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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가처치를 넘어서
    메가처치를 넘어서1.메가처치와 메가처지 현상메가처치라는 용어는 신학 교파, 전통이 아니라 규모와 관련이 깊다. 메가처지는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생겨난 질적 변화를 특징으로 보유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이다. 현대 기독교 교인들은 교파 배경이나 신학 전통보다는 개별 교회 자체의 특성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메가처지들은 교파 신학에 대한 충성도가 낮고, 잠재적인 교인들이 고리타분한 교리 논쟁보다는 신앙이 자신의 삶에 어떤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두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메가처치는 대체로 탈신학적이며 실용주의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메가처지들이 인지도 높은 기업 브랜드처럼 상징적 영향력을 지닌다는 사실 또한 수평이동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상징적 영향력은 교인들을 소형교회에서 메가처치의 상징적 영향력과 이를 따라 움직이는 신자들의 거대한 흐름은 메가처치 현상이 만들어내는 종교사회적 역동의 또 다른 측면이다.메가처치는 일방적인 교회라는 지위를 얻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범적이고 본받을 만한 교회로까지 올라셨다.1990년대에 이르러 메가처치 현상이 더욱 심해지면서 마침내 교회 성장학은 복음주의 신학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으로 부상한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신학을 성찰보다는 성장 지향적 실용 학문으로 더 강조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교회 생태계 파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증산층이 몰락하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오늘날 경제 상황과 유사하다. 교인과 교회 사이를 기업과 소비자 관계로 밖에 메가처치 현상은 결국 교회들 사이에 경쟁을 유발시키고 균형 잡힌 신학과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신학교와 교계에 대한 메가처치의 영향력을 포괄한다. 메가처치 현상은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한 국가의 정책적 정치적 방향에도 관여하고 있다. 안정적인 목회 일자리마저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성찰적 이론 신학이나 인문학적 소양보다는 교회 성장학이나 목회 상담학 같은 실용적 방법론을 더 요구한다.메가처치 현처치가 등장하려면 최소 2천 명 이상이 매주 한 장소에 운집해야 하는데, 19세기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희소한 탓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었지만 19세기 이후에 일어난 인구폭발 현상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5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강한 소비 성향이 강한 세대가 출현하면서 메가처치 현상을 가로막은 중요한 억제력 하나가 붕괴되었다.그래서 복음전도의 활용으로 인구분표별, 문화적 , 영적 분류 작업을 통해 전도 대상을 모델링을 하면 새들백 교회의 형성을 취하고, 메가처지의 예배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찬양팀, 영상팀, 인터넷팀 등은 메가처치의 예배와 다양한 활동이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여러 가지 기술을 지원을 통해서 예배는 잘 연출된 공연과 유사한 패턴을 갖게 된다.그러나 가톨릭교회에도 2천명이 넘는 본당이 상당히 많지만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교구제라는 제도적 한계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오직 하나의 가톨릭교회만 존재하며, 그 하나의 가톨릭교회가 지역마다 본당이라는 형태로 현존한다고 믿었다.이런 교구제 제도가 종교개혁이후로부터 허물어져서, 북미 지역에 교파주의가 출현을 통해 각 교파가 독립적으로 교구를 확정하면서 통일된 교구제는 붕괴되었으며 그조차 곧 무너져 내렸다.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신교회는 개별 교회 중심으로 돌아선다. 그에 따라 교구도 개별 교회가 임의로 구획하고 확정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교회가 그들만의 자체 교구를 갖고, 어느 교회도 다른 교회의 교구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개별 교회 사이의 질서를 유지해주었던 교구제는 완전히 해체되고 오늘날 대다수 개신교회에서 교구는 사실상 구역과 동의어가 되었다.베버에 따르면 자신의 영혼 구원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청교도 윤리를 만들어냈으며, 이 청교도 윤리가 자본주의의 출현을 막은 심리적 장벽을 허물었다고 주장한다.이 주장은 매가처지 현상 출현에도 상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메가처치 현상이란 시장 자본주의의 원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생겨나기 어려운 시작되면서 세워진 전통적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영락교회처럼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월남한 이들이 세운 월남자형 교회이다.한국의 메가처치 2세대는 1950~1960년대에 출현했으며, 산업화 시기에 인구가 서울로 몰리자 포화 상태에 이른 서울 구도심은 강북 지역으로 확장되었고, 그곳에 메가처지도 잇따라 나타났다. 이들 교회는 대개 한강 북쪽에 자리했기 때문에 강북형 메가처치라 불린다.하지만 강북형 메가처치는 서울 강북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교회의 한 유형을 가리킨다. 경제 성장을 위해 전 국민을 동원했던 한국 정부와 여러모로 달았는데, 권위주의 리더쉽, 중앙집권 구조, 성장을 위해 교인을 동원하는 공격적 복음주의, 감시와 통제의 소그룹 조직, 경제적 성공에 대한 약속 등이 두드러진다. 대표적으로 굉림교회, 여의도순복음 교회가 그렇다.강남형 메가처치를 3세대 메가 처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이 모두 가능하다는 사례를 사랑의 교회와 온누리 교회를 통해서 건강하고 모범적 교회로 여기게 된다. 