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소설의 줄거리는 간간이 체코의 공산주의 체제와 소련의 침공(1968)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언급되지만, 주된 내용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다. 결혼은 하지 않은 채 여러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즐길 뿐인 의사 토마스, 그 토마스만을 사랑하여 집착하고 질투하는 사진작가 테레사, 공산주의에 대한 내면적 저항의 관념뿐인 채 거처도 자유로이 옮겨 다니며 그때마다 만난 사람을 사랑하는 화가 사비나, 아내와 딸이 있지만 사비나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프랑스인 교수 프란츠, 이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사랑의 유형이 그려진다.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 읽기와 비평 (Shelly Kagan, 2012년) 죽음의 본질과 의미, 육체와 영혼과 인격(자아), 영생, 죽음의 가치(선악, 호불호), 자살 등에 관한 폭넓은 논제와 관점들을 세세히 치밀하게 따져보고,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곁가지로 논점이 흩어지지 않도록 과감하게 생략도 하면서, 다양한 경우와 사례를 들어서 아주 쉽고 평이하게 설명했다. 죽음을 다루었지만, 결국 제대로 신중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삶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한, 누구나 한번 읽어 볼 만한 좋은 책이다. 1. 인간의 본질 (1) 육체와 영혼 죽음을 이야기하려면 그 죽음의 주체인 ‘나’ 또는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설명돼야 한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다. 저자 셸리 케이건은 인간이란 육체와 영혼의 두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하는 ‘이원론(dualism)’과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물리주의(physicalism)’ 일원론의 두 관점으로 나누었다. 이원론 주장에 따르면, 육체는 물질적(분자 원자로 이루어진) 존재인 데 비해 영혼은 비물질적(생각, 의식, 인격이 자리 잡은 공간 또는 기반의) 존재이며, 육체는 자극 등으로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영혼은 육체에 머물면서 육체를 조종하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고 말한다. 이원론의 주장대로면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현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에도 영혼이라는 형태로 영생한다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한다. 한편 물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육체라는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며, 다만 그 육체가 다른 물질적 존재와는 달리 ‘정신’이라는 고난도의 다양한 기능(생각, 계획, 판단, 두렵고 슬프고 기뻐하는 감될 수 없는 것, 다른 건 이식해도 되지만 반드시 내 것이어야만 ‘나’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가 인간의 정체성 문제이다. 1) 영혼 관점(soul view) : 인간의 본질을 육체와 영혼 둘로 나눠서 보는 이원론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이 바로 영혼이다. 육체는 죽어 없어져도 영혼만 존재한다면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육체는 100년쯤 살더라도 신이 내 영혼을 1분마다 바꿔치기한다면 나는 1분 만에 죽고 1분마다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같은 육체라도 올해의 내 몸과 내년의 내 몸 사이에는 형이상학적 연결고리가 없어진다. 2) 육체 관점(body view) : 인간 정체성의 핵심을 육체라고 본다면(, 살아있는 나와 죽은 뒤에 부패하고 분해된 내 시신은 동일인이라 할 수 없다. 만약 신이 시신의 분해된 원자들을 다시 조합하여 부활시킨다면 같은 육체이므로 동일인이라 할 수 있을까? 시계는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도 동일 시계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아이가 블록으로 쌓은 탑을 아빠가 실수로 무너뜨렸다가 다시 똑같이 쌓아놓았다면 동일한 탑일까? (시계는 부품과 기능이 핵심이지만, 블록 탑은 누가 쌓았는지가 핵심) 여성 A가 다이어트로 30킬로쯤 살을 빼도 동일한 A 여성이라 하겠고, 다른 사람의 간이나 심장, 폐를 이식해도 동일한 A 여성이며, 심지어 성전환 수술로 성별이 달라져도 이 A의 동일성은 유지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만약 뇌를 다쳐서 남성 B의 뇌를 이식했다면 어떨까? 