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회>사회학의 세가지 이론적 접근방식2006528015지리교육과박상희* 기능주의기능주의Functionalism는 사회란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이 함께 작동해 사회 전체의 안정과 결속을 유지하는 복잡한 체계라고 주장한다. 이 접근 방법에 따르면, 사회학은 사회 각각의 부분들과 전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야한다. 종교적 신념과 사회의 관습을 기능주의적 접근방식으로 다른 제도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 줄 수 있다. 사회와 서로 다른 부분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이다.사회적 관례나 사회 제도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사회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콩트와 뒤르켐을 포함한 기능주의자들은 사회의 기능을 살아 있는 유기체에 비유하는 유기체적 유추를 활용해 왔다. 이들은 사회의 부분들이 마치 인체의 다양한 부분들이 그러하듯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같이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심장이 몸 전체에 혈액을 보냄으로써 생명유지의 절대적 역할을 하는 것 같이 어떤 사회적 항목의 기능을 분석하는 것은, 그 사회적 항목이 한 사회를 유지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기능주의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시키는 도덕적합의moral consensus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도덕적 합의는 한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가치를 공유할 때 형성된다. 기능주의자들은 질서와 균형을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로 본다. 이러한 사회적 균형은 사회 구성원들 간에 도덕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다.뒤르켐에게 영향을 받은 로버트 K. 머턴은 잠재적 기능과 명시적 기능을 구분했다. 명시적 기능은 특정한 유형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당사자가 인지하고 의도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잠재적 기능은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활동의 결과다. 머턴에 따르면, 사회학적 설명이란 대체로 사회적 행위와 제도들의 잠재적 기능을 밝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머턴은 또한 기능과 역기능을 구분한다. 사회적 행위의 역기능적 측면을 탐구한다는 것은 현존 질서에 도전하는 사회적 삶의 특징들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종교는 오직 사회적 결속에 기여하는 것은 오류다. 서로 다른 종교나 분파를 지지할 경우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초래될 수도 있다.기능주의는 분열과 갈등을 낳는 요인(계급, 인종, 젠더 등)을 무시하고 사회적 결속을 낳는 요인들만 부당하게 강조한 것에 대해 비판받는다. 많은 비판자들은 속성을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능주의자들은 마치 사회가 ‘필요’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글을 쓴다.* 갈등 이론기능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갈등 이론conflict theory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들은 사회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나아가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 설명하기 위해 종합적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갈등 이론가들은 합의에 대한 기능론자들의 강조를 거부하고, 대신 사회 내에서 분열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권력 불평등과 투쟁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들은 또한 사회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별개의 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은 갈등 가능성이 상존하고 특정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은 이익을 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 이론가들은 우월한 집단과 불리한 집단 간의 긴장을 연구해 어떻게 통제 관계가 만들어지고 지속되는지를 이해하려고 한다.갈등 이론 내부에서는 계급갈등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영향력 있는 접근 방식으로 대접받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학적 분석과 정치적 개혁의 조합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 될 것으로 간주된다.그러나 일부 갈등 이론가들은 베버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는 기능주의적 사상가들이 조화와 일치가 존재하는 사회적 삶의 측면만 강조한다고 비판한다. 갈등과 분열의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다렌도르프는 갈등이 개인이나 집단 간의 이익 충돌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이익의 충돌을 계급의 측면에서 바라봤지만, 다렌도르프는 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익 충돌을 권위나 권력과 연결 짓는다. 모든 사회에서는 피지배자와 지배자 사이에 그리고 권위를 가진 자와 그것에서 배제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존재한다.* 상징적 상호 작용론미국의 철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의 저작은 특히 상징적 상호 작용론이라는 이론적 전망을 통해 사회학적 사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징적 상호 작용론은 언어의 의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언어는 인간이 자의식적 존재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미드는 주장한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개별성을 자각할 수 있게 되며 우리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객관화 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상징이다. 상징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단어, 비언어적 몸짓이나 의사소통 방식 등이 상징이다. 미드는 인간이 상호 작용을 할 때 공유된 의미와 이해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상징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즉 언어나 제스처와 같은 상징을 통해 타인과의 상호작용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에 기반을 두어 자신의 행위를 결정해 가는 인간의 자율적 창조적 능력을 매우 강조하는 이론이다. 