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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속의 기생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
    목 차Ⅰ. 머리말1. 연구목적22. 기생의 사전적 의미3Ⅱ. 기생의 기원과 변화51. 삼국시대52. 고려시대63. 조선시대74. 일제강점기85. 해방 이후9Ⅲ. 기생의 생활121. 기생의 역할122. 기생의 교육133. 기생의 복식15Ⅳ. 조선 기생의 문화적 의미171. 문인으로서의 기생172. 소설·야담·회화 속의 기생203. 일제강점기 상징화된 기생22Ⅴ. 맺음말25참 고 문 헌27Ⅰ. 머리말1. 연구목적기생(妓生)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였다. 봉건 사회 속에서 자기표현의 수단도 가지지 못한 여인들 가운데 당대 상층부의 남성 문화와 교류하며 섬처럼 떠 있었던 여성 계층이 바로 기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性的) 존재와 천한 신분이란 제약에 갇혀 예인으로서의 가치가 평가 절하됐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저급한 게이샤 문화의 유입으로 풍미와 절도는 사라지면서, 기생은 왜곡된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 폄하되기에 이른다.이번 연구를 통해, 첫째로 기생의 역사를 통해 기생의 근원과 역할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궁중에는 여성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의녀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기생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기생에는 다양한 계급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생은 1패 기생, 2패 기생, 3패 기생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기생들은 왕과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들 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두 번째로, 문인으로서의 기생을 문화적 의미에서 고찰하고, 기생이 소설·야담·회화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 속에서 기생들은 어떻게 상징화 되고, 우리에게 전해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다음으로 일제강점기 기생의 생활과 사회를 당시 일제가 만들어낸 식민지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기생을 양성하던 기생학교의 시간표는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면서, 기생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양성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또한 기생이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써 타자화된 조선을 나모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한 계층으로 전락한 것이 가장 일반적인 사례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정복전쟁 중에는 변방의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 역할을 할 여성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사치노예들은 이러한 부류의 여성들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2. 고려시대고려시대의 문헌에는 고려가 삼한을 통일시키며, 남녀노소를 잡아 노비로 삼는데, 그 기예와 지식이 뛰어난 여자를 기생으로 삼아 술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고려여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미모의 여비들이 기예와 가무를 연습한 것이 고려여악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왕이 행차했을 때 배 위에 여악을 실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고을의 기녀를 뽑아서 교방이 가득 찼다는 기록이 있다.고려왕조 때는 교방이라고 하는 곳에서 기생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는데, 그것은 뒤에 세워진 기생학교와 같은 기관으로 보인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왕조 때부터 성행한 ‘팔관회’와 ‘연등회’ 그리고 ‘채붕’과 같은 행사에서, 그녀들의 우아하고 요염한 노래와 춤을 왕후귀족들이 관람하고 즐겼던 것이다. 고려 문종 31년(1077) 2월. 궁궐에서 연등회가 벌어졌다. 교방의 여제자 초영이 55명의 왕실연주단을 대동해 중광전에서 가무를 행하고, 군왕만세 와 천하태평 의 네 문자 춤을 펼쳐 보였다고 전해진다. 연등회란 원래 불교에서 기원한 것으로 수많은 제등에 불을 밝혀 그것을 나란히 걸어두고 화려함을 겨루는 행사였다. 불이 밝혀진 제등행렬의 화려한 인공조명 아래서 펼쳐지는 가무와 백희는 예능의 발달과 함께 발전을 거듭했다. 그 당시, 화희라고 불리는 불을 가지고 즐기는 여흥, 즉 오늘날의 불꽃놀이는 연등회의 호화찬란함을 장식하기 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기녀는 고려에 들어와 노비의 수적 증가와 함께 더욱 세분화되고 공식화되었다. 중앙의 관료제도가 정착되면서 개인소유의 사노비들이 국가 소유로 귀속되면서, 국가에 소속된 기녀, 즉 관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관아의 관비로 와 같이 기생과 창기, 기생과 여급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기생들이 단순한 접대부로 취급받음에 따라 이전의 ‘예인’으로의 이미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일제시대 ‘근대성’에 기반을 둔 위생담론의 등장과 이에 따른 위생관리의 시행으로 기생들이 잠재적 성병 보유자로 취급받아가는, 따라서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야하고 나아가 위생상의 이유로 ‘기생철폐론’까지 등장하는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말기의 기생 학교, 기생조합 등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7년의 한성기생조합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생겨났던 조합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권번(卷番)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광복 후 이것이 폐지되어 제도적인 기생은 사라졌다.5. 