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j 듀이커 독후감나는 이 책을 읽고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책의 압도적인 두께요, 두 번째는 호치민이라는 인간의 드라마틱한 인생이었다. 이 책은 호치민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아주 주도면밀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이렇게 자세하게 한 인간의 인생을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략된 부분이 상당부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조국을 떠나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의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이 두꺼운 책에서도 호치민이 미국에 머물렀던 기간은 자료 부족으로 생략된 내용이 많다. 호치민이라는 사람은 그토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가시밭길 인생을 살았고, 그 열망이 언제나 변하지 않았기에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도시까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치민은 공산주의자이고 오늘날 베트남을 세우는데 아주 큰 공을 세운, 국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 지도자, 공산주의 정치인에 대한 인식인 북한 탓인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호치민은 그렇지가 않다. 왜 호치민이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었다. 평생을 숭고한 뜻을, 숭고한 목적과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 사람은 이데올로기가 어떻든 손가락질 할 수가 없다. 오늘날 손가락질 받고 비난 받는 정치인, 권력자들은 초심을 잃거나 아예 숭고한 뜻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물론 정치인 호치민도 실책이 있었고, 북베트남을 건국한 이후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호치민에 대한 평가에 큰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호치민은 죽는 그날까지 독립되고 통일된 조국을 만들기 위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자신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인간 호치민은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에 아무리 숭고한 뜻을 지닌 사람이더라도 권력을 잡거나 나이를 먹으면 변절, 혹은 타락하는 경우가 아주 흔한데, 호치민은 적어도 그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으니 말이다.호치민이 평생을 생각하고 또 위했던 베트남이라는 국가는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했다.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놓쳐 외세, 열강의 식민지가 된 처지가 된 것도 그렇고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분단을 맞이한 것도 그렇다.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극단성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남쪽과 북쪽에서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것 역시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당시 식민지의 국민들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은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일제에게 큰 반감을 느끼고 독립을 열망했듯이 베트남 역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했다. 마찬가지로 외세의 지배 세력에 빌붙어 호가호식하는 매국노들도 있었고, 가시밭길 인생을 감수하면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애국자들도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던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왜 당시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호치민이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것과 같은 길을 우리나라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도 밟았던 게 아닐까? 식민지가 독립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 혹은 배경을 가장 먼저 제시했던 국가가 레닌이었고 막 소련이라는 국가가 태동했을 무렵에는 공산주의가 식민지의 독립에 구체적인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호치민은 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동시에 아주 민족주의적인 사람이었고, 그러한 성향을 평생 버리지 않았다.호치민은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의 순간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돌아보았을까? 나는 그가 후회 없는 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꺼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신념,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타오르듯 살아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 신념, 가치라는 것이 조국의 독립이나 통일과 같은 숭고한 이념일 때 그렇다. 어떻게 이렇게 고단한 인생을 지치지 않고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온갖 일을 서슴지 않았던 프랑스에서의 망명 생활, 프랑스 식민지 담당 기관의 추적과 체포를 피해서 범법자처럼 살아야만 했던 생활, 당시 소련 교육 기관에서 흔치 않았던 아시아인이라는 인종, 중국에서 행했던 베트남의 독립 운동 등 요약하기도 힘든 고단한 인생이었다. 그러한 인생을 가능케 했던 것이 단순히 애국심이라는 신념이었을까? 호치민이라는 인간이 강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물론 호치민의 인생에서 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생을 고단한 가시밭길을 살았지만 동료 공산주의 운동가, 독립 운동가들이 체포되어 목숨을 잃고 또 경쟁자 위치에서 일찍이 탈락함으로써 호치민이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프랑스 정부에 잡혀 총살을 당했을 때, 그나마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호치민이 운이 좋았다고 할까? 어쨌든 이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누군가는 호치민처럼 타오르듯 열정적으로 살았지만 체포와 총살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독립 운동의 대열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듯 다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호치민은 보통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정말 강한 인간이 완전한 삶을 살았던 나머지 운도 어느 정도 따라준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이 책에서는 당시 아시아인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독립을 염원하는 아시아인의 마음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호치민은 평생을 거쳐 외국을 돌아다니며 베트남의 독립을 부르짖었지만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소련에서도 걸핏하면 아시아의 식민지 독립과도 같은 주제는 뒤로 밀려나고는 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 각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결의와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마저 식민지 독립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열강,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에 눈이 멀어 얼마나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프랑스는 베트남이라는 식민지를 잊지 못해 끈질기게 군대를 몰고 베트남으로 들어왔고, 끝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다른 국가를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의 망령이 얼마나 짙었는지, 떨쳐버리기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중에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도미노 이론에 근거한 전쟁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프랑스와의 전쟁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 베트민은 제국주의의 망령과 싸웠고 또 똘똘 뭉친 애국심으로 이길 수 있었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역사가 고작 반 세기 전에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당시 식민지 국가에서 각종 수탈을 일삼았던 열강들, 강대국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얼마나 졌는가? 