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사점‘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책을 사고 처음 본 것은 작가 소개였다. 작가 소개에 적혀있는 ‘서머힐’이라는 글자를 보자 우연히 TV를 돌리다가 보게 된 ‘노는 아이들의 기적, 서머힐’이라는 교육채널의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그 프로그램의 서머힐이 A.S.니일이 설립한 곳이며 니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이 책의 저자 호머 레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책에 대한 흥미가 커지게 되었다.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고 동화책 제작에 관심이 있는 나는 우연히 교육채널에서 동화책 내용을 들려주는 화면에 관심이 가서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동화책은 아이가 학교로 가는 길에 악어를 만났는데 악어가 아이의 책가방을 물고 놓아주지 않아 학교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선생님께 사실 그대로 말했지만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고 아이에게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게 했다. 다음날 아이는 더 일찍 집에서 나왔지만 파도가 들이닥쳐 파도를 피해 오다보니 또 늦고 말았다. 역시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고 아이는 그 날도 혼이 났다. 그 다음날, 학교 가는 길에서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아이는 무사히 학교로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선생님이 커다란 고릴라에게 붙잡혀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고릴라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아이는 “선생님, 여기에 고릴라는 없어요.” 라고 말한다. 이 책은 ‘지각대장 존’이라는 책이며 작가가 다녔던 학교에 대해 쓴 동화였다. 그리고 작가가 다녔다는 그 학교가 바로 ‘서머힐’인 것이다. 우연히 본 프로그램의 내용이 이렇게 자세히 생각난 이유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P.61~63)]의 내용을 읽으면서였다. 상상의 세계 속에서 아이는 왜소하고 연약한 자신의 존재를 가장 힘 쌘 존재로 만들어 열등감을 보상받고 싶어 한다. 이 상상의 세계는 아이의 마음대로 굴러가며 진실과 거짓은 딱히 큰 상관이 없다. 이 책에서 예시로 보여준 아이와 엄마의 이야기나 지각대장 존에서의 아이들 이야기는 모든 법칙을 보여주며 열등감을 해소하는 모습은 아이들의 상상 속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아이들의 상상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없기 때문에 어른이 함부로 그 세상에 끼어드는 것도 판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충분한 상상으로 자신의 세계를 펼치며 그 속에서 열등감을 해소하고 억압으로 느껴졌던 모든 것에서 탈출하는 것은 어른이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올바른 성장을 하기 위해선 어른은 상상의 공간에 침범하지 않으며 그 공간을 이해하며 충분히 상상할 수 있도록 아이를 위한 배려를 제공해주어야 한다.하지만 상상력은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상상력이 아이에게 주는 것Ⅱ (P.70~71)]의 내용에서 거짓말은 자기 보존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는 벌을 준다고 위협받는 두려움에서 도피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아이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자기 보존 본능에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어른들은 아이가 거짓말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가장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어른들에 의해서 생겨난다니 웃기는 상황이 아닌가. 따라서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거짓말하는 아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위와 비슷한 맥락으로 [벌주기 (P.135~140)]에서 적의가 담긴 비난이 얼마나 해로운가를 에르고그래프(Ergo-graph)가 보여준다. 에르고그래프에서 칭찬을 하면 힘을 거의 다 썼다고 생각한 상태에서도 힘이 생겨나지만 충분히 힘이 남아있는 상태라고해도 비난을 하면 급격히 힘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벌, 즉 호머 레인이 생각하는 모든 벌(창피주기, 밥 굶기기, 꾸지람, 때리기 등 모든 금지 행위 및 행동을 지시하는 벌)은 나쁜 행위를 교정시키기 위해서 할지라도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이에게 비난을 퍼부었다면 아이는 잘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포하기 위해 거짓말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최근 교육의 현장에선 체벌금지로 인한 학생들의 수업태도 문제가 기사화되어 떠돌고 있다. 인터넷 동영상으로 나돌던 수업 중 선생님 몰래 단체로 앉아서 춤을 춘다거나, 선생님께 폭력을 행사하는 것 등 이전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태 체벌은 좋지 않은 것이며 체벌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이 책을 통해 배웠는데 왜 학생들의 수업 태도는 훨씬 좋지 않아졌는가. [청소년기 (P.100~113)]에서 보면 모든 아이들에게서 권위에 대한 약간의 저항이 있다고 한다. 여태 학교는 아이들을 강제로 공부하게 만들고 일방적으로 수업을 듣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체벌로 강요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로만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해.”라고 강요되고 있으니 아이들의 저항이 더 커진 것이다. 