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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파퍄야 향기 감상문
    그린파파야 향기(The Scent of Green Papaya, 1993)이 영화는 한 소녀(무이)가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 속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이 영화의 영상은 제목― 그린파파야 향기 (The Scent of Green Papaya)― 만큼이나 매혹적이다.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무이라는 열 살 박이 어린소녀가 다른 집의 하녀로 들어가기 위해서 시골에서 사이공 시(1950년대 남부 베트남의 수도, 현재의 호찌민 시)의 한 가정으로 찾아오게 된다. 먼 거리이지만 저녁 무렵까지 힘들게 걸어서 찾아온 무이를 주인마님은 반갑게 맞이하며, 무이는 늙은 하녀와 주인마님의 따뜻한 눈길 속에 낯선 도시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가 사는 집은 악기 연주만 낙으로 삼는 무책임한 가장과 죽는 날만 기다리며 늘 불공을 드리는 노마님(주인님의 어머니) 그리고 주인마님의 세 아들(맏아들 '쭝' · 둘째아들 '램' · 막내아들 '틴')이 살고 있었다. 맏아들 '쭝'은 아버지와 비슷한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며, 둘째아들 '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노마님의 며느리로서 아버지의 아내로서 자신의 어머니가 겪는 어려움을 가장 잘 이해한다. 이 집의 막내인 '틴'은 막내답게 개구쟁이이면서 응석장이의 모습을 보여준다.무이는 여러 해 동안 이 가정을 위해 봉사하여 왔던 늙은 하녀(티)에게서 요리법과 해야 할 일들을 배우며, 식사준비를 하는 도중에 쭝의 친구인 쿠엔과 마주치고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갖으며 자신의 마음을 키워가게 된다. 그리고 여러 번 가출 경험이 있는 주인마님의 남편은 주인마님이 옷가게를 하면서 모아두었던 돈을 가지고 또 다시 가출을 한다. 주인마님은 옷감을 팔며, 경제적으로 가장 노릇을 해 나간다. 무능한 가장은 폐인이 되어 집에 돌아오나 몸을 너무 상해 주인마님의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망한다.한편, 무이는 주인마님을 돌보고 주인마님은 무이를 그녀가 젊었을 때 죽은 그녀의 딸(토)과 동일시한다. 주인마님은 글을 쓰는 둘째 아들 램이 무이를 그의 처로 취하기를 원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기가 어려웠으며, 주인마님은 어려운 살림과 며느리의 요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무이를 쿠엔의 집으로 보내기로 한다. 주인마님은 무이를 쿠엔의 집에 보내기 전에 자신의 죽은 딸에게 주려던 옷과 패물을 그녀에게 주고, 무이의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울며, 그녀를 자신의 딸이라고 외친다.쿠엔은 현대적이며, 성공적이다. 그는 과거와 대조되게 변화하는 사이공의 새로운 모습이었으며, 그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부유한 약혼녀를 가지고 있었다. 흐름은 느리고 대사는 절제되었으나 쿠엔의 마음은 약혼자를 떠나서 무이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쿠엔은 모든 관습을 포기하고 베트남의 신데렐라처럼 무이를 그의 아내로 맞이하게 되며, 무이가 소파에 앉아 자신의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시를 읽으면서 이 영화는 막이 내린다.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흐르는 긴장감, 그 속에서도 평안하게 지내는 한 베트남 가정의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그 당시 베트남의 준전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예로, 밤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이는 이 영화의 배경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준전시 상태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또한, 이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베트남의 모습은 우리의 삶의 모습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그들의 음식 문화가 그러하다. 영화 속에서 무이가 요리하는 베트남의 음식들은 깔끔하고 정갈하며, 쌀밥을 주식으로 하며 각 종 채소와 장류를 이용하는 점, 젓가락을 사용해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젓가락은 중국식으로 긴 나무젓가락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있다.이러한 음식 문화 뿐 아니라 이들이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영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층에 거주하는 노마님은 매일 불공을 드리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식의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그 권위는 절대적인 점, 남편이 가출한 것을 전부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노마님(시어머니)의 태도나, 주인의 치료 및 집안일은 실질적으로 아내인 주인마님이 다하지만, 주인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맏아들인 쭝이 대표로 움직이는 모습은, 장자 위주의 유교 관념이 베트남에도 강하게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일 불공을 드리는 노마님의 모습은 베트남의 문화에도 불교가 깊게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9.06.06| 2페이지| 1,000원| 조회(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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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디세이아>에서 등장한 텔레마코스와 아테나 여신이 한 역할 및 활약
