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과거공부를 알아야 우리 교육이 보인다를 읽고-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첫 째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조선시대의 양반들의 모습들은 전부 거짓이라 볼 수 없지만 과장되거나 한 쪽의 모습만을 과하게 비추어주었던 점이다. 우리가 아는 고귀하고 점잖은 양반들의 이미지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무엇인가 그 시대의 양반들도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강했다. 두 번째로는 오늘날 입시제도의 문제점과 그에 관한 다양한 개선방안을 과거공부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현대 교육체제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되어 좋은 기회였다.이 책은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오늘날 입시제도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의 태도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현대교육의 입시제도에 대해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와 비교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이야기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입시제도와 교육체제의 행태이다. 심지어 책을 읽으며 입시제도에서의 문제도 있지만, 더 나아가 기업들의 채용방식에서부터 그러한 사회적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나의 생각 또한 공감할 수 있었다.수능에서의 좋은 성적, 명문대 진학, 대기업 취업,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 이 연결고리의 맨 첫 부분이 ‘수능’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은 너무 과열되어있다. 매년마다 수능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이면 각종 미디어에서 이른바 ‘시험대박의 명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명문대 진학이라는 꿈을 위한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열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입시도 ‘n수생’이 늘어가고 있다.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았던 과거제도를 생각해보면 1년에 한 번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런 한 번의 시험을 통해 평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경쟁심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온다. 교육의 목적이 시험이 되어 버린다면 오직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교육, 바로 사교육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사교육을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며 교육열을 식히기 위해 경쟁구도를 바꿔야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곳에서 경쟁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원은 한정적이며, 인간은 발전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때문에 경쟁이 없이 발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교육을 없애야한다는 주장은 옳은 것인가? 사교육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이 생겨나게 된 원인을 없애야 할 것이다. 사교육 시장이 엄청나게 커진 오늘날, 원인을 모른 채 사교육을 없애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고, 비윤리적인 것이다.그렇다면 사교육이 왜 문제가 될까?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자 사교육을 받는다. 명문대학에 진학하고자 할수록 사교육의 비용은 점점 비싸진다. 사교육을 받아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은 사교육(학원강사, 과외 알바 등)을 제공하고 있다. 명문대학에 많은 수험생을 보낼수록 이 학생이 받는 돈은 점점 많아진다. 사교육을 하고, 사교육을 받는 이 과정에서 돈이 없는 사람이 서있을 자리는 없다. 결국 사교육은 돈이 많은 사람들의 부익부를 지켜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육을 통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된다면 그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육도 자본주의에 적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마치 비용에 따라 교육의 품질을 매기고, 고액과외는 ‘교육의 명품’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교육의 명품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교육에 대한 가치관은 생각해보고 싶지 않다.사교육에서 일어나는 격차는 공교육의 붕괴를 낳는다. 학창시절 나는 그것을 경험하며 자라왔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잠을 자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한 대부분의 학생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수능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신공부와 수능공부는 별개였다. 심지어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방법에 따라 학교를 나누고, 진학을 결정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의 기준은 내신으로 수시를 쓰는 학교, 정시공부를 하는 학교였다. 가장 충격이었던 점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이제는 학교인지, 학원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모든 과목의 수업에서 수능에 연계되는 교재를 교과서 대신 사용하였으며, 자치활동 등 모든 활동 시간은 자습시간이었다. 충격이었지만 나 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나도 수능을 치러야 하는 학생들 중 한명 이었고, 충분한 자습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입시를 위해 사교육을 받는 학생들 때문에 공교육의 붕괴가 발생한다는 주장도 이젠 옛날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공교육의 사교육화로 공교육의 붕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고등학교 시절 운동부였다. 하지만 결국 나의 목표도 대학진학이었다. 수영선수로서 미래가 유망한 편이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운동을 그만두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는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 고등학교 시절 내신 등급은 1등급을 유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는 운동선수’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은 사실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운동선수가 좋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서는 사립대학교의 학교 홍보를 위한 스타선수이거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어야 한다. 나는 후자를 택하였다. 