커졌다는 것은 이전에는 체벌로 인해 피해왔던 저항들이 체벌이 사라짐으로써 표출 된 것이다. [청소년기 (P.100~113)]에서는 교사가 자신의 지위를 내려두는 척 가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교사는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군중의 일원이 되어 평등한 위치에 선다면 아이들의 태도는 매우 호의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선생님의 지위를 내려두는 척하며 체벌을 금지했지만 아이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있지 않기 때문에 권위에 대한 저항이 여전한 것이다. 말로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니 아이들은 더 저항을 하게 되고 흔히들 체벌이 없으니 버릇이 나빠졌다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수업에 대한 강요가 없어지고 아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아이들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권위에 대한 저항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더 좋은 교육 환경이 될 것이다.2. 비판점[아이의 발달단계에 맞는 장난감 (P.44~48)]에서 보면 장난감을 다루는데 어려움이 사라지면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장난감으로 아이를 피곤하게 만들어야한다고 말한다. 장난감으로 다양한 감각을 키우고 눈뜨게 하며 지식을 생각한다. 특히 책에서 예시로 든 자전거의 경우엔 매우 예외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에겐 감각을 키우기 위해 기능이 각각 다른 장난감을 많이 만져보고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자전거의 경우엔 속도감, 균형감각, 운동감각 등을 모두 훈련시키기 좋은 운동기구로써 난이도가 있는 장난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튕기고, 색이 있고, 재질이 다르고 하는 일차적인 장난감이 아닌 자전거 같이 고차원 장난감의 경우엔 말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전거 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고 해서 아이들은 자전거 타는 것을 멈추지는 않는다. 좀 더 위험하고 재밌는 곳을 찾아가 자전거를 타다 다쳐도 오며, 네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로 단계를 올리기도 하며 아이가 성장해서도 틈틈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운동기구이며 장난감인 것이다. 따라서 자전거는 흥미가 줄어들 수는 있어도 흥미가 떨어져 구석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을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아이가 조금 질렸다고 해서 자주 장난감을 바꿔주며 새로운 것을 제공해준다면 아이는 항상 새로운 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책을 읽다 질리면 또 다른 책,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재미가 없으면 또 다른 장난감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질리는 것에 익숙할 것이고, 그다지 새롭지 않은 장난감을 주었다면 금방 싫증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 deficit / hyperactivity disorder, ADHD)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 중에 고학력 맞벌이 부모의 아이가 많다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맞벌이로 돈은 많이 벌지만 아이와 많이 놀아주지 못해 장난감과 책을 많이 사주면서 아이들은 한 장난감을 오래 가지고 놀지 못하면서 집중력이 저하되어 장애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에게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장난감보다는 자전거처럼 단계를 높일 수 있으며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적지 않은 장난감들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본다.또 [놀이와 창조성 (P.128~134)]에서 보보고 있다. 아이를 오래 걷게 하면 상상력만 과하게 발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가장 좋은 교육 환경은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이라고 생각한다. 집 안은 항상 같은 색의 천장이며 항상 같은 벽과 항상 같은 사람들이 사는 매우 좁은 공간이다. 이렇게 좁고 한정되어있는 공간에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며 무의식중에 자신이 알고 봐왔던 것이 세상의 모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흔히 생기는 오류인데 자신이 봐온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를 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늘색 하늘만 봐왔던 아이라면 당연히 하늘은 하늘색이며 분홍색 하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아이를 안전하게 집에서 교육시키는 것은 배울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30분이라 하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놀이터까지의 거리가 아이의 세상이 될 것이다. 창조적인 활동을 위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에 제한을 두는 것을 결코 옳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마지막으로 [파괴적인 에너지 전환시키기 (P.159~170)]에서 제이슨의 이야기에서 조금 의문이 있었다. 무엇이 제이슨의 마음을 단번에 바꾸게 한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 의문이 해결되었던 것은 [서머힐을 만든 A.S.니일이 말하는 호머 레인 (P.192~202)]에 적혀있는 글 덕분이었다. 호머 레인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치유에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며 레인은 치유의 시작을 한 것이지 한 번의 사건으로 치유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단박에 치유가 되었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단박에 일어나는 치유는 기적 같은 것이지만 사람에게 있어 상처와 고통과 응어리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기란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레인은 제이슨의 그 사건 이후 점점 변해가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아서 이런 오해를 산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이슨은 그 사건이 마음을 열 계기가 된 것이며 리틀 코먼웰스한다.
