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문화와 예술 - 영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스페인 영화를 처음 접하는 나에게 스페인어로 들리는 대사를 비롯하여 아직 익숙하지 않은 스페인 문화권에 대한 이질감이 작용해서인지 처음에는 영화가 매우 낯선 느낌이 들었다. 또한 영미권 영화와 달리 스페인 영화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이가 아니고서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이 스페인 영화를 접해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과제를 시작하며 어떠한 영화를 보아야 할이지 고민하면서 강렬한 색채로 표현된 귀향의 포스터가 나를 이 영화로 이끌었다. 이 후에 알게 된 내용이지만 영화에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아름다운 것이 귀향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특징이라고 한다. 귀향을 보면서 이국적인 분위기와 음악이 스페인 영화에 대해 문외한이던 나에게 새로운 흥미를 일깨워 주었다. 또한 스페인 특유의 유머는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색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다.귀향의 간단한 줄거리는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라이문다는 한없이 거칠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할 일 없이 빈둥대는 남편과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둔 실질적 가장으로서 모든 현실이 짐스럽지만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의 딸 파울라가 성추행 하려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날 밤, 라이문다의 동생 쏠레에게도 비밀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쏠레는 불법 미용실을 운영하며, 미용실 손님과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홀로 살고 있었는데 고향인 라 만차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의 유령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엄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라이문다에게 숨긴 채, 미용실 손님들에게 엄마를 러시아 노숙자라고 소개한다. 엄마는 미용실 손님들과 차츰 어울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쏠레의 현실에 적응해가지만, 정작 가장 만나고 싶었던 라이문다에게는 나타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한다. 이 후 파울라까지 외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이상하게도 엄마는 라이문다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고 라이문다는 엄마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이 후 둘 사이에 해묵은 오해는 풀리며 모녀가 얼싸안아 눈물 흘리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엄마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해서 진정한 가족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스페인 영화 귀향은 죽은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는 환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가족 영화이자,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6명의 여자들이 저마다 말 못할 하나씩의 고통을 안고 있는데 의붓아버지의 성폭행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아버지를 살해한 파울라, 딸의 범행을 돕기 위해 남편의 시신을 예전 자신이 일하던 식당의 냉동고에 넣어야 했던 라이문다, 치매에 걸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이모, 산불로 인하여 불에 타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혼하고 먹고 살기 위해 홀로 불법 미용실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쏠레, 마지막으로 실종된 어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는 아우구스티나. 그들 중 누가 하나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암담한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데 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삶 저 밑바닥에 놓여있는 고통과 아픔, 그리고 서로에게 그 동안 말할 수 없었던 비밀들을 하나씩 털어 놓으며 마침내 그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거칠고 험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내내 어둡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나는 귀향의 매력이 호들갑 떨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언니인 쏠레가 엄마 유령을 미용실 손님들에게 소개하고, 또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라든지, 죽은 남편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라이문다의 모습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모습이 아닌, 너무나 자연스럽고 대범하기까지 하여 보는 나에게 코믹하고 유쾌하기까지 하였다.하지만 동시에, 엄마의 유령이 왜 라이문다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며, 딸의 미래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엄마의 무섭고도 강인한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웃음은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판타지는 단지 판타지만이 아니었다. 라이문다는 딸이 받은 충격과 우발적인 행동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수용해버리는 결단력을 지녔고 치밀한 뒷처리를 한다. 이러한 라이문다의 모습에서 모성의 위대함은 끝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페미니즘적 성격을 지닌 귀향은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들, 특히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잘 접근했다고 생각한다. 코미디와 여성, 열정과 감동이라는 알모도바르의 영화 귀향은 그래서 나에게 더욱 특별했던 것 같다.