그러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이라는 인간의 인생은 열강의 부조리, 가식적인 모습, 탐욕과 맞섰던 과정 그 자체였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 비폭력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호치민의 모습이 얼마나 몽상적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북베트남이 세워진 뒤 행해졌던 급진적인 정책은 둘째 치더라도, 결국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소련의 공산주의 전략, 강대국들의 공산주의 전략에 많이 의존했던 건 아쉬운 부분이기는 하다. 특히 소련에서의 교육, 레닌이 제시했던 공산주의 이론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련과 중국은 호치민과 뗄래야 뗄 수가 없었는데, 훗날 프랑스, 미국과 북베트남이 전쟁을 벌일 때도 호치민은 이들 국가의 지원을 잘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현실과 타협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역사일 수도 있다. 호치민이 아무리 열성적이고 또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베트남이라는 국가에 모든 강대국들을 제압할 수 있는 천하무적의 군대를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치민은 외세, 다른 국가가 베트남 땅을 밟고 주둔하는 것을 아주 지긋지긋하게 생각했지만 때때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고, 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자였지만 현실주의를 버리지 않았던 호치민의 능력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오늘날 비록 세계적으로도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열강의 손아귀에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가 자꾸만 생각이 나기도 했다. 과거에 힘이 있었다면,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과거에 있었다면 분단이라는 아픈 사건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리라.호치민은 예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 그의 인생은 베트남은 물론 세계 모든 국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태어났다면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이룰 수 없을 것 같지만 이뤄야만 하는 꿈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사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닐까? 호치민의 평전을 읽고 가치과 열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 독후감사실 이전까지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이름만 겨우 들어본 수준이었다. 오늘날 베트남에 호치민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고, 또 베트남의 국부인 만큼 그 유명세가 남달랐던 건 사실이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았었는지는 몰랐다. 이 책의 압도적인 두께를 보고 읽기가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지간한 장편소설 두세 권 정도 분량으로 보이는 평전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첫 페이지를 넘긴 순간부터 의외로 술술 잘 읽혔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살았던 인생과 당시 베트남의 상황이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이 국권을 프랑스, 일본에게 빼앗겼던 시절 우리나라 역시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었으니 말이다.호치민은 완전한 인생을, 그러니까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조국을 위해 살았으며 단 한순간도 다른 뜻을 품거나 나태한 적을 보인 적은 없었다. 물론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였고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했다는 점이 오늘날 시점으로 걸릴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색깔론은 그의 인생 앞에서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 색채가 짙은 민족주의자였다. 항상 베트남을 포함한 모든 식민지 국가가 독립을 통해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먼저 희망했으며, 그러한 민족주의적인 모습으로 인해서 소련이나 중국에서도 의심을 받기도 했다. 당장 식민지 정책, 식민지를 통한 열강의 제국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최초의 거물급 정치인이 레닌이었으니 호치민은 자연스럽게 공산주의로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호치민은 레닌이 사망했을 때 매우 비통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최초로 식민지 제도에 비판적인 이론을 제공해준 다른 국가의 지도자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호치민의 인생은 정말 다사다난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각종의 유럽 국가들, 미국, 소련, 중국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떠돌며 베트남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다. 단체를 조직하고 또 독립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온갖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당국에 체포되어서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살도록, 그렇게까지 자신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단순한 애국심이라는 마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어떤 열정,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천부적으로 존재했던 게 아닐까? 호치민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조국을 향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았던 역사적인 사실이 말이다. 