결국 개인을 사회적 산물이 아닌 자신의 주관에 따라 상황을 규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 주체로 파악하는 것이다.상징적 상호 작용론은 면대면 상호 작용의 상세한 내용에 주목하고, 그것이 타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상징적 상호 작용론에서 영향을 받은 사회학자들은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맥락에서 면대면 상호 작용에 주로 초점을 둔다. 그들은 사회와 제도들을 창조하는데 이러한 상호 작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강조한다. 이러한 이론적 관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막스 베버는 비록 사회 구조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구조는 개인의 사회적 행위들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사회 안의 권력과 구조의 문제나 그것이 어떻게 개인행위를 규제하는지 등의 거시적 쟁점들을 간과한다고 비판받아 왔다.앨리 혹실드는 저서에서 상징적 상호 작용론도 권력과 구조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혹실드는 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서구경제가 서비스 산업이 점점 더 증가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우리가 수행하는 노동의 감성적 측면이 밝혀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혹실드는 이것을 감정 노동 훈련이라고 불렀다. 회사는 당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지시를 내린다는 사실이다.혹실드의 연구는 서비스 노동자들 역시 육체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특정한 측면에서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혹실드의 보고에 따르면, 서비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미소가 일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외부에서 부과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자신들의 감정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감정이란 흔히 우리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이라고 간주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혹실드의 이 같은 발견은 흥미롭다.
◆ 2010년 4월 9일 토요일 9시, 향토지리의 첫걸음처음으로 가 보는 향토지리 답사. 고장, 지역사회를 답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고, 딱히 새로운 사실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향토지리 답사를 가니 그동안 우리의 고장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렇게 지리교육과에서 향토지리 답사를 가는 이유는 직접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해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기 위해서, 또한 향토지리 답사의 방법을 익혀 나중에 교사가 되었을 때 그 학교 주변의 향토 답사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번 향토지리 답사에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청주’. 이곳의 도시적 특성에 대해 직접 두루 살펴보고자 했다.-도시공원중앙공원과 상당조원은 도시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상징물이 많이 위치해있는 도시공원 중 하나이다. 도시공원은 지가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접근성이 높은 시가지 내 녹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휴식 공간, 녹지공간으로써 다방면으로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때문에 청주라는 도시에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러한 녹색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다 할 수 있다. 중앙공원에는 압각수라는 은행나무, 임진왜란 시의 전장 기적비, 미양공 화천당 박춘무선생 전장기적비, 의병장 한공봉수송공비, 청주척화비 등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많은 상징물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도시공원 내에 자리 잡은 각 종 상징물들은 그 도시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상당공원은 규모가 작지만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집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청주읍성: 청주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렇게 정치,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한 도시들은 청주 말고도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해 있는데, 이러한 중심지에는 대부분 방어를 위해 쌓은 읍성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과거 식민지를 겪고 산업화로 인해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지금 원형그대로 남아있는 성은 거의 없 성 내부 구조도 마찬가지이다. 청주읍성은 특히 네모반듯했는데, 이 사실과 네 개의 문터를 통해 대략적으로 옛날에 청주읍성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문 - 서문을 포함한 많은 문터들은 내 생각과 달리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문터라고 하면 왠지 잘 눈에 띄지 않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을 것 같은데, 네 개의 문은 모두 우리가 자주 지나다니던 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각 문에는 모두 다른 이름이 붙어있었는데, 서문은 맑은 가을이라는 뜻을 지닌 '청추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문 근처에는 시장이 발달해있는데, 이는 문 근처가 읍성의 가장자리에 해당하여 경쟁에서 밀려난 도매업, 소매업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서문 터 앞에는 큰 길이 있는데, 아마 성벽을 허물고 길이 난 것 같다고 한다.: 북문 - 북문의 또 다른 이름은 현무문이다. 북현무, 남주작, 좌청룡, 우백호라는 각 방위는 오방색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북현무는 검정색, 남주작은 붉은색, 좌청룡은 청색, 우백호는 백색, 그리고 중앙은 노란색을 나타낸다.: 남문 - 청주읍성의 남문은 바로 정문이었으며, 남문의 또 다른 이름은 청남문이다. 남문터 비석 옆에는 민주항쟁의 비석이 있었는데, 이는 1987년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민주항쟁 때 청주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즉 민주항쟁시 총집결 할 수 있었던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동헌 - 동헌은 청주 목관아 건물(관청)로, 지금 청원군청 내에 자리 잡고 있다. 