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발표 - 강진1) 지난 시간에 2권을 다루면서, 중용을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한편으로 탁월성은 각 사회의 통념과 실천의 적절함을 매번 새로이 측정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회에 다른 도덕이 존재할 것이라는 관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용은 올바른 이성에 의해 측정된다는 구절이 종종 발견되므로, 도덕에 어떤 보편적인 원칙이 있을 것이라는 관점도 나왔다.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올바른 이성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양한 탁월성과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올바른 이성이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어떤 식으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 6권의 주제이다.2) 중용을 측정하는 기준인 올바른 이성은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그러니 이를 정의내림과 동시에 지적 탁월성까지 찾아보도록 하자.지적 탁월성은 성격적 탁월성과 달리 오직 이성 자체에 관계된 것이다. 따라서 비이성적인 영혼의 부분들(감각-운동 영혼, 영양 섭취 영호)과는 상관없다. 이때 우리는 이성의 기능을 자신이 관계하는 대상의 본성에 부합·대응하여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하나는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에 관계하는 epist?monikon 학문적 인식의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에 관계하는 logistikon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부분 혹은 숙고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기능을 공통적으로 갖는데, 각각의 부분이 관계하는 대상과 각각의 기능들에 적합한 방식을 통해서 판별한다.성격적 탁월성이 합리적 선택에 따라서, 이성이 참이라 판별하는 것을 동시에 욕구가 추구하게 만드는 숙고적인 욕구라는 점에서 구분된다.3) 이성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들에게 해당되는 지적 탁월성의 품성상태 혹은 기능은 아래와 같다.epist?monikon - a) epist?m? 학문적 인식 b) nous 직관적 지성 c) sophia (철학적)지혜logistikon - a) techn? 기예 b) phron?sis 실천적 지혜추측이나 의견은 허위에 빠질 수 있으므로 배제된다. - 달리 말하면 위의 다섯 종류들은 제대로 기능하는 한에서 허위에 빠지지 않는다.4) 우선 학문적 인식의 부분에 해당되는 품성상태를 모두 분석해 보자. 학문적 인식이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필연적이고 따라서 영원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생성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 것을 다룬다.이것은 가르침에 의해 배울 수 있는데, 모든 가르침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출발한다. 그 방법은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이다. 귀납적 방법은 주어진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연역적 방법은 보편적인 원리를 이미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귀납적 방법은 보편적인 것의 원리를 찾아내곤 하는 반면, 연역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연역이 출발하는 원리인 보편적인 것은 연역될 수 없으므로 학문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그리하여 학문적 인식은 일종의 증명할 수 있는 품성상태로서 추론의 방법을 통해 능력이 길러진다.연역이 출발점으로 삼는 원리, 보편적인 것은 학문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갖는 다른 지적 탁월성의 대상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직관적 지성의 대상이다. 직관적 지성은 연역의 출발점인 보편적인 것의 원리를 알아보는데, 이는 귀납적이기도 하다.이렇게 원리를 알아보는 지성의 기능과 추론과 연역을 담당하는 학문적 인식의 기능이 합쳐지면 (철학적)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는 이성의 학문적 인식 부분이 갖는 총기획적인 지적탁월성으로 학문적 인식들 중 가장 정확하며, 전면적이고 총체적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본성상 가장 영예로운 것(불변하는 것, 완전한 것, 신이나 자연 혹은 본성 등)을 대상으로 하여 직관적 지성과 학문적 인식을 합친 것이다.5) 숙고적인 부분은 다르게 있을 수 있는 대상을 다루는데, 이는 제작과 행위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기예는 제작적인 품성상태에 속한다. 기예는 이성을 동반해 무언가를 제작할 수 있는 품성상태로서, 자신이 제작하는 사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제작에 관련되므로 생성에 관련된다. 이때 생성되는 사물의 원리는 사물 안에 있지 않고, 제작자 안에 있다. 따라서 기예는 필연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 생성과도 다른 것이다.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사물들은 그 자신 안에 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그리하여 참된 이성에 따르는 제작적 품성은 기예이고, 기예의 없음은 거짓된 이성에 따르는 제작적 품성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실천적 지혜는 행위의 영역이다. 