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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신약개론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고든D.피 & 더글라스 스튜어트이 상하게도 늘 과제로 접하게 되는 책은 잘 읽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감동이 적다. 그러나 이 책은 성경을 계속적으로 읽고, 묵상하고, 가르쳐야하는 누구나에게 참 유익한 책임을 서문만 읽어도 금새 알 수 있다. 그동안 성경을 읽는 안내서와 같은 많은 개관서들을 접하였고 그 책들 역시 독자들이 성경을 더 잘 읽고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기는 하지만 늘 부분적인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에 적은 유익이 있을 뿐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임.)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책들과 근본적으로 차별되는 분명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다양한 책들이 어떻게 전체와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지를 먼저 보여준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거대퍼즐과 같은 성경 전체의 큰 그림을 보여주고, 각 책들이 전체를 구성하는 퍼즐이 되어 어떤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지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각각의 책들이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를 어떻게 구성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차별된 유익은 표현이나 구성이 이해하기 쉽고, 간결하게 되어있으며, 개론적인 문제들(저자, 기록연대, 수신자, 저작동기)등을 알려주는데 집중하거나 지면이나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을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제시해 주었다.처음은 ‘둘러보기’를 통해 각 책의 전체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었으며, 그 다음으로 ‘들어가기’와 ‘주목하기’를 통해서는 성경본문을 읽는 방법과 본문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주요 주제들과 중요한 배경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마지막은 표현 자체가 퍽 마음에 드는 ‘산책하기’인데 (이 표현처럼 누구나 성경을 정말 산책하듯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독자의 손을 잡고 성경의 각 책을 산책하면서 책의 다양한 부분들이 어떤 식으로 전체를 형성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특별히 다른 개관서들과는 다르게 의도적으 즐거워하고, 의지하며 궁극적으로 피조성에서 존재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고, 반역의 끔찍한 결과를 경험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상실했으며, 그 결과 그의 본성과 속성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고 더럽혔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어서 전 존재와 행위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인간이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인 사탄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락한 결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였다. 그 결과 비탄과 소외, 외로움과 두려움 고통을 겪는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회복되고 생명을 얻으려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구속성경은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셔서 죄와 피조물의 반역에 무섭게 진노하시는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자비와 사라아과 신실함이 충만한 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신을 반역하고 거부하여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죄책과 소외를 겪는 피조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세 번째 장은 성경 이야기에서 가장 긴 장으로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물들을 구속하고 회복하는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속과 회복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상실한 하나님에 대한 시야를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재확립하신다.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시야를 회복해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셨으며,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교제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거부되고 온 소망들의 절정이자 성취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적 전통과 명확히 부합하는 인물이며, 부활 역시 이런 측면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가 바로 기다려 오던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소망과 기대에 대한 성취로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마태복음마태복음의 저자는 익명이다. 파피아스는 :첫 복음서:를 사도 마태의 저작으로 간주하나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데서 이방인들을 제자로 삼는 사명을 위임하기까지의 교훈을 포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강조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대인의 왕이시며, 예수님은 기적적인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이시며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계속해서 중요하다. 왕국의 복음은 모든 민족들-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것이다. 작은 내러티브: 하나님의 이야기의 신약부분을 시작하는 방식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자기 이름을 위해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복음전하는 자들로 세상에 보내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신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신다.▶ 마가복음마가복의 저자는 익명이지만 주후 125년 파피아스는 한때 바울의 동료였고 나중에 베드로의 동료가 된 마가 요한을 저자하고 한다. 