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행정론 요약1. 사회복지 행정이론1)사회복지행정의 개념사회복지는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조직적인 활동으로 인식되고 발전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조직사회로 인식되는 과정에서 행정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처럼, 사회복지에서 조직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복지행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필요성만일 복지기관이나 단체에서 행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관이 복지활동을 수행할 때 아래의 예와 같이 늘 혼란과 무질서를 경험할 것이다.1. 사회복지사와 클라이언트는 자기 마음대로 나타나거나 사라져 버림, 2. 사회복지사는 불규칙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결정하고 다른 전문가나 직원들의 활동과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없이 일을 해나갈 것임, 3.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활동으로 나타난 업무 결과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 4. 그 누구도 지역사회 내의 기관의 역할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며 미래 비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임, 5. 사회복지기관의 종사자들은 서로 정보를 나누려 하지도 않을 것임, 6. 사회복지기관 종사자들에 대한 분명한 역할기대도 없고 모든 결정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것, 7. 지식과 기술을 향상시키도록 지원하는 어떤 방법도 진행되지 않을 것임, 8. 사회복지기관 종사자들 사이에 아무런 과업의 위임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사회복지행정이란 위와 같은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장치이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복지활동을 조정하면서 이용자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속적으로 복지기관의 유지와 발전을 지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회복지행정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복지는 공식적인 기관에 의한 활동이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복지활동이 조직을 통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사가 수행하는 다양한 실천활동은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사회복지사는 조직 특성과 한계를 이해하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개인적 기술뿐만 아니라 행정의 지식에 정통해야 한다. 복지기관의 활동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할에 관한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가짐과 동시에 전문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역할과 관리활동을 수행한다. 행정가가 이렇게 다양한 역할과 관리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수용(Accepting)과 관심(Caring), 사회복지행정가는 직원과 클라이언트를 현실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는 지역사회의 관련 전문직 직원과 관리자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창의성(Creating)과 민주성(Democratizing), 사회복지행정가는 기관의 서비스 질을 증진시키고 자신과 직원 및 직원들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개혁적인 정책, 방법, 절차들을 개발하여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신뢰(Trusting)와 인정(Approving), 사회복지행정가의 활동은 직원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직원들이 제시하는 자료는 직무와 관련이 없더라도 존중되어야 한다. 기획(Planning)과 조직화(Organizing), 사회복지행정가의 활동 중에서 기획은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이다. 복지행정가는 복지서비스의 전달을 위해 효과적인 조직구조 형성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순위 설정(Prioritizing)과 권한의 위임(Delegating), 사회복지행정가는 각 목표와 활동들의 중요성을 비교·대조·평가하여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또한 책임과 권한은 서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과업과 권한을 적절히 위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의사결정(Decision making)과 의사전달(Communicating), 사회복지행정가는 지역사회에 유익한 결정을 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의사결정의 모든 과정과 단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동기부여(Motivating)와 촉진(Facilitating), 사회복지행정가는 직원들이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기관의 기능수행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사회복지행정가가 행정에 관한 적절한 명확히 하기 위해서 모든 직무는 서류에 근거하여 수행되고 또 그 서류는 원본 또는 초안대로 보존되어야 함을 원칙으로 한다. 비정의성(非情誼性), 이상적인 관료는 증오나 열정이 없이 형식주의적인 비정의성의 정신에 따라 행동한다. 기술적 자격, 이상적인 관료제는 기술적 자격에 의해 충원이 이루어진다. 전문지식, 모든 전문적 직무활동은 일반적으로 그 직무에 맞는 특별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한다. 공사의 분리, 직무활동을 사생활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몰주관적 · 비인간적성격을 갖게 하여 정의성,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가족관계, 사적 관계는 배제한다.인간관계이론 - 인간을 비인간적 합리성과 기계적인 도구로서 관리하려고하는 고전적인 과학적 관리방법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것이다. 인간을 감정, 정서 및 사회성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고 그들의 관리에 있어서 인간주의를 실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회복지사와 관리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간관계이론은 조직의 인간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조직이론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으며, 사회복지사와 관리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선호를 받고 있다.체계이론 - 체계란 상호작용하는 부분들로 구성된 전체, 즉 “부분들 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일련의 단위들”로 정의된다. 