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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명의 성난 사람들
    - 12명의 성난 사람들 -부제 - 정당한 의심12명의 성난 사람들. 1957년도 작품으로 금곰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오로지 배심원들이 평결을 하는 작은 방 하나가 전부인데도 배심원들이 말로써 이야기를 전개하는 스토리 전개만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영화가 나올 수 있는지 정말로 신기하였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여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되는 것인가 싶다.이야기에 앞서 영화의 틀인 배심제에 대해 알아보자. 영화는 우리나라와 다른 미국의 배심제도란 12명의 일반 시민들이 범인의 유죄, 무죄만을 결정하고, 그들이 유죄라고 결정할 경우 판사는 유죄에 따른 형량을 선고하고, 그들이 무죄라고 결정할 경우에는 판사가 무죄선고를 내려야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 않고 판사들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이와 유사한 제도로 국민참여 재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민참여 재판의 경우 피고인의 신청이 있어야 하고 배심원들이 무죄라고 평결하더라도 판사가 유죄의 심증이 확실한 경우에는 유죄라고 선고할 수도 있어 미국식 배심제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본 이야기로 들어가자. 정적이 감도는 법정에 침묵만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한 어린 소년이 자신의 친 아버지를 살해한 살인사건에 관한 재판은 이제 배심원들의 최종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지만 아버지를 찌른 칼에서 나온 지문, 살해장면을 목격한 목격자, 소년의 비정상적인 알리바이 등등 모든 증거는 이 어린 소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게다가 슬럼가 출신의 이 소년은 늘 아버지에게 맞고 자라 살해의 동기 또한 충분하였다.12명의 배심원들은 판사 옆 방에 모여 어린 소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이 어린 소년을 유죄라고 단정하는 듯 한 배심원들의 말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슬럼가에서 자란 아이는 어쩔 수 없다거나, 유력한 목격자가 있는데 더 이상 볼 것이 무엇이 있는가, 게다가 칼에서 지문도 나왔다는 명백한 물증에 어떤 배심원은 뉴욕 양키즈의 야구경기 관람권을 예매했는데 이걸 빨리 가서 보아야 하니 얼른 결론을 내리고 가자는 등 모두가 다 이 어린 소년을 이미 유죄라고 단정 짓고 얼른 결론을 내리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하긴 다들 일상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 어린 한 소년의 운명 따위에 대해서 그렇게 심사숙고할 여력이 없는 듯 보였다.그렇게 평의가 시작되고 12명의 사람들이 쪽지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 내지만 11명의 사람들이 유죄라고 평의하고 1명의 사람만이 유죄가 아니라고 평의를 내리게 되었다. 만장일치가 아니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배심제의 특성상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왜 이런 뻔한 사건을 길게 고민하느냐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건축업을 하는 배심원 8은 자신은 이 어린 소년이 무죄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죄라고 볼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며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한다.얼른 평의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해 따뜻한 저녁을 먹으려는 배심원들은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뜨리지만, 주인공은 그래도 한 소년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이 일에 1시간 정도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냐며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일단 소년은 자신이 친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주장이 과연 설득력 있는 주장인지부터 이들을 따져보기 시작한다. 우선 소년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해 집을 뛰쳐나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영화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고 아버지를 찌른 칼은 영화관을 가다가 흘렸다고 주장한다.우선 주인공은 아버지를 찌른 동기가 단순히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했고 그가 슬럼가 소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배심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시절 아버지로부터 맞는 다는 것은 훈계의 일환이었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를 죽이는 자식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슬럼가의 아이라는 이유 또한 편견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찌른 그 칼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특이한 칼이라는 점 또한 그와 동일한 칼을 전당포에서 구했다면서 이에 대한 반증으로 제시한다. 일순 놀라는 배심원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소년이 무죄라는 확신을 얻기에도 부족하다. 하지만 주인공의 노력으로 이제 유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배심원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아버지 몸에 난 칼자국의 상처는 아버지보다 키가 큰 사람이 칼을 위에서 아래로 찌른 상처이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작은 체구의 소년이 뛰어올라 아버지를 위에서 아래로 찔렀다는 가정 또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소년이 영화관에서 본 영화 기억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 흥분한 상태에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것으로 그 뒤 소년이 영화의 제목을 기억해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다.하지만 이러한 반대의 간접증거에도 불구하고 소년에게는 매우 불리한 목격 증인 2명이 있다. 아버지를 살해하자마 뛰어나가는 소년을 보았다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의 증언과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하자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는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여자의 증언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소년의 무죄를 입증하기에는 부족한 완벽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배심원들은 소년이 범인이라고 단정 짓는 가장 유력한 증거들에 대해 하나씩 파헤치며 사건의 진상에 조금씩 접근해 나가기 시작한다. 일단 할아버지의 증언을 살펴보면 그가 비명소리를 듣고 문 밖으로 나가보니 위에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소년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배심원들은 법정에서 증언한 할아버지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아파트 평면도를 구한 배심원들은 그가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아무리 빨리 문 밖 계단으로 나가려고 하여도 소년이 범행을 저지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속도에 이르지 못해 소년을 볼 수 없고 결국 할아버지의 증언은 거짓으로 판명 나게 된다.