세례 받으실 때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예수님의 이야기. 약 3분의 2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서술하는 반면 나머지 3분의 1은 예루살렘에서 보낸 예수님의 마지막 한주를 서술한다. 강조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도래하였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약속된 새 출애굽을 실현하실 이다, 왕적 메시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그의 정체는 알려진 자들 외에는 숨겨졌다. 새 출애굼의 방식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으로 이어지며, 제자도의 길은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활이후의 통찰력 있는 관점에서 서술한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시고, 십자가를 통해 자기 생명을 모든 이들을 위해 내어주신 이야기이다.강조점: 예수님은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는 자신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인류를 구속하신다. 제자도는 “포도나무(예수님)에 붙어서”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자기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작은 내러티브: 공관복음서들이 이스라엘과 당시 세계의 역사에서 예수님이 수행하신 역할에 관심을 두는 반면, 요한복음은 전 역사의 구도-창조에서 시작하여 구속과 그 이후(마지막 부활)에서 예수님이 수행하신 역할에 관심을 갖는다. 메시아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기독교 이야기의 궁극적인 복음이다.▶ 성경에 나타난 서신서와 계시록서신서들은 새롭게 구속을 받고 화해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소망과 기쁨 중에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완성되기를 고대하면서 현 세대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전례적으로 서신서들은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제하며, 주요 관심사는 하님의 백성들을 교훈하고 격려하며 권면하는 데 있다. 이런 서신서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서신서 저자들이 주로 하나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 자자들이 말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동시에 그들은 성령의 역할을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과 현재적으로 함께하신다. 둘째, 모든 서신서가 1세대 개종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므로 기독교 교리나 윤리학에 대한 완전한 요약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서신서들은 신자들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기록되었으며, 서신서들의 대부분이 교회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던 몇 가지 거짓 교훈들에 대한 직접적으로 대응함으로 거짓진리를 폭로하고 반박하는 측면을 강조하는보,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유대 그리스도인 순회 전도자들)도 함께 다룬다. 강조점: 고린도전서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 복음과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의 행실,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진정한 본질, 미래에 일어날 그리스도인들의 육체의 부활을 말한다. 고린도후서는 최근에 디도가 고린도 교회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것과 바울의 세 번째 방문 계획을 그가 도착하기 전에 교회에서 연보를 준비해 두어야 할 필요성과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거짓 사도들을 즉각 수용한 것에 비추어서 진술하고 있다. 작은 내러티브: 고린도전서는 성경 이야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1)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에 반영된 자신의 형상을 닮을 수 있게 하셨다. 2)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또는 변화로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람을 이기실 것이다. 고린도후서가 개인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성경 이야기에서 이 서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서신에서 하나님의 속성, 즉 십자가의 약함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그의 사랑의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십자가의 약함이 제자도의 유일한 참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 세상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저자는 사도 바울. 그리고 함께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이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에 대항하여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신자들과 벌인 격렬한 논쟁이다.강조점: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유래한 것이며, 예수의 죽음 때문에 유대인의 종교적 규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독후감/창작| 2014.12.15| 10페이지| 2,000원| 조회(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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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음과 행위의 관계- 열매로 알리라 평가A+최고예요
