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리골레토’ 감상문오케스트라, 뮤지컬 등을 감상한 경험은 종종 있었지만,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싼 오페라 티켓 값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오페라의 많은 예술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교양이 풍부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오페라에서 어떤 배우가 어떤 아리아를 어떻게 부르더라, 전체적인 분위기와 작품의 완성도는 어떻더라는 것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오페라를 본다는 생각보다는 오페라 극장 속을 들여다보고 초등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 작품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오페라에서 어떤 교육 내용을 뽑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처음 들어가 본 오페라 극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으며 규모 도 커서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는 베르디의 리골레토가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계단식 극장에 사이드에 놓여진 의자는 영화 속에서 보았던 16세기 극장의 모습을 조금이나 짐작하게 해 주었다.질다역을 맡은 김지현 소프라노의 나레이션으로 공연의 막이 올랐다. 스크린에 따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다. 한글로 불렀다면 부르는 사람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생생하게 느꼈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어 리골레토 자체의 비극성은 좀 더 잘 전달되었다. 그런데 만토바공작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배경으로 하는 첫 장면부터 약간 당황스러웠다. 술과 향락을 즐기는 백작의 파티 장면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본다면 단순히 선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남자가 여자들의 신체를 더듬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에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전에 예술의 한 장면으로 볼 것을 당부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빅토르 위고의 원작 「왕의 환락」을 각색해서 만들었다는 오페라 리골레토는 곳곳에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있기는 했지만 오페라를 처음 봐서 그런지 약간 지루하기도 하여 공연 내내 몰입해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나쁜 줄을 알지만 빠져드는 만토바공작의 노래, 만토바공작에게 지고지순한 질다의 마음을 울리는 순수하면서도 절절한 노래는 가을밤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매우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딸 질다를 걱정하는 애틋한 부성애를 지닌 리골레토의 묵직하고 힘 있는 노래들이 실습으로 지친 나에게 힘을 주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리골레토가 자신이 청부한 자객의 칼에 찔린 딸을 보는 장면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라고 느꼈다. 외출도 금지할 만큼 애지중지 키웠는데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신의 딸의 생명은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만토바공작은 죽이라고 말한 리골레토의 이중적인 모습이 벌을 받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 옛날 빅토르 위고는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냈을까.
교육의 목적에 따라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한 인간논제: 교육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불행하게 하는가?교육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먼저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교육은 자연 상태의 인간, 즉 미숙한 상태의 인간에게 인류문명을 통해 집적된 지식을 전수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해줌으로써 한 인간이 합리적이고 성숙하며 건전한 인격체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나아가 개인의 여러 잠재능력을 발현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아실현에 이르게 한다. 이렇듯 교육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측면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교육의 순기능은 개인적, 사회적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이 교육의 혜택을 고루 받은 것은 아니다. 현대 민주국가의 보통교육, 의무교육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별, 계급, 인종 등에 의한 차별로 인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동시에 자기실현, 잠재능력 발휘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교육이 차별적으로 행해지던 과거와 비교해볼 때 현대의 인간들은 의무교육 등을 통해 다소간 평등한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능력 발휘와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교육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측면이 있다.