기존의 고전 모형들은 대체적으로 조직을 폐쇄적으로 보았으나, 사회학의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와 일반체계이론(gencral system theory)이 조직에 적용된 뒤에는 조직을 개방된 체계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구조기능주의는 전체로서의 사회체계(사회) 내에는 하위체계(개인, 집단)가 있고, 이러한 하위체계가 어떻게 사회의 생존과 안정에 기여하는지를 연구하며, 사회체계는 유기적인 조직체라고 인식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일반체계는 독일의 생물학자 Bertalanffy의 시스템이론(system theory : 하나의 개체와 개체를 구성하는 부분, 그리고 개체와 부분의 상호 연관성을 고찰한 이론)과 Kat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명령통일(unity of command)의 원리는 조직에는 오직 1인의 직속상관(팀장, 과장 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통솔범위(span of control)의 원리는 통솔할 수 있는 조직원의 수가 한정된다는 뜻이다. 분업과 전문화(division of work or specialization)의 원리는 전문문야별로 한 가지 주된 업무를 분담하는 것이다. 조정(coordination)의 원리는 종사자들의 행동 통일을 유도하는 것이다. 권한에 준하는 책임의 원리는 조직에서 상급자에게는 권한이 부여되지만 그러한 권한에는 반드시 책임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서화(departmentation)의 원리는 독립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몇 개의 대단 위로 기관구조를 재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조직구조조직구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기능별 구조, 분업의 조합방식을 중심으로 구분한다.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기능내용에 따라 과업을 나누는 구조이다. 사회복지조직의 경우도 기획, 홍보, 모금, 프로그램 개발 등으로 구분하여 조직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사업부제 구조, 사업마다 각자의 기능별 부서를 가진 단위를 만들어가는 것이 사업부제 구조이다. 사업부제는 사업마다 조직되는 경우도 있지만 지역마다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공식·비공식 구조, 공식적 조직구조는 법령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업무와 역할을 할당하고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구조이다. 반면 비공식 구조는 인간적 접촉이나 친근 관계로 형성된다. 공식 구조는 문서와 능률을 강조하는 인위적 형태이지만 비공식 구조는 자연적이며 개인적 특성이나 욕구에 의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특징이 있다. 집권형·분권형 구조, 집권형은 권한이 상위계층이나 기관에 있으며 분권형은 하위계층이나 기관에 위임되어 있다. 라인 스태프 구조, 라인(line)은 수직구조, 스태프(staff)는 수평구조를 의미한다. 수직적 조직은 상하 간의 명령복종 관계가 중심적 구조이다. 라인은 수직적 구조이므로 명령침과 충원계획, 직무분석 등이 구체화되면 기기에 맞추어 선발기준을 확실하게 만든다. 선발의 경우에 기관장이 단독으로 결정하는 기관도 있지만 인사위원회를 통하여 관리자와 해당 업무 사회복지사의 의견이 반영되어 최종결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배치와 이동, 채용한 직원은 퇴직까지 한곳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 내에서 업무담당자가 전환되고 이동하거나 업무내용이나 역할이 바뀌는 인사이동이 발생한다. 인사이동은 직원 개인의 경력을 개발하고 능력이나 기술 등 인재의 가치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실시한다.인재육성인재육성의 필요성 - 서비스는 종사자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팀으로 이루어지며 다양한 직종이나 사회자원의 연계를 통하여 실천된다. 따라서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서는 개인의 역량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팀 역량의 개발이나 연계에 의한 시너지 효과를 추구해야 한다. 모든 직원이 조직에서 각자 역할이나 입장을 올바로 이해하고 조직이 기대하는 역할행동을 자각한다면, 또한 커뮤니케이션이나 문제해결을 적절히 하고 팀워크를 촉진하며 활동의 시너지 효과 상승에 공헌해야 한다. 이 점이 사회복지조직에서 독창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인재육성의 필요성이다.인적자원개발과 직장연수 - 경영관리 관점에서 사회복지기관에서 인적자원개발을 통한 인재육성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방법은 직장 내의 교육연수이다. 직장연수는 세 가지 형태로 실시할 수 있다. 즉, 직무를 통한 연수(OJT), 직무와 분리된 연수(OFF-JT), 자기계발원조제도 SDS)이다. OJT는 직장연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직장에서 근무할 때 모든 기회가 OJT의 장이 된다. OFF-JT는 직무명령에 의해 일정 기간 직무에서 떨어져 연수한다. 일상 직무연수에서는 하기 어려운 새로운 동기부여나 관점의 확대, 전문지식이나 기능습득을 목적으로 할 때에 적합한 연수형태이다. SDS는 개별 직원의 자기계발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자기계발은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한 자기관리이므로 조직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촉진하려
농어촌 교회의 실태와 교회를 통한 선교 전략201601029 전성현1. 서론선교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을 보았을 때 교회가 없어서 혹은 교회의 건물이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거나 선교를 진행하지 못한다고 하는 일은 조재하지 않을 것이다. 휴전선 이남의 지도에서 교회가 세워져 있는 곳을 점으로 찍어 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물론 이 지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교회는 대한민국 내에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작은 농촌 심지어 섬이라 할지라도 아주 특별한 곳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이 교회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있는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교회는 있으나 비어있는 곳 목회자는 있으나 성도가 없는 곳 성도는 있으나 사역자가 없는 그런 교회들이 넘쳐난다는 것 이다. 이러한 농어촌교회의 문제점들과 해결 방안을 필자가 직접 격은 일로 설명하려 한다.필자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 군산에 있는 어청도라는 섬으로 배치를 받아 그곳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그 섬은 군인을 제외하면 섬주민이 300명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섬이었었다. 또한 섬의 면적 역시 마을을 전부 돌아보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크기도 작은 섬이었다. 이런 작은 섬에 무슨 교회가 있을까 했지만 여객선 선착장에서 보이는 가장 큰 건물은 바로 교회였다. 그런 작은 섬에도 교회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잘 지어진 반듯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주말이 되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는 적지 않은 성도들과 목사님이 계셨으며 점심식사도 먹을 수 있었다. 제법 교회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사연이 있었다. 피자가 처음 교회에 출석한 날 주보에는 목사 안수를 받으러 담임 교약자가 출타한 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즉 그 교회에는 오랬 동안 사역자가 없어서 장로님께서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이끌어 오셨고 교역자가 부임하신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에 깨달은 사실은 이것이 농어촌교회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서도는 있는데 사역자가 없다는 것이다. 어청도라는 섬 서울에서 2시간 30분이 걸리는 군산에서 배타고 2시간 30분을 배멀미를 하며 들어와야 한다. 