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즈니스 입문 (김은영 저) 총 요약2017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한국 영화 산업은 2010년대 들어 괄목할 성장을 이루었다. 영화 시장 규모가 2조 3271억원에 육박한 2017년만 보아도 과거 1조원대도 되지 못 했던 2000년대에 비해 ‘르네상스’ 라 부를만 한 시기가 다시 도래했다. 관객수 역시 2013년 이후로 2억 1천명 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1인당 연간 4.25편에 이르는 숫자다. 가히 ‘좋은 시절’ 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체 상영관 수는 2017년 현재 2766개로 더 늘어날 수 없는 큰 규모가 되었다. 이미 내수를 통한 수익 창출은 최고점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출액은 전체 매출이 1300억 규모로 5% 내외를 차지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지표들이 있으나, 한국 영화는 극장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디오 테이프 시대의 2차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인터넷 스트리밍 산업이 대두되어 조금씩 그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해외 수출을 위한 기획과 스트리밍 산업에 대한 대응이 필요해지는 시점이다.영화의 상품적/산업적 속성영화는 통상적으로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로 그 구분을 한다. 이는 산업적인 기준인가? 아니면 그 영화의 ‘장르적’ 기준인가? 물론 산업적 기준이다. 상업영화는 일종의 상품적 가치를 지닌 채 탄생하여 그 수익을 기대하며 만들어진다. 독립영화는 자본에서 완전히 독립이 되지는 않는다. 각종 지원제도 등을 통해 독립영화의 제작비를 조달하여 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제작이 된다. 여기서 수익 여부는 해당 영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에 비중을 덜 가진다.그렇다면 영화는 ‘예술’ 인가? 물론이다. 영화 산업은 ‘예술 산업’ 혹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산업이다. 예술의 정의는 차치하고라도, 영화는 태생부터 ‘산업적’ 이었다. 거기에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영화의 태생적인 산업적 특징을 더 강화했다. 이에 저항하여 ‘예술 영화’ 의 기조를 견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도 보인다.한국영화 르네상스앞서 2017년 결산을 하면서 이미 이 시대는 한국영화가 ‘다시’ 맞이한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 이유 역시 자명하다. 역사상 최대의 산업 규모와 스크린수, 그리고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 등은 지금을 ‘다시’ 르네상스라 부르기에 충분하다.그렇다면 원래 르네상스였던 시기는 언제인가? 한국은 1960년대 이미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가 5회 이상을 웃돌던 시기가 있었다. TV도 없던 시기, 한국의 관객들은 모두 극장으로 향해 오락을 즐겼으며, 그런 분위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한국에서 극장이란 주로 데이트코스, 가족 나들이의 공간으로 인식된다.이런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한 한국 영화 산업에서 영화를 제작하는데에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조달이 되고 또 어떻게 운용이 되고 있는가?한국의 영화 산업은 기본적으로 제작사가 영화를 기획한 뒤 그 기획한 영화의 시나리오와 함께 투자/배급사를 찾아 계약을 하고, 그 뒤 개봉관을 잡아 관객을 만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제작사가 모든 제작비를 대는 아주 희귀한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은 투자사와 배급사가 각각 일정 부분을 투자를 한 뒤 개봉 후 수익을 나눠가진다.한국의 투자/배급사 중 ‘메인 투자/배급사’ 로 분류되는 기업은 CJ E&M, 롯데, 쇼박스 등이 있다. 그 외에 NEW, 20세기폭스 등의 다양한 국내외 투자/배급사가 한국 영화에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회사들이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비의 큰 부분을 메인 투자사가 투자를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공동투자자나 부분투자자를 섭외하여 나머지를 충당한다. 또한 메인 투자사는 25% 이상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배급권 등의 지적재산권을 확보한다. 이들은 영화의 오프닝에 ‘제공’ 이라는 크레딧을 받는다.부분투자자는 재무적투자자로서 다양한 창투사와 금융사들이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지적재산권 보다는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며 투자를 하며, ‘공동 제공’ 크레딧을 받는다.그 외에도 한으로 감독과 배우를 섭외하거나, 그 감독이 쓴 시나리오라면 바로 배우를 섭외한다. 