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Ⅱ. 본론1.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2. 고려 귀족사회 성립론1) 고려 귀족의 연원2) 문벌귀족사회의 성립3. 조선전기 지배세력의 형성과 변천1) 고려후기의 신흥사대부 성장론2) 조선초기 양반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논쟁3) 사림파의 성장과 그 사회적 성격론4.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변화1) 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의 대두와 배경2) 양반사회 변화론의 연구성과와 한계3) 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의 새로운 지표Ⅲ. 나가며Ⅰ. 들어가며한국사에서 귀족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귀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출현한 후 신분제사회가 완전히 붕괴될 때까지 존속하지만 그 명칭이나 성격은 각 시대 마다 달랐다. 그 이유는 그들이 딛고 선 정치적?사회경제적인 기반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귀족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서 귀족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삼국시대의 귀족만이 갖는 특성은 무엇일까? 귀족의 출현, 지배신분층 내부에서의 귀족과 비귀족에 대한 구분, 귀족의 존재양상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삼국시대 귀족의 특성을 알아보자. 삼국은 국가형성과정에서 지배세력을 한 곳에 결집시켰으니 이것이 곧 부였다. 지배자 공동체로서의 부가 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삼국 모두 공통적이었지만 그 성격은 다른 점이 많았다. 이 부가 재편되면서 출현한 것이 바로 신분제와 관등제였다. 부가 가진 성격상 차이로 말미암아 자연히 신분제나 관등제도 다른 점이 적지 않았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이 왕경인과 지방민을 신분편제하는 방법의 차이였다. 고구려는 지방민에 개방적이었다면 신라는 지극히 폐쇠적이었으며 왕경인과 지방민을 다른 신분체계로 편제하였다. 부의 결집된 지배세력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구주 속에서 재편되며 출현한 새로운 지배세력이 귀족이었다. 말하자면 귀족의 출현은 곧 신분제와 그에 바탕한 일원적인 관등제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신분제에 편제되어 법제적인 보장을 받는 세력의 상층부를 구성했던 귀족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지만 귀족회의의 참가자격의 여부가 그 기준이 될듯하다. 귀족회의에 참여하는 데는 일정한 신분적 제약이 뒤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는 그 자격이 진골과 6두품에게 주어졌다. 두 계층은 모두 족장적인 기반을 가진 동질적인 세력으로 신분제 초기에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귀족사회의 진전으로 국왕중심의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양자의 신분적인 간극은 점차 확대되었다. 골품제적인 시각에서 중고기는 넓게는 8계층 골품구조의 정착과정이며 좁게는 진골과 6두품의 차별화과정이었다. 귄력구조를 통해 귀족의 존재양상을 살펴보면 가장 유력한 귀족들이 차지한 최고 관직인 갈문황?상대등?중시 등과 국왕과의 역학관계를 통해 알 수 있다. 갈문왕은 이사금시대에 기원하며 원래 3성교립기에 전왕족이나 국왕과 일정한 혈연관계에 있는 유력세력에게 주어졌으나 김씨지배체제가 확립된 뒤에는 김씨집단인 탁에서 분화된 사탁부와 모탁부의 장에게 주어져 세습되었다. 갈문왕은 한시적으로 칭하는 경우와 세습적인 경우가 있었으나 국왕에 버금가는 정치세력은 후자였다. 모탁부의 장에 대한 향방은 알 수가 없으나 사탁부의 장은 갈문왕으로서 그 지위를 세습하며 국왕을 견제하는 세력의 대표자 기능을 하였다. 국왕과 갈문왕의 관계에 변화가 오게 된 계기는 법흥왕 때 불교수용을 둘러싸고 일어난 수용파와 반대파의 싸움에서 국왕권이 승리하면서였다. 귀족회의의 의장이 국왕이 임명한 상대등에게 주어지면서 갈문왕은 정치적 기반이 사라진 의례적인 지위로 전락했으며 상대등은 국왕의 비호 아래 가장 핵심적인 위치로 자리잡아 갔다. 허나 지배체제가 동요되면서 상대등은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로 변모하였으며 선덕왕 때 비담의 난을 계기로 집사부와 중시로 정치적 지위가 옮겨갔다. 상대등도 갈문왕의 뒤를 이어 의례적인 지위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2. 고려 귀족사회 성립론1) 고려 귀족의 연원고려 귀족사회의 기원 문제에 관한 견해는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의 사회질서 아래 지배층에 용납된 사회계층 출신과 출신지역이 같다고 하여 모두 신라인이라 볼 수 없으며 같은 신라계 귀족이라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동일한 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냐는 것이다. 또한 광종대 과거급제자들이 대부분 신라계 귀족들이었다는 해석은 광종대의 과거급제자가 발해, 태봉, 후백제 출신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강희웅 자신의 자의적 해석으로 보인다.고려 귀족의 기원에 대한 다른 견해로 고려 초기에 활약하던 인물들을 대신하여 특히 광종대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수구 개경에서 그리 멀지않은 근기지방 출신들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이 이후 고려의 지배계층으로 성장해 갔고 태조대 등장한 개국공신 계열과 광종대 진출한 신진세력이 정치적 변혁의 과정에서 대부분 제거된 후, 성종대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한 이기백의 의견이다. 이것의 문제점은 근기지방의 범위가 모호하다는 것과 매시기마다의 정치적 지배세력이 너무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승로의 기술처럼 급격한 면이 있는기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지배 세력들의 대다수가 한꺼번에 몰락하고 그 공백을 틈타 새로운 세력이 대거 등장하는 식은 아니었다는 것이다.2) 문벌귀족사회의 성립일반적으로 고려는 귀족사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려를 귀족사회로 파악하려는 견해를 반대하여 고려가 관료제사회였다는 주장이 한편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박창희가 귀족사회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창희는 고려 초기에 실시된 과거제는 오로지 개인의 학문적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으며, 가문의 배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시행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과거제가 속성상 넓은 계층의 참여가 허용되어 있어 하층신분의 상승이동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기능을 하였다고 주장하며 귀족제의 존립성을 부정하였다. 