이 같은 인식은 대형교회에 대한 고질적 거부감을 크게 완화했으며 결국에는 메가처치를 본받아야 할 모범교회로까지 올려놓게 된다.4세대 신자유주의 형 메가처치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앞 세대와 달리 특정 지역에 편중해 나타난다고 말하기 어렵다. 3세대부터 메가처치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정현 목사가 이끄는 사랑의 교회가 4세대 전형을 보여주는데, 3세대 옥한음 목사가 올바른 교회론을 정립하고 그 신학에 기초해 건강하고 모범적 교회를 세워 한국 교회를 변화시키고 싶었 했지만, 오정현 목사가 후임으로 들어오고 사랑의 교회는 급격하게 변했다.사랑의 교회의 신축 계회은 성장을 향한 강력한 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랑의 교회를 찾는 인근 지역 신자가 2만 명 증가할 경우 인근 1천개 교회에서 교인이 평균 20명씩 사랑의 교회로 수평이동할 것이 분명하다. 사랑의 교회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이웃 교회들을 배려해 신축 은 직통 계시가 아닌 성서의 계시를 강조했고, 유아세례와 국가교회를 거부하고, 제자도를 강조하고 평화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들의 교회론은 먼저 중생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들에게 교회란 참 신자들의 모임이다.그들이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인의 재침례를 강조하는 것도 거듭난 신자와 명목상 신자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생각하는 선교나 전도는 출석 교인 수의 증가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명목상 신자의 증가에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는 메가처치 현상의 주요 동력인 교인 증가에 대한 열정을 누그러뜨렸고, 메가처치로 커지려는 충동을 억제하는 제동장치로 작동한다.그들의 구원관은 가시적 교회를 강조하는데 교회 건물이나 장엄한 교회 의식, 운집한 회중이 아니다. 진정한 가시적 교회란 세상과 뚜렷하게 구별된 복음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현전하는 신자들의 모임을 말한다.메가처치 현상과 관련해 주목할 부분은 니버가 지적한 교회의 실패이다. 교회 분열, 곧 교파주의의 실패는 교회가 계급이나 계층의 압력에 굴복하고 교회 유지와 확장에만 매달려 본연의 책무를 등한히 해서라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통해 교회 분열을 상쇄하려는 변명과 정당화가 교파주의를 낳고 결국 탈교파주의와 개별교회 중심주의에까지 이른다.아나뱁티스트 교회 역시 어느 정도 교회 분열에 참여했으며 개별교회 중심주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공동체성을 강조한 덕에 메가처치 현상을 억제할 수 있었다.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군중의 특징은 익명성이다. 메가처치는 공동체성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선택자들의 임의적 집합이다. 성서는 익명성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곧 그분의 특별한 은총을 입는다는 뜻이며 나아가 존재의 구속을 의미한다. 반대로 이름이 잊히거나 지워지는 것은 은총의 상실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지크 엘륄은 익명성이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추상적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메가 처치는 추상적 사회에 존재하는 추상적 교회이다. 매가처치 교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낯선 관경의를 극대화하려는 충동을 가진 존재이며, 그 욕구는 자연스럽고 정당하다.3 개교회는 전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 4 개교회는 다른교회와 이해관계에 따라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시장을 기초로 형성된 계약 관계이다.교회론적 개인주의는 개교회 간의 분리와 대결과 경쟁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해하다고 정당화한다. 교회 내 신자들의 관계가 소외, 익명성, 친교의 상품화로 왜곡되고 있음에도 그것은 무해하며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이렇게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교회 간의 관계에서 공교회성을 약화하고 교회 내 공동체성을 약화하고 있다.6. 대안적 교회론의 모색메가처지 현상의 대한은 자발적으로 교회 성장을 억제하거나 적정 수준에서 교회를 분할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성장을 억제하거나 분할하는 것은 개교회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야지 강제로 요구할 수단이나 근거가 없다.교회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극소수 거대 교회와 절대 다수인 작은 교회로 양분되고 있다.매가처치의 대안으로 작은 교회를 찾은 신자들이 종종 함량 미달 목회자, 과도한 속박, 지나친 헌신 강요 때문에 메가처치로 돌아가거나 교회에 대한 마음이 식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매가처치 현상의 대안이 큰 교회 VS 작은 교회라는 틀에 갇혀 크기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뒤집어 쓰게 되는데, 올바른 대안은 큰교회 작은 교회가 아니라 병든교회 VS 건강한 교회 프레임으로 접근해야 한다. 진정한 대안은 건강한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명확히 밝혀내고 그 방향에 맞는 건강한 교회를 구현해내는 것이다. 얼마나 작은 교회가 아니라 왜 작은 교회인지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매가처치 현상의 근본적 대안은 매가처치 현상에 대한 철저한 진단과 비판, 자기반성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지향하는 방향성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 뱡향성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담론의 허구를 폭로함으로서 강력한 흐름의 예봉을 꺽는 것이 올바른 첫 번째 대안이고, 두 번째로는 실제적 대안에 .
