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격인가? 서평무엇이 인격인가를 읽고 왠지 모를 씁쓸함이 몰려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랄까?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종종 보였다. 최더함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분명히 알겠지만, 개혁파 신앙에서 말하고 있는 인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복음주의적 성향과 심리학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우리의 인격은 하나님 안에서 분명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인격체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 누리며 그 통치함을 주관하는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생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은 결코 그 생물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단절되어버렸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녕 죽으리라하고 말씀하신 것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이 바로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써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로 변질되고 오염되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존재가 된 것이다. 이 원죄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하였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것에 오염되어서 하나님이 없는 선, 하나님이 없는 신앙, 하나님이 없는 문화, 하나님이 없는 사회, 하나님이 없는 정치 등등, 그래서 인간에게는 선이 없다. 지,정,의가 죄의 전가로 인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이다.그래서 올바른 인격이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동반되어야 하듯이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삶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인 성경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백성은 그 은혜를 안다. 그래서 참된 인격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이다. 실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연약함, 그 부족함을 날마다 주님께로 가져가야 한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나의 신앙이 바로 나의 인격이라는 것을 알고 내 믿음, 내 행위, 내 공로가 아닌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성경적인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류를 극복한 진리의 승리를 읽고오류를 극복한 진리의 승리는 데이비드 딕슨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주석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 책에서 명명한 대로 많은 신학적 오류들이 난무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이단들이 득세하는 이 세대 가운데 빛이 되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17세기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수많은 회의와 기도와 신학적 토론들이 오고 감으로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는 시기에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기독교 특별히 개혁주의 교회에서 따르고 있는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헨리 8세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시작된 것이 영국교회의 종교개혁의 불씨로 작용해서 수많은 개혁파 교회가 따르는 신앙고백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하심 이였다.장로교의 위대한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그 당시 분위기 속에서 주석한 데이비드 딕슨의 열정은 이 시대가 감당할 수 없는 새로움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다른 성경 주석들이나 글들의 특징에서 알 수 있듯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으로 그 진리의 명확성을 더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가 분석해 놓은 여러 이단들의 논점들에 대한 성경적 논증들은 지금도 유효하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특별히 이 신앙고백서의 주석들은 각 조항마다 핵심적인 부분만을 집약하여 상대 적들로 하여금 문제 되었던 곳의 오류들을 정확히 끄집어내어 분석하고 그 이유들을 조목조목 해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명료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인간 논리의 한계성은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잘 보지 못한다. 딕슨의 논리 전개의 특징은 그런 점에서 종합적이면서도 분석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목회 사역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면들이 이 책에서도 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앙고백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실천적인 면에서 해설의 양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것에서 교회 생활의 어두운 면을 잘 지적하고 적정과 절도의 답을 주어 해결하려는 면을 볼 수 있다.18세기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특징들을 따라서 신학적인 바른 입장을 해설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아마도 그 신학적 입장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적 혼돈의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장로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좋은 객관적 틀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신학적 엄밀성이 교회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고 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헌법의 실제적인 구성을 보면 아직도 예정론과 제한 속죄가 없는 인도자유장로교회가 사용했던 12신조를 헌법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하여 사용하고 있고, 일부 장로교단이 1903년 미국장로교회가 수정한 신앙고백서(3장의 하나님의 작정 부분의 일부항목 삭제, 34장, 35장 첨가)를 받아들여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수정판은 딕슨이 주석하고 있는 판과 그 신학적 내용에서 핵심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체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서로 모순적인 부분들이 상당수 발견된다. 그런 점에서 딕슨의 주석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자 5년 6월 이상을 걸쳐 그 시대 당대의 것으로 그 후에 신학적으로 혼합되고 몰락의 과정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지침서이다.