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삶과 예술1.영원한 한국의 어머니상요즈음 ‘국민 어머니, 국민 배우, 국민 가수, 국민 여동생’ 이란 용어가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자주 쓰이고 있는데, 그렇게 불리우는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부풀리기 위한 얄팍한 상술이요, 호들갑스러운 인기전술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연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그러한 호칭이 생경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또한 ‘국민’이란 수식어가 붙은 인물들은 대부분 연예인들인데, 다른 분야의 인물들, 예컨대 학자, 시인, 정치인, 화가, 음악가, 운동선수, 기술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다수 국민들의 진정한 추앙을 받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오백 여년 전의 인물 ‘신사임당(1504~1551년)’이야 말로 어머니와 아내로서, 며느리와 딸로서 그리고 서화가로서 오늘날 까지도 온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국민’이란 수식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우리 국민들의 사표라 하겠다.현재 유통되는 화폐 중 최고액권인 ‘오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의 초상이 그려진 이유도 그러한 우리국민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각 나라마다 국민적 영웅이나 지도자등 그 나라 역사상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 화폐에 그려지는데, 세계 화폐사상 모자의 초상화가 같은 시기에 유통되는 두 화폐에 각각 그려진 예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분으로서는 가문의 영광이요, 그러한 조상들을 둔 우리국민들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다.또한 화가로서 당대에 유통되는 지폐의 초상화를 그림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귀한 일인데, 한 화가(일랑 이종상 화백)가 액면가가 다른 두 종류의 지폐(오천원권과 오만원권)를, 그것도 모자 두 사람을 연이어 그렸다는 것 또한 참으로 기이하고도 유일한 일이요, 화가로서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화력(畵歷)이다.일전에 ‘이종상’ 화백이 “ 모자가 함께 지갑 안에 있을 수 있도록 비상금으로 오천원권과 오만원권을 지니고 있으면여를 친정에서 보냈다.시부모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짧지 않은 기간 친정살이를 할 수 있었음은 시댁의 후덕함과 남편의 너그러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고부간의 갈등으로 인한 시집살이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살았거나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우며 아내를 무시하고 업수이 여기는 남편을 만났더라면 아무리 신사임당이 재주가 뛰어났다손 치더라도 우리 전통회화 사상 불후의 명작을 남기거나 사남 삼녀의 자녀들을 그토록 소신껏 훌륭하게 키우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의 위대함만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시댁과 남편의 후덕함과 아내 사랑을 간과하기 쉽다. 특히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의 하나라며 비웃음을 받던 시절, 남편 ‘이원수’는 그러한 세태에 전혀 개의치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사임당’의 그림과 서예실력을 거림낌없이 자랑하였다고 하니 그의 아내 사랑의 돈독함과 자랑스러이 여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신사임당’이 그녀의 전인적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 시대상과는 다른 집안 환경이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신사임당’의 순조로왔던 삶을 음미하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여인이 있는데, 바로 홍길동의 저자 ‘교산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다. ‘허난설헌’ 역시 명실공히 당대의 천재였던 그의 오빠 ‘허균’만큼이나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나 혹독한 시집살이 등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져 ‘사임당’ 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갔다. 뭐니뭐니해도 덕 중에서도 인덕이 최고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2. 탁월한 서화가 신사임당역시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한 가지를 잘하면 여러 가지를 다 잘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신사임당의 경우 다른 것은 몰라도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그림이든 글씨든 혹은 바느질이나 수예든 그 탁월한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서여기인(書如其人)이요 기인기화(其人其畵)라, 글과 그림은 곧 그 사람이니 글씨와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사물에 대한 이해능력과 통찰력 그리고한 고운 채색의 초충도는 규방 여인들의 자수를 위한 밑그림이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의 문인 사대부들은 채색이 화려하며 섬세하고 정밀한 그림들은 신분이 낮은 화원들이나 그리는 그림이라 하여 천시하고 일필휘지로 그린 문기있고 고상한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그러나 대부분의 문인화는 회화 특유의 조형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어설픈 그림들이었음이 사실이다. 신사임당은 여느 문인 사대부 못지않은 높은 학문과 교양을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도도와 같은 문인화가 아닌 정밀 화려한 초충도를 남긴 것은 그녀의 타고난 화가적 재능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초충도에서 엿볼 수 있는 빼어난 예술성은 문인들도 높이 평가하였다. 낭중지추(주머니속의 송곳)처럼 신사임당의 범상치 아니한 예술적 재능은 신분을 뛰어넘고 봉건적 성차별을 뛰어넘어 찬란한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초충도를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나비나 개구리. 귀뚜라미, 원추리, 방아깨비, 귀뚜라미, 오이, 맨드라미, 수박, 쥐, 가지, 패랭이 꽃 등이 참으로 앙징맞고도 정겹게 그려져 있다.이 들 소재들은 나름대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원추리 꽃은 그 봉우리가 마치 사내아이의 상징물과 같다하여 아들의 생산을 염원하는 것이고, 나비 접(蝶)자는 팔십세를 의미하는 질(? )자와 독음(讀音)이 같다하여 나비는 80세 까지 장수 할 것을 기원함을 의미하는 곤충이다.맨드라미는 마치 그 모습이 닭의 벼슬(계관 鷄冠)과 같다하여 계관화(鷄冠花)라 불리우는데 높은 벼슬을 상징한다. 그리고 귀뚜라미는 그 한자 독음이 관아(官衙)하고 같다하여 과거에 합격하여 관아에 들어가라는 의미가 있으며, 패랭이 꽃은 토종 카아네이션으로 마치 고운 분가루로 치장한 아리따운 시골처녀와 같은 자태를 가진 꽃이라 하여 젊음 혹은 청춘을 상징하는 꽃이다.발갛게 잘 익은 수박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는 생쥐그림도 재미있다. 본래 수박을 갉아먹거나 곡식을 훔쳐먹는 생쥐는 암암리에 국고를 축내는 탐관오리를 뜻하는데, 신사통찰력과 지혜로 남편을 섬겼다.’