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화사 누벨바그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2.12.03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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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 영화사 누벨바그 분석문입니다.
목차
1.누벨바그의 형성배경과 과정
2. 누벨바그와 68혁명
3.누벨바그 영화의 특징
4. 누벨바그의 대표적 감독
본문내용
1.누벨바그의 형성배경과 과정
누벨바그의 탄생 배경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언급된다.
첫째,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이라는 짧은 글이다. 이 글에서 트뤼포는 그때까지의 프랑스 영화는 소위 ‘심리학적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문학적으로 향기 높은 원작, 혹은 소재를 영화란 매체의 특성에 대한 고려 없이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오류를 범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
‘질의 전통’이라 칭하면서 그러면 진정한 영화작가는 누구이며,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 통해 ‘작가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으며 트뤼포를 중심으로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바로 이 젊은 영화인들이 몇 년 후 누벨바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둘째, 트뤼포의 글이 실렸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이다. 앙드레 바쟁이 편집장을 맡았던 이 잡지는 젊은 영화인들이 자유롭게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담론의 장이 된다. <카이에 뒤 시네마>를 탄생시킨 배후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레뷔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장 조르쥬 오리올이다. 그는 <레뷔 뒤 시네마>에서 유럽의 아트 시네마 및 아방가드르 영화와 함께 미국 영화 감독들의 영화도 비슷한 무게로 취급하며 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두 번째는 시네클럽 ’오브젝티프 49‘를 들 수 있다. 콕도, 브레송, 레엔하르드, 클레망, 아스트뤽, 피에르 카스트 등이 주도한 이 클럽은 전통적인 프랑스 영화를 거부하고 ’작가적인 영화‘를 꿈꾸었다. 이러한 배후가 있었기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탄생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새로움을 추구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미래에 누벨바그를 이끌어 가게 될 젊은 영화광들은 비평가로서의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영화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젊은 비평가들의 등장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는 히치콕과 하워드 혹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장인 감독들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이며 ‘카메라 만연필’선언의 영향이 두드러진 ‘작가주의’를 ‘카이에의 공식 정책’으로 정착 시킨다
셋째, 1940년대 말 앙리 랑글루아 Henri Langlois에 의해 설립된, 일종의 ‘국립 예술전용 극장’이라 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이다. 다수의 희귀 필름들과 영화 도서들을 소장한 이곳에서 당시 새로운 영화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특히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감독 다섯 명(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은 1950년대 초반의 몇
<중 략>
영화잡지인 <Cahiers>는 1051년 4월 최초로 발간되었으며 편집방향이 점차 네오 리얼리즘과 미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 양상을 띄었는데 이는 이미 작가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에지는 작가론의 산실이었으나 명료한 이론적 토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문적 유하의 정점은 아니었으며 바쟁의 비평원리에 몰두하엿으나 그 적용에 있어서는 각자의 개성에 의존하였다. 이는 누벨바그가 일정한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특징과도 연결된다.
참고 자료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까치, 1997.
요미우리 신문사,『20세기의 드라마 3』,새로운 사람들.
월러스틴,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편집부 편, 『프랑스 5월 혁명』, 백산서당.
"1968: 거부된 과거, 감추어진 미래", 신진욱 외, 『학회평론』11호, 1995.
"68혁명 이후 한세대", 카피레프트 모임, 『읽을 거리』2호, 1998.
노동자연대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