육체 관점에서 뇌의 동일성을 인간 정체성의 핵심으로 본다면 이식 수술 이후의 그는 본래의 여성 A가 아니라 남성 B라고 해야 한다. 즉, 남성 B가 여성 A의 몸을 이식받은 것으로 보게 된다. 3) 인격 관점(personality view) :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핵심은 육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인격적 동일성’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특정인의 ‘믿음, 욕망, 목표, 기억 등’을 가리켜서 ‘personality’라는 용어를ubiquity) :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ubiquitous) 닥쳐올 수 있다. 죽음이 삶에 주는 효과 : 죽음 덕분에 한정된 삶의 희소성과 가치가 올라가는 긍정적 효과. 죽음의 시간은 영겁인 데 비해 삶의 시간이 너무 짧은 데서 오는 허무감의 부정적 효과. 사랑을 하고, 시를 쓰고, 우주를 상상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민하는 놀라운 존재가 죽어서 썩은 시체로 끝난다는 비극적 효과. 3. 죽음의 가치론 (1) 죽음은 나쁜 것인가? 죽음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의 문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주체는 ‘나’이며, 내가 죽고 난 뒤의 유족이나 친구 기준이 아니다. 내게 죽음은 왜 나쁠까? 죽는다는 것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1) 박탈 이론 : 죽음은 살아 있을 때 누리던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나쁘다는 주장이 ‘박탈 이론’이다. 가족 또는 친구와 헤어져야 하는 이별이 나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고통이 나쁘고,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 불안, 우울함이 나쁘다. 박탈 이론의 취약점은 그렇다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비존재도 삶(존재)의 좋은 것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된다. 2) 에피쿠로스의 반론 (죽음은 나쁘지 않다) : “죽음은 끔찍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서 존재할 때는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라면, 뭔가가 내게 나쁘거나 좋다고 하려면 내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존재 요건(existence requirement)이 필요하다. 죽음이 내게 나쁘다고 하려면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존재 요건을 거부해야 한다) 3) 루크레티우스의 반론 (죽음은 나쁘지 않다) : “내가 태어나기 이전 존재하지 않았던 영겁의 시간이 내게 나쁠 것이 없고, 죽은 이후에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고 분리되면서 생명체가 진화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원자들은 인간의 몸을 형성하지 못해서 사랑을 나누거나 석양을 감상하거나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도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선택 받은 극소수의 행운아라 할 수 있다.” 셸리 케이건이 이 대목에서 설명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적절성” 문제는 이론에만 치우친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적절성을 따지기 이전에 본능적인 감정이다. 마치 처형장으로 끌려가 금방 죽게 된 사형수가 길바닥의 빗물 웅덩이를 안 밟으려고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과 같다. 위중한 수술을 앞둔 환자나 불 속에 뛰어드는 소방수가 죽음의 두려움을 느낀다거나, 사형날짜가 정해진 사형수가 그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적절성을 따져서 행동하는 이성이 아니라 저절로 느끼는 감정적 본능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본능은 지금껏 생명체로서 생장 작용을 해온 DNA가 어떻게든지 현재의 그 생명을 유지하려는 작용이며, 그게 위기에 처했을 때 느끼는 본능이 아닐까. 3. 삶에 대하여 (1) 인생은 살 만한가 (삶의 가치론)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말은 삶이 행복하고 좋은 것이라는 뜻이고, 반대로 삶이 전반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두운 미래뿐이라면 죽음은 좋은 것이다. ①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 삶이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를 평가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절대적 기준은 없고,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돈, 쾌락, 건강 등은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요소이고, 질병, 고통, 전쟁 등은 삶을 나쁘게 하는 요소들이다. 