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1장에서는 왜 핵심에 집중해야 하는가를 실패 사례 제시를 통해 주장하고, 이 책의 접근법에 대해 말한다.2장에서는 핵심 사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그리고 핵심 사업으로부터 충분한 잠재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3장에서는 우리가 '인접 영역으로의 확장'이라고 부르는 주제, 즉 핵심 사업 주변의 새로우면서도 그 사업과 관련된 사업군으로 이동하는 문제에 대해 다룬다.4장에서는 특히 산업의 격변에 직면했을 때 핵심 사업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5장에서는 성장 전략을 개발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성공요인 일관된 원칙"핵심에 집중하라" "인접 사업으로 확장하기 전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쟁력이 확고한 핵심 사업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먼자 이 핵심 사업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다록 해야 한다."대부분의 대박형 사업은 오래가지 못하여,수없이 많은 경영 관련 서적에 성장과 가치 창조를 이룬 사례로서 등장했던 기업은 전체 기업 수에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차세대 유망 산업을 선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보다 전략,경쟁부문,재투자율,그리고 실행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발견하게 된다.유망업종으로 투자를 확대하는 것 보다 단일 핵심사업에 자원을 집중 투자하는 것이 지속적 성장을 유지하기 지름길이다.핵심 세가지1) 핵심 사업과 그 경계의 개념2) 모든 사업 부문은 대부분의 회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3) 낮은 성과 원인은 전략적 차원에서 부터 실질 집행을 위한 조직의 능력을 결정하는 리더쉽까지 여러 차원 걸쳐 있다.[1장 필사적인 성장추구]핵심사업을 파악하기 위해 다음 5가지 자산이 있는 지 확인하라.1) 잠져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단골고객2) 가장 차별화되고 전략적인 능력3) 가장 결정적인 제품 매출4) 가장 중요한 유통경로5) 특허,브랜드,네트워크 등"귀사가 경쟁하고 있는 사업의 정의는 무엇입니까?""귀사의 핵심사업은 무엇이고 잠재적인 경보비용이 특히 높은 사업모델에서 기회가 발생한다.핵심을 재정의하기 위한 조직정비- 가격결정: 새로운 모델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격전략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인사: 새로운 핵심 모델은 신생사업이 갖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우수한 경영자를 필요로 한다.- 보상: 새롭게 정의된 모델에서 보상체계는 기존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 유통망: 기존 유통망과 경쟁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 성공기업들은 핵심을 재정의해야 한다..[5장 핵심으로 부터의 성장]'손자병법' , "기회를 많이 잡을 수록,내 앞에 더 많은 기회들이 열린다." 성장전략의 핵심이며 더욱 큰 성공을 만들어내기 위해 핵심을 유지하는 것과 더 많은 인접영역으로 이동하는 결정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나타낸다.[역자후기]'핵심으로 부터 이윤을 창출하라'는 말은 한국적 토양의 말로 '한 우물을 파라'이다..세계 주요 기업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성과를 내는 기업은 한개,혹은 많아야 두개의 핵심 사업에서의업계리더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핵심사업을 기반으로 새로운 고객,유통,제품,응용 분야로 연장함으로써 핵심사업을 강화하면서 단계적으로 인접영역으로 진출해 갔다.핵심이란 현재 그 회사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회사의 장래모습과 성장과정을 결정하는 일련의 제품,무형자산,고객,유통망,지역적 기반을말한다.지침1) 원래의 핵심 시장에서 시장지배력을 구축하고이를 통해 핵심사업 또는 그것이 속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2) 핵심사업의 논리적인 연장선상에서 핵심 사업을 다시 강화해주는 인접영역으로확대하라는 것이다.핵심사업을 강조하는 이유는 수익성 면에서 가지는 핵심사업의 중요성이다.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는 기업은 대부분 자신의 핵심 상품시장에서 1,2등의 시장점유율을보유한 기업이라는 점이다.초우량 기업은 자신의 경쟁기업에 비해 최소2배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가지는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한우물을 파라. 그리고 우물을 추가하여 더 파라면 원래 우물과 가까운 곳에 파라는 주장.1. 업과 관련된 사업군으로 이동하는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한다. 여기에서 성장의 두번째 역설이 등장한다. 즉, 핵심 사업이 강력할수록 수익성 있는 인접 영역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커지는 동시에 사업의 초점을 잃게 될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가장 성공적으로 지속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기업은 거의 항상 한두 개의 강력한 핵심을 중심으로 일련의 인접 영역을 정기적이며 조직적인 방법으로 확장하는 유형을 따르며, 이 유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중앙에서부?방사선 모양으로 확장하며 핵심을 강화시킨다. 핵심 사업을 보호하고 그에 투자하는 것과 인접 영역으로 확장하는 선택 사이에는 근본적인 긴장이 존재한다. 기업이 이 긴장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종종 기업 성장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4장 딜레마의 재정의산업의 격변에 직면했을 때 핵심 사업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재정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서술한다. 여기에서 성장의 세번째 역설이 등장한다. 즉, 강력한 핵심 사업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고 인접 영역의 확장에도 성공을 거둔 경영진은 산업의 격변에 가장 취약하다는 역설이다. 산업의 격변은 경영자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의사 결정 시간은 단축되고 있으며, 불확실성은 증가하고 있고, 전략적인 선택의 폭이 확대되고 있다. 경영자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변화들은 그들의 핵심 사업에 대한 부분적인, 혹은 근본적인 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조직과 성장 전략 간의 밀접한 연관에 대해서도 고찰한다.5장 핵심으로부터의 성장성장 전략을 개발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성장의 네번째 역설이 등장한다. 즉, 모든 뗍汰?성장을 저해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경영자들에게 핵심 주제는 기업의 전략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조직이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도 조직이 그것을 소화해서 수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반대로 좋은 조직은 조금 설익은 전략이라도 것입니다. 즉, 초점을 맞추는 영역이 구체적일수록 비즈니스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커진다는 것이죠. 