하지만 아무 시나리오나 감독 혹은 배우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나리오만이 생명을 얻는다. 좋은 시나리오를 위해 기존 저작물을 찾아 계약을 하기도 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창작을 하기도 한다. 혹은 이미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구매하기도 한다. 이러한 좋은 시나리오의 기준은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스토리’ 이다. 프로듀서는 이러한 좋은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저작권과 계약이렇게 완성된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저작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저작물의 영화화 권리는 또 누구에게 있는가?원작이 있는 경우 영화화허락계약 혹은 영화판권계약을 통해 그 원작의 권리를 일정 기간 확보한다.오리지널의 경우는 창작한 작가와 각본 계약서를 체결한다. 여기에는 진술과 보증이 계약서 조항에 들어가며, 이는 이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순수한 작가의 창작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실화의 영화화는 라이프 스토리 권리를 확보한다. 명예훼손과 사생활침해에 따른 소송을 예방하고 실화에 대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 되도록 확보하는 것이 좋다. 이 계약으로 프로듀서는 ‘스토리를 허구적으로 변형할 권리’ 를 확보한다.저작권 계약시에 작가가 혼자 시나리오를 썼는지, 아니면 프로듀서와 공동 개발을 한 것인지 여부에 따라 해당 시나리오의 권리가 달라진다. 혼자 썼다면 작가가 계약을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공동 개발이라며 작가 단독으로 혹은 프로듀서 단독으로 해당 저작물의 계약을 할 수 없다. 저작권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각본 계약서 체결은 필수다.또한 영화와 관련한 저작권에는 최종편집권과 음악저작권도 있다. 최종편집권은 프로듀서가 가지지만 한국 영화는 감독에게 재량을 주는 편이다. 그러나 계약서 상, 편집에 이견 발생 시에는 프로듀서가 결정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독립영화의 경우는 제작 여건이 어토리를 즐기고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보 인지의 80%를 차지하는 감각은 ‘시각’ 이다. 이 ‘시각’ 과 ‘스토리’ 가 결합되어, 인간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매체 중 하나가 바로 영화다. 단순이 시각 정보를 인지하는 것을 뛰어 넘는, ‘보는 것 그 이상’ 의 경험을 제공하는 장르인 영화는 관객이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이유 그 자체이다.이런 관객의 심리를 좀 더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 분류를 나누었다. 먼저 관람의 태도에 따라 첫째로 Active, 좀 더 능동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영화관 그 자체를 즐기는 부류가 있다. 둘째로 Passive, 일정한 기간을 두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부류. 셋째는 Outsider이다. 말 그대로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 부류다.그리고 관람 취향에 따른 분류가 있다. 먼저 잡식성인 멧돼지 취향은 말 그대로 개봉 영화는 무엇이든 보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다음은 가시나무새로 감성적인 영화를 선호하는 부류다. 그 다음은 숭어인데 주로 블록버스터를 보기 위해, 숭어처럼 몰려다니는 부류를 뜻한다. 그리고 오리와 거북이가 있다. 오리는 거북이 보다는 조금 더 영화관에 가는 편이지만, 그 걸음이 느려서 입소문이 다 난 후에 가는 부류이며, 거북이는 한국으로 따지면 천만 영화는 돼야 영화관에 가는 부류다.이런 식으로 관객을 분류화 하는 것은 영화를 제작할 때 그 타겟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며, 또는 이미 만들어진 영화의 마케팅 대상을 더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영화 마케팅과 극장 배급이제 관객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시장에 내놓을 것인지 알아야 한다.영화 마케팅은 기본적으로 ‘감정’ 을 판매하는 시장 활동이다. 마케팅의 4가지 요소인 ‘4P’ 는 Product(제품), Price(가격), Promotion(홍보), Place(매장) 에 따라, 영화 시장의 상품인 어떤 작품을 기반으로 시장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SWO 개봉일, 상영 기간 등을 협상한다. 영화의 상태와 마케팅 전략 등을 근거로 말이다.개봉일이 확정 된다면, 최소 8-9주 전부터 마케팅을 시작한다. 예고편과 포스터 등을 공개하고, 배우들의 사전 인터뷰, 예능 출연 등의 방법을 동원해 해당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관람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이 이루어진다.