    인문/어학| 2012.06.26| 3페이지| 1,000원| 조회(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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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헌 홍대용에 관해서
    담헌 홍대용에 관하여내가 이번 기회를 통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인물로 담헌 홍대용을 선택한 이유는 최근에 한국사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그가 어느 조선후기 실학자들보다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실학이 하나의 맥을 형성하여 사상으로서의 학파를 형성하여가던 18세기 초엽에 태어나서 18세기 후반을 살았던 인물로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북학파들과 교유하며 지낸 인물이다. 그는 1765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는 숙부를 수행하여 당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이해하였고 당시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 자연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이러한 홍대용의 사상이나 업적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때 떠오르는 것들에는 지전설, 의산문답, 혼천의 등이 대표적으로 있다.먼저 홍대용은 서양 과학을 적극 수용하여 지구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주를 무한한 공간으로 보고, 그 무한한 우주가 지구 둘레를 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지구의 자전을 주장하였다.사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홍대용의 지전설은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은 태양 둘레를 돌고 태양과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우주 체계에다가 지전설만을 덧붙인 것이어서 따라서 홍대용의 우주체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그는 “지전설은 송나라 학자 장횡거가 그 원리를 조금 밝혀냈으며, 서양 사람도 배에 타고 있으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론으로 추정해냈다”고 하기도 했다.하지만 그의 추론은 지전설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우주관을 완성해 냈다.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무한우주론은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홍대용의 우주관은 탈지구중심론이라는, 그 당시로서는 실로 대담한 인식론적 대전환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華)이고, 어느 쪽이 이(夷)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는 한편,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대범한 주장을 펼쳤다또한 홍대용의 담헌서 중 하나인 에서도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실제 홍대용의 북경 여행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책으로 의무려산이 그 배경이다. 홍대용의 은 가상 인물인 ‘허자’와 ‘실옹’이 서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허자’는 당시의 전통적이고 세속적인 학문에 얽매여 있는 성리학자를, ‘실옹’은 청나와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 실학자를 대변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홍대용은 에서 성리학의 거짓된 예의와 학문적 한계를 지적하고 성리학은 이미 진실함을 잃었으며 성리학자들은 이기심과 권력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패막이로 성리학을 내세우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다양한 비판을 수용하고 새롭게 변화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나 또한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명분 위주의 다른 사상들을 배척하고 양반들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수단의 성격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에서 나타난 홍대용의 사상은 그 당시 오랫동안 조선의 사회와 정치 속에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성리학에 대해 비판했다는 점에서, 은 그의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한번 더 알 수 있는 저서라고 생각된다.또한 이 책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지전설, 무한우주론과 같은 그의 사상들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은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는 허상을 풍자한 과학소설이라는 점에서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라는 평도 받는다.또한 이밖에 홍대용은 그의 저서 에서도 천문학과 특히 수학에 관해 다루었다. 의 서문을 보면 그의 수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서문에서 그는 그때까지의 수학책이 의 범위와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새로운 창조와 경험에 의해서 새롭게 풍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사고 능력을 길러 품성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특히 수학을 창조적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말했다.