    마태복음에 나타난 믿음과 행위의 관계‘열매로 알리라!’를 읽고저자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구원과 신앙생활의 만능열쇠처럼 여겨왔던 ‘믿음’과 그에 반해 덜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지 못했던 ‘행위’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명한다. 구원론적 역할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만 인정되며, 예수의 교훈이나 명령을 지키는 것, 지키지 않는 것은 천국 안에서 어떤 상급을 받느냐는 것에만 관계할 뿐. ‘행위’는 구원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다른 복음서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강조된 마태복음을 연구함으로 ‘행위’의 참된 가치를 되살리고, 믿음과의 관계 정립을 통해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한다.나는 현재 고등부 교사이며, 수년간 청년 새가족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되는 구원과 예정에 대해, 또 이번 과제의 주제인 믿음과 행함의 관계등에 대한(물론 이밖에도 너무 많다.) 물론 의미적인 이해는 있었지만 명확한 성경적 근거와 논리가 부족했기에 갑작스런 돌발 질문에 속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고, 교재에서 정리 된 내용 이상을 벗어날 수 없어 늘 답답했고, 어느 누구보다도 성경적 이해와 체계가 절실했다.그래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정훈택 교수님의 문제 제기와 그로 인한 연구의 성과로 얻어 진 성경적 근거에 기초한 정확한 정립이 나의 것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더 이상 의미적이고 주관적인 이해해서 벗어나 성경적 근거와 논리로 바르게 무장하여서, 바르게 이해함으로 확신 있게 믿고, 확신 있게 가르칠 수 있는 자가 되어 주먹구구식 믿음과 이해 없는 믿음을 양산하는 교회교육을 새롭게 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망한다. 반드시 한 번은 정리되어야 하는 이 믿음과 행함에 관한 이해를 과제를 통해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고,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성경 어떤 본문에서도 구체적으로 종합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으며. 마태복음에서도 관계를 암시하고 있을 뿐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숨겨진 이면을 연구해 보면 이 두 요소가 일체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삶에는 예수의 교훈을 따르는 삶과 그분에 대한 믿음이 조화되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행위는 마태복음에서는 독립적인 주제로 작용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음과의 관계에서만 바르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마태복음을 통해 이해하게 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저자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가 서로 대립되거나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총제적 삶의 영역에서 하나로 결합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 그리고 삶의 실천을 통하여 각 개인과 교회의 실체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열매 맺는 나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우리가 그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열매. 즉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삶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식은 지성적 확신과 감성적 체험과 그리고 의지적 결단에 그 뿌리를 두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만남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삶에서 가장 확실한 것. 바로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준다.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무 자체에 있다. 나무와 열매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열매는 그 나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있어도 나무 없이 독자적이거나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지는 못한다. 열매가 나무에 달리듯이 행위란 언제나 그 행위의 주체의 됨됨이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견해에 의하면 행위나 윤리란 언제나 사람과의 관련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특성, 그 믿음의 증거요 표현이다. 행위에 관한 질문은 인격이나 성격에 관한 질문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열매와 나무가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한 인간이 행하는 것과 그가 그의 내면 즉 그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통일체가 된다. 사람과 그의 행동의 뗄 수 없는 관계성은 동시에 행위의 한계성을 증거 한다는 사실이다. 즉 행위의 가능성 여부는 나무 자체에 의해서 한정되고 기대된다는 것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열매가 없음이나 나쁜 열매를 맺음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쁜 나무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며, 곧 찍혀 불에 던져지는 운명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거꾸로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심판의 기준은 단순히 열매 없음이나 나쁜 열매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있다. 마태복음은 따라서 누가 선하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이면으로 돌아가 누가 선한 사라마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예수께서 명령하시고 기대하시는 좋은 열매 곧 선한 행실이란 선한 사람이라는 토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와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이웃을 향한 태도, 혹은 종교와 윤리가 결합되어 있듯이 예수를 믿음과 그의 교훈을 따르는 것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자격요건을 구성하는 두 가지면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신 예수를 향한 기독론적 믿음은 제자들이 예수와의 관계에서 보였던 것처럼 인격적 실체이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고, 그를 의지했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았다. 믿음 개념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요소는 살아계신 예수의 실체에 있는 것이다. 그의 교훈이나 삶을 위한 가르침의 가치와 권위는 인격체이신 예수에게 달려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도 계속되는 교회의 영속적 요소는 예수의 현존성과 현존하시는 예수를 향한 믿음에서만 찾을 수 있다.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가르침이나 예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세상 끝까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 자신인 것이다. 기독론이란 이런 예수에 관한 가르침이지만 기독론이 지향하는 것은 그 가르침에 대한 지적 승인이 아니라 기독론이 보여주는 바 살아계신 예수의 존재이며 그분과의 실제관계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런 기독론 적 지식 위에 살아 계신 그를 의존하고 그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를 믿음과 그의 교훈을 순종하는 것 사이의 관계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니다. 