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질문과 이유를 들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 말하고 있다. 즉 이단자들이나 말씀에서 벗어나는 생각들에서 성경으로 초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즉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늘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에 말하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부분에서 멈추는 것이야 말로 딕슨이 추구했던 성경적 해석방법인 것이다. 개혁파 신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의 제 1 장을 눈여겨 봐야 한다. 딕슨이 말하고 있는 부분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대답 또한 그렇다 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인즉슨 성경 없이 그리고 성경에 반대하여 믿음의 조항들을 가르치고 제시함으로 교황의 절대 무오가 인정되는 것이 참된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기록되지 않는 그들의 전통들을 성경의 권위와 함께 동일한 권위를 지닌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도덕폐기론자들과 퀘이커교도들을 대해 딕슨은 성경으로 논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과 생명의 규범으로 성경을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비일비재하다.성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잠언적 교훈이 아니다. 성경은 역사가 담겨있고, 역사 가운데 인간사의 세세한 부끄러운 것들까지 담겨 있다. 창조 이후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것이다. 불신앙과 배교까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다르다. 일상적인 모든 것들을 성경에서 다루고 있다. 다른 종교에는 좋은 교훈과 가르침 등은 있지만 성경은 다르다.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섭리해 나가는 방편들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끌고 가시는 방법을 계시하고 계신다.경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성경은 너무나 특별하다. 즉 특별계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인간의 인식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성경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하나님을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주셨다.성경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신. 구약 성경이 전체는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다. 66권외에는 외경을 포함할 수 없다. 외경을 말씀을 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주의 계열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 이후 외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를 66권을 통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외경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경의 권위가 최고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가 최고인 것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 전승되어지고 있다는데 있어서 권위가 있다. 사람이, 교회회의가, 교회가 인정해서 성경이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성경을 보존하시고 전승한 것 자체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하나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라고 믿는다면 그 것을 따르는 것이다.율법주의적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고 응답해 나가야 한다. 개개인의 응답하는 것이 다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응답해 나가는 과정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를 가짐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외경은 영감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정경이 될 수 없다. 외경과 정경의 기준은 사도성이다. 사도성을 확인할 수 있느냐에 따라 분별할 수 있다. 그것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없는 경우 외경으로 정리를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정경으로써의 역사이다. 성경을 66권을 편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는 6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기 전에 벌써 66권을 공적으로 받아들였다. 성경의 신비성이다. 외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경으로서의 영감된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교훈이 담겨있는 책이다. 즉 66권외의 정경 외에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디도서 1:10-16 주해 및 설교1. 서론그레데의 상황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에베소의 상황과 유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이미 온 가정들을 엎드러뜨리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이었다. 하지만 그레데의 대적자들은 덜 관심을 받는다. 이는 그 문제가 에베소에서 발전된 것과 같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대적자들은 교회 지도자의 직분에 자격이 없고, 불순종적이며, 부적절하였다. 사실상 10-16절은 디도가 교회 지도자들을 자격 있는 사람들만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5-9절). 대적자들은 허튼 소리, 의미 없는 말, 신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단락(1:10-16)은 그 가르침이 주로 유대적이었고 의식적 정결과 불결에 대한 지침과 금욕주의를 가르쳤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대적자들은 교회의 일원이었지만 복음의 진리에서 떠났고, 따라서 그들과 교회가 신앙의 건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을 꾸짖어야 한다. 그레데와 에베소의 가르침의 유사성에 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 4:1-5를 보고 이 두 곳의 대적자들의 행위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디모데전서 1:3-7을 보면 알 수 있다.2. 역사적 문화적 배경1) 저자본서는 고대 문헌들과 외증을 통하여 바울이 기록하였다는 것이 입증되므로, 목회서신 중에서도 비교적 논쟁이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목회서신들과 마찬가지로 19C 초부터 대두된 비평주의적 성경 해석에 따른 비판적 견해, 즉 ① 역사적인 이유, ② 교회사적인 이유, ③교리적인 이유, ④ 문체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바울의 저작성이 의심을 받기도 한다.