저자는 소니나 인텔의 예를 들면서 충성 고객 확보나 유통망에 대한 투자, 제품 차별화 등을 통해 성과가 높은 핵심 사업을 더욱 강력하게 만듦으로써 비즈니스의 발전 및 성장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물론 이 책이 신규 사업으로의 다각화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핵심 사업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접 영역으로의 확장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즈니는 만화영화라는 강력한 핵심 사업을 기반으로 놀이 공원, 출판, 음반, TV, 홈비디오 사업 등 인접 영역에서 강력한 사업군을 구축했습니다.이 책의 논리가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동안 문어발식 확장이 당연한 기업 성공 전략이며, 핵심영역에 머무르는 기업은 나태하게 안주하는 것으로 치부 했던 우리나라 경영자들이 간과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은 기업의 핵심사업이 무엇이며 잠재적인 경쟁 우위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핵심 사업의 잠재력을 100퍼센트 활용하였는가를 냉정히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결국 이 책이 제시하는 구체적 지침의 첫째는 우선 원래의 시장에서 시장 지배력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핵심 사업 또는 그것이 속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갖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관련 영역으로의 확장, 즉 다각화 경영도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둘째 지침은, 핵심 사업의 논리적인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핵심 사업을 다시 강화해주는 전제 하에 인접 영역으로 확대해 나가라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저자가 말한 10가지 주요 경영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핵심사업을 엄격하게 정의하고, 그것에 대한 집중 정도를 결정한다. ② 핵심사업의 경계를 인식하고, 그것의 변화를 예상한다. ③ 핵심사업의 장기적인 잠재 경쟁자를 파악한다. ④ 핵심사업의 잠재적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는 전략과 운영능력을 보유한다. ⑤ 핵심사업장이다. 핵심 사업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다음의 5가지 자산이 있는지 확인하라.- 잠재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단골 고객- 가장 차별화되고 전략적인 능력- 가장 결정적인 제품 매출- 가장 중요한 유통 경로- 위 항목에 도움이 되는 기타 전략적 자산(특허, 브랜드 네임 등)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팅을 시작할 때는 가장 먼저 "귀사가 경쟁하고 있는 사업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귀사의 핵심 사업은 무엇이고 잠재적인 경쟁 우위의 원천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위의 5가지 차원 각각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어떤 회사에 있어서는 핵심 사업을 정의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반면, 어떤 회사에서는 극도로 까다로운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가능한 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질레트의 경우 핵심 사업은 남성용 면도 제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질레트의 이 사업 분야는 1910년 시점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가장 수익성 있는 분야였으며, 현재에도 그렇다. 이 핵심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고정밀 소형 제품을 제조하는 전문기술, 날을 세우고 처리하는 기술의 숙련도, 노련한 브랜드 관리 등 심화된 핵심 역량을 포함하고 있다.하지만 AOL, 타임워너, 3M, 비방디, 유니버설, 제너럴 일렉트릭, 타이코 등의 회사에서는 핵심 사업을 정의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들 회사는 예외에 속한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고도로 복잡한 거대 복합기업에 가까운 회사들은 지속적인 가치 창출 기업의 순위에 오르지 않는다. 잭 웰치의 지휘를 받았던 GE는 분명한 예외이다. 대부분의 복합 기업은 하나 이상의 강력한 핵심 사업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다. 우리가 뽑은 지속적인 가치 창출 기업 중에서 복합 기업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이는 사업의 다각화에 관한 과거의 많은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가장 강력한 성과를 내는 기업들은 놀랍게도 1개, 혹은 많아야 2개의 핵심 사업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같다.
박물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성형영 지음① 한문장지은이가 여행을 하면서 박물관과 유적?유물에 대하여 소개하고, 박물관에 가는 방법을 말해준다.② 한단락지은이가 여행을 하면서 유네스크로 지정된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다. 세계적으로 보존해야할 유네스코 유산과 달리 과거에 허름한 것을 개조하여 새로운 미술관을 만드는 것도 있었다.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과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이 유명한 작품들의 진짜와 가짜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미이라와 미이라 이전의 진저맨과 링도우맨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박물관에 가는 방법은 따로 없다. 박물관의 유물들을 자기의 다양한 해석에 있다고 본다.③ 4~5단락박물관은 그리스 신화에 유례하여 당시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물들이 그곳에 집결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을 쓴 지은이는 여행을 하면서 박물관의 유적과 유물들을 상헤히 설명을 해주고 있다. 유네스코는 3가지로 분류하는데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유네스코로 지정된 세계유산이 있다.유네스코와는 차이가 있지만 보충해야할 유산이 있다. 옛것을 허물고 현대식의 새것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데이드 모던이다. 과거 뱅크사이드 발전소였지만 현재 데이트 모던이라는 현대식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밖에 파리역을 오르세이 미술관으로 또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바호프 현대미술관 역시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이 책은 여러작품을 소개해 주는데 미켈란 젤로의 조각상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 슬픔을 표현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어머니를 빨리 잃은 미켈란 젤로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다.이집트에서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 미이라가 최초라고 하지만 이전에 과학적인 평가로 진저맨과 린도우맨이 발견되었다. 