충격적인건 배가 하루에 1편밖에 없다. 그것도 아침 9시에 출항한다. 그리고 그 섬에는 초등학교 분교가 교육시설에 전부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역하겠다고 올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의 환경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전부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전부이다. 섬에 있는 그나마 젊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육지에 집이 있고 주말이 되면 가게에서 장사를 하거나 섬을 나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하다.필자가 이야기한 이러한 상황이 어청도라는 섬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 농어촌 지역이면 거의 다가 격고 있을 상황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농어촌 선교현장에 뛰어들어 어떻게 선교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먼저는 잘 마련된 플렛폼인 먼저 세워져 있는 농어촌 교회들에 대한 진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진단을 통해서 나타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안과 개선의 여지들을 살펴본 후에 실현 가능한 전략적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2. 본론농어촌 교회의 정의농어촌 교회라 함은 인구 5만명 이하의 읍이나 면을 말하는데, 이것은 인구의 규모 면에서 지역 공동체 또는 행정 단위체로서 농어촌과 도시를 분류한 것이다. 농어촌 교회도 바로 농어촌 교회에 있기 때문에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어촌 교회의 문제는 농어촌의 문제이다.농어촌 교회의 문제점현재 농촌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인구의 도시 이동으로 인한 노동력 문제, 인구노령화, 농가의 부채, 과다한 농약 사용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토양의 생산력 저하, 전통 재래 품종의 멸절,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붕괴,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한 수입 농산물, 교육의 문제, 생존과 관계되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어촌의 문제역시 농촌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수자원의 감소로 인하여 수익이 감소되고, 대규모 간촉사업으로 연근해 어장이 사라졌다. 또한 외국의 값싼 해산물과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지고 어촌의 주민들은 노령화가 되어가는 반면에 열약한 복지 서비스는 개선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농어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비례하게 농어촌 교회 문제 또한 많다. 인구의 도시 이동으로 기존 신자의 감소와 선교 대상의 감소, 신학적인 문제로서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이 농어촌 교회와 농어촌 문제를 재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심각성을 수용할 만한 신학적인 대응이 없고, 정부가 농업 어업을 포기한 상태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지도자들의 농어촌 문제를 보는 시각이 정부와 똑같다는 것. 100년간 이어져 온 불변의 설교 방법, 목회자들의 사명감 결여,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 신념 없이 목회에 임한 자세, 목회자들의 잘못된 시각,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의 현장 실습 미약, 교단 분파로 인한 다툼 등이다. 앞서 언급한 것들이 비단 농어촌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들이지만 농어촌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더욱 심각하게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결과가 급속도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소외이다. 농어촌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심각한데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외면한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농어촌을 떠난다. 이러한 것은 교회도 만찬가지 이다. 농어촌교회의 젊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이 노출 되는 즉시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난다. 농어촌에 연고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욱 가차 없다. 더 나아가 각 교단은 이러한 농어촌교회의 문제를 외면한다.해결 방안농어촌 교회의 이러한 문제점들의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관심이다. 문제점의 원인이 소외에 있다면 그 해결방법은 바로 관심에 있을 것 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이 질문의 답 역시도 간단하다. 바로 교회 차체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 먼저는 교단 차원에서 농어촌 교회의 실태를 파악해야 한다. 교회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구성을 위하여 사역자가 필요하다. 성도는 있으나 사역자가 없는 교회에 사역자를 피송해야 한다. 또한 사역자는 있으나 성도가 없는 교회에는 선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복음의 불모지에 씨를 뿌리기 위하여 물질로서의 지원과 그리고 단기 선교팀의 파송과 같은 사람의 지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의 예배처가 없는 곳은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서 마련하는 것이 유익하다. 선교팀 파송이나 재정 후원 등으로 예배처를 마련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기존 교회를 통한 선교 전략농어촌에 잘 세워진 교회가 있다는 것은 농어촌 선교의 전초기지가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존 농어촌 교회의 준비된 시설들을 이용해서 어떤 방법으로 선교에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REPORT성경해석학12면 주해 페이퍼 - 예레미야 27장수업명:교수명:학 번:이 름:제출일:Ⅰ. 본문 및 번역: Jeremiah 40:1-612345678910111. 본문2. 번역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통치의 초기에 이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있었다. 말씀하시기를,2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 하셨다. 너는 너를 위하여 속박의 줄들과 멍에의 막대기들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네 목 위에 두라3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예루살렘의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오는 사신들의 손으로 에돔 왕에게와 모압 왕에게와 암몬 자손들의 왕에게와 두로 왕에게와 시돈 왕에게 보내라4 그리고 너는 그들로 그들의 주인들에게 명하라.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같이 너희 주인들에게 말하라.5 내가 나의 큰 능력과 나의 뻗힌 팔로 땅과 땅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내 눈들에 옳은 자에게 준다.6 그리고 이제 내가 이 모든 땅들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들의 짐승들을 그에게 주었다. 