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국가와 개인의 관계국가와 개인은 어쩌면 계약관계와 같다고 생각한다. 국가에 대해 해야 할 의무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가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느꼈을 때,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는 분명 옳지 못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이득이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하버마스는 앞선 세대의 잘못을 비판할 때 ‘나중에 태어난 자의 특권’을 가지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내가 만일 그러한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엄정한 가능성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당사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도덕적 규탄은 별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의 정치적 판단 상 범한 오류나, 과거의 기회주의보다도 현재의 반성을 더 중시해야 한다. 일제시대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논의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어렵게 된다. 다시 말해 친일 행위를 그때 그 당시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찾고자 할 때에 논제를 풀어나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우선,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는 무엇일까.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드러난 친일파 규정을 살펴보면 제헌국회의 규정안은 표면적으로는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나누어서 규정하지 않고 죄 라는 장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내용성으로 보면 1-3조는 민족반역자를 4조를 부일협력자 를 규정하고 있다 민족 반역자는 친일파의 범주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류이다. 이들은 개인의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조선을 일제 식민지로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던 자들이다 부일협력자의 경우 대체로 식민통치당국 및 관헌들의 강요와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일신상의 편익 때문에 일본의 대내외정책에 순응 협력한 사람들이다일제는 동화주의라는 식민지배 명분론을 선전하기 위하여 친일세력을 육성하고 이용하였다. 식민지배에서 무력적인 억압이 즉각적인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민족을 분열시키고, 또한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친일파들이 형성되면서 제일 먼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던 논리가 바로 일본과의 제휴나 동맹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의 보호와 일본과의 제휴를 통해 친일파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물론 부강, 곧 문명개화와 실력양성이었다.문명국 일본의 지도에 의해 사회를 문명화하고,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약자였던 한국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길이며, 또한 이것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친일파들은 점차 시간이 지난수록 한국은 독자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국 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 하에서 '문명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합방론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적극적인 시정개선론, 문명개화론에 대한 기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독립능력 결여, 독립불능론이 그 근거가 되었다.친일파 문제를 현재에서 평가할 때 개인과 국가 와의 관계에 관한 측면을 중요시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당시 상황을 ‘국가에 귀속되어 있는 국민’으로서 직접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보자.해방 직후 자신의 친일행위를 양심의 가책 문제로까지 고민한 대표적인 문인은 임화였다 임화는 는 것이 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라면 라고 되물었댜임화의 반성적 면모가 물론 일제시대 그의 친일적 행적을 모두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일제 시대에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상황 논리가 모두 옳다고 볼 수도 없다. 그 시대에도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생명을 바쳤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적인 삶을 표본으로 놓고 그 기준에 맞지 않았던 모든 사람에게 역사적 판단의 한 치 양보없는 칼날을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간의 삶이 항상 옳은 길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실수 혹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역사적 판단은 어느정도 그 인물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天皇을 말하다.목차1. 천황의 탄생1)고대의 천황2)중세 근세의 천황3)근대의 천황4)현대의 천황2. 천황을 둘러싼 논란1)전쟁책임2)침해당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3)천황의 정치적 이용3. 천황제의 존속 이유4. 일본속의 천황1)천황에 충성한 사람들2)천황에 반역한 사람들1.천황의 탄생1)고대의 천황일본의 실제 역사 속에서 ‘천황’이란 명칭이 등장한 것은 일본이란 국명이 새롭게 사용되기 시작한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니혼쇼키 와 고지키에는 기원전 660년 진무천황 때부터 일본의 천황제가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록에 등장하는 천황의 계보에서 최초의 실존 천황은 스이코천황 이다. 