믿음이란 그 주님에게 굴복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요, 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전 인격을 주님께 종속시킬 때 이 믿음은 한 인간 전체를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전 생애, 전 인격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행동과 삶 전체를 통하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믿음은 행위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행위에 전제되기도 한다. 행위는 믿음의 증거로, 결과로 혹은 열매로 나타난다. 두 요소는 서로를 보충하며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전인적인 응답 노릇을 한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의 제자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행위가 결여되는 것에도 제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이든지 절름발이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 즉 기독교 공동체란 본질상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근거로 모여드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그들의 삶은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증거이자 동시에 미래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조건인 것이다.지금까지 이해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믿음과 행위는 서로 이질적인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상호보완 되는 개념이며 그렇기에 애시당초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성도들의 정체성과 본질을 다루고 있기에 결국, 열매 없는 죽은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행위를 무시하는 열매 없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이 진리의 선포가 엄중한 경고가 될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4.12.15| 4페이지| 1,000원| 조회(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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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두아르트 로제의 신약성서배경사를 읽고
    에두아르트 로제의‘신약성서 배경사’를 읽고이 책은 신약 성서시대를 전후하여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정치, 사회, 문화 및 경제적 사건들을 다루어 주고 있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가 헬라 시대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자기 역사를 이어 오고, 신앙을 지켜 왔는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운동 그리고 그것이 초대 기독교에 미친 영향, 복음이 그 당시 초대 교인들에게 어떻게 받아 들여졌는가 하는 점을 다루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역사와 문화, 언어 등 여러 가지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와 헬라주의적-로마적 배경을 모르고는 신약 성서를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없다. 또한 신약성서는 팔레스타인과 로마 제국의 관계를 정확하게 고증 할 수 있는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세계의 이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 당시 배경들은 동시대의 문헌, 비문, 비문학적인 서류들, 그리고 고고학의 발견 등을 비교함으로써 더욱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데 이 책은 그 주변 여러 국가들의 문헌들을 나열하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서술함으로써 신약성서 배경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이해를 도와준다.제1부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제 1장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1) 페르샤 지배하의 팔레스타인유대교의 역사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서 시작된다. 그 땅의 북부에 이주했던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하여 몰락,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7년 끝내 바빌론에 의해 점령,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으며, 민족의 지배층은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하지만 그들은 바빌론 땅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켰으며, 신의 율법을 엄수하였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선택 받았다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려는 표지로서 안식일 계명과 할례의 계명을 준수하였다. 그럼으로써 지배가 끝난 후 조상의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타인총독 가비니우스는 기원전 57년 팔레스타인을 직접 식민지 총독에 예속되는 다섯 개 행정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로마 제국의 극심한 권력 투쟁은 팔레스타인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시저가 그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자 히르칸과 안티파테르는 재빨리 승리한 쪽 파벌에 가담하는데 성공. 시저는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에 지금까지 누리던 권리를 새롭게 했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더 큰 특권을 부여하였다. 유대교는 방해받지 않고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과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이 되었다. 시저가 암살됨으로(기원전 44년) 로마 제국 안에는 혼란이 일어났는데 기원전 40년 헤로데는 로마로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으로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로마의 지배자의 지지를 얻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 통치와 함께 로마 제국에 찾아온 평화는 팔레스타인에도 찾아왔다. 