그를 섬기도록.7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들을 섬길 것이다. 그의 땅, 또한 그것의 때가 올 때까지. 그리고 많은 나라들과 큰 왕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8 그리고 그것이 있을 것이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그를, 섬기지 않고 그의 목을 바벨론 왕의 멍에로 두지 않는 백성과 왕국을, 내가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벌할 것이다. 이 백성에 대해 내가 그의 손으로 그들을 끝장 낼 때 까지, 여호와의 발언이다.9 그리고 너희는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바밸론 왕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너희의 선지자들과 너희의 복술하는 자들과 나희의 꿈꾸는 자들과 나희의 점치는 자들과 너희의 마술사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말라.10 참으로 그들은 너희를 너희 땅으로부터 멀리 옮기려고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몰아내게 한다. 그리고 너희가 멸게 된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그 이후에 페르시아의 발흥까지 전세계는 바벨론의 손아래 들어갔다.유다에서는 요시아에 의해서 발견된 율법책을 따라서 개혁을 시작했고, 이집트와 바벨론의 세력 확장의틈바구니에서 요시아는 이집트의 느고에게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때로부터 여러 왕들이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추종하며 살아남기 작전을 벌였으나, 결국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기를 든 대가로 바벨론에 의해 586년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예레미야는 유다가 주변 국가들의 제국주의적인 야망의 부활과 결강 속에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그 격동의 시절을 목도하였다. 예레미야서는 국수주의, 편집증, 친 바벨론계와 친 이집트계의 갈등,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투쟁등을 생생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런 세월 속에 예레미야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2. 문학적 정황예레미야 27장은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한 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벨론 왕 느브가네살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에 대한 예언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27-29장으로 구성된 본 단락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이 이 장들을 예레미야서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분리시켜 놓고 있으며 하나의 독립된 전승의 시기와 본서 전체에 삽입되기 이전에 하나의 “모음집”으로서의 상태가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27장에서 29장에 이르는 본 단락은 시드기야 통치 기간 동안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모음집으로 이해할 수 있다.Ⅲ. 본문의 구조와 양식예레미야 27장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왕위의 오른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하신 예언의 말씀을 다루고 있다. 27장에서 시작하여 29장까지 이어지는 이 단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 이스라엘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멍에를 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는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라 칭하며 오히려 거짓5장 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며 좁게는 주로 유다를 향한 경고를 언급하는 제 27-29장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이 되는 것이 본 장의 위치이다.Ⅳ. 본문분석예레미야 27장 은 산문체로 기록 되어져 있으며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로 1-11절은 외국 사신들에게 전한 경고 메시지며 둘째로 12-15절은 시드기야 왕에게 전한 메시지이다. 셋째로 16-22절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본문은 1-11절까지로서 예레미야기 외국 사신들에게 전한 경고의 메시지인 줄과 멍에를 상징으로 사용하여 열국이 바벨론에게 정복될 것을 예언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한다.27:1 본장의 시작인 예레미야서 27장 1절은 26장과 같이 연대적 배경, 메신저 공식 여호와의 명령을 포함한 도입부로 시작하고 있다. 본 절의 연대기적 상황은 26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3, 12절 등을 참조하여 보면 ‘여호야김’은 ‘시드기야’를 필사자가 오기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본 절의 사건은 시드기야가 왕위에 있을 때인 주전 597년의 포로 사건을 전제하고 있다.27:2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얹고 이 구절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예레미야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상징ㅈ넉 행위에 대해 익숙해 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대목에서 황소가 매는 멍에를 상징물로 사용한다. 멍에는 소의 목에 가죽 끈으로 매다는 나무 막대기이다. 이러한 멍에를 상징물로 사용한 이유는 마치 멍에를 맨 활소처럼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갈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27:3 본 절에서는 사신들이 등장한다.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붙여” 예레미야의 목에 건 줄과 멍에를 유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주변의 국가들의 사신들에게도 주어 보내라는 말이다. 이는 유다의 주변 국가들 역시도 바벨론에 의한 지배가 불가피함을 보여주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항거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악한 결과만을 초래하는 무모한 것임을 경고하기 위이 되어 진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결코 친바벨론 인물이 아니며 다만 그가 전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27:7 본 절에서는 유다와 열방들이 바벨론의 압제 하에 있는 기간이 장기화 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예레미야서 25장 11절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 포로 기간이 70년이 될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정하신 형벌의 기간이 지나면 바벨론을 멸하시고 유다를 비롯한 열방을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7:8 앞서 7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힌 후에는 이제 그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것을 촉구며 유다를 비롯한 열국들의 바벨론에 대한 감정이 어떠하든지 그것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이상 그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도리며 그렇지 않을 