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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광사의 16국사에 대하여
    송광사의 16국사에 대하여목차Ⅰ. 송광사에 대하여1. 송광사의 유래2. 송광사3. 현존하는 송광사의 건물Ⅱ. 송광사의 16국사Ⅲ. 16국사의 생애와 활동사항Ⅰ. 송광사에 대하여1. 송광사의 유래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구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18공'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송'자를 '18공'이라고 파자하고 '광'자를 불법광포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국사전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하여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라고 풀었다. 김영수는 이 산에 '솔갱이'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던 것이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도 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2. 송광사[역사]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와 및 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치징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때의 석조가 중창하려는 원을 세우고 역부를 소집하고 임목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죽었으며,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50여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를 옮겨옴으로써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 개성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수행결사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사변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 해청당, 행해당, 임경당, 도성당이다.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동구에서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3. 현존하는 송광사의 건물· 청량각,일주문 :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흥교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있다. 다포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 이다.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여 있어 특이하다.· 척주각, 세월각, 우화각 :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채 있는데, 현관 척주각, 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 영가의 관욕처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각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 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많이 걸려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에 중수하였다.·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 종고루, 법왕문 :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조전의 화목을 적재해 두는 향적전이 있다.· 국사전·진영각 :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 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 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이 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 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현재 이 건물은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만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전·영산전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여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영산전은 보물 제 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은 의겸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관음전, 명부전, 화엄전 :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cm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있다. 그 옆에는 '불일보조국사감로'라고 쓴 오세창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명부전은 유명계의 시왕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과 교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모색하였다.8세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山派)에 속했던 종휘(宗暉)를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모인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어 참선과 교학을 함께 수행할 것을 기약하였다. 평창군(현재 전라남도 나주) 청량사(淸?寺)에 머물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그의 첫 번째 깨달음이 이루어진다.그 뒤, 평생 동안 육조혜능(六祖慧能)을 스승으로 모셨다. 1185년 다시 예천의 하가산(下柯山)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선종의 종지(宗旨)에 따라 수행하면서 교학을 병행하던 중,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지도 체계를 세웠으며, 말법학도(末法學徒)를 위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하였다.또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였다. 그 뒤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일융화라는 전통을 남겼다.1190년 그는 몽선(夢船) 화상과 함께 거조사로 가서,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를 모은 뒤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취지문을 지어 선포하였다. 결사문은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1205년(희종 1) 새로운 결사도량인 송광사로 와서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고, 『대혜어록』과 간화선법(看話禪法)으로 대중을鏡). 황해도 수안(遂安) 출신. 아버지는 사덕(師德)이며, 어머니는 김열보(金閱甫)의 딸이다. 어머니 김씨가 감로수를 마시는 태몽을 꾸었다.13세 때 외삼촌인 운손선사(雲孫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사굴산문(?掘山門)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으나 명리를 버리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이 때 쌍봉사(雙峰寺)의 청우(靑牛)를 모시고 수행하다가 뒤에 수선사(修禪社) 제2세 혜심(慧諶)의 문하에 들어갔고, 수선사 제3세인 청진국사 (淸眞國師) 몽여(夢如)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의 권력자 최우(崔瑀)가 그의 도행(道行)을 흠모하여 왕에게 아뢰어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직을 내리고 정혜사(定慧社)의 주지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뒤 사양하고 전국을 다니면서 설법하였다.1245년(고종 32) 최우가 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벌일 때 그곳의 주맹(主盟:법회의 책임자)이 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듬해 승려 200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 선원사에 머물렀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왕공(王公)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나 자주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1252년 청진국사가 입적하자 왕으로부터 조계산 수선사의 제4세 사주(社主)로 임명받아 그 때부터 수선사에서 선풍(禪風)을 떨쳤고, 혜심이 머물렀던 단속사(斷俗寺)를 감독하는 도감(都監)으로 임명받았다. 1256년 천영(天英)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나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자운사(慈雲寺)로 가서 1259년 왕사가 되었다.1260년 원종이 즉위한 뒤에도 특별히 예우하고 존숭하였지만 다음해 다시 수선사로 돌아와 설법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였다.솔직담백하면서도 해학이 있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대표적인 업적은 수선사의 선풍을 전라도지방으로부터 벗어나 중앙으로까지 파급시킨 점과, 수선사의 결사와 선원사·단속사의 결사를 융합시켜 공인된 수도원을 세운 점을 들 수 있다.나이 80세, 법랍 68세로 입적하였다. 국사로 추증되었고,.
