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라기보다는 가족을 의미하는 FI가 맞을 것 같다. 우리집의 사랑스러운 아들들 삼형제를 픽토그램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삼형제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색상은 삼형제 불루, 삼형제 그림, 삼형제 아쿠아로 이루어졌으며 삼형제의 형격을 의미하는 뜻이기도 하다.색상체계는 기본요소의 하나로서 삼형제의 고유한 색상이지지를 형성하고 심볼마크, 로고타입 및 각종 시각매체 등에 적용하여 삼형제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색상체계는 메뉴얼에 제시된 각 항목별 사용규정에 따라 정확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임의로 변경 사용할 수 없다.
- 절대적 진실의 역사에서 그 잊힌 자들의 역사를 보다.학번 : 이름 :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왕과 왕비처럼 고귀한 사람들 아니면, 홍경래나 임꺽정처럼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들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영웅의 열전이 아니라, 그런 잊힌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고 싶었다.(저자의 말 中)”저자의 이와 같은 집필 의도는 “조금은 색다르다.” 이것이 저의 사적인 생각입니다.역사란 무엇인가. 사람이 살아온 리얼리티의 기록이다. 왕과 사대부에게 독점되었던 문자와 지식이 이른바 개똥이, 소똥이, 말똥이 에게는 없었기에 그들은 역사에 편입될 수 없었다. 강명관 교수는 오죽 답답하였을까. 그리고 ‘뒷골목’ 역사에 대해 도대체 한 번 궁금증 가진 적 없이, 국사책에서 배워왔던 역사가 우리 빛나는 역사의 총체라고 의심 없이 믿어왔던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나 또한 답답하였다.저자는 뒷골목 역사의 집필을 위해 ‘조선왕조실록’, ‘백범일지’ 와 그 외 수많은 개인 문집, 신문 등 엄청난 자료를 통해 비주류 인생의 기록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가 밝히고자 했던 역사는 굳이 분류하자면 개개의 ‘미시사’ 이었으며, 양반네들이 허락하지 않는 뒷골목 미시사를 문헌을 통해 찾기란 도저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료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실마리’를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마치 탐정이 작은 단서를 모아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범인을 잡아내듯이 저자 또한 우리가 지나칠 수도 있는 자잘한 기록을 모아 역사를 조립해나가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을 따라가는 나는 독자로서 퍽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이 조립의 빈틈은 저자의 상상력으로 메워지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 상상력을 허구라고, 비합리적인 고증 방식이라고 비판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 수많은 자료에서 여태껏 역사학자들이 중요히 생각지 않았던 부스러기들을 모은다는 것 자체에 깊은 환희를 느끼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500년간의 선조들의 모습이 우리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적 흔히들 옛날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고들 한다. 컴퓨터도, TV도, 노래방도 없는 시대에 태어나서 평민들은 평민들대로 농사만 죽어라 짓느라 놀아보지도 못하고 양반네들은 양반네들대로 헛기침하며 종일 공부하느라 놀아보지도 못하고 어찌 그런 무기력한 삶을 살았을꼬 혀를 차곤 한다. 과연 그러하였는가?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쌍륙, 골패, 투전 등 민간의 도박은 지금 못지않게 유행하였으며 특히 도박계의 패권을 차지한 투전의 유행은 결국 전문 도박판과 사기도박까지 출연하게 만들었다. 이 유행은 양반네들한테까지 널리 퍼져 정약용이 “소나 돼지 치는 자들의 놀이가 조정에까지 밀려 올라왔으니 한심한 일이다.(목민심서)” 라고 언급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재상이나 승지들까지 이에 빠져 날 새는 줄 몰랐다니, 유가이데올로기로 뭉쳐 금욕이 생활화된 우리가 기대하는 양반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던 것이다.또한 놀이문화에 일가견이 있었던 소비의 황제 ‘탕자’를 보자. 영화 ‘스캔들’을 기억한다면 그 영화에 등장하는 배용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저자는, 탕자의 유흥과 소비는 현대의 오렌지족을 능가하다고 이야기한다. 거문고 하나를 들고 온갖 놀음을 누비고 기생에게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집 한 채를 선물하는 막가는(?) 놀이문화가 조선에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묵묵히 일하는 농민과 근엄하게 학문하는 양반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가 이들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우리가 간혹 있었다고 생각하는 배용준 같은 탕자가 실제로 조선에서 그리 드문 양반네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우리는 이들을 무어라고 평가해야 할까. (역사를 평가한다는 것은 자못 주관적일 수 있으나 이를 통해 현재에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 평가는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농사지어야 하는 개똥이 소똥이가 도박 질을 해댔으니 천벌 받아 마땅하고 이들을 교화시켜야 하는 양반들이 따라서 판돈 걸고 기생들과 놀음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결론지어버린다면 우리는 과연 국사책양반네들은 경제적 어려움보다는, 그들의 지위를 지탱시키는 유교윤리에 더욱 철저하기 위해서 유흥을 멀리해야 하는 딜레마적 입장에 처해 있었다. 어느 누구도 놀이를 합리화 시킬만한 변명거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놀이가 필요했다. 아무리 노동해도 풍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한 농민들이기에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매개가 필요했으며, 시대의 강박적인 윤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갈증을 느낀 양반들이기에 비상구는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의 스트레스와 고통은 도박, 쾌락, 소비 등으로 표출되었다. 이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단지 ‘심심해서’ 라는 이유로 유흥과 소비를 일삼는 우리가 그들의 유흥을 퇴폐적이라며 함부로 욕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재고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위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이 책의 소금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하층민, 여성과 같은 비주류 인생들의 엿보기이다. 