오늘날 왜 그렇게 베트남에서 호치민을 존경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호치민은 인간적으로도 매력이 많고 또 바른 인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정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지나친 비난을 받아도 똑같이 그것을 받아치거나 반격하는 모습은 서술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그가 주석 호치민이 아니라 ‘호 아저씨’로 기억되는 것도 이러한 성격이 큰 역할을 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으면서 그러한 인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숱한 좌절과 절망이 경험이 되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호치민은 살면서 정말 무수한 좌절을 겪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강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연락을 시도하고 또 협상을 마치고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대편을 때문에 좌절을 겪는 등 그의 인생은 절망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런 무수한 절망과 좌절이 호치민을 초연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무한하게 깨닫게 되었을 때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또 도를 넘는 비판이나 비난도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치민이 약점이 단 하나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북베트남에서 권력을 잡은 이후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호치민의 영향력이 북베트남에서 작지 않았던 만큼 그러한 비극에는 그의 책임도 있다. 물론 호치민은 온건하게 부르주아들을 대하라고 지시를 했고 또 당시 북베트남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그러한 지시를 거둘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에서 그의 책임이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시대의 한계처럼 보였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더라도, 아무리 완전한 인간이더라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 한 시대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바람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인물이 호치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당시의 베트남은 오늘날 우리나라와 유사했다. 자발적인 근대화 타이밍을 놓친, 유교를 근본으로 삼았던 국가가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애국지사들이 활약하는 그런 상황. 당시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보니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식민지 역사, 다른 국가를 식민지로 삼았던 역사가 인류사에서 얼마나 어두운 역사였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 국가의 운명은 그 국가의 국민들이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 간단한 원리를 당대에는 많은 열강들이 깨닫지 못해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호치민은 공산주의자 중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민족주의와 지역주의를 원론적으로 터부시하는 공산주의 세력권에서, 그는 굉장히 반식민지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성향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 스탈린은 그러한 호치민을 고깝게 보았다. 호치민을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의 공산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호치민은 당대가 낳은, 시대가 낳은 필연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닌이 가장 먼저 반식민주의의 구호를 내세웠기 때문에 호치민은 공산주의에 귀를 기울였고, 독립을 위해서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평생을 싸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당시 자본주의가 반식민지를 내세웠다면 호치민은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정의란 무엇인가정의라는 말은 무척 자주 사용되고 있고, 또 대중들에게 익숙한 단어이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정의라는 말을 주관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적용할 수 있고 또한 이 관념적인 요소를 현실로 옮기는 문제에서 여러 선택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면 잘못을 저지른 죄인에게 엄벌을 내리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 정의일까? 이렇게 현실에서 얼마든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서도 정의를 표현하는, 실행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뜻으로 정의를 설명하는 것은 무척 난해할 수밖에 없다.정의가 올바른 관념, 올바른 그 무엇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론의 문제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판단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반적인 모든 방법과 발상을 정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명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옳고 그름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가 또 문제가 된다. 정의의 기준은 오로지 선(善), 인간이 이성으로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만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의 이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한때 보편적인 이성으로도 합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혹은 모두가 옳다고 생각했던 선이 시대가 흐르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신분제 같은 것이 그렇다. 먼 과거에 인간의 이성으로 신분제가 옳으며 그러한 시스템으로 이 사회가 존속되어야 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진화되고 발전된 이성으로 선을 판별할 수 있는 지금, 신분제가 옳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회의주의로 흘러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합의할 수 있는 선이 아니라면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선, 정의와 같은 요소가 실재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이 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막연한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나는 선, 정의와 같은 관념적인 요소가 인간이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먼 과거의 철학자 플라톤이 설명했던 신화적인 철학에 가깝지, 현실적으로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선, 정의를 물질로 만들어서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인지적으로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인류 전반이 합의를 통해 완성할 수는 있다.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한 선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혹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못하는 경직된 근본주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정의는 이렇듯 인간의 합의된 이성에서 비롯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믿고 있는 선이 불완전한 것처럼 정의 역시도 불완전하다. 아니, 정의라는 요소가 선 위에서 건설되는 일종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구체적인 선을 실행하는 모든 방법론이 정의인 만큼 이견이 많을 수 있고 또한 다양성이 엄청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에 엄청난 다양성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의 보편성, 선의 합의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만큼 그 한계와 방법은 뚜렷하다. 