그러나 이 천황도 7세기 말부터 시작된 역사 편찬 과정에서 천황의 호칭이 소급되어 사용되었을 뿐이며 실제 제위 기간동안 천황으로 호칭된 최초의 천황은 텐무천황 이다. 텐무천황은 한반도로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수많은 사람이 유입되어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천황 및 귀족 세력간의 지배권 다툼을 제압한 천황이다. 그는 전국적으로 통합된 유럽 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천황이란 호칭이 사용되기 전인 야마토 정권 시기의 군주의 명칭은 오키미 였다. 기원 후 4세기 초 북큐슈, 긴키, 세토나이카이 일대에서는 지역의 연합 수장을 오키미 라고 불렀다. 672년 전신의 난에서 승리한 텐무천황은 율령 체제를 완성하고 황족 중심의 정치와 중앙과 지방의 통치기구를 정비했다. 텐무천황은 스스로를 아키쓰미카미 즉 신과 같은 존재로 신격화시켰다. 또한 이세신궁을 받들게 해 이후 이세신궁은 천황가의 가문신 즉 아마테라스오미카미 를 섬기는 신사가 되었다. 여기에 율령체제에서 스스로를 천황이라 규정했고, 황후와 황태자도 확립되어 제도화했다.672년 전신의 난을 평정하고 절대 지배자가 된 텐무천황은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율령체제 국가를 건설했다. 텐무천황은 일본이 과거의 왜국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독립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당나라의 천자를 의식하여 천황 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텐무천황은 천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직 취임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뜻을 따르게 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실권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615년 지정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에서는 막부가 아예 법령으로 천황과 귀족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 이른다.또한 고대 이래 이어져 온 천황과 사원 간의 밀접한 관계도 막부가 잘라 버림으로써, 천황이 사원을 통한 민중에 대한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길도 막혀 버리게 된다. 물론 실질적인 권한에 있어서는 탄압을 개시했지만, 막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천황가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막부 권력을 세우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도 세워야 한다는 모순점을 내포하여, 후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유학자들과 국학자들 사이에서도 천황의 위치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다. 특히 대권 위임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정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막부에 의해 즉시 탄압되어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양위론 역시 현실성이 없고, 천황가를 찬탈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채택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위임론의 가장 큰 약점은, 근본적으로 권력은 천황에게 있으나 잠시 천하를 위해 넘겨주었을 뿐,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메이지 신정부에 대정 봉환을 하게 하는 이론적 바탕이 된다.또한 민중에 있어서는 천황은 단순한 지방 영주보다 조금 다른 어떤 무엇 정도로 여겨졌으며,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막부 후기에 들면 이세 신궁 참배 열풍이 불고, 막부 정치에 불만을 품은 이들에 의해 다시금 그 존재가 부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페리가 이끄는 흑선이 나타나 개항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막부의 무능을 깨달은 사쓰마, 조슈, 도사 등 웅번의 신진 무사 세력에 의해 막부가 타도되고,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에도 시대는 막을 내린다.3)근대의 천황메이지가 및 일본 민족의 근간이라고 교육하였다. 이러한 교화 교육을 위해 제정된 것이 1882년 군인칙유와 1890년 교육칙어였다. 천황에 대한 충성의 서약으로, 국가가 위급할 때 모든 것을 바쳐 국가에 충성하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황실의 운명을 먼저 도우라고 세뇌 시켰다. 학교에서는 날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이는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 되었다. 교육은 학생들이 아니라 천황과 나라를 위한 것 이었으며 학교마다 천황의 사진을 모셔놓고 예를 갖추게 하였다. 실제로 메이지 천황은 스물이 안 된 나이에 마르고 창백했지만 국민들에게 공개된 천황의 모습은 강건한 청년군주모습이었다. 이후 메이지 천황의 초상은 학교와 관공서 등을 통해 널리 배포되었다. 이런 초상화들은 천황의 진짜 모습이라 하여 ‘어진영’이라 불리며 신성하게 취급 되었다. 이렇게 천황과 대일본제국 신민의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가 맺어졌다. 교육칙어를 외우고 천황의 초상을 경배하는 교육을 통해 신민 한명 한명에게 천황의 적자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 이다.메이지 천황을 세계를 지배할 절대 군주로 묘사했고, 이러한 이미지는 새로운 인쇄 기술에 힘입어 널리 대중에게 전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역시 서양의 전제군주를 모방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제도 뿐 아니라 거기서 살아가는 일상생활, 음식, 옷, 두발 등 모든 것을 서구열강과 똑같이 바꿔나간다는 노선이었으며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면서 다른 것으로 변해간다는 이상한 과정 이었다.