삶의 가치 중에는, 쾌락이나 고통처럼 그 자체로 삶의 기준이 되는 목적으로서의 본질적(intrinsical) 가치가 있고, 직업, 돈, 질병처럼 수단으로서의 도구적(instrumental) 가치가 있다. 삶을 좋거나 나쁘게 하는 요소들의 대부분은 도구적 가치에 지나지 않으며, 진실로 삶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본질적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성’(당위성, 필요성)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즉, 자살은 부도덕하지만, ‘개인의 이익’을 포함한 다른 합리적 이유(국가와 민족을 위한 시위, 항의나 결의의 표현, 철학적 소신의 결과 등)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논의이다. 자살할 수도 있다는 합리성 문제에는 1) 죽는 게 차라리 더 나은 삶이 존재하는가, 2)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이라고 하는 판단은 신뢰할 수 있는가, 두 가지 논점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① 첫 번째 논점은 ‘지금의 삶’과 ‘죽음 상태’를 비교한다는 건데, 죽음 상태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죽는 게 더 낫다는 요건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저자의 주장에는 맹점이 있다. “죽는 게 더 낫다.”는 것은 죽음 상태와 비교해서 더 낫다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써 ‘고통이 끝나는 순간’이 지금 삶의 고통보다는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② 두 번째 논점은 자살하는 당사자가 극심한 고통이나 비참한 상황에서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스트레스나 고통이 너무 심한 상태에서 죽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만 얼마 후 치료를 통해 회복되는 경우처럼 오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신이 혼미하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 자살하고 싶어도 불가능해진다. 결국 고통을 참고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는 게 더 낫다는 상황이 있고, 그것이 치유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료하게 인식한다면 자살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이라고 해도 자살은 비도덕적이라고 한다. 자살이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1) 종교적 측면에서 신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라는 주장, 2) 삶과 생명을 준 신이나 부모, 자연에 대한 감사의 의무를 위배한 것이라는 주장, 3) 자살의 결과가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5. 맺는말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삶 때문이다. 죽음을 제대로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의 이 책은 죽음의 본질과 의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인간의 ‘업그레이드’, 즉 다시 말하면 ‘인간종의 신격화(神格化)’이며, 이 책은 그 주제와 관련하여 3부로 나누어 세 가지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인간종과 다른 동물과의 관계를 파악하고, 다음으로 인류 역사에서 고대와 중세의 신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인본주의)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만물인터넷’의 네트워크와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의해 지배력을 잃고서 초인간으로 대체된다고 보는 단서들을 제시하였다.<중 략>그러면 우리의 마음(의식)은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역할을 할까? 현재의 과학은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으로 의식이 생기고, 그 의식(마음)의 경험들은 어떤 필수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라고 설명한다. 