위에서 논의한 교육의 여러 가지 순기능 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명제에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몇몇 현실적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예는 이웃나라 북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정치적, 이념적 목적을 위해 이른바 ‘세뇌교육’을 한다. 즉 북한에서는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정치적, 이념적으로 건전하며 동시에 지배층에게 헌신, 복종하는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유지에 해가 되는 다수의 위협을 줄이게 된 것이지만, 그러한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행복해졌다고 보기 어렵다.교육이 지배층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이용된 것은 북한뿐만이 아니다. 과거 왕조국가 등에서는 교육이 지배층 즉, 양반의 권력 유지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현재 민주국가 역시도 이러한 측면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맨 위에서 교육이 사회적,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그 사회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고, 그것은 주로 사회의 majority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시대나 사회의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나 사회의 majority의 논리가 어느 정도는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자아실현이 좌절되고, 지위 상승을 기대할 수 없었던 요인이 사회에 있었는데 표면적으로 교육의 기회를 열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좌절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수업, 양질의 씨앗을 심고 가꾸자.‘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를 읽고씨앗을 심고 가꾸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농부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기까지 틈틈이 밭에 나가 물을 준다. 비가 많이 내려 뿌리가 썩을까, 쨍쨍한 태양 볕에 말라죽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며 돌본다. 하지만 그들은 빨리 자라기를 바라며 성급히 덜 성장한 싹을 뽑아 올리지는 않는다. 학생이 배움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는 교사의 자세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학생들에게 질 좋은 씨앗을 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장이 없다 하더라도 과하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히 물을 주고 인내하며 끊임없는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이 책에서는 어떻게 좋은 배움의 씨앗을 고를 수 있을 지, 덜 자란 싹을 뽑아 올리지 않고서도 건강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내 학창시절 교실의 풍경을 돌아본다. 선생님께서는 한 손에 교과서 혹은 참고서를 들고 계시고 한 손에는 분필을 들고 계신다. 교재를 읽으시며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어 주시고 판서를 해 주시면 나를 비롯한 다수의 학생들은 그 내용을 열심히 공책에 옮겨 적는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왜 배워야 하는지는 설명해 주시지는 않는다. 그것이 입시 시험에 출제되기 때문에 한 문제라도 더 맞히려면 열심히 외워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학습 속에 기쁨이란 없다. 치열한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졸음을 이겨가며 치열하게 암기한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하다. 많은 내용을 배우고 그것을 암기 했지만,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내용을 외웠었는지 기억이 흐리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목표-달성-평가’를 단위로 하는 ‘계단형’ 교육과정의 폐해를 경험한 것이다.입시학원도, 공장도 아닌 학교에서 학생들의 사고를 자극하지 않는 딱딱한 지식을 모두에게 똑같이 주입하는 것이 효율적인 교육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학생들은 학교를 자아실현을 위한 배움의 장소가 아닌 입시를 위한 하나의 단계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언젠가 부터 그 자리마저 학원에게 내주게 되었고 학교는 학원에서 이미 배운 내용을 반복하는 지루한 장소, 밤늦게까지 이루어진 사교육의 피로를 푸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학부모들도 학교 교육을 통해 자녀들이 전인적인 성장을 경험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사교육을 통해 충분히 인생의 성공을 경험할 수 있지만, 학교교육을 거치지 않았을 때의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들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있는 듯하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신뢰하지 않는 것,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이 오늘날 공교육의 현실이다.