홍대용은 이외의 많은 책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고 연구하여 당시 수학을 집대성했다. 우리나라와 중국 수학의 성과와 서양수학의 성과를 수집하여 정리, 발전시켰다. 홍대용의 수학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당시 수학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결점까지 발견하고 분석했다. 그 내용도 비율법, 약분법, 면적 체적 등 근대적인 표현들을 썼다. 또한 그것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지식만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기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그 다음으로 홍대용의 업적 중 하나로 흔히들 알고 있는 혼천의를 들 수 있다. 혼천의는 해와 달과 별 등 천체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시계 기능을 하게 만든 기구이다. 고정된 고리 3개와 움직이는 고리5개로 이루어진 혼천의, 그것의 바깥 고정 고리 3개는 땅의 지평과 하늘의 좌우를 나타내고 가운데 움직이는 고리들은 시각에 따라 변화하는 해와 달과 별의 위치를 보여준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천체의 위치와 움직임을 한 눈에 파악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천문과학자로서의 홍대용의 지식과 열정이 담겨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의 혼천의 제작이 홍대용 때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혼천의는 기록상으로 1433년(세종 15) 정초·정인지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장영실 등이 그 제작을 감독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홍대용의 혼천의는 가장 마지막에 그것도 조정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 진 것, 물을 사용해 움직이던 이전 혼천의와는 달리 기계시계를 톱니바퀴로 연결해 움직이게 한, 특히 그 위에 서양의 기법들, 서양의 시계에 쓰이던 기구들이 적용되었다는 점들이 홍대용의 혼천의가 가지는 특징적인 면모로 평가되어진다.이 밖에도 홍대용은 사회개혁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경제 정책에서는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농민의 생활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학문과 재주가 많은 사람을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고 과거제를 폐지하고 하급 교육 기관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치하고 8세이상의 어린이 모두 취학시켜야 한다는 혁명적인 의무 교육제를 주장했다. 또 신분에 관계없이 청소년은 모두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과, 공평한 발언권을 보장하고 언론의 평등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인문/어학| 2012.06.15| 3페이지| 1,000원| 조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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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명장 최무선
    「고려 말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장군(1325∼1395)의 과학정신을 기리는 ‘최무선 과학관’이 20일 문을 열었다. (중략) 전통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연화체험(불꽃놀이), 화포로 왜구를 무찌르는 화포체험, 조선시대 선박과 화차, 총통을 직접 조립하며 체험할 수 있는 체험키트가 들어서는 등 체험을 통한 전통과학의 이해와 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또 야외전시실에는 전차와 장갑차 5대가 비치되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영천시는 11월까지 비행기를 비롯한 화포, 미사일 등 군 퇴역장비를 야외에 전시해 전통과학에서 시작된 호국정신을 현대에 접목시켜 재조명할 방침이다.」최무선의 고향인 경북영천에 최무선 과학관이 문을 열었다. 사망한지 600년이 넘는 고려말의 과학자가 당대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위대한 과학기술자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증거 일 것 이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최무선에 의해 화약이 발명되었고 그 시절부터 화약이 사용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고려말에 이루어진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세계 최초도 아니고, 또 당시 고려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약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고려는 최무선 이전에 화약을 가지고 불꽃놀이도 하였고, 또 무기로도 사용했다는 것이 기록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1104년(숙종9), 고려는 북쪽의 여진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하였는데, 이 때 발화대(發火隊)라는 특수부대가 편성 운용되었다. 발화대가 일반적인 화공부대인지, 아니면 화기를 장비한 부대였는지 아직까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당시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몽골이 이미 화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고려와 몽골의 교류가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화약병기에 대한 인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화약병기에 대한 보다 확실한 기록은 1356년(공민왕 5) 9월 고려의 중신들이 서북면방어군을 사열하고, 총통을 발사하니 그 화살이 순천사 남쪽까지 가서 땅에 떨어져 깊이 박혔다는 기록이다. 