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우상 이데올로기 서평[제1장 진보가 가져온 그늘]화란의 한 역사가의 글로 시작하는 이번 장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광적인 세계와 같다고 표현한다. 이는 과거 시대로 인해 주어진 결과물들은 금 새 시간이 흘러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불과 수년 만에 지식과 정보, 통신과 생산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발달된 수송수단으로 세계는 지구촌으로 좁혀 놓았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조상들이 꿈꿀 수 없던 세탁기, 컴퓨터, 텔레비전, 핸드폰 등 다양한 가전제품에 둘러싸여 있다.진보는 과거 시대의 결과물들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광적인 세계는 몰이성에 의해, 테러에 혈안이 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리고 악마적인 것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세계가 되었고, 지난 시간 동안의 인류의 경험과 생산성의 괄목할 만한 증대는 합리와 통제의 승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몰이성의 정반대로서 합리와 통제는 삼십년 대의 흑암에서 벗어난 해방의 징표인 것이다,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는 현 상황에도 수많은 미해결의 난제들은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실업율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있고, 사회 내부에서는 고독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소외가 고질화되고, 거리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또 극빈국들은 빚에 허덕이며 끝을 모르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파괴되기 쉬운 인간의 생명과 환경에 대한 관심은 점차 감소되고 가공할만한 무기 경쟁은 무서운 속도로 가열되고 있다. 전과는 달리 이러한 문제들은 전문적 지식이나, 임시방편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고질화가 되어왔고, 점차 만성적이 되어왔다.오늘날의 시대에도 여전히 문제점들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세계가 여전히 광적인 세계로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의 시대의 문제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해결책을 내놓으면 이는 더 악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즉 경제 성장, 기술 진보, 응용 과학의 발전, 국가의 팽창과 같은 현대의 해결책들이 도리어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고착화 시키고,마귀적이다.이처럼 혁명 이데올로기 외에 이 세상에는 유일무이하게 여러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혁명을 통하여 구 사회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기존 사회를 보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는 목표가 그릇되었기 때문에 발생하기보다 오히려 정당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가운데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정당한 목표들이 곧 이데올로기화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도 이들에게 협조하고 기여했을 것이다.우상숭배정당한 목표의 추구가 이데올로기화가 된 시점은 부분적으로 ‘정당한 목표 추구의 근저에 우상숭배가 있을 때 이데올로기는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어기는 우상숭배는 곤고와 압제, 공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병적 생활의 증상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러한 증상은 오늘날 우리 주면과 내부에 만연해 있다.예) 피조물 숭배, 목상, 석상, 점토상 숭배, 인간의 욕심으로 취해지는 테크놀로지이데올로기: 우상숭배의 온상이데올로기는 그러한 목표의 추구가 한창 무르익어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목적ㅇ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게 되는 그 순간에 발생한다. 이데올로기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멈출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쓰는 장점과 이것이 오히려 모든 필요 수단을 포용하는 약점이 될 수 있다.이데올로기와 우리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먼나라와 같지만, 우리 가까이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겐 때때로 어떠한 목표가 비상한 중요성을 갖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직업, 가족, 자녀, 돈 등 모든 면을 잃어버릴 가능성에서 위협을 느낄 수도 있으며, 만약 그 목표가 이뤄질 조짐이 보이면 그것을 획득하려고 온 정신을 쏟아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기 능력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부르조아지 사회 내부에서 엘리트들이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거짓 의식-이데올로기-을 유포시키며 떠받든다는 사실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다.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계급의 억압을 정당화했다. 마르크스에게 기독교신앙이 그러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였고, 그에게 기독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사용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는 레닌때에 와서 사상이 변화된다. 레닌은 공산주의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공산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 곧 계급 투쟁의 무기로 변모되어야 했다. 이 투쟁은 경제적 수단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의식이 단 하나의 원대한 이상, 즉 사회 질서의 전복과 생산 수단의 공유화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이상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향되기를 요구하였다. 공산주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인간의 의지적인 요소는 마르크스보다 레닌에게 있어서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혁명에 대하여 자멸을 지향하고 있는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레닌은 그 멸망을 실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추구하였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가하다고 생각하였다. 레닌은 마르크스에게서 빌려온 선(프롤레타리아,무산자계급)과 악(부르조아지,유산자계급)의 대립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완성된 성숙한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다. 세상의 악은 그 연원이 모두 자본주의에 있었다.