예를 들면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켜가면서 구현할 수 있는 정의란 없다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선의 실천성이고, 불완전한 정의를 최대한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의 근본에서 정의의 원칙이 얼마나 벗어나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또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최대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이 얼마만큼 이루어질 수 있을 때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정의의 원칙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이러한 다수결의 원칙이다. 물론 소수 측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또 강제한다면 그러한 상황을 정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저의의 원칙을 통해서 어떤 공동의 가치를 실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서 정의의 적용은 모두의 입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최소한의 반발을 살 수 있는 방안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정의에 가까울 뿐.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완전한 답을 찾기 위해 그러한 문제에서 질질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의 이익이나 기본권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갈등이 일어난다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이 나올 수는 없다. 인간은 그만큼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또한 탐욕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탐욕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니다. 동물의 탐욕성이란 본능이다.정의는 이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이다. 그것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완전한 정신.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인간이 동물과도 다르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완전하고 공정한 선을 지향하는 것, 그리고 이 선에서 정의를 도출하는 것이 최대한의 노력이다. 애초에 오늘날 모든 윤리 문제, 옳고 그름을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정의가 탄생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옳은 방향을 언제나 바라보고 지향할 수는 있다. 인간은 정의롭지는 않다. 그러나 항상 정의롭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윌터 아이작슨 독후감스티브 잡스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다. 비록 그쪽 분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부분은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아직까지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가? 아마 그러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실려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이 탄생하고 또 소멸하기까지 모든 궤적을 아주 낱낱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을 이렇게 자세하게 파헤쳐서 서술했다면 조금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어찌 보면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의 인생은 오늘날 신화적인 부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룩한 미국 상류층의 상징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는 과거 히피의 물결에, 당대의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을 거부하고 정신적인 평화를 선택했던 유행의 물결에 온몸을 맡겼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50년대부터 시작된 히피의 물결은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미국을 휩쓸었다. 젊은 시절 무엇보다 정신적인 가치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스티브 잡스는 이후 스티브 워즈니악과 의기투합하여 애플을 창립,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신화적인 인물이 된다. 젊은 시절 무엇보다 정신적인 가치와 평화에서 인생의 큰 의미를 찾았던 스티브 잡스가 거대한 회사의 CEO가 되어 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 세대의 신화적인 인물들, 오늘날 미국을 가능케 했던 전설적인 사업가들은 대부분 이러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정신적인 평화나 자기만족을 추구했던 그들의 괴짜 같은 면도 성공을 이루기 위한, 영리적으로 신화적인 인물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빌 게이츠가 자선 산업과 기부를 통해 이름을 알리면서도 그 또한 한푼이라도 더 버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매우 불합리해 보이는 과거나 가치 판단 기준도 결국 신화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효율적인 자본가가 되기 위한 재료가 된다. 스티브 잡스도 이러한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기업가 스티브 잡스와 인간 스티브 잡스를 구분해서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가 스티브 잡스는 무척 명민하고 또 똑똑하며 시장을 개척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의 미학을 자신의 회사 제품에 녹여내는 능력은 가히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매우 미니멀리즘한, 곡선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직관적인 디자인과 성능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러한 철학을 버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일체화를 신봉하는 인물이었으며 소비자들은 잡스가 디자인하고 생산한 물건 그대로 사용해야 할 뿐, 소비자들이 자의적으로 물건을 개조하거나 확장하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잡스의 철학은 죽는 그날까지 이어지는데, 이러한 까다로운 철학을 대부분 만족하면서도 많은 소비자들이 선호하게 된 뛰어난 제품들을 만들어낸 건 가히 천재적이었다. 기업가, 프로젝트의 리더, 마케팅 담당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잡스는 분명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인간 스티브 잡스는 존경하지 못할 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부하 직원, 아래 직원들에게 모욕과 폭언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면접 자리에서도 면접 지원자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히피 문화를 통해 물질 문화를 거부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우선시했다는 사람이 동업자와 나누어 가져야 할 돈을 대부분 혼자 독차지 하는 등 뛰어난 능력과는 별개로 이해하지 못할 이기적인 면을 보인 것 역시 사실이다. 나는 스티브 잡스가 성공하고자 하는 열정도 있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가치관, 심미관,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했던 욕구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기적이고 모난 성격도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또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설득하려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스티브 잡스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에만 집착했다면 그토록 폐쇄적이고 또 개방을 거부하는 플랫폼이나 소프트웨어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스티브 잡스는 문제적 인물이다.