또 고려 22) 11월, 공민왕이 장자온을 명나라에 보내 왜구들을 상대할 배에서 사용할 화약병기와 화약 지원을 요청하였고, 다음해인 1374년 5월 8일, 명나라로부터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기타 필요한 여러 가지 약품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최무선 이전에 이미 화기와 화약이 도입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특히 고려말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왜구를 상대할 신병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고려에서의 독자적인 화약 제조의 필요성은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고려는 아직까지 화약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화약이 당시 서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결정적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무선은 다른 사람들이 그저 불꽃놀이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화약이 당시 창궐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결정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전술상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흔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말들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 채 많은 일을 그저 지나쳐 버리는 수가 많았는데, 최무선은 비범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실용성이 있는 염초 제조법을 습득하여 자체생산한 사람이 최무선이었던 것이다.고려 말기인 1325년(충숙왕 12년) 충숙왕 때 현재의 영천인 영주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흥창사란 광흥창(곡식창고)을 책임맡은 관리를 말한다. 그 시절에는 전국에서 세금으로 돈 대신 곡식을 거두었고 그것은 조운선(漕運船)에 실려 전국에서 개성으로 운반됐다. 그것을 노린 왜구들 때문에 최무선의 아버지는 피해를 많이 입었으며, 이 때문에 최무선도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왜구를 무찌를지에 대해 생각했다. 무관으로 출관한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대응하기 위해 화약과 총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세 할 수 있으나 초석(염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원나라는 징기스칸의 정벌 전쟁에서도 화약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화약 제조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최무선은 원나라로부터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들의 왕래가 잦은 벽란도에 가서 원나라의 강남 지방에서 온 원나라 사람 이원(李元)을 만나 집에 두고 우대하면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화약제조법은 원나라에서도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극비사항이었으므로, 최무선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고,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설득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원에게 흙으로부터 염초를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 후에 최무선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염초 채취와 화약제조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중국이 먼저 시작한 첨단 선진 기술을 끊임없는 연구 개발을 통해서 자체 제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고려말부터 조선초 까지 살았던 대학자 권근은 최무선이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뒤 그를 칭송하기 위한 시를 지었는데 찬양일색이다. 이것만 보아도 당대 사람들이 최무선의 업적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다. 최무선이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첫째는 화약?화약병기를 자체 생산하여 무기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최무선이 화약을 본격적으로 제조한 시기는 1377년(우왕 3)이다. 최무선은 수차례에 걸친 시험을 거쳐 화약을 제조하였고,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火 都監)이라는 화기 제조기관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약병기의 제조 업무를 주관하였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곧 고려가 화약과 화약병기의 자체 생산, 그것도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고려는 이제 동양권에서 중국에 이어 두번째의 화기 보유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화통도감에서는 화약과 함께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철탄자(鐵彈子)?오룡전(五龍箭)?유화(?花)?주화(走火)?