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원인과 경과1. 서론2. 본론1) 전쟁의 원인2) “김일성 계획, 스탈린 승인, 모택동 지원”3) 6.25전쟁의 경과3. 결론1.서론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듯이,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겪어왔다. 그것은 세계 1,2차 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부터 내전, 혹은 게릴라전과 같은 소규모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규모면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의 원인, 성격 등으로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6.25전쟁이다.6.25전쟁은 여타 다른 전쟁들과는 확연한 성격적 차이를 보이는 유일무이한 전쟁이다. 6.25전쟁은 거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와 세계사회주의 간의 냉전체제 속 유일한 전쟁이며, 이념갈등으로 인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이다. 또한 미시적으로는 한민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이처럼 6.25전쟁은 민족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 전쟁으로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3백여만 명의 인명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전개과정에서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되는 사건이었다.이러한 6.25전쟁의 의미는 다른 역사적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교훈으로 받아드려야 하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최근 6.25전쟁에 대한 학생들의 설문조사에서 50% 달하는 수준이 누가, 언제, 왜 일어났는지 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군에 입대하는 현역 장병들의 올바른 의식과 시각을 위해서라도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6.25전쟁은 크게 민족 내부의 내전으로 보는 관점과, 냉전의 세계사적 산물로 보는 시각, 그리고 소수의 시각이지만 개인의 도발적 야심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체계론적 분석을 통해 개인적,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를 찾아보면서 진정한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찾고자 한다. 특히 김일성이 모택동과 스탈린으로부터 원조와 도움을 받는 타협에 의하여 갑산파를 중심으로 소련파를 규합한 소련 연합파, 남로당파와 북한 국내파의 연합세력인 국내 연합파, 그리고 친 중국 노선의 연안파 등 3대 세력으로 재편된다. 자연히 김일성의 권력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세력도 박헌영을 대표로 하는 국내연합파와 무정을 중심으로 한 연안파로 양분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갑산파를 이끌고 국내파와 연안파와의 권력투쟁에서 권력을 선점하게 된 것은 순전히 소련군정하에서 소련의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외부에 적을 만들어서 적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고 이를 통해 최소한 정적들의 세력을 약화 시키거나, 아예 적의 힘을 빌려 제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쟁을 선택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실제로 6.25전쟁은 통일을 가장한 김일성 권력유지의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김일성은 통일적 전면전을 가장해서 펼칠 제한전을 계획하고 소련의 지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2) 내부적 요인수정주의적 견해로서 한국전쟁은 국제전이 아닌 내전으로 규정된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은 내전을 의미하는 civil war 혹은 internal warfare로 표현되었다. 또한 내전설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국내적 요소와 국제적 요소가 모두 작용했지만 기본적인 동력은 국내적 대립?갈등에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전쟁이 1948~50년의 한국내부의 투쟁에 있었다는 것은 남한 빨치산에 의해 한국전쟁 발발이전에 이미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한국전쟁은 국제정치보다 국내적 측면이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해방 후의 상홍과 관련해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농민반란, 노동투쟁, 게릴라전, 38선상의 공개전투 등을 통해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쟁은 1945년 직후에 시작된 내전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었으며 혁명과 반혁명의 변증법을 거쳐 진행되었다. 1950년 6월의 재래식 전투의 시작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이 전쟁의 연장이었을 뿐이받았던 한국은 자생적 정치조직이 없었으며 국민들은 자치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망명중인 독립 운동가들은 심각한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은 한국이 자주독립국가의 지위를 되찾기 전에 일정기간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반도가 분할된 것은 미?소 강대국 모두 더욱 중요한 다른 정치, 외교적 쟁점들을 고려할 때 상대방이 도착하기 전에 누구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전략적으로 더욱 중요한 다른 지역에 계속 개입하던 워싱턴은 한반도에서 물러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를 배경으로 남한정부 수립은 가속화되었으며 이는 바로 미군 철수로 이어졌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는 공산군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세운 인민공화국이 남한을 침략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한편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모택동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2) “김일성 계획, 스탈린 승인, 모택동 지원”의 남침전쟁6.25전쟁은 남북한에서 300만여 명의 인명이 살상되었고, 산업시설도 무차별 파괴되었다. 남한에서만 공장 건물의 44%, 기계 시설의 42%, 발전 설비의 80%가 피해를 입었다. 전쟁 중에 약 120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피난길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가족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산가족은 1000만 명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고 길거리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 남편을 잃은 과부들, 손과 발 남한이 먼저 북침해 올 경우에 한해서 반격을 가할 수 있다고 하면서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했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것은 1950년 1월 30일의 일이었다. 