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민*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
검색어 입력폼
  • 러시아의 정치문화와 대외정책
    러시아의 정치문화와 대외 정책을 규정하는 역사적 요인3-표트르 대제의 서구화(근대화)정책의 내용과 의미1.서론러시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페테르 부르그에 위치하고있는 청동기마상을 본 적이 있을것이다. 푸쉬킨의 '청동기마상' 이라는 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기마상은 쿠데타로 황제자리에 오른 독일 출신인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1782년 프랑스의 조각가 파르콘에게 만들도록 지시하였다.당당한 자세로 하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동상은 마치 생전의 표트르 대제의 기상과 개척정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페테르부르그의 젊은이들은 결혼식이 끝나면 이 곳을 방문하여 꽃다발을 바치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러시아 인들의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제'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표트르는 러시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표트르 대제의 재위기간인 1682~1725년 에는 정치,경제적으로 국가 권력이 강화되었고, 사회,문화 생활에서 서유럽의 관행이 도입된 전환기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문화는 그 독특함과 우수성으로 세계적으로 매우 큰 찬사를 받고 있는데 문화의 변천 과정 중 특히 표트르 대제의 제위 기간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통적인 종교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문화의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사회의식에서 합리주의가 발전하였으며, 타민족 문화와의 활발한 접촉이 특징이다. 표트르 대제의 즉위 배경과 그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2.본론표도르의 죽음 이후 밀로슬라프스키 집안과 나리슈킨 집안이 모두 정권을 잡기위해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는 나리슈킨 집안의 승리로 표트르가 새로운 차르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표트르의 이복누이 소피야가 주도한 근위대의 반란으로 밀로플라프스키 가문이 득세하며 귀족회의는 이반을 대짜리, 표트르를 소짜리로 선포하는 러시아 역사에서 유일한 공동짜리가 탄생하였다. 소피아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인데, 러시아에 결코 있어 본 일이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던 소년은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에서의 생활은 여러 외국 기술자들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어려서 부터 다양한 분야게 관심이 많았던 표트르는 이러한 성격 덕분에 젊은 나이에 심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능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 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하였다.. 병정놀이를 하면서 놀기를 좋아했고, 기계와 기구들을 관찰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떄, 1695년 러시아는 흑해로의 출구를 열기 위하여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포병의 신분으로 표트르 또한 이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러시아는 터키 요새 공략에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함대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러시아는 바다를 통하여 식량, 탄약 등 물품을 공급하던 이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온 표트르는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해 내었다. 그 후 1696년 함대와 새로 조직된 해군병사들과 함께 진격하였고 아조프를 공격해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었다. 이 전쟁 이후 표트르라는 이름은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 후 형의 죽음 이후 그는 러시아의 전제군주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터키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 계획을 생각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대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떄 서유럽의 문화를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호기심과 서구에 대한 욕망이 컸던 그 또한 가명을 사용한 채 포병으로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 하였다. 사절단 시절 대포 조작 기술을 익히고, 넘치는 학습욕으로 전문가의 수준을 뛰어 넘기도 하였다. 관심의 폭 또한 넓어서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표트르가서유럽을 여행 하던 중 모스크바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약 14개월의 여행을 중단하고 표트르는 모스크바로 는 것은 모든 순교자들의 피로써도 씻을 수 없는 죄이며,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의 상을 훼손시키는 행위»라고 선언한 적도 있다. 이러한 대중적인 분위기에 맞서 표트르는 자신의 턱수염을 깎았고, 스스로 면도기를 들고 측근 고관들의 턱수염을 깎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농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턱수염을 깎아야 한다는 법령마저 실시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이발사 차르' 라는 별명을 얻었다.이 외에도 표트르는 귀족들이 즐겨입은 외투의 긴 옷자락을 자르게 했으며 재단사들에게는 유럽식의 의복을 입게 했다. 이어서 일종의 사교 모임인 야회를 권장했으며, 스스로가 야회에 자주 참가해 술을 마시거나 춤도 추었고 이야기와 농담을 나누었다. 또한 «젊은이들의 교훈서»를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은 «장화를 신고 춤을 추지 말 것, 손수건에다 큰 소리를 내어 코를 풀지 말 것,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지 말 것, 손가락을 핥지 말 것, 음식 앞에서 머리를 긁지 말 것, 쩝쩝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지 말 것» 등의 내용을 포함하여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서구적인 생활 습관을 심어주려고 하였고, 하인들 앞에서 젊은 귀족들이 외국어로, 특히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생활습관의 개혁에서 표트르의 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정치 제도를 크게 고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절대권의 강화를 기본으로 하였다. «짜르가 나라의 주인으로 모든 권력을 쥐 채 통치해야 하며, 짜르의 전권적이고 전면적인 통치를 뒷밭침 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모든 정치 제도는 교쳐저야 한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제도 개력을 위하여 1703년부터 네바 강변에 서유럽 식의 새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바다가 가깝고 추운 이 곳에 새 도시를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 규모의 토목공사가 필요하였으며 동원된 노동력 또한 막대하였다. 