    인문/어학| 2013.03.26| 13페이지| 1,000원| 조회(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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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 가면속의 아리아 평가A좋아요
    영화 ‘가면 속의 아리아’ 를 감상하고...영화 가면 속의 아리아는 파리넬리의 감독이기도 한 제라르 코르비오가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89년에 벨기에에서 제작된 영화이다.영화는 먼저 조아킴이 공연장에서 노래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조아킴이라는 배역을 맡은 사람이 진짜 테너라고 하니 더욱 놀랐다. 처음 장면부터 조아킴의 노래로 영화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마치 정말 공연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의외로 처음 장면부터 조아킴은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극 중에 사람들도 놀랐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줄거리와 달라서 나 또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은퇴를 한다는 소리에 놀라기도 하였다. 은퇴를 하더니 갑자기 소피라는 여자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기 시작한다. 소피가 조아킴에 집에 도착하고 그의 아내는 소피를 반긴다. 그리고는 소피에게 자기 남편이 소피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말을 한다. 이런 조아킴 아내의 말을 통해 조아킴과 소피의 관계가 제자와 선생만의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이 되었다. 더불어 그의 아내가 측은하게 여겨지기도 했다.그리고 영화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바로 도둑이었던 ‘장’ 이라는 남자가 조아킴의 두 번째 제자가 된 것이다. 그의 아내는 장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장의 재능을 알아본 조아킴을 상관하지 않는다. 사실 시장에서 장이 노래를 할 때부터 뭔가 있을 거라고 예측이 되었는데 정말 제자가 되어 여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한편 영화는 조아킴과 소피의 사랑에 대해서도 다루게 된다. 나는 솔직히 그의 아내가 소피에게 조아킴이 소피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말했던 장면을 보면서 18살과 40살의 넘는 아저씨와의 사랑이야기, 더불어 질투하는 그의 아내의 모습이 연상되었는데 의외로 영화는 조아킴이 소피를 멀리하고 선생으로만 남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다룬다. 그저 그렇고 뻔한 불륜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았던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영화에 중간 중간 부분에서 장과 소피, 둘에 대해 다루면서 둘이 곧 사랑하게 될 거라는 예측을 주기도 했다.날이 갈수록 장의 실력과 소피의 실력이 나아지지만 조아킴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조아킴의 생일날 소피의 삼촌인 프랑소와는 오페라 가수 경연대회 소식과 청첩장을 들고 온다. 경연대회를 주최하는 스코티는 20여년 전에 조아킴과 노래 대결을 해서 패하고 목을 망가뜨린 경험을 갖고 있어 조아킴에게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스코티는 아르카스라는 제자를 키워서 자기가 주최하는 콩쿨을 통해 조아킴의 제자 장과 소피에게 도전하는 형식을 취해 실질적으로는 조아킴에게 도전을 한 것이다. 프랑소와는 제자 장과 소피가 신인 오페라 가수로써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그의 경연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며 설득한다. 이에 조아킴은 허락하게 되는데 의외로 쉽게 허락을 한 것 같아 긴장감이 조금은 떨어진 것 같아 아쉬웠다.조아킴, 장, 소피 이 세 사람은 경연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한다. 그러나 조아킴은 제자들만 데려다 주고 다시 집으로 떠난다. 사실 경연대회에 출전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제자들을 위해 자존심을 포기하고 경연장에 데려다 주는 모습에서 제자를 위하는 선생의 모습과 더불어 돌아가는 모습이 쓸쓸하게 다가왔다. 결국 장과 소피만 둘이 남게 되고 둘은 그곳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한편 스코티는 장의 목소리가 자신의 제자 아르카스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르카스와 스코티는 둘이 입을 맞추는데 장이 아르카스의 노래를 듣고 자기와 목소리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스코티와 아르카스의 계획이 성공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장은 마음을 바꾸고 소피와 계획을 짠다. 그것은 소피가 첫 번째로 노래할 때 자기도 옆에서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데 소름이 끼쳤다. 음악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소피의 소프라노 보이스와 장의 테너보이스가 너무나도 멋지게 들렸다. 노래가 끝난 후 숨어있던 장이 나온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장과 아르카스와 목소리가 똑같으니 가면을 쓰고 대결을 하라고 권한다. 이윽고 하얀 옷과 모자와 가면을 쓰고 두 사람이 나온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가면속의 아리아라는 그 제목의 장면이 드디어 펼쳐지는 순간이다. 노래가 시작되고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음 이탈이 나고 만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부르지만 역시나 똑같다. 그래서 결국 그 절정의 부분은 반대편에 있던 사람에게 넘어가게 된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멋지게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부르지 못한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바로 멋지게 노래를 소화한 사람은 장이었다. 영화에서는 장이 나올 때 스코티를 비춰주고 아르카스가 나올 때 소피를 비추어서 나는 나간 사람이 장 인줄 알고 당황했다. 그러나 가면을 벗으니 끝까지 남은 사람이 장이어서 안심을 했다. 영화 중 나는 이 장면이 가장 긴장감 넘쳤던 것 같다. 하지만 경연대회가 펼쳐지는 동안 조아킴은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와 하얀 커텐이 흩날린다.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그 커피가 떨어짐으로써 조아킴이 죽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죽음의 장면을 너무나도 평화롭고 고요하게 아름답게 다룬 장면 같다. 장과 소피가 대결에서 승리해서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이런 슬픈 소식을 프랑소와가 들고 찾아오고 강가에서 조아킴의 장례식이 치러지게 되면서 영화는 끝에 다다른다.