메이지 정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빠른 정착을 위해 일본의 주권은 만세일계의 천황에 존재하며, 천황을 윤리적 정신적 정치적 중심으로 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국체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천황을 신격화하고 절대화하려던 메이지 정부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 천황 자체가 낯선 존재였고 다신교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절대 권력의 인간신이라는 개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으로서의 천황이 침투하게 된 계어서는 상당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천황은 제국헌법 하에 유일하게 통수대권을 가진 존재였으며, 그 외에 군부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부작위적인 전쟁 책임이 있으며, 이후 정부의 결정에만 따랐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평화를 희구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히로히토에게 있어서는 황조황종(皇祚皇宗)의 뜻을 잇고 사직을 온존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으므로 나름대로의 희망을 가지고 재가한 개전 결정을 한 것을 보았을 때 평화적인 선택을 하려 했을 가능성 역시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단한번의 방송으로 열도를 무장해제한 평화천황 으로 여겨진다.1945년 8월 14일 종전을 결정하는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종전파와 군부 두 세력은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이미 대세는 종전으로 기울고 있었다. 스즈키 수상은 혹시 모를 군부의 반란을 막기 위해 최종결정을 천황에게 넘기는데, 이때 모든 것이 히로히토의 성단으로 미화된다. 그것만이 국민을 참혹한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천황이 책임을 면하는 길이었다. 또 한번 천황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 이었다. 만세일계 천황의 치세 아래 또다시 평화로운 미래가 약속되었다.미국의 요구대로 히로히토는 신의 자리를 포기하는 댓가로 상징천황의 자리를 얻게 된다. 종전 후 천황의 새로운 지위를 알리기 위해 히로히토 전국순행을 시작한다. 천황은 각지에서 환영 받았으며 그로인해 천황과 국민은 매우 깊은 관계라는 것이 재인식 되었다. 이런 가운데 천황의 인식은 군국천황에서 평화천황으로 바뀌게 된다.전장에서 가해와 피해를 동시에 경험한 천황의 군대, 그들은 히로히토의 성단신화가 허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돌아온 병사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족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런 나쁜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 가족들이나 전쟁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실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 일본사회가 만들어 진 것이다.신화를 바탕으로 서도 안되며, 황태자나 황족시선 앞에 여자속옷광고가 있어서도 안된다. 천황이나 황족에 대해서는 칼럼을 쓰지 않는다 , 황실은 기자클럽제도라는 배타적 방법을 채택하여, 어느 신문에도 똑같은 기사를 싣게 한다. 결국 상징천황도 자유 평등 인류보편의 질서에 위배되는 존재가 아닐까.기미가요가 일본의 국가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기부터이다. 원래는 생일 축하노래로서 많이 쓰였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로 정착 되었다. 기미가요는 일본 천황의 통치가 천년, 만년 계속되리라는 노래말을 품고 있는 노래이고, 히노마루는 일본 국민은 물론 상당수의 아시아인들이 그 깃발 아래에서 고통 받으며 죽어간 전쟁의 상징물이다.일본 정부는 그간 나라 안팎의 거센 반발 때문에 기미가요와 히노마루 법제화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합법화 작업을 밀어붙여왔다. 우선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기미가요를 슬그머니 넣더니, 히노마루가 일본의 국기임을 가르치게 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세대가 성인이 되어 거부감이 누그러지자, 어느 날 갑자기 문부성, 교육위원회는 기미가요·히노마루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서 99년 2월에는 교육위원회의 강압과 학생들의 반발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던 히로시마의 한 고등학교 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부·여당은 내친김에 ‘국기·국가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학생들에게 강제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단서조항을 달았지만 이는 실제로 지켜지지 않았다.교육위원회는 각 학교 당국에 공문을 보내 졸업식장에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식순에 기미가요 제창을 넣도록 했다. 이에 따르지 않는 학교에는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도 넌지시 전달했다. 이 위협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졸업식 예행연습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저지한 교사가 주의조처를 받거나, 초등학교에서 기미가요를 가르치기를 거부한 음악교사가 하루아침에 해직되기도 했다. “기미가요·히노마루가 싫으면 일본을 떠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현대인의 성형, 다이어트 열풍예전에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프로그램에서 불법 성형 시술과 성형중독으로 얼굴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흉해져 선풍기 아줌마라는 별명을 얻은 한미옥씨의 사례를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람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한 모습이었다.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에 셀 수 없이 많은 성형을 하고 심지어 식용유까지 얼굴에 주입했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렇게 까지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던 중 한미옥씨의 성형 전 본래의 얼굴을 보고 깜작 놀랐다. 