경우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27:9 본 절에서는 선지자, 복술가, 꿈꾸는 자, 술사, 요술자의 다양한 직책들이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직책들이 언급되어지는 이유는 당시 백성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방의 거짓 사술들에 미혹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27:10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하는 대다수 지배계층의 주장에 편승하며 또한 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바벨론에 대항하도록 성동하며 다녔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면 결국 나라를 멸망케 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다.28:11 본 절의 메시지는 바벨론의 침공을 하나님의 징벌로 여기고 바벨론 왕에게 순순히 복종하면 본토에 계속 거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그 순간은 괴롭고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평화와 환난은 하나앞서 이야기하였듯 유다 왕 시드기야 시대로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27장에서 주목해 볼만 한 것은 바로 2절에서 포로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 줄과 멍에이다. 예레미야의 어깨에 지워진 이 멍에는 바벨론의 멍에이다. 즉 바벨론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핍박을 당할 것이고 마치 멍에를 짊어진 소가 자유롭지 못한 모습으로 농부의 손짓에 의해서 농부가 원하는 대로 밭을 가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역시 바벨론의 압제속에서 멍에를 짊어진 소와 같은 일들을 당할 것을 상징하는 것 이다.본 장의 3-7절까지의 말씀은 유다의 이웃 반바벨론 동맹을 맺고 있는 다섯나라의 왕들에게 보낸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도 명확하게 나타내시고 있다. 5절 말씀인 “나는 내 능과 나의 든 팔로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땅을 사람에게 주었노라.” 이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강한 권능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주권적으로 강력한 권능을 행하실 것을 암시한다. 특히 6절의 말씀에서는 ‘모든 땅’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통치될 것을 말하며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내 종’이라고 말한다. 즉 바빌론 왕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으며 이 하나님의 뜻은 어느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 되며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놀랄만한 주장인 것이다. 또한 7절에 기록된 한정된 복종의 지속기간 역시도 주목해 볼만하다. 바벨론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이 지내는 기간이 무한정으로 지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기한이 이르면”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압제에서 벗어날 날이 있음을 말씀 하신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이르면 바벨론은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땅의 기한은 밝히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분명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끝은 분명히 있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다 차면 하나님의 때에 포로에서 놓임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있다.27장 8-11절 역시도 예언의 대상은 말한다.
Ⅰ.서론1. 연구의 동기와 목적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근대사 못지않게 그리 순탄 하지만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나누어 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과 남쪽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하여 각기 다른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몇 년 후 한반도는 전쟁을 겪었으며 전쟁 이후에는 독재와 맞서는 민주화 운동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 하였다. 이러한 일은 1987년 6.29 선언에 이르기까지 1945년부터 1987년 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교회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우리는 이 부분을 심도 있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작년에 영화 1987이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 속에서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온다. 바로 교회와 절과 성당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 역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가 모두 힘을 합쳐 민주화 운동에 동참 하였는가? 교회사를 살펴보면 모든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정치노선을 같이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교계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속해 있다는 보수교단은 어떤 정치노선을 따랐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한 궁금증을 아니 가질 수 없다.본 연구의 목적은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선배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였는지 밝히 아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또한 진보교단은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번 기록되어진 역사는 다시 기록 될 수 없다. 한번 지나간 역사는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교회의 역사에도 이러한 보편적인 논리가 적용된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선배들이 어떠한 근거로 역사에 기록되어진 선택을 하였으며 그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옳은 일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치와 관련하여 동일한 문제가 대한민국 사회에 닥쳐왔을 들고 온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 교회의 정통적 신학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박형룡 박사는 선교사들에 의하여 소개되어지고 초기 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계승된 개혁주의 신학을 계속하여 발전시키고 다양한 신학사상의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한국교회의 정통신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장로교 보수교단에 속한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역시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의 신학과 박형룡 박사가 제시하는 신학의 사상을 수용하기 때문이다.박형룡 박사가 제시하는 정통신학은 이러하다.