허나 실제 과거응시자의 대부분은 중앙관리나 지방향리의 자손들이었다는 점과 과거급제자의 대부분이 중앙관리나 지방향리 가문출신이라는 점, 고려시대 과거나 음서로 입사한 유자격자를 현직에 배임케 한다거나,의 과거제에 대한 실상을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3. 조선전기 지배세력의 형성과 변천1) 고려후기의 신흥사대부 성장론조선 사대부의 기원을 고려후기 사회 속에서 발견하려는 노력은 1960년대 들어 이우성에 의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그는 ‘백성’이라는 말에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백성이라는 말은 일반농민, 즉 일반백성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기인백성’, ‘향리백성’, ‘인사백성’으로 불리는 집단은 지방의 토착세력을 의미하며 ‘이조사대부의 기원’을 이루는 것이라 전제하였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백성이었지만 경제적 능력에 입각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적 계기를 가지게 될 때 얼마든지 신분을 향상?비약시킬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우성은 이들이 고려 말 새로운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여 지방향리와 함께 조선사대부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였다. 고려후기 지방향리 출신의 새로운 관인들, 이들이 곧 신왕조인 조선의 지배층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1970년대 고려후기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층은 권문세족 이라는 민현구의 연구는 이와 짝을 이루어 고려후기 사회적 구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즉 원나라와의 특수한 관계가 시작된 이후의 고려후기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층은 권문세족이며, 이들과는 별도로 지방향리 출신의 사대부계층이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두 세력은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문세족 중심의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사대부 계층에 의하여 조선왕조는 건군하게 되었다는 일반론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2) 조선 초기 양반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논쟁조선초기 양반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논쟁은 이성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무는 양천제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양반은 고려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조선초기에 이르러 고려시대보다도 더욱 여타의 신분계층에 비해 배타적이며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신분층간에 신분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신분간의 이동이 일반화되어에서 이성무의 견해에 동조하나 두 학자가 주장한 사회의 계급구성을 해명하는 틀로서의 양천제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동시에 제기 하였다. 이 논쟁의 핵심은 송준호와 이성무는 양반을 특권적인 지배신분층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한영우는 양반을 양인신분층 내의 한 계급으로 보는 것이이라는 점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조선초기의 양반문제에 관한 이러한 논쟁은 무척 흥미 있는 것으로 학계에도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3) 사림파의 성장과 그 사회적 성격론조선왕조가 건국 된지 100여 년이 지날 때부터 조선의 지배층은 사림파라 불리어지는 신진세력의 도전을 받았으며, 끝내는 이들에게 지배적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사림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태진에 의해서다. 이태진은 사림파의 기원을 고려말의 향리층에서 찾으려 하였으며, 16세기 이래의 사림파의 대두는 단순한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라 중앙의 훈구파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사회계층의 대두를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16세기 이후의 사회적 변화라고 했다. 이태진의 연구를 이어 이병휴는 기호지방의 사림파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특히 중종대의 권력구조상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문제에 접근하려 하였다. 그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여러 측면에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계층으로 파악하고 훈구파와 사림파를 서로 전향이 가능한 세력집단으로 보고 있다. 사림파에 관한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는 이론적인 가설과 실제 사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4.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변화1) 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의 대두와 배경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은 해방 후 사회발전에 대한 열망과 함께 형성된 한국사 연구의 한 흐름이었다. 이에 대한 관심은 해방 직후에 이미 대두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연구는 6?25 동란을 치른 후 남?북한에서 각각 서로 다른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남쪽 학계가 사상?신분?경제 등 몇 개 분야에 걸쳐 변동의 .
