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조지의 생애헨리 조지는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 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영국계로서 독실한 복음적 신앙을 가진 신자였다. 부친은 성공회의 기도서와 주일학교 교재를 취급하는 소규모 출판업자였고 모친은 전직 교사였다. 헨리 조지의 공식 교육은 14세도 되기 전에 끝났다.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헨리 조지 소년은 도자기 가게, 해상보험 사무소 등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그리 삭막하지 않게 지냈다. 가정에서는 셰익스피어나 각종 시집, 역사서, 여행기 등을 늘 읽었고 성경도 끊임없이 접하는 교양 있는 분위기였다. 헨리 조지는 독서를 많이 했고 퀘이커 도서관을 열심히 이용했으며 프랭클린 기념관에서 열리는 과학 강좌에도 참석했고, 친구들과 토론회를 만들어 아리스토파네스, 바이런, 몰몬교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열렬히 토론하였다.15세 때 선원이 되어 호주와 인도까지 항해를 하였다. 그 때 쓴 편지나 항해일지를 보면 성숙해 가는 관찰력과, 가난과 전제권력의 희생자에 대한 동정심을 느낄 수 있고, 후일의 독보적인 넌픽션 저술가의 문장력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해를 마쳤을 때는 나이보다 더 성숙해 있었다.필라델피아에 돌아와서 보니 세상살이가 더 어려웠고 미국 동부 쪽은 별로 좋아질 희망이 없었다. 인구가 적은 지방에서는 무언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여객선의 승무원으로 취업하여 마젤란 해협을 지나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러나 이 당시는 서부해안 쪽도 경제 불황이 휩쓴 직후였다. 그래서 가게에서, 광산에서, 인쇄소에서, 방앗간에서, 농장에서 온갖 일을 다 하였다. 그 중 인쇄공으로 일한 기간이 제일 길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였고 감리교회에도 다니게 되었다.만 21세(당시의 성년)가 된 얼마 후 애니 팍스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였다. 호주 태생의 17세인 이 아가씨는 로스앤젤레스의 수녀원 학교를 다녔었으며 당시에는 부모를 여의고 부유한 삼촌댁에서 살고 있었는데, 삼촌은 무일푼 인쇄공이자 직장도 없었던 헨리 조지를 탐탁지야 한다고 하고는 5달러를 구걸하였다. “너무 절망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만일 그 사람이 돈을 주지 않았다면 살인을 할 수도 있었다”고 헨리 조지는 후일 회상하였다.헨리 조지는 일생 동안 생활에 쪼들리고 빚을 지기도 했지만 이때처럼 극심한 물질적 궁핍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이 그의 내면에 깊이 작용하여 일생일대의 사명을 이룩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문필가, 분석가로서의 싹1865년 4월 15일 링컨 대통령의 피살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에도 전해졌다. 노예 철폐론자였던 헨리 조지는 비극적인 소식에 격분하여 짧은 열정적 추도문을 써서 자신이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던 신문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에 기고하였다. 이 글은 신문의 머리글로 실렸는데, 이 글의 필자가 헨리 조지임을 알게 된 편집인이 그를 발탁하여 기사를 쓰도록 하였다. 헨리 조지로서는 최초로 보수를 받는 문필가가 된 것이다. 각 신문에서 헨리 조지를 자유기고가로 인정하게 되었고, 헨리 조지는 기자, 논설위원도 하였다. 28세 때에는 샌프란시스코 『타임즈』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얼마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크라니클』(Chronicle)의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그 후 헨리 조지는 자신이 설립한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인으로 4년간 일했다. 이 신문은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취했고 부정부패를 과감히 파헤쳐 폭넓고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신문으로 인해 헨리 조지는 여러 차례 육체적, 정신적 용기를 발휘해야 했다. 원생을 잔인하게 다루는 소년원 관계 기사로 인해 원장이 권총을 휘두를 때도 있었고, 술 취한 사람을 학대한 경관을 불법감금죄로 고발하기도 했고, 도박업계와 유착관계에 있었던 경찰서장에 대한 보도 때문에 경찰서장의 심복부하가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으며, 또 세 사람을 배에 납치하여 혹독하게 일을 시키다가 자살로까지 몰고 간 선장과 선원을 개인적으로 고발하여 유죄판결을 받게도 하였고, 쇠 난간에 한 손으에게 보낸 편지에서 헨리 조지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어느 날 낮 대로 상에서 어떤 사상, 어떤 비전, 어떤 소명이 (그 외 무엇으로 표현할지)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의 모든 신경이 전율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 그 시점에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저는 잘 했건 못 했건, 성취했건 못 했건, 그 맹세에 충실하였습니다.”) 헨리 조지의 맹세란, 풍요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깨달음, 집필, 강연캘리포니아에 돌아온 어느 날, 말을 타고 뉴욕에서의 맹세를 생각하던 중 헨리 조지는 경제에 관한 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였고 이 순간이 그 후의 진로를 결정하였다.“생각에 빠져 야산을 달리다 보니 말이 지치고 말았다.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쉬면서 지나가는 일군에게 인사 삼아 땅값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멀리서 쥐만한 크기로 풀을 뜯는 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저 너머 땅을 팔려는 사람이 있는데 1에이커(1,224평)에 1천 달러라고 하데요.” 이 때 부의 증가와 빈곤의 증가가 동행하는 이유가 영감처럼 번쩍였다. 인구가 증가하면 토지가치가 오르고, 이 토지가 필요한 사람은 돈을 더 내야 한다. 나는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였고 그 뒤로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이 이치를 발전시켜 그 이듬해 『연방과 주의 토지와 토지정책』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그 속에는 헨리 조지 사상의 맹아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려면 더 두꺼운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877년 9월 18일의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진보와 빈곤』을 시작하다.” 