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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외교관의눈으로보다독서감상문 10페이지
    중국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백범흠)중국학과 0864021 박미선책을 읽게 된 동기 및 서론사실 나는 중국 외교관련 책은 관심이 없었다. 지금 수업에만 열중하면 된다는 생각과 교수님이 만들어준 교재만으로도 충분 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런 전문 서적에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았다, 그래도 독서보고서를 써야한다면 가장 최근 것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다. 중국의 외교론은 세계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뀐다고 생각해서 가장 최근의 책을 찾다보니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만 보아서는 외교관 일을 하며 중국인, 중국문화와 부딪혔던 일들을 다룬 책일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을 중국의 사천년 역사를 모두 훓고 있는 책이었다. 한마디로 제목보고 선택 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외 교론의 내용이라고는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의 내용이 전부 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1학년 때 배웠던 것을 더듬어가며 읽으면서 중국의 긴 역사를 이 책 한권으로 잊혀 져 있던 기억의 퍼즐을 하나하나 끼워가며 읽은 느낌 이였다. 중국의 문명 흐름이 놓여있는 강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국이 중화 인민공화국으로 가는 길 까지 설명 되어 있었는데 이 책의 저자가 외교관으로서의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은 본론과 서론 뿐 이였지만 지금 북한과 관련지어 중국을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 이였다. 대부분의 중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그러하듯이 이 책의 저자 역시 중국의 부상의 가능성 역시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상하이와 쑤저우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되어있었다. 논밭이 대부분 이었던 상하이 쑤저우고속도로 주변은 공장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거리를 누볐던 거대한 자전거의 물결은 공장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거리를 누볐던 끝없는 자동차의 행렬로 바뀌어 있었다 중견 외교관의 육안으로 중국의 부상을 확인한 순간 이었다. -프롤로그中작가의 말처럼 중국은 차근차근 그것도 빨리 경제 발전의 성장을 하고 있고 지금도 성장 중 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 속 에서도 현재에서도 요하문명, 양자강 하류의 하모도 문화, 양자강 상류인 민강 유역의 삼성 퇴 문화, 금사 문화와 흉노, 선비, 동궐, 몽골, 만주, 티베트, 위구르, 문화 등을 흡수 융합하여 발전해온 이질 혼합의 문명이다. 중국의 문명과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주요 하천은 황하, 양자강, 주강, 요하와 흑룍강의 지류인 송화강 등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천은 말할 것도 없이 황하 이다,황하는 중국제 2의 하천이며 각기 황하 중류, 하류, 상류에서 탄생한 하, 상, 주, 의 문화가 융합된 문화가 사방으로 확대되어 중국의 문명이 탄생하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 진 것이다. 황하는 황토고원의 건조지대를 흘러내리므로 유 수량 이 비교적 적고 불안정하다. 여름과 가을철의 유수량이 1년 수량의 70%~80%에 달하고 겨울철은 10% 봄철은 15% 에 불과할 정도로 계절별의 수량의 편차가 심하다. 역대 왕조들은 황하 치수를 가장 중요한 국가의 과제의 하나로 생각했다.양자강은 중국의 제1의 하천이자 나일강, 아마존강, 미시피시강, 콩고강과 함께 세계 5대 하천의 하나이다. 양자강의 옛 이름은 장강으로 상류는 금사강 중류는 형각 그리고 하류의 이름인 양자강으로 불렸는데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이 강 전체를 양자강으로 호칭한 이후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양자강으로 불린다. 양자강은 중국의 지중해라고 불릴 정도로 수운이 발달하여 여름철의 홍수기에는 하류의 상하이에서 후한까지 1만 톤의 기성항행이 가능하다.흑룡강은 양자강과 황하에 이어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흑룡강은 부식질 함량이 많아 강물이 흑색을 띄어 마치 검은 용이 기어가는 거 같이 보이기 때문에 흑룍강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많은 퉁구스계 나라들이 흑룡강 유역에서 출발하며 명멸해 갔다, 흑룡각은 태평양 계절풍 영향권에 위치하여 유수량이 비교적 많은 반면 증발이 적고 부근에는 삼림이 울창하며 유량형성에 유리하다.주강은 제 4대 하천이다. 동북부를 관류 하는 하천이며 동남부는 델타(삼각주) 결국에는 다른 나라에 밀려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P 75이렇듯 주나라와 신라가 멸망한 것은 결국 스스로 긴장의 끈을 놓고, 자기 쇄신 없이 퇴락한 것이 원인이었다. P 75한편 주공은 하나라와 상나라 2대에 걸친 중원의 적폐를 일소하고, 새로운 통치제도와 경제, 사회제도를 도입하여 중국 문명을 일신시켰다.사람들은 토템과 귀신으로 부터 해방되어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주공의 개혁을 바탕으로 제2대 성왕, 제3대 강왕은 줄곧 팽창정책을 실시했다. 제 4대 소왕도 평창정책을 지속했는데, 소왕은 양자강의 북쪽 지류인 한수 유역을 공략하던 중 묘족과의 싸움에서 패사하고 말았다. 소왕 이후 주나라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 하였다.