해외로부터 불러들인 건축 기술자들의 지휘 알에서 러시아 전국에서 끌려온 목수들과 석공들, 일반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일해야 했는데 1712년에 새 도시 건설이 페테르부르그는 러시아의 매우 중요한 항구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은 라는 서사시에서 페테르 부르그는 '유럽으로 나아가는 창문' 이라고 언급하며 표트르를 찬양하였다. 볼쉐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사람들을 이 도시를 레닌그라드로 개칭했는데,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레닌에게 자신들이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좋은것인 이 도시를 바쳐야 한다는 생각 에서였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뒤, 이 도시의 이름은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갔다. 이것들은 표트르의 야심적인 건설 사업이 역사 속에 성공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부분에서도 개혁이 일어났는데, 새로운 관료 제도의 마련이 그것이다. 그는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새로운 상층 계급을 만들어 구귀족을 견제하였다 군대와 법원 및 문관에 14등급의 계급 제도가 마련되었고, 1711년 제국통치원을 만들어 귀족원을 대치시켰다. 이 기구 아래에 외무부와 법무부와 군무부와 상업부와 광업부를 비롯한 국가의 여러 분야에서의 행정을 맡은 여덟 부를 두었으며, 각 부에 운영위원회를 두어 행정력이 한 개인에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표트르는 개혁 정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과 숙련된 기술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믿어 교육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산술학교를 세웠으며, 항해학교와 포병학교 및 공병학교 그리고 해양아카데미와 같은 군사학교를 세웠고, 공장 지대에는 숙련공을 길러 내는 기술학교를 세웠으며 병원에는 부속 의학교를 세웠다. 교회에만 학교가 존재하던 이전의 러시아와 비교하여서는 이것은 혁명이었다. 또한 그는 귀족들이 새로운 러시아의 지도적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서 귀족들에게 교육을 강요하며, 외국에서 선진 학문들을 배우기를 권유하며, 글을 모ㅗ르는 귀족들에게는 결혼을 금지시키기 까지 하였다.이러한 교육 분야의 연장선 상에서 글자에서도 개혁이 이루어 졌다. 교육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교회슬라브어 문자를 좀 더 간편한 시민문자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였고 1721년 대북방전쟁에 승리함에 따라 자신의 권위가 크게 올라가자 이 기회를 활용하여 종교령을 제정하고 공포하여 러시아정교의 총주교구를 폐지하고 자신이 임명한 민간인 행정관인 대사장의 감독을 받는 신성종교행정회의로 대치시켰다. 이로써 짜르에 대한 교회의 예속을 공식화 하는데 성공하였다.내정의 개혁을 추진함과 아울러 표트르는 제정러시아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1700년 경부터 21년동안 계속되온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마침내 스웨덴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이에 따른 니슈타트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발트 연안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고대 노브고로드의 땅을 되찾고, 서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직접적 해로를 열었다. 여기에 맞추어 이 해 에 그는 국호도 '러시아 차르 대국'에서 '모든 러시아 사람들의 제국'으로 고치고 짜르라는 칭호 대신 황제에 해당하는 임페라토르 라는 칭호를 함께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러시아가 제정러시아가 되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3.결론대제라는 그의 칭호에 걸맞게 표트르 대제는 대내외 적으로 매우 큰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의 개혁에서 소외받은 계층도 있다. '악마의 도시' '뼈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노동자와 농민은 도시의 건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무거운 세금과 병역 및 부역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러시아 황제 역사상 유일하게 대제를 칭호를 받은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그 당시만 해도 미개한 국가였던 러시아를 일약 문명국으로 바꾸었고, 그 당시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전에 이미 시베리아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만약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강화책과 근대화를 위한 개혁 프로그램이 없었더라면 시베리아의 일부는 터키 또는 중국, 일본의 손에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표트르 대제는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 따라 표류하면서 떠돌아 헤맨 그러한 지배자가 아니었으며, 시대의 선두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의 통찰력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사회과학| 2012.04.05| 5페이지| 1,500원| 조회(153)
    미리보기
  • 이장과 군수 영화감상. 정부와 시민참여. 평가A+최고예요
    영화 를 보고감독: 장규성2007년 개봉작 이었던 ‘이장과 군수’라는 영화를 수업시간에 우연히 보게 되었다. 차승원, 유해진 주연의 이 영화 초반 부분에서 단순한 시골의 이장과 군수님이 나오는 코메디 영화일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금 보다보니 장르는 코메디지만 다른 코메디 영화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요즈음의 정치 태세를 나타내고 있고, 더 나아가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영화의 주인공은 춘삼이 역의 차승원과 대규 역의 유해진 이었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 반장과 부반장을 나란히 나누어 하던 친구였다. 대규는 춘삼이 에게 번번이 반장 자리를 빼앗기지만 그런 춘삼이가 밉지만은 않다. 어린 시절 그들은 서로가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잘못이 있으면 감싸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내고 성인이 된 그들은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춘삼은 충청도 산골마을 강덕군의 평범한 시골 노총각 이었다. 