이 진저맨은 신앙을 믿었던 시기의 인간으로 하여금 제물을 받쳐졌을 거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지금 널리 알려진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최고의 작품이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이다. 이 모나라자는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정말 많은 복제와 진짜라고 판단되는 가짜들이 많이 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오벨리스크는 뺏고 뺏기는 즉 소유권이 없는 유물들이 많다. 오벨리스크는 바티칸 광장의 교회를 알리는 탑으로 유명하다.박물관에 가는 방법은 100가지가 있다. 그것은 유물을 보는 방법에 옳고 그른것이란 있을 수 없다. 바람직한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이 100가지 방법인 것이다. 박물관에 갈 이유가 없다면 우선적으로 이유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듣고 보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만의 다양한 해석이 필요하다.④ 질문하기1. 박물관은 어떻게 생겼는가?2. 문화우산으로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이 있고 기록유산으로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등 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등록되어 있다. 왜 이런 것이 유네 스코로 지정되었을까?3. 데이트 모던처럼 왜 옛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만들었을까?4. 오벨리스크란 무엇인가?5.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은 과연 진짜일까? 가짜일까?가짜라면 왜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⑤ 질문에 답하기1. 박물관은 무제이온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문예?미술?음악?철학 등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뮤즈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그 제례에 회화와 조각품들이 헌정되고 각종 공연 예술이 펼쳐지는 등 당시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물들이 그 곳에 집결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박물관으로 해석한다.2. 인류 전체를 위해 보전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유산에 대해 세계 유산으로 지정해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각 나라별 유산보고 활동을 고무하고 있기다. 우리나라의 유산들도 이렇게 보호 받아야 되기 때문일 것이다.3. 물론 옛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시대 건축적 업적 위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덧붙여서 변화를 준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적 특징이 미술관 혹은 박물관의 성격과 그다지 어긋나지 않거나 오히려 돋보이게 하여 특유의 장점으로 만든 것이다.4. 오벨리스크는 파라노의 신전을 지키던 수호탑이다. 이집트 어로는 보호 또는 방어의 뜻으로 당시 이집트인들은 하늘을 찌르는 듯한 형상의 이 돌탑이 악이 덩어리인 구름을 뚫어 그 악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한다. 바티칸 광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워 십자가를 달아 교회임을 알리기도 한다. 라폴레옹이 좋아했던 탑이기도 하지만 소유권을 놓고 많은 문제가 있기도 하였다.5. 물론 진짜도 많지만 박물관에도 가짜가 있다고 한다. 진짜인체 위장하고 있는 가짜 또는 가짜임을 분명히 밝힌 진짜를 흠모하는 진지한 가짜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모방과 복제인데 이는 전시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가짜가 진짜처럼 위작의 경우도 있어 다른 곳에 팔리기도 한다. 가짜가 좋은 곳에도 쓰이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하니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⑥ 리뷰쓰기초·중·고 12년 동안 박물관 한번 안가봤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교과과정에서 문화 유적을 탐험하는 내용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이라는 것은 예전에 전해지던 유물들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것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나의 어린 생각을 반성하듯 박물관 그 이상의 내용들이 담겨 있다.우선 박물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자. 박물관은 무제이온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문예·미술·음악·철학등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뮤즈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그 제례에 회화와 조각품들이 헌정되고 각종 공연 예술이 펼쳐지는 등 당시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물들이 그 곳에 집결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박물관으로 해석한다.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로 지정된 세계 유산이 있는데, 유네스코는 3가지로 분류한다.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이 있다. 문화유산으로 우리가 잘 아는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등이고 기록유산으로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등록되어 있다. 왜 이런 것이 유네스코로 지정되었을까? 인류전체를 위해 보존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유산에 대해 세계 유산으로 지정해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각 나라별 유산보고 활동을 고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유산들도 이렇게 보호 받아야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꼭 이렇게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박물관에 있어야만 다 보전해야할 가치 있는 유산이 아니다. 그 예로 데이트 모던이다. 산업 시대에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개조하여 만든 데이트 모던은 이곳 현대 미술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처럼 폐기 직전의 공간을 현대식으로 바꾼 것이 여럿 있는데 파리역을 오르세이 미술관으로 또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 역시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왜 옛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만들까? 물론 옛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시대 건축적 업적 위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덧붙여서 변화를 준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적 특징이 미술관 혹은 박물관의 성격과 그다지 어긋나지 않거나 오히려 돋보이게 하여 특유의 장점으로 만든 것이다.이 책은 설명과 함께 이해가 잘 되도록 그림을 넣어 보기가 좋았다.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이 몇 작품 있었는데 피에타가 그 중 하나이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조각상으로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 더 이상 슬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실체 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묵념하듯 읽어 내려갔다. 놀라운 것은 조각으로 된 이 작품을 이렇게 섬세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눈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이 조각이 인상이 깊었다. 또 하나 슬프고도 무서웠던 것은 미이라와 진저 맨 그리고 린도우 맨 이다. 끔찍했던 해골들이 사연을 알고 나니 불쌍하게 되었고, 죽음에 관한 내 생각도 잠시 해 보게 되었다.