그 다음 달에는 막내딸(Anna Angela George)이 탄생하였다. 이 딸은 후일 극작가 윌리엄 드밀(William de Mille)과 결혼하여, 유명한 안무가 애그니스 드밀(Agnes de Mille) 을 낳는다.일 년 반이 걸려 이 책을 탈고하였다. 한 밤 중, 책의 마지막 장을 끝낸 헨리 조지 때는 평은 대체로 좋았지만 많이 판매되지는 않았다. 값이 싼 페이퍼백으로도 출판되고 독일어로 번역도 되었다. 결국에는 판매실적이 올라가고, 헨리 조지는 대중 강연도 하고 유명 잡지에 기고도 하여 상당한 수입까지 올릴 수 있었다.이 당시 서구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토지문제는 아일랜드에 있었다. 이 ‘에메럴드 섬’(아일랜드의 별칭)의 소작인은 터무니없는 소작료를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주로 영국인인 부재지주에게서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파넬(Charles Parnell)과 대빗(Michael Davitt)이 이끄는 아일랜드 토지연맹(Irish National Land League)이 결성되어 봉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미국에도 2,500개 지부가 있었음). 대빗은 뉴욕을 방문했을 때 헨리 조지를 만나서 『진보와 빈곤』을 아일랜드와 영국에 널리 보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헨리 조지는 그의 사상을 요약하여 『아일랜드의 토지문제』(The Irish Land Question)라는 작은 책자를 발행하였는데 이 책은 대서양 양쪽에 큰 충격을 주었다. 뉴욕의 아일랜드계 최대 신문인 『아이리쉬 월드』(Irish World)는 헨리 조지를 아일랜드와 영국에 취재 겸 강연 목적으로 파견하였다. 헨리 조지는 수많은 청중을 열광시켰고 영향력 있는 지지자도 얻었다. 지지자 중에는 미스(Meath)의 널티(Nulty) 주교, 클론퍼트(Clonfert)의 더간(Duggan) 주교와 같은 고위 성직자도 있었다. 헨리 조지는 골웨이(Galway)에서 영국 당국에 의해 위험인물로 몰려 두 차례나 체포되고 잠시 투옥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이렇게 1년간 외국에서 보낸 후 귀국하자 헨리 조지는 미국에서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진보와 빈곤』도 크게 성공했다. 판을 거듭하였고 10여 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1900년까지는 영어로 쓰인 넌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나간 책이 되었다. 헨리 조지가 첫 출간본과 함께 부친에게 보낸 편지의 구 헨리 조지는 원고 없이 즉흥 연설을 하는 편이었으며 청중을 감동시키는 명 연설가였다. 헨리 조지라는 이름은 이제 널리 알려져 연설회에 청중이 끓고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자서전에 보면, 헨리 조지의 첫 유럽 방문시 연설을 들은 쇼는 감동하여 “인간성 해방 전쟁”)(Liberative War of Humanity, 시인 하이네가 썼던 말로서, 헨리 조지 사상 실천운동의 비유적 표현)에 자원입대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이런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쇼를 포함한 많은 경우에 헨리 조지가 원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헨리 조지가 일깨운 사회의식은 후일, 헨리 조지가 강력하게 반대했던 집단주의를 수용하는 쪽으로 발전한 것이다. 심지어는 (물론 실패했지만) 헨리 조지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도 줄기차게 있었다.스코틀랜드에 가보니 아일랜드보다 사정이 더 나빴다. 헨리 조지는 하일랜드(Highlands, 스코틀랜드의 북부와 북서부 일대)의 헐벗은 소작인을 상대로 하여 외할아버지의 고향인 글래스고우(Glasgow)의 시청 앞에서 두 차례 연설하였다. 첫 연설 후 약 500명이 남아서 스코틀랜드 토지회복연맹(Scottish Land Restoration League)을 결성하였다. 두 번째 연설 후에는 가입자가 2천 명으로 불어났고 에딘버러(Edinburgh), 던디(Dundee), 애버딘(Aberdeen), 인버니스(Inverness) 등지에 지부가 설치되었다.옥스포드 대학에서도 연설하였는데 청중은 적대적이었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켐브리지에서는 연설 초반의 반대 분위기를 휘어잡아 결국 상당수의 청중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그 후 캐나다에도 연설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파우덜리(Terence V. Powderly)가 이끄는 ‘노동의 기사’(Knights of Labor)라는 단체가 주관했는데 이 방대한 단체의 모든 지부에는 『진보와 빈곤』이 여러 부씩 비치되어 있었다. 1886년 헨리
이 책의 지은이는 이처럼 수출을 성공시키기 위한 것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난 11년간 국내·외 근무 중 다양한 유형의 바이어들과 국내업체를 지원하면서 우리 무역맨들에게 전해 주고자 메모해 온 것을 정리하는 책을 발간했다는 것에 대해 참 뜻깊은 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수출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깨고 전자무역과 관련되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자무역은 바이어를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닌 만큼 더욱 신중을 기하여 전자무역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해외전시회를 사용하여 해외전시회를 다녀온 후에 그 기업에게 편지를 보내라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편지 하나를 보내는 것으로 거래가 잘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편지 하나라도 그 기업은 그런 수출상을 기억하고 거래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챙겨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무역은 바이어를 직접 대면하지 않아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다. 이런 것 때문에 이 지은이는 직접 바이어를 찾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앞에서 내가 적었듯이 직접 해외로 찾아가 바이어들과 상담을 하고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이어들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서로의 신뢰감을 높이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수출할 상품에 대한 정보를 더욱 자세히 입수할 수도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지은이는 이렇게 수출문턱 넘기라는 제 1부에서는 우리 업체들이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 수출에 나서야 하는 당위성과 그 효과를 말하면서 초보 수출업체들이 가지기 쉬운 선입견의 문제점, KOTRA 등의 수출지원 유관기관 100% 활용방법, 사이버무역의 실제성과 중요성, 바이어를 인간적으로 사로잡는 비책 등을 서술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역의 ABC를 자세하고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역의 수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각 나라마다의 문화적 특성을 알고 이해하면 수출을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제 2부에서는 수출 굳히기를 주제로 들고 있었다. 