어진 여인은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지아비로 하여금 뼈가 썩게 한다‘고 하였으며,’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더 귀하다‘고 하였다. 남편 이원수에게 신사임당은 바로 그러한 아내였다. 남편 이원수의 아내사랑은 지극하여 신사임당과 잠시도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않았다.그러나 자신의 치마폭에 싸여 평범한 촌부로 일생을 마칠 것을 우려한 사임당은 어느날 남편에게 폭탄선언을 하였다. 대장부로서 뜻을 이룰 때 까지 서로 헤어져 10년간 학업에만 정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사임당의 뜻을 받아들인 이원수는 처가를 떠나 서울로 발길을 돌렸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차마 헤어질 수 없어 몇 번이나 되돌아오곤 하였다.이런 남편 앞에 가위를 내밀며,’이처럼 우유부단하고 강단이 없어 장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남편과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하였다.평소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로 남편의 뜻을 받들던 아내였으나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이처럼 그 단호함이 추상과도 같았다.그 길로 다시 돌아 오지않고 학업에 정진했던 ’이원수‘는 마침내 뜻을 이루어 아내와 감격적인 재회를 할 수 있었다.또한 ’지혜로운 여인은 환란 때에 남편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한다‘ 라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조정은 소위 대윤의 윤임 일파가 숙청당한 을사사화(1545)이후 인지라 문정왕후 측의 ’윤원형‘일파가 득세하고 있었다.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임과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대윤과 소윤의 정쟁이었으나 실상은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숙청으로 조선의 마지막 사화(士禍)였다. 문정대비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윤임 등을 반역음모죄로 무고하여 극형에 처하고 윤임 측에서 발탁 기용했던 사림파의 명사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피의 숙청이었다.소윤의 좌장으로 온갖 음모와 술수로 억울한 누명을 씌워 반대파를 제거하였던 윤원형은 을사사화 후 정권을 오로지하여 온갖 부정을 저질렀으며 어미가 관비(官婢)였던 미천한 정난정을 첩실로 받아들였다.신분상승을 노린 정난고 건방지게 남정네의 앞길을 가로 막느냐며 호통을 치며 역정을 내었을 것이나 지혜로운 아내의 사려깊은 충고를 따른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부인의 높은 인품과 지혜를 온전한 마음으로 따를 줄 알았던 이원수의 도량과 아내에 대한 깊은 신뢰를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문정대비가 죽자 윤원형과 정난정 또한 황해도 강음 땅에 유배되어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독을 마시고 죽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가파른 오르막일 수록 그 내리막은 더욱 급하고 깊은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보여 주는 역사의 한 대목이라 하겠다.4. 현모와 율곡조선 최고의 명문가는 어느 가문일까?조선시대는 사대부 관료사회였으므로 대과급제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국리민복을 위해 업적을 남긴 인물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명문가 여부가 가려졌다.그런데 훨씬 많은 수의 일족들이 고관대작들을 배출하여 청사에 빛날 업적을 남긴 가문들이 많이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중 한 집안을 꼽으라면 단연코 ‘덕수 이씨’가문을 꼽겠다.왜냐하면 율곡 이이(1536~1584)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을 배출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9촌간으로 충무공이 아저씨 뻘이었다. 충무공은 우리 국민이면 삼척동자도 다 알다시피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낸 절세의 성웅이다.만약 충무공의 한산대첩이나 명량대첩이 없었더라면 36년이 아닌 400여 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충무공보다 9살 위인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이 33세 때 낳은 아들로 위로 두형과 두 누나가 있었다.신사임당은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는데 율곡은 세째 아들이었다. 신사임당의 자녀들은 하나 같이 그 재능이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율곡이 가장 출중하였다. 영특한 자식을 낳기도 어렵지만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을지라도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 갔을지 모를 일이다.그러나 타고난 총기.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1.금홍아 금홍아‘이상(李箱 1910~1937년)’은 그의 자전적 소설 ‘날개(1936년작)’에서 “박제된 천재를 아십니까?”라고 스스로를 ‘박제된 천재’로 표현하였다. 6, 25 때 납북되었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기림(1908~?)의“이상이 죽은 후 한국의 현대문학은 반세기나 후퇴하였다”라는 평가를 굳이 인용치 않더라도 천재라 자칭하였음이 그리 거북스럽게 듣기지 않을 만큼 명석한 두뇌와 문예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이상’.올해가 그가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며 총독부 건축기수였다. 술좌석에서도 안주보다 더 맛깔스러운 재담과 위트, 독설이 어우러진 달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이상. 늘 머리엔 비듬이 허옇게 묻어 있었고 허름한 차림이었으나 그의 옆에 앉고자하는 기생들의 자리다툼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학창시절 그의 오감도(烏瞰圖, 1934년 조선중앙일보발표)를 처음 접했을 때 참으로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박목월 같은 향토적인 서정시를 참으로 좋아했던 고등학생의 감성으로서는 띄어쓰기가 무시 된 채 첫 연부터 끝연 까지 무섭다고만 하는 아이가 등장하는 오감도는 난해함을 넘어 해괴망측한 시란 생각이 들었다.초현실주의 혹은 다다이즘(20세기 초반인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등장한 사조로 기존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 예술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사상적 흐름으로, 미술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마르셀 뒤샹 같은 사람이 대표적 인물이다.)의 경향을 보이는 난해시 오감도. 