동북공정(東北工程,East-North Project)-진실 혹은 거짓 -【목차】Ⅰ. 서론Ⅱ.동북공정의 의의와 내용가. 동북 공정의 뜻나. 동북 공정의 내용Ⅲ. 동북 공정의 추진 배경가. 중국의 민족적 특성(중국의 특수성)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다. 조선족들에 대한 불안감 급증Ⅳ. 동북 공정의 목적가.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 주권 확보나. 북한 붕괴 시 연고권 주장 및 통일 후 영토 분쟁에 대비다. 한반도 영토의 중국으로의 통일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Ⅴ. 동북 공정의 쟁점가. 건국과 영역나. 조공 문제다. 종족 문제라. 수 ,당과의 전쟁마. 계승 문제Ⅵ. 동북 공정의 문제점Ⅶ. 동북 공정에 대한 우리의 책임가. 사례① - 환단고기나. 사례② - 목이 잘린 단군상Ⅷ. 동북 공정의 대응 방법가. 현재의 대응 현황나. 향후의 대응 방안(1) 학계의 대응 방안(2) 정부의 대응 방안(3) 시민사회의 대응 방안Ⅸ. 결론Ⅹ. 참고문헌Ⅰ. 서론동북공정은 그동안 언론 매체를 타고 국내에 널리 보도되는 바람에 우리 국민에게 아주 낯익은 단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게 된 배경과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동북공정이 어떻게 해서 추진되었고, 또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은 현재 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그 바람직한 방안에 대해 연구해 보자.※ 다음 사진은 미국의 유명한 미니애폴리스 예술 박물관에 게재된 세계지도 중 일부 이다.옛 고구려의 영토를 중국의 영토로 표기 하고 있다. 이 지도를 통해 많은 나라가 고구려는 중국의 영토라 고 착각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역사의 왜곡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Ⅱ. 동북공정의 개념1) 동북 공정의 의의동북공정은 동북 변강 역사여 현상 계열 연구 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동북 변강 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로 해석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으로 국경 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설립한 것이다. 이후 중국은 1989년 동구권이 변화하고,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면서 국경 지방의 소수민족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이후에는 동북지방에 대한 관심은 더욱 각별해진다. 때문에 한국인들이 이 지역을 방문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한국 역사와 관련된 발언을 했을 때 매우 긴장하였으며, 한국인들의 출입을 감시하고 통제하기도 하였다.한편 중국 당국은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며, 조선족들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이 대거 중국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빚어지자, 중국은 급기야 동북 지방의 정체성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편,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중국은 탈북자들에게 난민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만약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했을 경우 더욱 많은 탈북자들이 발생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즈음 중국은 동북 지방의 연구기관들을 통해 동북 지방의 역사와 지리 및 민족 문제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보고,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연구결과들이 활발하게 발표되었던 것이다).◎ 관련기사 - [경향신문], 2004-08-15일자,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32&article_id=0000079838§ion_id=102&menu_id=102Ⅳ. 동북 공정의 목적)중국은 요동칠 가능성이 높은 동북(東北) 및 서북(西北)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동북공정’과 ‘신장(新疆)항목’이라는 2대 연구 프로젝트를 만들어 차근차근, 그러면서도 치밀하게 역사를 왜곡해 나가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실적 정치적 계산과 필요에 따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반론 :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고조선 ,부여 ,예맥 등 고구려에 선행하는 역사는 명백한 우리 역사이다. 현재 자국 영토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 역사까지 모두 자기네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한사군의 실체와 성격에 대한 중국 측 주장은 일방적인 것이다. 실상은 고조선과 한(漢)나라의 변경에 있었던 국경 분쟁이며 현도군은 광역의 식민지 군현으로서 기능했다기보다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창구의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발원했다.2) 조공문제○ 중국의 주장 :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다.주몽의 건국 이래 고구려 현은 이미 한(漢)의 현도군에 속했다. 동한(東漢) 180년 동안 고구려는 모두 동한 왕조의 신하였다. 220년부터 426년까지 고구려는 중국 중앙 정권의 신하로 예속되었다. 남북조 시기에는 북위, 북제 및 남조의 각 정권에 공물을 바쳤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속국 이었다.○ 한국의 반론 : 명백한 독자 국가였다.조공은 외교 형식에 불과했다. 광개토 대왕비에 나타나는 천하관은 고구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백제, 신라, 왜도 조공 관계였음에도 고구려만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주장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 고구려가 영락, 영가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도 중원의 조공 국이 아니라 중원 왕조에 대응하는 독자적 국가였음을 말해준다.3) 종족문제○ 중국의 주장 : 고구려 민족은 중국 소수 민족의 하나이다.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는 모두 중국의 각 종족에 융화되었다.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들만 신라로 넘어갔다. 