과거 청주군청의 사무실과 청원군청의 사무실로 쓰였으며 청원군청의 건물이 계속 확장되어 훼손이 심했다. 때문에 우리가 갔을 때는 새로 복원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1묘 3단 - 1묘 3단은 문묘, 사직단, 성황단, 여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1묘 3단은 정치, 행정적 중심지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위해 반드시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설치하는 데에는 좌묘우사라는 원리를 적용시킨다. 즉, 남쪽을 기준으로 좌측에 묘를, 우측에 사직단을 설치하는 원 있다는 것은 향교가 위치하고 있는 동의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청주에는 교동이 바로 그 예이다.사직단은 농경사회였던 조선에서 토지신과 곡물신과 같은 농업신에게 1년간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던 곳이고, 성황단은 조상신을 모시는 곳으로, 청주에는 주산과, 우암산의 진산에 있다.여단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달래는 곳으로, 청주에는 읍성 북쪽의 용화사에 있다.: 행주형 - 청주는 풍수지리상으로 봤을 때 배가 떠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 '행주형'인데, 이는 주성중학교의 명칭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이 행주형 배의 돛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당간은 깃발을 꽂아두는 기둥으로, 나무로 만든 것은 목당간, 철로 만든 것은 철당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당간은 옛날에 절이 있었던 자리에 있던 것인데, 이를 통해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남아있는 당간은 대부분 제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지주만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다.-청주의 구도심: 기능지역의 분화, CBD의 구조청주의 CBD는 대체로 옛날 읍성의 안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청주의 CBD 내부에 위치하는 동의 이름은 성안동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CBD를 성안길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일본의 잔재가 남아 제일 가운데 있는 동이라 하여 본정이라는 이름을 썼었는데, 이러한 일재의 잔재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북문로와 남문로를 통틀어 아우를 수 있는 이름인 성안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청주의 CBD를 둘러보면 건물이 깨끗하고 약간의 고층화가 이루어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와 함께 오래되고 좁은 골목길이나, 새로 재개발되어 길이 반듯하게 나 있는 로데오 거리의 모습 역시 볼 수 있었다.이러한 성안길은 시내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크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이로 인해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고, 대신 보행자만 다닐 수 있는 길로 변화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범위는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확인할 수 있었다.청주 CBD내의 기능들은 뚜렷하게 분화되지 않고 섞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성안길에서 빠져나가는 육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도심부 근처는 지대 지불 능력이 큰 업종이 와서 자리를 잡으며, 지가 때문에 상주인구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상구인구가 적어졌다는 것은 교동초등학교가 용암아파트 단지로 이동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었다.-오래된 거주지: 산업화 과정에서 산업화보다 도시화가 빠르게 나타나면 도심부 근청의 국공유지에 Squatter settlement, 즉 무단점유 불법 정착지가 형성된다. 이러한 Squatter settlement는 농촌에서 계속해서 인구를 밀어내기 때문에 과잉인구가 해소되지 않고, 이에 따라 이곳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가 커지다보면 이곳은 땅값이 올라가 재개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Squatter settlement에 거주 하던 사람들은 내쫓기게 된다. 이러한 도심 근처의 Squatter settlement는 외곽으로 빠져나갔던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도심재활성화가 일어나며, 이에 따라 도시 빈곤층의 문제가 야기된다. 청주 역시 산업화 과정에서 우암산 언저리의 수동 일대에 Squatter settlement가 형성되었었는데, 지금은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기능지역의 확대: 청주는 기존에 무심천 동쪽, 즉 성안길 쪽은 36번 국도를 따라 남, 북으로 확대되어 왔다. 청주대 근처는 단독주택으로 먼저 개발되었는데, 최근에 다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고, 사직동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는 20, 30년 전부터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한 무심천을 건너는 다리가 옛날엔 하나였으나 점점 많아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간이 흘러 무심천의 서쪽으로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무심천무심천 - 무심천은 청주시민들이 산책이나 운동을 하기 위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에 맞게 무심천에는 산책로, 자전거길 등이 만들어져 있고, 둔치가 넓은 곳에는 공원도 조성했다. 이렇게 주민들어 있고, 미호천 제방이 쌓여있다. 이렇게 하천의 상류에서는 댐을 형성해서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홍수를 예방한다. 하천의 하류에서는 바닷물이 올라와서 농작물에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그리고 식수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구둑을 만든다.미호천의 지류인 무심천에서도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용수를 확보하며, 하상을 일정 높이로 유지하고,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수중보'를 설치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수중보 옆에는 어도를 건설하였으며,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신흥 주택지최근에는 청주에 택지개발이 이발어지고 있는데, 용암동, 산남 1?2지구, 율량동, 분평동, 가경동, 복대동, 용암 2지구, 산남 3지구 등의 지역이 그 축이 되고 있다.