아침 7시 30분에 등교해서 정규 수업들어가기 전 30분 EBS 강의 듣기, 정규 수업 8교시까지, 그리고 저녁을 먹고 야간자율 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이뤄지는 밤 10시까지의 공부. 그렇게 공부만 하며 눈앞에 있는 대학입시를 향해 달려간다. ‘어느 학교 넣을 거야?’, ‘어느 과 갈 거야?’는 수능성적표를 받고 생각해볼 문제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즈음 대뜸 미술학원을 다니겠다고 선언을 했고, 인문계고등학교 이과에서 유일하게 미술 하는 아이가 되었다. 미대는 수학을 중요시 보지도 않으며 과학탐구를 입시전형에서 아예 빼는 대학교도 있었다. 때문에 나처럼 고등학교에서 이과 수업을 받으며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나 혼자였다. 학원에서 수학공부를 한다고 문제를 풀고 있으면 ‘입시에 중요하지도 않은 거 왜하니?’라는 질문을 받았고, 학교에서 미술학원을 다닌다고 하면 ‘좋겠다.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되겠네.’라는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받았다. 둘 다 기분이 좋지 못한 말이었다. 난 그냥 미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고, 수학이 하고 싶어서 할 뿐이었는데 우리나라 교육에서 보면 나는 효율이 좋지 못한 곳에 투자하고 있는 바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 교육현실에 조금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느끼며 자란 나라 그동안 답답했던 내 속을 이 책은 왠지 시원하게 뚫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책의 저자는 존 테일러 개토이다. 그는 본래 잘나가는 광고회사에 다녔지만 회의감을 느껴 교사의 길을 선택하여 30여 년간 선생으로 재직하며 뉴욕시 ‘올해의 교사’상을 세 차례나 받았고, 1991년 뉴욕 주 ‘올해의 교사’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은 1990년 올해의 교사상을 처음 받을 때 제자의 권유로 인해 쓴 연설문과 91년 수상 연설 등을 엮어 만든 것이다. 연설을 위해 작성된 이 책의 내용은 그가 30여 년간 겪어온 경험담이다.저자는 학교의 숨겨진 교육과정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른 개성어 수업을 들을 때마다 불만을 가져왔다. 관계 대명사는 왜 생략이 되는지, 분사구문은 왜 생략시키는지, 과거분사 뒤에는 왜 목적어가 나오지 않는지 난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영어는 왜 토익용 영어와 텝스용 영어, 토플용 영어, 내신용 영어, 수능용 영어를 따로 배워야 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토익용, 텝스용, 토플용 영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신용 영어와 수능용 영어를 따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나의 궁금증을 한 번에 해결해 주는 영어 수업이 있었다. 그 선생님말씀이 분사구문이나 관계 대명사는 우리나라 말에서 해석 했을 때 생략해 버려도 해석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도 생략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또한, 과거분사 뒤에 목적어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과거분사는 동사가 아닌 형용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과거분사가 ‘만들어진’이라는 말처럼 어떠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즉, 동사 형태인 ‘~을 만들다’와는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목적어가 뒤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예외니 외워라’,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사용한다. 라는 멘트로 학생들에게 원리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해버리니 우리나라 아이들은 텝스용, 수능용, 토플용 영어를 따로 공부해야만 영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 교과뿐만이 아닌 다른 교과들도 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연관성이 없고 암기와 문제 푸는 요령을 가르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서로 연관 지어 생각할 줄 모른다. 즉, 실제 교육과정이란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가장 기초적인 것만을 뭉뚱그려 조각으로 제시해준다. 스스로 생각해서 연계성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혼란이다. 개토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가르친다고 한다.두 번째는 ‘교실에 갇혀있기’이다. 학생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교실에 구속되어진다.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반 전체를 교실에 묶어두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아이들을 교실에 구속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의 의무인 것이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입시 또한 정해진 시간에 많이 그려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하도록 훈련(정해진 시간에 그림을 빨리 그려내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을 받는다. 시간이 촉박해서 시간 내에 못 끝내는 아이들은 미완성인 채로 다음 진도를 나가야하며, 미리 진도를 끝내 놓은 아이들은 못 끝낸 아이들을 위하여 기다리는 일이 허다했다. 진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이러한 방법은 뒤처지는 아이들을 항상 제외시켜야 하는 일이 생기고 이 때문에 우리는 뒤쳐지는 아이는 항상 뒤처지게 만드는 수업방식을 몇 년씩이나 되풀이 하고 있다.