    에서 등장한 텔레마코스와 아테나 여신이 한 역할 및 활약1. 아테나 여신아테나(제우스의 딸, 지혜의 신) 여신은 제우스 신에게 "크로노스(제우스와 같음)의 아드님, 전지 전능한 아버지시여. 현명한 오딧세우스가 귀향하리라는 사실이 축복된 신들을 기쁘게 해 준다면, 알고스를 정복한 헤르메스로 하여금 어서 오기기아 섬으로 가서 곱게 머리를 땋은 선녀들에게 신들의 결의를 전하게 하고, 용감한 오딧세우스에게는 귀향의 희소식을 전하게 하십시다."라 말하고, 올림포스 산마루를 질주해 내려와서 이다케 땅 오딧세우스의 집 뜰에 선다. 손에는 청동의 창을 든 나그네, 그녀는 태피아의 영주 맨테스(오딧세우스의 친구)로 변신한다. 그리고 오딧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에게 자신이 현명한 안치알루스의 아들인 맨테스라 소개한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에게 페넬로페(오딧세우스의 아내이자 텔레마코스의 어머니)의 구혼자들을 문 밖으로 몰아내는 일은 그의 일이라 말하며, 아카시아 호족들을 모두 회의장으로 소환해서 신을 증인으로 하여 그의 심정을 모두에게 털어 놓으라 말한다. 또한 페넬로페의 마음이 결혼 쪽으로 기울거든 힘센 친정 부친의 댁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혼례식을 거행하고, 예물을 잔뜩 준비하도록 말한다. 또한 스무 명의 사공이 탈 가장 훌륭한 배를 마련해서 오래도록 떠나 계시는 아버님의 소식을 수소문해 볼 것이며, 먼저 필로스로 가서 고매한 네스토르를 찾고, 그리고는 스파르타로 가서 미발(美髮)의 메넬라우스 왕을 찾으라고 텔레마코스를 위해 심오한 충언을 한다. 그리고는 영특한 아테나는 한 마라의 새가 바다의 독수리처럼 날아가듯이 사라진다. 그녀는 텔레마코스에게 마음 속 깊숙이 용기를 북돋아 주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전보다 훨씬 더하도록 그를 돌려놓았다. 또한 그녀는 그리운 남편 오딧세우스를 생각하는 페넬로페의 눈에 단잠을 퍼붓는다.다음 날 아침 텔레마코스는 시민회의를 열어 구혼자들이 이타카 성을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구혼자들의 두목 노릇을 하는 안티노우스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텔레마코 텔레마코스에게 곧장 명마부 네스토르에게로 가 그의 마음속에 간직한 지혜를 알아보자고 한다. 네스토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즉석에서 포세이돈 신께 축원을 올리며, 질주하는 흑색의 배를 타고 이곳까지 온 자신과 텔레마코스가 임무를 완수하고 떠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에게 몸소 그의 가슴 속에 용기를 넣어서, 행방불명된 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묻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얻도록 한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밀려올 때, 그녀와 텔레마코스는 자기네 홈배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네스토르가 만류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텔레마코스를 네스토르의 댁으로 보내고 자신은 검은 배로 돌아가기로 하며, 네스토르에게 텔레마코스는 당신과 머무를 테니 당신의 자제들을 동반시켜서 수레를 내주시고, 날랜 말 몇 필을 그에게 주라 말한 후 그녀는 물수리 모습을 하고서는 날아간다.아테나 여신은 또한 여자의 형체에 어울리는 허깨비를 만들었는데, 이는 유멜루스에게 시집간 페라에에 사는 이카리어스, 대담한 남아의 딸 이푸팀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를 신성한 오딧세우스의 집으로 보내어 설움과 한탄에 잠긴 페넬로페의 울음과 눈물 젖은 한숨을 그치게 하기도 한다.제 5장에 이르러, 오딧세우스의 장래에 대해 신들이 회의를 하는데, 아테나는 신들에게 오딧세우스를 생각해서 그의 모든 고난을 설명한다. 그러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칼리프소에게 오딧세우스를 귀향시키라 명한다. 얼마 후 오딧세우스는 스스로 만든 뗏목을 타고 귀향길에 오르지만, 그를 저주하는 포세이돈이 일으킨 풍랑에 휩쓸려 온갖 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에 아테나는 다른 바람들을 몰아서 멈추게 하고 잔잔하게 한다. 그러나 북풍만을 달려 물결을 깨침으로써 죽음과 불운을 피하고, 오딧세우스로 하여금 노젓기를 좋아하는 페아시아 사람들을 탈없기 찾게 한다. 영롱한 여신 아테나가 그에게 대책을 주지 않았다면, 그의 살갗은 깎이고, 뼈는 으스러졌을 것이다. 허기와 피로로 기진맥진한 오딧세우스에게 아테나 여신은 그의 를 맞이하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있는 여인으로 변신해, 서둘러 그가 찾는 왕궁으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유명한 사공 페아시아 사람들은 그들 중 누구도 저자로 걸어가는 오딧세우스를 유심히 보지 못한다. 궁에 이르자 아테나는 오딧세우스에게 왕과 왕비에 대해 이야기해주고는, 아레테 왕비와 알시노우스 왕에게 가도록 그를 짙은 구름으로 감싸 가려준다.페아시아 사람들은 바다 위에서 배를 달림에 감히 당할 자가 없듯이 부인네들은 길쌈에 있어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테나가 그들에게 훌륭한 솜씨와 고상한 마음씨를 선사했기 때문이다.또한 아테나 여신은 고향 땅에 도착한 오딧세우스에게 끝까지 그의 정체를 알리지 않게 하고, 본인에게는 상세한 것을 알리되 아내도 시민들도 친척도 모르게 한 다음, 우선 구혼자들의 죄를 청산시키고자 한다. 