헤로데는 그의 통치의 적들과 자기의 세력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였는데 베들레헴의 유아 살해에 관한 신약성서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성격의 모습과 일치한다. 헤로데의 말년에 세례 요한과 나자렛 예수가 태어났다. 그는 죽기 전 세 명의 아들, 즉 아르케라우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립푸스에게 분할해 주었다. 아르케라우스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안티파스는 갈릴리 있는 베뢰아를, 필립푸스는 북부에 있는 동부 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예수시대에는 본디오빌라도가 로마총독으로 있었다.6) 유대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로마 점령군의 행동은 유대 백성들의 증오를 극에 달하게 하였다. 아그립파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에 대항하는 무장 폭동은 무모한 짓이라고 설득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타오르는 불은 거질 수 없었다. 로마 총독 체스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없었다. 그 후 네로 황제는 가장 뛰어난 용장 베스파시안을 유대인들과의 전쟁에 파견하게 되고 유대인들의 항거는 47일 만에 허물어 졌다. 이리하여 로마의시야 시대를 향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의 선포와 행위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결정적인 거부에 부딪쳤는데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율법의 외적인 준수만을 생각하고 마음의 정결을 모르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c. 혁명당원들이들은 율법에 대한 열정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 저항하였다. 모든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일치하였으며 하나님만을 그들의 주와 왕으로 인정하였기에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 그에게 세금을 납부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공경하라고 기록한 첫째 계명을 범하게 되므로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에 반대하였다. 로마인들의 눈에 그들은 강도와 도적으로 보였지만 이들은 민족주의였고 유대주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혁명당원들은 로마의 지배에 대해 주민들에게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유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미래의 메시야적인 전환기를 참고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역사의 진행을 결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로마군대를 대항해 폭동을 일으켰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비참한 종말을 초래 하였다.d. 엣세네파 사람들엣세네파 사람들은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들은 필로나 요세푸스에 의해 전해진다. 이들은 정치적 종교적인 삶을 강력하게 규정하였고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물러나 생활을 했던 독자적인 유대인운동이었다. 아람어의 하사야 즉 “경건한 사람들”에서 기원되었으며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약 4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쿰란이라는 지역에서 독립된 공동생활을 하였다. 모든 개인소유를 공동체의 소유로 나누어 가지고 들어왔으며 세심하게 지켜야 하는 규정들을 어길시 엄격한 심팜을 받았다. 공동체의 생활, 규정, 서적들에 대해 외부사람들에게 누설해선 안 되었고, 인간의 몸은 영혼의 육신적인 감옥이문에 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강제적인 조세로 인해 곤궁에 처한 유대인들은 고국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또한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은 흩어졌고 포로로 먼 타국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사회는 희랍문화와 문명을 강하게 접하게 되었는데 회당을 희랍의 건축 양식에 따라 지었을 뿐 아니라 생활 습관 역시 그들의 문화를 따라갔다. 디아스포라의 유대교가 개방하였던 희랍어와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이 변화되었는데 디아스포라에서는 종말론과 메시야 대림사상이 후퇴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을 회복할 메시야가 어떻게 이방 나라에 나타나겠느냐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당의 가르침에서는 책임적인 생활과 행동을 위한 교훈을 주는 윤리가 전명에 등장하게 된다.b. 칠십인역 성경헬라주의 세계 속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가 율법 위에 확고하게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랍어로 번역해야 했다. 톨레메우스 2세인 필라델푸스 왕은 궁중 도서관에 유대인들의 율법의 희랍어 번역본이 없다는 사서 데메트리우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한 수치스러운 결함을 메꾸기 위해 예루살렘 대제사장에게 사신을 보내 이스라엘의 매 지파 6명씩 그의 도서관을 위해 번역할 임무를 수행할 72명의 학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 한다. 이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시의 앞에 있는 파로스 섬에서 매일 저녁 함께 모여 각자가 번역한 것을 수집하여 어떻게 원문이 결정될 수 있는지 서로 비교하면서 일치시켰다. 72일후 번역이 끝났고 유대인 공동체 앞에서 낭독이 되었는데 그 정확하고 세심한 번역에 감탄을 하며 환호를 하였다. 그리하여 72라는 숫자에서 우수리를 떼어내고 70정수로 채우면서 희랍어 번역본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c. 알렉산드리아의 필로필로는 그의 사고와 행위 안에서 철학적 숙고의 도움을 얻어 유대교에 대한 합리적인 논증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필로는 성경안의 많은 은유적 해석들을 기독교 공동체와 직접적인 관계를 설명하기위해 사용하였으며 다. 기원전 4세기 모세의 다섯 책의 편집이 끝났으며 토라는 유대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토라는 인간의 협력 없이 모세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하늘에 있었던 반면 다른 성서는 인간의 신적인 영감의 힘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토라는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후대로 전수 되었는데 “모세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아 여호수아에게 물려주었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그리고 예언자들은 그 율법을 대회당의 남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성서의 해석은 율법의 실제적인 타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중요하였으며 학가다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했다. 