지금의 모습이 상상조차 안되는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최근 다시 한번 선풍기 아줌마의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취직도 하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게 되었다며 행복한 모습이었지만 안타까운 포장에 불과 해 보였다.최근 들어 연예인들의 성형 고백이 이어지면서 성형수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환기되고있다. 미음이 예뻐야 진짜 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외모중심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한다. 조금 더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기위해 성형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거나 자신감을 갖기 위하여 외모에 많은 돈을 투자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외모를 선호하는 사회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격이 좋아도 얼굴이 못생기고 뚱뚱하면 결혼을 하기 힘들고, 학교 성적이 좋더라도 외모 때문에 번번히 면접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외모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긴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성형 중독이 된 사람들도 있고, 더 날씬해져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거식증에 걸린 사람들도 있다. 혹은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폭식증에 걸린 사람도 많다. 더 예뻐지고 날씬해져서 주류가 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도를 넘어서는 순간 비주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 한 일이다. 도대체 아름다움과 날씬함의 기준은 누가 정해놓았으며 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모습을 바라는 것일까.예뻐지고 싶은 욕망은 본능이다. 아름다워지자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격도 취향도 모두 다 다른데 체형이라고 똑같을 리 없다. 저마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살려서 건강하고 활기찬 몸을 만드는 것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비결이다. 입에 발린 말 같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마른체형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조건 음식을 줄이는 잘못된 다이어트를 시도하고 있다.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거식증에 걸린 한 모델을 사례를 보자. 브라질 모델 아나 카롤리나 레스톤 마칸은 지나친 다이어트에 따른 거식증 증세로 나와 같와 같은 나이인 21살에 사망했다. 카롤리나는 아름다웠지만 뉴욕의 좀 더 좋은 모델 에이전시에서 일하기 위해 체중 감량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그녀는 거식증으로 인한 신장 기능 저하로 병원 치료를 받아오던 중 심한 고혈압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사망했다. 사망 당시 키가 174㎝, 몸무게 40㎏으로 심하게 마른 상태였다. 카롤리나의 죽음은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고용하는 패션모델 업계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지만 주요 패션쇼에서는 여전히 깡마른 모델을 선호하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페션계의 풍조를 없애기 위해 2007년 가을,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 노리타는 밀라노 패션주간에 맞춰서 일간지와 거리 광고판에 일제히 자사 광고를 게재했다. 노리타가 선택한 광고 사진은 패션모델 이사벨 카로의 누드였는데 27세의 이 여성은 15년동안 거식증을 앓아온 환자로 당시 몸무게가 31kg 이었다. 노리타 측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광고를 실은 이유에 대해서 최근 많아지는 거식증과 무식욕증에 대해 경각심을 울리고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라고 밝혔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이 광고가 거식증 퇴치에 기여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다이어트에 맹목적인 소녀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부정적 시각이 팽팽하게 맞섰다.대중매체가 여성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각종매체에서 보도하는 내용들은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들로 묘사하다 보니 종종 여기저기서 S라인을 부추기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섹시한 몸매가 건강하다? 맞는 말이다 요즘 여성들에게 선망이 되는 에스라인 몸배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건강의 표상이다 - 06 4월 4일 중앙일보에스라인 몸매를 가진 여성이 골반부위의 지방산이 많을 수록 오메가3 지방산이 많아서 더 똑똑하다 - 07 11월 30일 sbs 뉴스 그러나 자크 마이에는 성형중독이나 거식증 폭식증 환자의 육체의 불안한 관계를 대중매체나 패션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특히 겉모습의 문제에 대한 정신적 불안이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겉모습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육체에 대한 타인의 판단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환자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갖는 의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가족단위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대가족은 이제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으로 바뀌었다. 전에는 세대 사이에 존재하던 갈등들이 뚜렷하지 않았는데 핵가족의 경우 이러한 갈등은 삽시간에 악화되기 마련이다. 