    인문/어학| 2015.08.27| 12페이지| 2,500원| 조회(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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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도덕인가 서평및 요약
    왜 도덕인가... 서평1. 저자 소개저자 마이클 샌델은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사회에 '정의' '공정' 논쟁을 촉발시킨 하버드대 명교수. 1953년 미네소타에서 출생했다. 브랜다이스대학교를 졸업하고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이클 월저, 찰스 테일러 교수 등과 함께 공동체주의의 4대 이론가 중 한 명이자 존 롤스 이후 정의 분야의 세계적 학자로 평가된다.1980년부터 30년간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수업은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하버드대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이러한 명성으로 2002년 앤 티 앤드 로버트 엠 벳 교수, 2008년 미국정치학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교수로 선정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정의란 무엇인가》《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등이 있다.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민주사회에서 도덕성의 의미와 본질,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나아가 공공생활을 음직이는 도덕적 딜레마와 정치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 책에 내용 중 상당수는 정치 논평과 정치철학 사시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평론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공공철학의 모험적 시도라 할 수 있는데첫째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법적 논쟁거리들에서 철학의 근거를 찾기고 있으면서둘째로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동시대의 대중 담론과 관계 맺게 하는 시도, 즉 공개적으로 철학을 행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려고 한다.2. 목차 소개1부 도덕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도덕적 가치가 왜 중요한가를 살피고, 경제적 도덕, 사회적 도덕, 교육 도덕, 종교와 도덕, 정치적 도덕 등 5개 주제로 나눠 지난 20년 동안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도덕적 현안들을 다룬다.즉 복권과 도박, 광고와 상업주의, 소수집단 우대정책, 존엄사, 정치인의 거짓말, 낙태, 동성애자의 권리, 줄기세포 연구, 온고 있는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가치들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정치적 도덕이나 종교와 도덕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을 했다.처음 부분을 상당히 흥미롭게 진행을 되면서 나에게 재미난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했지만,스포츠와 시민 정체성에서는 조금은 부족한 부분과 설명이 더 들어가서 논의을 진행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칸트로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칸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써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 기회가 된다면 칸트관련된 쉽고 이해기 쉬운 철학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이 책에서는 또한 ‘윤리적, 도덕적 가치가 경쟁할 수 있는 사회,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첫 단계’라고 말하면서, 도덕성이 살아야 정의도 살 수 있고, 무너진 원칙도 다시 바로세울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도덕’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전통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포괄적인 도덕적 종교적 이미지 속에서 정치생활을 형성하는데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처럼 도덕적 종교적 견해의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의 민주사회에서는 공적 정체성과 사적 정체성을 구분해아한다.지적이 흥미로운데 그러면 공적인것과 사적을 것이 구분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공적인 정치적인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설득 하는데는 무엇이 필요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아직까지 남는다..센델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지지하는 도덕적 종교적 이상이 진실하다 해도 나는 이러한 이상이 사회의 기본 구조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한다.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개인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다른 특징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사회의 공적인 정치문화에 영향을 받는다 라고 주장하는데 글쎄 사회적인 토론과 합의로 어디까지 도덕적으로 합의에 이룰 수 있을까?동성애문제나 낙태의 문제등 도덕적 종교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이사이에 힘을 많이 잃었다.부분적으로 부도덕이라는 의미에 대해 대한 개념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시민들이 도덕과 부도덕을 법률로 규정하는 것을 과거에 비해 더 꺼리기 때문이기도 하다.복권사업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이유는 독점 사업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도덕적 이유 때문에 현재 민간 사업자가 복권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금지되어 있다.자유주의에 입각한 복권 옹호론자들은 다음 두 질문 사이에서 딜레마를 빠지는데, 만일 복권이 세탁소나 편의점처럼 도덕적으로 합당한 사업이라면 왜 민간기업이 그것을 판매하고 운영해서는 안되것이라는 것과 복권이 매춘처럼 비도덕적 사업이라면 왜 정부가 그 사업을 운영하는가라는 문제이다.대개 복권 찬성론자들은 사람들이 도박의 도덕성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비도덕적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러나 실제 복권구매행위는 이러한 자유방임주의적 이상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복권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권을 홍보하고 구매하도록 부추 긴다. 그래서 더 이상 뼈빠지게 일할 필요가 없다는 환상을 자극한다. 그리고 극빈지역의 사람들이 더많이 구입하며 나아가 개인뿐아니라 주정부까지도 중독상태에 이르게 되어 시민들에게 노동윤리와 희생정신, 민주주의 적 삶을 지탱하는 도덕적 책임과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계속 퍼부을 수밖에 없으며, 이로써 발생하는 공공영역의 타락은 복권이 야기하는 가장 중대한 해악이다만일 복권이 일종의 죄악세를 부과하는 사업이라면 그것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죄악을 범하려고 장려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유일한 사업이다.더욱 많은 돈과 원활한 정부 재정을 유지 하기 위해 이제 미국의 주정부들은 자신의 권위와 영향럭을 이용해 헛된 소문을 퍼트려야 하는 형편이다.