그렇다면 교사들은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던 시절’ 만을 그리워하고 사교육에게 밀린 현실을 체념하며 학생들이 수업을 듣든, 듣지 않든 과거 그들의 수업방식을 고집할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의 창조, 협동적인 배움에 의한 교실 경영, 프로젝트 단원에 의한 교육과정의 창조, 그리고 배움의 공동체로서의 학교 만들기를 실천을 모토로 일어나고 있는 세계 각 국의 조용한 혁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수업을 계획하고 총괄하는 주체는 교사이기에 교사가 앞장서서 무너져가는 교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며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대응’을 중심으로 한 상생하는 배움과 수업이 책에서는 거짓 주체성을 추구하는 교사의 의식과 그 의식으로부터 생겨나는 수업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대응’을 중심으로 배움이 일어나는 수업을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 또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학습을 통해 개개인이 주체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라고 생각해 왔었고, 이러한 것들이 만들어 낸 수업의 형식주의의 문제점 또한 생각하지 못했었다. 수업참관 실습을 통해 보았던 초등학교 교실을 떠올려 보았다. 교사가 손을 든 학생들 중 발표할 학생을 골라주고, 그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제가 발표해 보겠습니다.” 라고 발표를 시작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나머지 학생들은 동의, 반대, 보충 3가지의 손 신호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이러한 방법이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할 수 있어 좋고, 교사에게는 학생들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를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니 좋은 방법 이라고 생각했었다. 나 또한 수업에서 편리함을 추구하는 교사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것이 얼마나 경직된 발표 방법인지, 얼마나 아이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사고를 구속 하는 행위 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이 책에서 밝혔듯, 아이들의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는 수업에서 중요하나, 그것이 교재, 교사, 다른 학생들의 사고와 어우러졌을 때 의미가 있기에 수업도 배움도 자유로운 대응이라는 반응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교사의 말이나 교실 친구들의 말에 대한 대응으로 무엇인가 생각해 내게 되고, 그 말을 교재의 내용이나 다른 친구들과의 말과 비교하고 생각의 차이를 좁혀 나가는 협동적이고 역동적이며 반성적인 배움을 경험해야 한다. 이 때 교사는 끊임없이 교실 속 아이들의 언어를 듣는 신체로써 아이들 한명 한명과 교감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수업을 통해 교사는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과의 신뢰를 형성할 수 있게될 것이다.‘교실 열기(수업 공개)’올해 교육실습을 나간 학교에서는 학교에 새로운 교사가 들어올 때 마다 그들의 수업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었다. 내가 참관한 학급 담임선생님께서도 학교에 오신 첫 해이기 때문에 수업 공개를 앞두고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을 공개하고 교사 협의를 통해 이 수업에서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날카롭게 지적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몇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수업 세안을 짜고 어떤 수업을 만들어나갈 것인지를 구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수업 공개는 그만큼 교사들에게 큰 부담이다. 최근 EBS 다큐프라임 ‘학교란 무엇인가’에서도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며 방송에 자신의 수업을 공개한 교사들의 사례를 보았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대중 앞에서 벌거벗는 기분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업을 공개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촬영한 화면을 다시 보며 교육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을 때는 눈물을 보이기도 할 정도로 속상해 했지만, 그들은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수업 방식을 고쳐 나갔다. 그러자 수업을 듣지 않던 학생들이 교사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뻐하며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교사는 점점 더 자신감을 얻어갔다.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집단인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다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수업을 놓고 다른 교사들, 넓게는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공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발전 없는 수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수업의 실패를 막고, 수업의 질을 높여 공교육의 붕괴현상을 바로잡는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보여주기 식의 수업으로는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수업공개를 통해 드러난 자신의 수업의 장단점을 일상의 수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함께 할 때 수업공개의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학교조직을 단순화하기’수업참관 실습을 나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교사에게 수업 이외의 업무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었다. 