영화 감상문당신의 열정과 그 안에서 흘린 땀을 기억하며...2008년 추석 연휴 극장에서 를 처음 보았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끊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웃음 소리를 기억한다. 극장을 나오면서도 가시지 않았던 유쾌함과 미소, 그리고 '다큐멘터리도 이렇게 재미있고, 유쾌할 수 있다니!' 하며 놀랐던 충격도 아직 생생하다. 화려한 스턴트맨을 꿈꾸며 2004년 액션스쿨에 입학한 동기들에 대한 정병길 감독의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는 무겁고, 진지한 영화'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도전은 이미 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다른 공간에서 각자 나름의 생각을 하며 살아가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희망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감상문을 쓰는 [우린 액션 배우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고방식과 살아온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액션배우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6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생이야기가 11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펼쳐진다.2004년 초기 액션스쿨 오디션에서는 36명이 합격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힘든 훈련으로 한달도 안되서 탈락자가 발생했고, 끝날 때쯤에 이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자는 권귀덕, 신성일, 전세진, 곽진석, 김경태, 주용성, 권문철, 정병길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인상 깊었던 인물은 권귀덕과 전세진이다. 궈귀덕이라는 인물을 검색해보니 내가 보았던 모든 드라마와 영화에 그가 출연했던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여 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할 정도로 많은 액션 장면 속에서 항상 그를 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 그는 많은 액션 장면 중에서도 특히 떨어지는거랑 차 뒤집기는 정말 자신 있다고 하였다. 차에서, 말 위에서 매번 떨어지고 차도 맨날 뒤집는 촬영장에서 그는 액션배우이자 동시에 불같은 호랑이 감독이다. 현재 퓨전사극 드라마 의 무술지도를 맡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열정을 보면서 꿈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영화를 통해 인생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다. 점집 아주머니의 말에 홀려 450만원짜리 호랑이 문신을 등에 새기고, 말 한 마리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쯤은 기본이라며 액션스쿨 오디션에서 정신없는 말타기(흉내)를 선배들에게 보였던 그의 모습은 영화를 다 본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인생 한방’을 얘기하는 전세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 맞장구를 쳐야 할지 망설여진다. 어쨌든 이 영화가 쉽게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현재는 제주 드림랜드 승마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코믹하면서도 나름의 철학관을 가진 그의 미래 모습이 기대가 된다.우린 액션배우다의 인물들의 삶을 보면서 스턴트맨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에서 필수 불가결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한다. 다쳐도 누구하나 신경 써주지 않아 혼자서 그 아픔을 붕대로 감싸며 견뎌낸다. 얼마 되지 않은 출연료도 치료비와 약값으로 쓰게 되고,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이 다치지 않기를 기도하며 살아간다. 멋진 액션 장면을 찍기 위해서라면 목숨과 맞바꾼 촬영도 겁나하지 않으며 비디오를 보며 끈임 없이 공부와 계속적인 단련을 강행한다. 이러한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더 이상 누구의 대역이 되는 스턴트맨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길임을 알면서도 가는 그들이다. 그들은 배우, 진정한 액션 배우다.이 영화가 나에게 다른 영화보다 특별했던 이유는 나래이션이라 할 수 있다. 우린 액션 배우다의 나래이션이 누굴까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는데 이수연씨라고 한다. 약간의 중성적이면서 잔잔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영화의 흥미를 돋운다. “그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인생 참 뭐 같다”등 인물들의 특징을 해학적이면서 옆에 있는 솔직한 친구처럼 표현해낸다. 그러면서도 다큐멘터리 식이지만 꾸미지 않고 그들의 생활을 우리에게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귀엽고 바보 같다는 느낌을 줄 만큼 솔직해서 보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하였다.흥미로운 것은 이제껏들이나 좋아하고 지루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린 액션배우다는 내가 본 어떠한 액션영화보다 스릴감 있었고, 그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솔직한 유머, 그 안에 뜨거운 눈물과 감동을 한꺼번에 체험해 보게 한 영화이다. 그러면서 이 영화를 통해 내가 평소에 가지고 다큐멘터리의 고정관념을 없애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중간 중간 서울액션스쿨 면접 당시의 화면을 뒤섞고, 그 과정에서 왜 스턴트맨이 되려고 했는지가 등장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를 만든 정병길 감독,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턴트맨 입문 계기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천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듯하다.가장 내 심장에 와 닿았던 말은 권귀덕이 말한 “우리도 맞으면 아퍼!” 이다. 그들이라고 아픔을 표현하지 못해서 안하고 있겠는가? 그들은 머리에서 피가 나는 순간에도 촬영이 지연될까를 걱정했고, 배우가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레슬링 장에서 와이어 촬영 때 단 한 장면을 위해서 30번이 넘는 촬영을 하였고, 촬영이 끝난 뒤 온몸이 붉어졌음에도 웃으면 “수고했습니다” 인사를 한다. 