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위주로 개발되고 있는데, 그 유형은 지구별로 소규모 개발되는 것과, 대규모 단지로 개발되는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새로운 주거형태(분평동) - 분평동 아파트단지는 도시화와 현재 개발 중인 아파트 단지이다. 건너편은 영운동이며, 길을 축으로 시가지가 확장되고 있으며 외곽 순환도로가 건설 중(2차, 3차 외곽 순환도로 건설)이다. 이렇게 외곽 순환도로의 건설로 청주의 시가지 발달은 서쪽으로 치우쳐진 동심원형(환상형)으로 나타난다. 사직동, 사창동, 율량동에 주거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청주 우회도로(순환도로)를 따라 용암동, 분평동, 산남동, 가경동, 복대동에 주거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1?2차 외곡순환도로는 서쪽(경부?중부고속도로)으로 먼저 발달 되었으며, 현재는 남쪽(대전 방향)도 개발 중이다.대규모 아파트 단지 지구 내에는 중심상가가 형성되는데, 주변의 상가 위치와 아파트 단지 별로 상가의 규모와 업종이 다르다. 예를 들어, 성화지구는 가경동과 가까워 상가가 적으며, 용암 2지는 금천동과 가까워 상가가 적다. 분평동의 시내나 용암동과 가까워 규모가 작다. 상가 형성 요소(어떤 업종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면 주요 주거층의 연령대를 알 .
- 2011 춘계 정기연합 답사 -기호지방(畿湖地方) 답사 보고서※ 일정 ( 3월 29일 ~ 4월 01일 )3월 29일청주 →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 추사고택 → 해미읍성 → 비행기들→ 서산간척지(A, B지구), 간월도 → 굴포운하 → 대호방조제, 석문방조제 → 평택항 → 안산 ( 1박 )30일안산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이주 노동자 거리) → 시화전망대 →소래포구 → 송도국제도시 → 인천항 갑문식 도크 → 인천 차이나타 운 → 영종도(인천국제공항) → 광성보, 초지진 → 강화도 마니산 입 구 ( 2박 )31일마니산 → 석모도(보문사) → 강화 고인돌 → 갑곶(역사박물관) →행주산성 → 신·구 포천 → 산정호수( 3박 )4월 01일포천 출발 → 고석정 → 직탕폭포 → 백의리층 → 자살바위 → 재인폭포 → 전곡선사유적지 → 신·구 동두천 → 청주● 들어가는 말이번 춘계 정기연합답사는 기호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기호지방이란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일원, 강원도의 철원지방, 충남 서북부를 포함한 지역이다.기호는 다시 수도 서울과 그 주변, 경기 동북부, 아산만 평야, 내포지방으로 구분할 수 있다.기호지방은 내가 사는 곳과 근처에 있어서 이번 답사는 가깝게 느껴졌고 다른 답사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첫째 날 3월 29일 >8 : 00 서원대학교 출발.9 : 30 외암리 민속마을 도착.- 외암리에 도착해 교수님께 기호지방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기호지방은 충청도 내포지방 + 경기도 + 서울 + 강원도 철원 + 인천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중 충청도에는 내포시라는 새로운 도시가 생길 예정이다.청주에서 차령산지를 넘어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다. 이곳은 안동하회와 같은 민속마을이지만 규모가 비교적 작다.+ 외암민속마을의 유래중요민속자료 제 236호 외암마을 (속칭 외암골)은 아산시내에서 남측으로 약 8km 떨어진 설화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외암마을은 약 500년 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의 외암마을은 조 온천은 지표의 연약부 부분이다. 이것이 단층이 지나갔기 때문인지 지표가 쓸려버렸기 때문인지 궁금하다.추사고택에서 백송을 볼 수 있었는데 참으로 멋있었다.12 : 55 해미읍성- 해미읍성의 성벽을 보면 밑의 돌은 크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또 바깥에서 보면 석성이지만 안은 흙으로 채워져있어 안에서 보면 토성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구조로 보면 북쪽면은 산을 접하고 있어 남쪽으로 성을 쌓은 평성이다. 평성이란 평지에 만들어 놓은 성이다.해미읍성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였으며 사용된 돌은 이곳에서 난 것이다.수원화성과는 다르게 군인이 거주하던 곳이라 성내에 민간인이 살지 않는다. 해자를 파놓았으나 흉내만 내는 정도이다.천주교 박해의 흔적이 있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천주교 신자를 묶었던 자국이 남아있다.13 : 41 비행기 들- 비행기들은 개척지로 외부인들이 유입되어 산촌형태를 띤다.다른 곳보다 해발고도 20m이상 높은 곳으로 봉우리의 높이가 일정한 봉고 동일선 지역이다. 때문에 벼농사하기가 나쁘며 저수지물을 들여와 경작한다.집단이주사업을 벌이기도 하여 일부는 죄수출신도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몇 년 전 공군부대가 들어서 지명이름 대로 비행기가 뜨고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서산간척지(이동중)- 서산, 충청도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간척하기 좋아 현대건설에서 80년대에 농업용지로 간척 되었다. 대부분 논으로 이루어져있으며 B지구 일부는 축산단지로 조성 되어있다. 하지만 리아스식 해안의 자연경관과 바다생물은 멸종하였고 정화역할을 해주는 뻘도 손실 되어 어느 것이 이득인지는 알 수 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자의 것이 미래가치와 지속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한다.간월도 층은 제 4기 뷔름빙기에서 현재의 사이에 생성된 호수에서 보인다.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나 운하를 파서 안면반도를 잘라 섬이 되었다.14 : 55 굴포운하지- 굴포운하는 삼남지방의 세금을 한양으로 수월하게 운반하기 위해 시도 되었다.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조세운반선이 올라가기 위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경우가 유사한 것 같다고 했다.5조는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다양한 발전가능성이 상승하고 있고 국내 제 2위의 긴 다리 라고 했다. 평택항은 발전 중 이며 앞으로도 발전가능성이 많다고 했다.교수님께서는 4대강 사업이 필요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이미 수도권의 물동량은 평택항에서 처리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교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현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멈추고 더 이상의 환경파괴를 지속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날 3월 30일 >7 : 57 출발8 : 22 안산 외국인 주민센터- 아침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간혹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국인 만 보였다. 시장에서나 노점에서는 외국인들이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의 간판은 한국어 반 외국어 반 정도 됐다. 