레닌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도 그 자체의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혁명에 대하여 그는 피의 격랑을 거쳐야 하는 떄라고 말하면서 희생 또는 희생적 준비태세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혁명의 목표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외에 다른 수단이 필요했고, 그는 혁명을 실행에 옮기고 완수하기 위한 경제적, 정치적, 및 과학 기술적 수단의 출현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왜곡된 수단은 발생했고, 이는 종교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의 임시적석하도록하는 모습들과 종교적 모습들이 등장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시가 이를 잘 나타내준다. 이들은 국가보다 민족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민족은 자연적 소산으로 창조주의 본래적 의지에 해당하는 것이나, 국가는 대조적으로 기계적이며 인위적인 것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은 먼저 자기 민족을 우선하며, 그 뒤에 다른 민족의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을 차례로 사랑해야한다는 견해를 가지는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아가페 사랑과는 먼 견해의 모습이다.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가톨릭, 개신교 국가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인종적 소수 민족들(원주민, 이민 노동자) 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서 일어난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민족의 주체성을 사수하려는 결정이 민족의 일체감 자체보다도 훨씬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자기 보존이라는 목표는 어떤 인간 집단이나 조직일지라도 쉽게 침투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자기들의 주체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집단이라면 어디든 수용될 수 있다. 심지어 가정에까지 열려있다.[제5장 물질적 번영의 이데올로기]돈과 재물의 소유에 대한 경쟁이 인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부의 분배라는 문제가 발생할 때 이기적인 욕망은 쉽게 타오른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물질적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몇 가지 발전 양상들을 통해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첫쨰, 최근 우리의 대다수가 누리고 있는 번영을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전혀 없었던 일이었다. 우리 중 대다수의 조부, 양친들 모두 걸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왔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제적 곤궁에 대한 투쟁은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고, 공업 체계가 만병 통치약으로써 수용되었다. 때떄로 공업은 비인간화,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였으나, 무시한 빈곤으로부터 해방을 이루고 있었는 그 사람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지만 단순한 금전적 보상이 정의가 될 수는 없고 이는 정의에 대한 파괴일 따름이다. 정의에 대한 왜곡은 그 결과로서 착취를 당하고 소외당하는 새로운 집단들을 생겨나게 했다. 이들은 사정없이 재정적 후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들의 주장은 주로 정부를 향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비용을 각출하고 보조금을 지원하고 돈을 대부해 주는 일을 한다. 이러한 패턴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세금 지불에 대한 거부가 늘어나 점차 세입이 감소되면 정부는 인위적으로 화폐 공급량을 늘린다. 그러나 이 처방은 오히려 인플레이션과 실업만을 심화시키고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도태시키며 다시금 정부의 적자를 유발시킨다. 따라서 나라가 경제 성장세를 회복하지 않으면 그러한 지원 받을 권리는 공수표가 되는 것이다. 이미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지속적인 경제적 진보에 대한 강박관념에 잡혀 무너져 가고 있다. 시대의 징조를 이해하길 거부하고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우리의 집착적인 태도는 과히 종교적 수준에 따른다. 많은 사람들과 기관에게 있어 복지국가는 하나의 신이다. 그러나 그 신은 결정적인 위기 순간에 우리를 버릴 것이다. 오늘날에 복지국가를 둘러싼 예배의식은 정치가라는 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공허한 우상숭배가 분명하다.[제6장 안보 이데올로기]가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가를 방어한다는 것, 이는 현실적으로 위협이 느껴지고 있는 떄라면 적의 위협에 대한 국가의 방위는 정당하며,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의무일 수 있으나, 그러지 않을 경우는 합법적인 목표가 되지 않는다. 종종 전쟁 가운데 있던 나라들은 다시는 전쟁의 폐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옛 전쟁의 모습을 오늘날로 옮겨 놓는다. 현재 여러 나라들이 평화로울 수 있고, 나라를 수호할 수 있었던,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던 것은 핵무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세력 균형에 한계나 제한선이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나라들은 전세계를 파멸로 이끌기 충분한다.
바울서신이 쓰인 배경들을 보면 대부분 감옥 안에서 쓰여졌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상황은 그가 기뻐할만큼 괜찮은 상황, 배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내용을 다루는 에베소서에서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그는 찬양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인물들을 보면 왠지 우리와 거리감이 있고, 비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 초월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똑같이 우리와 하나님을 믿는데 삶의 모습은 어떻게 이리 다른가?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에베소서에서의 바울을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이 처하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이겨나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조언해주는 책이다. 이 시대는 점점 사랑이 식어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그러면서 정치적으로는 시끄러운 이 세상은 참으로 냉혹한 현실이다. 실업자률이 늘어나고, 가정하나 제대로 세우기 힘든 이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삶을 내려놓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청년들을 향해서만 n포 세대라고 하지만, 이 영향은 모든 사람에게 남녀노소 상관없이 주어지는 환경 가운데 살고 있다. 더군다나 여기서 세상은 점점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가운데서 신앙지키기란 참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책 배경인 에베소서를 보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보면 우리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 그는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자였고, 뛰어났고, 명성이 있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로 있던 그는 진정 복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 모든 것들, 자신이 가진 것 다 버리고 복음을 가장 가치있는 것,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삶을 선택한다. 