학가다는 유익한 이야기나 수식, 율법의 계명과 상관없는 신앙과 희망의 내용을 담은 글이든, 교훈적인 성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율법에 따라 바르게 처신하기 위한 교훈, 즉 할라카에서 구별되었다. 또한 규범적인 것으로 타당한 교훈으로 편찬된 미쉬나도 지켜졌으며 미쉬나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학자들의 견해는 토세프타, 즉 부록이나 첨가물이라는 표시를 달고 있었다. 기록된 율법과 한없이 무수한 규정들로 이루어진 구전된 율법 안에는 개별적인 계명들의 다양성 속에서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뜻이 들어있으며 이세상이 창조되기 전 이미 하나님이 만드신 율법은 영원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5) 하나님과 인간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이 담겨 있는 율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거룩과 경외로 일컬어지는 유일한 하나님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떠한 남용이나 모독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피하였기 때문에 많은 다른 대체 호칭이 생겼는데 “전능자”, “숭고자”, “하늘의주” 등 하나님을 암시하는 다른 명칭들을 선택하였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으며, 또한 행위에 근거하여 심판이 내려진다고 믿었
    독후감/창작| 2014.12.15| 12페이지| 2,000원| 조회(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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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땅의 경제적 상황
    [성서 배경사]이스라엘 땅의 경제적 상황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 민중의 경제는 농업, 수공업, 상공업 같은 생산적 요인, 정치적 패권에 따른 상황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고, 변화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땅은 재산의 기본이었기에 경제적 상황은 땅에 대한 소유관계를 염두 해야 설명할 수 있다. 유대 민중이 부담해야 했던 조세와 경제에서 성전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등 이스라엘 땅의 경제적 상황들을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정리하였다.1. 이스라엘의 농업, 수공업, 상공업이스라엘 땅의 경제에서의 결정적 요인들팔레스타인의 경제는 주로 농업 경제였다. 농업 경제의 가정 중요한 생산 수단은 토지 및 인간의 노동력이었으며, 그 외에 자연 자원이 있었다. 주요 생산물은 곡물과 올리브였지만 포도주와 그 밖의 과일, 야채, 향료, 나무도 생산되었으며, 향수나 의약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향유도 빠뜨릴 수 없는 품목이었다. 그 밖에도 아스팔트 제조와 어느 정도의 가축 사육도 있었는데, 특히 이것은 유다 지방에서 성전 제사와 연관되었다. 유대의 농업이 자연적인 제약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법령(할라카 규정)의 통제를 받았으며, 그 외에 교역, 수공업, 사업에 대한 탈무드의 규정등 경제 분야에 다양한 종교적 규범이 존재했다. 헬레니즘화로 인해 도시화가 확산되면서 수공업과 사업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수공업은 특히 예루살렘을 비롯한 도시에 집중되었고, 그로인해 건설 사업의 팽창되면서 수많은 공업자들의 수요가 늘어났다. 교역활동은 상당히 분화되어 있었지만, 운송의 문제나 관세와 같은 장애물 때문에 지역 차원을 넘어 폭넓은 교역보다는 언제나 그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다.팔레스타인 역사의 맥락에서 경제의 측면들? 프롤레마이오스 왕가의 통치팔레스타인이 중앙집권적이고 거대한 헬레니즘적 제후국에 편입됨으로써 엄격하게 하나의 군주와 그 가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국가 경제의 하위 체계가 되었다. 이것은 국주, 그리고 그 군주의 가문이 경제 과정의 정점이자 중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심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이주와 도시 건설을 통한 왕실 부지의 강제 착취가 일어났다. 토지의 합리적인 운용과 엄격한 관리 체계를 기반으로 번영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칙령 ‘필라델포스’를 보면 자유농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지를 표명했다. 국가의 임차인들이나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농민들은 사업의 수익성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셀레우코스 통치기셀레우코스 왕조는 패권 장악 초기 예루살렘에 대한 조세 면제 조치를 실시.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제적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조세 정책과 관련. 유대 백서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에코노미카]를 통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경제는 네 개의 범주, 즉 왕실 경제, 사트라피 경제, 도시경제, 개인경제로 나뉜다. 왕실은 화폐경제, 대내외 교역, 조세를 독점했다. 사트라프가 다스리는 지방 당국은 소작료와 십일조, 즉 조세를 통해 거두어들이는 국가 수입을 관리했다. 지방 경제의 수입은 국가의 부동산이나 그 밖의 다른 재산, 교역과 사업, 가축, 관세, 다양한 종류의 조세로 충당되었다. 폴리스의 경제는 그 영토의 토지 소유에서 나오는 수입과 조세로 거두어들이는 수입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개인경제는 토지 소유, 그리고 돈을 대여하는 것과 관련된다. 농촌 경제와 도시 경제의 차이는 특히 토지 소유와 그로 인한 농부들의 예속적 상황에서 잘 나타난다.? 하스몬 왕가 통치기의 상황하스몬 통치가 시작되면서 유대의 소농들은 셀레우코스 지배자들이 부과했던 조세 부담에서 벗어나 비교적 괜찮은 시절을 누렸다. 하스몬 가문은 땅 자체를 자신들의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샬리트(A.Schalit)의 추측에 따르면, 하스몬 왕가는 심지어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에 땅 없는 소농들을 이주시키고 거기서 왕실 영지의 소작인으로 일하거나 아니면 그 땅의 주인이 되게 했다.? 로마와 헤롯 정권의 통치로 인한 상황 변화기원전 1세기 폼페이우스와 가비니우스는 팔레 의무는 백성들에게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헤롯 1세는 막대한 조세를 징수했으며, 전통적인 상위 계층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토지를 압류하였다. 땅이 비유대계 주인들의 수중에 들어간 반면 유대인 소작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적 갈등의 가능성이 고조되었다.? 토지 소유핀시(Fiensy) 분석, 1.소규모경영(10~80유게룸=대략2.5~10헥타르) 2.중간규모경영(80~500유게룸=대략20~125헥타르) 3.