    독후감/창작| 2013.04.01| 3페이지| 1,000원| 조회(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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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성대에 대하여
    · 개요 - 국보 제 31호 ,소재지는 경부 경주시 인왕동이며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다. 석재는 화강암, 높이는 약 9미터 원통부의 밑지름은 4.93미터 윗지름은 2.85미터로 아래는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구조 - 맨 아래의 기단부, 가운데 원통형의 원통부 그리고 맨 위의 상단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상하 2단으로 땅 닿아 있고 그 위에 27단의 원통형 몸통부가 있으며 상단부에는 천장형 바닥과 상하 2단으로 된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장대석(長臺石)이 설치되어 있다. 상단부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2.2미터인 네모반듯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 공간의 동쪽에만 석판이 깔려 있고 서쪽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서쪽에는 마루를 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원통부는 모두 377개의 화강석을 쪼개 만들었는데 외부는 곱게 다듬어져 있는 반면 내부는 축대를 쌓듯이 자연석 그대로 두었다. 원통부 한가운데에는 정남향으로 3단을 차지하는 사방 약 1미터 폭의 출입구가 있고 출입구의 위와 아래로는 각기 12단의 층이 있는데 아래쪽 12단까지는 흙이 가득 차 있어 출입할 때 이곳이 일단 중간바닥 구실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첨성대란? - 현재 경주에 있는 첨성대 현재 남아 있는 세계의 천문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 조에 이 왕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나오며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는 본부 동남쪽 3리에 있는데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은 것이다.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높이는 19척이다.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그 가운데로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은 첨성대가 오늘날의 천문대와 같이 천문 현상을 관측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지어진 시설로 이해하는 근거자료로 이용되었다.· 첨성대의 엇갈린 주장, 천문대설 - 그러나 구조상 단순히 관측천문대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첨성대에 대한 여러 다른 해석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첫 번째가 천문대설이다.첨성대는 상설 천문대라기보다는 혜성의 출현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때 혼천의와 같은 의기가 특설되어 관측에 임하였을 것이고 춘추분점과 동하지점을 비롯한 24절기의 정확한 측정을 위하여 그 때마다 성좌의 정확한 위치를 관측하는 개방식 돔으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또한 정남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오르내리는 데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점과 지점 측정의 보조 역할도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첨성대를 순수하게 관측대로 보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출입구 밖에서 사다리를 대고 드나들면서 출입구의 바깥쪽의 마모된 흔적을 관찰하고, 직접 내부에서 정자 모양의 정상부로 오르는 것을 실제로 실험해 봄으로써 비록 비좁기는 하지만 정상부로 올라가 소수의 인원이 그곳에서 별을 보는 등의 관측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종교제단설 - 하지만 첨성대의 형태는 일반적인 관측대나 탑 등의 고대 건축물과는 다른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고 관측하기에 실용적으로 설계 되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천문대설에 대한 반론으로 나온 것이 첨성대를 하나의 종교적 상징물로 보는 종교제단설이다.먼저 첨성대의 크기는 구조상 다시 신라에서 사용하였던 원가력에 따르는 천체관측에는 매우 적합하지 않았다. 원가력의 내용으로 보아 최소한 사유의의 육합의로 조립된 혼천의와 누호 및 귀의 가 설치되어야 하지만 첨성대에는 그러한 관측기기를 설치할 수 없으며 혹 별의 위치를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더라도 그러한 간단한 측정을 위해 첨성대처럼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첨성대의 위치가 중국의 고대부터 근세까지 전승되어 오던 천도지방의 개천설에 따라 지켜오던 관측에 맞지 않다는 점이다. 즉 신라의 천문역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바 있던 중국천문학의 관측기술에 대하여 다소의 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첨성대의 구조와 위치가 관측활용에 있어서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론에 근거하여 첨성대를 불교적 신앙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다고 주장한다. 