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아*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금동대향로의 미적의의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의 미적 의의그림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백제 금동대향로는 사비시대 백제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근처인 백제 능사의 공방 터에서 출토되었다. 금동대향로는 6세기 말에서 7세기에 백제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보 제 287호로 지정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그림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백제 금동대향로는 삼국시대나 같은 시대 때 다른 주변 문화들 가운데서 찾기 힘든 균제미를 갖추고 있는데 이 작품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온갖 물상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압도적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대향로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 기둥을 용의 머리와 몸체로 대체한 것이나 다리 하나를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들어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조형에 변화를 준 것으로, 구도상의 안정과 용의 힘찬 몸짓의 표현을 동시에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현존하거나 혹은 상상 속의 다양한 물상이 표현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출토 이후에 고고학과 미술사, 역사학 분야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특히 향로에 표현된 도상에대한 사상적 배경을 추정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도교적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이와 같이 발달한 백제의 공예기술은 후에 우리나라 남북국 시대 신라에서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걸작을 탄생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문화재로서는 앞서 말한 성덕대왕신종과 백제금동대향로가 쌍벽을 이룬다. 두 작품은 서로 제작시기에 있어서도 200여년정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유물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과 개별적 특성이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을 시도하였고,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의 문화적 역량이 응집된 금속공예품으로 규모, 제작기술, 예술적 표현, 음향적 특성면에서 한국 전통 종을 대표한다. 백제금동대향로도 역시 백제인의 사상과 염원을 담은 백제 최고의 기술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이것은 백제 27대 위덕왕이 전장에서 전사한 성왕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백제 능사에서 출토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두 가지 작품이 모두 부왕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동기가 같다.하지만 이 두 작품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작품은 외형이 다를 뿐만 아니라 내적 상징체계 또한 다르다. 성덕대왕 신종은 불교적 세계관이 표현된 불교예술품이고 금동대향로는 불교보다는 도교적 세계관이 혼합된 백제의 관념 체계 그자체이다. 또 성덕대왕신종은 그 예술적 표현과 함께 오묘한 음향적 특성을 통해 청각예술을 가미한 소리로 그 가치를 더한 반면 대향로는 외연에 베풀어진 시각적 예술성과 향연이 함께 등장함으로써 향로의 정체와 향연이라는 동체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다.한편 기존 연구에서는 이 향로를 중국 박산로와 관련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박산로를 백제금동대향로의 조형적 시원이라고 보기도 한다. 박산로는 또한 중첩된 산들이 배경으로 묘사되는 등 동아시아의 산수화의 시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나라 때에 유행한 박산로의 조향과 상징성은 수나라, 당나라때에 이르러서는 박산로의 내적 의미의 쇠퇴와 함께 외형도 단순, 도식화하고 있어 공예품으로 이렇다 할 작품이 눈에 뜨지 않지만 박산로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백제금동대향로가 탄생한 계기로 볼수가 있다. 다만 백제에 이르러서는 박산로가 백제의 관념세계 및 왕권강화와 연관된 새로운 조형성과 상징성을 갖고 백제금동대향로로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예체능| 2012.04.21| 2페이지| 1,000원| 조회(154)
    미리보기
  • 회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미술에 대한 고찰
    회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미술에 대한 고찰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회화가 발전되어 왔고, 또한 각 시대별로 독특한 화풍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회화는 일종의 편견과 오해로 충분할 정도의 공정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 편견은 우리나라의 그림이 중국의 송,원시대의 회화를 모방하는데 불과하지 않아 중국의 회화와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편견은 자주적이라기보다는 일제시대 식민주의 학자들에 의해 심어진 것인데 아직까지도 불식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회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맞지만 한국회화는 중국 회화의 아류나 독창성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한국적 특성을 키워왔고 외래문화의 수용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한국 회화는 삼국시대부터 중국 회화와 교섭을 가지면서 독자적 화풍을 이룩하며 일본 회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한국회화가 독자적 특수성과 아울러 국제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의 회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회화와의 관계를 정당하게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먼저 고대 때부터 받아들인 중국회화를 수용의 자세만이 아닌 우리의 작품도 중국으로 전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중국회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피동적인 