벌법 제 10조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의무자 24개 직군이 있다.(교사 직군, 의료인 직군, 시설종사자 및 공무원 직군)아동학대 예방과 신고를 위한 긴급전화의 설치규정(아동복지법 제 25조)에 따라 신고 경로는 다음과 같다. 아동학대신고번호는 2014년 9월부터 112로 통합 운영되고 있고, 기존 1577-1391번은 폐지되었다. 지역아동보호전문기관에 설치된 일반전화를 통해서도 신고가 접수되며, 보건복지부에서 설치 운영하제28조는 아동복지시설에 입소한 아동, 어린이집과 유치원 및 초·중등학교의 아동을 대상으로 성폭력 및 아동학대 예방교육을 6개월에 1회 이상, 연간 8시간 이상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2)2차적 예방프로그램2차적 예방프로그램은 아동학대의 발생 위험이 높은 집단을 파악하여 위험요인을 최소화하고 아동학대로 진전되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다. 10대 미혼모 가정, 스트레스가 많은 가족,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가족 중 아동학대 고위험 집단의 부모를 대상으로 실시되는 사회적응훈련, 분노조절훈련, 효과적인 의사소통훈련 등의 태도와 행동 개선 프로그램이 해당된다.3)3차적 예방프로그램3차적 예방프로그램의 목적은 이미 아동학대가 발생한 가정에 개입하여 치료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동복지법 제29조에는 아동보호 전문기관의 장은 아동의 안전 확보와 재학대의 방지 건전한 가정기능의 유지를 위해 피해아동과 보호자를 포함한 가족을 대상으로 상담, 교육, 의료적·심리적 치료 등의 지원을 해야하며, 보호자를 포함한 피해아동의 가족은 이 지원에 성실히 참여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학대아동을 위한 처벌규정 현황(국외)미국각 주의 형법에 따라 학대와 방치 모두 처벌 대상이다. 버지니아주는 부모가 아동에게 심각한 상해를 가하는 경우 2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및 10만 달러(한화 약 1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있으며, 부모의 양육권도 제한할 수 있다. 버지니아의 사법?경찰 당국은 아동학대사건 신고 시 부모의 사전 동의 없이 72시간까지 해당 아동을 보호할 수 있으며, 법원 명령을 통해 아동에 대한 보호조치나 격리조치 등을 취할 수 있다. 법원은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학대부모의 친권을 박탈할 수 있다.프랑스프랑스에서는 「형법」 제221-1조와 제221-4조 등에 따라 아동의 직계존속이나 친권자가 폭력을 이용하여 15세 미만 아동을 의도와 상관없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 30년의 징역(의도적 살인의 경우 무기징역), 아동에게 장
《아키라》(1988)1.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무엇입니까.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영화 중 구하기가 제일 쉬웠다는 이유도 있지만, ‘제 3차 세계대전 이후 어수선한 네오도쿄’라는 가상의 배경에 흥미가 생겨 선택하게 되었습니다.2. 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재미있었던 장면을 묘사하고, 그 이유를 쓰시오.테츠오가 아키라가 있는 곳, 올림픽 공사현장에 다다랐을 때 케이를 만났고 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처럼 힘을 사용해선 안돼. 머지않아 스스로도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될거야.” 하지만 이 말을 무시하고 테츠오는 아키라를 부활하게끔 지상으로 캡슐을 끌어올렸고, 결국엔 자신의 욕심으로 부활시킨 아키라의 힘에 의해 몸이 부풀어 오르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가 가진 능력에 비해 겸손함과 제어능력이 없었던 테츠오를 통해 더 높은 위치로 갈수록 오만이 아닌 겸손의 미덕을 가져야하고, 내가 가진 능력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3. 《아키라》에서 ‘아키라’가 의미하는 것, 또 초능력자들과 ‘아키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여 기술하시오.아키라는 많은 이들에게 제3차 세계대전 이후 어수선한 세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재건해줄 신과 같은 존재이고, 염원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염원의 대상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은 테츠오를 ‘아키라’라고 칭송하며 그를 따르게 됩니다. 테츠오는 추종자들이 생겼다는 자신감에 더욱더 본인의 초능력을 엄한 곳에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아키라를 깨우는 과정은 참 멀고도 험했습니다. 테츠오는 자신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는 아키라의 실체를 보고 싶었고, 그의 캡슐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게 됩니다. 타카하시, 키요코, 마사루는 함께 초능력 교육을 받았던 아키라를 캡슐로부터 깨우는 것에 성공하였고, 아키라의 힘에 제어당한 테츠오는 몸이 부풀어 오르며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계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키요코 무리는 테츠오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어수선한 상황을 막기 위해 아키라를 깨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언 초능력자인 키요코는 읊조렸습니다. ‘아키라의 힘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힘이 눈을 뜰 때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그 사람은 사용 방법을 선택해야하고, 테츠오는 선택하였다. 테츠오 군은 우리의 가장 새로운 친구이고, 그가 저지른 일은 우리의 연대책임이기도 하다.’ 결국엔 키요코 무리가 아키라를 깨운 이유는 테츠오를 멸망시키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방향을 존중하지만 그의 무분별한 초능력 사용을 통해 세상이 어수선해 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테츠오의 욕망을 네오도쿄가 아닌 다른 세계에 가두게 되면서 네오도쿄는 결국 희망의 빛이 비추는 세상으로써 평화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