< 목 차 >Ⅰ. 들어가며Ⅱ. 본론1. 『삼국사기』의 역사서술과 성격2. 『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역사인식과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3. 고려중기의민족서사시『동명왕편』과 『제왕운기』4. 조선전기 사서에 나타나는 역사서술과 역사의식5. 『규원사화』를 통해 본 17세기 도가사학의 재인식6. 17?8세기의 사서와 고대사인식7. 실학파의 역사이론Ⅲ. 나가며Ⅰ. 들어가며우리 민족처럼 많은 침략과 전쟁을 겪은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란의 침입, 여진의 침입, 대몽항쟁, 임진왜란 등의 크고 작은 전쟁을 합쳐 약1000회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런 잦은 외침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외세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강력한 저항의식과 민족적 자주성 등에 바탕을 둔 역사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는 고려중기~조선후기에 걸쳐 나타나는 역사인식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서에 나타나는 역사인식, 역사에 대한 이해 태도, 역사를 본 입장, 역사에 대해 강조하려 한 점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인식의 변화와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삼국사기』의 역사서술과 성격『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일종의 사관제도 아래에서 김부식을 비롯해 11명에 의해 찬술된 사서이다. 고려 인종 23년(1145)에 완성된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적으로 중국?일본의 최고 사적에 비해서는 훨씬 늦은 시기에 완성되었다. 만출 된 사서이니만큼 그간의 역사기술의 발전이 여기에 반영됨으로써 내용?체계가 갖추어졌을 것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서술 대상 시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 해서 상세를 결하고 정확하지 못한 점과 내용면에서 지나친 유가윤리와 중국 중심의 사상에 사로잡혀서 건조하고 왜곡된 역사상을 심었다는 비평을 들어왔다. 허나 14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사가들의 그것보다는 김부식의 유가적인 형식주의 예론은 융통성과 현실성?객관성?합리성이 더 많이 반영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논찬 부분에 논평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을 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삼국기사의 신라 편중은 김부식의 주관적인 편중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 신라의 사료에 비해 고구려?백제 측 자료의 결핍에 기인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삼국 각국의 기사에서 각국을 라는 제일인칭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때 그의 불편의 태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이처럼『삼국사기』에 대한 비난은 당시의 사상적 환경을 무시하고 사료의 영성 등의 객관적인 제약을 홀시한 데서 나온 부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대적 체질의 부인과 유교사관의 확립이라는 김부식 사학의 성격은 스스로 고대문화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좁혔으며 그 인식의 시대폭도 제한하게 되어 고조선사를 취급하지 않은 점, 고려사회가 가지는 전통문화의 체질을 부인하는 동시에 한국의 삼국시대가 가진 고대문화에 대한 가치평가를 낮추고 사료의 고대적 성격을 말살하든가 애매케 한 점은 마땅한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2. 『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역사인식과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삼국유사』는 충렬왕 7년(1281)에 편찬된 역사서로『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사서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다.『삼국유사』에는 현실의 세계와 불교신앙의 세계, 국가정치와 서민의 생활,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천지자연의 혼연일체의 조화 속에서 자국의 역사가 전개되어 오고 있었다는 사실, 역사전통의 유구성과 신성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시대적인 난파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찾아 권력의 독선과 야만인 이민족의 횡포에 저항하는 전통적인 자주와 인간의 회복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런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 하였다.『삼국유사』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삼국사기』에 비해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이다. 둘째,『삼국사기』와 달리 인용된 사료의 전거를 밝히는 원칙을 기본으로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했다. 유감인 것은 본문의 인용문 중에는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들도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셋째,『삼국과 불교적 입장에서 유교의 합리주의?현세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신이를 통해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불교적 신이를 통해서는 신앙의 옹호를 추구했다. 이는 당시 사학계가 이루어놓은 합리주의와는 다른 복고적인 것이었다.현대 한국사학에서『삼국유사』가 지니는 의의는 상당히 크다. 첫째,『삼국유사』가 오독으로 인한 많은 잘못과 반드시 원사료의 전문을 충실히 인용하는 방법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전거를 밝혀주었다는 것만으로도『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는 높다. 둘째,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사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삼국유사』가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이다. 셋째, 한국 고유문화를 존중함으로서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 우선 사료적 가치는 애초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에 일연이 전혀 얘기치 못한 일에 속한다는 것,『삼국유사』에 제시된 신이사관이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허나 중요한 점은『삼국유사』의 역사적 위치는 복고적이지만,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도리어 크다는 것이다.3. 고려중기의 민족서사시『동명왕편』과『제왕운기』12?13세기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금에 대한 굴욕적인 사대외교, 40여년에 걸친 대몽항쟁으로 인해 전고에 없는 수난을 겪었다. 그 당시 민중은 외세에 대해 강력한 저항을 했으며 이런 민족적 저항이 현실적 제약에서 더욱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발효되어, 이규보의『동명왕편』,이승휴의『제왕운기』라는 민족서사시로 나타났다.『동명왕편』과『제왕운기』는 모두 한시로 되어 있고 민족어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이는 12?13세기의 시인들의 서사시적 의욕의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시가전통의 영체와 문자?