사전 여론이 좋아진다면 극장은 상영 전에 개봉관을 늘리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다. 마케팅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또는 최근 개봉한 이나 처럼 입소문을 통해 점점 상영관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물론 영화가 좋기 때문이지만, 마케팅에게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개봉이 된 후, 영화는 관객과 만나는 첫번째 윈도우인 극장을 통해 ‘수익’ 을 발생시킨다. 한국은 보통 45:55, 혹은 4:6의 비율로 투자배급사와 극장이 그 수익을 나눠 가진다. 이렇게 따져봤을 때, 보통 제작사가 가져가게 되는 금액은 1인 당 3000원 정도다. 이렇게 되면, 100만 관객 당 30억의 매출을 계산할 수 있다.이 ‘부율’ 은 아직까지도 그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상승한 티켓 값에 비해, 더 많이 오른 제작비 등으로 인해 이 비율을 조금 더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영화의 흥행은 누구의 덕분일까. 영화인가 아니면 극장인가.어쨌건, 상영 기간이 끝나고 나면, 영화는 이제 후속 윈도우를 만난다.영화와 기술, 그리고 미래넷플릭스가 대세인 시대다. OTT(Over The Top) 의 등장으로 영화 산업은 그 근간에서부터 요동치고 있다.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첫번째 공간인 극장은 이제 더는 ‘첫번째’ 의 위치를 독점하지 못 한다.과거 비디오가 안방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 비해 영화는 ‘2차 시장’ 에서 현재 큰 수익을 내지 못 하는 추세다. 특히 한국은 DVD산업의 추락 이후 ‘2차 시장’ 은 거의 없다시피한 추세다. 하지만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와 IPTV 서비스 등의 등장으로 점점 그 규모는 늘어나고 있으며, 와 의 경우 대표적으로 2차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싶다.
미하엘 하네케 – 플랑세캉스의 미학 를 중심으로미하엘 하네케의 2000년 작 는 롱테이크 혹은 플랑세캉스로 불리는 연출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역시 많이 볼 수 있는 이 표현 방식은 단지 적은 컷으로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 외에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감독이 프레임 안에 더욱 많은 정보들을 넣어두고, 감독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시간을 들여 보여주고, 그를 통해 관객과 더 지적인 수준의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의 경우, 프랑스 사회가 가진 복잡함, 다민족국가이면서 그 구성원 간의 소통의 부재 그리고 그로인해 발생하는 일상적인 폭력의 순간들까지 포착하기 위해 하네케 감독은 플랑세캉스를 선택했다. 인물 간의 간격, 그리고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간격, 더불어 관객과 영화의 간격까지도 고려한 세밀한 설계가 필요한 이 연출법은 하네케 이전에 이미 오손 웰스, 타르코프스키 등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구현해왔으며, 그 기원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 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키노-아이키노-아이를 분석한 들뢰즈의 관점에 따르면, 카메라의 눈은 순수하게 인간 외적인 눈에 의한 관점이며, 그 눈은 사물들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보는 것’ 은 ‘대상의 빛이 관객에게 도달’ 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지각과 이해 능력을 넘어선 ‘영화적 지각과 이해’ 를 제시한다. 하네케의 영화 에는 이 영화가 키노-아이의 계승자라는 것을 화면 내에서 즉물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조르쥬의 지하철 씬이 바로 그것인데, 종군기자인 조르쥬는 도시 보다 더 간결한 전쟁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등 파리의 다양함 혹은 지나친 복잡성에 적응하지 못 하는 사람이다. 그의 내레이션, 아마도 안느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으로 보이는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은 조르쥬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전쟁터의 사진들이 나열된다. 그 장면들 외에 조르쥬가 어떻게 세상을 들여다 보는지를 추측하게 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면 바로 지하철에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자리에 앉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그의 목에 걸린 카메라의 시선은 고정이 된 채, 조르쥬의 앞에 앉은 여성, 그리고 조르쥬의 시선을 길게 보여준다. 조르쥬 본인도 자신의 카메라가 어떻게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는 지 느끼면서 렌즈를 가려보기도 하지만, 결국 앞에 앉은 여자는 일어나 가버린다. 