그런 그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해보이는데, 그럼에도 그가 이 복음을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데에 있어, 우리는 과연 그 복음에 대한 가치를 진정 깨닫고 있는 것인가? 바울 뿐만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서도 공통된 점은 그들이 하나같이 복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부유한 자도 있었고, 박식한 자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도 있었지만, 이 삶이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이지 않나, 지식이 믿음으로 동반되지 않아, 종교생활을 하고, 나의 욕구, 세상의 가치에 두려워 따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싶은데, 그러지 않는 자신을 보며 낙담할 때가 많다. 그런데 바울이 우리와 동일한 입장, 어떻게 보면 바울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한다. 바울의 모습을 보며 모세를 떠올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모세는 못들어갔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따지거나, 억울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알고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동행이 그가 어딜 가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모습이 바울과 똑같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후 그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이든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낙담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믿음없음을 돌아보게 한다. 낙담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같다. 이게 내 마음대로 안되니 나에게 실망하고, 상황을 탓하고, 낙담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깨달아 복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의 가치를 진정 안다면 우리는 낙담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다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낙담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 안에서 깨닫는 정체성에 있고, 이것이 그를 흔들리지 않게 했고,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힘쓸 수 있는 계기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믿음 상태를 많이 돌아보다. 어느순간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듯이 내 마음대로 계획하고 조정하는 모습을 본다. 그럴 때 내 마음대로 안되면 낙담하는게 비일비재햇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조정할게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 그럴려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제대로 알 때 우리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교제와 공동체성, 프로그램이 아닌 철저히 복음임을, 그래서 지금 시대가 오히려 복음에 더 갈급할 수 있는 시대가 될 수 있어 은혜의 시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유익이다.
1. 대학교의 기원과 현주소 그리고 장래1장 : 대학의 반기독교적인 기원대학은 처음부터 이교적인 기관으로 세워졌다. 이는 이방 문화를 학문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도 아래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모임이 자연히 받아들여진 이유는 앞으로 마찰이 일어날 수 있는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발적인 학문적 관심사 때문이었다. 이런 바탕 아래 중세 중기에는 새로운 이성적인 인식과 기독교 교리와의 조화를 통해 만들어진 스콜라 신학이 등장했고, 이 등장은 우리에게 점점 인본주의적으로 변해갔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삶의 지표로서 하나님 말씀 외에 이교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성경이 권위를 갖고 있었고, 교리와 조화시키도록 노력한 한도 내에서 이교적인 지혜를 탐구했다. 신학이 주인이었고, 철학은 그의 시녀로 선언 되었으나, 점점 시녀로서의 역할이 주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근대에 와서는 사고의 출발점에 대해서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하나님 말씀 보다 이교의 고전에서 찾아보려는 소수의 지도적인 지성인들의 결단과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도록 결정하며, 하나님을 떠나는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많이 언급했으나, 그들이 의미하는 하나님은 계시된 말씀에서 나온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과 점차로 멀어진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하나님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지 못하는 해석을 가지고 왔다. 인간은 타락하는 것과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는 창조의 중심되시고,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는 성경을 부정한다. 또한 인문주의자들 중에는 기독교가 고전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하는 자도 있고,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로 보는 것이다. 이런 바탕아래 모든 진리를 귀납적으로 찾을수 있다는 계몽주의도 등장하였고, 이는 이성과 과학의 영역을 믿음과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 이
이 책은 이스라엘 역대기를 다루며 그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들, 그리고 그분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과는 다르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 그리고 우리의 어떠함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시고 이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행하심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다시금 꺠닫게 해준다.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성전과 예배 부분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전건축은 나라의 평화와 연결되었다. 