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971010 김예림너구리의 탈을 쓴 인간들의 천태만상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고찰.인간은 태초 이래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생물의 자격으로 척박한 땅을 개발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복지를 추구해왔다. 그러한 추구의 여파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삶의 터전의 보이지 않는 파괴는 필요악의 개념처럼 어쩔 수 없는 개발의 이면처럼 존재했던 것 같다. 물론 보이지 않는 파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신음하는 지구의 면면은 이 땅을 지배하다 시피 살아온 인간들에게 수많은 신호를 보내왔지만 인간들은 보이면서 보지 않으려 회피해왔던 거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행동 양태를 보이는 인간들은, 태초에는 모두 하나의 뿌리로 시작하여 무분별한 개발의 수혜를 입고서 다양한 가지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인류의 복지증진이라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개발을 추구하여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들과 이기적인 행동의 결과로 신음하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로 나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신음하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실질적인 정책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얻은 것이 비단 윤택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수많은 생명들을 잃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로써, 소설로써, 그리고 영화 등의 예술작품으로써 힘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 직접적으로 말하고자하는 바를 내비추지 않는다. 환경파괴와 관련된 여러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개발의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서술함으로써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개발 피해자인 너구리의 입장을 통해 무분별한 개발을 자행하던 인간들에게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함을 가장 잘 나타낸 좋은 작품이 아닌가 한다. 이 애니메이션이 말하고 하는 바는 단순히 인간의 욕심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개발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작품 곳곳에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장치를 심어 놓음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요소들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시 되는 상황을 해결할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리적인 제시를 해보도록 하겠다.먼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가장 중심적인 틀은 하나의 사항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의 대결 구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들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더라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그 수혜를 통해 서로 다른 방향의 가지로 뻗어나갔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맞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삶의 양태를 너구리 사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개발을 지속해야한다는 입장과 개발을 그만두고 환경을 살려야한다는 입장 그리고 그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도 개발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자는 너구리들과 좀 더 온건하게 대응하자는 너구리들, 그리고 그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너구리들로 세력이 나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감독의 의중은 이러한 의견 분열이 가져오는 결과를 너구리라는 메타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의견 분열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결국 요괴대작전이라는 하나의 단결된 상황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의 결과는 대소동으로 치부되며 끝날 뿐 이였다. 이를 통해 생각해본다면 분열된 상황에서 도출된 합의된 사항은 우물 안 개구리식의 논리로 치부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본 영화가 시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너구리들이 머리를 쥐어짜낸 묘안이자 인간들에게 보내는 진지한 경고였던 요괴대작전은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단순한 흥미위주의 퍼레이드로 느껴졌던 것처럼 결국 분열된 상황에서 도출된 합의적 의견은 외면상 통일된 의견일 뿐이지 무결점의 대안은 아니라는 것이다.분열된 의견의 대결구도 뿐만 아니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계층 간의 대조적 상황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다. 바로 변신술이 가능한 너구리들과 변신술이 불가능한 너구리들의 모습이다. 처음에 이러한 장면을 보고 느꼈던 것은, 능력의 여하에 따라 삶을 어떻게 꾸려가는가가 천차만별인 우리네 인간과 똑같구나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비적 구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의 삶과 연관시키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이밖에도 장면 하나 하나에서 보이는 상황은 어찌 보면 감독이 인간사회에서 문제시했던 것을 너구리의 행동에 빗대어서 비판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쿠데타를 일으키는 너구리 곤타의 행동이 너구리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장면을 통해서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폭력적 행위를 일삼는 것은 결국엔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맥도날드 햄버거나 캔터키 치킨에 환장하는 너구리들의 모습은 서구문화에의 굴종에 찌든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개발을 막기를 원하면서도, 인간의 개발 행위를 막으면 앞으로 인간이 주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너구리들의 모습은 개발을 통해 얻는 이득과 그 여파로 인한 두려움사이에서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처음에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보고나서는 단순히 개발을 지속하느냐 개발을 중단하느냐의 문제만을 떠올렸다. 우리네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개발이 너구리를 비롯한 다른 생물들에게는 서식지 파괴라는 어두운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걸 너구리라는 동물의 귀엽고 순수한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서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이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한 것의 일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개발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요 흐름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면과 치부를 너구리를 통해 보여주는 풍자와 그리고 이를 통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 바로 감독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가볍게 보지 않고 깊은 생각을 한다면 너구리의 탈을 쓴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똑같이 구현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구리의 귀여움을 통해 미화된 것도 아닌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인간 본연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반성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