한 교사가 학교 내에서 중복된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도 다양하고 회의도 잦았다. 선생님께 “이렇게 바쁘신데 수업준비는 언제해요?”라고 질문을 드리자 선생님께서는 놀랍게도 “업무에 치이다 보면 현실적으로 수업준비를 못하는 날이 많다, 아이들에게 책을 펴라고 말하는 순간 가르칠 내용이 무엇인지 눈으로 빠르게 훑어본다.” 라고 말씀하셨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배움을 경험하게 하여 전인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본질적인 역할인데 수업에 관한 연구, 연수, 교육과정을 만드는 작업에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잡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수업연구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교사가 수업을 준비하려는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드는 복잡한 조직 구조를 단순화하지 않는 이상, 수업의 질을 높이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공교육 붕괴를 바로잡는 것은 점점 더 먼 이야기가 되어갈 것이다.
진리와 자기 정체성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명쾌한 답변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의 정체성이란 정의되어질 수 없으며, 이미 우리 삶속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존재론적 친밀감으로 인해 정의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개인이 노력으로 얻어낸 표면적인 조건들 즉, 사회적 지위나 재산, 학력 등을 정체성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조건들의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으로는 더욱 더 공허함을 경험하게 되었고, 정체성에 관해 재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그동안 철학적 사색의 목적에 관한 정의들이 추상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이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칸트가 정의한 ‘한계’의 개념을 통해서 철학적 상상력과 각 개인의 정체성을 연결시키려 노력하고, 진리를 향한 상상력을 자기 정체성과 연관시키려 노력하는 등 진리에 대한 철학적 상상을 멈추지 않았고, 두 가지 방향의 관점으로 전개되어 왔다.첫째, 진리의 세계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 욕심으로 얼룩진 변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변하지 않는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관점이다. 고대 서양철학에서는 변하지 않는 세계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실체’라고 정의하였다. ‘실체’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개념도 필요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자기원인이자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절대적 실체로부터 세상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 자연 그 자체이자 최고의 정신인 신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부질없고 변화무쌍한 현상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자의 부정 이며, 모든 변화하는 것들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절대자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가장 일천한 자연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을 벗어버림으로써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 형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고 절대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경쟁 사회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진리란 마음의 충족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관점이 될 수 없다. 또한 이 관점은 인간적 조건을 무시함으로써 현실적 조건을 망각하는 커다란 단점이 있다.둘째, 진리를 한 개인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 맺는 관계’ 속에서 열려지는 존재의 선물로써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초월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열려지는 존재의 세계로 이해한다. 이는 철학을 자연적 인과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을 뛰어넘어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벗어나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자연적 인과법칙은 생물학적, 진화론적 세계관과 유물론에 영향을 주어 사람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왔다. 생물학적, 진화론적 세계관은 적자생존의 관점을 취한다. 즉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길러야 하며 이렇게 인정된 사회적 조건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생철학자인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서도 발견되는데,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조건을 일정한 사회능력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의미는 사회적 능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자체이다. ‘의미 있는 삶’은 어떠한 외부조건도 아닌 나의 삶의 자리만으로 열리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인 것이다.