이는 인간의 삶 전체적인 측면에서 잘사는 것을 위해 무엇이 좋고 유익한지를 고려한다. 이때는 기예가 관계하지 않는 대상에 관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목적과 더불어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주로 관계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실천적 지혜가 다루는 대상은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니까.(이때의 각각의 것은 행위이다.)기예와 달리 기술적 능숙함이 없으며, 일부러 나쁘게 할 수 없다. 기예는 일부러 나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잘하는 사람이지만, 실천적 지혜는 그렇지 않다.그러나 실천적 지혜 또한 어디까지나 본성적적 이성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망각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성을 동반하기만 하는 어떤 품성상태는 망각이 있지만, 실천적 지혜에는 그런 것이 없다여담으로 잘 숙고함 이라는 어떤 기능이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잘 숙고함이다. 따라서 숙고적인 부분의 이성에 속하며, 좋은 결과 혹은 목적을 성취해 내는 것과 그것에 필요한 수단들을 판단해 낸다. 이때는 논리적이고 마땅한 절차를 모두 거쳐서 숙고되어야 하며,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이해력은 잘 판단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며, 행위를 명령하지는 않는다. 잘 숙고함과 이해력은 실천적 지혜안에 포함되며, 실천적 지혜는 이런 것들을 함께 가진다.6) 철학적 지혜에 비교하여 실천적 지혜를 다시 살펴보자.실천적 지혜는 그것이 학문적 품성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개별적인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천적 지혜는 직관적 지성과 대립해 있으며, 학문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과 행위의 대상인 최종 개별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일정한 경험이 필요한데, 이는 분석과 추론으로 획득할 수 있는 학문적 인식의 것들과 대비된다.그러나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최종 결과물을 다룬다 해서 완전히 상대적이거나 우연적이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이성에 따르는 지혜로서의 품성상태이므로 법칙성을 따른다. 이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11장에서 근원적 공정성,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하여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주장과 같이 한다. 더불어 이해력과 관련하여 공감적 이해력이 실천적 지혜와 더불어 있게 된다는 것 또한 이에 대한 근거이다. 감각과 경험은 매번 다르고 사람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실천되었을 때 공감을 이룰 수 있음은 공통된 것을 향해서 행해지기 때문이다.따라서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실천적 지혜를 가져야 하고, 실천적 지혜를 가져야 훌륭한 탁월성들을 모조리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자연적 탁월성을 갖지만, 우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탁월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이러한 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중용은 올바른 이성, 즉 실천적 지혜에 따르는 이성에 의해 측정된다. 탁월성이 따르는 합리적 선택은 그러한 실천적 지혜의 측정에 욕구의 추구함을 결합한 것이다.7) 중용의 측정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균형을 맞추는 방법.앞서 중용의 측정방법에 대하여, 관례와 통념의 적절함과 보편 이성의 측정이라는 두 관점의 분석을 살펴보았다. 전자는 탁월성의 상대적인 측면에 집중한 것이고, 후자는 탁월성의 보편적 측면에 집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식으로 균형을 잡는지를 살펴보자.이를 살펴보려면 본성상 그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불변하는 것)이 어떤 것이며, 이와 달리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핵심 단어는 원리이다.원리가 불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영원하거나, 운동의 방식이 다른 식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은 위로 가고 돌은 아래로 간다고 분석했으며, 신은 운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더불어 당시 그리스 학자들은 천체들이 규칙적인 반복운동을 하므로 불멸하는 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불변하는 것들에 들어가며, 철저하게 법칙에 따른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완벽하게 보편적이다.