몇 개월 사이에 중대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먼저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철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의 공산당 정부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내쫓았다. 그 후 미국과의 냉전이 심화되자 스탈린은 새롭게 부상한 사회주의 우방인 중공과 우호동맹을 맺었다. 1950년 1월 22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8일 후(1. 30) 드디어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는 비밀전보를 평양으로 보냈다.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모택동의 협조를 약속받도록 하였고, 김일성은 지시대로 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이 이미 그 계획을 승인하였음을 확인하고, 만약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중국이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곧바로 모택동은 만주 선양 부근에 9개 사단을 배치하고, 소련과의 군사방위조약을 서둘러 체결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김일성은 전면 남침을 결행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처음에 스탈린은 수차례나 김일성의 전쟁지원 요청과 전쟁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막 신생한 중공의 지도자 모택동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크나큰 부담이었고 실로 모험이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운명을 건 도박에서 선뜻 뛰어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이라는 인간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스탈린도 모택동도 결국 김일성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곧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총도 대포도 탱크도 비행기도 아낌없이 갖다 대 주었으며 심지어 전쟁계획에 직접 손을 대었고 전쟁 발발 후에는 세부적인 전쟁 지도까지 하였다.결론적으로 6·25전쟁은 ‘김일성이 계획하고, 소련이 승인하였으며, 모택동이 지원한 남침전쟁’이었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의해 시작됐음이 드러난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흡수하고자 했던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도 밝혀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엔군은 총사령부하에 한국군을 포함시켜 작전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 낙동강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완료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한국군은 지상군의 증원부대를 확보하기 위한 협조로써 최대의 국지전을 벌였으며, 8월 중순부터 시작한 북한군의 최대 공격은 9월 초에 이르러 끝났다.(2) 미군의 참전과 서울수복 ? 세계전쟁으로 전이7월 15일부터 맥아더는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구상,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으며,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다.미국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탈환을 위하여 동진하였고, 미국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절단되어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26일 서울로 진입하여, 28일에는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30일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에게 는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단지 남한지역에 있는 북한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사령부는 전 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넘었다. (3) 중국군의 참전과 1.4후퇴12월 4일 맥아더는 고 발표하였다. 이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 철수하였고,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유엔군 12만 명과 피란민 10만 명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다.중국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이 26일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자,렸다.
한국사회의동성애 인식변화 필요성목 차1. 서론1) 연구 목적 및 필요성2) 연구 내용 및 방법3) 이론적 배경2. 본론1) 동성애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변화2) 최근 한국사회의 동성애 관련 이슈3) 동성애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조사4) 동성애에 대한 한양대학교 대학생들과 충남대학교 대학생들의 인시조사 비교3. 결론1. 서론1) 연구 목적 및 필요성현대에 들어서 ‘다문화‘ 라는 개념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의 다문화는 상대성을 인정하고 서로 이해하며 공존하는 삶을 추구한다. 넓은 의미로 보았을 때 동성애도 이러한 다문화의 일부분일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동성애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도 제작되고 있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동성애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으며, 현대 사회에 들어 새롭게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동안 다수가 아닌 소수의 성 지향성을 가진 동성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상당한 제한이 있었고, 동성애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 이유가 있다. 과거 한국에서 동성애는 강력한 처벌의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그 사례가 여럿 존재한다. 동성애가 처벌과 범죄의 대상에서 벗어나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구성된 것은 19세기 말에 들어서이다(함인희, 2003). 하지만 그 동안에도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일반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일탈적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20세기 현대에 들어서야 동성애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회적 인권 운동과 국가 정책적 노력들이 시행되어 왔다. 그들도 이제는 ‘커밍아웃’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들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어떠한 사람이 동성애자가 되는 가‘ 와 같은 동성애의 이론적 원인이나 동성애자의 사회적 고충에 대한 논문들을 주로 발표해 왔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사회도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 및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사회. 