언어 등의 전제조건의 미숙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이규보의『동명왕편』은 동명왕이라는 한 사람을 찬미한 영웅시로 그 창작 목적을 천하로 하여금』는 민족서사시의 대성이며, 특별히 역사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승휴는『제왕운기』를 저술함에 있어 했다고 했다. 이는 객관적 냉정으로 민족의 동태와 역경을 그렸다는 의미도 있지만 당시 주어진 현실긍정에서 온 일종의 합리주의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민족 시조를 내세우고 민족의 활동을 최대한 그려놓은『제왕운기』가 민족의 주체성을 양도해 버림으로서 나타나는 민족서사시의 한계라 할 수 있다.4. 조선전기 사서에 나타나는 역사서술과 역사의식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은 고려 왕조 멸망의 당위성과 조선 건국의 합리화? 정당화를 위해 유교사관이 더욱 강조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은 건국 후 약 100년 동안 관찬 문화가 활발하게 전개된다. 이 당시 편찬된 대부분의 역사서도 관찬사서이다. 관찬사서는 전형적인 역사 서술법에 따라 체재적인 면에서의 균형이 중시되며 국가와 통치자의 목적의식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 초기에 쓰여진 사서로는『고려국사』,『동국사략』,『고려사』,『고려사절요』,『삼국사절요』,『동국통감』등이 있다.『고려국사』는 정도전 등에 의해 수찬된 사사로 고려사의 정리를 통해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고려시대 전체의 역사를 완성한 첫 사서라는 점과 고려 멸망의 당위성과 조선 건국의 합리화를 시도한 점, 수찬자가 통치이념을 정립하려는 목적의식이 강렬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동국사략』은『삼국사기』를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 권근에 의해 수찬된 사사이다. 강목법을 바탕으로 용어의 개서와 함께 인 관점에서 삼국시대의 역사를 비판 정리함으로써 삼국시대에 발현되어 고려에 계승되어 온 제반 문제점을 제기하여 이를 해결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새로운 통치이념의 정립이 서술의 주목적이다.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여 조선 초기 사회가 요구하는 유교사상과 유교적인 예절을 널리 보급시키려 한 점에서『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유교사관보다 일단의 진보가 있다 할 수 있으나 역사를 학문이 아닌 정치의 한 보조수단으로 본 점은 다음 세대인 로 기록하였다. 우왕과 창왕 때 역사기록을 반역열전에 넣은 점이나 고승과 은일에 관한 열전, 외국열전이 결여된 점이 결점이나 역사적 서술로서 비교적 과거의 사실을 사실 그대로 전하려는 객관성, 사료 수집의 충실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성종 때 이르면『삼국사절요』와『동국통감』이 수찬된다. 편년체로 쓰여진『삼국사절요』는 객관적인 서술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에서 삼국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비교적 삼국의 역사가 대등하게 서술되어 있으며『삼국사기』이외의 많은 사료적 보완이 가해졌다.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하나의 책으로 서술하려던『동국통감』의 수찬계획은 세조 때 있었으나 세조의 죽음으로 이뤄지지 못했으며 성종 때 이르러 국사에 대한 지식의 보급을 주목적으로 수찬된다.『동국통감』은 세종?세조 이래의 역사서술에 있어서의 객관화와 사료수집의 충실성 등을 보여 온 훈고학적인 서술방법과 서술내용을 계승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도전의『고려국사』,권근의『동국사략』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라는 주관적인 측면을 강조한 성리학자의 사론을 함께 담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5.『규원사화』를 통해 본 17세기 도가사학의 재인식도가사학은 유교사학이나 불교사학과는 달리 그 연구가 미진하다. 남겨진 도가사서가 극히 희귀하다는 점과 유교와 불교를 중심으로만 이해하여 온 사상사 연구 시각의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도가사학이 사학사에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소홀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민족이 시조로 생각하는 단군조선사에 관한 한 도가사서만큼 풍부한 기록을 남긴 사서는 달리 찾아볼 수 없으며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도가만큼 고유의 전통문화를 자부하고 존중하며, 존화사대사상을 비판하는 사학도 없다. 17세기에 있어서 도가적 역사의식의 성장이 가져온 하나의 결실이 북애의『규원사화』이다. 북애는 ‘자기의 장점을 잃지 않고, 남의 장점을 겸하는 자는 승리 한다’는 확고한 신념가지고『규원사화』저술에 임했다. 이는『규원사화』의 문화적?역사적 의식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선교의 숭상과 동이문화에 대
폭군의 멍에를 벗긴다-연산군을 위한 변명-최근 과거의 폭군들을 재조명 하는 역사서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이것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희대의 폭군들을 다시 살피고 진정 그들이 폭군이였는가를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러한 책들 자체가 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극악무도한 폭군이 아니면 그 시대와 상황을 빗대어 그들의 행위를 옹호하려는 취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작자가 의도 하는 이런 시각이 아니라 종래의 시각과 반대되는 이러한 시각들이 어떠한 근거들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보고 또한 다양한 역사적 시각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역사는 승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역사는 승자가 장악하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록됨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들의 생명력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 16세기에 폭군으로 낙인찍힌 그가 5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재조명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단 연산군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역대 폭군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당대에는 폭군으로 몰려 몰락의 길을 걸었으나 후대에 와서 다시 복명되었다. 그 예로서 서양의 주자로는 네로황제를 들 수 있고, 동양의 주자로는 진시황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을 치세 행위에 있어서 상당한 오해가 발견된 것이다. 