반면 그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은 A로 운동할 수 도 있고, 동시에 안 할 수도(혹은 못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비결정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결정성이 우연적인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연적인 것에는 학문이나 인식이 없으니까. 따라서 비결정성을 가진 사물이라도 그것이 이성의 인식 대상에 들어온다면, 법칙성을 갖는 종류의 것이다. 이를 가능성으로 부를 수 있다. 가능성을 갖는 것은 동시에 법칙성을 가지며, 그것이 앞으로 훌륭하게 운동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성장 혹은 운동할지를 추론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 - 자발성 그리고 책임의 문제 (부분요약)1) 탁월성은 감정과 행위에 관계한다. 이들은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에 따라 평가가 나뉜다. 어떤 때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용서 혹은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행위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자발적인 것은 단초(아르케)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행위자가 행위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을 알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 비자발성은 행위의 단초가 행위자 밖에 있어서, 행위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 이 단초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강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더불어 행위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 구체적인 대상이나 수단 그리고 목적의 관계를 몰라서 비자발적으로 행위 하게 되는 것도 있다. 이를 무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강제에 의한 것들 중에는 비자발성과 자발성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정상적일 때는 결코 행하지 않을 행위를 강제하므로, 행위만 단적으로 보자면 비자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에 실은 무거운 짐을 버리는 것과 같이, 어떤 행위는 그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행위이며, 행위의 단초가 나에게 있다. 따라서 강제적으로 보이는 많은 행위들이 사실 우리와 관련해서 자발적이다.그러므로 아무리 강제가 강하다 해도, 부모를 죽이라는 인질극의 상황처럼, 그 행위 자체가 도저히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인 경우, 그래서 그 끔찍한 일을 스스로 겪는 것이 나은 경우에는, 결코 악행을 행하면서 스스로 비자발적이었다고 변명할 수 없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그때도 행위와 선택의 단초는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을 대신해 무엇을 선택할지는 복잡한 문제이다.무지에 관해서는 행동에 구체적으로 관련되는 것 이외에는, 비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당연히 알만 하고 또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한 무지는 못됨의 원인이지 비자발성의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무지에 따르는 행위 중에는 자발적인 것도 있다. 가령 술에 만취해서 행한 것은 비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상태를 초래한 것이다. 이때 행위자는 무지 속에서 자발적으로 행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분노와 욕망에 의해 행위 되는 것들 또한 무지 속에서 행해지지만 엄연히 자발적이다.2) 합리적 선택은 미리 숙고했던 것 혹은 앞서 선택된 이라는 뜻을 가지며, 탁월성에 고유한 자발적인 것의 일종이다. 그것은 이성을 동반하며 행위의 수단에 관계하고, 우리가 성취 가능한 것들 중에 좋음과 나쁨에 관계한다. 그리하여 마땅히 추구할 만한 것을 선택함에 칭찬받는다. 때문에, 비이성적인 욕구나 분노 그리고 목적에 관계하며 불가능한 것도 추구할 수 있는 바람, 더불어 참과 거짓에 관계하며 참이기에 칭찬받는 의견과는 다른 것이다.3) 숙고는 합리적 선택과 같은 본성을 지니되, 현행적인 사유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고 자족적인 학문에는 숙고가 없으며, 어느 정도 비결정적이고 우리에게 달린 것이 숙고의 대상이다. 그러나 완전히 개별적이어서, 감각의 대상인 것들은 숙고의 대상이 아니다. 숙고는 주로 우리 행위에서 원인과 목적의 관계와 수단을 탐구하는데, 이는 이성과 관계하는 것들이다.4) 바람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했다. 바람의 대상이 실재로 좋은 것이냐, 외견상 좋은 것이냐는 문제가 있다. 단적으로는, 또는 진리에 따라서는 바람의 대상이 좋음이지만, 각자에게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바람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신실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문제 그리고 병든 사람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요약 ? 강진1) 어떤 것이 인간 안에 본성적으로 생겨난다면,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며, 능력을 가진 후에 활동을 발휘한다. 