천재 밑 발치도 못 미치는 둔재 고등학생이 어찌 이상의 그 깊은 정신세계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겠냐만 단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흉포한 힘에 의해 나약한 아이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원초적 공포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혹자는 오감도에 등장하는 열세명의 아이는 일제에 의해 강점된 조선의 13도라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흉포한 힘을 가지고 까마귀 같이 노려보는 존재는 바로 일제라는 말, 이상의 무절제하고 무능한 삶에 싫증을 느끼고 ‘도무지 한 군데도 쓸모가 없는 병신 같은 인간’이란 업신여김과 함께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재빨리 뒷문으로 달아나는 것이 인생의 이치임을 이상과 금홍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가난에 찌들고 폐병으로 인해 성불구자가 되다시피하여 금홍이와 외간 남자의 분탕질을 묵인하며 뒷방을 하루 종일 지키고 있는 이상에 대한 금홍이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도무지 한 군데도 쓸모가 없는 병신이야’라고 한 금홍이의 말은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급기야는 한 때 정성을 다해 수발을 들었던 이상에게 손찌검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금홍에게 두들겨 맞고 무서워 며칠씩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였다고 이상이 술회한 적이 있었다. ‘날개’란 소설에서 처럼 금홍이가 외출 한 후 그녀의 방에 들어가 화장품 냄새나 즐기곤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니 이상은 가난과 폐병의 고통과 패배감 속에서 서서히 박제되어 갔다.이제 금홍이는 더 이상 기댈 수 있는 반려자가 아니라 얼음장 같이 사납고 승냥이 같이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당시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 바로 그 유명한, ‘박제된 천재를 아십니까?’로 시작되는 날개이다. 자신의 여인이 외도를 묵인했음을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있으나 무능하고 무기력했던 한 남자의 어찌할 수 없었던 한계상황이 아니었을까?2. 한국의 로트렉 구본웅천재이든 범인이든 한평생을 돌아보면 삶의 향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서양화가 ‘구본웅’이 ‘이상’에게는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즉 ‘이상’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선의 ‘로트렉’(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인 신체결함으로 인해 집안에서 내침을 받았으나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좌절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이라 불리우는 인물 ‘구본웅’이다. 우선 ‘구본웅’의 화력(畵이상’을 문학적인 천재로만 알고 있지만, 그림에도 소질과 취미가 있어 ‘보성고보’ 시절 열심히 그림공부를 하였다.1931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선전鮮展, 국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모태라 하겠다)에서 자화상을 그려 ‘입선’까지 하였는데 그러한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 바로 ‘구본웅’이었다.‘이상’이 다방 ‘제비’의 실패에 이어 인사동에 다시 개업한 카페 ‘쓰루’ 도 실패하고 파산하여 집달관이 길거리에 가재도구를 쌓을 때 ‘구본웅’이 슬며시 입선작인 그의 ‘자화상’을 집어 자기화실에 보관하였다.훗날 “이상은 천재였어. 그림을 그렸어도 대성했을거야!” 라고 요절한 천재, 박제된 천재를 안타까이 회고 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상’의 지기(知己)였다. 구본웅은 ‘보성고보’와 가까운 ‘경신고보’를 다니며 그림공부를 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이끌었던 ‘YMCA’의 ‘고려화회’에도 나가 ‘장발’, ‘안석주’, ‘이제창’ 등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그리고 당대 최고의 조각가 ‘김복진’(1901~1940년, 소설가 ‘김기진’의 형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한 근대 조각가)에게 현대 조각도 배웠다.1927년에는 ‘얼굴습작’이란 조소로 선전에서 특선을 받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하였고 ‘일본대학 예술 전문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미술평론가로서도 활동하였는데 총독부 한글판 기관지 ‘매일신보’에 조선의 미술가들이 ‘화필보국(畵筆報國)’함으로써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예술가가 될 것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하였다.일제강점기의 대다수 유명화가들처럼 친일의 오점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 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반성문을 쓰기도 하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 선정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한편 당시 조선의 화단에서는 화가들의 최고 등용문이었던 ‘선전’에서 ‘서예와 문인화(주로 사군자)’의 출품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었다.서양화가와 일부 동양화가(주로 산수화와러나려나”하며 비방하였다.접한 지 불과 2~30년 밖에 되지 아니한 서양화에 매료되어 민족예술의 정체성을 돈독히 하고자 애쓰기는커녕 우리의 전통 서화를 마치 흉물 취급하듯 한 미술계 인사들의 편향된 시각을 잘 드러내 보이는 일화요, 양장에다 곱게 분 단장한 신식여인에게 도취되어 일평생을 함께해 온 조강지처를 흉물처럼 여기고 쳐다보기 조차 역겹게 여김과 같은 한심한 작태였다.19세기 후반 유럽에 유학한 일본화가들을 통해 왜곡된 채 도입된 화려하고도 명랑한 일본풍의 인상파 회화에 매료되었던 인사들의 눈에, 무채색 위주의 전통 서화는 초라하고도 창백한 아마추어들의 붓장난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3. 사랑의 메신저 구본웅이러한 ‘서와 사군자(양자를 전통적으로 서화라고 불렀다)’에 대한 폄하에 대하여 미술평론가로서의 ‘구본웅’은 붓을 들어 “조선미전(선전)에서 서. 사군자가 없어진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사군자’만은 동양화부에 속하여 그 미미한 흔적을 보이기는 하니 ‘서’의 한가지 만 없어졌다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이론과 제현의 의당한 의견이 있어 폐지하였겠으나 필자는‘서와 사군자’도 미술작품으로 인정하며 다른 미술품과 한가지로 진전함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그 까닭은 ‘서’가 각기 서가의 개성을 표현함은 새삼스러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떠한 평면을 미화하는 방법이라 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전통서화관을 분명히 피력하였다. 구본웅의 작품을 보면 표현주의 내지 야수파의 거칠고 강렬한 터치가 특징인데 그것은 태생적으로 반추상화인 ‘서화’의 현대적 미감을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더욱 빛을 발한 것이라 생각된다.구본웅 외에도 어떤 평자는 “혹은 ‘사군자’는 미술이 아니고 ‘서도’에 근하다(가깝다) 운하는 설이 있으나 (중략) 만일 미술의 여부를 논의하게 되면 ‘사군자’는 미술계의 대왕이요, 최대의 고상한 미술이다.정신의 심원과 만고불변의 미술이다” 라고 우리 전통 ‘서화’의 예술적 위대성을 갈파하였다. (오광수, 서성록 지음 ‘우리미술 100년’ 71면~74생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단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음으로 인해 온갖 어리석음과 고통의 질곡이 더해 질 뿐! ‘이상’처럼 짧고도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 일수록 그러한 이치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2개월여 전, ‘금홍이’와 헤어지고 다른 여인을 만났으나 그 여인 역시 떠나버리고 육체와 영혼이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이상’에게 마지막 사랑이 찾아왔다.사랑의 메신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구본웅’이었다. 