네로 치세에 일어난 로마시내 대화재를 역사는 그의 행위로 서술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취객이 저지를 화재라는 설이 등장하고 그것을 네로는 근위대를 동원해 맞불작전으로 대응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를 두고 역사는 네로가 자신의 도시에 불을 지른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진시황을 폭군으로 모는 가장 큰 사건은 분서갱유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후대에 유교가 국교화 되면서 생겨난 오해라고 볼 수 있다. 분서사건에서도 함양의 왕실서고를 포함한 70여명의 박사들의 개인서고에 책이 보관되어있었고, 갱유사건 제국체제를 비방하던 유생들의 연루되어 큰 타격을 입었을 뿐 사건의 발단은 서복과 노생의 불사약 사건이 발단이었다. 즉, 진시황은 유생들을 목적에 두고 일으킨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희대의 폭군들과 마찬가지로 연산군 또한 연산군 이후 조선사회를 쥐락펴락해온 사림들의 손에 그의 행적의 많은 부분이 왜곡된 것이다. 그 이유인 즉,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들이 강력한 성리학적 왕도주의로 무장하고 연산군을 쉼 없이 공격한데서 많은 오해가 출발한다. 결국 그들은 자기네들의 이념에 반하는 패도를 구가하는 왕을 왕도주의 라는 기치아래 끌어내렸고 그러한 행위의 정당화하기 위해서 후대에도 끊임없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은 조선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조선 정계의 주류로서 연산군은 조선조 희대의 폭군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연산군이 재위하던 시기는 성종의 치세를 이어 조선 건국 후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국가 질서가 정착된 시기로서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이다. 그러한 발판은 태종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가 체제정비의 노력과 세종 때에 시행된 각종 민본정책과 문화적 번영을 거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태평성대의 그의 치세가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가는데 또 한몫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그의 통치철학은 기본적으로 왕권강화에 두어졌는데 이는 성종 때부터 삼사의 언관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들의 정치철학과는 반대노선을 달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연산군 대에 군신간의 갈등은 피해갈 수 없는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었다. 그의 치세가 난세였다면 조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국가가 혼란한 시기에는 강력한 왕권으로써 신권을 휘어잡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만 국가가 재빨리 아정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권을 행사하는 군주의 입장에서도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연산군의 부왕인 성종은 성군으로 이름나 있긴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그의 치세와 신하들의 주장을 지나치게 경청한 왕이 아닐 수 없다.또한 성종은 연산군의 어머니가 되는 윤씨를 폐비시키고 그도 모자라 사사한 부왕으로 밝히고 있다. 성종의 이러한 행위의 근본적 원인은 성종의 즉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성종은 원래 왕위계승 순서로는 제3위에 불과했으나 당시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와 왕실 최고 자리에 있는 인수대비의 조력으로 말미암아 보위를 이어받게 된다. 따라서 윤씨의 폐위를 사주한 인수대비의 말이라면 성종은 적극 수용해야만 했다. 그 결과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급작스럽게 윤씨를 폐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윤씨를 동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성종과 대비전은 극약처방을 내리게 된다. 바로 윤씨를 사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째서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은 안전할 수 있었을까. 그것 역시 그들의 이해 관계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사대주의속에서 왕실의 변동은 명에 보고 되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차기 왕이 될 세자와 관련한 문제로 번진다면 조선은 곤란한 지경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연산군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 폭군으로 몰린 그는 어떤 성향의 소유자였을까. 그가 기존의 역사서술처럼 연일잔치를 벌이고 주색에 빠져 백모를 간통하고 정무를 뒤로 한 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냥을 다니는 그러한 군왕이었을까. 그러나 이는 상당부분이 왜곡되었고 정황상 불가능함을 책에서는 밝히고 있다. 연산군 치세에 찾은 잔치는 젊은 나이에 부군을 잃고 적적해하는 대비전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문무겸치의 통치철학을 가지고 사냥을 일종을 군사훈련으로 인식한데서 잦은 사냥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는 경학과 함께 사장을 즐겨 늘 손수 시를 지어 조선왕조를 통틀어 연산군만큼 많은 시가 남아 있는 군왕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렇게 조선의 풍류군왕이었고 때문에 술을 가까이했고, 왕권강화와 문무겸치 두 가지의 목적 아래 사냥을 즐겨했던 것이다.그러면 연산군이 폭군으로 몰리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연산군 때 두 번이나 불어 닥친 피바람은 어떨까. 어쩌면 이 두 사화의 해명은 이 책의 내용 중 기존의 정설을 가장 벗어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훈구 대 사림이라는 신권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사림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것이 기존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왕권과 신권사이의 대립이 불러온 갈등이었다. 이 갈등 중에 왕권이 신권을 탄압한 사건이 연산군 때의 두 사화이다.먼저 김종직을 보면, 김종직은 성종이 매우 귀이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종직의 은 자신을 귀이여긴 군왕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조의제문은 계유정란으로 집권한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글이었다. 