그런데 성격적 탁월성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습관은 활동을 함으로써 활동할 능력을 새로 얻으며, 그 능력을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격적 탁월성이 본성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지적 탁월성은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가르침과 성장을 통해 발휘될 뿐, 그 능력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하지만 성격적 탁월성이 본성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하여, 본성에 반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본성에 의한 운동은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것과 다르게 습관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2) 품성상태나 습관은 반복되는 행위의 성격에 따라 만들어지고 반복되며, 그런 성격의 행위들을 더욱 잘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성격의 행위가 탁월성의 형성에 기여하는지를 살펴야 한다.탁월성은 인간적인 좋음이므로, 올바른 이성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이때 탁월성은 더 잘 행위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모자람과 지나침은 이를 파괴한다. 따라서 탁월성은 중용(중간·적도....)에 따르는 행위에 의해 형성되며, 그런 행동을 더 잘 할 수 있게 해준다.3) 탁월성은 실재 행위와 관련되기에, 즐거움과 고통에 관계된다. 이때 무엇을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가는 그 사람의 품성상태를 표시한다. 즐거움과 고통은 여러 대상에 관계할 수 있으나, 탁월성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즐거워할 좋은 것에 즐거워하고, 마땅히 괴로워해야할 법한 나쁜 것에서 고통을 느낀다. 이런 까닭에 탁월성이 어떤 무감정 상태 혹은 평정상태라고 규정한 것은 충분치 못한 규정이다.그러므로 탁월성의 형성을 위해서는, 그것과 관계하는 즐거움과 고통을 적절한 대상과 정도에 대응하게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반대되거나 실패하는 경우에는 악덕이 생겨난다.4) 위 논의에 대하여 이러한 비판적 검토가 있다.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사람은, 이미 정의를 알고 있으며, 이미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다.그런데 탁월성은 무엇을 행하는지 아는 상황에서, 합리적 선택에 따라, 행위 자체를 선택하며,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항구적인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연히 혹은 타인의 지시로 정의로운 일을 했다하여, 위 논의에 따라 그 사람이 정의를 아는 사람 혹은 정의로운 사람인 것은 아니다. 실천의 항구성과 성격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실천이 항구적이지 않고, 말로 도피한다면 성격적 탁월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성격의 행위를 행함으로써, 바로 그런 성격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이다.5) 탁월성의 유(‘종류’ 할 때 ‘유’)는 품성상태이다. 실천적 측면에서 영혼 안에는 감정과 능력 그리고 품성상태가 있는데, 앞의 두 가지는 인간에 관련한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더불어 감정은 어떤 ‘특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는 것’으로, 항구성이 결여되어있다. 능력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탁월성이 아님을 논의했다.6) 탁월성의 종차(종 : ‘종류’ 할 때 ‘종’)는 중용이다. 중용은 적절한 정도이며, 기능을 잘 수행하게 해준다. 이때 많고 적음과 동등함은 대상 자체의 양에 대한 산술적 비례에 의해 측정되는 것과,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있다. 성격적 탁월성은 후자에 따른다. 그러므로 여러 종류의 행위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이성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성격적 탁월성을 규정하는 중용이다. 중용은 이성에 의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할 그런 방식으로, 합리적 선택에 따라 규정된다.
윤리학회 겨울방학 1차 발표 - 강진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1. 모든 기예와 탐구,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 목적은 활동 자체이거나 활동의 성과물이다. 수단으로 추구되는 것이 목적보다 더 좋은 것일 수는 없기에, 성과물이 있는 활동에 대해서는 성과물이 활동보다 본성적으로 좋은 것이다.각각의 기예와 학문은 각각의 목적이 있으므로, 여러 종류의 좋음이 있다. 만약 다른 기예를 하나의 능력으로 포함하여 자신 아래에 두는 기예가 있다면, 그 기예가 추구하는 목적은 아래에 놓인 기예들의 목적보다 더 좋은 것이다. 후자는 전자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모든 기예와 학문을 포함하는 총기획적인 학문이 있다면, 그 것이 추구하는 목적은 모든 좋음을 포함하는 최고선이다. 정치학은 모든 실천적 학문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정치학은 실천과 관계하는 인간적인 좋음들 중 최고선을 목적으로 갖는다. 그리하여 실천의 최고선을 찾는 우리의 탐구는 정치학적 탐구가 될 것이다.정치학적 사실의 본성은 가변성을 허용하고, 행위를 향한다. 