당시 문인, 화가 등 서울의 고등 룸펜들의 집합소는 다방이었다. 다방은 식민지 지식인들의 지적유희가 난무하는 만남의 장소요, 작품구상처였으며, 연락사무실이기도 하였다.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의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란 다방이었다. ‘이상’은 소공동에 있었던 ‘낙랑파라’란 다방을 주로 드나들었는데 이 특이한 명칭의 다방은 건축일을 했던 ‘이상’이 설계한 다방이었다. 나중에 ‘이상’은 다방 설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다방‘제비’와 카페 ‘쓰루’ 와 ‘69’를 개업하였다.그러니 ‘이상’이야 말로 우리나라 다방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불행히도 개업하는 족족 실패하고 말았지만...,!! 마지막에 개업한 카페 ‘69’은 남녀간의 성행위 체위를 연상시킨다는 입방아로 인해 폐업함으로써 참담히 실패하였다. 문예와는 달리 장사에는 천재이지 못했던 모양이다.한편, 1930년대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사조는 모더니즘이었다.즉 기존의 전통과 단절된 새롭고 영원한 것, 덧없음에 대한 추구를 통한 찰나적 견고함에 대한 추구 등의 풍조가 지식인 계층에 퍼져 있었다. 이러한 풍조가 가져다 준 가장 큰 이슈의 하나는 자유연애의 대유행이었다. 신분과 계급, 부와 가난을 넘어선 진실한 사랑, 비록 하루살이나 부나방처럼 덧없이 삶을 마감할 지라도 그 순간만은 목숨을 걸고 하는 사랑, 소위 죽음도 불사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자 하였다.‘이수일과 심순애’로 더 잘 알려진 신파극 ‘장한몽’이 대중들의 인겼다.
평전 나혜석1. 조선의 신 여성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중략)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며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 푸른 물에 꽃잎처럼 떨어진 윤심덕의 당대 인기가요 ‘사의 찬미’ 일부이다.인생의 끝을 안다면 우리 삶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질까?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토월회 유명배우였으며, 인기 대중가수였던 윤심덕(1897~1926)의 삶과 비견되는 또 한 사람의 신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요 시인이었던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느낀 감회이다.나혜석(1896~1948)은우리나라 최초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학생으로 남녀 모두를 통털어 우리나라 4번째의 서양화가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요, 시인이며, 소설가였다. 부친이 군수였던 나혜석은 수원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타고난 총명함으로 서울의 진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나혜석의 삶 전체가 아닌 그녀의 천부적 재주와 인생 전반부의 삶만 본다면 신의 공평성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진명여고보를 졸업한 나혜석은 18세의 나이로 유화 전공을 위해 동경유학길에 올랐다. 미모와 총명함이 돋보였던 재색(才色)겸비의 그녀는 당시 동경에 있던 한인 유학생들에게 신데렐라와 같은 존재로 자신들이 왕자가 아님을 한탄할 지경이었다. 문재(文才) 또한 뛰어나 동경여자미술전문에 다니면서 문필가로서도 활동하였는데 김억(김안서. 소월의 스승), 오상순, 남궁벽, 황석우 등과 문학 동인지 ‘폐허’에 참여하였다.1년 후 나혜석 못지않은 미모와 재주를 가진 조선의 신여성이 유학을 왔으니 그녀가 바로 윤심덕이었다. 두 여인들에게 쏟아졌던 유학생들의 뜨거운 구애의 숨결들을 가히 짐작할 만 하지 않은가?총각들은 물론이요, 조혼의 풍습으로 고향에 처자식을 둔 기혼자들도 그녀들 앞에서는 일곱 난장이에 불과하였는데 수많은 연적들을 물리치고 나혜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백마탄 사나이가 있었으니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던 전라남도 장흥 출신의 결심케 되었으니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라는 ‘사의 찬미’ 가사가 연상된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서울정동예배당에서 백년가약을 맺게 되는데 나혜석은 결혼전 김우영에게 그녀다운 다음과 같은 결혼조건을 당당히 제시하였다.2.당당한 결혼과 세계일주첫째, 나만을 죽을 때 까지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아내로서 당연히 제시할 수 있는 수긍이 가는 조건이다.)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이 조건도 화가인 그녀로서 제시할 만한 조건이라 본다)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 과는 별거할 것.(1920년대 당시의 통념으로 볼 때 시집살이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조건이요, 전실 딸 운운 하는 것을 볼 때 김우진은 재혼임을 알 수 있는데 1916년 첫 아내와 사별하였다)넷째,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가장 나혜석 다운 조건이요 남편 김우진 입장에서는 결코 탐탁지 않은 조건이다. 첫사랑을 자신의 가슴속에 묻고 살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조건 같잖은가!)김우영에 의해 네 가지의 조건이 모두 받아들여짐에 따라 결혼이 성사되었으니 사랑에 빠진 남자가 이 보다 더한 조건인들 못 받아주었겠는가? 두 사람은 신혼여행 대신 전남 장흥의 최승구의 묘를 찾아가 묘비를 세웠다.“아름다움은 이해와 개념을 떠나서 우리를 즐겁게 한다” 라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서양미학의 틀을 세운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 경우라 하겠다. 흔한 말로 이쁘면 모든 것이 용납 된다고나 할까. 문제는 우리 인생은 무상하기 짝이 없으니, 그 어여삐 여김이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결혼 후 1921년 조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유화 개인 전시회를 개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윤심덕이 서울 YMCA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음악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듯이. 아마도 나혜석의 뛰어난 그림실력과 외교관이란 남편의 후광이 더해진 결과이리라.아무튼 이렇게 나혜석의 화려한 인생 제 2막이 펼쳐지고 있었다.나혜석과 윤심덕, 유달리 이 두 사람 하고 출발 기념사진까지 찍은 이 여행이 나혜석의 인생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갈 격랑의 단초가 될 줄이야! 그야말로 파리는 훗날 나혜석의 토로처럼 그의 예술세계와 인생 그 모든 것을 뒤 흔들어 놓았다.먼저 1년여의 파리생활과 유럽 각지의 여행을 통해 그녀의 화풍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으니 인상파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기존의 화풍과는 다른 거칠고도 분방한 붓 터치와 대담한 원색을 특징으로 하는 야수파의 경향이 나타났다.서양화의 뿌리가 거의 없었던 초창기 우리나라의 서양화가들은 일본미술학교 유학을 통해 왜곡되고 일본화 된 유럽의 인상파 화풍만을 배울 수 밖에 없었다.그런데 새로운 예술세계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나혜석은 눈 앞에 펼쳐진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등의 화풍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격정적이고 진취적이었던 나혜석은 거칠고 강렬한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마티스와 루오 등의 프랑스 야수파에 매료되었고,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3.