동성과 이성 중 어느 한쪽에 국한되지 않고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성적 지향성을 가진다. 사람들은 양성애자라고 하면 동시에 여성과 남성의 두 성과 교제를 갖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부에는 그러하지만, 대부분의 양성애자는 오직 한 성과 교제를 한다.바텀(bottom)/마짜란 남성 동성애자 가운데 여성의 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바텀(마짜)이라고 한다.탑(Top)/때짜란 남성 동성애자 가운데 남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탑(때짜)라고 한다.트렌스젠더(Trans-gender)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다른 성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총칭한다.성전환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다른 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므로 외모나 복장으로 구분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커밍아웃 (Coming-out)커밍아웃은 [Coming out of the closet]의 축약이라는 데서 보이듯이, 동성애자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외부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동성애자들이 억압받는 현 시대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아를 형성하고 표출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커밍아웃은 억압받는 사회 현실에서 개인적으로는 간단치 않은 일이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② 동성애의 원인(1) 유혹설 : 유혹설은 나이 많은 동성애자들이 아이들이나 10대 소년들을 유혹해 동성애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에이즈에 감염된 한국 청소년 고백에서도 종종 드러나고 있으며, 동성연애에 빠져든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2) 영향설 : 영향설은 젊은 동성애자의 경우 동성애를 하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에 빠져들거나 주위에서 동성애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는다. 이것 또한 일부 호모들의 고백에서 인정된 것이다,(3) 무매력설 : 무매력설은 이성에게 인기 없는 사람이 동성애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레즈비언 가운데 여성적인 매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주로 남성 역할을 한다는 사실 등에서 입증되고 있다.(4) 성적 격리설 : 성적격리설은 주위에 동성밖지와 관계가 나쁜 경우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차별이 별반 없으며 ,최근 500여명이 넘는 한국 게이들을 상대로 한 인터넷 설문 조상의 경우 아버지와 관계가 나쁘다는 비율 (약 26%)보다 좋은 경우가 (약 45%) 월등히 많았다. 또 이 이론은 레즈비언의 경우는 별로 분석 사례가 없다는 결함도 있다.(3) 학습 이론적 원인동성애를 학습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입장은 동성애적 행위가 조건형성의 역할, 즉 동성과의 만족스러웠던 경험이나 이성과의 불만족스러웠던 경험이 동성애를 [선택]하게 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킨제이 학파들이 대표적 연구 집단인데, 그들은 어릴 때의 의식적, 무의식적 성경험이나 기숙사, 교도소, 군대등에서의 동성애적 경험이 동성애적 행동을 강화한다고 보고 있다.더욱이 행동주의 이론가들은 동성애를 잘못 학습된 결과이므로 학습과 훈련으로 동성애가 교정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전기충격, 혐오연상 등의 치료법이다.그러나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다하더라도 이 같은 요법으로 이성애로 전환했다는 사례는 없으며, 특수 환경에서 이루어진 동성애적 행위는 그 조건이 해제되면 원래의 성애지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동성애자들보다 이성애자들이 사춘기 때 동료들과 동성애적 행위를 한 경우가 더 많으며, 레즈비언 중 남성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경험이 이성애 여성보다 많다는 연구도 있지만 이는 레즈비언이 된 원인보다는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받은 결과일 경우가 높다.사회학습 이론 모델에서는 직접적 경험에서 오는 보상 내지 징벌 뿐 아니라 인형, 옷, 놀이 방법 등 간접 경험이나 관찰로써도 동성애적 행위가 강화된다고 보고 있다.오늘날 서구사회에서는 동성애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연구보다는 서로 다른 성적 지향의 소유자들의 행동이 왜 다른가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행동 특성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심리적, 생물학적 요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다.동성애의 원인에서 동성애는 태어나는 것인지 선택하는 것인지가 항상 논의 되어 왔다. 동성애자로 태어나는 것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으나,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유랑예인 집단 남사당과 그 외 승방과 머슴사이에서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의 사랑 얘기는 많이 전해진다.문학작품에서 동성애의 감정을 기록한 것은 고려시대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미소년인 청소년과 관리인 시적 자아가 같이 그네를 타고 즐기며,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둘이서 손잡고 소풍을 가고 싶다고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청나라 상인들과 미소년들이 거래를 통해 동성애 행위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중국 고전소설 홍루몽에서 미동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술집 얘기로 뒷받침된다. 박지원도 청나라 문인들이 미소년을 추천하여, 은근히 중국의 동성애 풍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이자 실학자인 박지원이 그러한 동성애 풍습이 좋다, 다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 게 더 재미있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최근에 와서는 홍명희의 [임거정]에 머슴들끼리의 남색 행위가 묘사되고 있으며, 그 외 현대 문학작품에서 동성애 묘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이나 구전을 통해 한국의 역사 속에서 동성애는 꽤 보편화된 삶의 일부분으로 절대 비난받거나,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공공연하게 동성애자의 정체성을 인식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여도 오늘날과 같은 도덕적 판단과 규제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세자빈 봉 씨의 축출은, 그녀의 동성애적 행위보다는 왕실의 위엄과 세자와의 갈등 그리고 숨어 있는 정치적 알력의 영향이 더 강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고관대작 대감들의 미동치기 관습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유교적 도덕관념이 한국에서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요한 장치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공자 ,맹자 생전은 물론이려니와 유교의 경전 격인 어진다. 