해방 이후1945년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기생의 신분은 1947년 ‘공창(公娼)제도폐지령’을 제정할 때 까지 존속되었다. 해방 후 남한은 미군정 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 또는 미군기지가 한국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병사를 상대로 하는 특수 음식점, 유흥시설 및 오락시설이 필요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 한국전쟁, 남북분단으로 인한 남북의 대립 상황은 거듭된 혼란 속에 일본식 유곽제도가 소멸됐다 해도, 이미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시스템의 매매춘이 공공연하게 부활되고 있었다. 해방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사창가가 전쟁, 쿠데타, 정쟁(政爭) 등의 혼란을 틈타 더욱더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1948년 당국은 권번 기생을 ‘접대부’라는 제도에 강제 편입시키게 되면서 기생은 근대사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1961년에 시행된 ‘윤락행위방지법’은 ‘공창제도 폐지령’이 단순히 유곽제도를 해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령인데 비해, 이는 적극적으로 매매춘 행위를 방지, 폐지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 법률은 박정희 대통령의 쿠데타에 의한 정권장악 직후에 제정되었다. 한국전쟁에 의한 전쟁미망인의 증대와 생활의 곤궁화로부터, 매춘행위로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고, 나아가 도라지』타령과 에로틱한 속가(俗歌)까지 모두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적고 있어, 기생학교에서는 가곡류와 이와 구별되는 조선 민요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생들에게 제일 중요한 서비스인 남자손님을 다루는 법은 ‘예법’이나 ‘회화’시간에 배웠다. 걷는 법부터 앉는 법, 인사법부터 술을 따르는 법, 표정 만드는 법부터 배웅하는 법 등, 술자리에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배우는 것이다. 더욱이 상대 손님이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에 따라 접대하는 법이 나누어져 있는 등 위의 내용들을 상세하게 강의하는 것이 ‘예법’과 ‘회화’수업이다.‘기생학교’는 인신매매 금지와 여성의 사회진출 장려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책적 일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기생의 전통적인 기예 보존, 후계자의 양성 그리고 예능자 지위향상이라는 정부의 그럴듯한 ‘기생학교’ 설립 취지는 고려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유곽제도, 권번제도, 정기검진제도도입 등의 시스템은 식민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이 미치고 있었음을 말해진다. 기생은 경제적 기반 약화와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의 영향으로 게이샤로 전향하는 등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게 된다.3. 기생의 복식기녀는 그들이 천인계층에 속하지만 여악을 담당하는 가무자로서의 역할과 남성들을 접대를 해야 하는 신분적 특수성으로 인해 옷차림이 일반 부녀자들에 비해 다양하고 화려했다. 기녀는 생활이나 복식 등의 면에 있어서 당시의 일반부녀의 생활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경직된 유교 윤리 하에서 그들은 이례적인 예외가 허용되어 복식 또한 매우 사치하였다. 복식금제에 있어서도 기녀는 많은 특전이 주어져 비단으로 옷을 해 입고, 피화(皮靴), 금, 은으로 된 일체의 장신구도 허용되었다.『경국대전』에는 "사족의 부녀와 아동·경기(京妓)의 잡다한 장식인 금은주옥은 금하지 않는다"는 기록과 『신보수교집록』에 "사족의 부녀로서 수놓은 의상을 입는 자는 가장을 아울러 논죄하며, 사부의 첩과 서자, 의원, 역관, 잡직 등에 있는 사람의 처로서 교자를 쓰는 자,표현의 한계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문인으로서 문화적 존재로서 시대에 이름을 남긴 기생들의 활약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2. 소설·야담·회화 속의 기생여기서는 조선시대의 소설·야담·회화에 등장하는 기생들이 어떤 상징적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지 살펴보고 이 시대에 있어서의 기생의 사회적 위치 및 기생의 의식을 알아보겠다.기생이 등장하는 소설은 주로 기생과 양반의 향락상이 구현되어 있고, 양반중심으로 서술된 소설과 기생중심으로 서술된 소설이 있다. 먼저 양반 중심으로 서술된 소설은 『구운몽』, 『동선기』, 『옥루몽』 등이 있다. 이 소설들에서 기생은 정조를 지키고 양반과의 애정 성취를 통한 신분상승을 바라는 존재로 표현된다. 양반이 기생을 풍류와 향락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한, 비록 사랑하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반면 『춘향전』, 『옥단춘전』, 『월하선전』 등 기생 중심으로 서술된 소설은 양반권력층의 향락적 풍류의식에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기생들은 양반들에게서 일종의 향락의식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 양반들의 진실한 애정을 가진 남자로서 받아들인다.조선의 신분제도에 있어서 기생은 천민계급이고 기생이 그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양반의 풍류?향락의 대상으로서 남성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도 또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속의 기생들은 부당한 신분제도와 양반들의 풍류?향락생활을 비판하고 있고, 남성에 종속되지 않고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의식을 보이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기생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기생들이 가졌던 사회적 불만이 그만큼 실재적으로 존재했고, 문학적으로 소설 속에 반영되었을 것이다.소설 속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으로는 『춘향전』의 여주인공 춘향과 그녀의 모친인 월매가 있다. 춘향은 은퇴한 기생 월매와 양반 성 참봉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조까지의 신분제도에서는「노비수모법(奴婢隨母法)」이라고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아버지가 양한다.