대규모경영(500유게룸이상=125헥타르 이상) 주로 헤롯가문, 왕실, 귀족, 제사장 가문이 대규모 토지를 차지. 중간 이상 규모의 대토지 소유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소작인이나 날품팔이나 노예를 고용하였음.? 헤롯 통치기의 경제 집중화헤롯이 온 이스라엘을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 그의 이주 정책은 로마의 퇴역 군인들과 바빌로니아나 이두메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 수혜자가 된다. 헤롯과 그 후계자들의 도시 개축과 대규모 건설공사를 진행했고, 땅 없는 소농들에게 어느 정도의 일자리 기회가 되기도 했다. 헤롯치하에 거둬들이는 직접적인 연간 수입은 최소한 1,000달란트(1달란트=6,000데나리온)에 달했으며, 아그립바 1세의 수입은 1,200달란트에 달했다고 한다. 로마가 패권을 장악한 이후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변동은 심각한 토지부족을 야기 시켰으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더 적은 면적의 땅으로 연명해야 했고, 그 결과 전통적인 주거 형태가 해체된다. 이와 동시에 재산의 강제 압류와 강압적인 조세 부담은 자금 가능성을 더욱 축소시켰고, 그 결과 소농들이 땅을 빼앗기고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자유농들이 소작농이 되고, 다시 날품팔이로, 심지어 거지로 추락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마을은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예속되어 갔다.? 부채 문제헤롯 통치기의 유대인의 파격적인 채권법인 프로스볼(Prosbol)제도가 등장한다. 이는 안식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탕감하라는 신명기 15장1절 이하 규정을 어기고 사면의 해가 지나도 채무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아 궁지에 몰릴 것을 고려한 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굿맨(M.Goodman)은 이 제도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안전한 돈거래에 대한 관심을 뒷받침하면서 제사장들과 일반 귀족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도입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2. 이스라엘의 조세 제도이스라엘 땅엣 공납금을 징수하고 조세를 회수하는 것은 지배 세력의 실제적 목적이었다. 자신들이 획득한 권련을 지탱. 확대하기 위함이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 백성에게 부과된 다양한 종교세(성전세,십일조,첫열매제물등)과 조공, 직접세(토지세,인두세), 간접세(왕관세,소금세,판매세등), 관세(수출입관세,항구관세,통행세등), 각종 수수료와 강제 부역을 모두 조세라는 개념으로 포괄하려 한다. 이 구조적인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동일하다.국세? 헬레니즘적 통치기의 조세 체계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적 조세 임대차 제도를 도입. 통치자들이 조세 징수의 책임을 직접 지는 것이 아니라 조세 임차인등 조세 징수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였다. 매년 최고 금액을 제안하는 사람에게 조세징수권이 입찰되었는데, 대개는 소규모 임대차였다. 임차인과 그 보증인들은 할당된 양을 징수하지 못할 경우 최종적인 위험 부담을 지고 있었으나 정해진 것 이상을 획득했을 경우에는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 셀레우코스 통치기에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경쟁은 곧 조세징수권 입찰을 둘러싼 경쟁이었다. 여기서도 조세 행정에 대한 책임은 대제사장의 수중에 있었다. 마케베오서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4세가 왕이 된 기원전 175년에서 169년. 성전 약탈이 일어난 해까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바친 조공의 액수는 거의 4,000달란트에 달했을 정도로 지나쳤다고 한다. 어쩌면 마카베오 봉기는 유대 민족에 대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착취에서 해방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스몬 통치기의 조세 체계이방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조공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는 많은 용병대를 고용해 군사행동을 전개했적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세분화된 과세 및 관세 체계를 전제하고 있는 이른바 페르가뭄 칙령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로마와 헤롯 통치기의 조세 체계팔레스타인의 유대 백성에게 로마의 정복 전쟁은 조세와 관련 3년이라는 짧은 휴지기를 주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오히려 전쟁에 때한 속죄금, 군인들의 급료, 전쟁 배상금까지 로마의 시리아 총독에게 지불해야 했다. 이에 로마인 징수원들이 유다에 들어왔다. 폼페이우스의 후계자로 시리아 총독이 된 가비우스는 조세 징수를 특히 행정관 안티파테르와 그에게 속한 다섯 개 행정 구역의 상위층(산헤드린)에게 위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롯 치하의 유다는 처음에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조공을 바쳤다. 옥타비아누스가 헤롯을 통치자로 인정하자 헤롯은 보답으로 800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선물한다. 실제 헤롯은 로마의 행정관이면서 유대왕의 왕관까지 쓰고 있었으니, 유대 백성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되었다. 유대 백성들은 헤롯의 폭압적인 조세 부담과 짐에서 벗어나려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유다 지역의 조세 체계기원전 6년 아르켈라오의 통치 구역이 로마의 속주가 되자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인이 조세의 직접 수취인이 되었고, 호구조사도 시행되었다. 호구 조사는 토지세와 인두세를 징수하기 위한 주민 조사, 즉 앞으로의 과세를 위한 명단 작성을 의미했다. 한 가정의 모든 남자는 만 14세부터, 여자는 만 12세부터 조공의 의무를 져야 하며, 매년 한 데나리온을 납부해야 했다. 조세 징수에 대한 책임은 제 3의 집단. 일반적으로 상위 계층과 최고의 값을 부르는 조세 임차인이 조세를 징수했다. 요세푸스의 언급을 보면 유대 귀족들이 조세 징수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국민총생산에서 조세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12~50% 정도였으며 비록 지배 세력의 교체에 따라 그때마다 변화는 있었지만 조세로 인한 백성들의 부담은 항상 있었다. 타키투스로 유다 지역의 조세가 과중한 짐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헤롯은 몇 차례에 걸쳐.
    교육학| 2014.12.15| 5페이지| 1,000원| 조회(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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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이란 무엇인가?