생각보다는 외국어가 많지 않았다.외국인 주민센터 앞 다국어로 인사말이 쓰여있다.마치 해외의 식당 같다.중국식 길거리 음식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는 성남이다. 성남은 서울역 앞의 막노동자와 청계천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두 번째는 바로 안산이다. 정부는 Sydney를 모델로 삼아 안산을 계획했다. 그러나 서울의 인구분산을 위해서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서울의 중력에 의해 인구가 흡입되어 가족 전체가 아닌 일하는 사람만 이주하거나 아예 이주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인구분산은 실패하였고 공장의 위치가 서쪽이라 분진이 주거지로 날라와 대기오염이 심각하다. 도시의 가운데로는 철도가 지나가 철도로 인해 도시가 양분되어 융화가 안되는 문제도 있다.시화지구는 공장마다 section이 있으며 1000여개의 공장이 들어와 있는데 대부분 중 · 소 기업이 입주하여있다. 내국인의 3D업종 기피 현상 때문에 이곳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으며 이들이 거주하면서 상대하는 상가가 입점하고 주민센터까지 입지하게 된 것이다.마지막으로 돌아가기 전 주민센터 밑의 도서관에서 사서분께 인터뷰를 해보았다. 그분께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학력이 자국에서 대졸 수준으로 의외로 높으며 한국의 임금 청라지구도 개발 중이다.14 : 03 인천항- 인천항은 갑문식 도크로 도크안에서 물높이를 같게 만들어서 접안한다.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매우커서 군산과는 달리 뜬다리 부두설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때도 배우고 대학와서도 배운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매우 신기했다.14 : 40 China town- 내가 인천에 살아봐서 그런지 이곳도 한번 와보았다. 근데 그때보다 많이 꾸며놓은 것 같다. 차이나 타운의 풍광은 붉은색이 많이 보이고 중국음식점과 상점이 위치해있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주인은 대부분 한국인이었고 중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껍데기만 차이나타운 같았다.15 : 13 인천항- 다시 인천항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인천항 내부로 들어갔다.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인천항에 목재가 쌓여 있었다. 수입된 목재다. 우리나라는 목재의 98%를 수입에 의존한다. 종이를 아껴쓰자!+ 인천에서 강화도로 가는 긴 시간 중에 문득 생각났다. 청라지구가 완공되면 50만의 인구가 유입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 중 적어도 50%가 서울로 출·퇴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경인고속도로, 1호선, 외곽순환도로가 모두 포화상태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시의 정책은 무엇이고 우리가 도시계획을 한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제2외곽 순환도로의 개통으로 조금 분산된다 하더라도 막대한 교통체증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16 : 38 초지진-강화도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았다. 김포 반도와 강화도는 붙어 있다가 단층작용에 의해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정말 지도에서 보면 딱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강화도는 5개의 섬이었는데 간척해서 하나로 합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강화도는 인삼이 유명한데 화강암 편마암 풍화토여서 인삼농사가 잘된다.초지진은 돌출해 나온 곳에 위치한다. 병인양요와 운요호 사건을 거친 역사의 유물이다. 포가 있으나 포가 고정각이라 수비에 매우 불리하였다고 한다.17 : 23 광성보- 용두 돈대는 용의 머리형상오르기 전 아쉬운 일을 겪었다. 예전에는 볼 수 있었던 화강암 풍화토를 시멘트로 덮어버려서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쉬웠다.보른하르트형 산지가 보인다. 판상절리에 불상을 새겨넣어 기괴하고 아름다웠다.우측은 불상을 모셔논 곳이다. 이곳은 절리에 의해 떨어져 나온 덩어리이다.마애석불좌상으로 가기 위해 산을 오르던 중턱에서 바닷가 둑을 보았을 때 둑이 휘어져있는데 그것은 옛날에 간척할 때 기술이 부족해 갯벌을 따라서 간척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간척지는 직선으로 된 것으로 확연히 비교된다.마애석불좌상 판상절리의 옆 부분은 후에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축대는 동결 융해로 인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한다.12 : 25 고인돌- 고인돌은 북방식과 남방식이 있다. 북방식은 북부에 나타나고 받침대가 원래는 4개이나 현재는 앞뒤가 없어져 2개만 남아있다. 덮개돌의 무게는 80톤으로 이곳에 묻힌 사람은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로 추정된다.교수님께서 차로 이동 중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셨다. 옛날의 강화도는 상점이름이 개성, 개풍이 들어가는 상호가 많았다. 6.25때 그쪽에서 피난온 사람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대교체로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13 : 03 강화토산품 판매장-흩어져서 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 하였다.14 : 13 강화 풍물시장- 인삼과 화문석을 파는 곳에 도착했다.년수는 인삼의 나이다.화문석은 과거에는 수공업으로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대량생산도 하고 있다. 예전에는 화문석 가격이 매우 비쌋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돗자리가 화문석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대체제가 많기 때문이다.인삼 중 수삼은 땅에서 캔 상태로 바로 먹게끔한 삼이다. 인삼 중 6년근이 꽤 있었는데 사실 6년 키우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6년 키우기 전 땅속에서 썩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4 : 48 김포층 도착- 문수산층이라고도 한다.염하하상에서 10m위에 위치한다.이층에 박혀있는 돌은 모양이 동그랗다. 하천에 의해 침식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다.