구약의 저자들이 이렇게 본 이유에 대해서 책에서는 성전의 기능과 성격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성전을 왕궁과 똑같이 봄으로써 성전이 건축되고 유지된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그분의 통치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며, 따라서 이는 나라의 평화와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 내면에 중심이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 안에 안식과 평화가 정해지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듯이 우리의 시선과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평화와 안식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전의 기능이 완전해질 수 있던 것과 우리가 성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죄성 뿐인 우리에게 성전을 거룩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었는데,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으로 거룩히 지킬 수 있게 하심이 우리 안에 더욱 큰 은혜가 되지 않나 생각해본다.새로운 이해를 얻은 것은 성전의 구조적 특징에서였다. 이 구조는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성전(성막)이 시내산과의 연결을 둠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이신대로, 일정 높이에 따라 일반 백성, 장로가 출입이 가능했듯이 성전의 지성소, 내소, 외소도 그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졌음을 언급하는 내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어떤 형상이 아닌 말씀으로 주신 것에 대한 이해는 십계명의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편에 속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함을 다시금 강조하며 우리의 신앙의 강건함은 말씀에 귀기울일 때임을 어떤 형상을 기대하지 말 것을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구약의 이러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며 설명이 다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백성들을 다스릴 때도 말씀으로 다스림은 말씀되신 예수님편에 우리가 믿고, 듣고 순종할 때 우리에게 안식이 함께 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카이퍼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그의 신앙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힘쓴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는 네덜란드의 교회사와 정치사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교회, 국가, 사회와 언론, 학교와 학문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알려진 그에게 이러한 열정은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가 깨진 세상으로부터 다시 가정과 학교, 나라가 회복되어 다시금 원형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데에 있었고, 이것이 사람들의 유익이자 행복이기를 일찍이 깨달았다.그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앞을 걸어갔던 믿음의 선조 칼빈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와 비슷하게 칼빈도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의 역할을 감당해 내었고, 세상을 기독교 세계관 아래 세운 본인이기도하다. 죄악 가운데 있는 세상이 하나님을 거절하기란 당연하고, 그 세상 속에 하나님의 규례, 세계관이 세워지기는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각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세우시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점점 확장된다.카이퍼는 본서에서 현대주의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삶의 체계로서 거대하게 도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당연히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가진 삶의 체계로서 맞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독교 원리를 근거로 하는 전포괄적 삶의 체계를 ‘칼빈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인도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모든 사상과 삶의 근원을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 하나님 중심 사상이란 성경적이란 말과도 통하며, 성경은 곧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란 말과 함께 한다. 칼빈주의는 그어떤 사상 체계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경적 요소를 강조한다.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과 달리 카이퍼가 전하고 싶은 것은 삶 속에서의 칼빈주의 영향을 더욱 강조한다. 이론에서 지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칼빈이 주장하는 진정 칼빈주의에 대해서 카이퍼는 우리의 삶교는 구별의 절대적 특성을 극복하고 상대적으로 만들어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관계를 위계적으로 해석한다.정반대로 현대주의는 모든 차이를 부인하고 모든 구별을 공통의 수준에 놓으려고 한다. 심지어는 남녀의 구분까지도 그러하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서로 동등한 자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재능 외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권위와 재능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주시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전체 인간 생활을 하나님 앞에 놓는다면, 우리는 모두 동등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있으며 따라서 사람으로서 서로 동등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 말고 사람 사이에 무슨 차별을 인정할 수 없다.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개인이나 가정의 성품이나 재능의 우월함을 보이되 자기 확대나 야심찬 교만을 위하여 이 우월성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그것을 쓰기 위함임을 보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귀족주의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삶에 대한 민주주의적 해석을 말하고 나라들의 자유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셋째, 세계와의 관계(태도)이다. 이교는 때때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하게 여김으로써 세계를 너무 높게 평가한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세계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 로마교는 교회와 세계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보았다. 교회는 성화되고 세계는 저주 아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세계는 교회의 보호와 훈계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이원론적 상태는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고상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교회를 부패시켰고 교회는 세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칼빈주의는 이러한 사상과 개념에 개혁을 가져왔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중되어야 하며, 구원을 이루시는 특별은혜와 창조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베푸시는 일반은혜가 있다는 위대한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세상 생활을 교회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세상으로부터 피하는다.