아테나 여신은 정교한 젊은 몸의 모습을 하여 오딧세우스의 옆으로 다가와, 그가 고향 땅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는 그에게 자신이 제우스의 딸 아테나임을 말하며, 그에게 슬픔을 참으라 말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도 그가 유랑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며,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사람들의 학대를 참고 견디라 말한다. 그리곤 그와 교만한 구혼자들을 처치할 방법을 강구한다. 그래서 오딧세우스를 누구도 몰라보도록 주름지게 만들고 누더기를 입히고, 그의 아름다운 눈을 흐리게 만든다. 그리곤 그에게 양돈가를 찾으라 말하며 자신은 스파르타로 가서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불러오기로 한다.아테나는 광대한 라케다에몬으로 가서, 위대한 오딧세우스의 착한 아들을 급히 귀한시키고자 마음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곤 텔레마코스에게 집으로 올 것을 명하며, 구혼자 중 몇몇 우두머리들이 그를 없애려는 음모를 계획하는 중이라 말해주지만, 그의 안전을 인도하고 보살펴 주시는 불멸의 신 한 분께서 훈풍을 보내줄 거라 말해준다. 그리고는 높은 올림포스로 떠난다.또한 아테나 여신은 예쁘고 훤칠한 키에 솜씨가 유별한 여자로 변신하여, 오딧세우스에게 이제야겠다 말하고는 그의 눈에 단잠을 퍼붓는다.21장에 이르러, 아테나는 아키리우스의 딸로 하여금 홀에 있는 구혼자들에게 시합으로 죽음의 전조가 되는 활과 회색 검을 가져올 충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드디어 구혼자들과 오딧세우스 · 텔레마코스가 싸우게 되자, 그녀는 제우스의 따님 아테나 여신의 모습이나 목소리를 멘토르로 변신을 하며, 함께 싸울 것을 말하지만 섣불리 오딧세우스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지는 않는다. 구혼자들은 다마스토르의 아들 아젤라우스, 유리노머스, 암피메돈, 데모프톨레머스, 폴릭토르의 아들 페이산데르 그리고 현명한 폴리버스에 의해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 여섯 명 모두가 온 힘을 주어 창을 날리자 아테나 여신이 모두 빗나게 만들며, 이젠 구혼자들이 전력을 다해 뾰족한 창을 날리지만 이 또한 대부분 허사로 만든다. 그리고는 지붕에서 살인 방패를 펴 구혼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모든 구혼자들 죽고 난 후, 오딧세우스의 안면에 아테나 여신이 미모를 내리니, 전보다 키가 장대하고 보다 우아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페넬로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 그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를 감싸 마음과 사지를 긴장에서 노곤하게 만들어 주고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계획을 짜낸다. 이는 오케아누스 강으로부터 곧장 황금 왕관을 쓴 새벽의 신을 일으켜 인간에게 빛을 주게 하는 것이었다.마지막 24장에 이르러, 아테나 여신은 오딧세우스의 아버지인 라엘테스의 다리를 포동포동하게 해 주고, 전보다 보기에 기골이 장대하고 몸집을 크게 해준다.또한 라엘테스에게 "오, 나의 벗 중에서 가장 다정스런 알세이시우스의 아드님이시여, 먼저 영롱한 여신과 제우스 아버님 전에 축원을 올리고, 그대의 기다란 창을 휘둘러 날리십시오." 라 말하며 힘을 북돋우어 준다. 그리고는 이다케의 시민들에게 잔인한 전투를 거두고 철군하라 고함을 질러 모든 무리를 퇴진시킨다. 이에 오딧세우스가 고함을 지르자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 신으로 하여금 노하게 마지 말라 이른다. 이에 다가오는 세월동안 나가 오딧세우스의 옛 친구인 멘토스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행에 필요로 하는 배와 식량 등을 마련해 주리라 약속한다. 그는 그녀의 말을 새겨듣고서 더 이상 주저치 않고, 서둘러 집으로 가 유모인 유리클레이아를 불러 포도주 열두 병을 채우고, 단단히 꿰맨 포대에는 보리를 담으라 명한다. 저녁이 되자 그는 아테나와 함께 어머니 페넬로페 몰래 필로스로 항해한다.두 사람은 필로스로 접근해서 넬레우스의 성에 이르렀다. 텔레마코스가 앞장을 서서 나오고 아테나가 길을 인도하며, 곧장 명마부 네스토르에게 가서 그의 마음속에 간직한 지혜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필로스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 도착했을 때, 네스토르는 자기의 아들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었으며, 그의 주위에서는 사람들이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네스토르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멘토스로 변신한 아테나, 텔레마코스―에 대해 묻자 텔레마코스는 자신들을 소개하고 오딧세우스에 대한 소식을 묻는다. 네스토르는 텔레마코스에게 트로이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건네준 뒤, 오딧세우스의 안부는 스파르타의 군주 메넬라우스에게 알아보라고 텔레마코스에게 조언한다. 네스토르의 성에서 하루 밤을 지 샌 후, 텔레마코스는 다음 날 아침 네스토르의 아들 페이시스트라스트와 함께 스파르타를 향해 달려간다.수레는 평평한 동굴이 많은 라케다에몬에 이르러 유명한 메넬라우스의 궁전으로 달린다. 그들은 메넬라우스의 성에서 환영을 받는다. 메넬라우스의 부인 헬레나는 텔레마코스에서 겉모습에서 오딧세우스의 아들임을 알아차린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메넬라우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오딧세우스의 활략을 높이 칭찬한다. 다음날 아침 메넬라우스는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물어보기 위해 방문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집트의 바다 신 프로테우스에게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오딧세우스는 칼리프소 섬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준다.아테나는 광대한 라케다에몬으로 갓, 위대한 오딧세우스의 착안 아들을 급히 귀한시키고자 마음에 향수를 불러일으.