하지만 활동상의 문제로 이는 다시 곧 깨어지고, 1998년 6월 동성애자 모임 30개 단체가 연대한 ‘한국 동성애자단체 협의회 (한동협)’이 출범하게 된다. 한동협 역시 연대체가 너무 느슨하다는 이유로 흐지부지 해체되게 된다. 이후 한동안 레즈비언과 게이를 포함한 단체들의 연대의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그러다가 2007년 10월 말, 차별금지법에서 보수 기독교 단체와 기업의 압력으로 인해 성적 지향을 포함한 다수의 조항이 빠진 것을 계기로, 다양한 성소수자 단체들과 개인들이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행동’으로 모이게 된다. 이후 이들은 약 2개월 간 신속하고 다양한, 광범위한 활동을 펼친다. 이는 지난 연대체의 시도들과는 다른, 상당히 고무적인 일로, 이를 계기로 성소수자 진영의 단체들은 다시금 연대의 가능성과 그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긴급행동이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으로 넘어가면서 이 새로운 연대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개인들의 고민과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토론회 등을 통해 연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2) 최근 한국사회의 동성애 관련 이슈① 군형법 92조 문제현재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있어 가장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슈는 군형법 92조의 계간 및 기타 추행 조항에 대한 문제이다. 이 조항의 주요 내용은 '계간 및 기타 추행을 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처벌조항으로,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단체에서는 이 중 '계간' 조항이 동성애자들 간의 성행위를 비하하여 묘사하고 있으며, 병영 내의 이성간의 합의에 의한 성관계는 처벌하지 않고 있는 데에 비해 동성 간의 성관계에서는 합의에 의한 것까지 성폭력(합의하지 않음)으로 간주, 처벌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현재 동 법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이 제기되어 있으며, 3/4분기 중 위헌여부에 대한 최종 선고가 있을 예정이다.② 보수 기독교 단체에 대한 문제현재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에서 말했다.
한국사회의 자살- 카이스트 사태를 중심으로 -목차1. 서론 - 한국사회의 자살 실태2. 본론1) 카이스트 자살 사건의 발단2) 카이스트 자살 사건의 전개3) 이론적 분석 - 자살론, 갈등론, 낙인이론3. 결론1. 서론익히 알다시피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는 2위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는 빠른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살률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IMF를 거치면서 그 폭은 더욱 상승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0년 만에 약 두 배로 상승하면서 자살이 세 번째의 사망원인이 되었다.[표 1])우리나라의 2009년 15~24세 청소년의 사망 원인은 ‘고의적 자해(자살)’가 가장 많았다. 특히 인구 10만 명당 청소년 자살자 수는 2008년 13.5명에서 2009년 15.3명으로 늘었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청소년 자살률과 비교하면 한국은 6.2명으로 OECD 평균 6.8명보다는 다소 낮았다. 하지만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비교하면 3~4배나 높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15~24세 청소년의 8.8%가 지난 1년 동안 한 번이라도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사회조사·2010). 자살하고 싶은 이유 1위는 ‘성적·진학(37.8%)’ 때문이었다.)이러한 심각성 속에 최근 카이스트 자살 사건이 벌어졌다. 소위 신자유주의의 여파 속에서 교육 또한 하나의 상품, 경쟁력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카이스트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교육제도를 개혁하게 되었고, 이에 학생 및 교수가 연달아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10~20대 자살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이에 우리는 학생들의 자살, 특히 최근에 벌어진 카이스트 자살 사건을 사회적 자살로 보고 여러 이론들로 설명하려 한다.2. 본론1)카이스트 자살사건의 발단카이스트는 대한민국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으로,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국립 특수대학이다. 카이스트는 본래 등록금을 내지 않았지만, 이번의 교육개혁움을 학점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되었다.징벌성 등록금 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평점 3.0에서 0.01점 낮아질 때마다 약6만원을 다음 학기 시작 전 지불해야함]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카이스트 학점체계가 상대평가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의 3분의 1은 무조건 3.0 이하일 수밖에 없다. 또한 2.0 미만의 학생은 최대 600만원의 수업료가 부가된다.교육개혁의 두 번째 내용은 전 과목 영어강의제도이다. 이 제도의 도입 배경은 세계적 석학들이 대부분 영어 논문을 발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면 이 분야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취지는 상당히 좋다. 하지만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기 이전에 학교 안에서 뒤쳐지고, 소외되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또한 과도한 수업량은 밤 10시에도 나가서 수업을 들어야 하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을 새는 일도 많아졌다. 자살한 네 명의 학생 중 세 명이 1학년을 마친 뒤 자살한 것으로 보아 학업량을 소화하지 못해 힘들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다음으로 카이스트는 재수강을 총 3번밖에 하지 못한다. 게다가 재수강의 최고학점은 B학점으로 제한된다. 이렇게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재수강의 횟수 제한은 학생들을 더욱 소외시켰다. 또한 사관학교와 같은 학교 분위기는 학생들의 배움의 의지마저 잃게 하며, 입학하는 모든 학생들이 작성하는 서약서는 학생들을 더욱 고립시킨다.이렇게 변화된 카이스트의 교육제도는 학생들이 진리를 탐구하여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인류의 밝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는 대학교가 아니라, 학점을 따기 위한 곳이자, 등록금을 줄이기 위해 공부에만 매달려야하는 장소가 되어갔다. 