이는 비단 세조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조의 뒤를 이은 성종과 연산군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왕권에 대한 신권의 강력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왕권강화를 내세운 연산군에게는 더욱이 용인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또한 김종직의 성종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연산군의 판단이 결코 틀린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 연루된 자들이 대거 추살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를 훈구세력이 사림을 치기 위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밀고한 것으로 이로써 훈구세력에게 타격을 가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우리는 흔히 연산군이 이 같은 폭군의 면모를 보인 이유를 갑자사화의 배경에 있는 그의 불우한 성장 환경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가 왕이 되고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 충격으로 인해 궁중에 그 같은 피바람을 몰고 왔고 또 그것으로 인해 폭군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박종화의 소설의 영향과 또 그를 바탕으로 1987년에 제작된 영화 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폐비윤씨의 피로 물든 적삼이 소설과 영화로 인해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연민에 입각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배경이 전혀 없진 않았을 테지만 그러나 정치가 어디 그러난 연민의 정만으로 되는 것이던가. 연산군은 윤씨를 폐하고 사사하는 논의가 벌어질 때 신하들이 나서서 적극 만류하였다면 적어도 윤씨가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이는 다음에 보위를 잇게 될 세자를 생각한다면 더욱 더 만류했어야 했다. 따라서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자기 군왕인 세자에 대한 반역이라고 규정하고 그에 관계된 자들을 처벌 한 것이다. 결국 이도 따지고 보면 신권이 왕권을 능욕한데 대한 처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문명 세계를 물들이다Ⅰ. 세계의 중심축, 유럽Ⅱ.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유럽문명 세계화의 발판Ⅲ. 전파의 용이성, 지리적 요인Ⅳ. 농업의 발전,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Ⅴ. 가축의 사악한 선물, 세균 비유럽을 정복하다Ⅵ. 잉여 식량의 축척, 유럽 사회를 정주화 시키다Ⅶ. 문자, 유럽 근대 제국 통치의 힘Ⅷ. 식량 생산, 유럽문명 세계화의 궁극적 요인Ⅰ. 세계의 중심축, 유럽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서구를 중심축으로 구조화 되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에 수긍 할 것이다. 그 중심에는 유럽이 자리 잡고 있다(혹자는 미국이 중심의 축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역사가 유럽인의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그 중심에는 유럽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언제부터 유럽을 중심축으로 세계가 재편되었을까. 그 시기는 불과 몇 세기 전, 구체적으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부터이다. 이전의 유럽은 다른 대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대륙에 비해 발전이 더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계의 중심축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부터 유럽이 세계의 중심축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유럽문명 세계화의 발판15세기 급격한 향료의 수요와 더불어 재화와 명예에 대한 유럽인의 욕심으로 인해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부합해 15세기 말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하지만 신대륙, 즉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신세계 정복에 나서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총기, 쇠 무기, 말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기술과 원주민들이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등), 문자를 통한 구체적 정보의 획득, 중앙집권적 정치조직, 해양기술 등을 앞세워 아메리카 원주민 및 기타 민족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들이 정복한 아메리카 대륙의 풍부한 자원이 밑거름이 되어 유럽문명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Ⅲ. 전파의 용이성, 지리적 요인유럽이 아메리카를 손쉽게 정복한 요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럽의 군사기술과 전염병, 문자, 해양기술 등에 의해서이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청동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유럽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 천 년이 지나도록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이 청동기에 머물러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리적 요인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라시아가 동서를 축으로 이루어진 반면 아메리카 대륙은 남북을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를 축으로 길게 늘어진 유라시아 대륙은 같은 위도에 위치하여 비슷한 환경을 가졌기 때문에 동식물종, 기술 등의 전파가 용이하였다. 그러나 남북을 축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위도의 차이가 심해 동식물종, 기술 등의 전파가 불리하였다. 위도의 변화에 따른 환경의 차이로 동식물종이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Ⅳ. 농업의 발전,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콜럼버스가 상륙했을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농업과 수렵채집 생활을 병행하고 있었다. 농업도 널리 퍼져 있었지만 유라시아에 비하면 수렵채집이 차지한 지역이 훨씬 넓었다.) 