    독후감/창작| 2009.06.06| 6페이지| 1,500원| 조회(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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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차이나 감상문
    「인도차이나(Indochine)」감상문이 영화는 철저히 프랑스적 시각을 가진 영화로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차이나에서 살아가는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야망 운명을 그린 영화이다.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보면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이며, 여타의 다른 영화들과 다를 게 없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갔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인도차이나와 프랑스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 등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면 그저 이 영화가 평범하고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요약해보자면, 영화「인도차이나(Indochine)」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서부터 인도차이나가 독립하게 되는 순간까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엘리안느 데브리는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으로서 넓은 농장을 가지고 있는 권력 있는, 그러나 오래전부터 외로움에 익숙해진 여인이다. 그녀는 농장에서 고무나무를 키우면서,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안남의 황녀 까미유를 양녀로 키운다. 엘리안느는 까미유에게 프랑스 상류 사회의 교육을 시키고 남다른 애정을 베푸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엘리안느의 역을 하고 있는 '까뜨린느 드뇌브 분'이 자신의 양녀 까미유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 연기는 가히 감탄할 만한 하다.그러던 어느 날, 장 밥띠스뜨라는 사람이 사이공으로 오게 되는데, 그는 젊고 잘생겼으며 또한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겉으로 냉정했던 엘리안느의 연약한 이면을 본 순간 그는 그녀와 뜨거운 관계에 빠지게 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엘리안느의 양녀 까미유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 장 밥띠스뜨를 연모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된 엘리안느는 까미유를 서둘러 탄과 결혼시키려 하지만 까미유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이미 장에게로 갈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까미유를 이해하고 탄도 그녀의 도주를 돕게 되며, 까미유는 드래곤 아일랜드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에 말려들어 까미유는 프랑스군의 수비대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게 되고 유랑 극단에 합류해 피신 생활을 한다. 세상은 독립운동의 열기로 달아오르고 이 두 사람은 프랑스군의 추적을 당하게 된다. 한편 까미유는 부당한 수비대장을 살해함으로써 베트남의 잔 다르크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신과 혼란 속에 까미유는 장 밥 띠스뜨의 아들을 낳게 되고, 후에 장과, 장과 까미유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는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당하고 만다. 그리고 장과 까미유의 이야기를 상연하다가 유랑극 단원들도 체포되고, 까미유 또한 체포된다. 100개의 극단이 장과 까미유의 이야기를 상연하고, 까미유는 공산주의자의 영웅이 되어버린다. 엘리안느는 까미유의 석방을 부탁하나, 이미 경찰 국장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미유는 공산 민족주의자들의 중요한 영웅이 되어버렸다. 그 후 장과 엘리안느는 다시 한 번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며, 장은 그녀에게 아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다음날 장은 자살을 가장한 죽음을 맞게 되고, 사면 된 까미유는 영웅이 되어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동조자가 되었고, 결국 엘리안느와 그녀의 아들을 버리고, 인민전선 측으로 가버리게 된다. 그리고 엘리안느는 농장을 정리하고 손자 에티 엔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그 세계 안의 사람이 되고,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이 열리게 되고 이 영화는 끝이 난다.영화,「인도차이나(Indochine)」의 몇몇 장면을 살펴보면, 인도차이나는 중국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이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인도차이나의 황궁의 모습과 관리들의 모습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유랑 극단 배우의 분장 모습은 중국 극단 배우 모습의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탄의 어머니가 엘리안느에게 탄과 까미유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며 엘리안느와 자신은 노년에 많은 자손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일반 베트남 가정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노년의 축복된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베트남이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 문화권의 국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점도 이러하다고 볼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9.06.06| 2페이지| 1,000원| 조회(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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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요, 무가, 판소리, 민속극