- 2010 추계 정기답사 -울릉도 답사 보고서※ 일정 ( 10월 11일 ~ 10월 15일 )10월 11일청주 → 포항 → 도동 → 독도박물관 → 도동 ( 1박 )12일도동 → 성인봉 → 알봉 → 나리분지 → 추산수력발전소 → 섬목 → 천부 ( 2박 )13일천부 → 현포령 → 태하령 → 남양 → 도동 ( 3박 )14일도동 → 울릉도 일주선 → 저동 → 도동 ( 4박 )15일도동 → 전망대 → 청주● 들어가는 말이번 추계정기답사는 울릉도 일대로 가게 되었다. 울릉도는 내가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이다. 때문에 이번에 울릉도 일대를 가면서 가지 않았던 곳을 간다는 설렘에 부풀어 있었다.우선 울릉도는 신생대 제 3기와 제 4기에 걸쳐 진행된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동해상에 있는 화산도로 독특한 화산지형과 해안지형 등 육지에서 보기힘든 자연지리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또 육지와의 격절성으로 인해 육지와는 다른 독특한 인간생활이 표출되고 있어 인문지리학적인 관점에서도 연구 대상이 된다. 이렇듯 독특한 인문 및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울릉도를 이번 기회를 통해 답사하였다.● 첫째날, 10월 11일이른 새벽 4: 41에 버스를 타고 서원대학교를 출발하였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휴게소를 거쳐- 8 : 23에 포항항에 도착하였다.- 9 : 42 포항여객터미널을 출항하였다. 갑판이 없는 쾌속선 Sunflower호를 타고 동해를 향했다. 속도는 45킬로노트로 빠른속도라고 했다. 아마 갑판이없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13 : 00 드디어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울릉도의 날씨는 쾌청하였고 오는 동안 파도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여름성수기가 지났는데도 관광객이 매우 많아 여객터미널 일대는 사람들로 붐볐다.- 14 : 30 숙소에서 나와 독도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서조면암을 보았다. 온도가 낮아 용암이 올라오다가 내려가서 확 식어버려서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현무암에서는 나타나지않는다. 조면암 위에 서식하는 향나무는 1000년이상 된 것이다.- 14 : 38 울릉호텔은옛 군청 소재지였다. 지금은 울릉호텔이 들어서 있지만 시설은 호텔이라는 이름에 전혀 못 미치게 열악하다고 한다.- 14 : 42 울릉중학교를 거쳐 독도박물관으로 오르막길을 오른다.- 14 : 52 드디어 독도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역시 울릉도는 길이 가파르다. 독도박물관에는 독도가 포함되어있는 여러나라의 고지도가 있었다. 우리가 자주 언론이나 책을통해 본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서양최초로 미국포경선이 독도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았다.섬은 사람, 물, 식생 세가지가 있어야 섬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독도에는 이 세가지가 모두 존재한다. 이러한 독도는 광복을 거쳐 건국 초기에 독도의용수비대의 역할로 지켜질수있었다. 그리고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사용 되면서 울릉도 주민이 희생되는 비극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독도는 면적 187544제곱킬로미터에 동,서도 간의 거리는 151m이다. 해양성 기후를 띠며 때문에 겨울에도 강수가 자주내리며 눈도 자주내린다. 최한월 평균기온은 섭씨 1도로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띤다. 독도의 이름은 우산, 삼봉, 가지 , 석을 거쳐 지금의 독도로 불려진다.독도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에는 지하자원이 있다. 독도 밑에는 하이트레이트 고체연료등 지하자원이 다수 산재해 있고 부근 수심 2500m에는 해저심층수가 존재한다.부가적으로 안내원에게서 울릉도 오징어가 맛있는 이유를 들었는데 잡은 후 바로 해풍에 건조하기 때문에 맛있다고 말씀하셨다.이렇게 독도에 대한 얘기와 사진자료 박물자료들을 접하고- 16 : 10 독도박물관에서 하산하였다. 원래 옆에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로 가려했지만 오늘은 보수문제로 운행을 안한다고 했다.- 16 : 13 독도 박물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터의 물에 닿은 돌들은 빨간색을 띠는데 이는 물에 있는 철분 함유량이 높아 그런 것이다. 때문에 물 맛도 쌉싸름하며 마치 철을 핥는 것 같은 독특한 맛이 난다. 이러한 약수터는 남은 답사에도 많이 맛볼 수 있었다. 이 만큼 울릉도에는 제주도와 다르 물이 많은 것이 유명하다. 비가 연중 고른탓이 한몫 한다.- 16 : 18 하산하는 길에는 향나무 조각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울릉도의 향나무는 암벽에서 수천년동안 해풍에 시달리며 돌에있는 수분과 진기를 흡수하여 희귀한 모양, 향기,자색, 향유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를 이용한 조각품이 관광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16 : 36 관입작용에 의해 가운데에 들어온 부분이 보인다. 때문에 가운데 것이 더 강하다.- 16 : 40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 교수님으로부터 항구주변의 상가배열이 어떻게 되어있나 조사하라는 과제를 받았다.내가 조사한바는 이렇다.해안 터미널에 가장 가까운 곳에는 낚시 용품점과 노상횟집 등이 있고 산지쪽으로 바라보면 크게 세갈래의 길이있다. 그중 가장 넓은 가운데 길에는 수협같은 시설이 있고 상업시설은 양 끝의 길에 더 발달 되어있다 특히 산지를 바라볼 때 오른쪽길이 더욱 발달하였고 우리 숙소도 그 길에 있다. 이 세길을 따라 상가가 분포되어있다. 해안과 수직되는 구조다.● 둘째날, 10월 12일- 8 : 05 성인봉을 오르기 위해 아침일찍 길을 나섰다.- 8 : 39 산중턱에있는 집에서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이곳에서 맑은 날 독도가 보인다고 하셨다. 여기선 도동 지역이 한눈에 보이는 데 도동은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와 파여 형성된 곳이다. 단층이 지나가면서 여기만 파인 것이다. 여기서보면 길 3개를 중심으로 식장, 선물가게, 오징어가게등이 분포하는 것을 볼 수있고 주변의 나무는 무화과, 선벗나무, 삼나무, 섬솔나무 등을 볼 수 있다. 섬솔나무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염분을 막기위해 표면 껍질이 거칠다. 그리고 증발을 막기위해 재질은 뺀질뺀질하다.- 8 : 49 독도는 400 ~ 350만년전 신생대 제 3기말에 열점이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울릉도는 250 ~ 200만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화산지역의 족보는 독도→울릉도→제주도→백두산의 순서로 독도가 제일 경사가 가파르고 백두산으로 갈수록 점점 완만해진다.울릉도에서 유명한 약소는 초를 먹고 자라서 약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9 : 30 마가목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고온다습하여 가지가 많이 생긴다 이는 곳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9 : 41 soilcreep을 볼 수 있다. 나무가 꼬꼿하게 서기위해 발생한다.- 10 : 02 산중턱에서 쉬면서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했다. 공기가 맑으니 노래가 더욱 잘되고 기분도 좋았다.- 10 : 49 성인봉을 오르다 보면 사진과같은 나무가 있는 원시림을 만날 수 있다. 원시림은 이곳이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조성될 수 있다. 원시림의 나무는 안이 썩어서 텅비어있으나 고온다습하여 죽지않고 있다.- 11 : 28 드디어 성인봉에 도착하였다. 오는 길이 가파르고 힘들었지만 도착했을때의 보람이란 상당히 좋았다. 옆에서는 지금은 독도경비에 필요한 레이더기지가 있는 말잔등이 보인다. 정말 말잔등처럼 수평하게 정상부분이 되어있다. 성인봉은 외륜산에 있는 984m의 봉으로서 울릉도에서 가장 높다. 