신구약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하는 초자연적 성경관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경관 위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수립하기를 원했다. 이 같은 그의 신학사상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총회신학교, 그리고 만주 지역에서도 변함없이 주장되었다. 장로교회의 신학은 유럽 대륙의 칼빈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한 것이다. 즉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통이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의해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서 전개되고 성장한 과정이다.한국 장로교 보수교단의 신학을 정립하고 기둥을 세운 인물이 박형룡이라면 그보다 앞서 기둥을 세울 단단한 기반을 세운 일이 있었다. 바로 1907년 9월 17일 평양 소재의 ‘쟝대재 예배당‘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바로 그 것이다. 이 노회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초의 목사를 장립하였으며 더 나아가 장로회 신경을 채택 하였다. 이 장로회 신경은 교단이 갖추어야 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기위한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때 채택된 신조는 총 12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어 장로교 12신조로도 불리며 칼빈의 개혁주의 정신에 입각하여서 만들어진 신조이다. 이렇게 신학의 정통을 세우고 이어가려는 노력들이 이어짐으로 인하여서 한국 장로교 보수교단의 신학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한국 장로교회 보수교단은 선교사 되지 않아 다른 세력에 의하여 한반도의 정세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이른 것 이다. 38도선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한반도에 북쪽에는 소련이 점령한 상황 속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진행 하였으며 남쪽에는 미군정 상황 속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진행 하였다. 38도선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기 까지 미군정시기 약 3년간의 시간동안 한반도는 이념대립의 각축장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적극적 홍보아래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계가 이식되었으며 남한에서의 이념 대립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득세하였다.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통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동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다.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는 미군정을 이어받아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그는 청년시절에 겪었던 미국의 기독교 문화와 공화제 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을 받아 초대 정부를 이끌어나갔다. 이승만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고수 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제시한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을 대통력 책임제로 수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 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국회를 단원제로 하고,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하되 반대파에 대한 타협으로 내각책임제의 요소를 가미하는 형식을 띠었다. 국회의 정부 불신임 경의안과 정부의 국회해산권을 인정하지 않아 대통령제를 본질로 하면서, 동시에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권한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선출을 국회에서 하도록 규정하였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대통령은 한 번만 중임할 수 있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중임 제한 철페를 위한 불법적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파란을 일으켰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초대 헌법은 이후 한국 권력 구조의 원형을 이루면서, 동시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일인 지배 권위주의로 타락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대 대한민국의 정부되었다 그가 제시한 국가목표는 첫째, 한국의 상황에 맞게 민주주의를 내면화 하고, 둘째, 복지국가를 건설하며, 셋째,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넷째, 교육 개혁과 문화 규범의 창달을 통해 국민정신을 고양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의 추진을 위한 능력은 전무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간선제,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 부여, 구회에 내각불신임권 부여 대통령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5공화국 헌법을 출범시켰다. 전두환 정권은 효율적 정치 장악을 위하여 국회를 해산 하고 야당과 여당으로 개편 하였으며 야당은 사실상 준여당의 성격이 강하도록 개편 하였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의 반발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학생운동은 이념적으로 급진화되었고 대학별연대와 조직 체계가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시위의 태도가 과격해지고 강경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영자 사건, 명성그룹 사건 등 금융부정 사건들이 생기게 됨으로 정부는 계속되는 시위와 항의 속에서 유화정책으로 선회하게 되다.이러한 집권 후기 유화정책은 잠재해있던 민간사회와 정치사회의 정치적 저항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5년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은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긴 하였지만 실질적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이 결과 저항의 구심체로서 야당이 출현함으로서 국회가 제 기능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제 정국은 전두환의 임기 만료를 전제로 한 개헌에 맞추어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합의를 촉구하였으며 대통령은 4.13호언초치로 응수하였다.4.13 호헌조치로 인하여 국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바로 6.29선언을 이끌어낸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6월 항생의 시작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한 일에서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4.13호헌 조치로 강격대치 상태에 있던 집권세력과 저항세력이 맞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6월 민주항쟁은 전 국민적 민주화 운동이었다. 