과도한 과제와 수업량, 지나친 영어사용의 수업으로 도태되어가는 학생들, 징벌적 등록금제도는 학생들에게 협력은 없고, 경쟁만이 사는 길이 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 상황에서 학점에 쫒기다 보면 친구는 적이 되어버리게 되고,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자살을 하는 친구들을 돌볼 여유조차 사라지게 되었다.2)카이스트 자종 경진대회에서 60여개의 상을 받으며 ‘로봇 영재’로 불렸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과학고 출신 학생 수준에 맞춰 영어로 진행되는 미적분 수업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부적응은 학사경고로 이어졌고 다른 친구들은 내지 않는 수백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부담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수면제 수십 알을 복용하며 막다른 선택을 했다.두 번째, 3월 20일 카이스트 학생 박모(20)군 자살- 김씨가 세상을 떠난 것은 3월20일 오후 6시35분께이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김씨는 3월16일 학교를 휴학하고 수원에 있는 부모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의 방 안에는 컴퓨터를 이용해 A4 용지에 작성한 10줄 분량의 짤막한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 말미에는 김씨의 자필로 보이는 서명이 남겨져 있었다. 유서에는 ‘부모님에게 죄송하다. 동생한테 미안하다. 쓰던 물건은 동생한테 줘라’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김씨는 성적이 우수하고 평소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가 졸업한 과학고등학교의 한 관계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도 우수했던 친구였다. 입시에서도 서울대와 카이스트에 모두 합격했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카이스트에 입학하고 나서도 평점 3.0 이상을 기록했던 만큼,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에게 적용되는 등록금 차등 부과 대상도 아니었다. 공부 외에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가 있던 다음 날 새벽 김씨의 새터 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학생은 학내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활발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던 친구였다”라고 말하며 그가 활동했던 컴퓨터 관련 동아리를 소개하기도 했다.세 번째, 3월 29일 카이스트 학생 장모(22)군 자살-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 재학생이 또다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경찰은 3월 2 미뤄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경찰은 장씨의 주변 인물들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 중이다.카이스트 학생 자살은 올해 벌써 3번째 일어났다.네 번째, 4월 7일 카이스트 학생 박모(19)군 자살-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 학생이 또 자살했다. 올해만 벌써 4번째다.경찰은 4월 7일 오후 1시20분께 인천시 남동구에서 박모(19)군이 숨진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박군은 이날 한 아파트 현관 앞에서 머리에 피를 많이 흘린채 요쿠르트 배달원 박모(42)씨에 의해 발견됐다.박군은 카이스트 휴학생으로 이달 초 학교를 휴학한 상태로 알려졌다. 경찰은 박씨가 휴학 당시 학교에 우울증 진단서를 제출한 점에 따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추정하고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하고 있다.다섯 번째, 4월10일 카이스트 교수 A씨 자살- 올해들어 학생들이 벌써 4명째 자살해 결국 총장과 학생들간의 간담회까지 진행된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경찰은 지난 4월 10일 오후 4시께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의 한 아파트에서 카이스트 박모(54) 교수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박 교수는 주방 가스배관에 목을 맨 채 숨져있었으며 외부 침입 흔적이 없고 유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유서에는 A4 용지 3장에 걸쳐 "애들을 잘 부탁한다,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의 가족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은 유서에 최근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고 전했다.3) 이론적 분석이번 카이스트의 자살을 사회적 자살로 보고 분석한다. 크게,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으로 분석하고, 다음으로 갈등론적인 입장에서 분석한 뒤, 마지막으로 낙인이론으로 분석할 것이다.①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Emile Durkheim, 1858~1917)은 1897년에 발표한 저서 에서 자살을 '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뒤 즉 개인과 사회의 결합력이 약할 때의 자살이다. 일상적인 현실과 좀처럼 타협 또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살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이타적 자살'은 그 반대로 과도한 집단화를 보일 경우, 즉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할 때의 자살이다. 개인의 생존보다 민족의 생존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정세의 변화라든가 사회 환경의 차이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에 의한 자살이다. 아노미(anomie)란 '행위를 규제하는 사회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뒤르켐이 사용한 용어로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이나 사회규범이 혼란 상태에 빠졌을 때 발생한다.'숙명적 자살'은 사회가 과도하게 욕망을 억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절망 속의 자살을 말한다.카이스트 자살사건에 대해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많이 거론이 되는데, 이기적 자살은 자살의 원인을 주로 개인(본인)에게서 찾고, 아노미적 자살은 그 이유를 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자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그에 따라 각 유형의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이 만약, 우울증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구조적 문제이기 보다는 개인적 문제 즉 이기적 자살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이와 같이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제까지 내 연구의 동반자였던 친구가 경쟁과 투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면 어느 누가 심적인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노미적 자살, 그러니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다.따라서 이번 카이스트 자살사건의 학생들은 개인이 학교라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속의 정도가 약해 발생한 이기적 자살의 측면과 더불어,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학생들이 아노미상태로 내몰려진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있다.