뒤이어 앉은 여성 역시 조르쥬의 카메라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조르쥬는 이 사물의 눈이 가진 힘에 항복 선언을 하고 자신이 일어나 버린다. 이 장면은 파리 지하철에 내재된 일상적 폭력을 카메라와 조르쥬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그리고 이 장면은 조르쥬의 연인 안느가 지하철에서 당하게 되는 폭력을 비춘 장면에서 재소환이 된다. 아랍인에게 희롱을 당하고 침까지 맞는 성폭력을 당하는 안느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남성 외에 다른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 못 한다. 심지어 그녀가 희롱을 당하는 순간에 옆 좌석 손님들은 웃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지나고 안느를 괴롭히던 아랍인 남성이 나간 뒤, 승객들을 놀래키는 소리를 지른 후 웃으며 떠날 때, 객실 안에 있던 모두가 들썩인다. 그 폭력의 순간을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절묘한 장면이다.이 두 가지 장면에서 카메라는 거의 지하철 손잡이 봉에 붙은 것처럼 지하철 객실 전체를 보여주며 버티고 있으며, 심지어 객실 바깥 마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안의 공기와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며 왜곡 없이 보여주는 ‘롱테이크’ 혹은 ‘플랑세캉스’ 방식은 이 모든 상황이 단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현재 진행 중인 상황임을 관객이 인지할 시간을 준다. 실제 지하철에서 진행한 장면들은, 단지 장면 내 주요 등장인물인 안느나 조르쥬의 표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객실에 탄 사람들의 표정이나 고개의 움직임 등을 시간을 들여 보여줌으로써 그 상황을 관객이 자신의 현실 속에서 동일시 시키도록 한다. 지극히 객관화 된 카메라의 시선 덕분에 관객은 그 상황에 ‘몰입’ 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을 거는 화면과 대화를 하고 그것을 통한 사유, 바로 진실로 접근해가는 사유의 시간을 가진다. 이것은 단순하게 한 샷이 시간이 길어서가 아닌, 관객과 영화 간에 발생한 간격, 그리고 관객이 그 상황과 동일시 할 수 있도록 설계 된 이야기 내 인물 간의 간격 등으로 인해 가능해진다.간격 의 모든 장면들은 단지 한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인 수화 장면이 지나고 나오는, 조르쥬의 동생 쟝을 따라가는 약 8분 30초 간의 롱테이크 (03:37 – 12:07) 를 포함하여 영화 내내 각 장면이 각각의 ‘간격’을 의미한다. 그 간격은 사회적 간격이다. 가출을 한 쟝, 그리고 노숙자 마리아를 모욕한 쟝에게 덤비는 아마두 사이에 벌어진 일은 프랑스 사회가 가진 많은 적폐를 한 테이크에 담아 보여준다. 노숙자의 삶과 버스킹하는 뮤지션이 한 거리에 있고, 가출을 한 백인 소년 쟝은 노숙자에게 쓰레기를 버린다. 그리고 노숙자에게 사과하라며 쟝을 끌고 가는 아마두는 흑인이다. 아마두가 쟝을 붙잡은 이유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이었지만,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길거리의 많은 백인, 심지어 백인인 경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도망가던 노숙자 마리아 역시 경찰에 붙잡히고, 그 길로 추방을 당한다.장면들 속의 ‘사회적 간격’ 은 각 장면 마다 삽입된 컷 아웃된 암전으로 상징화 되어 영화 전체의 리듬을 형성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 영화 전체는 각 장면들이 충돌하며 의미를 만드는 몽타주인 것이다. 샷과 샷 간의 간격은 전후의 장면이 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면서 또한 영화를 모두 보았을 때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퍼즐임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간격은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거리로도 상징화 된다. 인물의 클로즈업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으며, 카메라의 움직임은 각 장면의 주인공이 걷는 길을 따라가며 그가 겪는 주변의 일들을 담아내는 역할을 한다.이러한 ‘간격’ 을 통한 몽타주는 마지막에 북을 치는 아마두와 학생들이 나오는 장면 이후 나열 된 마지막 세 개의 장면들에서 확장이 된다. 마리아는 처음 자신이 모욕을 당하고 추방까지 당하게 되었던 장소를 지나, 자신이 구걸을 할 구역을 찾는다. 하지만 그 곳에서 마저 쫓겨나게 되며 다시 길거리를 헤매인다. 안느는 지하철에서 나와 다른 곳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를 지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조르쥬는 안느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지 못 한 채, 화장품도 사들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 사회 내에서 도덕적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부당한 일을 당하는 아마두에서부터, 허상을 쫓아 불법체류를 하는 마리아,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지만 지하철에서는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안느. 