그러나 이는 디모데전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행적을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으로만 제한하려는 의도와 바울서신을 도식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문체, 내용, 교리 등을 고정된 형태로 본 것에서 기안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의 바울 저작성은 의심받을 수 없는 것이다.2) 수신자바울의 다른 서신(롬1:7 ; 고전1:1 ; 엡1:1)들과는 달리 본서의 수신자는 '디도'라는 한 태도에 대한 훈계가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첫째로 디도를 바울이 있는 니고볼리로 빨리 오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로 율법학자인 세나(Zena)와 아볼로를 먼저 보내어 그레데 교회에 영적인 궁핍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고, 셋째로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디도를 격려하고 권면하기 위해서였다.5) 시대적 배경A.D 1세기 후반 경에 주로 활동.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으로 확장되던 때였다. 이때에 디도는 전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던 바울과 동행하여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초대 교회들이 겪고 있었던바 교회의 질서를 세워지는 과정이 미비 및 이단의 공격 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에 그레데 교회를 비롯하여 안디옥,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하였다.6) 전체 내용 구조Ⅰ. 인사(1:1-4)Ⅱ. 그레데에 있는 디도의 의무(1:5-2:16)1. 장로의 필요성(1:5)2. 장로의 자격(1:5-9)3.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1:10-16)4. 바른 교훈과 복음에 대한 권면(2:1-16)Ⅲ. 성도의 사회생활에 대한 권면(3:1-11)1. 국가에 대한 태도(3:1)2. 일반 생활에 대한 태도(3:2-11)Ⅳ. 개인적인 부탁과 인사(3:12-15)3. 본문 구조 및 주해1) 본문개요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10-16절)그레데 교회 안에는 쓸데없는 논쟁과 거짓 교훈으로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대표적 부류가 곧 할례당으로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거스려 할례를 받는 등의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단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만 얻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가르침이었다. 또한 바울은 유대주의적 이단들의 그릇된 교리들을 지적하기보다 그들이 그러한 거짓 교리들을 고수 현혹시켜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 '할례당'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자들로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던 자들이다(행 15:1;롬 2:25-29).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하였다(롬 10:9;갈 5:6).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간에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빌 3:3). 그런데 그레데에는 육체의 할례를 고집하여 속이는 이단들이 특히 극심하였다.1징 11절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 본 절은 9절에 언급된 감독의 기능 중 하나인 '책망'의 구체적 실천 사항이다. '막을 것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토미제인'(ejpistomivzw)은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출교'(딤전 1:3,4;딤후 3:5)나 '정죄'(딤전 6:5)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엎드러치는도다 - 할례당은 물론 그레데에 있는 '이단'들의 목적은 교리나 진리를 전하는데 있지 않다. 그 표면상의 목적은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의 내면적인 목적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 즉 타인을 속이거나, 희생시킴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Hendriksen). 한편 '엎드러치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트레푸신'(ajnatrevpw)은 '전복하다', '뒤엎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것을 의미한다(딤후 2:18).1장 12절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 '어떤 선지자'는 주전 6세기의 시인이며 그리스의 7대 현인 중의 하나인 크노수스(Cnossus) 출신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로 추정된다(Guthrie, Scott, Calvin, Hendriksen). '에피메니데스'는 후대의 작가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나 '키케로'(Cicero)에 의해서 선지자로 불리었다(Scott). 그런 에피메니데스'는 그레데인을 세가지 '장로'에게도 부여되었다(9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 본 절은 '히나'(i{na , '위하여')로 시작한다. 이는 본문이 앞에서 언급한 징계의 목적임을 시사한다. 바울이 디도에게 그레데인의 나쁜 본성(12절)을 징계하라고 하는 목적은 그레데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데 있다. '온전케 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기아이노신'(uJgiaivnwsin)은 '건강하다', '잘지내다'는 뜻이다(Hiebert). 이는 '참된 믿음'을 묘사한 것으로 디도에게 부여된 징계의 직무가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엄격한 외과 의사'로서의 직무임을 시사한다(Scott). 따라서 '징계'는 단순한 판단이나 심판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판단'이어야 한다.1장 14절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 - '허탄한 이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도이스'(mu'qo")는 '신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혼합에서 생겨난 것으로, 구약의 말씀들을 영지주의적 관점으로 바꾸어 만든 것이다(Hanson, Hendriksen).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과 같이(딤전 1:4) 디도에게도 그레데인들에게 팽배해 있던 유대인들의 신화를 주의시키라고 권고한다.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배반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트레포메논'(ajpostrefomevnwn)은 '돌이키다'의 뜻을 가진 '아포스트레포'(ajpostrevfw)의 현재 중간태 가정법으로서 '자의로 거역하는'(Robertson), '습관적으로 거부하는'(Hiebert)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사람들의 명령'은 유대인들의 유전 즉 정결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골 2:20-23;딤전 4:1-5, Guthrie).1장 15절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그레데인들에게 전한 오류는 '외적인 것'에 의해 부정(不淨)의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오류에 대해 바울은 예수께서 정하신 원리를 다시 천명하고 있다. 