심지어 시퍼런 눈과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더 상태가 나쁜 친구를 병문안 가기도 한다. 이러한 그들은 자신을 버리고, 영화에 자신을 내어 준 것이다. 그들이 표현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 우리는 모두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담배 한 개비로 이 아픔을 삭이고 있는 그들의 삶의 애환과 아픔을 보면서 그 아픔이 고스란히 내 마음으로 전달 되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그들에게 액션 배우는 인생 자체이다. 물론, 영화 다큐멘터리 촬영의 마무리는 의 무술감독을 맡은 지중현 무술감독이 죽고, 비슷한 시점에 권귀덕을 제외한 모두가 액션배우를 그만두는 결말을 맞는다. 따라서 현재 스턴트를 일을 하는 이는 권귀덕 단 한명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현재 액션배우를 하지 않고, 액션배우와는 다른 길을 선택 하였다고 꿈을 포기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꿈도 다르고 앞으로의 일도 예측할 수 없지만 그 마음만은 2004년 스턴트를 시작했던 그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아직도 나에겐 모두 액션배우다. 내가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의 새로운 꿈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또한 앞으로 영화를 볼 때 나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주인공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그 뒤편에서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을 스턴트맨, 액션 배우를 찾고 있을 내 모습이 상상된다. 영화를 본 오늘, 그들의 미소를 잊지 못하는 하루를 선물해 준 그들에게 감사하다.우린 액션배우다>는 진지하고 숙연해질 수도 있었을 스턴트맨의 일과 일상을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가는데, 거기에는 전문성우의 목소리가 읽어내려가는 코믹한 내레이션과 엉뚱한 행동과 사고로 웃음을 선사하는 세진의 역할이 크다. 방송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전문 성우는 객관적 진실이나 진지함을 담보하는 대신, 시치미를 뚝 떼고 코믹한 내레이션을 읽어내려간다. 세진은 현재 스턴트맨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귀덕이나 진석, 성일만큼의 큰 비중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TV에 출연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호랑이 문신을 등에 새기거나, 위험을 감내한 동기생들의 스턴트 촬영 현장에 놀러와 과자를 뺏어먹거나 잠에 빠져드는 그의 캐릭터는 아슬아슬하고 고단한 스턴트맨의 생활과 때로는 대조를 이루면서 이 영화의 유쾌함을 유지해간다.의 묘미는 단연 다양한 드라마, 영화들의 액션장면 촬영장이다. 자동차가 뒤집어지고,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고, 보호런닝 없이 와이어를 타는 이들의 아슬아슬한 스턴트 활약은 우리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래서 알지 못했던 세계이다. 또한 부상이 잦고,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뿐인 자신의 일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주인공들의 웃음과 당당함, 열정은 단순히 스턴트맨의 세계를 넘어 '꿈을 꾼다는 것' '그 꿈을 쫓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스턴트맨 촬영 현장과 함상과 고통을 바탕으로 빛을 낼 수 있었다. 영화에 출연하지만 너무 짧은 순간 지나가버리는, 그래서 좀처럼 그들의 얼굴을 스크린 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런 스턴트맨의 비애는 지중현 무술감독의 죽음과 소리소문없이 이루어진 장례식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한없이 무겁고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이 꿈을 향해 끊임없이 뛰고 있다는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가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드러내보일 수 있었던 것은 감독과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서로에 대한 격려와 믿음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다큐의 끝에서 이들은 한 여고에서 오직 그들만이 주인공인 무대를 가지게 된다. 그 때 그들의 얼굴에는 단 한 번도 웃음이 떠난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덕 혼자만이 남은 지금 그런 날이 다시 또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그 날의 감동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 이 다큐는 겉으로는 큰 웃음을 많이 주고 있지만 결코 그 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 작품이다. 자신들이 간절히 원하는 꿈을 향해 달리는 이들의 모습과, 영화계에서 액션배우들이 받는 대우 등에 대하여 솔직하고 재치 있게 나타낸 것들이 이 다큐가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웬만한 영화 애호가가 아니고서야 라는 제목을 두 번째 이상 들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천만 관객을 노리는 초대형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눈물 콧물 다 쥐어짜는 찐한 대중 멜로나 드라마도 아니다. 누군가는 ‘고작’이라고 덧붙일지도 모를 저예산 독립영화에, 내로라하는 스타 배우도 없을뿐더러 장르조차도 이름만 들어도 따분할 것만 같은 ‘다큐멘터리’다. 주말에 데이트 코스 삼아 잠깐씩 들르는 경우가 대부분인 관객들이 위험을 감수한 선택을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이 영화, 그 이력이 심상치 않다. 제6회 맥스무비 최고의 독립영화상(2009), 전주국제영화제다.