특히 신군부가 집권하는 과정에서도 잠잠히 있- 6.29 선언)4.19 혁명이후 어수선하던 정국을 틈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된다. 군사정변의 주동자는 육군 소장 박정희였다. 박정희에 의해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국시로 삼아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기부터 6.29 선언까지 이어지는 군부독재 기간에 기독교의 반응은 진보주의 신학을 따르는 진영과 보수주의 신학을 따르는 노선으로 극명하게 나누어진다. 군사정변 초기의 교계의 반응을 살펴보면 진보교단과 보수교단을 막론하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박정희의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교회협의회(K.N.C.C)’는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쿠테타는 부정과 부패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건지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한국민은 군사정부에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경직, 김활란 등 교계의 지도자들은 군사정변 직후 6월경에 미국으로부터 군부정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들이 초기 박정희 정권을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박정희 정권 초기의 공약인 경제성장과 반공, 그리고 정당한 때의 민정이양 등을 놓고 보면 초기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교계의 지지는 상식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은 박정희 정권에서의 한일협정, 삼선개헌, 유신체제 등을 거치며 나뉘어졌으며 이후 12.12 사태를 통한 군부독재 연장과 5.18 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6.29 선언에 이르기까지 정치상황에 대한 진보교단과 보수교단의 견해차이는 계속 되었다.1) 보수교단의 정치적 입장정치학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보수교단은 5.16 군사정변 이후의 정치변동 상황 속에서 독재에 항거하거나 사회의 정의구현을 위하여서 투쟁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정권에 우호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교계지도자들은 정권의 지도자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통하여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1. 영국의 종교개혁1517년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불길을 전 유럽을 뒤덮고 있었다. 이것은 바다건너 있는 어떻게 본다면 유럽 대륙에서 고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영국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16세기 유럽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이 종교개혁은 사실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가기고 있다. 표면에 나타난 역사적 정황을 보면 독일의 한 신학자인 루터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지 종교적 문제로 끝나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당시 세속 황제들과 로마 교황청의 팽팽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이 종교개혁을 이해 할 때는 그 나라의 정치적 상황의 배경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특별히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영국 종교개혁의 시작은 성경을 통하여 감화 받은 사람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영국을 통치하는 통치자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에 의하여 시작 되었다. 헨리 8세는 1509년 헨리 7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를 당시 헨리의 아내는 캐더린 이었다. 사질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 결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헨리 8세는 왕이 되기 6년 전 150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주선으로 스페인에 속해있는 아라곤왕국의 공주인 캐더린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캐더린이 헨리의 형 아서의 아내라는 것에 있었다. 영국의 교회지도자들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을 의시해서 이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 때에 이 사건이 후에 있을 영국의 종교개혁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헨리 8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영국을 강력한 천주교회 국가로 만들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이 헨리 8세의 강력한 의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추기경 토마스 울지 였다. 울지는 종교보다는 정치에 관는 사산하거나 유아기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캐더린이 더 이상 아기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헨리는 그와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와 결혼하고 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헨리의 이혼 요청을 받아 드리지 않았다. 헨리는 왕권으로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었지만 절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이혼할 수 있기를 바란 나머지 당시 입스위치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추기경에 오른 토머스 울지를 통해 교황에게 종교적인 정식 이혼의 허락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교황이 헨리의 결혼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게 된다면 전임 교황의 오류를 인정하게 됨으로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 되고 또한 정치적으로 로마를 위협하고 있는 신정 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헨리의 이혼소송이 기각되자 헨리는 교황청과의 단교를 택하였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헨리 8세는 1531년 요크와 캔터베리 주교회를 열어 자신이 “영국교회와 성직자들의 유일한 보호자요 머리”라고 선언하고 하원은 주교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 1532년 5월에 왕이 교회를 다스릴 수 있다고 선언 하였다. 1534 11월에는 의회를 설득하여 왕이 “영국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머리”이고 이단과 악습을 교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수장령을 통과 시켰다. 이로서 천주교와 영국은 결별하게 된다.헨리 8세의 사망이후 에드워드 6세가 왕이 되었다. 이때 에드워드의 나이는 9세의 불과 했다. 그런 어린 왕을 위하여 에드워드 세이모어가 섭정을 시작 하였는데 세이모어는 종교개혁의지지자였다. 세이모어는 복음적인 설교자와 출판인들이 널리 활동하게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독인 남부의 중교개혁자 들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의 글들이 소개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영국에는 칼빈의 영향력이 점점 더 강하여 졌다.