수출 굳히기는 수출문턱 넘기보다 조금 더 심화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출문턱을 겨우 넘었다면 수출 굳히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수출 굳히기에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으로는 결제조건을 소프트화하라는 것이었다. 수출업자들은 일람불신용장이 아니면 큰일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 때문에 계약이 깨진다는 것이었다. 일람불신용장을 바이어가 수용하지 않으면 계약은 깨지고 만다. 즉 신용장은 수출상과 수입상의 걱정과 부담을 은행이 나서서 해결해 주는 방식이므로 수출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결제방식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람불신용장이 아니라도 대금결제를 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하공 lTdjT다. 이처럼 수출상들이 불안해 하지 않아도 유산스 혹은 비신용장 방식으로 바꿀 것을 권유하면 업체들이 찬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업체들은 상황에 따라서 일람불신용장을 제시하고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일람불 신용장을 권유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또한 계약서를 쓸때에 주의해야 할 점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계약기간과 계약경신절차의 정확성을 이야기 하고 있었으며 당사자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여 작성할 수 있도록 하라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준거법과 분쟁 처리절차에 대한 것도 계약서에 넣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나도 수업시간에 배웠듯이 준거법과 분쟁 처리절차를 나라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법을 기준으로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계약서 뒷면에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더욱 눈이 갔다.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수업내용이 생각나면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 분쟁처리절차를 나타내지 않으면 그 후에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 같았다. 따라서 나도 이 책의 지은이가 적어놓은 계약서 작성법에 대해 눈여겨서 보게 되었다. 계약서를 잘 작성하는 요령 또한 배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약서는 그 수출물품을 계약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계약서를 잘 써야 나중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도 계약서대로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계약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알게 되었고 이 책의 저자가 수출상에 대한 입장으로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또한 A/S를 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하라고 하고 있었다. 즉, 물건을 판다고 해서 그 바이어와의 인연을 끊지 말고 계속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라는 말이었다. 물품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바이어에게 A/S를 해주게 된다면 단기적으로는 회사에 손실이 일어날 수 있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그 바이어가 다시 그 수출상을 이용해 물품을 구입할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러한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A/S를 잘 해주지 않는 회사의 물건을 사게 된다면 나중에 그 물건을 사지 않을 확률이 높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물품을 팔았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관리도 철저히 해야할 것이다. 즉, 바이어를 위하여 애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또한 상대를 알고 협상하라고 말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수출을 하기가 더욱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중요한 법인데 이처럼 협상을 하기 힘든 상황이 다가온다고 협상을 포기해 버린다면 무역협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지은이는 협상의 기본전략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감정과 일을 분리하라고 말을 하며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입장보다는 이해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양자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고 객관적인 판단기준을 가지고 설득하라고 말했다. 이러한 협상의 기본전략을 사용하여 상대방과 담판하는 테크닉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또 각 나라만의 특색이 있듯이 일본인은 먼저 예, 그러나에 익숙하며 독일은 상담을 시작하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인한테는 접대가 먹혀들어가지 않고 정직, 질서, 법규, 정확성이 이들 비즈니스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자 독일 사람들이 정말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접대와 로비 등과 같은 그러한 것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결정하는 모습이 좋은 나라 사람들인 것 같았다. 