    역사학| 2017.05.29| 28페이지| 3,000원| 조회(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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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와 법가의 비교 평가A좋아요
    Ⅰ. 제자백가의 출현 배경춘추 말에서 전국시대에 걸쳐 중국의 봉건사회가 형성되고 확립되면서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많은 학자들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한다. 주대의 봉건체제하에서는 세습적 신분질서가 고정되었고, 사상과 학문은 국가가 관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극히 일부의 귀족계층만이 학문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고, 노예와 농민은 수탈제도 하에서 그들의 정치 경제적 요구와 사상을 표현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생산력과 경제의 발전 및 각 제후국의 발전정도의 불균형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제후국은 경쟁적으로 인재를 얻어 개혁을 하고 부강을 도모하였다. 지금까지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었고, 일반민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밀접한 교류를 가지면서 사상과 학문을 토론하였고, 제자백가의 독창적 사상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주요 학파로는 유가, 묵가, 도가, 법가가 있었다.Ⅱ. 유가(儒家)의 성립과 발전유가는 춘추 말 공자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의 맹자와 순자에 의해 사상적 체계가 정립되었다. 한 때 진의 시황제에 의해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한의 무제 때 관학으로 인정되면서 동양사상의 주류로 발전하게 되었다.1. 공자의 사상공자의 중심사상으로는 인(仁)이 있다. 공자는 인의 가장 순수한 상태로서 어버이에 대한 ‘효(孝)‘와 윗사람에 대한 공경의 덕목인 ’제(悌)‘를 중요시하고, 이를 인간행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고 하여 ’충(忠)‘과 ’서(恕)‘를 강조했다. 이러한 인이 사회적,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예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과 ’예(禮)‘를 결합할 것을 주장했고, ’예‘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내적인 덕과 외적인 예절을 균형 있게 갖추어야 한다는 ’중용‘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자는 사회와 정치에 대해서도 강한 참여의식을 보여주었다.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정명론(正名論)을 주장하였다.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고,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2. 맹자의 사상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불행을 측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더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부정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타인에게 겸양을 베푸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인.의.예.지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측은지심은 인을 수행하는 출발점으로, 인이 정치에 실현되면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가 된다는 것이다. 즉, 군주는 왕도를 행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어긴다면 방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성혁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후세 왕조교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3. 순자의 사상맹자가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한 반면,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하여 후천적 노력을 받아야 비로소 선해질 수 있다고 하여 특히 교육을 강조했다. 중국 고대 유학자들 가운데 순자처럼 적극적인 인간관을 제창한 사람은 없다. 그는 인간의 알 수 있는 능력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가 말하는 예는 공자가 말하는 예처럼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는 보편적 강제규범이었다. 따라서 그는 강제규범의 근거로서 군주권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했고, 강제적, 제도적인 측면이 강한 그의 논리는 법가에 영향을 주었다.Ⅲ. 법가의 성립과 발전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신분제도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유지할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법가이다. 법가사상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변혁에 부응하여 현실을 똑바로 보고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들은 초기에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인재’라는 뜻의 ‘법술지사’라고 불렸고, 훗날 법가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1. 한비자 이전의 법가사상법가는 한비자에 의해 집대성되었지만, 그가 나오기 전에 세 갈래의 큰 학파가 있었다.첫째는 '법'을 강조한 상앙이고, 둘째는 '술'을 강조한 신불해이며, 셋째는 '세'를 강조한 신도이다. 상앙이 주장한 ‘법’은 백성들의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불해의 ‘술’은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이 그들의 행동과 일치하게 하는 기술로써, 신하들을 잘 조종해 군주의 자리를 더욱 굳게 하는 인사정책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신도의 ‘세’는 군주만이 가지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권세를 말한다.2. 한비자의 사상한비자는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였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하여 발전시켰다. 그는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계승하였고,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격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으로 엄격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하였고, 군주 고유의 권한으로 엄형주의를 강조한다. 또한 한비자는 ‘술치’와 ‘세치’를 함께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법과 술 그리고 세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하였다. 특히 술치는 관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군주 고유의 독단적인 권한을 강조했다. 법치는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이란 이기적이고 무질서한 사회에서 일정한 행동의 기준이며, 이는 군주가 마련한 강제규범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가 사상은 군주의 획일적 통치를 강조하였고, 이를 지키기 위해 우민정치와 사상의 통일이 강제되었다. 비판의 근거를 만들 수 있는 법 이외의 모든 지식은 철저히 탄압되었고, 백성들은 철저히 억눌렸다. 따라서 이러한 법가의 논리는 당시 군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결국 까다로운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착취하고 고통 속에 빠뜨리기도 하였다.Ⅳ. 유가와 법가의 비교유가의 역사관은 과거의 경험을 중시하여 고대의 권위 있는 성인을 내세워 자기들의 학설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법가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사회적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 이에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고대인들이 보다 순박하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덕이 더 많았음을 인정하였지만 그들이 본성적으로 선했다기보다는 물질적인 환경에 기인했다고 말한다.정치면에서 유가는 덕과 인의의 도덕 가치를 말한다. 따라서 인의 실천과 예에 입각한 이른바 덕치(德治)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법가는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법치(法治)를 내세웠다. 한비자가 유가에서 내세우는 ‘덕’, ‘인의’ 등의 의의와 작용을 무조건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한비자는 그 당시의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 유가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군주의 지위를 낮추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덕치 대신에 법치를 주장한 것이다.