종교제단설을 주장하는 이용범은 첨성대가 천문관측대가 아니라 모종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며 불교의 수미산을 상징적으로 축조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복합기능설 - 그러나 첨성대가 제단설이라는 데에도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는데 제기와 제물을 운반하고 오르내리기에 다소 불편한 감이 있으며 왕성에 있는 국가적 제단이라면 그 제사는 왕이 주재하였을 것이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한 기록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천문대설과 종교제단설의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상징적으로 선덕여왕의 불심을 상징한 조형물로서 우물과 관련이 있다는 복합 기능설이 있다.
    공학/기술| 2013.03.25| 2페이지| 1,000원| 조회(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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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공부 서양사정리
    ·1.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발생배경과 그 의미14세기경부터 중세봉건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성장함에 따라서 교황권은 쇠퇴하고 중세문화도 그 빛을 잃어가게 된다. 이러한 봉건사회의 붕괴와 중세 문화의 조락 속에서 새로운 근대문화가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했다.중세사회의 기본이 되는 장원경제, 기사도, 카톨릭 교회, 스콜라 철학 등이 차츰 활력을 잃어가고 자유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예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향후 약 3세기에 걸친 이러한 움직임을 가리켜 르네상스라 하며 이는 유럽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는 운동이었다.르네상스는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 말로서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 유럽을 휩쓸었던 예술 문화의 혁신 운동을 일컫는다. 봉건제를 타도한 도시의 상층 시민이 르네상스 운동의 보호자이자 추진자로서 미술과 문예 등에 새 분야를 개척하였으나 보수화 되고 장식화 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인문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이 강조되었다.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4세기경부터 시작된 고전고대문화의 부활을 발판으로 한 근대문화 창조의 움직임이라는 오늘날의 르네상스 개념을 확립한 사람은 역사가 부르크하르트였다. 르네상스를 중세와 단절된 그리고 고대와 직결된 문화 현상으로 파악한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그 후 많은 비판과 수정이 제시되었다.1)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였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 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지중해 무역이 재개되면서 그 중심지로서 도시가 급속하게 발달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부유한 시민층이 성장했다.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조직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도시의 전통이 완등 인문적인 과목은 중세의 수도원학교나 대학에서도 교양과목으로 인정되었다.이러한 인문주의의 전파와 보급에 있어서는 저명한 학자들의 강의로서 페트라르카의 사후에 곧 시작되었고 학회의 형식으로도 이루어졌으며 특히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발명은 인문주의의 전파와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3) 르네상스의 의미르네상스는 인간을 개성적인 존재로 파악했고 그 결과 르네상스는 인간성을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이 그의 타고난 개성을 마음껏 기르고 발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유분방한 개성적인 인간과 여러 면에 걸쳐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이를 발휘하는 만능의 천재들을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이 배출하였다.이와 같이 인간의 발견 이외에 세계의 발견 또한 르네상스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이를 찾고자 하는 의욕으로서 신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팽창의 정신은 르네상스 정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또한 르네상스는 민족이나 사회의 차이를 뛰어 넘어서 교양에 의하여 맺어지는 세계시민사상의 발전을 가져왔다.요컨대 르네상스는 서양 사상의 일대 전환기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침체한 중세의 종말을 고하고 근대로부터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4) 이탈라이의 르네상스 예술과 발명 및 자연과학예술은 14세기 전반에 더욱 왕성하게 발달하였고 자연을 방향으로 그 발전이 지속되었다. 15세기에 급진적으로 발전한 예술은 위대한 거장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 그밖에 수많은 군소 작가들이 회화와 조각을 새로운 수준에까지 향상시켰으며 르네상스의 고전적 양식의 발전시켰다. 그들의 작품은 휴머니스트들이 고전에서 발굴해낸 고대 예술의 모범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 예술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과 인간의 힘과 권위를 이상화하였다. 