유물론 또한 세계를 구성하는 기초적인 요소가 물질이라는 존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유물론의 대표적인 학자로써 ‘소외’의 개념을 사용한 마르크스는 인간의 물질적 삶 및 생산 활동을 중심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한다. 그는 인간적 조건을 오로지 물질에만 두었으며, 물질적 어려움과 자본주의의 착취 등 외부적 어려움 속에서도 ‘의미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외면하였다. 이렇게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을 인간의 가치로 환원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무시되었으며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우울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싱어는 개인의 인격을 사회적 가치로 환원하는 자연적 가치관과 공리주의적 인간관을 결부 시켰다. 그는 생태계 내에서 인간만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윤리 기준으로 ‘자기생명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격 속에 들어있는 절대적 존엄성을 상대화 시키고, 인간과 인격의 분리를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생명에 대한 관심의 크기에 따라 절대적 존엄성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상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인권의 근거가 되는 인간의 존엄함이란 합리성과 자기의식,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에 제한되어야 하며, ‘자기 생명에 대한 관심’을 지닌 인격체들이 질 높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가치한 것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싱어의 공리주의적 인격이론의 맹점 역시 환원주의에 있다. 인간의 가치를 사회적 조건과 동일시하였을 때 표면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으며, 충족시킨 인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고 있었던 사회적 가치들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싱어는 모든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그 자체로 생존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의 삶의 자리를 배려하고 인정하는 것임을 부정한 것이다.존재론적 지위란 태어남과 동시에 갖게 되는 각 개인의 삶의 자리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변적인 외부 조건에 호감을 갖거나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가치, 즉 존재론적 지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실존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즉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타인의 실존을 책임지고자 하는 나의 강렬한 의지이며 삶을 통해서 배워 나가야 할 일종의 능력인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실존에 대답하고자 하는 존재의 약속인 사랑을 이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실존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어떠한 사회적인 조건으로 자신을 가린다 하더라도 존재론적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개인의 삶은 일정한 조건이 상실된다고 해서 전락하는 것이 아니며 조건에 의해 환원 될 수 없다. 개인의 삶의 자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사회적 조건으로 따질 수 없으며 그것은 삶 자체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조건은 단순히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조금 더 가진 선물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칸트는 이 사랑의 개념을 실천이성으로 파악 하였다.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꺼려하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막아줄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자신에 대해 홀로 생각 할 때 어두운 생각과 슬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근심, 절망 등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이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삼투압에 의한배추 절이기!생활화학 1-D배추 절이기의 원리김장 할 때 배추가 절여지는 원리, 정수기의 원리, 식물이 물을 흡수하는 원리 등은 모두 삼투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활동에서는 배추를 직접 절여보고, 어떻게 배추가 절여질 수 있는지 탐구한다.1. 삼투압(P는 삼투압, C는 용질의 몰농도, R은 기체상수, T는 절대온도)삼투압이란 용액 속으로 용매가 삼투(저농도 용액에서 고농도 용액 쪽으로 세포막을 통하여 물이 이동하는 것)하려는 힘이다. 용매분자는 통과되지만 용질분자는 통과되지 않는 반투막으로 용액의 상(相) Ⅱ와 순수한 용매의 상 Ⅰ을 칸막이하면, 용매분자는 Ⅰ에서 Ⅱ로 반투막을 통과하여 삼투에 의해 이행한다. Ⅰ에서 Ⅱ로 용매가 이동함에 따라 Ⅱ의 부피가 증가되고 Ⅰ에 비해서 Ⅱ의 압력이 커진다. 이 압력은 용매의 이동(삼투)에 저항하는 힘으로서 작용하며, 삼투의 힘과 균형을 이룰 때 평형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을 삼투평형(osmotic equilibrium)의 상태라 하고, 이때 상 Ⅰ과 상Ⅱ의 압력차를 삼투압이라 한다. 삼투압을 측정하는 장치는 삼투압계(osmometer)라 한다.1877년 독일의 식물학자 W. 