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 가치관이 뒤섞인, 기존의 가치관에 저항하면서 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치관에 영합하는 그의 양면적인 모습은 이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더 나아가서 기업가로서의 성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애플 시리즈부터 아이폰 시리즈까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제품에 잘 구현했기에, 애플의 상품이 언제나 뜨거운 감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이 책을 읽고 내가 만약 사업가가 된다면 스티브 잡스와 같은 기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와 동시에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업가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알았다. 그의 신화적인 성격은 입양아, 히피 문화에 심취했던 과거, 이기적인 성격, 미적 취향 등 다양한 주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설프게 스티브 잡스를 따라해서 기업가로 성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인생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바로 열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취미처럼,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가처럼 즐겼다. 자신의 일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무조건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처럼 자신의 일을 사랑해서 성공하는 것. 그와 같은 열정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오쩌둥, 그는 누구인가?1. 들어가며마오쩌둥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현대 중국을 건국한 사람이다. 수많은 군벌로 나누어져 있던 중국을 통일한 업적이 있지만, 반대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의 경제와 문화를 후퇴시키고 수없이 많은 인명들을 희생시킨 평을 듣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중국 현지에서도 표면적인 평가와 실질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로, 그의 영향력은 중국이 강대국이 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가 소수의 특정한 인물들로 인해서 움직이고 또 바뀐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마오쩌둥은 틀림없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오늘날 중국이 강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고 또 국제 정세의 흐름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오쩌둥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절대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오쩌둥은 어떠한 생을 살았으며 어떤 이데올로기로 현대의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이미 마오쩌둥은 70년대에 사망한 인물이지만 그의 그림자는 아직도 짙다.2. 마오쩌둥의 생애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 샹탄현에서 태어났다. 마오쩌둥의 아버지 마오이창은 자주성가한 부농이었고 어머니 원쑤친은 시대에 맞게 전근대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남으로 태어난 마오쩌둥은 곧잘 아버지와 충돌했는데, 마오쩌둥이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자주 맞고는 했다. 반면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다. 마오쩌둥의 어머니는 아들을 아끼는 평범한 아낙이었으며,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마오쩌둥은 슬픔의 감정을 보였다. 마오쩌둥은 어릴 때 책을 좋아했던 똑똑한 소년이었다. 그는 어릴 때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역사서나 고전을 곧잘 읽었는데, 그런 독서 취향은 말년까지 죽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이나 공산주의 관련 서적보다는 자치통감이나 삼국지연의와 같은 중국의본의 침략으로 인해 반식민지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민중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 감정이 퍼져나갔다. 어릴 적 마오쩌둥도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중국 한민족의 궐기와 발전을 촉구하는 팜플렛을 읽으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마오쩌둥은 14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서 뤄씨 성을 지닌 여자와 혼인을 하였으나, 당시에 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결혼을 하자마자 공부를 하겠다며 고향을 떠났고, 마오쩌둥의 첫 번째 아내는 이른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다.마오쩌둥은 샹탄을 떠나 장사성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오랫동안 후난 성에 살았던 그에게 중학교는 신세계와 같은 공간이었다. 죽을 때까지 후난 성 사투리를 버리지 못한 마오쩌둥은 그곳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학문의 길에 정진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민족주의가 녹아 든 끊는 피를 자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곳곳에서 의병들이 궐기하자 반 년 정도 의병에 몸을 담고 총을 잡기도 했다. 의병 생활을 마친 이후 마오쩌둥은 후난 성으로 돌아와서 중학교 교육 과정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향한다.이때 마오쩌둥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양창지다. 양창지는 베이징 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마오쩌둥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마오쩌둥은 베이징 대학교에서 보조 사서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마오쩌둥은 젊었을 적 공산주의보다는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했다.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그는 통일된 중국이 아니라 각각의 지방으로 독립해서 무정부주의의 이상을 실현한 통치 체제를 구상하기도 했고, 무력이나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과 계몽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방법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가 레닌-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건 나중의 일로, 베이징에서 학습을 하던 시절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미완성 상태였던 셈이다. 양창치를 중심으로 마오쩌둥은 당시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많은 좌익,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고 이는 그의 혁명가 인생에서 큰 자산이 된다리되지 않았던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도를 하였으나 지방 군벌의 탄압으로 인해서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난다. 