이 갈등들은 백일하에 터져 나올 수도 있고, 오히려 억눌려서 금기로 작용하며 내부로 투사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억압은 병리 현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위험이 있는데 그게 젊은이가 느끼는 불안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아리랑-망간광산에 새겨진 차별과 가해의 역사[1부 ‘단바망간기념관’ 7300일]1장 아버지, 어머니가 걸어온 길작가의 아버지인 ‘이정호’는 고향 경상남도 김해군이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자, 가족들과 함께 일을 찾아 식미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정호는 큰아버지 이봉률 밑에서 지내며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당한다.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의식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생활이 궁핍해 정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6세의 나이로 망간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한다.2장 ‘재일’에 새겨진 역사일본의 패전 직후부터 1955년경에 걸쳐 단바의 함바는 재일조선인의 정치활동과 일본인들의 혁명활동의 거점 중 하나가 된다. 봉율과 정호 일가도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호쿠소 린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조선인연맹을 해체 시키기 위해 일본인이 날조한 것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조국방위대’ 게이호쿠대 대장이었던 이정호가 억울한 판결을 받게 된다. 이 날조 사건으로 많은 재일 조선인들은 고통과 편견을 받아야 했고, 그들의 명예는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3장 아버지 이정호가 추구했던 것단바는 일본의 최대 망간 산출지로 채굴량이 부족해지자 이를 증배하기 위해 더 많은 광부를 필요로 했고 이것이 조선인을 강제 연행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이정호는 백두광업유한회사를 만들게 된다. 백두광업을 잇던 중 그는 진폐증에 걸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외국에서의 망간수입으로 인해 78년 백두광업은 도산하고 진폐증으로 고생하던 중 망간광산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몸을 혹사 시키면서 까지 기념관을 세우는데 매진했다. 결국 개관한지 6년 후 이정호는 사망한다,4장 아버지와 길을 떠나다 - 조선인 강제연행과 망간광산전쟁수행과 공업발전을 위해서는 망간이 꼭 필요했고, 단바분지에는 망간이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망간광산에 조선인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는 강제 연행과 관련이 깊다. 강제 연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조선인들을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하였고 강제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민족차별 아래서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한 13명의 증언 )5장 진폐증과의 싸움일본정부는 광물 채굴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을 우려해 1970년대까지 진폐증이라는 심각한 병을 광부들에게 철저히 주지시키지 않고 진폐증 문제를 방치했고 진폐증 환자들은 진폐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렇게 진폐동맹이 결성된지 사반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폐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6장 단바망간기념관의 탄생이정호는 동포들의 혼의 위로하겠다는 심정과 후세에 그 역사를 남기고자 하는 의지로 기념관을 세우고 싶어했다. 기념관을 건설 하는데에는 수억엔의 경비가 필요했지만 그 누구도 협조해 주지 않았다. 오랜고생 끝에 단바망간기념관이 개관되고 활황을 띈다. 당시 이 기념관은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인권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전시시설이었고 뉴욕 타임즈에도 소개되지만 계속된 경영위기로 결국 기념관을 폐관하기로 한다. 그러나 인권네트 사무국은 시민들로부터 모금을 해 자금을모아 주었고 기념관은 유지될 수 있었다. 모금을 통해 직면한 경영위기는 넘겼지만 이 같은 사태가 반복될 것을 걱정해 기념관 사업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특정비영리활동법인(NPO법인)을 세우기로한다. 이로인해 기념관 사업도 크게 활성화된다.7장 단바망간기념관 관장직을 이어받아80년동안 이 지역사회에서 살면서 분명 기념관의 의의를 높게 평가해 주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전쟁 전부터 치안단속의 대상이었던 재일조선인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식별하려 하는 일본 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억울함과 부조리함이 이용식으로 하여금 기념관을 지키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념관의 만성적인 적자는 개선되지 못했고,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문제의식도 희박해 지면서 방문자가 줄어 더 이상 운영을 지속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판단해 2009년 5월 31일부로 기념관을 폐관한다. 단바망간기념관의 7300일을 정리해 보고 싶어 이 책을 출판한다.[2부 나의 연구노트]1장 재일조선인 차별로부터 해방을 향하여재일조선인은 일본에 호적이 없고 외국인 등록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등록원표가 파기되면 재일조선인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최소한의 기록조차 없어지는 것이다.재일조선인은 취직과 승진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또 입시와 학교생활에서는 물론이고, 권리는 배제 당한채 의무만 강요 받고있다. 입주차별과 국민연금, 장애연금도 차별 받는다. 전쟁중에 일본에 강제연행된 피해자이자 그 민족의 자손인 재일조선인들은 여전히 많은 차별의 피해자가 되고있다.2장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며일본은 피해의 역사만 남기려하고 가해의 역사는 지우려 한다. 