프랑스는 에티켓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고 요구사항도 즉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폭넓게 떠본 다음 자기 주장을 펼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예의를 잘 차리며 명예나 체면보다는 감정에 약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과 독일, 미국을 칭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인맥만 잘 뚫으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고 하듯이 프랑스 인도 우리나라처럼 인맥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 알 수 있었다.영국 사람들에게는 유머감각이 필수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인들은 재촉받는 것을 싫어하며 처음 만나면 격식을 차리지만 몇 번 만나면 편안한 의상으로 협상을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영국은 협상이 발달한 나라라고 말하며 그래서 더욱 인내심을 가지고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3000만원으로 시작하는 부동산 투자 101가지라는 책을 북리뷰로 선정하여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초보자들이 읽기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었는데 101가지가 무색할 만큼 정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인것 같았다.우선 저자를 살펴보니 현재 여러 방송과 신문에서 부동산투자에 대한 가이드와 전문 컨설턴팅을 하고 있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부동산투자 최일선에서 일하며 소액 재테크가 가능한 틈새시장 공략법을 연구해오고 있었다.이 책에서는 자신의 실전거래 노하우를 담고 있었고 특히 부동산 투자시에 빈번히 발생하는 거래사기나 함정을 피해 가는 방법, 우량 부동산을 저가에 매입할 수 있는 최신 투자기법과 틈새시장 공략법, 소액물건을 고르는 요령 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외국계 투자회사의 저가 매입용 부동산인 저당권거래, 유입부동산, 낙찰약정 부동산의 매입요령 등에 관한 내용은 지금까지 나온 부동산 관련서적에는 비교적 언급이 덜된 새로운 내용으로 적은 돈으로 부동산투자를 시작하려는 중산층 투자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책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신뢰할 수 있는 중개업자 2~3명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말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중개업자에게 갔다가 괜히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개업자를 알아두는 것이 좋은 이유로 좋은 매물이 나오면 우선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처럼 투자를 하려고 해도 꼼꼼히 알아보고 발품을 팔아가면서 투자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투자를 위해서는 섣불리 잘못 알고 하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다.하지만 이 저자는 너무 신중해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신중히 매물을 고르느라 다른 사람들이 좋은 매물을 고르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매물을 고르더라도 어느 정도 좋다는 생각이 들면 매물을 구입하도록 실천에 옮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그 매물은 그 시기를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또한 부동산 매물을 언제 사고 언제 팔아야 하는 것이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 타이밍이 투자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식에서 많이 하는 말들과 같이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아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고 파는 것이 주식시장과 같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이 책에서는 주인이 자주 바뀐 부동산은 신중히 사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인이 많이 바뀐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매물은 주로 하자가 많은 물건일 가능성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처럼 부동산 매매를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고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주인이 많이 바뀐 부동산을 잘못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부동산 매물이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며 소형 매물이라도 잘 찾아보면 좋은 매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용도를 바꿔 성공한 몇 사례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처럼 부동산은 주인이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어떻게 바꿔가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주제로 낡은 단독주택을 기능개선을 바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이 오래된 단독주택이라서 그런지 이 말이 끌리게 되었다. 지은지 오래된 단독주택은 주거기능이 떨어져서 부분 개,보수로 공간활용도를 높이면 유리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기본골격은 유지하면서 버려진 공간을 이용하여 정원, 창고, 지하실 등 죽은 공간을 활용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또한 단독주택을 원룸으로 개조하면 수익성을 높일 수 있고 다가구주택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별도의 용도 변경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이런 오래된 단독주택은 하자가 많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매입하기 전에 주택 내부와 외부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노후된 주택은 아무리 가격이 싸도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었다.또한 동네의 중개소 말고 부동산 컨설팅을 받을 수 있는 곳에 가서 상담을 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동네에 있는 부동산 중개업자는 믿을 수 없어서 부동산 컨설턴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매물이 좋다고 투자를 했다가 낭패를 보고 만 사람이었다. 