안느가 겪는 문제들을 자신이 보지 못 했다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고, 결국 오늘도 안느의 일을 알지 못 한 채 떠나는 조르쥬. 이 몽타주는 단지 이 상황들의 열거가 아닌, 그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사회에 살아가고 있고 그것이 단지 영화가 아닌 현실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의미를 영화 안에서 밖으로 확장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관객은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 진실은 수미상관으로 배치 된 마지막 수화 장면이 지난 뒤 관객이 객석을 떠나며 마주하게 될 현실에서 관객이 각자 찾게 될 것이다.하네케의 영화는, “진리에 봉사하는, 혹은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1초에 24번의 거짓말이다” 라는 하네케 자신의 말처럼 많은 꾸며낸 이야기들의 조각들을 보여주고, 그 조각들이 모두 맞춰졌을 때는 그것이 이 현대 사회에 펼쳐진 진실임을 깨닫게 한다. 영화의 기본적인 속성은 ‘꾸며내는’ 일에 있으며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이 꾸며낸 것들을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또한 영화의 숙명일 것이다. 특히 는 부제인 “몇가지 여행에 대한 불완전한 이야기” 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모든 불완전해 보이는 화면 위의 진실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현재진행형’ 임을 깨닫게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선택된 플랑세캉스는 진실의 철저한 반영으로써의 거울 같은 화면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표현형식이다.
제2부 특수성 : 영화들8. 피부와 밀짚 : 파스칼 보니체르요약문1. 비주류성에 대한 동의를 구함 (259p)파스칼 보니체르는 서두에서 현대 영화의 흥행기간의 단기적인 면을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빌보드’ 에 올라 있는 히치콕이 영화의 흥행성을 찬양하며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듯이 보인’ 다고 말한다. 이 부분이 처음엔 비아냥으로 느껴졌으나, 그 다음 문장을 보면 전혀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는 주로 로 소개되고 있는)를 들며 히치콕의 비주류성-한 두 작품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하다는 것-에 대해 ‘꾸밈없이 선언’하는 것으로 첫 문장이 히치콕에 대한 찬양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2. 방어적 표층 (260p – 262p)첫째로 의문이 드는 것은 ‘표층’ 이라는 단어의 용법이다.“만일 지난 20년이 지난 이후에, 즉 히치콕에 대한 트뤼포의 고전적 연구 – 영화에 대한 진정한 시학인 – 의 출판 (요약자 주 : 이것은 ‘히치콕 트뤼포’ 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래로 오랫동안 거부되어온 그의 영화들의 보편성이 마침내 인정되었다면 그것은 관객 대중이 그 영화들의 비주류적 지위가 순수한 형이상학의 방어적 표층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60p)”지극히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주류성’ 은 ‘오락 이상의 것을 하는 척하는 것’ 인지가 매우 모호하지만, 히치콕의 영화가 가지는, 순수하게 ‘이미지’ 로 구성된, 영화만의 원형적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비주류성’ 의 범주에 넣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보니체르 자신도 작가주의적인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면 ‘우리랑 동종’ 이라는 것을 심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그리고 이에 대해 부연하려고, 다음 문단에서 히치콕의 영화가 가지는 특징을 ‘눈속임 그림 장르’ 에 빗댄다. 그리고 그 특징은, 히치콕에 대한 흔한 오해들-그는 공포영화 감독이라는 주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Memeto Mori’ 인 ‘왜상적 해골’ 의 ‘출몰’ 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가장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에서 나오는 해골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보니체르는 가 의 ‘섬세한 선조 세공’ 이며 는 에서 나오는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모티브가 된 것이라고 말하며 두 영화의 선형적인 비교를 시도한다.