6.25전쟁이 한국사회에미친 영향목차1. 서론2. 본론1) 전쟁의 피해2) 정치적 측면3) 경제적 측면4) 사회·문화적 측면3. 결론1. 서론6·25 전쟁은 한민족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강대국들의 국내외정책 등 국제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미국은 정치적·군사적인 면에서 한국전쟁을 계기로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혀, 국제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훨씬 커졌다. 한편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더욱 심화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또한 6·25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의 경제부흥과 보수체제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한민족에게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가 폐허로 변하였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다. 엄청난 전쟁사상자 외에도 한국군과 경찰에 의한 보도연맹학살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 같은 집단적 민간인 학살이 저질러졌다. 남한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 명에 달하였고,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전쟁의 참혹함은 두말 할 나위없다. 이제는 6.25전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6.25전쟁이 한국사에 있어서 왜 중요한지를 알아봐야 할 것이다.북한의 경우,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북한이 훨씬 더 컸다. 중국군 참전 이후이며 휴전협상의 막바지에 공습으로 인한 집중적인 파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이 전쟁은 김일성체제를 강화시켰다. 김일성은 3년 동안 계속된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나자, 전쟁의 책임을 국내파, 곧 남로당계열에 돌리고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 1958년 초 김일성 유일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반미주의가 굳게 자리 잡았으며, 북한이 패배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회생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우의가 두터워졌다. 한편 북한의 경제를 철저히 파탄시켜 경제적·사회적으로 암흑기를 초래하였다.남한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우선 반공적 국가질서를 강화시켰다. 처참한 전쟁의 경험은 국민들로 하여금 반공정신으로 무장론에서는 6.25 전쟁의 피해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2. 본론1) 전쟁의 피해6.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 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국군의 인명 피해전사:58,809명, 부상: 178,632, 실종 및 포로 : 82.310계 : 319,759연합군의 인명 피해전사 : 36,991 부상 :115,648 실종 및 포로 :6,944계:159,583공산군의 인명 피해북한군 전투 손실 : 520,000명중공군 전투 손실 : 900,000명민간인사 망(학살당한 인원 포함) : 370,599부 상 :229,625납 치 :84,532행 방 불 명 :303,212피 난 민 :240만전쟁 미망인 : 20만전쟁 고아 : 10만물적 피해민간가옥 :612.000호각급학교 :15,427동(4,023 개교)경찰서 : 1,931동(1,176 개소)행성기관 : 2,700동의료기관 : 1,500동금융기관 . 하지만, 이 같은 변화가 전시라는 비정상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 이는 상당 부분 한국전쟁의 정치적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전쟁이 정치에 미친 영향은 기본적으로 전쟁 자체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전쟁 초기에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 일임되면서 전쟁 수행의 주된 책임은 이승만으로부터 미군에게 넘어갔다. 이 같은 상황은 곧 한국 국가로 하여금 국가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상실하게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통치자에게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정치에 더욱 몰두하게 하는 또 다른 부수적 상황을 만들어냈다.특히 전쟁 후 이승만 1인 독재체제의 수립이 가능했던 상황에 관해서는 당시의 정치 주도세력의 성격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민당에서 민국당, 그 후 민주당까지 이어지는 보수야당 세력의 지도자들은 모두 한때라도 이승만과 '밀월관계'를 가졌고 애당초 그들의 야당으로의 변신부터가 그로부터의 소외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특히 전쟁발발 직전에 공포되어 전쟁기간 동안에 시행된 농지개혁은 기존의 지배엘리트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더러 이는 전시 하에서의 광범위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성장과 결합하여 한동안 집권세력의 독주를 가능케 하는 '정치공백' 상황을 야기했다. 농지개혁으로 인해 기존의 지주계급이 거의 몰락한 가운데 이승만에 대한 가장 조직적인 반대세력이었던 야당의 정치적 능력도 한동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3) 경제적 측면한국전쟁은 남?북한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히면서, 여러 측면에서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남?북한의 인구는 대략 3천만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사상자는 6백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 그 자세한 피해는 아래 표에 나타나 있다.※한국전쟁의 인적 피해(단위 : 명)구분남한유엔군북한중국군계민간인군인민간인군인사망373,599227,74836,813406,000294,151184,1281,522,439부상229,652717,083114,8161,594,000225,949물2*************44시설26*************2※한국전쟁으로 안한 북한의 공업부문 피해상황(단위 : %)구분전력생산석탄생산철생산공업생산전체감소비율748990366.25 전쟁은 660만여 명의 사상자(유엔군과 한국군은 약 50여만명 공산군은 150여만명, 민간인 430만 여명)가 발생하고, 공장 900여 개, 주택 60만여 동, 산업시설과 전국토의 4분의 3을 초토화되었으며,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탈출하므로써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4) 사회·문화적 측면(1) 사회의 재구성한국전쟁이 미친 사회적 영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급격한 사회적 변동이다. 전쟁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나 극심한 파괴가 있었지만 외형적 파괴 이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이다.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자는 대체로 남한이 100만명, 북한이 270만명 정도였으며, 그 가운데 사망자는 남북한 모두 40만명 안팎이었다. 