    인문/어학| 2016.08.08| 3페이지| 1,000원| 조회(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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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서론Ⅱ. 본론1. 서얼에 대한 차대2. 서얼 허통운동의 배경3. 18·19세기의 서얼 허통운동Ⅲ. 결론Ⅰ. 서론서얼(庶孼)이란 양반 아버지와 양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庶子), 노비를 비롯한 천민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얼자(孼子)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서얼은 양반의 소생이었지만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해 적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인 편견과 함께 많은 제약을 받았다. 서얼은 양반 계층에 속하지 못하였으며 문과에 응시할 기회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신분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한 무과는 응시가 용이했지만, 이 경우에도 대부분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이 주어졌다. 이것은 유교의 적서에 대한 명분론과 귀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설명되었으나, 고려 시대나 중국의 당나라·명나라에서도 없던 차별이었다.Ⅱ. 본론1. 서얼에 대한 차대우리나라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한다. 최근 서얼에 대한 연구는 공통적으로 서얼이 별도의 신분임을 인정하면서 그 형성시기를 16세기로 잡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시대에도 적서의 문제가 존재했는데, 태종 15년(1415)에 제정된 서얼금고법은 서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양반사대부의 혈통도 아닌 일반 양인이 과거 응시가 가능하였다는 점을 볼 때, 이는 서얼에게만 부당하게 적용되는 차대 규정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서얼은 문·무과나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첩의 자손은 문무 양반관료의 등용시험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고 있다. 서얼금고법이 폐지되어 서얼의 과거응시가 가능하게 된 상황에서도 한품서용(限品敍用)의 제약이 따랐다. 한품서용(限品敍用)이란 서얼을 일정한 품계 이상으로 임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으로, 역시 아버지의 관직의 높낮이나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서얼이 등용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사실상 서얼은 관직에 등용되는 것이 힘들었고, 재능이 뛰어난 서얼들 또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 국가의 인재손실 또한 컸다. 또한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조선사회에 정착하면서 성리학적 신분질서와 함께 이념과 명분이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차별이 생겨나게 되었고, 양반과 상민, 남자와 여자 뿐 아니라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더욱더 심해지게 되었다.조선 사회에서는 양반이 첩을 두는 것이 관행으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서얼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얼 차별을 오히려 강화했다. 처음에 서얼들은 양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양인도 아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부계가 사족일지라도 모계 쪽의 어느 한 가닥이라도 사족이 아닌 혈통에 연결되어 있으면 모두 서얼에 포함되었고, 따라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서얼의 수가 늘어났다.16세기에 들어와 서얼들은 기술직 중인, 관청 서리, 지방 향리와 함께 신분적으로 중인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시에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기 때문에 '중서(中庶)'라고 불리기도 하였다.2. 서얼 허통운동의 배경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국왕과 일부 선견지명이 있는 양반사대부들은 서얼허통을 주장하였고, 서얼 자신들도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연산군 3년(1497)에는 서얼의 잡과허통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서얼의 문·무과 응시 불가능에 대해 불가능을 주장하면서 서얼을 허통하고 서얼인재를 등용하자는 건의는 계속되었다. 중종 때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서얼 차별의 시초를 『경국대전』이라 하고 서얼의 불행한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서얼들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을 제한하는 조치를 없애기 위한 서얼허통운동을 전개해 갔다. 명종 대 양인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의 손자가 과거를 보는 것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서얼허통운동은 계속되었고 선조 즉위년 진사 김사악과 그 외 서얼들이 문·무과 과거 응시를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당시 서얼 허통 반대론자들이 제시한 반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존비의 등급은 엄격해야 하고, 선왕의 법도는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서얼을 등용하면 명분이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서얼 차별의 근거로 활용되었다.