선왕의 아들인 유왕도 2세, 3세와 같이 통치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향락만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총애하는 후궁 포사가 낳은 왕자 백복으로 하여금 세자 의구를 대신하게 하려다가 의구의 외가 신나라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유왕이 의구를 폐하자 신후는 증, 견웅, 서이 등과 함께 거병하여 유왕을 축출했다, 티베트계로 추정되는 견융의 군대가 수로를 약탈하고 수도 호경을 탈출한 유왕을 추적한 끝에 근교의 여산에서 따라잡고 그와 백복을 죽였다. 주나라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국 서주의 멸망은 집안싸움, 즉 내흥이 원인이였다.이처럼 중화문명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확장되어갔다. 첫째 제와 연, 진과 같이 유력한 제후를 변경에 분봉하여 이민족을 점복하게 했다. 득 이민족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거점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둘째 초나 진, 연과같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중원인과 이민족이 함께 살면서 이민족이 중 원화 되었다. 서주라는 조그만 핵이 상나라를 병합하여 조금 더 큰 핵이 되고, 춘추 전국시대, 진. 한 전국시대, 5호 16국 시대, 남북조시대, 수. 당을 거치면서 마침내 세계 최대 규모의 나라와 민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4. 진 . 한 4백년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와 500여 년간 계속되어온 분열의 시대를 는 유 씨와 함께 이성 제후도 분봉하여 정치와, 경제 군사를 모두 위입 했다. 군현제와 봉건제가 혼합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5. 분열과 이질 혼합의 시대삼국시대에 들어와 흉노, 오환, 선비, 맥 저. 강, 등의 북방 민족의 중국내지 유입이 더욱 활발해 졌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족지역으로의 이주는 한족에 의해 쫓겨난 조상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한 족에 동화되어 감과 동시에 때때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그들의 민족의식도 쫓아갔다. 5호 16국 시대에 북방민족 국가들이 대거 출현한 것은 이들 북방민족들이 중원 문명에 자극에 눈을 뜨고, 그간 비축해온 힘이 분출한 당연한 결과였다.북방 민족들에게 중원을 내어 준 왕족과 귀족을 포함한 한족들은 대거 양자강 이남 으로 피난하여 교민이 되어 묘족, 월족, 장독 등 원주민들과 섞이거나, 그들은 벽지나 더 남쪽으로 쫒아내고, 한문화를 퍼트렸다. 한족들은 남방으로만 피난한 것은 아니고 요하유역으로 흘러들어가 그 곳에서 농지를 확대했다. 이주한 한족들은 선비와 호한 퉁구스 몽골계와 섞였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연나라이다.또한 이질혼합 문화는 하회서랑, 신강 들 으로도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족은 감숙성을 거쳐 신강성 투르판 분지로도 이주하여 도아이스 도시국가인 이 씨의 서량, 국 씨의 고창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족이 중원을 포기 한것은 물론 아니다.한족의 80%이상이 고향땅에 남아 북방 민족들의 지배 하 에서도 조상의 터전은 굳게 지키고 있었다. 강남으로 이주한 한족이나 중원에 남아있던 한족 모두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자위단체를 조직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지방의 호족들도 지도자로 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집락이 나타났다. 자위단이 형성되는 장소는 기존의 향리와는 다른 산간 요충지였고, 방벽을 쌓아 외부세력의 칩입에 대항하였다.유목민과 농경민이 흉합 되면서 호한문화가 탄생하였다. 영가의 난은 화북일대에 집중되어 있던 수준 높은 중원 문명이 강남과 요하 드러내고 있었다. 장종시대에 활동하기 시작한 북위 황족을 주상으로 둔 금나라 제 1의 시인 원호문이 15살 때 지은 안구사는 금나라라는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듯한 시대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남송은 정권을 장악 하고 있던 한탁주의 주도로 회하와 섬서 2개 전선으로 북벌음 감행하였다 남송의 장군 오희는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금나라 군에 항복 이에 힘입어 금나라는 회하 방면에서 군사???을 집중하여 남송군을 양자강 쪽으로 밀여 붙였다.당시 금나라는 이미 몽골의 대두로 위협 받고 있었고, 산동지역에서 민란의 움직임도 있어 조속한 화평을 바랐으며, 남송도 금 나라군이 양자강 유역으로 접근해오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P 256-1207 양국은 남송의 조공 액수를 올리는 선에서 타협을 하고 금나라는 남송 내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끝냈다.금나라는 이같이 이민족인 거란족으로 하여금 같은 이민족인 몽골족을 방비하게 하는 이이제이 정책을 활용하는 한편, 몽골부족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통해 몽골을 통제 해왔다.그러나 징기스칸은 순식간에 몽골을 통합하고 금나라가 쳐놓은 촘촘한 통제의 그물을 벗어버렸다.8. 한족의 부흥과 중화주의의 확립남흉노의 서진 공격으로 일어난 311년 영가의 난과 여진족의 침공이 가져온 1126년 정강의 변 등을 계기로 화북에 살던 수많은 한족 주민들이 강남으로 지주했다. 이들의 일부는 객가가 되었고 수, 당 이래 회하 이남이 경제 중심기가 되었고, 인구도 중원에 비해 둴등히 많아졌다 특히 항주를 수도로 한 남송은 강소, 안휘, 강서, 절강, 복건, 호북, 호남 등을 집중 개발해 놓았으며, 이에따라 남송 이후의 왕조들인 원, 명 청, 등은 국가 재정을 강남에 의존하게 되었다.4세기 모용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황제 모용준이 생포한 염위의 한족 황제 염민을 노복하재 라고 경멸했듯이 몽골도 한족을 멸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조 쿠발라이는 엄격한 민족 차별을 실시했는데 이처럼 민족차별 정책은 소수의 몽골인이 다수의
    독후감/창작| 2012.11.13| 15페이지| 2,000원| 조회(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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