그러므로 복권은 도덕적 시민의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운만 조금 따르면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스포츠 구단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이 들게 된다.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해보자.그런데 부자가 각 가정에서 낙엽을 태우면서 느낄 가을의 정취를 이웃에게서 산다면 사람들은 몇 푸의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낙엽을 긁어모아 태우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부자에게그 권리를 팔지만, 파는쪽이던 사는 쪽이던 낙엽을 태우는 행위를 깨끗한 공기를 오염시기는 행동으로 인식하기보다는 하나의 사치품 내지는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처럼부자에 대한 사람들의 못마땅함 때문에 갈수록 주민들 사이의 협력이 힘들어 짐을 이야기 한다.시장 논리가 공교육을 후퇴시키고 있다비록 학교가 광고업자의 입장에서 최저의 홍보 장소일 수는 있으나, 교내 상업주의는 학교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심하게 훼손시킨다. 아이들의 인성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치고,학교를 향한 상업주의의 이러한 침투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또한 제대로 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인 공교육의 목적과 상업주의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도 논쟁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최근에 기업들의 새로운 격전지로 떠오른 장소는 학교다. 교실까지 침입한 기업들의 무차별 행보는 학교를 안전하고 확실한 강매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한창 자라나는 학생(소비자)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기업들은 우호적인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고 아이들의 마음 속에브랜드를 좋은 인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무료 비디오, 포스터, 학습자료들을 앞다투어 제공한다.기업이 지원하는 교육 자료들이 꼭 교육에 대한 사항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브랜드 이름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브랜드 이름을 교육 자료나 커리큐럼에 교묘하게 집어넣는 기업도 있지만 교내 광고를 하는 직접적인 방식을 취하는 기업도 많다. 많은 학교들에서 그와 같은 마케팅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학교 상업화의 가장 끔찍한 사례는 TV 뉴스 프로그램 채널원으로 수많은 청소년들이 시청하기 때문에 방송 운영자는 기업에게 엄청난 광고비를 받는다.기업이 후원하는 대부분의 학습자료들은 선입견과 왜곡된 시각, 피상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학교에 제공되는 무료 자료들은 기업 광고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시사나 뉴스 주의해야 한다.적극적인 시장 옹호자들조차도 대학교육을 시장 압력에서 보호하려 한다.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시장의 해법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의 성격을 훼손시킨다. 적어도 대학교육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메릿장학금의 증가가 바로 그 시점을 앞당기게 될지도 모른다.도덕적 종교적 문제들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신념이 과연 옳은 신념일까?삶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므로 정부가 법을 통해 그런한 문제들에 답을 정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한다.그 대신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신념에 따라 사람들이 삶을 살 권리를 지녔음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을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주장을 한다.자유주의 절학자들의 주장은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된 인식을 드려냈다. 이 인식에 따르면 우리의 생명을 우리 스스로가 만든 창조물로 여기면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삶을 살거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인간에게 죽을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가?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우리는 일정한 의무감을 갖고 그 생명을 지키는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 로크와 칸트 두 사람 모두 자살할 권리를 부정했으며 생명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인식에 반대했다.생명을 신성한 선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환자의 비참한 상황이 생명 보존보다 우선한다고인정할 수 있다. 해결책은 죽음을 돕는다는 행위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지키면서 존엄사를 존중해줄 방법을 찾는 것이다.아무리 훌륭한 목적을 가진 연구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근본적인 인간 권리를 침해한다면 정화될 수 없다.중요한 의학 연구라 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 도덕적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줄기세포연구에 수반되는 배아 파괴가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에 해당하는가 여부이다.배아파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배반포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
    사회과학| 2014.11.05| 10페이지| 2,500원| 조회(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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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주의 조식신학 마이클 호튼 종말론 요약
    조직신학 종말론 요약개혁주의 조직신학 6부종말론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 및 실천의 체계 전체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렌즈라는 사실이다.삶과 죽음과 영원한 소망에 관한 우리의 묵상을 조직하는 것은 바로 복음 그 자체다.천국에 가는 것은 일종의 간이역 중강 상태에 불과하며 복음에서 말하는 최종적인 소망은 아니다.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구자기 극단적인 입장이 있다. 한쪽 극단에는 플라톤 자신의 파이돈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플라톤주이적 관점이다.이 관점에 따르면 정신 또는 영혼은 육체적 존재를 초월하는 더 높은 자아다. 외적으로 형상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 존재하는 영혼은 진선미-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으로 이상에 합치된상태 -를 안다.구원은 영혼이 죽을 때 육체에서 행방되어 일련의 교육적인 환생을 거친 뒤에 일자에 최종적으로 재결합하는 것이다.존재론적 일원론은 개인적 실존을 파괴하지만 그렌츠가 언급하는 대로 일원론은 인격성을 상실하면서 또한 공동체도 파괴한다. 