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얼허통 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붕당정치로 인해 정치·경제·국방 등 모든 부분에서 혼란이 가중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와 군량미의 심각한 부족 현상에 직면해 있었다.따라서 신분상승이란 포상을 조건으로 모든 신분계층을 동원하였고, 서얼도 국가가 정한 규정에 따라 납속을 하거나 군공을 세우고 합법적으로 허통할 수 있었다. 혹은 전란으로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틈타 불법적으로 신분을 숨기거나 문서를 위조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방법으로 허통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란 극복을 위한 일시적인 정책이었고, 전세가 호전되자 양반사대부들은 전란 중 혼란이 가중된 사회적·신분적 질서를 다시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에 선조 29년(1596) 경에는 납속에 의한 허통이 중단되고, 이미 과거에 합격했었거나 관직에 진출한 서얼까지도 파직시켰다.서얼 허통은 인조반정 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1625년(인조 3) “허통사목(許通事目)”이 제정되어 양첩자는 손자부터, 천첩자는 증손대부터 허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외된 양첩자의 자식과 천첩자의 자식·손자는 수시로 실시된 납속책을 통해 허통할 수 있었다. 숙종 21년(1695)에 서얼이자 영남의 생원이었던 남극정을 비롯해 988인이 자신들의 현안문제 해결을 위해 상소하였다. 이들은 납속하지 못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한 것에 대해 부당성을 알리고 납속허통법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그 결과 1년 뒤 납속허통법이 폐지되었고, 서얼은 금고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서얼이 법적으로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 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3. 18·19세기의 서얼 허통운동18세기는 정치적으로 노론의 일당전제청치를 탕평으로 이끌었고, 경제적으로 이앙법과 견종법의 보급에 따른 농업생산력이 발달되었다. 이와 함께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로 생산이 증대되었고, 화폐가 널리 유통되어 상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근대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 문화와 학문적으로 실학의 영향으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중간계층의 신분상승 욕구가 충만했다. 이러한 시기에 서얼의 지위 또한 변화했고, 이들은 향촌지배기구에 참여하는 등 실질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을 펼쳤다.영조 대에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반포하여 서얼들이 청요직에도 진출할 기회를 열어 주었으며,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한다는 조치를 내리는 등 적극적으로 서얼 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취하였다. 영조가 통치한 시기에 많은 서얼들이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료로 진출하였다.영조의 서얼허통 정책은 정조대에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1777년(정조1) 정유절목(丁酉節目)을 제정하여 서얼이 나갈 수 있는 길을 넓혔다. 서얼들이 고위 일부 문무관직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제한을 없앤 것이다. 또한 정조는 1779년 최고의 학문 기관인 규장각에 능력 있는 서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 등이 등용되었고, 이들은 규장각의 핵심 요직인 검서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조대 서얼 출신 학자들은 조선 후기 북학 사상과 문화 운동의 주역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19세기에도 이어져 서얼 출신의 실학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되었다.일반적으로 19세기는 조선왕조의 동요기 내지 해체기로 인식되어 왔다. 이 시기에 세도정치와 왕권의 약화와 관료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지만 양반관료들은 개혁을 통한 문제해결에 소극적이었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얼들은 그들의 사회·경제적인 처우 개선을 위해 소통 운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아버지의 생전에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서얼들은 문과급제 후에도 모두 교서관으로만 분관하기 때문에 명현·고가와 사대부가의 후예이면서도 시골의 미천한 자들보다 하대 받고, 승적된 후에도 음서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매우 부당한 처사였다. 또한 순조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는 권력이 소수의 가문에 집중되어 관리 임용도 문벌위주로 이루어졌고, 서얼들의 관계 진출 역시 부진하였다. 이에 1823년(순조 23) 만여 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癸未節目)」이 제정되어 통청이 허용되었고, 또 서얼의 한품이 종2품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인문/어학| 2016.08.08| 4페이지| 1,0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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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경똥장수 서평 평가A+최고예요