입장이 아닌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중국의 서화를 수용할 때에 우리의 필요나 미의식에 맞는 것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받아들인 중국회화는 철저하게 이해하며 소화했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적 특성의 화풍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국회화로부터 무엇을 수용했는지를 파악하고 아울러 그것을 토대로 무엇을 어떻게 발전시켰나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그림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우리나라 회화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미술과 문화의 특성 및 그 시대적 변화, 역사적 현황, 한국인의 미의식, 외국과의 교섭 등의 다양한 측면까지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호사가적인 감상의 차원을 벗어나 진정한 회화미술에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회화는 본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모두 순수한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동굴 깊숙한 곳에 식량원으로서의 각종 동물들과 사냥장면을 그려 놓음으로써 사냥감의 확보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을 띄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림의 역사가 인류가 동굴 속에 살면서 수렵을 하여 먹고살던 시대부터 시작하였음을 밝혀준다.동양에서는 확실한 구석기시대의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회화의 시원이 현재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동양회화의 기원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중국인데 중국에서는 회화의 기원이 유소씨, 복희씨, 창힐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간주되어그림 울산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85호왔다. 우리나라 또한 암각화 등의 문양을 통해 회화가 이미 청동기시대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발달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원삼국시대의 유적인 경상남도 의창군 다호리에서 출토된 다섯 자루의 붓들도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회화는 다른 미술분야와 마찬가지로 긴역사를 통해 변천해왔는데 선사시대의 선각화를 제외하고 이른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화의 기원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우 경우 늦어도 4세기 경부터는 이미 고분의 벽면에 무덤주인의 초상화나 당시의 생활상과 종교관을 나타내는 다양한 소재들이 활발하게 그려졌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회화의 시원이 적어도 16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긴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나라는 줄곧 다른 양상으로 변모하면서 발전을 해왔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우리나라의 회화에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우리나라의 회화는 일제시대 이후 편견의 피해를 입어 우리나라의 만의 특색, 특징, 중국이나 일본회화의 다른 점들이 의문으로 제기되고 있다.그림 안견의 몽유도원도우리나라가 중국을 비롯한 외래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수용하여 늘 외국회화와는 다른 한국적인 화풍을 분명히 형성했다는데 특징이 있으며 그 특색은 한마디로 정의 할수 없지만 대체로 그때 그때의 불교조각이나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공예에서 엿볼 수 있는 것과 기본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분야에 반해 회화는 평면적 미술이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그러한 특징이 덜 돋보일 뿐이다. 이런 현상은 삼국시대 회화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벌판을 무대로 거친 자연과 중국의 거대한 세력에 대항해야만 했던 고구려는 한과 육조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힘차고 율동적이며, 때로는 긴장감이 감도는 강한 성격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옥한 넓은 땅과 비교적 온화한 자연조건을 누렸던 백제는 고구려와 양의 자극을 밑거름을 특유의 느긋하고 부드럽고 세련된 회화를 창조했다. 신라 역시 솔거와 같은 훌륭한 화가를 배출했고,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 등 몇 편의 공예화 이외에는 작품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다른 야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특징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신라말기부터 통일기에는 당과의 빈번한 교섭을 통하여 불사의 경우처럼 풍요롭고 균형과 조화를 이룬 회화가 발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은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실용화와 더불어 감상화가 크게 성행하였고 화론이 발달 했으며 실경산수화가 확립되었다. 특히 청자와 함께 이 시대 미술의 귀족적 아취를 잘 반영하고 있는 불교회화는 그 화려한 채색이나 정교한 문양은 물론 구도나 인물묘사에 있어서 철저하게 고려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유교를 기본으로 했던 조선왕조시대의 회화는 인물, 산수, 영모, 화조 등 가장 다양하게 발달했다. 이 시대 회화의 여러 가지 양상 중에서도 특히 조선 초기의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이른바 안견파 산수화, 이암, 김식, 변상벽 등에 의해 발전을 본 해학적인 영모화, 조속과 조지운 부자를 위시한 중기 화가들이 그린 정서적이 수묵화조화 그리고 이정,그림 정선의 인왕제색도어몽룡, 황집중 등의 중기 화가들에 의해 독특하게 발전된 묵죽, 묵매, 묵포도 등은 조선 초중기의 회화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한국적인 특색을 뚜렷하게 형성했음을 입증해준다. 조선 후기에는 정선일파가 새로운 남종화법을 소화하여 우리의 산천을 그리는 진경산수를 발전시켰고 김홍도와 신윤복 등이 당시의 생활상을 더없이 해학적으로 묘파하여 풍속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이룩했다. 이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새로운 민족적 자아의식에 기반을그림 김홍도의 서당
    예체능| 2012.04.21| 4페이지| 1,000원| 조회(123)
    미리보기
  • 마오의제국과 만력 1587 두 시대와 두 책을 비교하며,