네 번째는 ‘정서적 의존성’으로 아이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들 각자의 개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사가 그것에 간섭하여 정서적인 의존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선생님이 주는 동그라미와 곱표, 미소와 찌푸림, 사과 벌, 표창 따위로 아이들은 기뻐하고 좌절하게 된다. 아이들의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그저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로운 생각, 표현력은 이제 그 과목 담당 선생님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그 교사가 좋아할만한 대답을 하고 표현을 하게 된다. 내 아이가 이런 방식으로 학교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는 생각을 한다면 학교를 당장 없애 버리고 싶을 것 같다. 한 반에 학생이 30명가량이나 되고 그 안에서 반드시 성적으로 줄을 세워야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이 정서적 의존성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항상 시험을 보고나면 내 등수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등수가 높으면 의기양양하고 등수가 낮으면 그 과목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다. 상과 벌! 아이들을 다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나 나는 상과 벌 때문에 선생님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내 인생의 전체에 놓고 봤을 때 크지도 않은 보상을 위해 목숨을 힘을 잃고 만다. 나는 아이들을 상담하다보면 답답함을 느낀다. 아이들과 상담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지금 시작해도 될까요?’, ‘지금 실력으로 대학 갈 수 있을까요?’이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판단까지 나에게 맡겨 버린다. 거기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내가 다시 물어보면 항상 대답은 ‘모르겠어요.’였다. 그럴 때면 나도 이렇게 말했었나하는 회의감도 들었으며 흰 도화지를 바라만 보는 아이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야.” 라고 두루뭉술하게 말을 해버렸다. 그 말이 아이들에겐 가장 힘든 대답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여섯 번째는 ‘조건부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전문가의 의견에 평가받아야 하며, 이것은 객관적인 지표인 것처럼 보이는 통지표로 알려진다. 자기 자신이나 부모가 아닌 권위자들의 평가에 자신의 가치를 통보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성적표를 자세히 보면 얼마나 적은 시간과 생각이 들어가는지 다들 놀랄 것이다. 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통지표들이 쌓이고 쌓인 무게 아래 아이들은 무성의한 타인들의 판단에 따라 자기자시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구상에 나타난 모든 주요한 철학 체계의 밑바탕이 되었던 자기평가의 개념을 상실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학점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이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점수가 못나오면 자신의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좌절하곤 한다. 그래서 학점을 따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말이 한때 유행처럼 번졌지만 아직 우리의 인식체계는 행복이 성적순이다.마지막은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모두 감시당하고 있으며, 친구나 가족들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것을 장려하여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게 한다. 쉬는 시간은 다음 책을 준비하고 화장실을 다녀오기에 빠듯해 아이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최소화 했다. 방과 후에는 숙제를 내줘 학교생활의 연장되게 했다. 이런 방식으로 나 되어 날아왔다. “그럼 그 대학교가서 내 반지나 하나 만들어줘.” 성적으로 갈 대학을 정해주고, 하고 싶다는 것보다는 학교이름이 더 중요하고, 예체능을 하찮게 여기는 이 사람이 그동안 내가 봐왔던 선생님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내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학교였고, 선생님이었다. 이 모습이 바로 개토가 말하는 바보가 되어가는 우리네 학교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러한 학교에 다녔고 그러한 교육을 받았다는데 분개했다. 그러면 이렇게 나를 잃게 만드는 학교를 우리는 왜 당연히 여겼던 것일까?여기서 개토는 교육을 축소하여 아이들이 가정에서 더욱 많이 배우게 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날 뉴스나 신문에서는 방과 후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여 학교에서 사교육까지도 책임지자고 한다. 학교교육을 더욱 확장시키자는 견해이다. 이에 개토는 이 견해는 가정과 조직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가정과 조직은 어떻게 보면 비슷하지만 실은 차원이 틀리다. 조직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모인 모임으로 한 가지 기능을 하기 위해 모였다. 조직 속의 사람들은 한 가지 기능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 기능이 잘못되었을 때 상호 보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정은 다르다. 모든 면에서 상호 관련돼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가정속의 아이들은 하나의 문제가 생기면 삶의 전반적 부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상호 보완해가면서 균형을 이루고 더욱 나아져간다. 학교는 대표적인 조직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가정이 해야 하는 일을 학교가 한다고 오해해 학교를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내 생각에도 학교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해서 존재하는 곳이라는 견해보다는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존재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는 맞벌이부부가 많고 한 가구당 아이가 1, 2명인 이 때에 우리 아이들이 가정과 함께 하는 것은 실질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또 다른 조직인 학원에 다.