일본은 전후처리와 피해자 구제 등 반성해야 할 문제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큰 요인이다. 일본정부가 치러야 하는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배상의무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또 독일에서는 역사 문제에 관해서 철저히 사죄하지만 일본의 정치가들은 아무렇지 않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3장 역사왜곡을 밝힌다이 장은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나카 사카이가 저술한 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망간광산 노동자들을 ‘돈벌이 갔던 사람’들로 표현하며 그것을 그리운 추억으로 포장한다.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사회적 약자'가 아닐까. 그들은 일본에서 차별받고 한국에서 외면 받는다. 일본에서 동화와 배제를 강요받던 그들에게 우리는 들끓는 민족감정은 커녕 최소한의 관심도 보여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류열풍으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생활하는 것이 많이 나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심지어 조금은 뿌듯한 기분까지 느꼈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아리랑’과 재일조선인과의 인터뷰, 재일조선인에 관한 여러 기사를 보고난 후 그동안 내가 그들에 대해 정말 무관심하긴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한류 열풍덕분에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변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재일조선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한일, 북일 관계가 좋아져도 재일조선인의 대우가 나아지진 않죠. 하지만 교과서 왜곡, 납치문제 등 관계가 악화되면 폭력으로 되돌아옵니다."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재일조선인들은 훨씬 온몸으로 차별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일본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즐거움이자 효율적인 질서유지 수단쯤으로 여기는 것 일지도 모른다. 남보다 월등하다는 우월감에 스스로 자기만족을 하면서 말이다.2010년, 해방 65주년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18년째 진행 중인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 조선인 피폭자 사건, 강제연행 희생자 문제, 재일조선인 차별, 야스쿠니 신사참배,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 기술을 거부하는 일본교과서 문제 등, 확실히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재일조선인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첫 번째 노력이 사라졌다. 망간광산에서 힘들게 일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역사를 남기고자 세운 단바망간기념관이 폐관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폐관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땅 안에서 유일하게 강제징용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기념관이 사라져서는 안된다며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들이 나섰다고 한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단바망간기념관의 재개관 및 지속적 운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목표약을 모금하고, 후원회원을 확보하고, 모금에서 그치지 않고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 및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전개할 것이라고 한다. 또 ‘윤도현 밴드’라는 가수는 일본 현지에서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콘서트를 열어 재일교포와 일본인 등 천 3백여 명이 공연에 함께했고, 1억 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다고 한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씩 힘을 모아 기념관을 재건한다면 그것 또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만약 소중한 것인줄 알면서도 이 작은 박물관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본 정부에 대해 역사를 운운할 수 없고, 침략전쟁이다 강제연행이다 뭐 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역사란 이긴 사람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때문에 어쩌면 우린 진실과는 다른 사실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힘은 약했을지는 모르지만 민족의 자긍심과 강인감이 있었고,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로 남기를 바란다. 같은 나라에 있지 않다고, 한국어가 서툴다고, 일본인 같다고 우리마저 그들을 차별 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은, 돌아오고 싶은 그런 ‘집’ 이 되었으면 한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역사와 동-동남아시아의 역사사토시 이케다이 글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형성과 아시아 지역과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역사적 변형 과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1. 두 역사 체제의 모태로서 아시아1981년 월러스틴의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이래로 세계체제 시각은 근대일본을 연구하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근대 아시아의 지역 경제는 유럽 중심의 세계 체제와 연계를 맺은 결과로서보다 아시아 내부의 역동성의 결과로서 성장하였다는 새로운 시각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유럽과 러시아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을 의미한다. 