사람의 뇌는 그물처럼 연결된 800억 개 넘는 뉴런들의 복잡한 시스템이며, 그 뉴런들이 수백억 개의 신호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으로 훨씬 더 복잡한 어떤 것(의식의 흐름)을 창조한다는 것이다.<중 략>혹시 내가 우주 전체에서 뭔가를 느끼는 유일한 존재이고, 다른 모든 인간과 동물들은 마음이 없는 로봇이 아닐까?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내 꿈속의 등장인물이 아닐까? 혹시 내가 가상 세계에 갇혀 있고, 내가 보는 존재들은 시뮬레이션이 아닐까?”이런 식의 의문 제기는, 2,300년 전의 『장자』에 나오는 “물고기의 즐거움(魚之樂)” 논쟁을 연상케 한다.<중 략>‘호모 데우스’는 잘못 붙인 이름이 아닐까. 인간은 그저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고, 자아와 인간성, 사생활까지 집어삼킨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신이 되는 게 아닌가. ‘기술종교’, ‘기술인본주의’, ‘데이터교’, ‘만물인터넷’이라는 말은 ‘초인간’이 아니라 사실 인간이 이미 없는 게 아닌가. 그것은 지금까지 누리거나 추구해 온 자아나 인간성을 송두리째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 감상과 비평 (톨스토이, 1878) 1. 첫 문장과 두 갈래 이야기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암시적이고 포괄적이다. 이 한마디 속에, 행복한 사랑 끝에 비극적 죽음으로 귀결된 안나의 삶이 들어 있고, 사랑과 일과 신앙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하지만 자기 나름의 방향을 찾아서 성실히 살아가는 레빈의 삶이 들어 있다. 소설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에 집약하기 위해 작가인 톨스토이가 매우 고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이런 글쓰기 방식을 푸시킨에게서 터득했다고 한다. 한 소설 작품 전체를 일관하고 대표할 수 있는 말을 맨 먼저 던진 것이 훗날 좋은 평가를 얻게 됐으니, 이 첫 문장이 톨스토이로서는 회심의 일격이다. 그런데 이 첫 문장에서 말했듯이, 『안나 카레니나』는 두 갈래의 이야기이다. 안나와 레빈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각각 별도로 전개된다. 끝 무렵에 안나와 레빈 두 사람이 딱 한 번 만나기는 하지만, 그저 만남으로 그칠 뿐 이야기의 전개(갈등, 복선, 전환 등) 면에서 의미가 있는 만남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왜 별개로 전개되는 안나와 레빈의 두 갈래 구성 방식으로 소설을 썼는지 매우 의아하다. 실제로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의문과 비판이 제기되고 지적된 것 같다. 톨스토이 자신은 이런 구성 방법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내적인 응집력”이라고 말하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물 간의 관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게 짜 맞춰진 구성이므로 잘 찾아보라고 했다 한다. 그런 톨스토이의 주장에 따라 잘 찾아본다면 따로 전개된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에 “응집력”이 없는 건 아니다. 즉, 과감하고 열정론스키를 자주 마주쳤고, 사랑의 고백을 들었으며, 그때마다 생기가 솟아나고 기쁨을 느낀다. 처음엔 “수치심과 기쁨, 공포 등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끼지만, 점점 더 깊이 사랑으로 빠져든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가정의 주부이자 유부녀의 사랑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갈등이 이미 예고돼 있고, 관련 인물들의 성격이나 태도가 어떻게 그려질지가 관심거리다. (2)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태도 우선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인 안나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동기는 무엇이며, 안나의 심리나 태도는 어땠을까? 톨스토이는 안나를 정면에서 불륜녀로 낙인찍고 악행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나를 위해 넌지시 변명을 해준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하게 되기 전에 오빠 오블론스키의 처제인 열여덟 살 키티가 브론스키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키티에게 말했었다. “그 푸른색 안개를 기억해요. 알고말고요. 그건 스위스 산에 내린 안개 같죠. 어린 시절이 끝나는 황홀한 시간에 모든 걸 감싸는 안개 말이에요. 그 거대한 원으로부터, 행복하고 즐겁던 그때로부터 길은 점점 좁아지죠. 비록 환하고 멋져 보일지라도 이 길로 들어서는 건 기쁘면서도 무서운 일이에요.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결혼하기 전 누군가를 사랑하며 설레고 황홀했던 소녀 시절과 결혼 후 사랑도 시들고 찌들어 버린 지금의 불행을 이렇게 말했다. 