촉천들 화기들을 군사적으로 널리 활용하였는데, 이를 위해 화기 운용부대인 화통방사군(火 放射軍)도 설치하였다. 나아가 해전에서의 화포 활용을 위해 누선(樓船)이라는 새로운 전함도 건조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화기 운용의 성과는 바로 나타났는데, 화기로 무장된 고려의 전함은 왜구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1380(우왕 6)에 벌어진 진포해전과 1383년에 벌어진 남해의 관음포해전이 그것이다. 두 차례의 해전에서 고려의 화약병기는 왜구 토벌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군사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진포해전은 우리 나라의 해전사상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었다는 점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해전술상에 있어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둘째는 화약과 이런 무기들은 그저 발명하고 개발한 것만이 아니라, 이를 가지고 실제 전투에 참가하여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고려의 화약병기들이 어떤 제원과 성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각종 전술목적에 적합한 다양한 화기의 제조에 주력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특히 화통도감이 설치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화통방사군이 편성되었다는 점은 곧 화기가 재빨리 전술적 목적에 이용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화기로 무장된 고려의 전함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1380(우왕 6)년에 벌어진 진포해전과 1383년에 벌어진 남해의 관음포 해전이었다.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진포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여겨, 그를 도원수로 임명하여 참전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의 수군은 전선이 100척에 불과하여 왜선에 비해 수적으로 1/5밖에 안될 정도로 열세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화포를 갖추고 있었기에 무위해 각 전선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거대한 해상요새를 건설하고 고려수군에 맞섰다. 따라서 종래의 고려수군이라면 왜선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근접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화포로 무장한 고려 수군은 이 초대형 선단을 향해 대규모의 화포 공격을 퍼부어 적선 500척을 전소시켰다. 이 진포해전은 우리 나라의 해전사에 있어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먼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었다는 점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세계 해전술상에 있어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이다. 즉, 기존의 해전에 있어서의 기본 전술이라 할 수 있는 당파전술보다 한 차원 높은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룩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포해전은 이러한 점에서 세계 해전술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전개된 또 하나의 전투가 1383년에 벌어진 관음포해전이다. 진포해전에서 대패한 왜구는 보복을 위해 다시 12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남해를 침입하였다. 이에 정지 장군이 출정하여 화포와 궁시를 이용하여 적선 17척을 불살랐다. 이 해전은 함포의 전술적 운용에 있어서 진포해전보다 진일보하였다. 진포해전이 적선이 정박이 되어 있는 고정 표적에 대한 함포 공격이었다면 관음포해전은 해상에서의 이동 표적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고려는 해전에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종래의 수세적인 왜구 토벌작전에서 적극적인 공격 전략으로 전환하였으며, 나아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389년(창왕 원년)에 경상도 원수 박위(??)가 전함 100척으로 출정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당시 고려군은 대마도의 해안에 정박중인 적선 300여 척을 소각하고, 연안의 주거시설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후 왜구의 침구는 현저히 축소되어 거의 종식된 것이나 다름이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 대마도 정벌에서 화포의 활용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전투상황이 포구에 집결된 대선단에 대한 집중.
    인문/어학| 2012.06.15| 4페이지| 1,000원| 조회(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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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금이씨 살해사건