그러므로 정치학적 탐구는 본성상 대체로 참인 판단에 만족할 수밖에 없으며,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경험이 충분치 않고 감정에 치우친 젊은 사람은 정치학에 적합한 학생이 아니다. 그들은 수학은 잘 할 수 있을 것이다.2. 탐구 방식은 ‘사실’(우리에게 알려진 것) 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와 관련하여(통념적으로) 알려진 것과 단적으로 알려진 것(본성적으로 참인 것) 이 있다. 우리는 전자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은 학문의 제일원리(아르케)이다. 이는 사례에서 제일 원리로 나아간 후에, 다시 제일원리에서 출발하여 사실을 설명하려는 플라톤의 방식과 차이가 있다. 반대 방향이다.그리하여 작은 조건이 있는데, 정치학적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므로, 이는 탐구자가 정치학적으로 좋은 습관과 품성상태를 갖게끔 성장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 제일원리이기에, 사실은 주어져야 한다. 사실이 충분하면 번거롭게 이유를 되묻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다.3. 통념에 따르면 최고선은 행복이라 불리며, 잘 사는 것 혹은 잘 행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이견이 있는데, 대체로 쾌락·즐거움이 행복인지 아니면 명예가 행복인지, 이도 아니면 관조적인 삶이 행복인지로 크게 나뉜다. 관조적 삶은 우리의 문제에 주된 것이 아니기에 나중에 논한다. 즐거움은 일리가 있지만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명예는 정치적 삶의 목적이지만 수혜자에 의존한다. 더불어 명예는 자신이 가진 좋음에 대한 확인 받음이다. 따라서 명예가 행복이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보편적인 좋음이 따로 있느냐에 대한 이론은 나중에 따로 논의한다. ([부록] 참조)4. 목적이 여럿이므로 좋음도 여럿이다. 그 중 어떤 것은 다른 것을 위해 촉구되므로, 모든 목적·좋음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고선은 완전한 것이므로, 완전한 좋음 혹은 그 것들 중 가장 완전한 좋음이 최고선이다. 완전한 것은 자족적이고, 단적으로 추구되는데, 우리가 행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그런데 우리가 찾는 좋음은 인간적인 것이고, 기예와 실천이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기능에 있으며, 인간의 기능의 잘함이 바로 인간적인 좋음의 종류이다. 이는 성과물이 아닌 행위를 목적으로 한다.인간이 가진 기능을 우리는 영혼이라 부른다. 기능들에는 A. 영양 섭취-성장, B. 감각-운동, C 이성 총 세가지가 있다. 이 중에 이성만이 인간의 기능이므로, 이성에 의한 실천적 삶이 인간적인 좋음이다. 이는 a. 이성이 사유하는 것 b. 이성에 복종하여 행위함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후자가 정치학적 탐구에서 추구되는 인간적인 좋음이다.같은 종류의 기능에 대해서 더 잘함을 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탁월성에 의한 우월이 계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며, 이 중에 가장 완전하고 총기획적인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우리가 찾는 최고선이다. 이를 찾는 것이 이번 탐구의 목적이다.영혼이성을 가진 부분이성이 없는 부분영양 섭취 ? 성장의 부분식물과 공유하는 기능이성과 결코 관계할 수 없는 부분일차적인 의미의 ‘이성’자체 안에 이성을 가진 부분사유하는 부분 (인간)= 지적 탁월성의 영역감각-운동적인 부분행위 ‘실천’ 욕구하는 부분이성에 설복/저항할 수 있는 부분동물과 공유하는 기능* 이성과 관계할 수 있는 부분= 성격적 탁월성의 영역5. 인간의 탁월성은 육체의 탁월성이 아닌, 영혼의 탁월성을 말한다. 영혼의 상태(hexis)들 중에 칭찬 받을만한 것을 우리는 탁월성이라 부른다. 따라서 정치학을 하려면, 필요한 수준에 한하여 영혼에 관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6. 위 논의가 참이라면,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부합할 것이고, 거짓된 논의라면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의된 행복이 여러 가지 통념에 부합한다. 따라서 논의는 참이다.그런데 검토 중 부가적으로 새로 알려진 것이 있다. 행복의 성취를 위해서는, 수단이 되는 일정한 외적인 좋음(풍요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정한 뒷받침이 없다면 행복에 크고 작은 흠집과 난처함이 생길 수 있다. 가령 외모가 추하다거나, 자식 혹은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경우, 그리고 심각한 것으로는 주변에 나쁘고 추악한 사람 밖에 없거나, 함께 하던 좋은 친구와 가족을 사별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통념 속에서 행복이 노력과 훈련 그리고 배움으로 얻는 것인지의 논란이 발생한다.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자족성에 대한 소론2009101581철학과 강진『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자족성에 대한 소론요 약자족성은 존재하는 근거로 자기 자신 외에 다른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자족할 수 없다. 따라서 보다 완전한 자족성을 지닌 국가를 수립하고, 거기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자족성의 실현은 국가의 기원이자 목적이다.플라톤은 『국가』편에서 분석을 통해 국가의 자족성을 확보하려 한다. 국가의 각 부류를 분석하여 분별하고 자족성을 파악한 결과, 국가는 시민·수호자·통치자로 나뉘었다. 