국제경제학 -자유무역 관련 사설내가 이 사설을 선택한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겁게 논의 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한-미FTA이며 각 정당간의 입장대립은 물론 국민들도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며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논쟁이 뜨겁다. 한쪽에서는 한-미FTA 체결을 안 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하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을 반 정통 경제학의 이단자로 취급하고, 반대쪽에서는 한-미FTA를 체결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하며 이를 찬성하는 사람을 미국 경제학에 세뇌된 신자유주의의 노예 정도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이고, 문제의 핵심은 한-미FTA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영향이며, 우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기대하는 것을 과연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앞서야 하고, 이러한 평가를 하는 각자의 관점이 어떤가 하는 것이 또 다른 핵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FTA의 논의가 구체화 되어갈수록, 곳곳에서 들려오는 반대의견은 과연 한-미FTA가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체결 반대자들이 주장은 소위 ‘밥그릇 지키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각종 의문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나 또한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대학생으로서, 국민으로서 과제를 통해 한-미FTA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고 위의 사설과 관련하여 사설을 쓴 이의 FTA체결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며 그의 의견과는 조금 다른 내 의견을 밝혀보려 한다.먼저 FTA는 Free Trade Agreement의 약자로 자유무역협정을 의미한다. 이는 협정을 체결한 국가 간에 상품 및 서비스 교역에 대한 관세 및 무역장벽을 완전히 철폐함으로써 마치 하나의 국가처럼 자유롭게 상품, 서비스를 교역하게 하는 협정이다. 자유무역협정은 다양한 형태의 지역무역협정 중 가장 낮은 단계의 경제통합으로 특징적인 것은 회원국간의 관세 및 무역장벽을 철폐하되 비회원국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관세율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국가 간에는 관세와 그 외의 다양한 제약이 있어서 상품이 국경을 넘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었다. 때문에 그러한 제약들을 없애거나 최소화시켜 다른 나라와도 마치 같은 나라 안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 자유무역협정의 본래 취지이며 목적이 된다.한-미FTA 이론적 배경은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비교우위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국제경제학 시간에 배운 리카도모형을 통해 설명가능 한데 각국이 비교우위를 가지는 상품에 완전 특화생산하면 세계 전체의 산출량은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한 나라가 두 재화 생산 모두에 절대우위를 갖는 경우에도 양국이 어느 한 재화에 특화하는 것이 양국 모두의 후생을 증대시킨다하였다. 그런데 이 이론에 근거한다면 한-미FTA를 체결해야 우리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정부와 보수언론의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시켜보면 비교우위론에 의할 경우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산업은 농업뿐만이 아니라 제약, 의료, 정밀기기, 정밀화학, 항공·우주, 금융 등 우리가 미래산업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산업, 앞으로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어야 할 대부분의 차세대 산업들이 상대적으로 비교열위에 있기 때문에 이를 모두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내가 선택한 위의 사설을 쓴 이는 FTA를 불붙은 전쟁이라 칭하며 일본과 중국 모두 개방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생각과 FTA가 지연되면 자국이 동북아에서 소외될 것이라는 압박감에 서둘러 FTA를 추진하려 한다고 서술한다. 덧붙여 그는 일본 경제단체 경제동우회의 대표의 말에 공감하며 먼저 FTA를 체결하는 자가 승리하는 자라 하였다. 때문에 우리나라도 이 대열에 맞춰 FTA 속히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과거 그들보다 먼저 FTA가 발효됐다면 우리가 선발자로서의 이익을 누릴 수 있었고 동북아 경제통합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미FTA 체결을 찬성하는 입장으로 그 속도면에서도 우리나라가 다른 동북아보다 먼저해야함을 사설해서 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미FTA 체결이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반박의 의견이 없다. 미국에 수출하는 양이 많고, 무역에 의지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FTA를 체결은 당장 수출에 청신호를 켤 수 있다. 수출이 활성화될 경우, 국내 경제성장률은 그만큼 증가하게 되고, 관세가 철폐되어 가격인하 효과가 발생하여 소비자들은 보다 낮은 가격으로 폭넓은 선택이 가능하다. 더불어 국내의 경우 해외 자본 투자 증가 및 산업 활성화로 일자리 증가도 예상되는 경제적 효과를 지닌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한-미 FTA 체결이 미국 의회 내에서 한국에 대한 우호적 시각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한미 안보동맹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나아가 중국, 일본 등 한국 주변국과의 관계정립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그렇지만 궁극적으로 FTA로 인한 이득, 누가 더 큰가? 이에 대해 나는 미국이 한국에 비해 경제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미국이 여러 면에서 실익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미국과의 FTA 체결을 통해 무엇보다도 제조 분야에서 실익이 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출 증가 효과와 각 다양한 산업분야의 고용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보이는 이익이 전부이고 피해는 없는가?내가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유 중 가장 큰 핵심을 차지하는 조항은 투자자-국가제소권(ISD) 조항과 한국국익과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공공의료부문의 미국지배와 영세업종 산업보호가 결여된 조항이다. 투자자-국가소송제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좌우할 핵심 쟁점으로 한국에 투자한 미국자본이나 기업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국제민간기구에 제소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다. 