오늘날 한(韓)민족의 선조는 주로 고대 삼한(三韓) 곧 신라인이고 조선 반도로 옮겨간 중국의 각 종족도 상당 수 섞여 있다. 고구려의 후예는 극소수이다.○ 한국의 반론 : 우리민족은 한족문화권과는 구별되는 동방 문화권을 이룩한 별개의 민족.고대 중국은 자기네 민족만 중화로 부르고 나머지는 동022&aid=0000045901Ⅵ. 동북 공정의 문제점)동북공정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동북공정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 중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 등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연구들이 한국사를 크게 왜곡 또는 말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보아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는 견해를 계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동북공정은 바로 이러한 주장을 중국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며 본격적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중국은 고구려 사 뿐만 아니라 고조선 사·부여 사·발해사 까지도 한국사의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있는데, 이렇게 된다면 한국사는 신라와 백제로부터 시작되어 시간적으로는 5,000년에서 2,000년으로 축소되고, 공간적으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한강(漢江) 이남지역으로 축소되게 되어 한국사의 근간이 크게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중국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국사를 침탈하는 것이며, 한국 문화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특히 동북공정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었던 모든 나라들을 중국 역사 속에 강제로 편입시킴으로써 영토와 역사를 동일시하고 있고, 심지어는 사료를 임의로 삭제하고 첨부해 주변국들의 역사를 말살(抹殺)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리고 중국은 한족을 중심으로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건국 초부터 소수 민족의 독립을 막고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한족과 소수 민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동운명체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들고 나와 지나칠 정도로 배타적 애국주의와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고 보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어 주변국들을 긴장시키고 있다.Ⅶ.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책임)우리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환단고기몇 년 전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기록을 갖고 우리 학계 스스 이 서사시를 단순 이야기이고 노래이고 아킬레우스의 분노정도 헬렌의 처사를 노래하는 전설 정도로 생각했으나, 1873년에 3천 년 전의 거대한 트로이 궁전이 엄청난 보물과 함께 지상으로 신화가 아닌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나타났다. 또, 중국 진나라 진시황제의 기마 군단이 1977년 한 농부의 손에 이끌려 엄청난 세력으로 현실의 역사 앞에 나타났다.단지 우리는 고조선 시대의 신화와 같고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을 역사의 현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민족의 저력이 없는 것뿐이다. 간혹 단군 영정이 ‘ 우상이니 아니니’ 라고 소모성 논쟁을 보면, 그들은 뿌리의 근거가 어디인가 라고 의문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민족의 태동기에 있었던 사실이다. 단지 기록문화의 후진성 때문에 논리성과 진실성에대한 의혹을 가져 다 주고 있을 뿐이다.Ⅷ. 동북 공정의 대응방안‘동북공정’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하기 위한 역사 왜곡은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 왜곡 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중에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왜곡은 중국의 정부 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훨씬 크다. 더구나 고구려 역사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 사까지 왜곡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 밖에 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1. 현재의 대응 현황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이나 동북아 전략을 꿰뚫어야 동북공정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의 대응 현황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인상이 짙다. 정확한 좌표 설정이 없고 장기적인 대안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한마디로 무대책 · 무대 응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을 얕잡아 본 중국은 이제 동북공정·백두산 공정에 이어 이어도 문제까지 들고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까지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 현황을 살다.
천안문사태와 파룬궁목차Ⅰ.서론1.천안문사태란 무엇인가?가.1차 천안문사태나.2차 천안문사태2.파룬궁과 리훙즈Ⅱ.본론1. 천안문사태가. 1차 천안문사태-1차 천안문사태의 역사적의의-1차 천안문사태 발발이후의 중국의 정세나. 2차 천안문사태-개혁개방 이후로 나타나는 정치개혁의 물결-민주화시위에 맞선 중국 공산당 정부의 강경대응2. 파룬궁가. 파룬궁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나. 파룬궁에 대한 국제사회의 입장Ⅲ.결론천안문사태와 파룬궁 탄압에 나타나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인권탄압Ⅳ. 참고문헌 및 인터넷 참고 사이트Ⅰ.서론1. 천안문사태란 무엇인가?가. 1차 천안문사태중국 혁명영웅을 기리는 청명절(4월 4일)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故 주은래 수상을 추모하는 수천개의 화환들이 놓이고 군중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날 밤.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강청 등 ‘4인방’의 지시로 천안문 광장에 놓여있던 수천개의 화환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장에서 화환을 지키고 있던 57명이 체포되자 1976년 4월 5일 이른 아침 분노한 수만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이들은 그동안 주은래를 기리며 ‘4인방’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던 사람들이었다. 흥분한 이들은 공안부 건물에 침입해 건물과 인근에 있는 자동차를 방화하는 등 십수시간에 걸쳐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이에 대해 당국은 수백명의 비무장병을 동원, 북경의 각 정부기관 경계에 들어갔다. 밤이 되자 대기하고 있던 민병 1만명과 공안 경찰 3천명, 인민해방군 부대가 곤봉과 혁대를 손에 쥐고 일제히 출동했다. 광장에 남아 있던 군중은 포위되었고, 포위망은 점점 압축되었다. 