파리여행의 후유증 이혼이처럼 파리여행은 그녀의 예술세계를 또 다른 차원으로 외연을 넓혀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최린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비극적 인생유전의 출발점이 되었다.변호사이기도 했던 남편 김우영은 파리 도착 얼마 후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고,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의 파리에서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당시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화가 이종우가 마련한 최린 환영파티에서였다.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던 중 남편 김우영이 떠난 자리를 최린이란 사나이가 채웠다고나 할까, 최린은 천도교 도령으로 유럽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곧바로 연인이 되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꿈결 같은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행각에 대한 발 없는 소문은 귀국 후 조선의 사교계에 까지 널리 퍼져 김우영의 귀에 까지 들어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화려한 향연 녀가 주장한 재산 분할의 요구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도 정당한 것이었다.그러나 그 당시의 법과 정서로서는, 그것도 자신의 불륜으로 인한 경우에는 감히 상상치도 못할 요구요, 파렴치한 요구라고 까지 여겨질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혼은 그녀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고통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한때 촉망받던 청년 변호사요 관리였던 김우영은 이혼 후 4개월 만에 재혼하였으나 그 역시 이혼의 충격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까지 어눌하게 되었고, 변호사 업무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고 한다.사나이로서의 패배감과 제 마누라하나 간수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남의 일을 돕겠다느냐는 주위의 조롱과 냉소어린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혼 후 그는 생모와 자녀들의 만남을 철저히 봉쇄하였다. 출산 후 잡지 ‘삼천리’에 ‘모성애로 인하여 지금까지 애인이나 친구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애정과 행복, 만족감을 느꼈다’고 기고한 나혜석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큰 이혼의 고통이었다.당시 극도로 피폐해진 그녀의 심정을 ‘이혼 고백서’란 제목으로 잡지 삼천리에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는 홀로된 몸,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란 글을 실었다.미모와 재주가 출중한 신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이혼녀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극와 극이었으니 세상을 향한 나혜석의 비통한 울부짖음은 몸가짐이 방정하지 못하여 부정을 저지른 탕녀의 절망적 넉두리에 불과하였다.사필귀정이란 냉대와 멸시만이 더해 질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더욱 그림에 매진하여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정원’이 특선을, 제 11회 일본제전에 입상을 하는 개가를 올려 전업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고, 한 때 사립미술학교인 여자미술학사를 열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갔다.그런데 얼마 후 이혼의 충격보다 더 큰 시련이 닥쳤다. 1932년, 작품활동을 위해 금강산에 머물렀었는데, 화재로 인해 그녀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이어요.’라고 자신의 시대를 정면으로 공박한 여인이었다. 시대를 앞서 갔던 앞서갔던 자아가 잘 드러난 그녀가 쓴 시 중 그 일부를 보자노라를 놓아라순순히 놓아다오높은 담장을 헐고깊은 규문을 열고자유의 대기 중에노라를 놓아라...아아 소녀들이여깨어서 뒤를 따라오라일어나 힘을 발하여라새 세상의 광명이 미쳤네그야말로 여자이기 이전에 남성과 평등한 인간으로 능력과 인격을 인정받고 싶다는 남존여비의 조선사회를 향한 절규요 분노를 토로한 것이다.또한,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이혼 고백서’에서 이르기를 ‘조선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게 정조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았으려고 합니다.’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불평등한 남녀 정조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나아가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을 먹고 싶으면 떡을 먹 듯이 임의용지(任意用志, 뜻대로 )로 할 것이지, 마음의 구속을 받을 일이 아니다’ 라고 하여 요즈음 들어도 다소 파격적이고 놀라운 주장을 하였다.그 결과 주위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로 인한 그녀의 고독은 더욱 깊고 긴 그림자가 되어 그녀를 함몰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히며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1934년, 불행의 씨앗을 잉태했던 만남의 상대 최린에게 ’위자료 12000원 청구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최린에게 정조를 유린당했고 그로 인해 이혼 당함으로 해서 받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보상하라’ 는 것이 청구이유였다.소송제기 당시 최린은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3,1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자에서 변절하여 내선일체의 선봉에선 극렬 친일분자가 되어 영달의 길을 걷고 있었다.그런 그에게 느닷없는 정조유린으로 인한 위자료 청구소송은 참으로 부끄러운 사건으로 사건을 기사화한 동아일보에 압력을 행사하여 기사를 삭제케 하였으며 나혜석에게는 소송의 취하를 조건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수 천원을 건네주어 사건을 무마시켰다.로 가자
허난설헌 평전1. 조선의 3대 여류시인조선의 3대 여류 시인으로 명종 대의 황진이(?~?)와 선조 대의 이매창(1573~1610) 그리고 강릉 초당리 생인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1563~1589를 꼽는다..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당시 천한 신분이었던 기생으로 황진이는 송도 기생이었고, 이매창은 부안의 기생이었다. 이들은 비록 천한 신분인 기생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을 따라 나름 여인의 향기와 재주를 발산하며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다갔다.송도 삼절의 하나로 불리운 기생 황진이는 재색을 겸비한 조선 중기 최고의 명기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황진이는 비록 천한 기생이었으나 천성이 깔끔하고 번잡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평소 사치스러운 치장을 하지 아니하였고, 천박함을 멀리하여 시정의 잡배들은 천금을 준다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그녀의 살 향기 앞에 30년 면벽 구도의 공덕도 허망하게 무너뜨려버린 지족선사와의 일화와 갖은 유혹으로 욕정을 자극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던 스승 서화담과의 일화 등 황진이의 남성 편력에 대해서는 수 많은 야사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가객 이사종과의 계약 동거는 시대를 앞선 황진이의 삶의 일부였다.