교육적 체벌은 바람직하지 않다.어느 고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수학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뺨을 때리고 책을 얼굴에 던지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공개되어 파문이 일었다. 또 다른 초등학교에서는 기간제 교사가 신발장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빗자루로 1학년 아이의 머리가 찢어질 정도로 때려 상처를 입혔다는 뉴스도 있었다. 단순히 시험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때리고, 모욕감을 주고, 신발장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아이의 머리에 상처가 나게 때리는 이러한 모습들을 과연 체벌이라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체벌이라는 명목 하에 일방적인 폭력을 가한 사례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이는 9년 전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서는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 에 한해 체벌을 허용하고 있으며 또 6년 전 ‘교육차원의 체벌은 정당하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체벌존속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2011년 3월 18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어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이 금지되었다. 왜 결국 체벌을 금지하였을까?체벌이란 ‘일정한 교육목적으로 학교나 가정에서 아동에게 가하는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 징계’ 라고 사전에 명시되어 있으며 7년 전 판례는 체벌이 법령에 의한 정당행위로 성립하기 위해 다섯 가지의 전제)를 들고 있다.대법원 판례를 깊이 생각해보면 체벌을 할 때에는 모든 교육적 수단을 다 써 본 후에 그래도 교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방법과 정도에 맞게 체벌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예시를 다시 살펴보면 수학성적이 낮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라고 할 수 없다. 마치 학업성적이 좋다는 것이 바람직한 행위로 보일 수 있는데 이는 공부 잘 하는 아이는 착한 아이라는 어릴 적 어른들에게 들은 말로 공식화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한 오류일 뿐이다. 때문에 아이의 학업성적이 낮다고 해서 체벌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책을 얼굴에 던지는 행위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굉장한 치욕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 이는 교육목적을 지녔다고 볼 수 없다. 후자의 경우는 교육의 목적을 지녔다고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화로써 지도할 수도 있는 미미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체벌에 의존하였으며 체벌을 하다 교사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실렸기 때문에 아이를 그 정도로 때린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교육현장에서 흔히 이루어지게 되는 교사의 감정이 격해서 이루어지는 체벌은 그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불법행위임이 명확해진다. 또 감정적 체벌이 아니더라도 다른 교육적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 행하는 체벌 역시 불법행위가 된다. 결국 교육목적의 체벌이라고 하더라도 비교육적 폭력으로 변할 수 있으며 교육목적의 체벌과 비교육적 폭력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아동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행위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선택이 그 행위의 가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여부에 의하여 좌우된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교육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이는 그 행위의 가치를 알고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니 하면 안 돼.’ 라고 교육이 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이 뒤 따랐기 때문에 아프지 않으려고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체벌로 인한 교육은 그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효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체벌로 인해 아이는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으며 뿐 아니라 몰래 그 행동을 했다는 것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결국은 체벌로 인한 교육은 완벽하게 교육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며 아이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한 적극적인 행위를 유발하지 못하게 한다.체벌은 폭력과 다르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체벌 또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체벌과 폭력의 차이 중 ‘교육목적을 둔’ 이라는 것은 어른이 만든 것이지 맞는 아이에게 이해가 된 개념이 아니다. 