마구 얻어맞은 군중은 차례차례 쓰러져, 15분 후 광장 돌바닥 위에는 엄청난 양의 피가 낭자했다. 이것이 중국 전역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천안문 사태’였다.이 시위는 주은래 사후에 시작된 주자파(走資派) 비판 캠페인에 대항하는 대중의 반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나. 2차 천안문사태1989년 6월 3∼4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을 결의한 이래 농업생산책임제 도입, 기업자주권확대,경제특구 설치, 합영사업 인가 등 서구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경제적 자유·개방의 폭을 확대해 나갔으나 정치개혁은 상대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그 결과 공산당의 부정부패, 급증하는 인플레이션) 과 소득격차에서 오는 불만감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1989년 4월 15일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전(前)당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사망하자, 베이징대학[北京大學(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을 찬양하고 보수파를 비난하는 대자보) 가 붙기 시작하였다. 그 뒤 베이징과 상하이[上海(상해)]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전개되고, 22일 거행된 후야오방의 장례식에는 수십만의 학생과 시민이 참석하여 본격적인 민주화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내 보수파는 개혁파 당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조자양)]을 축출하고, 강경파인 리펑[李鵬(이붕)]이 정정(政情)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의 시위는 중국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상하이·선양[瀋陽(심양)]·장춘[長春(장춘)]·장사[長沙(장사)] 등으로 확대되자 강경보수파는 5월 19일 전격적으로 베이징에 군을 투입하고 20일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 을 선포하였다.그러나 시민·학생들이 이를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하자 덩샤오핑은 이를 체제도전으로 간주,6월 3일 제27군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개시했으나 1백만 시민의 육탄저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10시부터 탱크·장갑차를 앞세워 시위군중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무력진압을 강행하여, 4일 오전 5시 계엄군은 천안문광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1400여 명의 사망자, 1만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의 결과 중국은 서방측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강경보수파의 권력장악으로 자유·개방 정책이 후퇴하게 되었다.2. 파룬궁과 리훙즈1992년 중국 리훙즈[李洪志]가 창시한 기(氣) 수련법 또는 수련 단체로 물질한 수련법에 따라 몸과 마음을 닦게 되면 몸에 공력이 생겨 더욱 높은 단계로 올라가게 되고, 그러다 자동적으로 내공을 지속시킬 수 있는 법륜의 단계에까지 이르면 병을 고칠 수도, 체내 조직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수련법은 리훙즈의 저서인 《전법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리훙즈 자신이 '파룬궁은 종교가 아니며, 정치에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파룬궁의 성격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게 내려져 있지는 않은 상태다.파룬궁은 이미 세계 40여 개 나라에 전파되었고, 현재도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리훙즈는 현재 미국에 이민했으며, 중국 정부의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다.그는 홍콩 시사주간지 《아시아 위크》 2001년 6월 1일자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되었고, 파룬궁과 함께 2001년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Ⅱ.본론1. 천안문사태가. 1차 천안문사태중국 역사에서 천안문 사태라 함은 1차 천안문 사태 즉,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에 있었던 대중반란과 2차 천안문 사태 즉,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을 말한다.중국 문화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의 풍조와 마오쩌둥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 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베이징[北京]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톈안먼 광장에 이징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 )이라 하여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과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분명하게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였으며, 덩샤오핑[鄧小平: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으로 해서 화궈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나. 2차 천안문사태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天安門(천안문)]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등으로도 불린다.1978년 12월 중국은 공산당 제11기 제3차중앙위원회전체회의(3中全會))에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을 결의한 이래 농업생산책임제 도입, 기업자주권확대, 경제특구 설치, 합영사업 인가 등 서구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경제적 자유·개방의 폭을확대해 나갔으나 정치개혁은 상대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공산당의 부정부패, 급증하는 인플레이션과 소득격차에서 오는 불만감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1989년 4월15일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전(前)당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사망하자, 베이징대학[北京大學(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을 찬양하고 보수파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였다. 