전체적으로 날씨는 좋았지만 수증기가 많이 올라와 알봉이 보이지않아 아쉬웠다. 이 곳은 조면암으로 이루어져서 제주도 같은 부석이 별로 없다고 한다.그리고 나리분지를 향해 내려갔다.- 12 : 24 나리분지에 내려왔다. 나리분지는 칼데라로 폭발후 화구함몰에 의해 커졌다.알봉분지는 성인봉에서 침식된 토사로 인해 나리분지보다 조금 더 높다.- 14 : 10 조금 더 걸어 나리동 투막집에 도착했다. 나리동 투막집은 개척당시에 있던 울릉도 재래 형식을 띰으로서 4칸으로 되있고 일자형태로 지어졌다. 겉에는 울릉도의 폭설에도 방간을 이동할수 있게 억새를 이용하여 우데기를 쌓아놓았다.- 14 : 15가는 길에 샛길로 빠져 섬백리향 군락지를 들렀다.섬백리향이란 울릉도의 국화로 향이 백리까지간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꽃이다. 천연기념물 제 52호로 지정되어있다.- 14 : 45 에는 나리동에 있는 또다른 재래형식 가옥 너와집을 갔다. 나무를 쪼개서 지은 집으로 우데기가 아까와는 달리 나무로 되어있다. 굴뚝도 굉히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용출소나리분지는 칼데라가 깨져서 백두산처럼 물이 고이지는 않는다. 대신 칼데라에 내린 비는 이곳 용출소로 나온다 용솟음처 나온다고해서 용출소라 한다. 물이 맑고 수량이 굉장히 많았다. 이물은 추산의 수력발전소로가서 수력발전에 사용된다.- 15 : 49 코끼리 바위, 코끼리 똥 바위 이둘은 원래 붙어있었다. 그증거로 주상절 리가 둘다 옆으로 뉘어져있다. 그리고 추산의 천사바위의 구멍은 조면암이라는 증거가 된다.- 16 : 25 추산 해안도로주상절리, 타포니, 시스텍(공암)이 보였다.- 16 : 50 풍혈화산지형에 많이 있는 냉기가 나오는 곳으로 저동 봉래폭포에도 있다. 음식 등을 보관하고 있다.● 셋째날, 10월 13일- 8 : 38 숙소출발 우리 조는 히치하이킹을 하여 현포까지 갔다. 다른 조보다 일찍 도착해 고분군에가서 있으려 했으나 길을 잘못들어 고분군에 가지 못하고 태하로 가는 언덕에서 합류하였다.- 10 : 32 성하신당에 도착했다. 이곳은 옛 군청소재지이다. 태하의 뜻은 안개가 많이 낀다는 뜻이다. 이곳은 고기잡이하기에는 바람이 강한 곳이라 항구로서 불리하다. 서서히 취락의 규모가 작아지고 있다.- 10 : 43 황토구미에 도착했다. 황토구미는 풍화와 산화로 빨갛게 변한 황토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리의 울릉도 순찰의 증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있다.- 11 : 12 북서풍에 말려들어온 소금(염)이 날려와서 타포니가 생겼다. 이러한 형태를 벌집 타포니라고 한다. 형태가 노란색인걸 보아 지금도 진행중인 fresh한 타포니다.태하령을 걸어 넘었다 산에서 솔섬나무, 섬 잣나무. 너도 밤나무 등을 볼수 있었다. 이 식물들은 일본에 서식하는 식물들로서 울릉도가 일본과 비슷한 기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는 난류인 동안해류가 울릉도 주변을 흐르기 때문이다.- 14 : 14 울릉도는 최소 아홉 번 폭발하였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은 지형에서 볼수 있는데 풀과 불연속면의 반복으로 횟수를 짐작할 있다.
동양사입문>칭기즈 칸중국 역사상 주요 인물이라 생각해보니 얼마 아는 것도 없고 막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역사 中 내가 흥미 있는 분야가 뭘까? 바로 전쟁史이다. 전쟁史를 읽는 재미로 중, 고등학교 시절에 자연스레 교과서와 역사서를 읽고 그 영토확장의 과정과 王朝 교체에서 역사와 지리를 배우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앨빈토플러'가 말하길 "인류 역사 중에서 단 3주만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라고 한다. 인류는 비극적이지만 전쟁을 위한 경쟁과 부국강병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교류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때문에 나는 中國史 中 가장 기억에 남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전쟁의 달인 칭기즈칸에 대해 쓰려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조사를 하고 Report를 쓰며 칭기즈칸을 중국사의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언급하겠다.칭기즈 칸과 그의 부친시대에 점성사들은 천문을 관측하여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고 역사가들도 일월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약 1155년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몽골의 여러 왕자들과 아미르와 귀족들에게는 그의 생애가 72년이었고, 일흔세 살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1155년 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타타르 원정에 나섰을 때, 그의 부인 우렐룬 에케가 칭기즈 칸을 임신했다. 바로 얼마 전에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타타르와 그 군주인 테무진 우게에게 승리를 거두고 적을 눌렀기 때문에, 그것을 상서로운 징표라 생각하여 그 타타르 군주의 이름을 따서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칭기즈 칸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을 때, 부친 생전에 그를 미워했고 은밀히 적개심을 품었던 타이치우트 종족의 수령들, 즉 그의 친족들은 오랜 원한을 드러냈다. 이수게이에게 복속하던 다른 친족과 군대가 그의 자식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타이치우트 쪽으로 기울어 점차 그들과 연합하는 지경물로 강력한 군주였지만 칭기즈 칸과 그의 아버지에게 몇 차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배신하다가 결국에는 칭기즈 칸에게 패하여 도주하다 다른 종족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그는 옹 칸을 죽임으로써 옹 칸의 권좌와 왕국과 재산과 군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해에 그에게 ‘칭기지’(chingizi)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칭기지’라는 말은 ‘막강하고 위대한 군주’를 의미하는 ‘구르 칸’과 같은 뜻이다. 그때까지 그의 이름은 부친이 지어 준 테무진이었다. 점성가들과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그의 帝位의 시작을 이해부터라고 본다. 칭기즈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1207년부터 1209년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탕구트, 즉 서하(西夏)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했다. 전쟁 선포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攻城)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칭기즈칸은 이제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웃딘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1223년에는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 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칭기즈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히말라야 남쪽을 돌아 중국 송나라 영토를 가로지를 생각을 했지만, 더위와 습기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칭기즈 칸은 이해 봄에 인더스 강가에서 귀환했다. 