사르트르와 보봐리 부인이 20세기에 들어 세인들을 떠들썩하게 했던 계약결혼과 유사한 동거를 그들보다 400여 년이나 앞당겨 실행하였던 것이다. 황진이는 단순히 시류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그 시류를 스스로 거슬러 올라가다 눈앞에 명산대천이 나타나면 성큼 뛰어내려 한이 찰 때 까지 마음 껏 노닐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여인이었다.황진이는 색 앞에 한 없이 작아지는 사내들의 정체를 훤히 들여다보며 그들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아는 조리사였다. 그녀 앞에 사내들은 부나비와 같은 존재였다. 다만 서화담 만은 그녀의 예리한 칼로도 자를 수 없는 커다란 바위였다. 그녀가 서화담의 제자로 남아 그로부터 수년 동안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까닭이다. 서녀로 태어나 기녀로 죽은 그녀의 삶은 여인의 아름다움의 위력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 아름다움으로 뭇 남운 약관의 사내들이 그 말의 참뜻을 알 수 있으랴!허균(1569~1618) 역시 매창과 서로 좋아하였으나 이귀의 정인임을 알고 10년 동안 교류하면서도 끝내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허균이 뒷날 회고하기를 “창기 계생은 이귀의 정인으로 외모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다”고 하였다.허균 역시 이귀의 말처럼 인물은 별로라고 하였으니 그녀의 외모를 뛰어넘은 출중하고도 묘한 매력과 재주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가 38살의 나이로 죽자 가슴 저미는 슬픔을 적은 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를 보면 매창의 치맛자락에서 풍기는 향기까지 그리워하였다고 한다.아마 허균의 가슴 속 깊이 그녀의 또 다른 이름(字)인 천향(天香)이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죽은 지 채 10년도 못되어 대역죄인이 되어 온 몸이 찢기고 사지가 절단 된 채 저승에서 다시 만난 허균에게 매창은 무어라 말문을 열었을까?“차라리 그때 당신 품에 부나비 처럼 뛰어들어 벼슬이고 뭐고 다 치우게 하고 나와 더불어 풍진 세상 취한 듯 꿈에 젖은 듯 살자고 할 것을! 어차피 진토가 될 인생, 길가의 버들과 담벼락 밑의 꽃(路柳墻花, 기생을 이르는 말)과 같은 이내 팔자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남정네와 의리를 지킨답시고 속절없이 자네 속 마음만 훔쳤네 그려”라고 하며 그의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보다듬어 주었을까?조선 중기의 또 한 명의 박제된 천재 난설헌 허초희 (蘭雪軒 許楚姬)!그녀의 호 속에 들어있는 난(蘭)과 눈(雪)이란 두 글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난향의 은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와 북풍한설, 엄동설한이 언뜻 떠오르는 눈의 상반된 이미지가 마치 기구하게 전개될 그녀의 운명을 담고 있는 듯하다.난은 그녀의 평탄하고 꿈 많았던 시집살이 전의 삶을, 설헌(雪軒)은 눈 덮인 집처럼 차가왔던 시집살이를 상징하고 있는 듯 하다. 그녀의 삶은 어쩌면 그렇게 출가 전후가 빛과 그림자처럼 그토록 극 주위사람들을 신분에 의해 차별하지 않았다. 아들과 딸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쳤으며, 지체 높은 사대부가였으나 그의 집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재주와 인품에 따라 예우해 주었다.그러한 시대를 초월한 집안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난설헌은 자랐고, 학문을 배웠다. 그의 아들 허봉이 서얼 출신인 손곡 이달과 사귐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당시(唐詩)의 대가였던 그에게 사랑하는 딸 초희와 허균을 가르치게 함을 허용하였다.허엽은 손곡 이달의 신분을 뛰어 넘는 재주를 간파하였고 그의 비상한 재주를 귀히 여겨 자신의 소중한 자녀들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다. 스승 화담으로부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관과 격물치지를 중히 여긴 학문을 배운 결과였다.서화담은 당시의 성리학자들과 달리 명분과 계율을 앞세운 성현들의 가르침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고 서화담의 가르침 대로 스스로 사색하며 회의하고 깨우치는 자득지학(自得之學)의 도를 깨우쳐 실천에 옮겼음을 알 수 있다. 퇴계 이황은 마치 모범 학생처럼 사물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설사 자신이 세상의 사물에 대해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에 괜한 실수를 하지 말고 오로지 즉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서화담은 이황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그리하여 “퇴계는 어느 한 구석도 잘못된 것이 없는 게 없다.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독서에만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라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혹평을 하였다. 즉 남의 가르침이나 독서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이 직접 사물과 접해보고 부딪쳐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직접적인 공부를 통해서 기존의 가르침이나 질서 혹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의 이치를 터득함이 학문의 올바른 자세라고 주장하였다.이러한 학문적 접근 방법의 차이로 인해 같은 동인이면서도 유성룡과 우성전 등을 대표로 하는없음을 당연시 하였다. 그런데 그 구별의 기준은 성현들이나 성현의 뜻을 이어 받은 소수의 위정자들이 정하였다.이러한 질서를 일시적이나마 거스를 수 있으려면 합당한 명분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그 명분이라는 것도 대개의 경우 성리학자들의 기준에 합당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허엽은 이러한 시대적 가르침을 일정 부분이나마 무시해 버렸다. 즉 적서(嫡庶)의 차별과 남녀(男女)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한편 이율곡이 서인의 원류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반면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으니 양가는 정치적으로는 적대적 입장이었다. 난설헌의 오빠 허봉이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이 병권을 남용하였다하여 탄핵에 앞장섰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던 사실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하면 쉬이 이해될 수 있다.난설헌이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우리 문학사상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개방적이고도 문예를 사랑하였던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 남녀 교육의 기회균등이 실현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리 오래되지 아니하였음을 감안할 때 난설헌은 부모 덕을 톡톡히 타고난 여성이었다.