    제 1장. 들어가며구비 문학은 한국 민족의 역사와 같이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고 전승된 문학유산이다. 끊임없는 구비전승을 통해 거듭되는 민중의 창작 욕구를 해소함과 동시에 유형(Type)과는 차별성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각편(Version)으로 발전시키면서 구비문학은 끊임없는 발전을 이룩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문학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구비문학은 크게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민속극, 속담, 수수께끼로 나눌 수 있는데, 판소리와 무가는 구연자의 전문성 때문에 다른 구비문학에 비해 사실상 자료와 연구가 빈약하다. 특히 무가는 굿과의 구별하여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문학 장르이다 보니, 현대사회에서는 무가를 무당들이나 부르는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기며, 한편으로는 그저 민간신앙에 쓰이는 구비물로 그 예술적 가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한국 무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는 집적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무가에 대해 재조명되면서 다양한 학문적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구비문학―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민속극, 속담, 수수께끼 ― 지금도 현존해 가늘지만 꾸준히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우리는 그러한 구비문학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연구함을 통해서 학문적 영역을 넓히며, 국문학사적으로 그 위치를 닦아 두어야 한다.앞으로의 내용은 이러한 구비문학에 대해 알아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비문학은 무가(巫歌), 민요(民謠), 판소리, 민속극(民俗劇)이며, 이들은 과연 어떠한 것이며, 어떠한 종류가 있고, 그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세계관 ? 의식은 또한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제 2장. 무가(巫歌)Ⅰ. 무가의 개관1)무가(巫歌)와 무(巫)무가(巫歌)는 무(巫)에 의해 무속적 의례(儀禮)에서 가영(歌詠)되는 구비물(口碑物)이다.즉, 무당(=巫)이 굿(=巫俗的 儀禮)에서 노래(=歌詠)하는 것을 말한다. 무가는 ‘무’라는 특수한 부류의 전유물이며, 지금까지도은 일이 있을 때는 날을 받아 ‘날받이 씻김굿’을 한다. 또한 객사하고 물에 빠져 죽은 혼을 찾기 위해서는 ‘혼맞이굿 ? 혼건지굿’을 하며, 처녀?총각으로 죽은 영혼을 위해서는 ‘저승 혼사굿’을 한다. 그리고 초분을 이장할 때나 49재 및 소상(小喪)?대상(大喪)때에도 씻김굿을 한다.다른 지역에서 서정무가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현재 해명할 길이 없다. 다만 서정무가가 발견되는 지역은 수준 높은 음악성이 갖추어진 곳이라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선율악기가 쓰인다는 점이 , , 전라도의 서정무가 등을 전달하기에 적합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2) 교술무가무가는 기본적으로 교술적 성격이 강하다. 서사무가와 희곡무가를 제외한 단편적인 무가는 대부분이 교술무가에 속한다. 단편적인 무가는 신통의 나열이나 의례를 행하기까지의 설명, 또는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아뢰고 신의 의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가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제주(祭主) 설명과 제의(祭儀)를 베풀게 된 이유 설명, 제의의 준비과정과 제물(祭物) 설명, 찬신(讚新), 축원(祝願), 공수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물의 묘사 설명이나 알려주는 것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실제 무가 사설에서는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단락 속에 뒤섞여 들어 있다.교술무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역사의 기술이것은 무가의 서두에서 가창되는데, 천지(天地) 조판(肇判)) 이후 강산의 마련과 지금까지의 치국(治國)·흥망(興亡)을 약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무속이 성하며 전승되는 무가도 풍부하다. 향가의 '처용가'나 고려 가요의 '처용가' 및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대왕반(大王飯)', '군마대왕(軍馬大王)' · '나례가(儺禮歌)' · '성황반(城隍飯)' · '대국(大國)' · '내당(內堂)' · '잡처용(雜處容)', '삼성(三城)대왕', '구천(九天)', '별대왕(別大王)' 등은 고대 무가의 편린이다. 현재 전승되는 무가의 수집은 193계적이다. 이러한 골계적 표현은 성을 희화하는 것이다. 무속이 본시 풍요를 기원하는 것에 있어서 풍요가 곧 다산의 의미로 하여 성적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유교의 비판으로 성은 과장되고 희화화되어 웃음을 유발하는 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굿놀이의 풍자의 대상은 대체로 사대부 양반층이며 풍자를 하는 인물은 종이나 학동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주 소놀이굿경사굿의 일부로 제석거리에 이어서 행해지는 무가이다. 제석거리가 끝나면 무당은 제석거리 복색 그대로 마루에서 안마당을 향해서 서고, 악사들은 무악연주를 위하여 역시 안마당을 향해 마루에 앉고, 이 놀이의 주인공들인 원마부와 곁마부는 마루 앞 봉당에 선다. 앞마당에는 멍석을 뒤집어쓰고 고무레를 짚으로 싸서 머리를 만든 가장한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선다. 의 진행은 무당과 마부와의 대화, 마부의 타령, 덕담, 마부의 동작과 춤, 소의 동작 등으로 엮어진다.