마오쩌둥은 마침내 레닌-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직업 혁명가가 급진적인 정책과 국가 운영으로 이상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신념은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둥은 소련이나 프랑스로 떠날 수 있는 유학 기회를 모두 거절하였는데, 이는 그가 중국 내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선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모스크바 현지에서 한번도 공산주의 교육을 받지 않았던 마오쩌둥을 소련은 이후 내내 불편하게 여겼다.마오쩌둥은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립 회의에 후난 지역 대표로 참가한다. 그는 그곳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외세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아직 세력이 미미했던 중국 공산당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국공 합작 찬성에 앞장선다. 당시 쑨원을 지도자로 하는 중국 국민당 세력은 적지 않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쑨원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게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1차 국공합작은 쑨원의 역할이 컸는데, 국민당 내부에서 일부 우익 세력이 불만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랫동안 민족진영의 거두였던 쑨원의 결정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은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에 입당하여 세력을 키워나가는데, 이때 훗날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과 같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내부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했고, 이는 국민당 내부에서 공산당에게 경계심을 품게끔 하는 원인이 된다. 쑨원이 병으로 사망하고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험악한 공기가 돌기 시작했고, 마침내 국공결렬이 되면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에서 숙청된다.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공산당 대학살을 시작으로 마침내 1차 국공 내전이 발발한다. 이때 중국 공산당은 폭동을 일으키고 또 적극적으로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는 등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나, 수많, 이념적인 논쟁보다는 게릴라 전술이나 군사 분야를 중시했던 마오쩌둥은 학습과 이념으로 무장한 다른 혁명가들에게 얕보이기도 쉬웠다.1927년 정강산 부근으로 후퇴한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국민당은 마오쩌둥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파견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는데, 이는 마오쩌둥 세력을 얕본 이유가 컸다. 당시 마오쩌둥은 홍군, 중국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세력의 겉모습은 비적, 산적과도 다름이 없었고 마오쩌둥 본인도 이른바 부르주아에 대한 약탈을 일삼으며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이때 마오쩌둥은 주더와 같은 군인을 만나 자신의 수하로 두기 시작했고, 정강산 지방에서 소비에트를 건설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불어 이 즈음부터 마오쩌둥이 중국 홍군의 실력자로 떠오르면서 당내 경쟁자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는데, 마오쩌둥은 지나친 군사 우선주의, 모험주의로 소련과 경쟁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1934년 국민당의 토벌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 홍군은 마침내 서북부 산시성으로 모든 공산당의 인원들을 이동시키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장정이다. 후난성과 정강산 근처에서 정체 상태에 놓여있던 마오쩌둥 역시 대장정에 합류하는데, 대장정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그의 권력이 확실하게 자리 잡혀 있지 않았다. 당장 정궈타오와 같은 당내 라이벌들에게 강한 견제를 받고 있었고 소련에서도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미덥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치밀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당내 경쟁자들의 부하들, 수하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경쟁자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등의 능력을 발휘하여 대장정이 끝날 즈음에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가장 확실한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한때 마오쩌둥의 라이벌이었던 저우언라이 역시 이때부터 확실하게 마오쩌둥의 아래에 위치한 수하가 되었고, 캉성과 같은 인물은 마오쩌둥에게 아부하기 위해 연극배우 출신 장칭을 적극적으로 마오쩌둥을 이어주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했다. 대장정둥의 수하가 된 저우언라이가 출석했다. 이미 민심을 잃고 있었던 국민당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많은 병력과 자원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이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무섭게 세를 불리기 시작한다. 마오쩌둥이 일본군의 덕을 봤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다. 국민당은 공산당과 일본군 둘 다 대적할 수밖에 없었지만, 공산당은 이런 양면 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이다.결국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진 이후, 국민당은 다시금 공산당 토벌에 나서나 그 사이에 힘을 불린 공산당은 예전과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미국의 중재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만나 화해와 동맹의 행사를 시행하긴 했으나, 그건 형식적인 행사일 뿐이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본격적인 전쟁에 나선다. 부정부패와 무능, 강압적인 통치 정책으로 국민당은 중국 전역에서 민심을 잃은 상태였고 그 사이를 틈타 중국 공산당은 하나둘씩 국민당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결국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고 1946년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민공화국이 건설된다.분명 마오쩌둥은 군인으로서, 게릴라의 리더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수없이 많은 전쟁, 당내 경쟁, 권력 투쟁을 거친 끝에 확실한 권력을 잡았고 중국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마오쩌둥은 뛰어났을지언정 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로서는 그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역사에 남을 독재자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인생은 중국의 지도자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만약 마오쩌둥이 중국인민국화국을 건설하자마자 사망했다면 그는 정말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인생은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중국의 역사는 숱한 희생과 학살, 파멸로 점철된다.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직하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밀어붙였다. 대륙의 최고 권력자가 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과 반우파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숱한 부르주아들, 자산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