동방 종교가 일반적으로 가르치듯이 자야가 마침내 모든 존재와 합일을 달성할 때 이 표면상의 유익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창시자 메리 베이컨 에디는 자니가다(그리고 떠나가다)라는 표현을 대중적인 어휘로 도입했고 질병과 죽음은 환상(마야)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본적으로 영지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물질세계와 악과 고난은 우주적 조화라는 영원한 윈리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잘못된 믿음이다.성경에서는 영혼이 불면한다는 가정이 전혀 없다. 오히려 영혼은 몸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끝이 있는 창조된 실체다. 불멸성은 생명나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제시된 목표였으며 영혼뿐만 아니라 전인격에 제시된 목표이다.인간의 실존 또한 영혼의 끝없는 재탄생을 통한 순환적 실존이 아니다. 그와 달리 영혼은 몸과 함께 생겨나며 기독교 종말론에서 완성으로 간주되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의 성취를 지향한다.데카르트는 우주에서 가장 의심할 수 없는 실재는 순수 지성으로서의 자신의 실재하는 자 입은 형태든 간에 죽음 이후의 생존은 소망하지 않았다고 한다.판넬베르크나 베르카우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소망의 실재를 변호했지만, 육체를 벗어난 존재의 중간 상태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플라톤주의적인 유산에 과잉 반응을 보였다.비환원적인 물질주의 라고 부르는 몸과 구별되는 영혼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육체적 존재의 영적 측면은 인정한다.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어떤 의미에서든 신적이거나 본질적으로 불멸하지 않는다. 영혼이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생존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이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선물로 허락하시기 때문이다.교회론에 있어서도 기독교는 인격적 정체성이 우주적 통일성 속에 가라앉는 본질의 융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주인과 더불어 서로 교제를 누리기 위해 풍성한 잔치에 모인 교제에 대해 말한다.성경적 종말론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성취로 나아간다.중간 상태에서 신자들은 단지 명상에 잠긴 채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중간 상태에 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한다. 천국과 관련해서 인용되는 거의 모든 본문들은 중간 상태가 아닌 영원한 상태를 언급한다.영혼 수면설이라고 알려진 영혼의 잠의 옹호자들은 사람이 죽자마자 그 영혼은 중간 상태에서 천국에 있지도 않고 지옥에 있지도 않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무의식 상태로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을 신봉하는 몇몇 사람들은 인간론적 일원론을 받아 드리면서 몸과 구별되는 영혼의 주재를 부정한다.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전통적인 관점을 채택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 할 수 없다.지옥에 있는 사람과 천국에 있는 사람의 존재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발생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결코 역사적인 내러티브나 교리 설명이 아니며 모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밝아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다.우리의 세례는 몸의 부활을 전제로 하며 바로 이 때문에 세례는 육체적인 성례이지 단순히 영적인 마음의 훈련이 아니다. 우리는 성찬후천년주의자들에 따르면 이 황금기 이후에 재림하실 것이다.전천년설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역사의 끝에 다시 오실 때까지(눈에 보이는 교회를 포함하여) 세상의 상태가 점점 더 타락할 것으로 예상한다.후천년설은 열방이 그리스도를 공식적으로 메시아로 인정하고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그 밖에 전 세계적인 재앙들이 점차 그칠 때까지 교회의 선교적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으로 인해 상황이 점점 개선들 것으로 예상하고 그 후에 그리스도가 자신의 왕국을 받으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영원한 나라를 시작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 시기 내내 성장과 쇠퇴, 고난과 성공, 증언과 배교가 동시에 발생한다라고 예상한다.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닌 이민의 측면을 적절히 파악하지 못하는 반면, 후천천설은 그 나라의 아직을 측면을 과소평가한다.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 종말론적 관점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와 같이 그 폭이 매우 넓었다. 사두개인들을 혼합주의적이어서 그리스와 로마철학을 상당히 많이 차용했고 랍비 전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결과 사두개인들은 대체로 로마의 지배자들에게 고분고분했고 로마인들이 세운 명목상의 왕의 지배를 받는 현 상태를 지지했다.에세네파는 독신과 극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했고, 특별히 선지서 연구에 몰두하여 당대의 사건들을 말세와 전도로 해석했다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임박한 심판과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이런 사막 공동체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 이 공동체마저도 말세를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발생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죽은 자들 부활 및 마지막 심판과 더불어 메시아의 통솔 아래 이스라엘 신정 왕국이 문자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은 계속해서 여러 세기에 걸쳐 정통 유대교 신앙의 특징이 되었다.신약의 예언적, 묵시적 문헌들 - 특히 예수님의 의 왕국의 흐름을 발견하고 그 왕국의 다양한 표현과 통치를 인식하면서(각기 나름의 사명, 목저, 운명, 수단이 있는)현재 이 시대의 두 도성을 분명히 구별한다.그러나 무천년설에 대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왜곡은 보수적인 기질을 조장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역사적 제도로 축소시킨 반면, 천년왕국 운동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묵시록적이고 반제도적인 실체로 이해하며 현 상태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복돋았다.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보다 더 분명하게 천상의 왕국과 지상의 왕국의 차이를 설명했다.찬상의 왕국은 세속 권력이 아닌 오직 말씀으로만 전진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카톨릭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시대의 정치적 왕국과 혼동했다면 제세례파는 두 왕국을 위험할 정도로 대립적 관계로 파악했다고 종교개혁자들은 생각했다.그보다 신자들은 각기 그 원천과 목적과 수단이 다른 두 왕국의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고 종교개혁자들은 주장한다.십자가 아래 있는 이 영적인 왕국을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지정학적인 왕국으로 바꾸려는 모든 시도의 원동력은 사실 메시아적인 왕 자신이 이르렀을 때조차 신정 체제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똑같은 정말론적 오해다.슈바이처는 사랑의 왕국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한 임박한 왕국이 위로부터 이르러 격벽과 심판 가져울 것을 기대하셨다고 주장했다.