그 원리는 부정의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그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Scott).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내면적인 문제를 저버리고 외면적인 면에만 치중(置重)하는 우를 범하였다. 가증한 자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델뤼크토이'(bdeluktoi)는 '혐오스럽고 위선이 가득찬 자'를 의미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말과 행위가 다름을 암시한다.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귀를 기울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면의 죄를 정죄하신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탄한 이야기에 빠져 외면적인 문제 에만 착념하였다.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 '버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이'(ajdovkimoi)는 문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롬 1:28;고전 9:27).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을 앞세우는 자들이었다.강해설교제목 :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부제목 :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10절]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당시 교회 안에는 복종치 않는 자들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교훈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큰 악이다.또 헛된 말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헛된 말이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말, 다른 이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을 가리킨다. 성경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말씀했다(잠 10:20). 우리 모두는 의인의 혀를 가져야 한다.또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속이는 것이 악한 세계의 특징이다. 주께서는,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거짓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다.
성경인물과 심리분석을 읽고...이 책을 보고 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교수님께서 과제로 내 주셨지만 과연 어떤 인물이 나와 가장 비슷한 인물일까 찾아보다가 사도 베드로에게 가장 눈길이 많이 갔다. 처음에는 므비보셋이 나와 가장 비슷한 인물인 것 같았지만, 베드로가 가장 나와 연관성이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로얄리스트 라는 말과 함께 참 정감이 가는 인물이다. 참 바르고 참 착하게 살아왔던 내 모습을 베드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베드로는 전형적인 충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조심성과 두려움이라는 과제 때문에 수많은 실수와 말실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순종이 마지막에는 빛을 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성경인물을 통해서도 이렇게 내 안에 역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오순절 사건 이후의 베드로는 많이 변했다. 그의 생각도 그의 행동도 예전의 두려움과 자신의 안전을 먼저 살피던 베드로가 아닌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나 자신도 베드로를 통해서 내 잘못을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탓하는 투사하고 내 안에 올라오는 역동들을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해석해서 내 스스로를 가두고 내 자아를 거짓 자아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 같다.착한 아이로 성장했던 나의 자아를 감추려고 거짓 자아를 만들어서 부모님에게는 정말 착한 아들로 장남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갖추어진 체계와 질서를 무시하지 않고 순종하고 규범을 충실히 따르며 책임감 있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베드로와 가장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순수하고 어찌 보면 멍청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내 어린 시절의 나와 동일시로 느껴졌다.부모님께서 하라면 하는 대로 순종하며, 순복하고 어른들 말이라면 밭에 콩을 심어도 팥이 나온다고 해도 믿었던 순수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러므로 내 자아는 내가 아닌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나를 보호하였고, 내가 아닌 타인 의존적 삶을 살아왔다. 집에서의 나의 모습과 밖에서 보는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 이였다. 집에서는 착한 아들, 순종하는 아이, 무엇이든지 부모님 말씀에 토 달지 않는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밖에서 특히 초등학교 이후 중학교로 올라오면서 내 자아는 그런 내 모습이 가식적이고 역겨웠는지 몰라도 반항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 두려움이라는 존재가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있는 전형적인 에니어그램의 6번 충실한 사람 이였다.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는 것이 두려울까봐 오히려 역으로 폭력적이고 비난적이며 사람들을 기만하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안전이 침해당하는 것을 나는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가족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있어서 safe zone 이였다. 하지만 밖에서 나는 왠지 나에게 사람들이 안 좋은 시각으로 나를 볼까봐 노심초사 하며 불안하다. 예전에 나는 선교학과에서 부전공장을 맡았었다 과 임원선거 때 나는 전공장을 맡으면 왠지 잘 못할 것 같다는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서 일찍 포기하고 부전공장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성격적인 요소 때문에 나는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나에게 모험을 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그냥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나는 어릴 때부터 가졌던 감정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관심과 무관심의 극을 달하는 부모님들의 양육태도였다. 관심을 당연히 받아야할 어릴 때는 부모님들이 하시는 사업덕분에 나는 자꾸만 소외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장하면서 부모님들과 잦은 부딪힘으로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집에서는 얌전한 청소년, 착한 아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착한 척, 이해하는 척, 마음 넓은 척하며 교회에서나 부모님과 함께 아는 지인이나 사람들을 만났을 때 혹은 친척들을 만났을 때 나는 그렇게 변했다.