이 대목은 꼭 안나를 위한 변명은 아니다. 결혼한 여성은 누구나 이렇게 느낄 것이다. 그 후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하게 되면서 점점 정열적이고 대담하며 단호해지고 뻔뻔해진다. 브론스키가 경마에서 다쳤을 때의 안나 태도를 두고 카레닌이 훈계하자, 안나는 정면에서 반발한다. “난 당신 말을 들으면서도 그 사람을 생각해요. 난 그 사람을 사랑해요. 난 그 사람 연인이에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난 당신을 증오해요.” 불륜을 알면서도 이혼도 안 한 채 ‘현상 유지(status quo)’를 하려는 남편의 침착하고 냉철한 관대함에 안나는 오히려 분노하고 괴로워한다거만하기도 했다. 사교계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추문을 들었을 때도 흥분하지 않고 조용히 숙고해서 차갑고도 침착하게 대응한다. 안나 당신의 감정은 양심 문제이지만 부부로서의 결합을 깨뜨리는 건 죄이므로 신의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자신의 경고와 훈계에 안나가 도리어 정면에서 반발하자, 카레닌은 그런 안나를 “명예심도 없고, 무정하고, 종교도 없고, 타락한 여자”로 경멸하며, 아내의 타락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질 수는 없다면서 “그녀가 튕긴 흙탕물을 가장 절도 있게 정당하게 떨쳐 내고” 명예를 유지할 방법을 고민한다. 브론스키와의 결투, 불륜의 증거를 제시한 이혼, 별거 등 세 가지 방법을 두고 고민했지만, 이혼이나 별거는 결국 안나를 브론스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절대 안 된다며 안나를 잡아두는 “현상 유지”를 선택하기로 결론짓는다. 카레닌은 안나에게 브론스키를 만나지 말 것, 자기의 명예에 먹칠하지 말것, 아이의 어머니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안나가 브론스키의 딸을 낳고 건강이 위험해지자 남편 카레닌은 기독교적 관대함으로 안나와 브론스키를 용서한다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안나를 치료하도록 조치하고 그 아기를 돌봐주기까지 한다. (3) 사회 분위기와 톨스토이의 태도 몇몇 특수한 사회나 고대 사회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외도(外道)이며 불륜(不倫)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의 순수하고도 정열적인 사랑과 이미 약혼자가 있는 로테의 절제 덕분에 불륜으로 빠지지 않고 괴테를 통속 소설 작가의 오명에 빠지게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불륜을 소재로 쓴 톨스토이는 어떤가? 『안나 카레리나』는 통속 소설이 아닐까? 당시 사회의 시각이나 사람들의 관념은 어땠을까? 우선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가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 데 대해 아내 돌리가 화가 나서 이혼을 고민하자 안나는 용서하라며 새언니 돌리를 달래서 무마한다. 오블론스키는 그 이후에도 암암리에 외도를 즐긴다. 남자의 외도는 고금의 흔한 현실이며,툼 과정에서의 갑작스러운 충동 때문도 아니고, 자살 이유나 배경을 설명한 유서를 남긴 것도 아니다. 톨스토이는 안나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대로 풀어낸 것일까? 톨스토이도 안나의 죽음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 것은 분명하다. 7부의 끝부분에 대여섯 장을 할애해서 자살에 이르기 전의 과정을 서술했고, 마지막에 안나의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독백 장면도 꽤 길게 서술했다. 안나의 죽음은 단연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이고, 그러므로 비중을 크게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톨스토이가 생각해 낸 안나의 자살 동기는 사랑의 실패, 사랑의 절망이다.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었다는 데 대해 안나는 죽음으로써 복수하겠다고 말한다. ‘브론스키의 마음에다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고 안나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애인의 사랑이 식은 데 대해 복수하기 위해 자살한다? 꽤나 억지스럽고 무리한 발상이다. 하지만 안나는 그렇게 죽음을 생각하다가도 다시 “아니다. 그러지 말자. 그저 살아야 한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모두 지나가 버릴 거야.”라고도 생각한다. 이처럼 안나는 신경질적 우울감을 독백으로 쏟아내다가 어디론가 가겠다며 집을 나가 마차를 타고 상관도 없는 거리 풍경을 보며 중얼거리고, 정처 없이 열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브론스키의 메모 한 장에 자기 운명을 거는 등 갈팡질팡하는 행동을 표출한다.