이 글의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 때 아시아는 일본을 포함하지 않는다.아시아의 내적 역학을 중요시하는 연구자들은 하나의 국가나 국가 경제를 분석 단위로 하는 발전론자 모델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세계 체제의 기본 시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세계 체제 시각이 내포하고 있는 유럽 중심적 편견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비유럽 지역의 역사 진행을 세계 체제를 변형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통합을 전후한 시기 아시아 지역의 역사 진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자 중 가와가츠는 유럽 중심적 세계체제 형성에 대한 월러스틴의 이론에 도전한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와의 원거리 무역에서 유럽 세계 체제가 형성되는 주요 역동성이 기원한다고 주장한다.가와가츠는 그의 논지를 ‘14세기의 위기’에서 시작하면서 이것이 사실상 세계적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의 풍요로운 산품과의 만남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물품들을 스스로 자급하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 영역을 창조해나가게 한 것이다.중국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16세기동안 일본은 유럽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아시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유럽과 일본은 16-18세기 동아 s같은 형태의 무역 구조를 공유하고 있었다.그러나 유럽과 일본은 수입 물품의 자급을 이루지대, 즉 분석의 매개층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동 -동남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조공 무역 체제가 이러한 분석의 매개층에 해당한다.근대 세계 역사를 유럽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아시아의 각 부분을 점차 통합해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던 월러스틴과 달리 하마시타는 근대 세계 역사를 유럽 세계 체제를 포함하는 많은 지역 체제들 사이의 연결 모습이 변화하는 시기로서 개념화하고 있다. 즉 그는 유럽의 지역적 세계 체제와 다양하고 중첩적이 아시아의 세계 체제들간의 교섭은 이미 존재했던 교섭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하마시타는 지역적 세계 체제 대신 지역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필자가 굳이 지역적 세계 체제의 용어를 쓰는 이유는 동-동남아시아의 지역경제가 유럽의 세계체제와ㅏ 몇 가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마시타는 유럽 국제 체제의 이념과 실천, 즉 동등한 주권 국가간의 조약과 외교 행위에 기반한 국제 질서가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적 세계 질서 속에 하나의 범주로 포함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유럽 세계 체제는 전지구적 세걔 체제를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 변화시킴으로써 인류 근대사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사토시 이케다는 유럽 경제라는 용어보다 유럽 세계 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시게마츠의 정의에 따르면 지대는 정치경제 행적적 경계에 의해서 울타리 쳐지지 않은 항구 도시 섬 바다 육지의 일부를 연결하는 연결 지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토시 이케다는 지대보다는 지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세계 체제 연구에서 지대라는 용어는 중심부 반주변 주변 지역으로 구성된 구조를 지칭히는데 사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경우 영토성이 다소 명확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하마시타에 의하면 한 지역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하부 치제로서 전지구적 세계 체제 속에 편입될 수 있는 조건으로 화폐와 다른 교환 수단의 유통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화폐에 의한 경제적 연계 이외에도 지역간 물적 인적 유동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가와가츠가 설명하는 쇄국의 모습은 쇄국의 막부의 노력의 결과이다.18세기에 이르러 일본은 생사를 수입 대체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래도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견직물은 일본의 견직물보다 높은 질 때문에 도쿠가와 말기까지 수입된다.쇄국은 아시아 무역세계들로부터 일본경제를 차단하려던 정책이 아니었다. 쇄국 기간을 통하여 수입 대체가 진척 중이었는데도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외부무역은 계속되고 있었다.동-동남아시아의 지역적 세계체제 내에서 무역관계의 연속성과 그 중요성을 지지하는 일본어 출판물이 늘고 있다.도쿠가와 정권의 수입 대체는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3. 하마시따의 세가지 전제삼중구조론과 더불어 하마시타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동-동남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지역적 세계체제를 확인한 것이다. 하마시타의 주장은 다음 세가지 전제로 요약될 수 있다1)중국 중심의 지역적 세계체제는 근대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럽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통합된 이후에도 동-동남아시아 지역 내의 관계는 분해되지 않고 유지 또는 확대 됨2) 근대 동-동남아시아의 지역적 세계체제를 특징짓는 주요 역동성은 체제 주변 국가들에 의한 중국 중심적 질서에 대한 도전에 기인한다.3) 일본이나 아시아의 신흥공업사회들이 중국 주변부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더라도 현재나 미래의 동-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비중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하마시타는 동-동남아시아에서 존재했던 지역적 세계체제를 중국 조공무역 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가 유지될수 있었던 것은 견직물 등 중국물품이 중국 외 지역에서 크게 요구되었고 이로인해 같은 물품이 중국 내외에서 가격 차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중국 중심적 정치, 군사, 외교질서가 존재 했을을 주장하면서 하마시타는 이를 팍스 씨니카라 부르고 있다.