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해 왔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불량청소년으로 돌변했다. 착한 아이가 나쁜 아이로 돌변하는 순간 이였다. 내 안에 감추어 있던 분노가 그 순간 표출되었다. 도둑질과 나쁜 짓들을 하면서 나름 쾌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중적인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나는 진정 나를 찾고 나를 끊임없이 되돌아 보아야할 중요한 시기에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가족 안에서의 나와 그리고 학교에서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자아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육탄전(?)으로 서로에게 종종 이야기를 하셨다. 매일 서로에게 하시는 소리가 “너는 왜 내가 이해하는 대로 안 해” 이거였다. 서로에 대한 겉치레적인 이해만 있을 뿐 진정 속으로 한 사람으로서 서로공감하고 경청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집에 들어오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과연 이 싸움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갈등했다. 나는 처음에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더 잘해야겠다. 라는 마음과 나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서 더 착한 척하고 더 순종하는 아이인 척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싸움은 호전되지 못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고 어머니는 나에게 감정의 쓰레기들을 고스란히 전해주셨다. 아버지의 과거와 나쁜 점, 험담, 어머니의 감정들이 나의 감정처럼 인식되어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어머니를 투사시켜 대리남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청소년기가 지나고 청년기에 들어서도 쉽게 이 감정들이 없어지지 않았다.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정죄하고 지적하고 요구하시는 것이 많았다. 정작 나는 그 수준에 올라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더 많은 것을 바라셨다. 부모님이 자신이 바라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이 처럼 자기 안에 있는 내면에 있는 자아 즉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문제들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1. 개요1) 저자는 누구인가?마태복음의 저자는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마태(9:9-13)라는 것이 전통적 의견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름을 두 개 가지는 일은 흔히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레위라고 하였고(눅5:27-28) 알패오의 아들이었다. 그는 본래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는 세관 관리로서 가버나움에서 일했다(눅5:27-28).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에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하는 것은 그가 철저히 회개하였고 진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하자 곧 잔치를 베풀고 당시에 종교인들이 경멸하던 자기의 옛 세리 친구들과 죄인들을 청해서 대접한 것은 마태가 자기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썼나?마태는 그의 기록 전체에 걸쳐 구약의 인용과 언급이 많다는 것은 그의 저자의 목적을 논하려는 것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는 사항이다. 그는 자신의 복음을 확실한 입장에 서서 저술하였고 그의 목적은 예수님의 생애에서의 주요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로 발생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특징 하나만으로도 저자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을 남긴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직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족보로써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보편 주의적 색채로써 끝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태의 많은 강조점들이 아무리 유대적이라 하더라도 그의 주목표는 기독교가 유대주의보다 훨씬 포괄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넓은 의미의 구약 성취가 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마태복음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독자층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든지 이 복음서가 지닌 보편적이고 공평한 성격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3) 어떤 책인가?마태복음은 “교사의 복음서”로 불린다. 이는 자료가 교육에 아주 적합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문에 초렘4) 구조5분법: 구조상 이 복음서에 기록된 각 편의 강론을 마무리 짓는 가장 뚜렷한 징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7:28; 11:1; 13:53; 19:1; 26:1)라는 표현이다. 제 4복음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복음서 저자는 다섯 편의 강론과 예수의 위대한 행적에 관한 이야기들을 교차적으로 배열해 놓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마태는 교인들에 대한 교리 교육이라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예수의 공생애를 다룬 기사 부분과 주제별 관점에서 연결되는 예수의 강화 부분이 합쳐서 한 부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보서는 기사+강화로 이루어진 부가 5개로 이루어져 있다.서 론메시아의 출현 1-2장1부기사메시아의 자기 계시 및 선포의 개시 3-7장강화산상수훈(제자도) 5-7장2부기사메시아의 능력과 사도 임명 8-10장강화열 두 제자 파송에 대한 지시사항들(제자의 사명) 10장3부기사메시아와 세상의 대립 11-13:52강화하나님 나라의 비유 13:1-524부기사메시아 사역의 진행과 고조되는 대립 13:53-18장강화제자들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 18장5부기사메시아의 승리의 입성과 수난 19-25장강화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 24-25장결 론십자가 구속의 희생과 부활 승천 26-28장서론과 본론을 제외한 본론부가 모세 오경을 본떠서 5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5부는 각각 예수의 행동을 기록한 기사 부분과 예수의 설교나 교훈 등을 기록한 강화 부분이 합쳐서 한 부를 이루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는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을 완성시키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고 있다.2. 마태복음의 주요 사상1) 구약 예언의 실현: 하나님 나라구약 예언의 실현이라는 주제는 마태복음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이 복음서의 핵심 주제를 “천국 복음”이라는 마태 특유의 표현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기본 소식을 가리킨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에 “천국 있다.