이 예술은 고전 고대의 영향과 결부된 예술에 있어서의 세속적 정신의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또한 서구 전체의 예술적 취미와 양식 크게 공헌하였다.자연과학 또한 제약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근대 과학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그 좋은 예의 하나가 해부학에서의 베살리우스이며 태양중심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중세교회에 의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공식 우주관이였으므로 태양중심설이 확립되기 어려웠다.2. 북부유럽의 르네상스에 관해 논하라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은 약 16세기경이다. 르네상스가 북유럽까지 전파된 데에는 활판인쇄술의 영향이 크다. 활판인쇄술의 발명과 전파는 이탈리아 학자들이 편집해 놓은 고전 문헌들을 북유럽의 학자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북유럽 국가의 학자들과 대학생들이 많이 유학을 왔기 때문이다. 또한 기사도 문학과 스콜라 학문이 쇠퇴함에 따라 문화적인 공백이 나타났는데 이 공백 속으로 르네상스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한편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수많은 귀족들로 하여금 르네상스 문화를 접하게 만들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북부유럽을 넘어온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북부유럽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차이점먼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활기차고 세속적이었으며 인간중심의 개성사회를 실현하여 개인의 해방과 자각을 강조하였고 사실적이며 도시적이고 시민적이었다. 고대와 그리스도교를 결합시키면서 플라톤 철학을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북부유럽의 르네상스는 기존의 북부 유럽적 전통 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을 접목시켰고 그들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추구했다. 또한 북부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ㅢ 그것과는 달리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교회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었다.이탈리아의 인문주의가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던 데 반해 북부유럽의 인문주의는 종교 및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이렇게 북부 유럽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이 일어난 곳으로서 고전 고대의 옛 터전이었으며 한 속어 문학은 각국의 국가적 통합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15세기까지는 라틴어가 지배적이었으나 16세기에는 민족문학의 부흥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토착적 전통이 새로운 형태로 종합되었다. 프랑스의 라블레,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영국의 셰익스피어 등은 르네상스의 세계관과 문학적인 양식을 수용하여 각 국의 민족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3. 지리상 발견의 배경과 영향 및 역사적 의의1) 지리상 발견의 동기와 배경유럽 세계의 확대는 인도에 이르는 항로의 발견,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마젤란의 세계주항 등 소위 지리상의 발견들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지리상의 발견들은 동양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포르투갈에서 처음 시작되고 에스파냐가 그 뒤를 따르며 그 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15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지리상 발견이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먼저 일어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살펴보자면 우선 종교적인 동기를 들 수 있다. 15세기 중엽을 전후한 이슬람세력의 진출 특히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서유럽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열을 더욱 부채질하여 이것이 선교를 위한 새로운 지역과 항로의 발견을 추구하는데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또한 유럽인의 동방에 대한 호기심은 지리상의 발견을 가져온 또 하나의 동기였다. 특히 이 호기심은 13세기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여행기로 더욱 커졌다.그러나 지리상의 발견을 가져온 보다 중요한 현실적 동기는 경제적인 측면에 있었다. 그것은 후추를 비롯한 향료, 비단, 면, 금은보화 등 동방의 물산을 아라비아상인이나 이탈리아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교역하려는 것이었다.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동기나 의욕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제반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항해에 관한 지식과 기술이 그만큼 발전되어 있어야만했고 또 재정적인 후원이 있어야만 했다. 이이름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불리게 되었다.콜럼버스의 항해는 인도로 가는 서방항로의 탐험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인이었던 마젤란은 에스파냐의 지원 아래 다섯 척의 배로 1519년 출항하여 항해 중에 토착민에게 살해되었으나 남은 일행은 항해를 계속하여 1522년에 돌아왔다. 다섯 척 중 한 척만이 돌아왔고 선원은 18명이었다. 지구의 구형설을 입증한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항해는 이렇게 성취되었다.한편 멕시코 내부에 황금으로 가득 차 대제국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1519년 코르테스는 이 제국을 찾아 나섰고 무방비 상태의 아즈텍 제국을 손쉽게 정복하고 약탈하였다. 