    윤금이씨 살해사건1992년- 10.28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김성출씨 집 셋방에서 윤금이씨 사체 발견- 10.30 사체화장- 10.31 용의자 케네스 마클 이병 한국경찰에 검거, 아무 조사없이 미군측에 넘겨짐- 11. 3 동두천 제 사회단체 성명서 발표, 동두천 택시노조 미군 승차거부운동 시작- 11. 4 동두천 지역 대책위원회 결성- 11. 5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결성 (50여개 사회단체)- 11. 6 한국검찰 마클 이병에 대한 구속수사 방침 발표- 11. 7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인마행 동두천시민 제1차 규탄대회, 미 2사단 정문 앞- 11.11 한국검찰, 마클 이병에 대한 구속수사 포기 발표- 11.13 주한미군사령부 마클 이병에 대한 신병인도 불가 성명 발표- 11.15 살인미군 구속처벌을 위한 동두천시민 결의 대회- 11.16-19 서울대 학생 4명 시한부 단식농성- 11.17 주한미군에게 죽음을 당한 윤금이씨 추도식 및 규탄 시민대회, 기독교회관 대강당- 12. 4 "윤금이씨 살해 미군 구속처벌과 공정한 재판권행사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선포식. 이후 93년 4월 9일까지 매주 토요일 서울역 서명운동 등 가두 서명운동을 벌여 총 96,542명의 서명을 받음.서명명부는 담당재판부와 미대사관측에 전달.1993년- 2.17 케네스 마클 1차 공판(검찰 심문, 마클이병 범행 부인)- 3. 5 "주한미군범죄 근절대책 수립을 위한 공청회" 기독교회관 대강당- 3.10 케네스 마클 2차 공판(변호인 심문, 범행 계속 부인)- 3.12 대구지역 학생들 대구 미문화원 항의방문- 3.24 케네스 마클 3차 공판(검찰 무기징역 구형)- 4. 9 검찰의 졸속구형 규탄 및 진상규명, 엄중처벌 촉구 결의대회, 명동성당- 4.14 케네스 마클 선고 공판(무기징역 선고) 1,000여명 방청, 재판후 보고대회, 용산 미군사 령부 앞 항의 시위- 4.21 윤금이 공대위 대표단 미 대사관 면담, 공개서한 및 서명명부(96,542명분) 전달- 6.17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엽서보내기 범국민운동 시작, YMCA앞- 7.10 클린턴 미 대통령 방한에 즈음한 미군범죄에 대한 항의 시위, 탑골공원 앞- 7.14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상설기구(가칭)" 기금마련 김지숙 '로젤'공연- 8. 4 윤금이씨 유족, 미국정부로부터 배상금 7천 1백만원 수령- 8.16-20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상설기구(가칭)" 기금마련 김지숙 '로젤' 2차 공연- 9.23 케네스 마클 항소심 공판 시작- 10.26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 발족식, 기독교회관- 10.28 윤금이씨 살해미군 항소심 2차 공판 및 윤금이씨 1주기 추도식- 10.30 윤금이씨 1주기 추모제 및 제1회 민족자주를 위한 시민의 밤- 12.10 '윤금이 공대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인권상 수상- 12.16 케네스 마클 항소심 선고공판(유기징역 15년 선고)- 12.23 케네스 마클 상고, 한국검찰 상고포기1994년- 4. 1 미군범죄 신고센터 개설식, 전국 10개 지역에 개설- 4.29 케네스 마클 상고심 선고공판(유기징역 15년 확정)- 5.17 케네스 마클 천안 소년교도소에 수감*케네스마클, 2006년 8월 14일 가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위의 사건은 미군 이등병이 한국여성을 살해한 사건이다. 사건전날인 27일 저녁, 술에 취한 윤씨는 미군 케네스 마클 이병과 하룻밤을 지낼 요량으로 동두천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집 앞에서 미군 제이슨 램버트 상병과 마주친 두 사람은 그와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전날 밤엔 램버트상병과 밤을 보낸 것이었음. 어제까진 자신과 함께했던 여성이 다른 남성의 품에 안겨있는걸 본 램버트는 시비를 걸어옴. 그 일로 화가 난 마클은 윤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가 폭행을 시작했다. 마클은 콜라병으로 윤씨의 이마를 여러차례 가격했다. 이마에서 피가 솟구치고 윤씨의 반항이 멈추자 마클은 방안에 있던 우산을 윤씨의 항문에 쑤셔 넣는 기이하고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우산 끝은 직장까지 무려 27센티미터나 들어가 있었다. 여기서 엽기행각을 멈추지 않고, 자궁에 맥주병 두 개를 쑤셔넣고 콜라병은 반쯤 박혀진 상태로 만든 뒤, 증거인멸을 위해 입에 성냥개비를 부러뜨려 물리고 온몸에는 하얀 세제가루를 뿌렸다. 부검결과 사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앞 얼굴의 함몰 및 과다출혈로 드러났다. 이 일로 범인 케네스 마클은 대법원까지 간 끝에 징역 15년형을 확정받고 94년 5월 17일 천안 소년교도소에 수감되었다.위의 사건은 주한미군의 만행 중에서도 가장 엽기적인 행각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한 성폭행 사건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세계 모든 기지 주변에서 계속되는 문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나라에 따라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번 ‘동두천 여학생 성폭행 사건’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미 해병 여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1995년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 3명이 12살 여중생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일본 각지의 지방의회들은 미군 기지협정 개정, 기지 사용면적 축소 등을 제기했다. 8만5천여 명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현민 집회를 열고 기지 철거를 요구했다. 일본 각지에서도 반미집회가 이어졌다. 결국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나서 사과를 하고 중대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기소 전에 일본 경찰에 넘긴다는 내용의 미·일의 합의가 도출됐다. 반면, 2011년 한국에서는 18살 미성년자가 자신이 머물던 고시텔 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미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이 뒤인 지난달 28일 뒤늦게 알려졌고, 이마저도 네티즌에 의해 재조명 된것이지 국내 언론에선 잠잠하다. SOFA 협정에 의해 미군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나라 법으로 처리하기도 힘들다.