페퍼는 삼투압에 관한 최초의 실험으로서, 페로시안화구리막을 반투막으로 하여 각각의 온도·농도에서 설탕수용액의 삼투압을 측정하고 실험적으로 다음의 관계, <삼투압은 일정 온도에서 농도에 비례하고, 일정 농도에서는 절대온도에 비례한다>고 하는 것을 밝혀냈다. 1887년 네덜란드의 물리화학자 J.H. 반트 호프는 페퍼의 실험 결과에 근거를 두고 다음 관계식을 도입, 열역학에 기초하여 증명하였다.삼투압을 P 기압, 용질 n mol을 용해하는 용액의 부피를 Vℓ, 용액의 절 대온도를 T, 기체상수를 R라 하면, 용액의 농도가 그다지 크지 않은 범위에 서 PV = nRT라는 식이 성립된다.삼투압을 측정함으로써 용질의 분자량을 정하거나, 분자량을 아는 물질의 용액 속에서의 해리도를 구할 수가 있다.[그림 1][그림 1 설명] 반투과성 막을 경계로 한쪽에는 설탕물, 다른 쪽에는 물을 넣으면 설탕 분자는 막을 통과하지 못하지만 물분자는 막을 통해 서로 반대쪽으로 이동한다. 이 때 이동하는 물 분자의 수는 서로 다른데, 물만 들어있는 쪽의 물분자 농도가 설탕물 쪽의 물분자 농도보다 더 크기 때문에 확산의 원리에 의해 물만 들어 있는 쪽에서 더 많은 물분자가 설탕 용액 쪽으로 투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U자 관에 반투과성 막을 끼우고 양쪽에 각각 물과 설탕용액을 넣으면 삼투에 의해 물의 수면은 낮아지고 설탕 용액의 수면은 높아진다. 이 때 수면의 상승을 막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압력을 그 용액의 삼투압이라고 하며, 삼투압은 용액의 농도에 비례하여 다음처럼 나타낼 수 있다.2. 생활 속의 삼투압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삼투압 현상들을 접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배추 절이기와 식물의 물 흡수, 정수기와 관련한 삼투압 현상을 알아보도록 한다.1) 배추 절이기와 삼투압배추의 약 90%는 물, 나머지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추의 물은 세포막 속에 담겨져 있다.세포막은 여러 화학물질 중에서 물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반투막 구조로 되어있으며, 세포가 살아있는 동안 세포 활동에 필요한 여러 화학물질이 선택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특별한 통로가 있지만 세포가 죽으면 이런 통로는 모두 막혀버린다.배추를 소금물에 넣으면 열역학 법칙에 의해 세포에서 물이 빠져나오게 된다.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온도와 압력이 일정한 상태에 있는 분자들은 에너지가 낮아지거나, 혹은 더 많이 흩어진 상태로 옮겨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분자들이 얼마나 흩어져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 엔트로피다. 즉 일정 온도와 압력에서 분자들은 작은 에너지와 큰 엔트로피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이 분자 세계의 기본 법칙이다.배추의 세포 속의 물은 소금물보다는 비교적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다. 소금물이 엄청 진하지 않다면 소금물이나 세포 속의 물분자의 에너지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소금과 함께 섞여 있는 물분자는 세포 속에 있는 비교적 순수한 물분자보다 더 심하게 흩어져 있어 엔트로피가 큰 상태라 볼 수 있다.세포 속 물분자는 엔트로피가 더 큰-안정된 상태의-소금물 쪽으로 빠져나온다. 그러면 배추는 원래의 모양을 잃어버리고 김치 담그기에 적당하게 절여지는 것이다. 세포 속의 물이 소금물 쪽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정도를 나타낸 것이 바로 삼투압이다2) 식물과 삼투압(S는 흡수력, P는 삼투압, W는 팽압)세포의 수분 흡수력은 삼투압이 높을수록, 팽압이 낮을수록 왕성하다. 식물세포에서는 세포의 농도가 높을수록 증가한다. 식물세포에서는 세포의 팽압(식물 세포를 저장액에 넣었을 때 세포가 물을 흡수해서 팽창하는데, 이때 세포막이 세포벽에 가하는 압력)이 물의 흡수를 방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원형질의 삼투압은 생물의 종류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어떤 용액과 비교하여 삼투압이 높은 것을 고장액, 낮은 것을 저장액, 같은 것을 등장액이라고 하는데, 고장액과 저장액을 반투과성 막을 사이로 해서 두면 저장액 쪽에서 고장액 쪽으로 물분자가 이동하여 전체적으로 농도를 같게 유지하려고 한다.원형질 분리는 식물 세포를 고장액에 담갔을 때 액포 속의 물이 세포 밖으로 빠져 나와 원형질의 부피가 줄고 세포막이 세포벽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이다.3) 역삼투압 정수기의 원리두 용액의 농도차에 의해 물은 저농도에서 고농도로 흐르는 삼투현상에서, 두 용액이 100ppm의 농도차를 보이면 약 1프사이(psi)의 삼투압이 발생한다. 이 때 고농도 용액에 삼투압 이상의 압력을 가하면 물은 역류하여 고농도에서 저농도로 흐르게 되는데, 이때의 압력을 역삼투압이라 한다.역삼투압 정수기는 바로 고농도에 강제로 압력을 가해 물을 저농도 쪽으로 이동시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각종 불순물이 섞여 있는 농도가 높은 물에 압력을 가하여 반투막 역할을 하는 멤브레인을 통과할 때 불순물은 걸러주고, 순수한 물과 용존산소 및 미량의 미네랄만을 통과시켜 정수하는 방법을 이용한 것이 역삼투압 정수기이다.4) 김치의 발효와 삼투압발효식품으로 유명한 김치는 양념류의 삼투압에 의한 수분의 교환과 배출로 인해 만들어진다.김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게 된다. 소금은 삼투압 작용으로 맛을 내게 할 뿐 아니라, 김치를 보존할 수도 있게 해준다. 소금에 절이면 염분이 채소에 침투하는 동시에 탈수 작용이 일어나 채소에 들어 있던 수분이 밖으로 빠져 나오는 삼투압 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바깥쪽의 소금은 침출된 수분이 용액화 되면서 삼투압이 발생하여 더욱 침투성을 높이게 되어 김치가 된다. 이러한 소금의 작용은 채소 뿐 아니라 다른 재료들에도 똑같이 작용한다.삼투압 작용에 의해 채소의 숨 쉬는 세포를 죽임으로써 세포와 세포 사이의 성분을 교류시켜 효소의 작용을 촉진한다. 이로 인해 채소의 풋내가 없어지고 미생물과 효소가 작용하여 김치가 숙성되고 맛과 영양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발효과정에서는 양념 뿐 아니라 미생물의 작용도 중요하다. 김치가 익으면서 생기는 젖산균은 김치를 숙성시키고, 효소는 채소의 유기성분과 결합하여 맛을 내게 하고 부패를 억제시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