㉡ 동해안 거리굿동해안 별신굿에서 맨 마지막에 하는 것으로 무의에서 연행하는 이유는 굿거리에서 청배한 신들을 따라온 수비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수비들에게 제향한다기 보다는 인간생활의 여러 면모를 다양하게 극적으로 연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측면에서 본다면 민중들의 골계적 흥미를 위한 소극이라 볼 수 있다. 진행방식은 주무(主巫)와 반주무(伴主巫)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반주무는 주무의 독연(獨演)에 말참견을 하거나 주무가 묻는 말에 짧게 대답만 할 뿐이고 본격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다. 반주무 이외에 관중들도 굿에 개입한다.㉢ 동해안 도리강관원놀이별신굿 중 거리에 이어서 행해지며 일명 또는 라고도 하는 무극이다. 진행절차는 과는 달리 사또역, 관속역, 고딕(官奴)역을 따로 설정해서 나누어 맡으며 각 배역에 어울리는 분장도 별도로 준비되고 있기에 연극으로서 발전된 형태를 보여 준다. 내용은 관속들이 신임 사또 앞에 현신하는 것을 극화한 것으로 하층에 의한 상층의 풍자가 주를 이룬다.㉣ 동해안 중잡이놀이동해안렇기에 민중이 널리 부를 뿐만 아니라, 그 음악적 ? 문학적 성격도 민중적이다.이런 민요는 민중의 생활상의 필요성에서 창자(唱者)가 스스로 즐기는 노래이다. 민요의 대부분은 일정한 생활상의 필요성 때문에 존재한다. 즉, 노동을 하거나, 의식을 거행하거나, 유희를 하면서 부른다. 또한 민요는 창자만으로도 존재하는 자족적(自足的)인 성격을 지닌다. 즉, 민요는 창자 스스로의 필요성에서 부르고 창자가 스스로 즐기기 위해 부른다.그러기에 민요는 창자 자신에게 충실하다. 창자인 민중의 의식을 충실히 반영하면 되지 다른 누구에게 평가받을 필요가 없다.2) 민요의 역사악보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채 구비(口碑)전승되어왔기 때문에 언제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노동기원설'에 따르면 민요는 노동을 하면서 박자에 맞추어 소리를 내고, 이러한 무의미한 소리에 선율을 얹어 부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설에 따르면 민요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추측된다.흔히 민요의 가능성이 있는 옛 노래를 추측하는 데 있어서 위지 동이전에 실린 제천행사에 대한 기록 중 '연일음주가무(連日飮酒歌舞)'라는 말을 토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국 민족이 일찍이 춤과 노래를 즐겼으며 그때 불려진 노래가 민요라고 가정하는 경우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문헌으로 남아 있는 옛 노래를 보면, 상고시대에는 · 등의 여러 책에 수록되어 있는 와 의 가락국기(駕洛國記) 편에 언급되어 있는 가 있다. 또 에는 고구려의 , 백제의 , 에는 신라의 · · · · 등이 실려 있다.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이전의 주술적 민요 형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체계를 갖고 있는데, 이제현의 소악부(小樂府)에 시 11수와 이인로의 에 있는 민요집 풍요선에 (풍요는 땅을 파고 흙을 운반할 때 또는 방아 찧을 때 부르는 노동요) 등이 전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 민요에는 가 있다.조선 초기의 것으로는 강희맹이 채집한 참요 14수가 에 전하고, 조선 후기의 것으로는 이학규가 채록한 경상남도 김해지방의 민요져 있다.교술민요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 설명해서 알려 주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으며, 이 점에서 모든 교술문학과 일치한다. 기능요 중에는 특히 의식요가 교술민요이다. 의식요는 의식을 진행이나 그 내용과 직접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 가사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비기능요인 교술민요는 알려 주자는 실용적 목적보다 사물에 관한 묘사나 성명을 흥미 있게 해서 즐기자는 노래이나,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서정 민요와 다르고,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서사민요와 다르다.서정민요는 감정의 주관적이며 집약적인 표형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노동요 중에서 노동하는 자의 감정이나 의식을 나태나는 노래는 교술민요가 아니고 서정민요이거나 서사민요이다. 급격한 동작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진행하는 노동에서 부르는 노래는 음악적으로 가창민요이고, 노동하는 사람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나타낸다. 비기능요 중에서도 선율이 풍부한 가창민요는 대체로 서정민요이다. 양반의 서정과는 달리 생활에 밀착되어 있고, 그저 흥겨운 데 그치지 않고 절실한 경험을 소박하면서도 날카롭게 나타낸다. 또한 서정민요는 생활감정을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비판 또는 시대비판의 노래이기도 한다.서사민요는 일정한 인물과 사건을 갖춘 이야기로 되어 있다. 기능요인 서사민요는 주로 길쌈노동요로서 불려진다.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노동을 하기 때문에 길고 재미있는 내용이 필요하다. 교술민요로 부르기는 하나, 서사민요가 가장 적당하다. 길쌈노동은 여자들만의 일이고 길쌈하면서 부르는 서사민요는 모두 부요이다.희곡민요는 어떤 행위를 대화를 통해서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교술 ? 서정 ? 서사민요에 비해서 현저히리 비약하다. 오로지 언어유희만 희곡민요라 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기능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Ⅵ. 남요(男謠) ? 부요(婦謠) ? 동요(童謠)의 차이민요에는 남요(男謠) ? 부요(婦謠) ? 동요(童謠)로 구분이 되어 있다. 남요(男謠)는 성년 남자들의 노래인데, 노동요 ? 의식요 ? 유희요 ? 비기능요가 다 있
    인문/어학| 2009.06.04| 25페이지| 2,000원| 조회(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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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문시대를 연 선의의 경쟁자, 김만중 vs 조성기