동물의 가축화와 식물의 작물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동물의 가축화와 식물의 작물화는 농업의 식량생산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축화 된 동물은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이며, 축력을 이용한 쟁기질을 통해 더 넓은 땅과 비옥하지만 갈기 어려운 땅도 갈 수 있다. 지력을 높이는 분뇨의 획득과 농업에 관련된 일들(탈곡, 제분, 관개 등)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또한 작물화 된 유라시아의 곡류는 옥수수에 의존한 아메리카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었다.)이처럼 농업의 식량생산에 큰 영향을 끼치는 동식물의 가축화?작물화가 유라시아에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라시아에 가축화?작물화가 가능한 대형 야생 포유류와 식물종이 가장 많았으며 실제 가축화?작물화 된 비율도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반면 아메리카 대륙은 가축화?작물화 할 만한 야생 동식물이 거의 없었고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작물화 된 식물이나 가축화된 소수의 동물들이 도입될 수도 없었다.) 유라시아 대륙이 식량 생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동식물의 가축화?작물화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Ⅴ. 가축의 사악한 선물, 세균 비유럽을 정복하다동물의 가축화는 유럽 발전에 큰 축복이었다. 가축화를 통해 유럽 사회는 식량 생산의 증가와 기술의 발달, 도시와 세계 교역로의 발달 등을 촉진시켰다. 반면 세균이라는 사악한 선물도 유럽에 주었다. 조밀한 인구가 열악한 위생환경 속에서 사는 전염이 용이한 도시와 세계 교역로의 발달은 세균에게 더 없는 행운으로 수많은 유럽인들이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에 신음하며 죽어갔다.) 이처럼 오랫동안 유럽을 괴롭혀오던 세균은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여러 지역의 진출을 계기로 다시 유럽에게 축복을 선사해주었다. 아직 가축화가 미비했던 아메리카 대륙과 세계 여러 지역에 구세계의 각종 병원균을 퍼트려 원주민의 대부분의 목숨을 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럽은 여러 다른 대륙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가축의 사악한 선물이 축복으로 다시 변하는 순간이었다.Ⅵ. 잉여 식량의 축척, 유럽 사회를 정주화 시키다동식물의 가축화?작물화로 인한 식량 생산의 증대는 인구의 조밀화와 정착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식량 생산을 위해 불가피하게 시작된 정착 생활은 산아 간격의 단축을 야기, 인구 밀도를 높였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자 대규모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 집권적 조직이 형성되었다. 인구 규모가 커질수록 구성원 사이의 갈등 해결, 의사 결정, 공간적 현실, 경제적 측면 등의 문제가 발생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복잡한 사회, 즉 중앙 집권적 조직의 형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또한 정착 생활은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불필요하던 잉여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잉여 식량의 저장 결과 왕과 관료와 같은 엘리트 계급, 필사경과 기능인 등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전문가들, 공공 토목 공사에 동원된 농경민 등등 경제적 전문화와 사회적 계층화된 사회가 가능해졌다.)마지막으로 정착 생활은 기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술이 가장 빠르게 발달할 수 있는 곳은 생산성이 높고 면적이 넓으며 인구가 많은 지역, 즉 잠재적인 발명가도 많고 서로 경쟁하는 사회도 많은 지역이다.) 유라시아는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역으로 정복 전쟁에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인 총기와 쇠 같은 것들이 만들어진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조선후기 몰락 양반 이야기-숙재 조병덕의 경우를 중심으로-1. 머리말2. 조병덕의 가계3. 조경모독(朝耕暮讀)과비기력불식(非基力不食)4. 몰락 양반의 체면유지를 위한 노력5. 양반의 이중성6. 맺음말1. 머리말본 레포트에서는 숙재(肅齋) 조병덕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조선후기 몰락 양반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호(號)를 숙재라고 했던 조병덕은 조선후기의 문인이요, 조잠의 후손으로, 순조 1년(1800) 한성 황화방 취현동에서 태어나 고종 7년(1870) 충청도 남포현 심전면 삼계리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조병덕은 무엇보다도 17, 18 두 세기에 걸쳐 화려한 지위를 누린 노론 화족의 후예로서, 그의 생애는 조선말 세도정치기에 이은 대원군 집권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 시기에 일어난 끊임없는 민란과 신분제의 동요, 서양 열강의 개항 압력, 천주교의 확산 등 소위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이에 본 레포트에서는 먼저 조병덕의 가계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고, 이어 생활 방식을 통해 그의 사상을 검토해보았다. 마지막으로 격변의 시대 속에 살았던 조병덕을 통해 몰락 양반이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노력과 양반의 이중성을 살펴보았다.2. 조병덕의 가계조병덕의 집안은 양주 조씨로 시조는 조잠. 양주 조씨 일문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말생의 손자인 정(挺)이 1619년(광해군 11)에 우의정에 오름으로써 시작된다. 인조의 국구(國舅)가 된 창원, 현종 때의 형조판서 계원(啓遠)에 이어, 계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登科)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계원의 다섯 아들 중에서 조병덕의 직계 조상은 조희석이다. 조희석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했다. 이른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조태채도 그의 아들이다. 아들들이 현달했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번성했기 때문에 조희석은 하나의 파를 이루었는데, 그가 괴산 군수를 지냈으므로 ‘괴산공파’라고 한다. 괴산공의 둘째 아들 조태휘는 영천군수를 지냈다. 가계도를 보면 12세 조계원으로부터 13세 조희석을 거쳐 14세 조태휘에 이르는 3세대가 양주 조씨의 전성기였음을 알 수 있다.조태휘의 장남 조규빈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부평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장남 조영진은 조병덕의 고조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조병덕의 증조부 조창규도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의 벼슬에 올랐다. 