    [목회신학]‘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읽고김 세윤 저신앙생활 오래 해도 자신이 믿는 바를 잘 몰라,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복음에 대해 애매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는 주먹구구식의 바람직하지 못한 불안한 믿음들. 이 책에서 지적하듯 복음을 올바로, 포괄적으로 실존과 연결하여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 아는 것과 대충 하는 것에는 능력이 없다. 제대로 알고, 확신해야 흔들리지 않으며, 능력이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며, 이 세상의 참 진리인 복음과 구원의 이해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며 성경이 밝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조금 알고 대충 알아 능력 없이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복음의 진리 위에, 구원에 확신 가운데 제대로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구원이 뭘까? 구원이 왜 필요한가? 이런 원론적인 질문 앞에 의미적으로 이해하고는 있는데 말로 술술 풀기에는 무언가 모호하고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구원의 이해를 아주 쉽게 접근하고, 쉽게 풀어 주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구원에 관한 이해를 특별히 고등부 교사이기에 다음세대가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정리해 보려한다.1. 니들이 구원을 알아??구원이 뭐지?? 감기에 걸리면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나고, 머리가 아픈 증상이 나타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거짓, 불의, 증오, 아픔, 여러 가지 결핍, 갈등..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여러 가지 고난과 좋지 않은 악한 증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생은 바로 이 ‘죽음’에 걸려 있기 때문에 이 죽음과 그 증상들인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럼 우리는 왜 그 죽음의 병에 걸린 걸까?성경은 (롬6:23)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이 죄의 대가로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죽음의 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도대체 죄가 뭐길 래?? 우리가 생각과 말과 이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여,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의 자기 뜻대로 살려는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 때문인데, 즉 죄는 자기지혜, 자기힘, 자기사랑 등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며 우기는 겁 없는 독립선언과 같은 것이다.쉽게 설명하면,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분리된 뿌리 뽑힌 풀에 비유될 수 있다. 그 뿌리 뽑힌 풀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제한된 수분과 영양분이 있을 때 까지만 잠시 살다가 곧 말라 비틀어져 죽고 만다. 그의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더 이상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풀이 땅에서 뽑히는 순간 사실상 죽음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된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제한된 자원으로 얼마동안은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자원은 곧 고갈되기 때문에 곧 죽게 된다는 것이다.자기를 주장하려는 인간의 내면 곧 그 속에는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꾐에 빠져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등을 돌리고 거짓과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여, 타락하게 되는데, 이것이 죽음의 시작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던 무한한 자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자기 속에 있는 자원은 제한되었기에 본능적으로 남의 자원을 빼앗아 채우려 한다. 그래서 인간 사회가 치열한 생존 경쟁과 약육강식처럼 정글법칙대로 마치 동물의 세계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갈등과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안전히 살아야 할 본래의 정체성인 자아로부터 소외되게 한다. 인간 본연의 고독과 허무는 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자원으로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여 누릴 수 있다면 구원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그분의 은혜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이다.2. 구원의 사건! 그 놀라운 비밀.그렇다면 구원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바로 구원의 사건이다. 이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어우러져 총제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신 공생애 기간 동안 스스로가 구원자임을 부지런히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이 예수의 죽음으로 헛된 것 같았고, 거짓처럼 보였지만 결국 예수의 부활에 의해 그 가르침이 사실이었으며, 옳았다는 것이 확인 된 것이다.마가복음 10:45를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예수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의 사역의 목적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인자’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다니엘이나 시편등 구약에서 예언된 구름타고 오실 사람의 아들같이 생긴 이. 즉 신적존재인 메시야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에게 “다니엘의 환상과 구약의 곳곳에 예언되었던 그 사람의 아들이 바로 나란다.”하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인자’라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언약관계가 깨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세워 종말 때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의지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할 것을 예언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들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일을 창조하시고, 그 아들들의 대표가 되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 자신인 것을 스스로 증거 하신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자신들을 로마와 같은 이방나라들로부터 독립위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함으로 그들의 죄 사함을 이루어 새 언약을 세우고, 그러므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고난 받는 메시야’ 라는 것이다.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약의 예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정말 고난 당하셨고,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21:23 말씀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나타내려했다. 그래야만 그가 거짓 선지자였으며, 그의 모든 행동과 주장은 사기였으니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더 이상 예수 운동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예수의 죽음 후 제자들 조차도 슬픔에 잠기고, 뿔뿔이 자기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은 바로 “예수님이 옳았다!”라는 것을 증명해 준 사건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모든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 구약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가 맞다는 것.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한 사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 가지 사건. 즉 예수님의 자기주장과 가르침,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자가의 구원을 설명하고, 부활은 십자가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확인하게 한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구원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진노와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속죄하셨다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이라는 자원에 뿌리내려 원래의 관계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또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사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죽음이란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맺어진 것이 새 언약이다.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분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분의 상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 지는데, 믿음은 그 구원을 받는 필요한 수단이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복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옛사람. 죄가 죽은 것이요, 그가 살으심은 우리의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새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례는 나의 믿음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극으로 표현하는 거라 할 수 있다. 나의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고백하고 내가 확실히 믿는 자임을 선포하며 동시에 확인하는 것이다.이 모든 것을 정리해 보면,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던 모든 것이 끊어지고, 자기의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 죄와 사탄의 종노릇하는 죽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동참하여 그 분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신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3. 나 구원받은 거 맞아요??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서 악과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나 이전과 명백히 다른 것은 이 세상의 시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그분의 자녀이다. 그러나 그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 구원을 완성하기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긴장’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구원받은 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 그로인한 평안과 자유함.. 소망이 주어지지만 그 자체가 구원받았다는된다.
    독후감/창작| 2014.12.15| 5페이지| 1,000원| 조회(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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