각 항은 모순율을 통해 분석되고 포착되었기에, 서로에 대하여 상반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각 항들이 통합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여러 국가들이 흥망성쇠하며, 상반된 것들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여러 예시들이 있다. 따라서 국가 수립은 실증적이며, 분석을 통해서는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가능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기술과 조작의 측면이다.기술은 인간의 능력이다. 아무리 완벽한 기술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 안에 실패를 내포한다. 기술과 기술자는 실천에 있어서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찾으면 나머지도 찾게 된다. 그러므로 국가를 통합할 기술자는 절제·용기·지혜를 한 몸에 갖춘 우수한 인재여야 하는데, 플라톤은 오직 철학자만이 그리할 수 있는 통치자라고 말한다.철학자는 각각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므로 앎에 있어서 실수함이 없다. 앎의 대상인 모든 존재를 사랑하므로 정치에 있어서도 국가 전체를 아낀다. 지혜를 추구하는 만큼 신체적 즐거움을 멀리하므로 절제 있으며, 신체적인 어떤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므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기에 용감하다. 철학자는 정의 실현의 주체이며 국가 통합의 모범이다.철학자의 지속적인 확보를 위해서는 처자공유제와 같은 동물적 조작과 더불어 수학과 철학교육 등의 인간적 조작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철학자가 갖게 될 능력들이 많은데, 그 중 유일하게 이성은 인간이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일세. 아니면 자네는 나라를 수립시키는 기원(起源 : arch?)으로서 다른 무엇을 생각하는가?”“다른 어떤 기원도 없습니다.” 그가 대답했네.자족autarkeia이란 존재의 근거들이 자신 안에 모두 마련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히 자족적인 것은 자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자족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이 결여한 만큼의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은 자족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결여한 것을 지닌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에 사람들이 모여 국가를 수립하니, 필요는 국가수립의 원인이고 자족은 국가수립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만약 국가가 제대로 수립되었다면 국가 전체는 자족적이다. 사람들은 국가 안에서 자족적인데, 불완전한 인간은 자신보다 더 완전한 국가의 자족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국가 수립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기능은 성공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를 가진다. 만약 사람들의 기술이 생존에 충분한 만큼 훌륭하지 않다면, 그들은 죽게 될 것이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에 맞는 한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한다.“이로 미루어 볼진대,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heis hen) ‘성향에 따라’(kata physin)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이는 국가 안에 있는 모든 기능들을 분석 하여 분별하고, 각 기능에 적합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종사하도록 고착화 하는 것을 말한다. 분석은 운동을 배제해 각 기능을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여 고착화한다. 분리되어 고착화된 기능들은 자신을 규정하는 근거로서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을 갖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며,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도, 다른 것과 섞이지도 않는다. 모든 기능들이 각각의 것 자체로 드러나니, 이는 자족성을론 있습니다.”“그건 무엇이며, 누구에게 있는가?” 내가 물었네.“그건 나라의 수호술(守護 : phylakik?)이며, 우리가 방금 ‘완벽한 수호자들’로 불렀던 그 통치자들(archontes)에게 있습니다.통치자와 수호자가 분리되면서 국가는 최종적으로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개개인 자신의 자족을 위해 국가에 의지하는 시민들이다. 두 번째는 국가 전체의 자족성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수호자들이며, 마지막으로 국가를 대내외적으로 지켜내며 전면적인 지식으로 국가의 자족성을 실현하는 통치자들이다. 위의 세 종류의 사람들은 인간 내면의 욕구·용기·이성에 대응하며, 각각의 고유한 덕목으로 절제·용기·지혜를 가진다.(3) 이상국가의 불가능성 : 모순율플라톤은 국가의 자족성 실현을 위해 국가 구성원들의 각 기능을 분석하여 따로 떼어내고 자족성을 확보했다. 그것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면 국가는 전면적으로 자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 끝에, 국가는 시민·수호자·통치자로 나누어졌다. 이들은 각각 욕구·용기·이성에 대응한다.