하마시타 등이 제시하는 견해는 동-동남아시아 세계체제의 역사적 진행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영국이 유럽으로부터 은과 동의 유출을 제한하고 산업혁명을 통해서 인도 면의 수입 대체를 완수 할 때 까지 중국의둘째, 조공무역의 수익성이 감소하고 사무역의 부피가 증가함에 따라 공식적인 조공무역은 사라지게 되었다. 셋째, 이전의 조공국들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서구의 정치외교적 원칙과 방법을 채택하기 시작했다.주변국들이 중국 조공무역 체제라는 커다란 틀 안에 그들 자신의 또 다른 소규모 조공체제를 만듦으로써 중국 중심적 질서를 변화 시키려는 기도들이 동-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따고 하마시타는 주장한다.중국 중심적 질서에 대한 도전의 예로서 도쿠가와 쇄국정책의 정치 ,군사,. 외교적 측면을 검토하고 있는 최근의 연구들이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 의하면 도쿠가와 정권은 중국 중심적 질서에 도전하여 일본 중심적 질서를 건설코자 하였다는 것이다.일본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나라였고 일본에게 있어서 동-동남아시아 세계체제와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서구세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동아시아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통합되는 새로운 역사적 과정은 본래 존재해왔던 팍스 씨니카에 대한 도전이라는 역사적 진행을 다시 불러들었던 것이다.이러한 팍스 씨니카에의 도전, 즉 근대 동-동남아시아를 움직였던 지역적 역학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를 기반으로 가와가쯔와 하마시타는 일본의 산업화에 담긴 의미를 재해석해나간다.가와가쯔는 일본의 산업화는 17세기 이래로 아시아 물품을 자급하려 했던 일본의 노력이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 수입대체 라는 형태를 띠고 추진되었지만 이후 아시아 무역세계로 재통합됨에 따라 일본이 중국과의 아시아 내부간 경쟁을 노출 시켰고, 일본은 중국과의 경쟁을 위해 자신을 산업화 시켜야 했다는 것이다.한편 하마시타는 일본의 산업화는 상당한 정도 동-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중국상인의 힘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상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일본 상인들은 서구식으로 제조된 물품으로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고, 성냥과 비누같은 아시아형 근대상품을 개발해야만 했다.동아시아에서 핵심적인 활동주체는 중국이었고, 팍스 씨니카에 대한 도전이 근대 일본의 근본적인 역역 내에서 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이 아닌 중국정부와 화교자본망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 중심은 이 지역의 정치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되돌아오고 있다.이러한 발전은 이 지역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미래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시장사회주의가 성공하고 중국이 50년 안에 반주변부의 위치를 획득한다면 세계체제의 구성이 크게 변경될 것이며 중국은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변화는 아마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종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중국의 실험은 중국 내에서 심각한 소득의 양극화와 함께 상당한 자본축적을 가져올 수 있다.하마시타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동-동남아시아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역사적 특인 중국 중심적 질서가 오늘날 다시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이 지역의 정치경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학문적, 정책적 토론의 내용들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4.세계체제 연구를 위한 교훈하마시타와 가와가쯔의 시각에서 보면 서양이 아시아를 통합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시아와 세계체제는 서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아시아는 유럽 세계체제에 의해 통합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럽의 변화를 초래하는 능동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이러한 동아시아적 시각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연구의 기본시각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며 동 동남아시아 세계체제를 통합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유럽 세계 체제와의 무역이 필수불가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전 지구적인 체제로 팽창하는 과정은 그것의 지역화와 비유럽지역의 세계화 과정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세계체제와 지역적 세계체제들 간의 상반된 역사적 진행에서 오는 상호영향에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다.지역적 연계를 중요시하는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첫째, 세계체제의 공간적 구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산업화라는 역사적 진행에 대한 지역적 시각은 일본에 산업화에 대한 또 다른 이해방법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