세이모어는 종교개혁을 위한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이웃 국가인 스코틀랜드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코틀랜드의 메리와여 공동기도서를 만들었으며 리틀리, 낙스와 같은 신학자들은 42조 신조를 만들에 된다. 이 신조는 정통적인 천주교의 재세례파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으며 예정론을 강조하고 성례에 관하여는 칼빈주의 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1553년 에드워드의 사망이 임박하자 백성들의 지지 가운데 헨리 8세와 캐더린의 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는 투철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에드워드 대에 이루어 놓은 개혁의 탑은 무너지게 된다. 메리는 1554년 천주교도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함으로 자신이 천주교도임을 전 유럽에 알린다. 더 나아가 대륙에서 일어났던 반동 종교개혁에 힘입어 종교개혁자들을 핍박 하였다. 으러한 상황 속에 페리는 “피의 메리”라는 악명이 주어지게 된다.1558년 메리가 죽자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본래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귀족들의 후원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천주교회와 칼빈주의 자들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에 중요정책을 사용한다. 천주교의 감돚정치체제를 채택하고 성지자의 독신제도를 고수하며 교회에서 십자가와 성상의 사용을 주장하는 등의 정책을 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1559년에 수장령을 내려 왕이 교회와 국가의 최고 권력자임을 선언하며 에드뤄드 6세의 제이 공동기도서를 수정 보완하여 통일령을 통과 시켰다. 또한 그녀는 39조 신조를 작성함으로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이 39조 신조는 42조 신조를 수정보완 한 것으로 칼빈의 영향이 많이 묻어난다.1603년 엘리자베스가 혈통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는 영국의 왕으로 등극함으로 인하여 제임스 1세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등극과 함께 영국에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게 된다. 제임스는 왕권신수설에 기초하여 절대왕조를 세우기를 원하였다. 또한 1604년에는 천주교회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위해 스페인과 편화협정을 맺는 등 반개혁적 입장을 취하였다.2. 웨스트민스터 총회 개최 배경1625년 제임스 1함으로 탄압하였다. 이러한 찰스의 실정은 종교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정치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기초로 하여 국회를 가볍게 여기며 그의 아들과 스페인 공주를 결혼시키려 하다가 국민들의 반발을 샀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장로정치를 폐지하고 영국국교회를 채택할 것과 공동 기도서를 받아들일 것을 명령하는 등의 실정을 거듭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하여 찰스는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의회를 소집 하였으나 의회원에 당선된 자들은 청교도가 다수였다. 이에 찰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명하였는데 그 결과 더 많은 청교도가 의회에 진출하였다.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이 회를 장기의회라 한다. 찰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의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찰스의 명령에 불복하고 저항하였다. 이에 찰스는 체포명령을 내리고 이로 인하여 의회군 과의 내란을 초래하였다.장기의회가 소집되고 1640년 12월 의회는 캔터버리 대주교 로드를 체포하여 런던 타워에 감금하였고 1641년에는 스타 체임버와 고등종교법원을 폐지하였다. 이에 찰스는 아일랜드에서 천주교도들이 수천 명의 개신교인들을 살해한 틈을 타 교황과 손을 잡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반란자들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이에 격분한 의회는 1643년 윌리엄 로드는 여러 가지 죄를 물어 재판에 회부한 후 처형하였다.의회는 찰스의 여러 가지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1643년 7원 1일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교회개혁을 위한 최회를 소집하였는데 이것이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 총회다.3. 웨스트민스터 총회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 까지 진행 되었다. 총 모임 횟수는 1163회였으며 참석자는 총 대표 151명으로 10명의 상원의원, 20명의 하원의원, 전국에서 뽑힌 121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로 구성 되었다. 121명의 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구성은 대부분이 장로교도였으며 2명의 감독 주의자와 5-6명의 독립파, 소수의 에라스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의회는 국왕의 의회 수장령을 폐지하였고 또한 총회의 참석하는 스코틀랜드의 대표를 제외한 모든 대표들의 자격을 총회가 결정하고 의회가 이를 승인하도록 하였다. 의회는 회합의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고 그 업무를 하달하면서 그 비용을 부담했다. 심지어 의회는 의장과 서기를 임명하고 공석을 보충하며 모든 최종 결정사항에 거부권을 행사하기 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어용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의회는 공동기도서는 폐지하고 소집된 총회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새로운 의식, 권징, 정치 등을 제정하여서 가능한 한 완전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스코틀랜드나 대륙의 개혁교회들과 일치가 되어 지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총회에 명령하기를 “모든 비방과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영국교회의 39개조 신조의 교리를 수호하라”는 의회의 명령에 따라 처음 10주 동안 39개조 신조의 수정에 들어갔으나 신조의 수정보다는 전면적으로 개정하자는 의견이 많아지자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총회는 1644년 8월 신앙고백서 작성 위원회를 조직하고 1646년 11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완성하여 의회에 제출 하였다. 또한 1647년 10월에는 성인들을 위해 ‘대요리문답서’를 같은 해 11월에는 ‘소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다. 신앙고백서는 1647년 8월에 스코틀래드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1648년 6월 영국의회가 승인한 후 스코틀랜드와 미국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가 되었다. 대소요리문답서는 영국의회와 스코틀랜드 총회에 의해 1648년 승인 되었다.4. 웨스트민스터 총회 채택 문서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이후 125년 동안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했다. 17세기의 신학과 신앙 명제들을 포함시켰다. 조리 있고 엄숙하며 명확한 언어로 서술했다. 완결성과 포괄성을 가졌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진리를 변호했다.이 신앙고백서는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