    고전 작가론- 문학 속의 라이벌김만중 vs 조성기-『사씨남정기』와『창선감의록』 17세기 소설을 통해 두 인물을 바라보다 -Ⅰ. 서(序)우리는 어머니를 위하여 하룻밤 만에 소설을 창작한 효자 김만중을『구운몽』,『사씨남정기』등 그의 작품만큼이나 작가 김만중을 잘 알고 있다. 그 중 그의 작품 『사씨남정기』는 문학적으로나 17세기 조선사의 역사적 사료로써도 그 가치를 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읽고 회자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문벌로 보면 같은 서인출신의 최고 지식인은 조성기는 잘 알지 못한다. 그가 남긴『창선감의록』과 같은글에 대한 구성이나 내용 사상관 등 이 외 여러 측면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동시대의 소설가 졸수재 조성기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기존의 연구에서는 가정소설의 시초가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이며『사씨남정기』계 소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가정, 가문 소설의 감투 격으로 여겼으며, 『창선감의록』은 『사씨남정기』의 계보를 잇는 소설 혹은 아류작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에 대한 의혹이 생기고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그 한 가지 예로『사씨남정기』는 확실한 창작 연대는 미상이나,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맞아들이는데 반대하던 김만중이 마침내 남해도로 유배되어,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므로 1689년(숙종 15년)에서 그가 세상을 뜬 1692년(숙종 18년) 사이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런데 이 시기는 이미 조성기(1638~1689)가 죽은 이후이다. 이에 따르면 『창선감의록』이 『사씨남정기』보다 이전 작품일 가능성이 많고, 결국 가정에서 일어나는 처첩간의 갈등묘사는 『창선감의록』이 먼저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본 고는 당시 두 작가의 사회적 배경이 되는 17세기의 조선의 상황을 살펴봄과 동시에 가정소설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두 작가의 생애, 문학과 사상관에 대하여 살펴본 후 두 작품에 대한 개괄적인 비교분석을 하고자 한다.된 예송)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쟁투에서 그의 문벌이 속한 서인이 패하자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그 후 그는 1692년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계 복귀와 유배의 길을 오르내렸다.그는 문학적으로 한시가 아닌 국문시가를 높이 평가한 민족어문학론을 주창하고, 통속소설의 예술적ㆍ교화적 기능을 평가해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장편소설을 썼다.또 감정의 표현을 시의 본질로 여기는 연정설을 내세우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문학관도 가지고 있었다. 문집으로 『서포집』 『서포만필』등이 전한다. 예송논쟁1. 배경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후 자의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朞年 : 만 1년)으로 정하고, 곧 이어서 현종이 즉위하였다.2. 제1차 예송그런데 이듬해인 1660년(현종 1년) 음력 3월 남인 허목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나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 송시열 등은, 효종은 인조의 제2왕자이므로 계모후인 자의대비의 복상에 대해서는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이 옳다고 대항하였고, 남인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적장자나 다름없으니 3년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기년설이 그대로 채택되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3. 제2차 예송그 후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 자의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기년으로 정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서인의 주장대로 대공으로 고친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 대로 기년으로 해야 한로 수용하면서 조화롭게 풀과 한 관인으로서 면모를 문학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2.1.2 문학관과 사상관1) 정치적 위치와 사상 - 불교에 대한 긍정적 시각김만중이 활동한 17세기 후반은 대전란이 가까스로 사라지고 당쟁이 과열되어 가던 시대이다. 김만중은 노론 권력층에 속한 인물이었다. 유학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학적 이념의 정권의 중심부에 있었던 그는 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만중의 김만중다운 점은 유학을 절대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비판하는 사상적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비판의 대상은 주자학이었으며 그 논거는 당시에 이단으로 취급되었던 불교였다.불교에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불교로써 주자학의 독선적 권위를 부정하고 주자학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세계관이 독단임을 비판했다. 그는 불교의 근본이치인 진공묘유가 주자학의 무극이태극과 비슷하다고 논파했다. 