바르트는 영원과 시간의 이원론 속에서 종말론을 역사를 초월한 희망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몰트만은 종말론을 우리로 하여금 미래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역사 안에서의 희망으로 본다.세대주의 위험할 정도로 부정적인 쳔년왕국설에 애착을 갖고 세상이 평화의 왕국 안에서 완성하기보다 격렬한 대화재 속에서 멸망하기를 고대한다.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열망과 활동을 지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다.몰트만의 관점은 잘못된 믿음이 이 윤리적 문제의 원인이며 오직 복음 선포로써만 이런 믿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이고 있다.몰트만이 주장하듯이 무천년 옳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있건 없건 마찬가지로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천년왕국설 못지않게 무천년설의 입장도 미래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완성될 것을 고대한다.그러나 무천년설은 우주의 최종적으로 파괴될 것이라거나 이 놀라운 영원한 평화의 상태가 천년이라는 기간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예상 없이 완성을 고대한다.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은 초기 유대교 종말론의 가정, 즉 그리스도의 왕국은 다가오는 왕국 속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이라는 가정을 따르는 듯한다.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와 후천년주의적 과거주의자의 핵심적 차이는 천년왕국이 예수님의 초림속에 속하느냐 재림에 속하는냐의 차이다.신약의 예언들과 관련해서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가리키느냐가 아니라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의 통치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영광 속에서의 통치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세례, 설교, 성찬을 통해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 완성의 보증으로서 우리 마음속에 임자하신 성령은 자신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는 일을 완성하실 것음을 확신시킨다.성령은 다가올 시대의 복을 현재로 가져오시며 이 복은 우리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더 많은 복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갈망으로 충만하게 한다.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복음을 통해 발전하고 있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현재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많은 본문들과 함께 읽으면 세상의 구속은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나라가 전복시키고 있는 조건임을 드러낸다.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까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는 우리가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왕국이 아니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왕국도 아니고 우리가 지금도 하늘에서 받아 누리는 왕국이다.무천년주의 해석에 따르면 현재 요한계시록의 천년 속에서 살면서 또다시 죄에 빠지는 문자적 천년왕국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회복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밝아올 영원한 의와 평화의 왕국을 갈망한다식된다.
    인문/어학| 2013.12.20| 8페이지| 1,5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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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에로 초대하는 진리
    자유에로 초대하는 진리신앙고백서의 대해서 들었던 것이 신앙생활을 하고 5년쯤인가 웨트민스터신앙고백서라는것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어릴때만 해도 4영리가 보통 기독교인의 신앙을 담고 있는 지침서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고백이라는 것에 무지 아니 무시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신앙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다.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욕을 먹고 무시를 당하는 시대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비판을 받고 있다. 아마도 똑바로 살지 못하는 우리 기독교인이 문제라고 생각은 하지만 왜 똑바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아마도 신앙고백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저자인 Willem D. Jonker 또한 서언에서 이야기 하듯 신앙고백서의 특징 중 하나가 그 시대의 정황을 잘 드러냈다라고 이야기 했다.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혼동과 거짓과 이데올로기적인 오용에 대항하면서 오랫동안 인내함으로 소명에 응답해온 것에 대한 증언이기도 한다라고 이야기 한다.올바른 신앙교육에 그 시대의 맞는 신앙고백서의 중요함과 아직 우리나라에 맞는 신앙고백서가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 남는다.이 책을 읽으면서 신앙고백서의 중요한 부분을 알아 가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구성이 책은 1장의 프로테스탄트의 형성으로서 신앙고백문서, 2장의 개혁교회 신앙고백의 고유햔 특성의 대한 내용으로 서론이 들어가고 3장부터 5장까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하이델 베르크 신앙고백서, 도르트레히트 정경의 이야기로 저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본론 부분으로 구성되어져 있다.6장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의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로 남아공화국의 문서인 바르멘 신학선언문과 벨하신앙고백서, 카이로스 문서, 신앙과 항거를 설명한다.1장은 신앙고백서의 정의로 초대교회 신앙고백은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띠면서 동서방 교회 모두 삼위 하나님의 신앙고백을 기독교의 근본 교리로 삼고 있다고 설명하면서츠빙글리와 루터의 신앙고백서의 목적은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신앙증언, 교육, 그리고 모든 회중이 진정한 신앙에 머물도록 하는데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칼뱅의 첫 과업중의 하나가 젊은이의 교육을 위한 신앙교육서 작성한 것이 나중에 하이델 베르크 신앙교육서를 작성하는데 근간이 되고 올바른 신앙교육서가 종교개혁 첫 시기에 현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신앙고백서의 주된 목적이 회중을 내적으로 강건하게 새운다는 사실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교통하는 신앙을 통하여 그 통일성을 더욱 강화하고 또한 새롭게 견지하도록 하였다.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서들은 국가로부터 정치적인 합법화를 천명하기도 했고 또한 말씀 선포를 위한 원칙을 선명하게 주는 역할을 했다.