“의 어머니와 아들 간의 음성적 연대는 겉보기에는 정상적인 모성적 사랑과 자식으로서의 효성의 결백한 표현이며 또한 납치되어 생명이 위험한 한 소년의 유일한 안전선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들에게 들어와 그를 분열시키고 살인적인 방식으로 사로잡는 에 비추어 우리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미국인 가정의 정상성 조차도 미약하게 동요함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261p)이 문단 다음에, 우리는 ‘거울’ 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데, 당연하게도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 의 그 ‘거울’ 임을 알 수 있다.“여행자 커플과 스파이 커플인 두 미국인 커플은 분명히 짝패들이다. 한 커플에서 다른 커플로 넘어감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그 아이가 거울의 후면으로부터 넘어오는 것과도 같다.” (262p)도입부 시퀀스를 설명하며 그것이 마치 ‘거울의 후면’ 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퀀스의 내러티브 구조를 마치 아이가 ‘에고’ 형성 단계에서 넘어오며 ‘오인된 자아’ 를 형성하게 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3. 거울 놀이 (262p – 263p)보니체르는 본격적으로 가 ‘거울’ 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모든 것은 마치 각각의 배역이 그 또는 그녀 자신의 반영을, 보이지 않는 표면의 다른 면에서, 알아볼 수 없는 섬득하고도 괴물 같은 형태로 흘깃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발생한다. 이러한 규칙의 유일한 예외는 그 아이이다. 그 아이는 드라마에서 관건이 되며 따라서 반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262p)그러면서 루이스 베르나르의 살인 시퀀스가 하나의 ‘악몽’ 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며 이 영화를 ‘거울’ 에 비유했던 주장을 부연한다.4. 실수들로 이루어진 코메디 (263p – 264p)여기서는 두 커플이 마주 보는 시퀀스와 ‘채플’ 장면을 예로 이것이 ‘순수한 채워넣기[불필요한 삽입어구]’ 이며 ‘실수들로 이루어진 코메디’ 라며 ‘얼굴들의 교란적인 재중복을 이해할 만한 일로 만드는 기능을 할 뿐’ 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거울’ 구조라는 보니체르의 주장은 한층 더 부연해준다.“…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른 커플의 여자와 등을 맞대로 있다는 의미에서 잘못된 자리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하지만… (중략)…도리스 데이와 자리를 바꾸게 함으로써 남자와 등을 맞대게 된다…. (중략) 두 커플은 이내 자신들이 마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263p)“제임스 스튜어트의 실수가 – 점화번호부 때문에 우연의 일치로 강화된 혼동이 생기느라고 그가 교회Chapel를 채플씨로 오해하는 것이 – 공통의 이름을 고유의 proper 이름으로, 건물을 사람으로 변현시키는 문자들의 상상적인 이중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264p)5.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264p – 266p)이런 구조는 역시 ‘실수’ 를 매개로 이어져서 괴상한 플롯 속에서 ‘이중적 의미를 가진 장면’ 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며 암브로즈 채플 미행 장면 등을 예로 든다.“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두 명의 암브로즈 채플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고 나서 박제사의 의심스런 태도 – 그를 미심쩍게 보게 했던 – 가 단지 박제사 자신이 제임스 스튜어트의 행동을 굉장히 이상하다고 봤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일 뿐임을, 현실에서 그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장인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제임스 스튜어트와 관객이 그에게서 본 것은 그가 제임스 스튜어트에게서 보았던 것 – 즉 미스테리적이고 괴상한 플롯 속에 함축된 섬뜩한 존재 – 이었다.” (265p)이 부분은 관객과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이 보는 대상이 보는 것이 서로 ‘거울’ 과 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로 보인다. 거기에 부연하여 미술적인 부분 중 박제된 동물의, 아직은 새까지 가진 않았지만 야생성을 갖고 있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고, 히치콕의 징환이자, ‘야생이지만 동시해 무해한’ 의미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6. 