    이 책은 20세기 초반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똥장수, 물장수 등 도시하층민들의 일상생활을 위생개혁과 환경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는 똥장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흔히 똥장수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일상적으로 생산되는 분뇨를 처리하는 것이 큰 과제였고,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도시 인프라의 미비로 인해 심각한 위생 문제에 직면했다. 똥장수들은 청대에 들어서 정식 직업군으로 정착했고, 자신들만의 관행을 확립해나갔다. 상수도나 분뇨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은 도시에서 똥장수의 존재는 그만큼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분도를 만들어 공공영업을 사유화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시정개혁에 저항하고 투쟁하기도 했다. 똥장수들은 시민들과 마찰을 겪었고, 국가가 위생과 환경문제에 초점을 두고 이를 개혁하려 했다. 가장 중요하지만 하찮은 일을 담당했던 그들은 도시하층민의 생활을 했다. 똥장수들의 사회적 지위와 일상생활 수준은 열악했고,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은 최소한의 복지혜택도 받지 못했다. 베이징 위생행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연세대 의대에서 의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이러한 똥장수들의 이야기를 통해 베이징의 도시환경, 위생시스템의 발전 과정을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한다.베이징의 똥장수는 황허의 범람과 전란을 피해 이 도시로 몰려든 산둥성 출신 이주민들이었다. 똥장수의 고향은 대부분 러링을 포함하여 산둥 서북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산둥 서부는 남북 운하의 요지여서 한때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산둥 운하가 단절되면서 서부경제는 극심하게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황허가 범람하여 산둥 서북부를 완전히 침식시켰고,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고 전란이 빈번했다. 빈번한 자연재해,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산둥성 서북 지역 사람들은 이주지로 베이징을 많이 택했고, 1911년 철로가 개통되면서 일상적인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부푼 마음을 갖고 베이징으로 이주정경제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여성과 아이들이 일을 해야만 했다. 상하이를 비롯한 대다수 도시 사회에서 농촌이주민들이 인력거꾼의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과 달리, 베이징 인력거꾼은 거의 도시 자체에서 공급되었다. 따라서 지방 출신들은 인력거꾼 시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또한 인력거꾼 시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던 반면 똥장수와 물장수는 그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입이 힘들었다.똥장수는 청대 이래로 산둥인들이 장악했다. 그들은 수매업과 마찬가지로 분뇨채취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업권을 설정하였고, 분도라는 분뇨채취 구역을 설정하여 임대, 양도, 매매 관행을 확립해 나갔다. 똥장수는 분뇨를 옮긴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운수업에 종사한다고 할 수 있었다. 분뇨를 시민을 상대로 거래하기 때문에 상업, 시민을 상대로 분뇨를 처리하기 때문에 서비스업에도 포함됐다. 똥장수 사회는 자본가인 동시에 분뇨창고 소유주인 분창주, 분뇨채취 구역을 소유하고 있는 분도주, 그리고 똥장수 노동자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분창주는 똥장수 사회에서 최대의 자본가이자 상인으로 똥장수 사회의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분도를 소유하지 못한 일반똥장수는 분창주와 분도주에 의해 생활하는 일종의 임대노동자였다. 분창주는 수거한 분뇨를 농촌에 비료로 되팔아 큰 이익을 남겼지만 똥장수 노동자는 임금체불 등에 시달렸다. 또한 베이징에 시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똥장수들을 일일이 통제했고 그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똥장수들은 제대로 월급을 받는 것이 힘들었고, 분창주는 임금체불이 빈번했다. 그들은 그 부족분을 일반 시민들에게 수고비의 명목으로 뜯어냈기 때문에 시민들과의 관계 또한 좋지 않았다. 똥장수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도시 구조의 특성상 시민들을 상대로 갈취할 수 있었다. 똥장수들은 업무시간을 제한받았고 집단숙소에서 생활했으며, 이들의 소득으로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가 어려웠다.베이징은 일찍부터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주목들은 단지 내성에만 분뇨처리를 위해 제한적 출입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똥장수 사회 내부에서는 내성의 분도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권위를 가졌다. 똥장수 사회에서는 똥장수들이 분창주와 계약을 맺는 것을 도와주고, 분창주들이 회계관리와 각종 계약을 담당해주는 대리인인 똥장수 브로커도 존재했다.베이징은 명청대 이후로 계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했고, 이로 인한 만성적인 도시문제가 발생했다. 상하수도 설비의 부재, 쓰레기 처리문제가 심각했고 분뇨처리 문제 등 환경 인프라의 미비로 도시환경이 위협받았다. 또한 물장수와 똥장수들에 의해 공공영역이 사유화되었다. 특정 똥장수가 분도를 독점하여 시민에게 수고비를 요구했고, 도시민은 분뇨 냄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명청 이래로 도시화와 인구집중이 심화되고 교통이 발달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장비, 인력, 재정 등은 매우 부족했다. 따라서 시정부는 환경 인프라의 구축을 위해 국가개입을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도시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위생개혁과 도시환경을 개선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20세기 전반에 걸쳐 개혁의 주요한 과제였다.