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설교함으로써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카톨릭에서 중시 여겼던 성례는 하나님 말씀의 보이는 측면일 뿐이지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통해서 회중이 참여하고 말씀이야 말로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그리고 신조학의 정의와 특징과 통일된 입장을 보여주는 세 신상고백서의 신학적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2장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고유한 특성으로 교파들마다 신앙고백이 다른 부분을 설명하고 고교회의 교리들의 신앙고백을 포함하는 보편적 성격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고교회의 교리적인 결정을 받아들기 발전시켰으며 서방교회가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래하신다는 필리오꾸베 산앙고백을 강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동방교회는 하나님의 영원성 및 불가시적 본질인 창조주 하나님께 두고 개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서방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인간의 구속을 핵심으로 즉 죄를 중심으로 생각을 전개한 방면에 동방교회는 성육신 중심적인 사로를 했다. 또한 동방교회는 죽음과 연약성으로부터 구원으로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 타락을 그렇게 많이 강조하지 않았다.개혁교회는 동방과 서방교회의 이런 차이를 고려하면서 서방의 관점을 수용한다.그러나 개혁교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로마 카톨릭교회보다 고교회의 구원론적 의미를 취한다.종교개혁은 특히 구원이 직분과 성례의 중재를 통해 주어진다고 하는 로마카톨릭의 교회론에 강력히 반대했고, 개혁교회와 로마카톨릭교회의 제3조의 신학의 차이, 칼빈과 루터의 예정과 칭의, 성령론 및 칭의와 성화에 대한 차이, 하나님나라를 향한 소망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칼빈과 제세례파와 루터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개혁교회의 특징은 성경과 성령의 중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온 세상의 성화를 꿈꾸는 것으로 이야기 하면서 개혁교회 신앙고백의 특징과 구성, 내용을 정립하고 있다.3장은 네덜란드신앙고백서를 포괄하는 개념과 교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살피고, 그 기획, 즉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질문해야하며 목적으로 개혁교회를 이단이나 반역세력들로 파악하고 박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왕에게 확인시키는데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성경을 교회가 전수해준 전통의 일부로 여기는 로마카롤릭교회와, 성경을 성령에 대항하는 죽음 문자로 보든 제세례파를 비판함과 동시에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를 거절하고 제세례파의 입장인 한번 용서받고 거듭난 사람은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상태에 있게 된다를 거부하게 된다.그러면서 네델란드 신앙고백서의 취약한 부분을 지적해서 설명하고 있다.4장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를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신앙교육서의 형성과정과구성상의 특징적 요소로 고교회의 신앙교육서들을 포함했던 네 가지 구성 요소를 다루고,고교회의 신앙교육서들보다 교육학적으로 더 나은 형태로 구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깊이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출간된 이래로 가장 짧은 기간에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다른 신앙고백서들보다 교회의 지체가 되는데 필요한 세례자 입문교육에 사용되었고, 예배 시에 또한 빈번하게 설교자들이 이 신앙교육서의 도움으로 설교를 할 만큼 전 교회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5장과 6장은 도르트레히트 정경의 역사와 배경 정경의 구조인 항론과 반항론의 다섯가지를 다루고 있고,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신앙고백서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저자는 글을 맺는다.새롭게 발견한 점짧지 않은 책 내용 속에 이렇게 많은 부분에 대해서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모든 신앙고백서가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차이점을 있다라는 사실에 놀랐고, 칼빈과 루터의 율법의 관련하여 다른 견해를 보여줌으로서 칭의와 성화의 대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 오는데 루터는 율법을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도구로서 파악하지만 칼빈은 율법을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성화의 길로 신자들을 이끌어 갔다라고 보고 성화에 대한 이런한 접근은 루터의 두 왕국론을 거부한다.아마도 루터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나누어져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깔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는데 칼빈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하나로 생각하고공공적인 정치적인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 세상 모든 영역이 성화의 단계 즉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패러다임으로 봐야한다는 칼빈의 주장에 필자는 동의하면 아마도 개혁교회의 세계관과 교리적 합리성도 여기에 맞추어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공로주의적인 로마카롤릭의 신학이 성례의 참 의미를 희석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 가슴이 아프고 말씀중심으로 구원의 수단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백성들이 성례를 통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부분들이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이 잊고 지내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어릴때부터 예정론 대한 부분을 들으면 너무나 답답하고 아직도 이 문제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 이 책에서 칼빈의 관점과 루터의 관점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조금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그리스도와 연합의 근거로 개혁교회는 예정을 강조하지만, 루터는 믿음로 말임암는 칭의를 강조한다. 문제는 예정교리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결정론적인 맥락으로 이해되어 지는 부분이 있고 루터교회는 주권적 은혜론보다는 제한된 신인협력적인 사고를 받아 들이는 문제가 생겨났다. 책에서는 루터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수납을 하나님의 예정하시는 주도권에 가장 밀접하게 연결 시켰다라고 말하면서 에라스무스와 논쟁에서 원칙상 예정을 강하게 강조하였다라고 말한다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루터가 예정을 믿고 있는 것인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정면에 내세우기 위해서 예정의 부분은 약화 시킨 건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칼뱅의 신학이 하나님의 주권성에 지배받는다고 말하거나 예정론이 지배적인 요소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라는 표현도 필자를 또 다시 어려움에 빠지게 한다.아마도 그 만큼 예정의 교리가 어려운 부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주권과 주권적 은혜론과 신인협력적인 사고의 구분점이 어려움 부분이 있다라고 생각이 든다.