이처럼 중개업자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1~2년 된 초보 중개업자나 부동산 정보를 모르는 이론에만 강한 중개업자의 말은 들어서는 안된다고 이 저자는 충고하고 있었다.또한 아파트의 흔히 로열층이라고 말하는 층의 가격상승의 여지가 높다고 예기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층수와 방향, 그리고 조망권 여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로열층의 가격이 1층이나 꼭대기 층에 비해 13% 정도 비사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저자의 얘기를 읽으니 정말 차이가 많이 난다는 생각이 들었고 살 수 있으면 로열층을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직접투자 실패 사례(보루네오 가구)회사연혁:보루네오 가구는 1966년 목재 수입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보루네오 통상으로부터 출발해창업자인 위상식 사장은 단순한 목재의 수입보다는 가공을 통한 판매가 더욱 부가가치가 높을 것이라 판단하고 1969년에 일본에서 기술과 설비를 들여와 가구의 직접생산에 돌입하였다.그당시 한국의 가구산업은 장인이 수작업을 통해 전통적인 가구를 생산하는 것이 고작인 가내수공업 단계였다.따라서 이 회사는 동남아에서 수입한 원목을 바탕으로 현대식 가구를 기계적 방식으로 생산하는 최초의 가구전문 생산업체가 된 것이다.해외직접투자 이유 (해외직접투자 결과-실패)1. 70년대 후반 국내시장 포화 - 해외시장 개척 필요성 절감2.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의 가구를 저렴한 가격으로 전세계에 판매한다."이념 설립-세계적으로 소비자들의 취향이 동일해지고 있고 1979년부터 채택하고 있는 이탈리아식의 디자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실패의 원인1. 지역별 문화 ,풍습의 특성을 간과:보루네오의 해외직접투자는 양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비교 우위를 가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지역별 문화.풍습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표준화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제시하여 문제가 되어 회사가 커다란 타격을 입음2. 가구산업의 특수성 간과:보루네오는 저가, 대량생산체제에 기초한 획일성을 중시, 이로 인해 신속성과 중앙 통제식 관리에 의한 효율적 업무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하지만 지역별로 상이한 고객의 취향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3. 시장접근방식의 실패: 보루네오는 자회사 설리방식으로 해외직접투자를 했다. 그러나 자회사 설립에 의한 해외시장 진입방식은 범세계적 차원에서 전략적 통제를 효율.원활하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모든 개발비와 위험을 자체 부담해야 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으로 재정적 압박을 가져왔다.4. 무리한 사업확장: 국내 내수시장과 홍콩에서의 판매호조가 있었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재정적 압박을 초래하게 되었다.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으로 진출함으로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마케팅 및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과도한 비용을 투자함으로서 재무상태 악화를 초래하였다.5. 자사의 핵심기술 우위요소가 없다.: 보루네오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유럽식 생산설비, 동남아를 통한 원자재 구입 등을 수직적으로 통합함으로 저가,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경쟁자와 견줄만한특별한 경쟁적 우위요소를 지니지 못했다.시사점1. 제품특성에 맞는 국제화 전략 수립: 정보통신의 발달로 전세계 소비자의 취향이 점차 비슷해지고 있는 경향은 분명히 존재한다.그러나 여전히 지역고유의 특성, 문화가 존재하며 그 특성, 문화자체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적 특성을 파악하여 그 지역 소비자들의 필요와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노력이 국제화 전략에 필요하다.
부동산투기의 종말이라는 책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전강수 교수님께서 쓰신 책이기 때문이었다. 우리학교의 교수님이 쓰신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교수님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어떠한 생각을 펼치고 계신 지를 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거기에다가 교수님이 쓰신 책은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에 대해 서술하고 있어서 교수님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많은 저자들의 책을 읽는지를 알 수 있었다.교수님은 먼저 헨리 조지에 대해 얘기하셨다. 헨리 조지가 자유방임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며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을 비판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조지가 말하는 자유방임은 무조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회를 균등하게 한 후에 자유방임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균등한 기회란 자연자원에 대한 접근의 자유가 보장된 상태를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이 토지를 포함한 자연자원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아무리 자유시장이 성립되어 있다고 해도 토지사유제가 확립되어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접근이 자유롭지 않고 그 권리가 평등하지 않다면 경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자유시장의 효과는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자유시장 아래에서도 빈곤과 주기적 불황과 실업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헨리 조지는 주장하고 있었다. 