장갑의 손가락들 (266p – 267p)‘박제된 생물’ 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영화 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고, 더 나아가 를 비롯한 히치콕 영화에 대한 논의로 확장을 시도하는 보니체르는, 어머니를 박제한 아들의 예를 들며 에서 보여주었던 여러가지 요소들이 가지는 의미가 충분히 역전될 수 있고, 이런 것이 히치콕이 가지는 인간에 대한 전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전망을 기반으로, 히치콕의 영화가 얼만큼, 스크린-거울 구조를 ‘바짝 끌어안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사실 그의 영화들은 장갑의 손가락들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듯 하고 그 가역성에서는 피부와 밀짚을 교대로 재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구조에 따라붙어 괴롭히는 것은 하지만 새의 부리의 맹렬한 강타이다. 우리가 그것을 예견함으로써 서스펜스가 창출된다. 이러한 음침한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것이다.” (267p)비로소 제목의 의미가, 보니체르가 보는 히치콕 영화가 가지는 매우 밀착적이고 정교한 스크린-거울 구조에 대한 찬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칼럼을 통해, 히치콕의 징환들 중 ‘거울 구조’ 가 에서 로, 그리고 이 두 영화의 요소가 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 둘이 웃다 역사가 죽어도 모를 발칙함아서왕의 전설은 유럽에서는 아주 중요한 로맨스이다. 원래 웨일스에서 유행했던 이 전설은 기사도와 사랑으로 가득하다. 란슬롯과 기네비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서왕의 성배를 찾는 여정, 기사들의 형제애 등을 다루면서 중세 유럽 문화의 전형적인 정서를 대변한다. 중세의 많은 음유시인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영웅적으로 묘사했다. 귀족의 성에 초대되어 아름다운 목소리로 영웅을 찬미하고 귀족가의 처녀의 아름다운 미모를 추켜세우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취적이고도 권위적인 이런 장면들을 ‘몬티 파이튼’의 말썽꾸러기들이 하나씩 희화화시켜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봐야할지 모를 정도로 망쳐놓는다.권위에 대한 도전은 패러디의 기본이다. 이런 도전은 영화 시작부의 자막에서부터 선언하듯이 발견된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그 영화를 가늠하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영화 제작자 역시 그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오프닝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는 예우도 이런 맥락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곤 한다. 는 이런 관습들에 정면으로 맞선다. 자막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 즈음에, ‘자막을 잘 못 만들어서 자막 만든 사람을 해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한 번 무장해제를 시킨다. 간드러지게 웃듯이 다시 ‘특별한 스타일로 제작한’오프닝과 자막이 등장한다. 웃지 않고 배길 방도가 없다. 그 뒤에 등장하는 아서왕의 모습은 오프닝이 쌓아둔 웃음기 속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중세의 기사는 수행원 한 명에 튼튼하고 빠른 말이 기본이다. 중장비로 넘어가면 기다란 랜스에 방패, 철갑까지 착용한다. 언뜻 떠올리면 근사하지만 그걸 착용했을 때를 생각하면, 배트맨이 고개를 양 옆으로 돌리지 못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우습다. 자기 목도 스스로 못 돌리는 꼴에서 권위는 온데간데없다. 몬티 파이튼은 기사가 가진 허영을 정면으로 풍자한다. 소리만 가진 말을 타고 등장하는 아서왕의 모습은 영화 내내 등장할 때마다 폭소를 부른다. 그 뒤에서 마치 음향효과 팀의 폴리 아티스트처럼 코코넛을 두들기며 말굽소리를 만들어내는 수행원까지 발견하면 정말이지 견딜 수 없게 웃기다. 그런 채로 당도한 성 앞에서 자신을 브리튼의 왕이라고 소개하는 아서왕의 선언이 힘을 가질 리가 없다. 경비병과 길거리의 일꾼들은 모두 아서왕의 권위에는 관심이 없다. “난 당신을 뽑은 적이 없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 지위를 얻어냈지?”라고 되묻는 백성에게 아서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성을 내는 것뿐이다. 권위 따위는 퇴비 속에 던져진지 오래다. 그 뿐인가? 아서왕의 친구들의 에피소드들은 더하다. 순결의 기사는 ‘무료한 성에서 야한 속옷을 만들곤 하는’여자들이 사는 성에서 순결을 잃을 뻔 한다. 용맹한 기사는 성에 갇힌,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르려는 왕자를 공주로 착각하고 구하러 가서 결혼식 하객까지 처참하게 죽인다. 이런 상황과 인물들의 천연덕스러운 대사들 속에서 중세의 허영은 짓뭉개진다.영화가 가진 풍자성은 시퀀스 전체 뿐 아니라 대사 하나를 봐도 느껴지며,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힘을 가졌다. 토끼 한 마리에 벌벌 떠는 기사들과 생각 외로 어마어마하게 강한 속칭 ‘만렙 토끼’를 보고 폭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원래는 용맹한 기사인 ‘로빈’을 적 앞에서 내빼는 겁쟁이라고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가사들이 나올 때쯤에는 이미 영화의 뻔뻔스러움이 익숙하다. 어느 새 권위와 역사는 살해당해 잊혀져있다. 중반에 급작스럽게 죽어버리는 역사가는 이런 살해를 은유한다.