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로서 자살까지 하겠다는 안나의 생각은 억지이자 무리로 보더라도, 갈등하는 안나의 생각과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본인이 유책 배우자이므로 남편에게서 아들 세료자를 데려올 수도 없는 당시의 이혼제도, 사람들의 눈총이 무서워서 사교계 출입도 할 수 없이 사회적 제약 속에 살아야만 하고, 브론스키만을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현실로는 그저 정부에 지나지 않는 처지라는 것,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의 집착 외엔 아무것도 정상화될 수 없는 상황에 그의 사랑마저 점점 옅어져 간다는 괴로움이 그것이다. 그렇다 크게 실망하며 농사꾼 처녀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지만, 우연히 키티를 목격했을 때 레빈은 “세상에 그런 눈은 단 하나였다. 세상과 인생의 의미를 응축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을 통틀어 단 하나뿐이었다.”라고 할 만큼 순수하고 진실하며 변함없는 열정을 지닌 청년이다. 키티와 결혼하고 사랑함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신체 건강한 레빈이지만 몇 차례 자살의 문턱에서 서성인다. 목을 매달지 않기 위해 밧줄을 감추고, 총으로 자살하게 될까 봐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걸 꺼린다. “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왜 내가 여기 있는가?” 죽음을 두고 깊이 사색하다가 결국 ‘영혼을 위해, 진실되게,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산다.’는 일꾼의 말에 레빈은 진리를 깨닫고 삶에 충실하게 된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까지 고민하는 이러한 레빈의 고뇌는 이 소설 속에서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톨스토이 본인의 사상과 고뇌가 그대로 레빈이라는 캐릭터에 투영돼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소설의 구도 면에서 보면 레빈의 부분은 아무래도 조화롭지 못하다. 굳이 의미를 두자면, 안나가 열정적인 사랑에다 모든 것을 걸고 죽음까지 불사한 것과 대조적인 한쪽에다 레빈을 두어서 삶의 자세, 신앙, 존재의 의미 등에 고뇌하면서도 가정과 사랑에 충실한 가치관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안나와 레빈을 함께 이야기로 엮어서 끌어가지 않은 채 전혀 동떨어진 두 얘기를 펼쳐놓은 것은 매우 거슬리는 측면이 아닐 수 없다. 끝. 『안나 카레니나』, 감상과 비평 (톨스토이, 1878) 1. 첫 문장과 두 갈래 이야기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암시적이고 포괄적이다. 이 한마디 속에, 행복한 사랑 끝에 비극적ml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쓰라린 상처를 잊지 말자 머리말 『작별하지 않는다』는 재미있는 이야기 소설이 아니다. 쓰라린 상처를 다시 헤집어 더욱 쓰라리게 만들고, 슬프게 탄식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서 학살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다짐이다. 기억의 시작은 꿈이다. 야산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묘비처럼 심어진 무덤들에 바닷물이 차오르며 무덤의 뼛조각이 쓸려가는 꿈이다. 화자(話者)인 ‘나’ 경하의 이 꿈 얘기를 듣고 다큐 제작자인 친구 인선이 실제로 검은 통나무들을 다듬어 묘비처럼 세우는 작업을 하면서 끔찍한 제주 4.3사건의 상처를 되짚는다. 경하는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인연으로 5.18 광주학살 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넘어 트라우마까지 지닌 인물인데, 그가 친구 인선의 고향인 제주의 무덤 꿈을 꿈으로써 4.3사건과 연계시킨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인 인선은 엄마 강정심(姜正心)으로부터 학살 사건의 목격담과 경찰에 끌려가 투옥된 오빠 강정훈(姜正勳)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동분서주했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사건의 진상에 관한 자료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큐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인터뷰 영상을 찍고, 자료를 모으고, 경하가 꾼 꿈속의 통나무 무덤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화자인 경하는 인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위한 말 상대역일 뿐이며, 소설의 주제는 제주 4.3 학살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 