동네 노인네들과 함께 고스톱 치기를 일삼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부양하던 평범한 이 노총각은 갑작스러운 마을 이장의 죽음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던 중 자신의 친구였지만 항상 자신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해 왔던 대규가 군수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알 수 없는 묘한 경쟁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힌다. 묘하게도 성인이 된 그들은 어린 시절 반장이었던 춘삼이는 마을 이장으로, 부반장이었던 대규는 군수가 된다.대규는 이장 춘삼이 앞에서 생색을 내고, 열등감을 느끼는 춘삼이는 군수의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넘어간다.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지역 발전을 위하여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하려고 시작할 때부터이다.군수는 지역 발전을 위해 막대한 보상금을 얻을 수 있는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주장한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이런 경우는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혐오시설 건설을 반대하는 현상을 ‘님비’현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회 기반시설은 꼭 필요한 시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지역 사람들은 설치는 해야 하지만 우리 지역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를 하고 나선다. 우리 지역이 아니라면 다른 지역도 아닌 것 이지만 이기적인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님비현상을 다른 말로 ‘지역 이기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님비현상의 예로는, 광역 쓰레기 소각장 설치 반대. 납골시설 반대, 화장시설 설치 반대, 뷴뇨 처리장 설치 반대, 하수 종말 처리장 설치 반대 등이 있다.영화 속에서 무조건 혐오시설 설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지역 주민에게도 분명히 문제는 있다. 하지만 모든 잘못이 지역 주민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려는 군수에게도 충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군수는 군민을 대표하라는 의미로 선출된 것이 아닌가? 이 영화 속의 군수는 여러 군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독단적으로 밀어 붙인다.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시위와, 단식투쟁 결국에는 폭력마저 난무하는 극한 대립 상황에 치닫게 된다.모든 정책의 집행 과정에서는 그 정책의 집행에 따라서 얻게 되는 이익과 손실에 대한 정확한 제시가 필요하다. 이 영화 속에서도 춘삼은 ‘순진한 시골 사람들 속여서 이익을 취하려 하지 말라’ 는 대사를 한다. 정책의 실상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에게 정책 실현 시 얻게 되는 장점들만을 달콤하게 소개한 후 그들에게 동의를 요하는 것은 매우 잘못 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정책 집행자들은 국민들이 자기의 소신 것 옳고 그름을 판별 할 수 있는 주관성이 배재된 객관적인 정보만을 제공 해 준 후, 그 후에 동의가 얻어지면 정책을 집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이 실현되게 되고, 그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 할 수 없다. 더 나아가서 반대하는 다수의 의견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공권력이라는 힘으로 무장하여 정책을 집행하는 사례가 많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정비 사업’만 해도 그렇다. 이 사업은 얼마 전 착공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그 전에도 찬, 반 논쟁이 심하였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다. 공사가 완료 된 후 몇 년이 지난다면 이 사업이 옳은 선택인지 그른 선택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시한 채 추진된 이 사업이 우리의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면 결국 그 책임은 또 다시 국민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필요한 절차를 무시하고 졸속적으로 시행된 ‘4대강 정비 사업’의 착공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을까? 먼저 그 타당성을 증명하고 그 다음 사회적 합일을 이끌어 낸 후에 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영화 속에는 ‘백 사장’이라는 부정적 인물이 등장한다. 지역 유지인 백사장은 군수가 자신의 돈으로 주무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군수 자리에서 쫒아 내려고 한다. 그러던 중 군수에게 대항하는 춘삼을 만나게 되고 춘삼을 이용하여 대규를 군수 자리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 결국 대규는 백사장이 꾸민 뇌물 누명을 쓰게 되고 군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이런 일이 영화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정치’ 라고 하면 일단은 돈 많고 백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치에 돈과 백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정치라는 것도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경유착이 생기게 되며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에서는 ‘백사장’ 이 그러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러한 문제점이 시작되었을까?기업과 정치인들의 부도덕한 밀착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처음 시작은 박정희 정권이 아니었나 싶다. 박정희 정권은 황폐화된 한국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경제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정부주도형 대기업-수출산업 중심의 경제성장 전략은 각종 인허가 및 규제를 수단으로 특정 기업에게 이권이나 기회를 제공하는 특혜를 줄 수밖에 없었던 시기다. 그 때문에 정경유착이 시작된 것이고 각종 비리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 현직 대통령들은 “정경유착을 근절 시켜야 한다.” 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이 정경유착 근절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가지 잡음만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고 있고, 도리어 뿌리깊이 박혀 이제는 마치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해결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독후감/창작| 2009.12.04| 3페이지| 1,000원| 조회(771)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02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43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