조부 조진대는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조병덕의 아버지 조최순은 둘째 아들이다. 첫째 조의순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으나, 조최순은 합격하지 못하고, 셋째 조후순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막내 조이순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령을 지냈다. 조병덕의 형제는 셋으로 그는 둘째였다. 형 조병헌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수령을 역임하다가 임지에서 죽었으며, 아우 조병우는 요절했다. 조병헌의 슬하에는 4형제가 있었다. 장남 조봉희는 생원시를 거쳐 남원부사까지 지냈다. 둘째는 조인희다. 셋째 조용희는 조병덕의 동생 조병우에게 출계했으며, 넷째 조귀희는 일찍 죽었다.조병덕의 넷째 삼촌 조이순은 진사과에 합격하고 임피 현령을 지냈다. 조이순의 아들 조병로는 진사과를 거쳐 나중에는 호조참판까지 지내, 조병덕의 할아버지 조진대의 후손들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다.조병덕과 동당은 아니지만 같은 괴산공파의 친척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심암 조두순이다. 조두순은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조태채의 5대손으로 조병덕에게는 아저씨뻘이 된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빠르게 출세하여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정치적으로는 노론을 대표하는 노론의 종주가 되었다.이렇게 조병덕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의 선조들이 높은 관직을 누린 화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2세, 13세, 14세의 3대가 가장 전성기였으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정치적으로 점점 몰락하고 있다.)3. 조경모독(朝耕暮讀)과 비기력불식(非基力不食)조병덕이 삼계리로 이사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조상의 산소가 있는 삼계리에 살면서 초하루와 보름에 조상의 묘에 성묘하는 평소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위기지학을 하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는 것인데, 사실은 이것이 낙향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조병덕의 생계수단은 농사로 공부와 함께 농사를 병행해야 했던 그가 추구했던 가장 이상적인 생활 방식은 ‘조경모독’과 ‘비기력불식’이었다. 이는 그가 어느 후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잘 나타나있다.다만 ‘농사일을 보느라 독서할 여가가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 동소남의 ‘낮에 밭 갈고 밤에 책 읽는다.’고 한 말과 서유자의 ‘자기 노동에 의한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설을 듣지 못했습니까? 이것 또한 학문 가운데 하나의 일입니다. ‘힘을 다하여 밭을 갈며 공손히 자식의 직분을 다 한 것이 어찌 위대한 순임금이 아닙니까? 고봉이 독서에 빠져서 보리를 빗물에 떠내려 보낸 것은 성인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독서의 뜻이 아닙니다.조병덕은 경제를 학문을 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는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을 통해 학문에서 자기의 주장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에 불과할 뿐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으로서 여전히 체면을 앞세우며 지출을 줄이지 못한 조병덕은 자제배와 문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으며 심지어 도와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삼계리로 낙향하며 마음먹었던 초심은 사라지고 독서에 빠져 보리가 떠내려간 것도 모른 고봉을 비난하던 자신이 어느덧 ‘고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낙향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던 조병덕에게 ‘조경모독’이란 그야말로 ‘하나의 이상’에 불과했던 것이다.)4. 몰락 양반의 체면 유지를 위한 노력“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가 있을 따름 입니다.” 맹자가 양혜왕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은 이익을 거부하고 인의를 표방했다. 조병덕 또한 맹자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았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한 조병덕의 생계수단은 농사였다. 그러나 그의 농토는 1840년대부터 계속 축소되어, 결국 영세농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졌지만, 그는 생활 규모를 축소하거나 간소화하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러 상경하기 위해 농우(農牛)를 판 적이 있었고, 삼촌 병문안 하러 상경하기 위해 불에 탄 이부자리를 수리하고 아버지 제사에 부족하기 위해 논을 팔려했다. 이러한 조병덕의 모습에서 경제적 현실감이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다.5. 양반의 이중성조병덕의 편지는 도덕과 명분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세속적인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의 몇 가지 금기사항 가운데 특히 금전거래에 관한 기록이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다. 조병덕이 자주 사용하던 관용구 중 하나가 “손에 동전 한 푼이 없어 꼼짝달싹 못한다.”란 말인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편지를 전해주던 전인을 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와 “이 편지는 반드시 즉시 태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말미마다 적은 까닭은 그 때문이다.조병덕은 생계를 위해 책을 판 일이 적지 않았고, 가마비를 아끼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어쩌다 손님이 갑작스레 닥치면 자신의 밥그릇에 행주를 깨끗이 빨아서 넣고 그 위에 쌀밥을 덮어야 할 정도였으니,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유력한 친척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은 당연했다. 또한 장남의 과거 응시 비용에 큰 부담을 느껴 “어찌 반드시 과거에 응시하려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