해방 되던 해인 1945년 경의 우리나라 문맹율이 무려 78%(남녀를 통합한 수치이니 여성의 경우 거의 문맹이었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 하겠다) 라는 통계치를 보면 이미 450 여 년 전에 한 시를 능수능란하게 창작할 수 있었을 만큼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니 더욱 그러하다 하겠다.앞서 본 것처럼 아버지 허엽은 자신이 경상감사까지 한 사대부였으나 열린 성품의 선비로 당시는 적서의 엄격한 차별을 두었던 신분 사회였음에도 이를 괘념치 않았다. 오로지 인품이나 실력을 중시하여 아들인 하곡 허봉(荷谷 許?)이 손곡 이달(蓀谷 李達)과 교유함을 허락하였다.손곡 이달은 양반과 기생첩 사이에 태어난 서출로 그 재주가 출중하였는데, 당시(唐詩)에 능하여 삼당시인(三唐詩人)중의 한 사람이었다. 허균이 훗날 서얼들과 끈끈한 교분을 맺었던 것도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고 과거에 급제한 후 호당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안동 김문의 김첩의 아들 김성립과 누이동생 난설헌이 백년가약을 맺게 하였다. 김첨의 가문도 5대째 과거에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였으니 난설헌의 남편 감으로 그의 아들 김성립이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당시 난설헌은 15살이었고 김성립은 1살이 위였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누이였으니 나름 여러모로 난설헌의 배필로 김성립이 적당한 인물이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매는 난설헌에게는 가시밭길의 예고편이 되었다.그런데 곧은 성품의 허봉에게 인생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1583년 회령지방의 이탕개가 난이 그 단초를 제공하였다. 조선초 세종이 여진의 폐해가 심함을 잠재우기 위해 함경도 지방에 김종서로 하여금 6진을 개척하여 이후 저들이 조선의 국경을 넘보지 못하였으나 중기로 내려오면서 내정이 어수선해지자 저들이 다시 창궐하여 그 피해가 적지 아니하였다.그러나 조정에서는 저들에게 관록을 내리는 등 후대하는 소극적 회유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오랑캐의 못된 근성은 어찌 할 수 없었던지 회령지방의 이탕개가 난을 일으켰다. 이탕개는 귀화한 여진족으로 조정으로부터 관록을 받아 많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임진년 조일 전쟁이 발발하기 9년 전의 일로 전쟁을 잊고 살았던 조선 조정은 이탕개의 난에 접하고서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이 화급한 와중에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은 너무도 화급하여 미처 임금에게 고할 겨를도 없이 경기 이하 5도에 명해 군사를 징발하여 군사들을 급파하였다. ‘선조치, 후보고’였다. 그러자 이를 두고 동인이었던 오빠 허봉은 박근원, 송응개 등과 병권의 남용인 동시에 임금을 업수이 여기는 방약무인한 조치였다며 율곡을 탄핵할 것을 강력히 주청하였다.한동안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을 들끓기 시작하여 좀처럼 그 소용돌이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선조는 조정대신 중 누구보다 그 인품과 경륜을 귀히 여겼던 율곡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의 손을 들.
한국화(문인화)의 발전을 위한 방안목차1.머릿말2.한국화(문인화)의 발전 방안1)한국화 교육의 혁신2) 한국화가들의 의식 개혁3) 시대적 감각에 맞는 한국화(문인화)의 창작4.) 한국화의 상품성의 제고5)공정한 평론 풍토의 조성과 실력있는 큐레이터의 양성1. 머릿말한국화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인 바 한국화단의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는 무엇보다 실력과 도덕적 인품을 갖춘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근대 6대가가 모두 사라진 70년대 이후 그야말로 한국화단은 ‘지리멸렬,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제 강점에 의한 우리민족의 비극적 역사가 가로 놓여 있다.구한말 이래 관념적이고 사의적인 남종 문인화란 끈을 붙잡고 전근대적인 사숙에 의한 교육에 의해 근근이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의 전통화단은 민족문화말살을 위한 일제의 교묘하고 악랄한 문화정책과 생존을 위한 근대 6대가를 비롯한 서화가들의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한 식민지 미술정책에의 영합으로 인한 도덕성의 상실, 서양화 일색의 화단 풍조 등으로 그야말로 빈사상태에 이르렀다.특히 일부 근대 6 대가의 친일 예술활동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끊이질 않고 있는 가운데 지금 우리의 화단은 실력과 인품을 갖춘 지도자의 부재라는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권위와 실력을 갖춘 지도자가 없음으로 인한 결과란 너무도 뻔한 것이니 현재의 문인화단이 그것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같은 동양 삼국인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후 의식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서양화와 전통일본화를 결합시킨 신일본화를 탄생시켰고, 중국은 아편전쟁과 신해혁명, 태평천국의 난 등 내우외환을 겪으면서도 서양과 일본을 통해 ‘중서 절충, 고금융합’의 창신의 정신으로 전통중국화의 변화와개혁에 성공하여 오늘날 세계 미술계의 제패까지도 노리고 있는 실정이다.그리고 이러한 민족회화의 성공적인 개혁과 창신에는 예외없이 민족예술의 앞날에 대한 비전나 전 국토가 완전히 강점당하였다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우리의 경우 참으로 불행하게도 우리민족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들처럼 희생을 무릅쓰고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을 위해 당당히 처세한 미술지도자들이 별로 없었다.문인화가들을 포함한 한국화가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하에서 관료로서 일본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풍류를 즐김에 그 재주를 탕진하였으며, 변관식 같은 이는 선전(鮮展)에의 출전거부와 세상과 절연 후 전국방랑 등의 소극적 저항을 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일제가 주최한 선전을 통해 화단에서 입지를 굳힌 후 추종자들을 문하에 거느리고 낙후한 도제식 교육으로 연명하거나 아니면 일제의 식민문화정책에 영합, 추종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였다.이러한 황폐한 예술풍토에서 조국의 독립을 맞이하였으니 민족회화 발전을 위한 교육과정의 설치 등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할 실력있고 신망받는 화단의 지도자그룹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독립된 지 60여년이 지나도록 전통회화의 발전을 위한 화단의 화합과 민족문화의 창달은 커녕 서양 미술교육 일변도의 미술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직 전근대적 도제식 교육이 일반화되어 있고 겨우 몇 개의 대학에서 한국화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도 매학기 마다 학과의 존폐를 걱정하며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다.중국의 경우, 서양과 일본의 화풍과 문물을 배우고 익혀 예술적 시야를 넓힘과 아울러 ‘중득심원, 외사조화’, ‘독만권서, 행만리로’를 스스로 실천하고 절차탁마의 노력으로 실력을 연마한 지도자로 부터 전통회화기법은 물론이요 나아가 서양의 투시법과 소묘, 해부학, 미술사, 예술관상학, 문학, 색채학, 서법까지도 배운 선각자들이 지금의 중국화단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이러한 지도자가 없는 우리의 전통화단은 그 당연한 결과로 중국이나 서양처럼 회화의 풍격이나 예술적 견해나 이념에 의해 화파가 나뉘어져 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추구하며 상호자극과 경쟁을 통해 회화의 발전을 이루어 가고자 하기보다는 예술의 본질과 전혀 관계없낸 중국의‘동북 공정’ 보다 더 무서운 ‘문화의 공정’이 우려될 뿐이다.