그러나 세 부류들에게는 그들이 하나의 단일한 국가로 결합될 수 없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각 부류의 본성인 욕구·용기·이성은 서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 대립은 분석에 적용된 방법인 모순율에서 기인한다. 모순율에 대한 『국가』편의 구절은 아래와 같다.“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들(tanantia)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이.모순이 발생한다면, 각 항목은 양립할 수 없기에 동일한 것일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지거나 서로 분리되어 다른 것이 된다. 이에 따라 수긍은 부인에, 갈구함은 거절에, 끌어당김은 떠미는 것에 대립한다.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욕구는 거절하거나 떠미는 기능이 아니므로 원하는 것을 무한정 가지려 한다. 때문에 자족을 넘어서려하고, 이러한 욕구가 국가를 지배하면 침략전쟁이 발생한다. 반면 이성은 진리에 따라 자족과 적도를 실현하는 한정 족적인 국가가 취할 형상을 보여줄 수 있을 뿐, 실증적으로 관찰되는 국가가 어떻게 수립되고 성장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책을 써야 자족성을 더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그러므로 국가의 자족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국가의 구성원인 세 부류를 하나로 통합할 방책을 확보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구체적인 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례들이 사실로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례들로부터 원리를 찾아낸다면 이상국가의 영토를 불가능의 영역에서 가능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2. 이상국가의 구현(1) 기술과 조작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례들이 실재하는 경우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자신 안에 죽음을 내포한다. 삶과 죽음이 상반됨에도 생명체 안에 함께 있다. 다른 예시로, 우리의 정신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기억을 통해 과거를 가진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의 기억 또한 상반되는 것이 양립하는 사례이다. 이처럼 많은 예시를 들 수 있지만, 『국가』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기술·기능이다.『국가』에서는 기술·기능을 분석하여 종류를 구분하고 자족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기술 자체는 그 어떤 결함도 과오도 없는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기술은 본디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존재하며,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천되지 않는 기술은 그저 설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은 실천 속에서 기술이다.따라서 기술은 인간의 능력이며, 정도의 차이를 허용한다. 따라서 자신 안에 성공과 더불어 실패 또한 내포한다. 가장 훌륭한 기술자도 수많은 연습과 실패를 통해 완전해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타고난 자질과 끊임없는 숙련 그리고 실증적 검토를 통해 실패를 피할 수 있으니, 『국가』에서 탁월한 기술자를 만들기 위해 성향에 따라 한 가지 일에 종사된다.그러므로 철학자가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면, 그는 사물들의 좋음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 전역에 좋음을 실천하고 정의를 구현한다. 그의 통치에서 국가와 인간의 성격은 화판으로, 철학자 자신은 정체의 형태를 그리는 화가로 비유된다. 그리고 철학자 자신의 탁월한 성향은 정체의 구체적 형태를 그리는 본이 된다. 철학자 자신이 훌륭한 나라의 본이고, 시민들의 모범이며, 법률과 정체가 가질 훌륭함의 근거이자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아래와 같다.“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3) 철인치자의 능력그러나 인간은 필멸자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철인치자를 일회적으로 획득했다하여, 국가가 영원토록 자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국가가 영원에 근접하려면 국가의 자족성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철인치자를 지속적으로 획득할 방책을 국가의 제도와 법률 안에 실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플라톤은 『국가』에서 철인치자를 키워내기 위한 두 부류의 방책을 제시한다. 하나는 훌륭한 성향을 지닌 남녀들을 결혼시켜 훌륭한 자손을 만드는 동물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체육과 시가 그리고 전쟁훈련과 철학교육을 통해 훌륭한 영혼을 기르는 인간적인 방법이다.동물적인 방법에 해당되는 방책들은 바로 처자공유제와 공동 교육·양육이다. 처자공유제는 훌륭한 사람들이 최적의 시기에 결혼하여 우월한 성향을 가진 자녀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이는 동물의 교배에서 주로 활용되는 방법인데, 그 목적은 인간이 가진 신체적 측면을 조작하는 것이다.공동교육·양육은 자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