투자자본이나 기업이 피해를 보았다고 판결이 나면 한국정부가 이에 대해 현금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고 당연히 국제적으로 한국보다 힘센 미국의 투기자본 및 초국적기업의 승리가 예상된다. 한미 FTA에서 ISD로 제소할 수 있는 자격은 미국 투자자로 미국인 투자자에게 우리의 사법권을 벗어난 지역에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나라의 사법권을 침해하는것 뿐만 아니라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이 된다. 즉, 한마디로 초국적 투기자본이나 기업이 자신의 이윤 확대를 위하여 상대국가의 법과 제도를 무력화 시키는 독소조항이라 생각한다. 이 조항을 제외하고도 미국이 서비스업, 농업은 물론 거의 전 제조업에서 높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취약한 산업분야의 경우 생산 감소 및 경쟁력 약화 가속화 될 것이고 이러한 생산 감소는 농업 , 의약품 분야 등의 지적재산권 강화로 인한 가격상승으로 소비자 부담을 가중 시킬 것이다. 또한 한-미 FTA가 해외 자본 투자 증가 및 산업 활성화로 일자리 증가가 예상된다고 하지만 농업 및 낙후 제조업 분야 등 노동의 구조조정으로 대량 실업자를 양산시키고 이에 따라 양극화 심화 논란이 예상된다. 결과적으로 한-미 FTA체결은 한국경제의 미국 예속화를 낳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이론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기는 힘들지만 무역은 언제나 양국 간의 이득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일어나며 그렇지 못하여 손해를 보는 계층에 대해서는 국가는 그 피해를 보상해주어야만 한다. 자유무역은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으로의 재편, 비교열위에 있는 산업의 쇠퇴와 그 구성원들의 실업을 가져온다. 비교열위에 있는 산업이 많을수록 구조조정의 폭은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조정에 대한 대책이 없는 한, 자유무역은 오히려 사회양극화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유무역에 의한 이익, 경제성장분을 자유무역에 의한 산업의 재편과정에서 실업자로 남게 되는 이들에게 분배해주는 복지적 정책 또는 시스템을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자유무역에 의한 경제성장은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의 대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잔과 상투형에서 로렌스는 영국 회화의 실패원인을 찾아 나서며 서두를 시작한다.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미적 감수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인들을 회화에 있어서의 실패는 삶에 대한 영국인들의 태도에 있다고 지적한다. 본격적으로 시각예술에 있어서의 영국인들의 실패 이유를 찾아 나서며 영국인들과 그리고 뒤따라 미국 인들을 마비시킨 어떤 공포를 주목한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이 공포는 그들의 삶을 위협하 고 비전을 왜곡시키며 충동을 목조르게 한다. 그러면 대체 무엇에 대한 공포란 말인가.16세기 말경, 이 북부 유럽인의 의식을 완전히 지배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성생활에 대한 공포였다. 이것은 엘리자베드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본능적, 직관적인 의식을 희생시키게 하였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공포로서 느끼기 시작하였고, 이 후 전력을 다하여 자기의 본능적, 직관적 의식과 육체적이며 성적인 것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영국에 있어서, 성은 괴상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매독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이건, 15세기 말경의 영국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질병이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이르면 매독이 끼치는 황폐력은 분명한 것이 되었으며, 그것에서 오는 충격이 사려 깊고 상상력이 풍부한 의식에 이미 깊게 침투되어 가기 시작했다. . 그러나 치유 방법이 여러 가지로 발견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겁에 질릴 필요는 없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똑바로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가장 끔찍스러운 해독이 저질러지고 난 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는 여기서 매독에 대한 은밀한 인식 혹은 공포감이 영국인과 미국인의 의식에 헤아릴 수 없이 심대한 영향을 끼쳐 왔음을 확신했다. 그 공포감이 명백하게 설명되어질 수 없었을 때에도 공포는 강력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제압하면서 엄연히 거기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회화라는 예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상관그들의 직관적 능력은 위축되고 죽었으며, 그들은 무엇을 느낄지 모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느낄 것인가? . 본능과 직관에 대한 이러한 거부적인 운동은 모든 나라에서 도덕적인 형태를 띠고 나왔다. 그것은 처음에 증오 속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 증오는 공포에 의해 더욱 적의에 찬 것이 되었고 매독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은 그 공포에 더욱 나쁜 해독을 첨가했다. 이제 이러한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육체의 재현 및 그러한 육체의 실재에 대한 직관적 지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조형예술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인지 하는 점이 분명해진다. 살아 있는 육체의 실재는 상상력에 의해서 지각될 뿐이며 상상력이란 곧 직관적인 인식이 지배하여 우리의 의식이 점화된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력을 부인하고 상상력을 통한 삶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있는 한갓 초라한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17~18세기에 우리는 직관적인 인식을 고의적으로 부인해 왔으며 그것이 예술에 끼친 결과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비전은 더욱 시각적인 것이 되고 직관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그 위에서 회화가 번성했다. 그러나 어떤 회화인가. 