헨리 조지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교수님 책을 읽으며 아담 스미스와 같이 경제학 쪽에서 유명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헨리 조지는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면서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특히 기회의 균등이라는 전제조건을 구비할 경우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정의와 효율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을 강력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토지보유세를 강화하고 노력소득에 대한 과세를 그만큼 감면하는 세제개혁을 추진하자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제개혁을 실시할 경우 네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세제개혁은 20세기 전 기간에 걸쳐 전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어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거둔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이러한 세제개혁이 어느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고 또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또 교수님은 대천덕 신부의 경제사상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대천덕 신부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신부였다. 이 신부님은 가난한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 때문에 일찍부터 사회문제와 가난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의 토지법과 헨리 조지의 이론이 경제문제를 성격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확신하고 난 다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30년 정도 줄기차게 이 법과 이론에 관해 이야기 해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특히 희년법이라는 토지법이 특이했다. 희년법은 내가 처음 듣는 말일 뿐 아니라 어떤 뜻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희년법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 더욱 자세히 읽게 된 것 같다. 이것은 레위기 25장 23절에 대한 내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토지소유와 토지매매 금지를 말하고 있었다. 또한 대천덕 신부는 헨리 조지와 마찬가지로 토지 가치세가 성경의 토지법 정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또한 교수님은 정부의 정권에 따라 보유세를 처음엔 강화하다가 점점 철회를 하면서 부동산 부양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과 김대중 정권 역시 그러한 케이스라고 얘기를 하면서 그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게 되면 부동산 투기는 줄어들게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교수님은 보유세를 강화하게 되면 부동산 투기는 줄어들게 될 것이라 뜻을 가지고 계셨다. 이처럼 부동산 투기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시절과 김대중 대통령 시절 또한 보유세 강화 정책을 펴다가 점점 철회가 되어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은 미미하게 되어 버렸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이명박 대통령의 정부는 강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굳혀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을 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일 뿐이었다. 몇 년 후 정부는 부동산 보유세 정책을 철회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부동산 부양책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 임기인 5년이 다하게 되면 그 차기 대통령이 부동산에 대한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들은 부동산 부양책을 내놓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경제의 논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또한 이러한 패턴을 바꾸는 것 역시 정부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정부가 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감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것들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또 교수님은 김경환 교수님이 쓴 칼럼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의 칼럼 제목은 보유세를 올린다고 집값이 내릴까 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교수님은 반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보유세 강화가 집값을 내리는 효과가 단기에 그친다는 것을 김 교수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보유세를 강화한다고 임대료 상승이 안된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김교수는 보유세를 강화하게 되면 집값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임대료가 올라간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교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부동산 보유세가 건물보유세로만 되어 있다면 맞는 말이지만 토지보유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보유세는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교수가 말하는 임대료 상승은 장기가 아니라 단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보유세에 대한 논란은 여러 가지가 나타나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대체로 보유세 강화를 찬성하고 있는 입장이었다.대체로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정책에 대해 실책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참여정부 때에는 집값에 대한 과도한 단언들을 계속 해오고 있어 부동산 값이 상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또 정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철학 또는 패러다임을 확립하지 못한 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부동산 대책이 나왔지만 그것이 어떤 패러다임에 입각해 추진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