암매장 사건 등의 쓰라린 상처를 다시 헤집고, 국가 폭력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집요한 몸부림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이 책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의 꿈 얘기에 인선이 사람만 한 통나무 백여 개를 다듬어 검 독백이 또한 그렇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이 책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의 참상을 그렸지만, 작가 한강이 그 이전에 쓴 『소년이 온다』(2014년)에서 광주 5.18사건의 아픔을 작품화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유년 시절 광주에서 자란 동기도 있겠지만, 작가의 글쓰기에는 비극적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책무감이 느껴진다. 이 책은 한강의 또 한 번 상처의 헤집기이자 역사 기억하기이다. 이 책에서 다룬 4.3사건의 학살 장면만 해도 끔찍한 국가권력의 폭력이다. 산 위의 “무장대 3백 명”을 색출하기 위해 군과 경찰이 양민들을 노인과 갓난아이까지 총살한다.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맞으면 저절로 구덩이에 떨어지게 하거나, 바닷가 백사장에서 총살해서 시신들이 그대로 썰물에 휩쓸려 가게 했고, 인선의 외가와 건넛마을을 통째로 불태우기도 했다.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는 갱도에 수천 명을 그대로 매몰하여 갱도를 메워버리기도 했다. 죽은 그 사람들은 무슨 죄목인지도 모른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희생되고, 보도연맹 관련됐다면서 잡혀가 감옥에 갇혔다가 전쟁 터지자 그대로 몰살시킨다. 제주에서 3만이 죽었던 것처럼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인선은 엄마와 아버지, 외삼촌, 이모에게서 그때 학살의 실상을 직접 듣고, 답사와 인터뷰, 자료를 통해서도 그 국가 폭력의 역사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며, 그걸 기억하고, 억울한 죽음들과 쓸려가며 뒤섞인 뼈들의 원한을 씻어주기 위한 작업에 집요하게 매달리게 된다. ‘나’ 경하는 프로젝트의 발단이 된 꿈을 꾸긴 했지만, 바로 그 인선의 ‘학살 역사 기억하기’ 작업을 위한 도구로 쓰인 것이다. 이 책이 “작별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이유는, 수십 년 뒤에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누명을 벗게 하는 신원(伸) 작업을 시작하고, 또 수십 년 뒤에야 유해 발굴을 미, 또한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가 학교 운동장에서 학살된 부모와 오빠, 여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시신의 얼굴마다 쓸어야 했던 그 눈…. 그리고 제주 4.3사건 얘기를 꺼내기 위한 발단도 눈에 덮인 검은 통나무 꿈이다. 작가는 왜 처음부터 끝까지 눈 얘기로 끌고 갔을까? 작가가 눈이 내릴 때의 영원처럼 느린 속력, 또는 눈의 아름다움 등 눈의 “비현실성”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 속에서 눈은 순환한다는 사실 때문에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상징적 이미지로 작용한다. 하나의 눈송이에는 극미세 먼지나 재의 입자가 구름 속에서 수증기와 뭉쳐서 만들어진 결정이다.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된다.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칠십 년 전 이 섬 제주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 아이들과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아니라는 법이 없다.” 수십 년 전 학살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피와 살들이 지금 눈이 되어 내 몸에 내리고 있는데 저 눈을 맞으면서 그 학살의 역사를 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섬세하고 차가운 표현, 불친절한 글쓰기 작가 한강의 글쓰기는 표현이 섬세하다. 냉랭하고 날카로우며 건조하고 단절적이다. “압도적인 성량으로 끊임없이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던 여름이 갔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힘” “처음에는....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굉음 같은 실내의 정적을 가르며….”