    마오의 제국과 만력 1587년레이 황의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와 필립 판의 "마오의 제국"을 비교하여 중국에 대해서 서술하려고 한다. 먼저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는 명대 만력제 시대의 관리들 7명의 인물과 황제를 중심으로 껍데기에 불과한 황제체제에 대하여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명대의 황제는 황제라는 명분 아래 항상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는 껍데기에 불과 했다. 황제는 천제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악운이 닥치면 책임자가 되어 희생되며 관리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물론 초기의 황제나, 몇몇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거머쥐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불과 몇몇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황제체계를 전복하고 세워진 인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은 이전의 황제들보다도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갖춘 1인 독재자로써 진정한 황제의 역할을 했다. 이것은 인민이 주인이고 인민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져야하는 인민공화국이 한 사람의 독재정권으로써 그 사람을 황제로써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 모순을 드러낸다.위 두 책은 시대가 다른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형식은 서로 비슷하다. 두 책 모두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마오의 제국"은 인물들을 3가지 테마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중국의 현대사를 회상, 부패, 투쟁으로 나누어 각 테마별로 살펴 볼 수 있었다.먼저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린자오이다. 그녀는 1950년대 베이징 대학교 학생으로 젊은 엘리트 여성이었으며 문학에 소질이 많은 재능이 있는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녀는 16세 때부터 공산당에 가담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뼈 속까지 지지하였다. 하지만 베이징 대학에 입학 후 그녀가 꿈꾼 이상사회의 건립과 마오가 주장해온 사상들과의 이질감을 심하게 느끼게 되었지만 표현하지 못하던 찰나 백화쟁명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그녀는 정부의 옳지 못한 점을 연설하는 등 공산당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마오는 이때 반 수용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퇴직하거나 보직 변경을 요구하였고, 신사층과 권문세족들은 여기저기서 붉은색 대문을 검은색으로 바꾸어 칠하는 등 남의 이목을 끄는 화려함을 피하고 부유함을 감추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또한 그는 린자오와 비슷하게 강제로 퇴임한 후 재임기간 동안의 기록을 출간하면서 그 속에 각종의 공 사문서를 집어넣었는데 현존하는 이 문집은 해서가 공정하고 청렴결백한 관리였다는 것과 사건의 올바른 처리를 강하게 염원하고 있었다는 것, 나라를 위해 온힘을 다해 번잡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 문집은 재정문제를 다루고 있는 장과 사법부분에 주목해야하는데 해서의 문집 중 사법에 관한 부분은 매우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 이유는 거대한 제국의 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어떠한 논문보다도 더 간결·명료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역사적 사료는 그 당시 중국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사료를 통해 당시 명조의 법률이 행정의 도구에 불과하며 피통치자를 지켜주자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며 당시사회를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홍위병에 무덤에서 등장한 홍위병들은 1960년대 중국 공산당의 청년운동에 참여한 학생들로 이들은 마오쩌뚱을 지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당시 당 주석 마오쩌뚱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의 당 지도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이들로 인해 마오쩌뚱은 동료들에게 빼앗겼던 당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였지만 이미 홍위병들은 중국의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하고 정부 내의 부르주아적 요소로 간주되는 모든 것들을ㅈ축출하는 것에 앞장서며 새로운 혁명가가 된 듯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어린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던 선생님, 교수, 의사 등을 반혁명 운동가, 불순분자로 명명하고 폭행과 살인을 자행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중국 전체로 퍼져 나갔고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배경은 마오쩌뚱 사상과 신격화된 마오쩌뚱에 대한 쇠뇌교육을 받아온 것으로 인한 것이라고 자신들의 뜻에 맞춰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게 하였다. 그는 법으로 규정된 각종의 의식은 변함없이 거행되었지만 이 자리에 출석하지 않았고, 고위 관직에 결원이 생겨도 공석 그대로 두고 보충하지 않아 극소수의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문관들이 최상층까지 승임할 수 있는 희망이 없어졌다. 신하들로부터 상주가 부단히 제출되었지만, 그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태업으로 자신의 직책을 방기하는 데 있어서 선택적이었는데 자신 스스로 도가의 무위이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중이라고 당당하게 큰소리 칠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하들도 경전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켜도 좋다든지 하는 어떤 지침을 찾아낼 수 없었고 심지어 격분의 감정이 계속 확대되어 갔지만, 주독부 혹은 청군 측의 내전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황제의 직책 방기로 인해 정부가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문관 집단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자동제어 장치가 있었다. 축, 진, 미, 술의 해가 되면 변함없이 북경에서 회시와 전시가 실시되었고, 또 중앙이나 지방관에 대한 정기적인 고과도 폐지되지 않고 있었다. 