칭기즈 칸은 이해 봄에 자신의 오르두들에 도착했다. 가을에는 여러 차례 그에게 복속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 탕구트 지방으로 출정했다. 그해 겨울 그 왕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두르시게이시를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그 왕국의 시두르쿠라는 군주가 에리카이 시에서 50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나와 전투를 벌였는데, 30만 명이 살해되었다. 칭기즈 칸은 이해 봄에 옹군 달란 쿠둑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병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 있던 아들 우구데이와 톨루이를 불러들여, 그들과 조용히 앉아서 유언을 했다. 우구데이 카안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칭기스 칸은 그가 태어난 해부터 만 72년이던 해 병으로 말미암아 탕구트 지방의 변경에서 사망했다.칭기즈 칸은 생전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서 이들의 도움도 빌렸다. 몽골의 승리만이 상업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기즈 칸에게 넘겨주었으며 오아시스 주민들에게 저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지만 저항할 경우에는 처참한 학살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을 퍼뜨려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었다.그는 무슬림 상인들을 처음에는 첩자로 이용했으며 다음으로는 중재자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신과 지역 통치자로 임명하였다.했던 원 왕조가 명 왕조에 남긴 유산은 상당한 것이었다.'명(明)'이라는 국호에서도 볼 수 있다. 보통 중국인들이 세운 왕조의 국호는 주로 지명에서 따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한(漢)의 경우 한수 유역에서 발흥하였기 때문에 국호 역시 그에 따랐고, 당(唐)의 경우 이연이 북주로부터 당 지역의 제후로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국호 역시 이연이 책봉 받은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10세기 이후 비중국계 왕조들의 경우, 지명이 아닌 금(金), 원(元), 청(淸) 등의 국호를 사용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점령한 이후 오왕(吳王)이라 칭했지만 황제를 선포한 이후 명(明)이란 국호를 택했다. 명이라는 국호가 홍건적들의 배후 사상인 백련교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지배적 주장이지만, 지명으로 국명을 하던 중국인 국가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명이 비중국계 국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지방제도에서도 원의 제도를 계승한 점이 드러난다. 원은 중국의 각 지방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두고 황제의 행정감찰관료인 다루가치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행성 체제는 명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지방 행성의의 권력이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로 배분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군제에서도 몽골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명의 병제는 위소제(衛所制)인데 일종의 세습적인 모병제라고 할 수 있다. 군호의 편성에 있어서 100호, 1000호 등의 십진법 체제를 활용하였는데 이는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의 십진법 편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북경은 칭기즈 칸 시기 대대적인 파괴가 있었지만, 원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명실상부한 대원제국의 중심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쿠빌라이는 파괴된 북경을 복원하고 화려한 궁궐을 짓는 한편, 북경이 수도로써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었다. 그것은 조운체제를 정비한 것인데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북경으로 운송시키기 위해 대운하를 정비하고 궁궐까지 운하가 들어올 수 있도록 적수담을 만들었다. 명 시대의 북경은 원 시대에 이미 구축된 체이라 불리는 해상 원정이다. 정화의 해상원정에는 여러 원인이 제기되고 있다. 영락제가 찬탈한 조카 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한 이유, 동남아의 부를 얻고 싶어한 영락제의 사욕 등 논란이 분분하다. 현재로써 가장 설득력이 높은 가설은 명의 영향력을 인도양 일대까지 넓히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는 몽골제국을 계승하여 명을 세계 제국으로 만들려는 영락제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진다.몽골의 영향은 우리문화에도 깊숙이 남아있다. 족두리, 연지가 몽골에서 들어왔고 '수라'도 몽골어이다. 임금의 식사에 자주 오르던 맥적(貊炙)이라는 불고기가 있다. 이것은 '맥족이 불에 구워먹는 고기'라는 뜻인데 '맥족'은 몽골로이드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요즘 서울의 몽골식당에서 볼 수 있는 몽골리안 바베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은장도도 몽골에서 유래했고, 귀걸이를 할 때 귀를 뚫는 것도 몽골 여인네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몽골의 영향력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려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몽골제국이 이렇게 세계를 재패하고 경영하며 이슬람, 중국, 우리나라, 그리고 유럽에 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는 몽골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 가족 가축과 함께 이동해 보급로가 따로 필요 없는 전선 형성 등 독특한 전술운영을 했던 몽골군은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추었었다.하지만 책을 읽고 조사를 하며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칸 군대는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활용하였다. 호레즘왕국의 변방 오트라르에서 몽골 상인들이 학살당했을 때 칭기즈칸은 『그들의 머리에 달려 있는 머리카락 숫자만큼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닛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학살의 소문은 다른 전투에서 적의 군사들로 하여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바그다드를 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