와토, 앵그르, 푸생, 샤르댕은 아직도 얼마간의 진정한 상상적 빛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영국을 보면 호가트, 레이놀즈, 게인즈버러 등 그들은 이미 부르주아였다. 인간보다도 옷이 더 진짜 중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은 완전히 사멸하고 일종의 반짝하는 색채사진과 같은 시각적인 비전만이 만연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것일 따름이고, 아무런 본능적, 직관적 지각이 곁들이지 않은 단순한 상투형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로렌스는 평하였다. 그런 그에게도 블레이크는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니지만 예외가 되었다. 블레이크는 풍경화를 떠나서 영국이 배출해 낸 유일한 상상적 화가였다. 블레이크는 진정한 직관적 인식과 튼튼한 본능적 감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따금 한갓 있어서 그처럼 증오하고 두려워한 인간의 육체적로부터의 도피의 한 형식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의 무너져 가는 미적 욕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돌파구였다. 로렌스는 이것이 영국에 있어서의 가난하고 초라한 예술의 역사라 지적한다. . 한편 지난 세기에 있어서 대륙의 예술은 어떠했는가. 이것은 보다 흥미 있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술가는 그가 참으로 종교적으로 느낀 것, 다시 말해서 피와 뼈 속에서 느껴진 종교적인 진실만을 창조하였다. 반면 영국인들은 종교적인 육체와 연관된 어떤 것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프랑스도 다소 마찬가지였긴 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인 역시 매독과 생식하는 육체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으나 그렇게 깊지는 않아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현대 프랑스 예술에서 육체가 마침내 그 실체에 있어서 용해되어 버리고 햇빛과 그림자의 일부가 됨과 더불어 프랑스 예술은 더없이 찬란한 매력과 환희를 경험하게 되었다. 현대 프랑스 회화의 진정한 충격은 빛의 발견과 거기에 따른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탄생에서 비롯한 것이다. 세잔조차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세잔이 아무리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을 시도했던 간에 참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빛과 자유로운 색채에 대한 저 명랑한 발견자들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아직도 미성숙단계에 있던 인상주의자들이 빛과 함께 색채를 발견했던 때일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인간을 괴롭히던 저 어두운 생식적 육체로부터 도피하여 충만한 공기와 햇빛 속으로 달아났던 것이다.로렌스는 실제로 현대 프랑스 미술은 세잔에 의해서 진정한 실체 혹은 객관적인 실체로 되돌아가는 첫걸음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세잔의 사과야말로 거기에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도 스며들게 하지 않고 사과가 그것대로의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려는 진정한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세잔의 위대한 노력은, 말하자면 사과를 자기로부터 밀어제쳐 버려서 그것으로 하여금 스스로 살게 해의 인간, 즉 진정한 인간이고자 했으며, 정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와 청명한 공기를 마시기를 원했다. 그는 단순히 정신과 의식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핏속에서 그의 본능과 직관을 통해서 세계를 알고 또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진정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의 본능과 직관은 죽었고 우리는 추상화라는 염포에 뒤덮여서 살고 있다. 때문에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이 건드리면 아프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과 직관은 죽었고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잔의 사과는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한다. 그리하여 세잔의 추종자들이 다시 그를 추상화시킴으로써 비로소 세잔은 겨우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비평가들이 앞으로 나서서 그의 멀쩡한 사과를 의미 있는 형식으로 추상화하였고, 그에 따라 세잔은 구원되었다.로렌스는 현대미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의 업적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노력에 있다고 본다. 세잔은 1839년 프로방스의 엑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은 체구에 수줍고 민감하며, 거대한 야심에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실이나 실재 또는 상상력 에 대한 순진한 지중해적 감각에 더 깊이 지배되어 있었다. 그는 햇빛이 충만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한 것처럼 살아 있는 육체의 광휘와 현람함에 크게 감명받았다. 그는 베로네제와 틴토레토, 그리고 후기 바로크 예술가들의 찬란한 기법을 말할 수 없이 찬미했다. 그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지만, 후기 르네상스나 바로크풍의 끔찍할 정도로 진귀한 회화구성에서 참으로 형편없이 그렸다. 왜? 세잔이 초기회화에서 실패한 이유는 그는 살아있는 프로방스적 육체가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것을, 그가 두뇌적 의식을 가지고 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즉, 세잔의 갈등은 예술가와 그의 매체 사이가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과 그의 직관, 혹은 본능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자신이 되는 일, 바로 세잔이 되어야 했다. 이 후 세잔이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드디어 상투형을 회피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정물화에서 틈을 남겨둠으로써 그 틈 사이로 상투형이 미끌어 떨어져 없어지게 하는 방법이다. 이로써 그는 그의 풍경화를 성공시켰다.세잔은 직관으로써 실체의 세계를 감촉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를 원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현재 지배받고 있는 두뇌적, 시간적 의식을 내쫒고 무엇보다도 직관적인 형태의 의식을 대치하려고 했다. 