그 뒤 베이징과 상하이[上海(상해)]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전개되고, 22일 거행된 후야오방의 장례식에는 수십만의 학생과 시민이 참석하여 본격적인 민주화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내 보수파는 개혁파 당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조자양)]을 축출하고장춘[長春(장춘)]·장사[長沙(장사)] 등으로 확대되자 강경보수파는 5월 19일 전격적으로 베이징에 군을 투입하고 20일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시민·학생들이 이를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하자 덩샤오핑은 이를 체제도전으로 간주하여, 6월 3일 제27군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개시했으나 1백만 시민의 육탄저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10시부터 탱크·장갑차를 앞세워 시위군중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무력진압을 강행하여, 4일 오전 5시 계엄군은 천안문광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1400여 명의 사망자, 1만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의 결과 중국은 서방측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강경보수파의 권력장악으로 자유·개방 정책이 후퇴하게 되었다.2. 파룬궁가. 파룬궁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1992년 5월, 중국 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1,900개의 지부, 2만 8천 개의 수련장이 세워졌고, 1억 명이 넘는 수련자들이 생겨났다. 이렇듯 파룬궁 수련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중국 정부는 1999년 7월, 산하 조직을 불법화하고,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는 한편, 파룬궁을 단순한 사교집단으로 몰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이후 파룬궁 지도부 70여 명이 검거되고, 베이징에서만 1만 명, 중국 전역에서 3만여 명에 달하는 수행자들이 구금되는 한편, 2001년 현재까지 237명이 목숨을 잃고, 600여 명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히는 등 법륜공의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중국 정부의 강경 대처는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나. 파룬궁에 대한 국제사회의 입장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중국 정부의 이러한 조처가 파룬궁의 정치세력화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과 함께 톈안먼[天安門]사태 이후 최대의 인권탄압으로서, 언론자유 및 종교·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라고 비판함으로서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있는 상태다. 특히 미국은 중국의 법륜공 탄압을 강력 비난하면서 국제연합을 통해 중국 하였다.
목 차1. 서 론1-1.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21-2. 그들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 22. 본 론2-1. 조선족의 역사 ---------------------------------- 31) 조선족의 형성과정 ---------------------------------- 32) 조선족의 분포특징 ---------------------------------- 42-2. 조선족의 정체성 -------------------------------- 51) 국가의식 ----------------------------------------- 52) 민족의식과 모국의식 -------------------------------- 62-3. 조선족의 중국내 위상과 지위 --------------------- 81) 조선족의 국가주인적인 권리 --------------------------- 82) 조선족의 중국내 지위 -------------------------------- 92-4. 조선족이 바라보는 우리, 우리가 바라보는 조선족 --- 103. 결 론 (상생방법) ------------------------------ 11◈참고문헌 ---------------------------------- 131. 서 론1-1.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중국 동북(東北) 지방의 요녕(遼寧)·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 등 삼성(三省)과 그 밖의 중국 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족(韓族)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들을 말한다. 한말(韓末)에 외세의 침노로 한국의 국권이 흔들리면서 나라 안팎이 어지러워지자,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동북 지방과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이주해 가는 한국교포의 수가 갑자기 늘어났다.이 유민의 대열에는 조국 광복과 국권회복을 다짐하며, 독립투쟁을 하기 위하여 조국으로부터 망명해 가는 독립운동가도 많았다.8·15광복으로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에는 본국에 생활근거가선조의 북방관리들이 은연중에 조선인들의 도강을 종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1886년 전후하여 간도의 조선이민의 수는 이미 10만명에 이르고 있었다.)20세기초에는 조선족이 대거 이주하였는바, 그 이유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빚어낸 경제적, 정치적 도피가 주요 요인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조선족의 이주는 급격히 증대되어 1910년에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이주인구는 약 22만명, 1920년에는 약 45만 9천여명, 1930년에는 60만여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5년 해방 당시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 인구는 동북지방에 약 160만, 기타 지방에 약 10만이었고, 이후 수년에 걸쳐 약 70만이 여러 경로를 통해 한반도로 귀환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한반도로 귀환한 이후 잔류한 조선족들의 상당수는 국공내전 기간 공산혁명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후 잔류한 100만 조선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에 의거하여 56개 민족의 한 성원이 되어 중국의 공민으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2) 조선족의 분포특징①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었다.중국조선족은 98%이상의 인구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집중되어있고 구소련의 조선족은 99.5%의 인구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4개국에 분포되어 있다. 재일조선인은 주로 서해안지역과 훗카이도에 분포되어 있다. 조선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족이 벼농사를 짓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 후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대소하천유역과 평원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했기에 조선족들은 민족 향심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주요 동북3성*ㆍ길림성: 약 118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요 거주 지역으로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및 연변, 길림, 장춘 등 지역에 밀집거주하고 있다.ㆍ흑룡강성: 약 45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요 거주 지역으로는 목단강시, 할빈시, 가목사시 등을 들 수 원망의 갈등을 수업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업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전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까?”1) 국가의식중국내 여타 민족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에게도 국가의식과 민족의식은 확연히 구분된다. 