이처럼 제대로 된 지도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작가들에 의한 예술적 성취라는 것은 초라할 수 밖에 없음이 당연하다. 지도자들 자체가 체계적이고 다양한 과정이 마련된 미술교육을 받지 못하고 구한말 이래 정체되어 있던 전통서화를 답습하는 교육을 받는데 그쳤으니 그들의 수련생들에게 그 이상을 가르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오늘날의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은 화가로서 표현하고자 하는바를 제대로 화면에 그릴 수 있는 기본적 형사능력도 배우지 못한 채화면 구성능력(구도)과 채색능력 그리고 화제를 쓰기 위한 서사능력과 문학을 비롯한 인문적 소양의 부족을 보이고 있다.특히 문인화의 경우 전문회화장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러, 고등교육의 보편화로 높은 교양을 갖추고 다양한 회화장르를 접하여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심미안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일반대중의 예술적 수요에 턱없이 못 미쳐 일반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미술시장에서도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생활인으로서의 한국화가들은 생계유지를 위해서 폐쇄적, 배타적 화실의 운영, 공모전에의 과도한 집착, 전시회를 통한 작품의 연고 판매(사실상 강매) 등을 통한 활로의 모색에 치중하고있다.특히 공모전은 한국화(문인화) 인구의 저변확대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으나 문인화의 질적 저하라는 측면에서 그 부작용도 적지 않다. 각종 공모전의 난립은 우리 문인화단의 현주소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학원 운영자 몇명만 모이면 공모전 개최를 모의할 정도이다.사실상 공모전은 미술시장에서 외면받은 전통화가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하나의 결정적 방편이 되어 현재 엄청난 수효의 공모전이 개최되고 있고 끊임없는 심사의 불공정성시비와 저질작가의 양산이 문제되고 있으며 은연 중 화단 분열의 근인(根因)의 하나가 되고 있다.특히 신인 작가의 전통적 등용문인 대한민국 미술대전의 경우 과거에도 심사의 불공정성 시비로 낙선작 전시회가 열리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나 특히 최근 고 있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고적(法古的), 폐쇄적, 이기적 도제식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화가로서 기본적인 소양인 형사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한 소묘와 구도법, 채색법, 명암법, 투시도법 등 동, 서양화를 막론한 기초인 화법을 익히게 하고 문학과 역사,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도 쌓게하여 이른바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이치가 무르녹아있는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해나가야 할 것이다.특히 우리의 문인화단은 실기위주의 교육에 치우쳐 이론교육이 전무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실기없는 이론교육이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 없는 실기교육은 맹목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교육의 병행을 통해서 작가들로 하여금 개성있고 독창적인 한국화창작을 위한 창의적인 심미적 시야를 넓힐 수 있게 해야겠다.또한 초, 중등 교과 과정에 제대로 된 서예와 한국화교육 과정을 넣어 한글세대들이 어려서부터 전통서화에 대한 소양과 정서적 친근감을 갖게 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문인화의 저변확대와 개성있고 창의적인 한국화의 창작을 위해 서예교육은 참으로 중차대하다고 본다.최근 들어 문인화 공모전에서 화제의 존치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으나, 서와 화의 역사적 관련성은 두고서라도 서예에 접해본 사람들이 한국화(문인화)를 비롯한 전통회화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서예는 문인화인구의 저변확대와 현실적 관련성이 있으며,문인화에서 서(書)의 요소를 제할 경우 수묵이란 재료의 특이성 만으로 타 회화장르와의 구분은 현대예술의 조류상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렀다. 특히 일정 수준의 소묘능력만을 갖추면 누구나 쉬이 그릴 수 있다는 간이성을 특징으로 하는 화조, 화훼류 위주의 문인화의 속성상 서(書)와의 결합은 생존을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의 교육현실상 입시위주의 교과편성과 전문교사의 부족으로 학교교육에서 서예교육은 거의 배제되어 있음도 문인화의 장래를 위해 심히 우려되는 바인데, 문인화가(文人畵家) 스스로 서예의 요소를 문인화에서 배제하자는 주장은 도무지 이해가 있음과 비교할 때 참으로 우리 문인화와 문인화단의 현실은 답답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역사의식과 소명의식 그리고 국제적 감각이 결여된 일부 무지한 지도자들은 그저 예술권력의 언저리에서 자족, 자만하며 근시안적 이익을 쫓기에 급급하다. 결국 이들의 예술가로서의 일그러진 행태는 민족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우리 민족을 삼류민족으로 전락시키는 데 일조를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예술에는 국경이 없으나 예술가에게는 민족이 있음’을 늘염두에 두고, 사리(私利)에 급급하여 우리 예술 역사에 누를 끼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3) 시대적 감각에 맞는 한국화(문인화)의 창작모든 예술은 역사와 시대의 산물이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강조하고 중용과 금욕을 강조하던 시대에는 오색의 화려함을 배제한 단일색조의 수묵에 의한 사군자화가 풍미하여 사람들로부터 선호되었고, 현실세계의 복잡함이 극에 달한 혼란기에는 무위자연의 평안과 자유를 선망하며 자연 속에 은거하거나 산수화를 즐겼다.즉 예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용을 거듭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생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왜 천 여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의 한국화가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당연한 결과로써 미술시장에서 형편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가 자명해진다.대중들의 심미관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을 뿐 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음과 달리 현실과 동떨어진 구닥다리의 소재와 기법, 화가라고 불리우기에 부끄러운 서툰 표현능력, 대중들의 색감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묵조의 단순함을 보이고 있는 한국화가 더 이상 대중들로 부터의 사랑과 관심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전통 수묵화의 문제점 중 특히 채색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필요하다고 본다. 각종 방송, 언론 매체가 오디오 시스템에서 비디오 시스템 중심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어 놓기 위해 화면의 빠른 전개와 자극적 스토리 그리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주위환경의 영향에 따라 단일묵조 위주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