예)마태복음마가복음9: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2: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16:16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8:29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19:17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0:18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론인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지는 그것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기사들(3;17; 8:29; 14:33; 16:16; 17:5)과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는 기사들(1:23; 14:27; 18:20; 28:20)의 맥락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분명해 진다. 마태는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경우가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이 그 자체로서 예수의 신원에 관한 비밀을 벗겨주는 최상의 고백이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고백이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그리고 오로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두 번째로 중요한 칭호인 “인자”는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칭호이며 따라서 개인적인 고백의 차원에서 사용되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상응하는 대중적인 칭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림과 종말론적인 심판이 라는 맥락에서는 이 두 칭호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세 번째 칭호인 “주”는 거의 예외 없이 예수의 제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 역시 마태복음에서 특히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 메시아 예수마태복음에서 “성취”는 중심 주제 중 하나이다. 이점은 ‘이 모든 일이 된 것 11:12:18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함렘 31:152:23나사렛 동네 와서 사심?4:13~16가버나움에 가서 사심사 9:1~28:17예수의 축귀, 치병사 53:412:17~21~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사 42:1~313:35비유로 말씀하심시 78:2아삽의 시21:5나귀타고 입성하심슥 9:927:9~10은 삼십으로 밭을 삼슥 11:12~134) 이스라엘과 교회마태복음은 신약 가운데 가장 유대적인 책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구약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랍비들의 논쟁거리를 자주 언급하며, 독자들이 유대 의식의 제반 사항과 유대적 용어(천국, 다윗의 자손)의 용례에 대해서 알 것이라 전제하고, 때때로 번역 없이 아람어를 사용한 경우를 보아 알 수 있다.그렇지만 바로 이 복음서는 또한 많은 사람에 의해서 맹렬히 반유대적인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복음서는 유대 지도자를 위선자이자 맹인 된 인도자라고 혹평하고 있다. 비 복음서는 유대인이 아닌 자들이 동서로부터 유대 메시아의 잔치에 불려오는 것으로 그리지만 반면에 그(유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8:11-12) 또한 가장 유대적인 복음서가 지금부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참 백성에 속할 것이라는 일관된 기대를 포함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2:1-12의 동방 박사들은 이 점에 대한 암시 이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방인을 만나시면서(8:5-13; 15:21-28) 그분의 사명의 넓은 범위가 점점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든 족속에게 제자 삼도록 파송하는 것으로 복음서의 결론을 내린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마태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더 명확하게 예수를 참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와 예수의 사명에 응답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그 안에서 계속 유지되는 하나님 백성의 참된 남은 자로 보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와의 관계의 문제이며, 그 관계는 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루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또한 만유의 왕 역할을 지니신다.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하나님이 왕권을 말하는 구약의 용례에 못지않은 언어로 인자의 나라에 대해 들을 수 있다(13:41; 16:28; 19:28; 25:31-34).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실 때 마귀로부터 전 세계의 왕권을 손에 넣으라는 제안을 받았다(4:8-9). 그러나 그분은 거절했고 아버지를 순종하는 길을 따름으로써 마침내 ‘하늘가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라고 선언하실 수 있는 위치에 이르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서(실패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조롱당함으로써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참된 운명을 담당하신 것은 역설적이다. 이 역설적인 왕의 진정한 위엄은 복음서의 시작과 끝에서 이 복음서를 묶어 주는 두 어구에서 드러난다. 서두에서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선언된다. 그 뜻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1:23)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분은 친히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라고 선언하신다. 이렇게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는 분을 바라보도록 해준다.3. 본문 구조1) 메시아 예언의 실현 1:1 - 4:11이 부분은 메시아의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의 가계는 최초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과 그리고 유다 왕조의 시조인 다윗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첫 절부터 기록하고 있다. 계속해서 처녀 탄생, 세례, 시험받은 사건 등이 그의 공생애를 위한 준비로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는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니” 또는 그와 비슷한 말이 5회나 기록되어 있어(1:22; 2:5, 15, 17, 23)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2) 메시아의 원리 발표 4:12 - 7:29이 부분은 주로 메시아 왕국의 영적 윤리적 선포로 되어 있다. 마태만이 “천국”이라는 말을 30번 이상 사용하고 있다. 천국의 영적 원리가 산상보훈(5-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