인간은 직관적 의식을 한 번도 믿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정말 위대한 혁명의 신호라 할 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세잔의 모습으로 그가 자기의 모델들에게 고 외쳤을 때, 그것은 예수회나 그리스도교적 이상주의자들의 전락뿐만 아니라 인간 의식의 전면적인 양태 그 자체의 붕괴와 거기 따른 새로운 의식 양태의 출현을 예고하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델이 그녀의 개성과 그녀의 정신을 개입시키는 순간 그것이 상투형과 도덕이 되며, 그 자신이 별수 없이 상투형을 그려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모델의 진부하지 않은 유일한 부분은 그녀의 사과다움appleyness이었다. 제발 한 개의 사과가 되라. 너의 모든 생각, 너의 모든 느낌, 너의 개성과 마음을 떨쳐버려라. 그것들에 관해서 모든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 그것들이 견딜 수 없도록 지겨움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하나의 사과가 되라!여기 다만 하나의 사과를 찾고자 했던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디즘, 사디스트 등의 어원이 되는 사드 후작이다. 사드는 이기적 욕구와 불의와 불행의 순간을 글을 통해 철저히 만끽했으며, 그것의 진실성을 주장했다. 귀족 출신의 사드는 프랑스 혁명기 전후의 일탈적인 삶을 통해서 열 권에 가까운 책을 썼는데, 대부분이 성애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사드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에게 언어를 가지고 싸움을 걸면서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윤리와 규범에 맞서 평생을 투옥과 도주, 정신병원에 입원을 반복했던 인물로 다.
< 21세기 정치 리더십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왔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활력이 넘치다 못해 소란스럽기까지 한 것 같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정치지도자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각축을 벌이고 대한민국의 주인인 우리는 그들 중 한 명을 선택해 나라를 맡기게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정치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이다. 덕망과 자질, 그들이 내세운 공약, 전문성, 도덕성과 청렴함등 정치지도자의 기준으로 거론되는 요소는 매우 많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정치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정치 리더쉽을 제시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정치 리더쉽이란 조직 내에서 조직력을 갖추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통일된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이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 리더쉽을 통해 조직의 통일성이 확보되는 것은 물론 조직이 지닌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된다.21C 정치 리더쉽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조직들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모순, 혼동으로 가득 차 있어 어떤 조직을 잘 관리하는 지도자라도 리더십의 발휘가 매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과저를 통해 이러한 상황 속에서 21세기 리더가 갖추어야할 정치 리더쉽 3가지를 제시하려 한다.먼저 첫 번째로 21세기 리더가 갖추어야 할 것은 인간적인 매력과 존경심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과 섬김이다.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디지털이 펼치는 변화무쌍한 기술들은 인간의 삶에 한층 더 높은 편리함을 가져다 준 반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순수한 인간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부조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세상이 너무 드라이해져간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 시대의 리더가 갖추고 있어야할 기본 성품은 사랑과 섬김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시 말해 새로운 리더십의 패러다임은 한마디로‘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더 이상 리더의 역할은 조직 구성원들을 통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리더의 역할은 사랑을 나누어 주고 섬김의 자세로 봉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교과서 혁신 정치학의 사랑의 정치학 부분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나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꼽고 싶다. 그는 내성적이었지만 늘 겸손한 성품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의 겸손함으로 인하여 같이 일하던 조직원들에게 많은 신뢰를 줄 수 있었고 조직원들은 그를 항상 따르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외교정책에 결정함에 있어서도 조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항상 조직원들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조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릴 때 그의 리더십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는 면담을 요청한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신이 먼저 면담을 끝내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끝까지 인내심 있게 경청하였다. 아울러 그는 부하 직원의 잘못에 대해서도 핀잔을 하거나 혼내는 것이 아니라 넌지시 돌려 말함으로써 부하 직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도록 하였다. 그런 모습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동시에 함께 일하는 조직원들로부터도 ‘늘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함께 일할 때 기분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게 하였다. 