이 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넓은 지역에 에스파냐 식민제국을 건설하였고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 노예들을 사용하여 금은 채굴이나 사탕, 담배의 재배농업에 동원시켰다.3) 지리상 발견의 결과와 그 역사적 의의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 각 국은 새로 열린 세계시장의 점거를 목표로 치열한 경쟁체제에 돌입하면서 대외 팽창을 하게 된다. 즉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를 획득함으로써 그 곳에 유럽의 언어와 문화가 침투되었다. 식민지는 정치권력의 원천이었으며 귀족 사이의 경쟁이기도 했다. 식민지는 본국의 이익을 위해서 건설된 것이므로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보홀ㄹ 받는 종속적인 지위 하에 있어야만 하며 식민지 건설자들이 식민지의 교역을 독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지리상의 발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경제 중심축의 이동을 가져왔다. 또한 새로운 상품이나 산물은 역시 아프리카와 신대륙에서도 많이 도래하였다. 특히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의 유입은 유럽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16세기초를 기준으로 약 1세기 동안에 물가가 2배 내지 3배로 앙등하는 이른바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즉 1500년에서 분야에서의 혁신과 교류 또한 지리상의 발견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것은 당시까지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새로운 식물들과 동물 품종들의 확산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럼으로 주기적인 식량위기를 제거하
    학교| 2013.03.25| 8페이지| 1,500원| 조회(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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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상문 유럽중심주의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를 읽고...유럽 중심주의는 그다지 나에게 낯선 존재만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깊이 아는 정도도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들께서 조금씩 얘기해주셨던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이 내용들이 간단하지만 이해하기 쉽고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이었던 것 같다. 또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서양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세계사, 유럽에 관한 인식과 책이 서술하는 것과 내용이 너무 달라서 나의 관점을 아예 바꾸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나는 세계사가 유럽 중심적이라는 것을 약간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무관심하게 넘어갔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세계사가 유럽 중심이었구나 라는 것을 더욱 알게 되고 유럽 중심으로 쓰여진 세계사가 왜 문제가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일단 우리가 지금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사는 유럽 중심주의라는 명목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세계사가 유럽 중심주의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세계사 또는 서양사도 포함하여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편협된 시각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하여 미국에 대해서까지 서술하고 있는데 나는 이 중에서 수업시간에도 잠깐 언급이 되었던 그리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스의 문화는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많이 배워왔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리스 문명이 인간 중심적인 면모가 있지만 신앙과 미신을 중시하는 비합리적인 측면 또한 있다고 서술한다. 나는 이 부분을 보고서 얼마나 내가 주의 깊지 않은 사람인지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그리스는 정말 많은 신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때 그리스의 문화는 인간중심적이라고만 주입식으로 외우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 문화의 전부이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오류를 범한 내용을 초 중 고등학교까지 이르러 배우고 있다.그리스에 대한 오류는 이 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문명의 우수성에 대한 언급은 다른 지역의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페르시아를 예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명칭 및 평강 등에 대해서 그리스 중심적인 경향이 드러나는데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의 승리를 동서양 대결에서의 서양의 승리, 아시아와 유럽의 대결에서의 유럽의 승리로 평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수업시간에 영화 ‘300’에 대해서 교수님께서 언급하셨던 것이 생각이 난다. 