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에서 인간 대언자가 필요했고, 기독교 영역에서도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 순교자, 성직자로서 대언자가 등장했다. 루터 역시 이러한 사제적 매개에 대항하였지만, '가르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중보자 직분과 신비의 청지기를 다시 도입하고 말았다. 칼빈에 의하면, 종교는 피조물의 중재가 전혀 없이 하나님과 인간 마음의 직접적 교통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제나 순교자, 천사를 평가 절하했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해야 했기에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에 맞서서 거룩한 분노로 전쟁을 벌였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지만, 그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여기에서 사람을 위한 종교와 하나님을 위한 종교를 다시 한번 비교할 수 있다. 사람을 돕는 일이 종교의 주된 목적으로 남는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신앙심이 열등한 사람이 더 거룩한 사람의 중보 활동을 구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되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 노릇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의 요구가 모든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칼빈주의는 이 세번째 문제에 대하여서도 역시 단호하다. 칼빈주의는 종교의 전적으로 보편적인 특성과 적용을 옹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람은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올려놓아야 한다. 칼빈주의는 감정이나 의지에 국한된 종교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이성적 의식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비추는 사유의 빛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때에 변할 수 없는 존재 법칙을 창조된 모든 것에게 주셨다. 칼빈주의는 이에 철저히 순종하여 모든 생활을 하나님을 섬 주권에서 생긴다’ 라는 명제를 덧붙여 설명한다. 성경은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행정관은 모든 방종과 불법을 막고 선인을 악인에게서 보호하는‘일반 은혜’의 수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행정관은 하나님이 자기의 종으로 세운 자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수단으로 삼아 죄의 관영을 막아 공의를 유지하려고 하시며 행정관에서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든 도시든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며, 모든 시민은 처벌이 두려워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행정관에게 순종해야 한다. 순종의 궁극적 의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행정관을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칼빈은 하나님이 섭리를 행하시는 방식으로 한 백성에게 이와 같이 가장 바람직한 조건을 빼앗으시거나 한 국가가 거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죄로 복을 상실했을 때 그 조건을 결코 수여하지 않으실 주권적 권세를 갖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치적 명제는 다음 세 가지 명제로 요약해서 표현할 수 있다.1) 하나님만이 국가의 운명에 관하여 주관적 권리를 갖고 계시며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런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나라들을 만드셨고 그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보존하며 그 규례로 그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2) 죄는 정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친정을 파괴했다. 그러므로 권위의 행사는 통치의 목적상 기계적 치료책으로 사람에게 입혀졌다.3) 이 권위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엄위로부터 그에게 내려오는 권위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동료 인간에 대한 권세를 결코 갖지 못한다.둘째, 사회영역에서의 주권이다. 칼빈주의적 의미에서 우리는 가족과 사업과 과학과 예술 등이 국가와 별개로 존재하며 국가의 우월성으로부터 자신의 생활 법칙을 도출하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높은 권위유를 위한 투쟁은 각자의 영역에서 개인의 의무가 된다.마지막으로 국가에서 교회의 주권이다. 우리의 옛 칼빈주의 신앙고백서의 한 조항이 “온갖 우상 숭배와 거짓 종교를 막아 근절하고 교회의 거룩한 봉사를 보호하는 일을 정부에게 위임하는”사실에 있다. 그 난점은 종교 문제에서 정부의 간섭을 요구했던 칼빈과 그 아류의 만장일치적이며 확일적인 충고에 있다. 영적인 의무에서 행정관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을 향한 의무 ② 교회를 향한 의무 ③ 개인을 향한 의무이다.첫 번째 의무에 관해서 행정관은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에게 권력을 주시는 최고 통치자로 인정해야 한다. 모든 행정관은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에 따라 통치하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자연 생활과 그 말씀에서 탐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떤 교회의 결정에 종속되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에 필요한 빛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두 번째는 정부와 가시적 교회의 관계이다. 우리는 가시적 교회가 분열되고 어느 나라에서도 가시적 교회의 절대적 통일성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에 맞닥뜨린다. 행정관은 이 교회들의 개별 영역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자유 즉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정부가 교회에게 자발적인 원칙에 따라 자신의 힘으로 살도록 허용할 때 교회는 가장 부요롭게 번성한다. 국가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은 나란히 존재하며 서로 제한한다.마지막으로 개인의 주권에 관한 정부의 의무이다. 개인의 신앙에 관한 정부의 의무는, 개인적 영역에서 갖는 주권적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말할 때, 양심을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양심은 결코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고 언제나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께 종속된다. 이러한 양심이 바로 각 사람의 개인적 영역의 주권이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이중 의무를 갖는다. 하나는 교회로 하여금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자신(국가) 또한 주권적 양심에 양보하는 것이다. 교회의 주권은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