    사회과학| 2012.06.15| 2페이지| 1,000원| 조회(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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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며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故 심미선 양 故 신효순 양2002년 여름은 뜨거웠다. 작렬하는 태양열도 뜨거웠지만, 월드컵열기를 이길 순 없었으리라. 그 당시 한국에서 월드컵열기를 이길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사람의 죽음마저도.........? 사건발생- 2002년 6월 13일 친구생일잔치를 다녀오던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학생이 주한미군 제 2사단 소속 마크워커 병장이 몰던 장갑차에 깔려죽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갓길을 걷던 두 여중생이 대북군사훈련에 참가하던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을 거둔 것이다. 50톤 장갑차에 깔린 두 여중생은 뼈마디가 으깨지고 뇌수가 터지는 등 시체마저도 온전하지 못 하게 죽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 곳에는 안전표식 하나 없었다고 한다. 차도하나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큰 전차가 일반인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훈련을 함에 있어서, 안전표식 하나도 제대로 설치하지 않고 훈련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고, 분노만 증폭시킬 뿐이다.? 사건의 경위 및 투쟁 경과- 사건 발생 다음날인 6월 14일 미 제2사단은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 위험이 있는 사회단체 등을 배제시킨 채 현장에 유족들과 자신들의 추종세력만을 참여시킨 일방적인 현장브리핑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현장브리핑이란 것이 사건에 대한 기초조사도 하지 않고, 빠르게 사건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목적으로 진행하여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게다가 이 자리에서 왜 훈련을 하기 전에 마을이장이나 관공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미군측은 훈련 사실을 미리 통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주민들을 기만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은 사람을 죽인 궤도전차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궤도전차에 깔려죽은 두 학생이 잘못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주한미군은 이처럼 저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들은 사건에 대한 사죄와 진상조사 등 최소한의 전제조건도 없이 유족들에게 군, 경, 공안기관을 압박하여 장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주한미군은 장례식 이전에는 일단 두 여중생의 장례식을 치르면 미2사단과 면담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약속을 믿고 유족들이 장례식을 치르자 장례식 후 태도를 돌변하며 유족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유족들에게 이 사건이 사회여론화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4억원을 주겠다고 매수를 시도하는 등 사건진상을 규명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고만 하였다.- 6월 27일 : MBC 9시 뉴스 방영 후 규탄여론 급속 확산.-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인 브라이언 메이커 소령은 여중생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의 과실도 없었다’ ‘궤도차량은 사고 당시 모든 안전수칙을 이행했다. 한미 합종조사 결과 누구도 힐책 받아야 할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의 과실도 아닌 것으로 결론났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은 사건의 진상에는 예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SOFA에 기대어 판결내리면 되니까 한국 국민의 여론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7월 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여중생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발표를 했다. 발표의 주요내용은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이 참여시키지 않은 조사는 한미합동조사라고 볼 수 없으며, 운전병이 여중생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30미터 가량의 거리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또 사고차량의 선임탑승자는 제때 운전자에게 경고할 수 없었다고 하고 운전자는 소음이 심해서 경고를 듣지 못한 것처럼 조사결과에서 기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민변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다시 말해 사건 가해자들이 전방의 여중생을 파악하였을 때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더불어 하필이면 그때 무선통신의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더욱 의구심이 가는 일이기에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등의 미 2사단의 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의문사항 7가지를 발표한 것이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주한미군은 허겁지겁 사건을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사건발생 보름께인 7월 4일 주한미군의 총대장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리언 러포트 당시 주한미사령관은 여중생사망과 관련하여 ‘미 육군이 이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안정한다.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과실은 없다는 공식입장을 뒤집어엎고, ‘그동안 여러 가지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주한미군의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라 일단 위기를 벗어나려는 가증스러운 기만술책임이 드러났다.7월 12일 : 전국공무원노조 경기지역본부와 전교조의 서명운동 돌입7월 14일: 민주노총 결의대회 및 제4차 범국민대회 진행. 집회후 의정부역까지 행진7월 16일 : 서명 10만명 돌파, 살인미군 한국법정처벌 시민특별 수사대 발족 기자회견7월 17일 : 청소년 추모 문화제 진행- 500여명의 청소년참가7월 18일 :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에 대한 전교조서울지부 분회장 선언-1000명 참가7월 23일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재판권 이양 촉구 성명서 발표7월 26일 : 국회의원 미국의 재판권 이양 촉구 성명서 발표7월 27일 : 제5차 범국민대회 - 서울 종묘에서 개최7월 31일 : 오후5시 덕수궁 대한문 앞 49재 추모제 열림 5000명 참여. 명동까지 행진8월 3일 : 형사재판권포기촉구 전국동시다발 평화대행진 (마로니에공원)8월 5일 :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 의정부지청의 수사발표로 물의를 빚음8월 6일 : [MBC PD수첩] 'SOFA, 미군범죄의 면죄부인가' 방송
    사회과학| 2012.06.15| 4페이지| 1,000원| 조회(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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