이 영화에서는 페르시아 사람들을 야만적이며 심지어는 인간도 아닌 괴물로 그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작은 것처럼 보일 수 도 있지만 더 나아가면 동양에 대해 야만적이며 저급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편협 되었고 반드시 고쳐져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비록 이 책의 내용은 유럽 중심주의로 쓰여진 세계사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뿐 아니라 다양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단순히 유럽 중심주의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서양과 동양으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들 말이다.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기준이라든지 오리엔트라는 이름 자체도 서양의 우월의식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든지 헐리우드에서 동양인을 범죄자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리는 것들에 대한 서양과 동양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교수님들께 많이 들은 것 같다.내 생각은 약간 이 책의 논지를 벗어날 수 도 있고 어쩌면 관련이 되어있을 수도 있는데 교수님들의 얘기와 역사를 배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정말 강자의 역사 같다. 대부분 강자들의 역사만이 기록되고 후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보며 기억한다. 약자의 역사, 그것은 과연 역사의 중심의 설 수 있을까? 과연 그러한 날이 올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강자들만이 기억되며 강자들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퍼지기도 한다. 아까 위에서 언급했지만 서양과 동양, 이 사이에서 서양이 우월하게 그려지는데 어쩌면 유럽이 아니라 동양이 근대에 들어서 세계적 지배권을 획득했다면 세계사가 동양을 중심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어떤 나라든 간에 강성한 그 나라를 중심으로 역사가 서술되고 역사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가 중심의 되어 모든 세계사가 서술되기에는 지금 다른 나라가 급부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고대에서부터 중세에까지 엄청나게 큰 힘을 떨쳤으나 근대에 들어 서양 세력들의 의해 무참히 짓밟혀졌다. 하지만 중국은 다시 부활하고 있으며 급부상하고 있다. 혹 중국이 세계에 대한 목소리가 가장 커지면 세계사의 중심이 중국을 바뀌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물론 이미 굳어져버린 학문이 다시 바뀌게 되려면 많은 시간이 들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동양나라들의 목소리도 커져가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유럽 중심주의를 토대로 한 세계사의 문제점을 인식했고 이러한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도 발간하고 있으며 아직 많은 어려움에 있고 미미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계에 있으며 또 언제까지 편협된 시각과 서양의 우월성과 객관적이지 못한 세계사를 배워야 할 것인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쓰여진 세계사가 필요할 것이다.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 또한 서양을 우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한명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생각이 이렇게 된 배경을 집고 넘어가고 싶다. 또한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 중 고등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과목을 제일 좋아했었다. 중학교 때 배웠던 르네상스 등과 같은 중세시대가 나는 너무 재밌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사회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교과서의 내용들을 암기하고 받아들이면서 서양의 문화들은 우월하고 인간적이며 민주적이고 교양있는 것들로 나에게 인식되어져 왔다. 그 인식은 내가 대학교에 와서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내용을 접하기 전까지이다. 대학교 와서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내용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 당시를 돌아보니 ‘예전에 내가 배웠던 교과서들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옷을 입고 있었구나 ’ 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많은 학생들 아니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이 유럽 중심주의로 옷 입은 교과서로 공부하게 된다며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결과일 것이다. 물론 교과서마다 약간씩 다르고 또 나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의 경우에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서양우월주의의 생각이 심했고 동양의 것들을 고리타분하고 재미없고 저급한 문화라고 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혹시나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그대로 인식하며 중립적으로나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늘어날까봐 염려되는 바이다. 나에게 있어서 우아해 보이고 고상해보였던 포크와 칼이 원래는 칼로 썰고 집어먹는 그냥 단순한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하나하나 서양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열거할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세계사에 대한 관점과 더불어 동양을 바라보는 관점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독후감/창작| 2013.03.25| 4페이지| 1,000원| 조회(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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