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 또 하나, 이 소설 작가의 글쓰기가 매우 불친절한 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화자인 경하는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죽기를 작정하고는 수신인을 정하지 않은 유서를 써두었다가 그걸 찢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상황에 있다. “더이상 일도 가족도, 계속할 일상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된” 사람이 입원한 인선의 무리한 부탁을 받고는 인선의 제주도 집 앵무새 한 마리에게 물을 주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찾아가는데, 경하는 인선의 통나무 프로젝트에 그다지 내키지도 않고 새를 좋아해서 키우는 취미도 아닌데 왜 그 터무니없는 무리수를 감행한 걸까? 수많은 주민의 생명을 학살한 역사의 되새김이 주제이니, 새 한 마리라도 굶어 죽게 방치할 수 없다는 생명 사랑? 그렇다면 단전으로 꽁꽁 언 집에 혼이 되어 나타난 인선은 왜 앵무새 아마의 죽음이나 나무 밑 무덤에 애곡(哀哭)이나 탄식조차 하지 않을까? 죽어서 땅을 파고 묻은 앵무새가 다시 살아나 울거나 좁쌀 먹이를 먹는 장면은 왜 필요할까? 이야기의 흐름 면에서 왜 꼭 새가 등장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려운 구성이다. 또, 경하가 어두워 오는 P읍에서 지선버스를 기다리다가 인선의 부탁을 포기하려고 입원한 인선에게 전화했을 때 간병인이 받아서 다급하게 끊는 장면으로 인선에 돌발 사고가 생겼다는 복선을 깔았지만, 그 복선은 뒤에 어떤 설명도 매듭도 없고, 뒷얘기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러고는 단전되어 온기도 없고 불빛조차 없는 방안에 느닷없이 인선이 나타난다. ‘꿈인가.’ 경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면서도 인선과 긴 대화를 이어간다. 인선의 혼령과 대화하면서도, 어둠을 뚫고 나가서 버스를 탈 생각도 하고, ‘인선이 있는 병원에 연락하려면 불 켜진 집들의 문을 두드려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청해야 할 거다.’라는 생각도 하고, ‘의료 사고가 있었나.’라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의문을 품기도 한다. 작가는 인선을 혼령으로 혹은 환영으로 등장시켜 놓고는 실제의 현실 인식과 뒤섞어 놓았다. 그러고는 또다시 긴 과거 학살 이야기를 계한 방식으로서 인선의 발언이 가장 핵심이 될 수밖에 없지만, 굳이 눈 덮인 외딴집에서 혼령과의 대화 방식을 택한 까닭이 납득하기 어렵고, 읽기에도 불편하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쓰라린 상처를 잊지 말자 머리말 『작별하지 않는다』는 재미있는 이야기 소설이 아니다. 쓰라린 상처를 다시 헤집어 더욱 쓰라리게 만들고, 슬프게 탄식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서 학살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다짐이다. 기억의 시작은 꿈이다. 야산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묘비처럼 심어진 무덤들에 바닷물이 차오르며 무덤의 뼛조각이 쓸려가는 꿈이다. 화자(話者)인 ‘나’ 경하의 이 꿈 얘기를 듣고 다큐 제작자인 친구 인선이 실제로 검은 통나무들을 다듬어 묘비처럼 세우는 작업을 하면서 끔찍한 제주 4.3사건의 상처를 되짚는다. 경하는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인연으로 5.18 광주학살 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넘어 트라우마까지 지닌 인물인데, 그가 친구 인선의 고향인 제주의 무덤 꿈을 꿈으로써 4.3사건과 연계시킨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인 인선은 엄마 강정심(姜正心)으로부터 학살 사건의 목격담과 경찰에 끌려가 투옥된 오빠 강정훈(姜正勳)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동분서주했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사건의 진상에 관한 자료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큐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인터뷰 영상을 찍고, 자료를 모으고, 경하가 꾼 꿈속의 통나무 무덤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화자인 경하는 인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위한 말 상대역일 뿐이며, 소설의 주제는 제주 4.3 학살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 암매장 사건 등의 쓰라린 상처를 다시 헤집고, 국가 폭력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집요한 몸부림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이 책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의 꿈 얘기에 인선이 사람만 한 통나무 백여 개를 다듬어 검은 칠을 하고 언덕에 세우자는 프로젝트의 제목이다.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