특히 조선족은 실제 그들 민족의 국가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혼란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흔히 조선족들이 느끼는 국가는 중국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최근 그들은 중국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긍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민증에 해당하는 신분증명서로 그들은 공민증을 소유하고 있는데 민족구분란이 있어 조선족이라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지만 엄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임에 틀림없다.조선족이 중국을 자신의 국가로의 인식은 몇가지 계기를 통하여 형성되었다. 신중국의 성립이후 조선족의 사회적 지위 및 생활의 변화와 중요한 연관이 있다. 첫 번째는 토지개혁을 통한 토지의 분배로서 경제적 지위의 변화였다.) 중국은 1949년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제까지 식민지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소작농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그들에 토지를 나누어줌으로써,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과 함께 국가의식 형성에 일조하게 되었다. 농민들에게 토지라는 것은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삶의 터전이자 경제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두 번째는 우호적인 소수민족정책으로 중국의 실질적 지배민족인 한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은 초창기부터 항일 내전을 겪으면서 우호적인 연합정책을 추진해왔다. 이는 사회주의 건설이후에도 비교적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민족간의 분열과 억압, 착취를 없앰으로써 중국정부로부터 자유로운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세 번째는 항일내전, 중국내전 등에 많은 수의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과 협조적인 관계에 있거나 실질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중국의 성립이후 조선족의 정치적 위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택동의 장정에 참이 우리나라처럼 좁은 국가가 아니라서 지역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인정해야겠지만 기본적인 문화나 가치지향은 동일하다. 그러나 정착배경이나 한반도 내의 떠나온 고향의 차이로 인해 그들간에도 일치하지 않는 점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요녕성은 주로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연변은 함경도 사람등 여러 지역 출신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이런한 점은 조선족 상호인식에도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그들의 생활속에서 지역적 편차나 출신들은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단지 조선족이라는 언어와 문화의 동질성만으로도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그러나 세대별로 모국에 대한 인식이 다르게 나타나고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그들의 이주배경과 시기 및 과정, 그리고 성장기의 경험, 개별적인 가족사적 배경이 다양하여 한마디로 범주화 할 수는 없지만 젊은 세대로 내려올수록 중국에의 귀속감이 강하다고 보여진다. 예를 들어 70세 이상의 고령자들은 일반적으로 조국에 대한 염원이 절박한 바, 그들이야말로 죽어서라도 뼈를 고향에 묻고 싶고 언젠가 귀국에 대비하여 부모의 뼈를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조국에 있는 ‘본적지’이며, 중국은 임시 기탁처인 것이다.)조선족은 북한이나 남한 사람들과 강한 민족적 동질성을 느끼고 있다. 민족적 동질감은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와 한반도와의 조선족 거주지역 인접성을 고려할 때 당연하다고 하겠다. 민족적 동질의식은 문화적인 유사성의 인식에 근거한 것이 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국의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의 분단은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 조선족의 자아의식에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1980년대 후반 이전까지 조선족에게 모국은 바로 북한을 뜻했다. 남한을 고향으로 가졌거나 남한에 부모형제를 가지 사람도 많았지만, 하나의 한국만을 인정하여 유일 합법 정부로서 북한 정권을 인정하고, 남한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중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동서냉전 체다 3배반이나 높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설기관인 상무위원회에도 조선족위원이 있으며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구의 각급 인민대표대회, 정치협상회의에는 모두 조선족대표, 위원이 포관되어 있다. 그 외, 국가기관, 중국 공산당과 군중 단체, 기업소, 사업단위의 책임일군으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2만7천여명이나 되는데 그 중 두사람은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둘째, 자치권 문제와 조선족실태; 중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민족구역자치제도는 중국의 다민족실정에 따라 제정한 중요한 정치제도이며 민족평등, 단결과 공동번영을 보장하는 주요한 표징으로 되고 있다. 지금 중국에는 두개의 조선족자치지방이 있는데 그 하나는 1952년 9월 3일에 건립된 연변조선족자치주이고 다른 하나는 1958년 9월 15일에 건립된 장백조선족자치현이다. 이 두개 자치지방의 자치기관은 동급지방정치권기관의 기능 외 헌법과 민족구역자치법이 규정한 권한에 의해 아래와 같은 자치권리를 행사한다.① 입법권 ; 즉 당지의 정치, 경제 미 문화의 특점에 근거하여 자치조례와 단행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 이 권리행사로 연변에서는 1985년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를 제정하였고 장백에서도 이미 ‘장백조선족자치현자치조례’를 제정하였으며 지방성 법규로 널리 실시되고 있다.② 재정권 ; 국가재정체제의 규정에 의해 민족자치지방의 재정수입은 본 지방에서 자주적으로 안배하고 사용할 수 있다.③ 지방경제의 건설 및 관리권 ; 자치기관은 국가계획의 지도하에 자주적으로 지방성 경제사업을 안배하고 관리할 수 있다.④ 지방의 교육, 과학, 문화사업에 대한 관리권 : 민족자치기관은 자주적으로 지방의 교육, 과학기술, 문화, 의료위생, 체육사업을 관리하고 발전시키며 이 방면의 교류와 협작을 강화한다.⑤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공안부대를 조직하는 권리를 가진다.⑥ 민족의 언어문자사용권 : 당지에서 통용되는 한 개 혹은 몇 가지 언어문자를 사용하되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민족의 언어문자를 위주로 한다.⑦ 자치 지방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