    독후감/창작| 2013.09.19| 5페이지| 1,500원| 조회(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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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이란 무엇인가 서평
    구원이란 무엇인가 서평1. 머리말바울의 구원관을 바르게 이해함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바울서신을 새 관점적인 해석이 얼마나 위험한 한지를 리차드 개핀 교수가 쓴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새 관점이 무엇인지 최갑종 교수님의「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접근과 개혁신학」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갔다.새 관점에서는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율법을 지켜 의와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 였다는 전통적인 주장이 잘못되고 1세기의 유대교는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강조하는 은혜의 종교임을 주장한다.언약적 율법주의이란 율법은 의와 구원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닌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에 의해 주어진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율법은 그 자체 언약백성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자들에게 속죄의 제사를 통해 언약백성의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갖는다는 말이다.고로 새 관점은 예수과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신약해석, 특히 바울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리차드 개핀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미국 정통 장로교단의 교육위원으로 봉사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자로 크게 인정 받는 교수이다.개핀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바울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논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장을 통해서 바울과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 함으로해서 바울에 대한 새 과점이라 불리는 이슈를 바르게 보는데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지필했다.2. 책의 구성1장에서는 구원의 서정과 바울 신학을 이야기 하면서 새 관점이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을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의 동등한 입장을 강조하는 공동체적이고 교회론적인 관점을 설명하면서 칭의가 바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전통이 이해하는 것처럼, 칭의가 교회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새 과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고로 이신칭의를 구원론적인 입장이 아닌 교회론 적인 입장으로 개인의 구원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언약백성인 가를 말해주는 교회론적인 측면을 살짝 이야기 하면서 상세하게 진술하지는 않지만 바울신학, 특히 바울의 구원론의 여러 측면들을 필요한 만큼 다루겠다고 이야기한다.2장에서는 구원의 서정과 바울신학의 중심이라는 주제로 바울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의 문제가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인 측면에서 구원의 실제적인 적용을 무엇이지 질문을 하면서 바울신학의 중심적인 관심사의 주제를 복음을 중심에 둔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그 복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전체적인 초점으로 고전15:3-4의 말씀으로 논증한다.그러면서 죄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무엇인지 집중하면서 로마서 중심으로 죄는 신중심적인 사고와 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고전15:3-4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라는 구절은 근본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이중적인 윤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함 하며 십자가의 효력은 비록 동일한 방식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죄책과 죄에 노예된 것을 파괴하되 그것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킨다는 것을 개핀 교수는 주장한다.또한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와 그리스도의 연합, 죄책과 같이 죄를 온전히 관계적인 책임으로 파악하고 이에 답변을 시도해야고 주장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관계적이고 법적인 관심에 칭의를 이야기 한다.3장과 4장에서는 구원의 서정과 종말론이라는 주제로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가 인간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인간론의 중심에서 종말적으로 성화를 설명하려고 했다.바울이 그들의 존재의 핵심에 그들은 인간론에서 볼 때, 속사람의 과거 부활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미래의 육체적인 부활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은 부활이라는 범주 안에서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부활의 삶이라고 이야기 한다.또한 칭의와 우리의 구원의 “아직 아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를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는 것인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인지 파악할 필요성을 이야기한다.3. 비평개핀 교수는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로서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의 형식으로 확장된 구절인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 논의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 또한 주님의 죽음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부활 또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논쟁의 중심임을 놓치지 않고 있다.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표준새번역 고전 15:3)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핵심 요절로 사용해서 구원의 역사적 관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새 관점주의자들은 성경 중심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비치는 듯이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면서 성경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나란히 예수님의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죄 및 그 결과와 관련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서정 문제를 거론할 때, 그의 핵심적인 초점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historis salutis)에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 구분에 있어서 잘못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구속사적인 초점을 축으로 하여 개인적인 구속의 적용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개핀교수는 강조한다.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과 현재 그의 죽으심과 부활 덕택에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연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을 차지한다.칭의를 법정적인 것으로 성화를 갱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해야 한다.새 관점주의가 말하는 이신칭의가 바울 복음의 본질적 요소임을 부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이해 할 수 있다.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불어 먹고 교제를 향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새 관점은 즉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로 보는 것, 또한 개인의 구원교리가 아니라 언약백성인가 말해주는 교회론적인 측면으로 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과 관련하여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로 바라보는 것을 잘못 된다고 리챠드 개핀박사는 말하면서 바울의 구원의 서정의 본질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을 강조한다.고로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반영되는 그의 교훈의 이러한 깊은 구원론적인 의도와 요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왜 새 관점에서는 칭의를 교회론 측면으로 다루고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발전된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의 선교문맥에서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사회적인 혹은 수평적인 의미를 등한시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는 바울 복음의 핵심이라기보다, 오히려 바울의 이방인 선교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보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바울의 복음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며, 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칭의는 복음을 듣고 응답한 자에게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그러므로 이신칭의는 바울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복음의 외연 혹은 복음의 적용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해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관련하여 아담의 죄와 그 결과가 궁극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개핀교수는 주장한다.겉사람이 “육체” 혹은 “지체”에 상응하는 혹은 바꿔쓸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영으로 이해 된 정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낸다.겉사람 혹은 육체는 좁은 의미로서 신체적인 것 혹은 생물학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속사람 혹은 마음은 내 존재의 중심에 있는 나로 표현하는데겉사람은 죽음을 초래케 할 부패에 종속된 나인 것처럼, 속사람은 종말론적인 삶과 매일같이 지속되는 삶의 갱신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나인 것이다.속사람과 겉사람의 구별을 구원의 서정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바울신학의 중심과 연결해야 할 것이다.새 관점은 전가의 교리를 반대한다.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가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전가된다는 것은 부인하는 것이다.새 관점은 최후심판에서 칭의를 전통적인 믿음(신뢰)의 영역이 아닌 신실성의 표현인 선행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새 관점주의자인 라이트는 현재적 칭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미래에 주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신자의 삶, 선행을 최종적인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13.09.19| 6페이지| 1,5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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