근대에 들어 신해혁명으로 도시공간이 변화했고, 천안문 광장이 근대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광장은 집회와 축제가 열리는 대중적 참여공간이었지만 똥장수들은 개인자격으로만 광장에 진입할 수 있었을 뿐, 직업집단으로서 광장의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반면 서민들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민중문화를 대표하는 톈차오 광장이 존재했다. 톈차오 광장은 단순한 시장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상업과 오락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고, 베이징의 하층민들의 휴식과 기분전환의 장소였다.중국의 다른 근대 도시와 마찬가지로 베이징도 이주민이 도시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축 중 하나였다. 대표적으로 명초 이래로 동향의 과거응시자나 상공업자가 수도나 성도에 머물 때 그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사설 기구였던 회관이 있었다. 명 중기 이후 신사 및 상공업자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직업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동향, 동업조직을 결성부가 성립되면서 시정부 산하에 직속부서를 설치하여 베이징의 도시관리를 체계화했고, 이때부터 시정부의 도시 관리가 본격화되었다. 똥장수의 횡포로 고통받고 있던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시정부는 분뇨처리업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정부 또한 도시 인프라 구축을 위해 도시환경과 위생에 장애가 되었던 분뇨처리업을 시정개혁의 주요대상으로 삼았지만 약간의 성과가 있을 뿐이었다.제 1차 분뇨처리업 개혁은 사유화된 분도를 시정부가 회수한 후 위생국이 이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똥장수들은 분도에 대한 시정부의 접수계획에 반대의사를 직접 표출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들은 시정부의 개혁을 지지하여 위생개혁을 통해 똥장수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길 바랐지만, 시민들의 일상적인 분노를 시정부가 처리하는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 과정에서 똥장수들의 동향인인 쑹저위안 총사령이 분뇨처리업을 관영화하는 시정부의 논의를 취소했다. 똥장수들의 시위로 베이핑 시장이 사임했고, 그들은 집단행동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어 이후 더욱 조직적이고 사회적 이슈가 된 대규모 환경폭동으로 발전했다.똥장수들은 2차 개혁이 발표된 직후에도 시위와 폭동을 전개했고, 시정부에 적극 협조하는 분창주들을 타도 대상으로 지목했다. 2차 개혁에서는 분뇨처리업자에게 개혁을 맡겼지만 시정부가 이를 실질적으로 관리, 감독했고 일정한 성과를 이끌어냈다.환경위생 종사자들은 공공의식과 사리추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고 시정부의 개혁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도시화의 진전으로 인해 환경위생의 개혁에 대한 요구는 높아졌지만, 환경위생 종사자 중 분창주와 수매업자 등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자들은 개혁을 지지하기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시정부의 지원 가운데 상수도가 보급되었지만 근대적 급수체계와 전통적 인력급수체계가 공존했고 물장수들의 상황도 어려웠다. 수매업에 대한 위생개혁이 가속회될수록 기득권이 약회될 것을 우려한 물장수들의 반발도 거세지게 되었다. 그러나 물장수들은 우물의 절반이상행정 시스템을 활용하여 이를 강화하려 했다. 대대적인 전염병 예방접종을 시행했고, 콜레라에 대한 방역조치를 실시하였지만 형식적 조치였을 뿐 전문성 부족과 예산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점령당국은 민간조직인 신민회를 방역활동에 동원하였다. 그들은 의료위생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친일매국활동으로 인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한 의료서비스가 도심에 집중되어 교구에서 의료서비스를 받기 어려웠고, 똥장수의 생활비로는 병원에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점령당국은 새로운 도시계획을 모색했고, 기존 베이징의 도시경관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신도시를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위계화하려 했다. 신도시가 생기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었지만, 신식 상하수도 설비가 갖추어진다는 것은 물장수들이 일자리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똥장수들은 신도시가 건설되더라도 적지 않은 분뇨가 생산될 것이므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1940년대에는 베이징의 물가가 폭등하고 인구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러나 떠돌이 똥장수의 증가로 개별 똥장수의 수거량은 늘어나지 않았고, 시정부의 간섭 등으로 똥장수의 생활수준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똥장수들은 여전히 일상생활과 의료생활 등의 복지와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똥장수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직업병은 기생충병과 하지정맥류 등이었다. 또한 전쟁 이후 일본점령기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물가폭등으로 인한 생계곤란이 이어졌고, 똥장수들은 시정개혁에 대한 기대보다는 의료와 복지 등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개혁안이 비준되어 정식 똥장수들이 활동을 보장받았고, 분창법이 제정되어 신규 분창주의 진입을 막았다.1951년 인민정부는 대대적인 분도제도 개혁에 관한 6개조를 포고했다. 이에는 일체의 분도 및 화장실을 위생공정국이 관리하도록 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1954년에 이르러서야 분뇨업은 관영화되었다.신중국 성립 이후 일본점령기와 국공내전 시기 일본이나 국민당 우파에 협력했던 반동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특별조사았다.