인간은 하나같이 그 개개인이 가치 있고 역사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물론 과거에 비해 스스로의 기록을 남길 여지는 훨씬 비대해졌지만 역시 ‘나’ 라는 인간은 후손들에게 기억될 확률보다 잊힐 확률이 엄청나게 클 것이다. 나름대로 한평생 진땀 빼며 살아온 인생을 누구하나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연함에도 역시나 슬프다. 나라는 인간도 결국 장구한 역사 속에서는 ‘비주류’ 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역사책에서 나의 이름을 보는 듯한 기쁨을 내내 품고 이 책을 읽었다. 조선 같은 신분과 성의 차별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 항상 나만큼 고귀한 존재는 없다고 자부해온 내 자신이 이상스러우리만큼 난 책 속의 개똥이 소똥이 말똥이 에게 연민보다 더 큰 동질감을 느꼈다. 그 동질감은 기쁨과 동시에 나를 한 없이 슬프게 했다. 사회의 주류가 되어보겠다던 열정보다 비주류에 안주하려는 내 자신이 한심하여 슬펐고 또한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 짓는데 너무 형편이라니, 밥 세 끼 굶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호화찬란한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할머니에게 돈 천원을 아낀다. 그 시절 배고프지 않은 백성들이 어디 있었을까. 하물며 의술을 익혔음에도 과거를 보지 못한 가난뱅이 의원들은 무슨 돈이 있어서 무료로 시술을 하였단 말인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참으로 엉터리이며 이들을 본받지 못하는 우리는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그리고 또 다른 비주류, 여성이 등장한다. 안채에서 조신하게 남편 뒷바라지를 하던 전형적인 조선 여인네들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의 모습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야말로 정말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긍정적인 모습들의 여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는 퇴폐적인 망국의 역사 속 양반네들의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이 하나같이 남자이고, 그들이 가는 파멸의 길에 곁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여인들이라는 것이 여자로서 화가 치밀었었다. 장구한 남녀차별의 역사를 그런 식으로 뿌리까지 확인한다는 것이 못내 슬펐던 것이다. 차라리 여자 하나 때문에 정사를 망쳐 나라를 말아먹은 비화들을 접할 때면 차라리 속이 후련할 정도였다. 남들이 혀를 끌끌 차며 “저래서 여자는 안 된다니까.” 라고 말할 때 나는 오히려 “대단한 여자로군.” 속으로 주어 삼키며 흐뭇해했던 기억까지 있으니 말이다. 역사 속 여자라고 해봐야 궁궐의 여인들의 임금을 둔 자리싸움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 속 감동과 어우동은 남성편력이 심해 부도덕했을망정 남성에 얽매여 그들을 뒷바라지 하는 수동적 인물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들은 부도덕한 남성이 편만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출연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저자의 말은 가슴에 와 닿았다. 기생을 점유하여 첩으로 만드는 풍조는 법적 합리화 시키고 여성으로 하여금 남편이 죽어도 실질적으로 재혼이 불가하게 만드는 사회적 풍토. 이런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성적 욕망과 감수성을 견디어내야 했던 여성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으며, 금기를 깨버린 감동과 어우동 같은 여인은 사형선 기억되지 못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자를 독점한 남성들의 횡포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정말 잔혹하다고 또다시 되뇌었다. 저자도 여성들의 뒷이야기에서 결국 양반들이 얼마나 부도덕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불가분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여성들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못한 것은 그 자료의 부족이었을까, 아니면 저자 역시 남성으로서 그 자료수집에 본능적으로 소홀했기 때문이었을까?도그마란 무엇인가. “선하게 보이는 것” 뜻의 헬라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 절대적 권위가 부여된 철학적 명제나 종교적 진리를 의미했지만, 요즘은 독단 또는 독선을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 덕분에, 도그마는 사회를 지탱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과학 분야에서는 천동설이나 창조론이 이 도그마에 해당된다고 예를 들 수 있겠다.어느 사회에서는 도그마가 주된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아 보편적인 동조와 협력, 최종적으로 발전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성과 미시성이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 어떤 도그마도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군림할 수 없다. 도그마는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며, 다른 주장이 설 자리를 주지 않는 허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도그마의 긍정적 역할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결코 무시될 수 없는 큰 결점이다. 도그마에 빠진 사람은 한 번 주입된 개념이나 가치를 추종하여 다른 여지에 대해 고찰하지 않으며 그러기에 위험한 것이다. 도그마는 철학자 칼 포퍼에 의해 ‘열린사회의 적’ 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반증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신앙, 과학뿐만이 아니라 역사에서도 부수어져야한다.이렇게 느닷없이 도그마 얘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 도그마’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해서이다. 아직 사회라는 거대한 괴물과 직접 부딪혀 본 경험이 없는 학생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많은 도그마와 마주쳐왔고 그 도그마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살아왔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