중·하급 문관의 파견이나 승진은 추첨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부에서 후보인원의 명부를 작성하면, 본적지의 지방관이 될 수 없다든가 부자 형제간에 상·하급 관리가 될 수 없다든가 하는 원칙을 제외하고는, 관직 임용은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이런 연례적인 사무에 대해서는 황제도 의례적으로 비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은 사례감의 병필태감이 대신 주비했다. 그는 재위 48년째 되던 해에 조용히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태업은 끝이 난다.)하지만 노동자들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현재 공산당은 한때 자본주의를 냉정한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잔인한 경제이론이라고 비난했지만 지금은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체제에 의존하고 있다. 마오쩌뚱은 죽기 전 공산당은 그들 스스로를 노동자들의 전위로서, 국가를 사회의 철 생산의 3분의 2이상을 생산했고, 그 가운데 강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랴오양 같은 도시들은 중국경제에서 절대적인 몫을 차지하는 곳이 되었다. 만리장성에서부터 시베리아 국경까지 뻗어있는 중국의 동북지역은 한때 중국경제의 상징이었으나 지금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 있는 사양 산업지대로 변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도입과 때를 같이하여 그 지역을 지배해왔던 국영산업은 비효율적 자본손실에 노출되었고 시장개혁이 추진됨에 따라 지역경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실업률을 빠르게 증가하여 위험수준에 도달하였고 그 지역의 노동자들의 30~60%가 해고되거나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랴오양지역의 상황은 그 어느 곳보다도 심각했는데 한때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확인 시켜주는 프롤레타리아로 추켜세워졌던 노동자들이 평생직장보장과 복지혜택을 보장받음을 받았던 과거에 비해 지금 현재 자식과 연로한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취업을 구걸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소요사태를 야기했다.노동자들의 소요사태는 3월의 추운 월요일 새벽에 일어났다. 이때에는 베이징에서 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 기간이었는데 도시의 고위간부들은 수 천 명의 노동자들이 랴오양 합금공장 또는 랴오톄라고 불리는 큰 강철생산업체 앞에 몰려들고 있다는 긴급 보고를 받고 잠에서 깨어났다. 파산된 섬유업체, 화학업체, 피스톤공장, 피혁공장 이들 산업과 관련된 정밀 공장 등의 노동자들이 시위자들과 합류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길로 몰려왔다. 그들은 지방법원 앞에 도달하였는데 그곳에서 그 지방법원장과 검사장에게 부패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나타나지 않자 다시 시 청사가 있는 거리로 몰려가서 그 도시 공산당 실세중의 한명인, 시장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처음에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런 랴오양 시위 사태를 지방 관료들이 매주 통제하던 수 백 건의 소요사태와 별다를 바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3월 11일에 랴오양에서 벌어진 사태는 몇 가지 이유로 경종을 울렸다. 그 첫 번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실업상태로 남아 있었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몇 달분의 체불임금과 복지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약속한 퇴직금은 지급되지 않았고, 많은 노동자의 가족들은 취사용 기름과 난방용 기름조차 구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이 분노한 것은 빈곤이 아닌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과 공산당 간부들의 부유한 삶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공산당의 천인공노할 부패는 근처에 있는 선양시에서 발표한 큰 숙청에 관한 뉴스가 부도 되었을 때 노동자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이런 선양의 부패 스캔들은 랴오톄 노동자들을 격분 시켰고 이들은 랴오양의 상황도 선양과 별다를 게 없고, 당 간부들이 비슷한 사례의 부패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들의 공장을 도산시켰다고 확신하였다. 노동자들은 선양의 지사가 랴오톄 회사의 해체를 지시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시를 내린 지사는 선양의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선양의 당 서기로 있었고, 그가 승진시킨 시장과 많은 간부들이 지방교도소에 가있었다. 노동자들은 공산당 자체가 범죄조직이라 믿었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노동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노동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차원에서 임금지불 요구대신 관료들의 부패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을 선택했고 비록 이 전략 변경이 작은 것이었으나, 그로 인한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3월 5일 전인대가 열리고 있던 바로 그날 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산한 랴오톄 강철회사의 낡은 건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수투표로 13일간의 시위를 단행하기로 결정했고 이어서 노동자들은 그들을 대신해서 당국과 협상을 벌일 10명의 대표들을 선출했다. 회의 막바지에 팡칭샹이 일어나서 말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쓴 일련의 서신들을 읽기 시작했다. 서신의 내용은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을 밝히지도 않았고, 민주개혁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는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지방 공산당의 일부 간부들과 그들의 정책에 관련된 것임을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장쩌민 주석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공
    독후감/창작| 2012.04.21| 8페이지| 1,500원| 조회(113)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03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37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