테리 길리엄을 필두로 한 영국의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튼’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중세의 허영에 대한 풍자를 보며 웃다보면 영화와 함께 역사도 절단이 나 있다. 이런 행위가 마지막에 출연진이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에서 시원스럽게 끝난다. 살인범이 잡히자 필름은 끊어지고 엔딩 크레딧도 없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음악이 흐르면서 술렁이는 객석. 이 모든 것들이 장난꾸러기들의 계획 속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못된 짓을 해버렸어!’라고 키득거리는 몬티 파이튼 그룹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1.누벨바그의 형성배경과 과정누벨바그의 탄생 배경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언급된다. 첫째,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이라는 짧은 글이다. 이 글에서 트뤼포는 그때까지의 프랑스 영화는 소위 ‘심리학적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문학적으로 향기 높은 원작, 혹은 소재를 영화란 매체의 특성에 대한 고려 없이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오류를 범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질의 전통’이라 칭하면서 그러면 진정한 영화작가는 누구이며,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 통해 ‘작가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으며 트뤼포를 중심으로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바로 이 젊은 영화인들이 몇 년 후 누벨바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둘째, 트뤼포의 글이 실렸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이다. 앙드레 바쟁이 편집장을 맡았던 이 잡지는 젊은 영화인들이 자유롭게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담론의 장이 된다. <카이에 뒤 시네마>를 탄생시킨 배후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레뷔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장 조르쥬 오리올이다. 그는 <레뷔 뒤 시네마>에서 유럽의 아트 시네마 및 아방가드르 영화와 함께 미국 영화 감독들의 영화도 비슷한 무게로 취급하며 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두 번째는 시네클럽 ’오브젝티프 49‘를 들 수 있다. 콕도, 브레송, 레엔하르드, 클레망, 아스트뤽, 피에르 카스트 등이 주도한 이 클럽은 전통적인 프랑스 영화를 거부하고 ’작가적인 영화‘를 꿈꾸었다. 이러한 배후가 있었기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탄생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새로움을 추구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미래에 누벨바그를 이끌어 가게 될 젊은 영화광들은 비평가로서의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영화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젊은 비평가들의 등장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는 히치콕과 하워드 혹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장인 감독들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이며 ‘카메라 만연필’선언의 영향이 두드러진 ‘작가주의’를 ‘카이에의 공식 정책’으로 정착 시킨다셋째, 1940년대 말 앙리 랑글루아 Henri Langlois에 의해 설립된, 일종의 ‘국립 예술전용 극장’이라 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이다. 다수의 희귀 필름들과 영화 도서들을 소장한 이곳에서 당시 새로운 영화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특히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감독 다섯 명(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은 1950년대 초반의 몇<중 략>영화잡지인 <Cahiers>는 1051년 4월 최초로 발간되었으며 편집방향이 점차 네오 리얼리즘과 미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 양상을 띄었는데 이는 이미 작가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에지는 작가론의 산실이었으나 명료한 이론적 토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문적 유하의 정점은 아니었으며 바쟁의 비평원리에 몰두하엿으나 그 적용에 있어서는 각자의 개성에 의존하였다. 이는 누벨바그가 일정한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특징과도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