문제는 이같은 인적 피해가 발생할 정도의 극도의 공황(恐慌) 상태에서 점차 파괴되어지는 기존의 인간 관계에 있다. 특히 농촌에서는 이미 농지개혁으로 인해 지주의 물적 기반이 크게 훼손된 데 이어 전쟁 발발후 전선의 변화에 따라 더욱 증폭되어지는 이념투쟁 속에 종래의 반상(班常) 구분이나 머슴 등과 같은 특수한 사회적 관계가 와해되어 가기에 이른다.사회적 관계의 재구성과 국민 부담의 증대는 한국적인 독특한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다.첫째는 크게 상승한 교육열이다. 과거부터 우리 사회에는 유학의 영향으로 '독서인'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전쟁을 거치고 신분 질서 등 모든 사회적 관계가 유동화하면서 교육을 통해 개인적 역량을 키우고 이를 사회적 이동, 즉 지위 상승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이 같은 교육열은 한국 국민의 전반적 수준을 제고시켜 오늘날 우수한 인적 자원의 기반이 되기도 했지만, 지나친 개인주의로 역작용도 가져 온 것이 사실이다.둘째는 농촌 이탈과 이에 기인한 급격한 도시화이다리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분단 또는 냉전을 거부할 세력이 사실상 이 땅에서 거세당하게 되었다(김진균?조희연, 1985).이제 한국전쟁 이후 반공이데올로기는 공히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정당화되어 제도화 및 일상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한국전쟁이라는 변수 자체가 레드 콤플렉스를 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드는데 유일한 변수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하고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로 된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이 결과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레드 콤플렉스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원천 그 자체이다. 1999년 가을 미국 AP통신이 노근리사건은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고 보도하기까지는 노근리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무수한 양민학살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유가족의 신소?신원을 해도 ‘빨갱이’라는 말로 일축을 당했다. 오히려 당시 학살사건 관련 사진들은 대개 ‘괴뢰군의 천인공노할 학살’ 현장의 사진으로 등장하여 반공교육의 자료로 사용되곤 했다. 미군 외에도 국군이나 서북청년회와 같은 반공청년단들의 무차별적인 학살 사건들에 대해서도 당사자나 유가족들은 반공 괘씸죄에 걸리지 않기 위해 진상에서 멀어져야 했을 뿐만 아니라 기억 자체를 왜곡시켜야 했다. 1980년 5.18 광주 항쟁조차도 남파간첩이 조정한 사건으로 탈바꿈하였다.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려 했던 대학생들이나 언론사 기자들이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계엄사에 끌려가야 했다.심지어 한국에서 1987년 이전까지 노동운동이나 여타의 사회운동이 불온시 되었던 데에도 한국전쟁의 영향이 지대하다. 해방 당시 60만 명의 전평이 한국전쟁으로 사라지자, 노동자계급을 사회 기본 세력으로 하는 공산주의나 북한에 대한 반격 공세는 노동운동 또는 노동조합을 곧바로 친공(용공)운동 또는 용공단체라는 발상을 심어놓았다. 그런 부정적 관념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발전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의 합법공간을 극도로 축소하여 나아가 민중들의 양심의 자유는 고사하고 정당한 생존권 주장조차도 거의 불식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3) 이산가족이
추격자200500605 이진광1. 악과 악의 대립2. 인물의 변화3. 영화 속 우리 모습4. 감독과 배우5. 영화평영화 는 한때 한국사회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유영철 연쇄살인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 살해방법이나 죽인 사람의 숫자 등 그동안 여러 연쇄살인마가 등장했었지만 유영철만큼 이 사회에 충격을 준 인물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 는 상당히 특이한 영화이다. 쉽게 말하면 영화 초반부터 누가 범인이고, 영화 속에서 태연하게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범인의 모습처럼 어찌 보면 뻔뻔스럽게 초반부를 이끌어간다.1. 악과 악의 대립의 극중 인물은 엄중호(김윤석)과 지영민(하정우)이다. 엄중호는 전직 형사 출신의 포주이고, 지영민은 연쇄살인범이다. 포주와 연쇄살인범... 두 캐릭터 다 다른 영화에선 당연히 악일뿐이다. 하지만 에선 엄중호만이 선으로 비추어진다. 언론, 경찰, 검사보다도 포주인 엄중호 개인만이 선이 된다. 언론과 경찰, 검사는 연쇄살인범 지영민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역할만 할뿐이다.하지만 연쇄살인범 지영민을 잡는 포주 엄중호는 절대 선일까? 엄중호가 지영민을 잡고 싶어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엄중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아가씨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지영민이 팔아넘겼다고 생각한다. 엄중호에게 범인의 존재는 자신의 생계에 치명타를 입힌 존재다. 자신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에 솔깃해 환호성을 지르는 경찰들과 달리 엄중호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자신의 아가씨들에게 들어간 돈이 얼마이고, 그 아가씨들이 사라진 까닭에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이다. 오죽하면 범인의 단서를 잡아내라고 범인의 주소지로 보냈더니 거기에 가서까지 범인의 누나에게 합의금을 독촉할 정도였다.분명 영화 초 중반까지 엄중호는 지영민을 연쇄살인범이 아닌 그저 자신의 아가씨들을 팔아넘기는 다른 포주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다른 포주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위 법의 수호자였던 그가 이제는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다녀야 하는 직업을 택해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도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그 어떤 경찰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가장 근본적인 시점부터 시작해서 파고들어가게 되는 과정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이러한 대립을 보여주는 영화는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을 들 수 있다. 극 중 강철중(설경구)는 비리경찰로서 살인마 조규환(이성재)를 잡기 위해 추격한다. 이때 강철중이 그를 잡으려는 초반의 의도는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에 의 엄중호처럼 범인을 잡기위한 이유가 바뀌지만 강철중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이유로 범인을 추격한다.이러한 대립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대립 구도 보다 더욱더 흥미롭다.2. 인물의 변화전직 형사인 엄중호는 출장안마소를 운영한다. 어느 날 그가 데리고 있는 아가씨들이 실종되기 시작한다. 엄중호는 미진을 불러낸 핸드폰 뒷자리가 4885인 손님이 실종된 다른 아가씨들을 마지막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뒤를 쫓는다. 미진은 엄중호에게 손님의 집 주소를 문자로 보내려고 하지만 핸드폰이 터지지 않아 실패한다. 