때문에 아이는 자신이 맞는 이유에 대해 정확히 모르거나 이 체벌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때 반항심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흔히들 체벌을 정당화하기위해 쓰는 말로 ‘잘못했으니까 맞아야지.’ 라는 말은 잘못을 했으면 누구든 맞아야 하는 것이며 잘못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때려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잘못했으니까 맞아야지’ 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아이는 잘못을 했으면 맞는 것이 옳다고 교육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친구가 잘못을 했을 때 아이는 어떤 행동을 할까? 그 아이는 충분히 ‘잘못했으니까 맞아야 돼.’ 하며 그 친구를 때릴 수 있다. 아이에게는 자기가 친구를 때린 것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 싸움에 중재자로 나선 교사는 아이에게 ‘친구를 때리는 것은 옳지 않아.’ 라고 가르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왜 잘못한 일인지, 친구가 아니라 내가 혼나야하는 일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체 친구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친구를 체벌하는 것을 왜 폭력으로 보는가? 아이 역시 친구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휘두른 체벌일 뿐인데 말이다. 즉, 체벌은 아동-청소년과 어른-비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이고 계급문제이다. ‘맞아도 되는 존재’(아이, 청소년)와 ‘사람’(어른, 비청소년)을 분리시키는 인식과 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이다. 정혜신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서 때리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여러분보다 약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죠.” 결국 체벌은 때리는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정당화 시켜놓은 폭력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체벌은 누구나 누구에게 교육목적을 두고 육체적 고통을 가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체벌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들은 교사들이 체벌을 불가피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효과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다소 시간이 지난 연구 자료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2000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교사가 체벌의 주요 목적은 첫 번째가 수업분위기 유지(45.4%)로 나타났고, 학교질서유지(29.7%), 문제 학생 징계 및 선도(14.7%), 학생의 성적 향상(4.8), 기타(5.4%)의 순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은 ‘학습태도 불량’과 관련하여 85%이상이 체벌 당한 적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고, 특히 성적과 관련된 체벌도 20%이상이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성적부진으로 인한 체벌은 학생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체벌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공부를 못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체벌을 가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체벌을 당한 학생들이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을 교정하였는가의 문제이다. 체벌이 문제행동을 교정하고 개선하는 데에 실제적인 효과를 보인다면 체벌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에도 불과하고 부분적으로는 체벌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체벌경험이 많을수록 비행경험도 많고 공격성 및 폭력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강하다. 하지만 학교체벌을 처음 경험한 연령과 비행경험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즉 조기 체벌은 아무런 비행 억제효과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체벌은 결코 문제 행동에 대한 적절한 치료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최초 체벌 연령이 낮을수록 현재에도 체벌당하는 빈도가 높고, 공격성 및 폭력우호도가 높으며, 문제아로서의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정도가 높았다. 여기에 주목해 본다면, 체벌은 합리적인 문제해결력 및 자기억제력을 가져온다기보다는 공격성 학습과 낙인과정을 매개로 일탈 성향을 가중시켰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 체벌 경험이 많을수록 스스로 문제아라는 자아인식도 강하고, 체벌 후 문제 행동을 표출하는 정도가 높은 반면, 반성효과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거의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체벌을 통해 공격성을 학습하며, 스스로를 문제아로 낙인하고, 일탈 성향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결국 ‘체벌을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에 허용할 수 있다’고 했던 시행령은 제한조건이 잘 지켜지지 않았고, 위 연구결과처럼 의도했던 교육적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도리어 역효과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2011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31조 제8항의 체벌금지 조항이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