    독후감/창작| 2016.08.08| 6페이지| 1,000원| 조회(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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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업적 평가A좋아요
    Ⅰ. 서론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그중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박지원은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 중상주의를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있던 변화와 격동의 시대였다. 보수적인 양반지배층들은 관념적인 성리학에 매달려 당시 봉건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민중들의 실제생활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조선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민족 주체성을 자각할 것과 함께 우리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당시에 조선이 처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이용후생을 도모하고자 하였다.Ⅱ. 본론1. 생애조선후기의 뛰어난 문인이자 실학파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1737~1805)은 아버지 사유와 어머니 함평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학문적으로 노론 낙론계에 속했는데, 이후 박지원은 이러한 학문적 기반위에 낙론의 심성론을 발전적으로 해석하여 북학론의 사상적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 장가들어서 장인으로부터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이양천에게서 사마천의 『사기』등을 배웠다.1765년(영조 41)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로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 백탑 근처로 이사하게 되어 박제가 · 유득공 · 이서구 · 서상수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이 교유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홍대용 · 이덕무 · 정철조 등과도 이용후생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다. 특히 30세 때는 이전 해(1765)에 연행하고 돌아온 홍대용과 교유하면서 청나라의 실정과 국제 정세, 그리고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 학문에 접함으로써 북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1780년(정조 4)에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우리나라에서 이용후생 할 수 있는 시책을 내놓았는데, 이 시책을 담은 책이 바로 『열하일기』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보고 느낀 선진 중국의 산업 · 경제 등을 우리나라에 소개함으로써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박지원은 여기에서 중국의 산천과 기후와 남녀 풍속, 제도, 문물 등과 다리, 길, 말 등의 우수성을 묘사하고 우리나라가 이러한 것들을 배워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그가 남긴 많은 저서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북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한 문명을 받아들이고 청나라를 통해 서구문명을 인식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신분제 혁파 등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 국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지원은 서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천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박지원은 1805년(순조 5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2. 사상과 업적1) 사상의 특징사상적인 면에서 박지원은 북학파의 선두주자였다. 북학파는 17, 18세기 사상계의 핵심부에 위치했던 노론 성리학파 중 낙론 계통을 잇는 젊은 학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낙론의 인물성동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북학자들은 종래 청을 오랑캐로 간주하여 물의 범주에 넣고 차별적으로 인식하던 태도를 비판하고,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는 전제 위에 조선과 청을 동격화 시키면서 청의 문물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연암은 김석문의 삼환부공설과 담헌의 지전설을 수용하여 종래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 점성적인 우주관을 타파하였는데,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 종합적 극복책이 바로 북학론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 주체성에 대해 자각하여 우리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중시하였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평양과 패수의 위치 문제를 중심으로 조선의 강역, 한사군의 위치 등에 관한 종래의 설들을 반박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지닌 민족의식의 표명임은 물론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고자 한 것이다.2) 『열하일기』와 문학사상박지원의 저작은 『연암집』 17권으로 전하는데, 대표작 『열하일기』는 11~15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 때 다른 작품 또한 많이 저술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 소설과의 밀접한 관련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주목받은 작품은 모두 12편이다. 소위 구전을 비롯하여, 『열하일기』의 「관내정사」 속에 있는 「호질」과 「옥갑야화」속에 있는 「허생전」, 그리고 「연상각선본」에 포함되어 있는 「열녀함양박씨전」등이 있다.그의 저작 중에서도 열하일기는 그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열하일기』의 이본으로는 신활자본 2종과 필사본 9종이 있다. 『열하일기』가 지닌 체제의 우수성과 함께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내용 등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열하일기』는 탈고 후 100년을 훨씬 넘긴 1901년에야 비로소 읽혀지기에 이른다. 활자본 중에서는 1932년에 박영철이 간행한 판본이 가장 선본이자 대표적인 이본으로 지목되고 있다.많은 연행록 중에서도 『열하일기』는 그 사상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고, 기사체와 편년체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요 여정은 날짜별로 서술하여 여행의 경위를 알 수 있도록 하였고, 세부적 묘사나 자기의 주장을 펼칠 때에는 한문 문제의 격식을 활용하여 기사체의 이점 또한 활용하였다. 또한 『열하일기』에서는 박지원이 여행이라는 체험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이를 우리 현실과 관련지어 인식하는 방법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다. 연행을 통해서 본 청나라의 실상과 시대의 흐름을 통찰했던 북학파들과의 사상적·문학적 교류와 토론을 통해 시대 모순과 문제점들의 근본 원인을 꿰뚫어 보고 그 해결방안을 심각하게 모색하였다.그는 북학론과 관련하여 중국과의 적극적인 통상론을 주장하여 벽돌 사용, 수레 통용, 마정개혁론을 펼쳤는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북벌정신을 실현하는 셈이다. 북벌은 부국강병으로 실력을 쌓는 것에서 의미가 있는데, 생산성과 경제력은 국방력을 높이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3) 이용후생론박지원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는데,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의 실학자들은 당시 일반 양반 계층이 생활 교양의 연장으로서 문학을 했던 것과는 달리, 뚜렷한 창작의식을 갖고 실학적인 현실인식의 바탕 위에 사회 개혁의 의지를 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박지원의 소설은 이들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 실학자들의 문학 중 실학사상을 성공적으로 작품화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논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용후생할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새로운 방법과 묘한 방법이 있다면, 아무리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사대부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해야 한다”고 하여, 『열하일기』와 『과농소초』에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배와 수레의 이용과 유통을 강조하여 북학사상의 핵심인 상공업의 활성화에 대해 주장하였고, 우리나라의 생산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상공업의 부진에서 찾기도 하였다.박지원의 이용후생론은 상공업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업의 개선에도 그런데 그는 이전의 실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토지의 분배’ 문제보다는 ‘농업 기술의 혁신’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또한 그는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1)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정덕 뒤에 이용후생을 해야 한다는 기존의 방법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경제 문제에서는 화폐 정책ㆍ중상 정책 등을 비롯하여 토지 개혁론까지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는 한 미래의 비전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당시 문학의 흐름인 복고풍을 벗어 던지고 현실의 문학을 했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 관념에서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의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인문/어학| 2016.08.08| 4페이지| 1,000원| 조회(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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