엄중호는 4885의 집 근처를 헤매다가 자동차 접촉사고를 낸다. 전직 형사의 직감덕분일까, 엄중호는 접촉사고를 당한 사람의 피 묻은 옷과 연락처를 절대 남기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에서 그가 4885임을 알게 된다. 이는 실제로 를 본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그 때부터 추격은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엄중호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는 범인을 일찍 알려주고 그 범인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준다.엄중호는 경찰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가씨들이 실종 되었을 때에도 경찰이 수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경찰은 시장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오명을 덮기 위한 연쇄살인범 잡기에 4885, 지영민을 이용하려고 한다. 지영민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 난 뒤에도 경찰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지영민을 이리저리 파헤치려고 한다. 자신의 전업이 경찰이었는데도 엄중호는 왜 경찰을 신뢰하지 않는가. 그가 경찰이라는 집단 안에서 그들의 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엄중호는 동료 경찰과 나쁜 짓을 하다가 본인만 경찰직을 박탈당했다. 그 뒤 그가 왜 하필이면 출장 안마소 포주가 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경찰과 출장 안마소 포주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경찰은 포주를 단속하거나 포주에게 돈을 받고 그들의 불법에 눈감아준다. 딱히 새로 시작할 것도 없었을 테고 불명예스럽게 경찰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엄중호는 자연스럽게 어쩌다보니 출장 안마소를 했을 것이다.엄중호는 왜 지영민을 쫓는가. 시작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아가씨들에게 빌려준 돈 때문이다. 아가씨들을 찾아야 그녀들에게 빌려 준 자신의 돈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전직 경찰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아직은 쓸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옛 동료였던 경찰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다가 실종된 미진의 딸을 맡게 되면서 엄중호는 그 아이에게 애처로움을 느낀다. 비오는 날 어느 모텔 앞에서 미진이가 죽었을 것이라 느꼈을 때, 자신을 따라 다니던 미진의 딸이 오토바이에 치여 입원했을 때, 그는 미진의 딸을 보면서 미진의 죽음의 책임이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지영민을 잡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는 미진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 알아야만 한다.엄중호의 추격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시작되었지만 선을 지키고 악을 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엄중호가 미진의 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반드시 지영민을 잡겠다고 다짐할 때 출장 안마소 포주라는 그의 직업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인간 엄중호 만이 보인다. 다른 경찰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지영민에게 집착하지만 엄중호는 그렇지 않다.3. 영화 속 우리 모습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맨 처음에 범인을 잡고, 다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범인을 증거가 있는 현장까지 추격해서 잡은 사람은 경찰이 아닌 '현직 포주'였다. 불법도 아닌, 그렇다고 합법도 아닌 법망의 경계선에서 법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법을 피해 살아가는 포주가 오히려 법의 '혜택'을 입고 있는 살인범을 쫒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직접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당사자가 직접 나설 때에만 그나마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걸 보면 그저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경찰은 제3자에 불과할 뿐이었고, 단지 자신의 밥줄 때문에 범인을 쫒아가 잡은 것이 결과론적으로 앞으로 범인에게 희생될지도 모르는 많은 예비 피해자들을 구해내며 사회의 안녕과 정의를 도모한 영웅적 행위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도 기가 막히지 않은가.경찰은 절대 엄중호 만큼 절박한 입장이 아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다. 범인을 잡으면 좋고, 못 잡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차피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것을 믿고 웃으면서 살인을 자백하는 범인을 앞에 두고도 증거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고, 오히려 엄중호가 '비공식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조하고, 행여 나중에 그 폭행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쓸까봐, 엄중호를 앞에 내세워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해할 뿐이다.솔직히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범인의 모습은 그다지 완벽하지 못하다. 경찰서에서 앞뒤가 안 맞게 말을 바꾸다 걸릴 정도로 그다지 계산적이지도 못하고 치밀하지도 못 할 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날렵하지도 못한, 그저 어디에서나 한번쯤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청년의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얼핏 보면 마치 경찰의 수사망을 교묘하게 빠져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범인이 경찰에 맞서 의도적으로 한 일은 애당초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결과적으로 무능력하고 사명감마저 없는 공권력이 마치 그가 지능적이고 교활한 면까지 갖춘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보이게끔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다소 과장되게 공권력의 허점을 꼬집으면서까지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4. 감독과 배우아예 처음부터 패를 다 보여주고도, 판을 가지고 노는 타짜 같은 감독.. 나홍진! 이 영화가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그런데 정말 노련하다. 그것도 다른 장르도 아닌 스릴러 영화에서 조폭 코미디 영화에서처럼 우스꽝스런 상황설정이나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할 수도 없고, CG로 떡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감독의 연출력이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그래서 감독으로써는 꽤나 까다롭고 어려운 장르가 스릴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