그런 그의 진솔함과 조직원들과의 소통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는 2011년 만장일치로 UN 사무총장에 재신임을 얻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그러나 현실에서는 불행하게도 구성원들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는 봉사자로서의 리더가 되기보다는 권력이나 자신의 이익에 연연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리더는 조직원내에서 자신이 누구보다도 많은 경륜과 학식을 갖고 있으며 보다 높은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그러한 아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리더에게는 유연한 자세와 따뜻한 심성을 지녀 구성원들 개개인의 인성과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줄 아는 유비와 같은 성품이 요구된다. 이로써 팀원들은 편안함을 느껴 리더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한마디로 리더는 친밀한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친밀한 권위는 겸손과 헌신, 사랑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조직원들과의 공감과 배려, 소통을 통해서 노력하고 헌신하는 리더쉽이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갈 21세기의 진정한 정치 리더쉽이다.두 번째로 21세기 리더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통찰력은 곧 혜안을 의미하는데, 불확실성의 연속 속에서 한치의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운 지금의 현실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인물들을 요구하고 있으며 변화를 주도할 혁신적인 리더를 찾고 있다. 다시 말해 21세기는 빠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를 하고 신속한 결단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엘리트 정치 리더쉽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두뇌와 분석력,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알고, 조직 내 구성원들의 실질적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 세계는 무한경쟁 시대다. 과거 70~80년대 정치 마인드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지금 시대적 가치의 관점에서 지도자의 정치 리더쉽은 북한통일 문제에 대한 혜안에서 찾아야 한다. 즉 21세기 정치 리더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해법을 찾고 외교안보대북정책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철학을 가진 리더쉽이 우선적으로 요구됨을 의미한다. 북한은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한반도적 특수성의 산물이다. 다른 나라의 정치지도자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는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꿰뚫어보는 시대정신을 품어야 한다. 사실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북한은 우리만의 기회의 창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애물단지였지만, 미래의 북한은 새로운 경제발전의 동력을 제공하는 우리만의 보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 북한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고만 했던 현 정부는 그래서 시대적 가치에 역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남들에게는 없는 그래서 우리만의 고민이자 축복인 북한문제와 통일문제를 가장 현명하게 해결하는 정치지도자야말로 민주주의 이후의 시대적 가치에 부응하는 리더쉽이 될 것이다.마지막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발 맞추어 신속하게 적응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정치 리더쉽이 요구 된다. 디지털 시대의 리더란 조직 구성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고, 문제인식 및 지각을 돕고, 역량을 개발하고 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즉, 디지털 시대의 리더는 실력이 있어야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리더는 꾸준히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전문지식이 바로 리더십 파워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단히 노력해야함을 의미한다. 더불어 리더는 실행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전략을 수립하고 완벽한 준비를 해 놓았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가 엄청난 속도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단력을 갖고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실행력이 말로 리더를 리더답게 만드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지도자는 구성원들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가리키고,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각 부문이 급속히 변화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리더는 자신의 비전을 환경변화에 맞게 설정하고 구성원들에게 미래의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리더와 구성원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 중 하나는 상대방이 나와 같이 공감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그리고 공감할 때, 오히려 그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 경청기술이라는 것은 조직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며 정확하게 듣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담겨진 서로의 감정과 느낌을 공감하면서 혹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효과적으로 질문하는 과정과 스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리더의 커뮤니케이션은 밀어붙이기가 아니라 끌어당기기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