또한 주자학에 입각한 세계관이 독단임을 밝히며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각 민족 문화의 보편성과 독창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곧 주자학에 맹목적으로 심취되어 있는 조선조 주자학도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김만중의 이러한 민족문화에 대한 자각은 그가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에 입각한 정권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2) 문 학 관 - 국어에 대한 진보적 주체성김만중은 그의 수필집인 에서 문학에 관한 많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특히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평한 문장에서, 한국 사람이 국어를 버리고 남의 말을 배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한문 문장에 비하여 한국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정세로 비추어볼 때 놀랄 만큼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탁견(卓見)이었다. 을 통해 그의 문학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① 감 동 론문학의 본질적 기능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감동론이다. 김만중은, 문학은 도(道)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하는 등 장래가 촉망했으나 조성기는 병약한 체질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도 당시의 시대는 임·병 양난 이후 17세기는 많은 정치적, 사상적 갈등을 겪은 시기이다. 치열한 당쟁이 지속되었으며 예송논쟁과 학술, 사상 논쟁이 끊임없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졸수재 조성기(1638-1695)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사류들과의 교류를 통해 개혁을 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고자 노력을 펼칠 수 있었다.2) 골방서생 그러나 사색의 대가조성기는 병약한 신체로 인해 가정에 은둔하며 사색에 젖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조성기는 평생을 두고 많은 서적을 읽었는데 경전, 사서를 비롯하여 불도의 서적, 패관기록에 이르기까지 두루 고찰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책을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체적 결함에 따른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는 조성기가 독서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2.2.2. 문학관 및 사상관이는 조성기의 문집인 『졸수재집』을 토대로 졸수재의 세계인식, 학문태도, 문장론 등을 검토하여 보려고 하는데 『졸수재집』에 남아 있는 그의 글은 대부분 40대 이후의 글이고, 그 이전에 대한 글과 정보가 거의 없어 사유와 인식이 변모한 궤적을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1) 국외적 자기인식졸수재는 자신을 局外者(국외자)로 인식하였는데 졸수재가 자신의 입지로 규정한 ‘국외’ 바로 정치권 밖을 뜻한다.졸수재가 젊어서부터 신체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정치는 커녕, 정상적인 사회활동조차 할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외적조건으로 인해 평생 학문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그러나 학문과 사회인식이 깊어지면서 이는 커다란 상실감 내지 결핍감으로 작용하여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채 독서와 사색에서 얻은 이상적 지식은 그가 인식하는 현실과 엄연한 괴리가 있었다. 졸수재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상적 자아의 모순적 현실에 대한 개선의지는 주로 그를 알아주고 찾아주던 친지와의 만남과 서찰을 통해서 이러한 점에서 조성기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재미있는 작품을 선물하기 위해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중심내용은 화욱을 중심으로 한 심씨와 정씨 가정의 갈등이다. 다시 말해서 일부다처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는 일부다처제였다. 그리고 당시 숙종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았다. 즉 축첩제의 모순점이다. 숙종을 충으로써 대했던 조성기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장희빈을 왕비의 자리에 앉힌 것에 대해 불만이었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의 모순점은의 주요 갈등내용이다. 즉 조성기는 자신의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이 작품을 썼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의 사회적 제도의 모순점인 일부다처제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김만중은 1689년 숙종이 장희빈을 왕후로 맞아들인데 대하여 상소한 탓으로 남해에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 기록)이 실증하고 작품의 주제 사상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도 직접적인 창작 동기는 숙종이 정실부인인 민씨를 버리고 장희빈을 왕후로 삼은 것을 경계하려는데 있었다.그리고 우리말과 글자를 표현한 국문소설을 써서 향간의 부녀자들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당대 사회현실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견해를 알려주기 위한 또 하나의 창작 동기가 있다.)3.3. 두 작품의 인물 형상창선감의록사씨남정기특징성부인(화욱의 누이)두부인긍정적 인물, 조력자 역할화진유연수유교적 인물화진사정옥긍정적 인물, 유교적이고 도덕적인 인물남채봉사정옥비범한 인물조월향(화춘의 첩),범한, 장평, 엄숭교씨, 동청, 냉진, 엄숭부정적 인물, 악인의 전형적 형태.임씨(화춘의 처), 남채봉, 윤옥화(화진의 처)사정옥긍정적 인물남채봉, 윤옥화의 고난= 사정옥의 고난임씨의 덕성, 남채봉의 지혜= 사정옥의 재덕으로 총합되서 나타남.심부인, 화춘유연수우매한 인물화욱유연수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역할가문 창달이라는 욕망 때문에 둘째 아들을 편애하여 스스로 가문 내의 분란을 조장한 의 화욱과 후사에 대한 욕망 때문에 가정 내에 분란의 씨앗을 뿌린 의 유연수는
    인문/어학| 2009.06.04| 20페이지| 3,000원| 조회(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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