종목 특성상 대학에서 홍보를 위해 데려갈 만한 스타선수는 되기 어려웠고, 그동안 공부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입시제도 때문에 운동선수라는 꿈을 포기해야 했던 경험 때문에 다양한 입시전형으로 인한 공정성의 파괴에 대해서 공감 할 수 없었다. 미국의 경우 ‘공부하는 운동선수’에 대한 특별전형이 있다. 그 학생에게는 스타선수보다,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학생보다 더 높은 대우를 해준다. 대학에서 그 학생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전형이 과연 공정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사교육을 활성화 시키는 특별전형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적극 공감하지만, 특별전형이 전부 없어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구 반대한다. 특별전형이 점차 없어지는 것은 수능의 과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국어, 수학, 외국어 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입시 때문에 운동선수를 포기해야 했던 경험을 떠올리곤 한다.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고 창조적인 교육을 통해 공부만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을 사교육활성화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사회는 점차 열린 질문에 대한 능동적 사고를 선호하고 있는 것은 맞다. 대학, 대기업에서의 면접 또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과제이다. 나는 초, 중, 고를 다니면서 능동적 사고를 요구하는 과제를 받아본 경험이 손에 꼽는다. 항상 칠판에 주어진 지식들이 정답이라고 받아들여야 했으며, 문제집의 문제들을 수동적으로 풀어내야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성장했을 것이다. 학원을 다녔던 학생이라면 아마 더 많은 수동적 과제를 풀어내야 했을 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이러한 학생들에게 창조적 사고를 요구한다. 대학입시가 중요하다는 의식이 판에 박혀있는 이 시기에서, 빠르게 능동적 교육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적절치는 않다. 획일화된 시험을 10년 넘게 보고 입학한 대학생들에게 열린 질문을 갑자기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대학 입시에 있어서 창조성을 평가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 획일화된 시험을 비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학교 정규 수업에 음악, 체육, 미술 수업이 없는 것도 아니다. 복합적으로 지능을 발달시키기 위해 다양하고 창조적인 커리큘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창조적 교육의 무조건적 수용은 사교육 업체의 더 큰 활성화와 상업적 목적을 위한 악용 등과 같은 문제점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높다. 따라서 의식의 변화와 창조적인 교육이 동시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천재의 탄생은 과연 누구의 몫인가?(Good Will Hunting을 보고)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천재라 정의한다. ‘Good Will Hunting’의 윌은 분명 천재이다. 수학이면 수학, 역사면 역사, 물리면 물리. 윌은 평생을 한 영역에 몸담은 교수가 증명하지 못한 문제를 단번에 비웃을만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윌은 성장 과정에서 폭력의 경험으로 마음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세계에서 몇 명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풀며 재미로 공부하는 윌은 자신의 천재성을 부정한다. 남들을 비아냥거리기 일쑤이고, 청소부, 벽돌공으로 일하면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며 그것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윌의 천재성을 발견한 교수가 등장한다. 바로 램보 교수이다. 램보 교수는 윌의 잠재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숀 교수를 찾아간다. 하지만 천재성을 가진 윌에 대한 두 교수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두 교수가 가진 교육관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램보와 숀 교수의 행동을 바탕으로 교육관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분석해보자.교육관이 다른 이유는 인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교육관은 달라진다. 루소와 실존주의의 교육관을 바탕으로 두 교수의 교육관에 대하여 분석해보자. 루소는 인간을 자연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본다. 자연성이란 잠재가능성을 말한다. 따라서 교육이란 인간이 가진 내부의 자연성을 발현 시키는 것이다. 램보 교수는 윌의 천재성을 최대한 끌어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극중에서 그는 숀 교수에게“올바른 방향을 주어야 한다.”,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하자.”라는 말을 한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는 기회라며,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램보 교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윌의 흥미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과제를 주며 잠재성을 최대한 이끌어 내려고 노력한다.반면에,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바라본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수 있는 존재로 설명한다. 자유의지는 학생이 하고 싶은 것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니다. 학생의 잠재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잠재가능성과 하고 싶은 일이 다르다면 그것에 대한 선택을 할 의지가 있다. 극중에서 숀 교수는 “그 애가 원하는 것을 찾도록 시간을 주자”, “MIT 대학에서 몰래 수학문제를 풀면서 벽돌공이 하고 싶다는 것은 무슨 의도이냐”라는 말을 한다. 마음의 문을 닫고 정말 좋아하는 것을 아직 잘 모르는 윌에게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 것이다. 실존주의는 학생에게 ‘만남’의 경험을 강조한다. 여기서 만남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의미하며, 무한한 감동 상태를 뜻한다. 즉, 만남이란 학생이 어떤 누군가와의 경험을 통하여 기존의 생각을 180도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말한다. 이러한 만남의 정의 때문에 만남의 경험은 굉장히 희소성을 갖는다. 교사는 학생이 이러한 만남을 경험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주어야한다. 숀은 윌에게 만남의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숀은 윌과의 공통점을 이끌어내고 마음의 문을 열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윌은 숀에게 점차 방어기제를 약화시켜 갔고, 결국엔 눈물을 흘리며 굳게 닫혔던 마음을 열게 된다. 숀의 “It's not your fault”라는 대사는 윌의 만남의 경험을 극대화 시켰다고 생각한다. 윌은 숀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도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숀은 윌의 잠재성을 넘어서 윌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점이라 생각한다. 윌의 주변사람들은 모두 그의 잠재성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잠재성에만 집중할 뿐 그의 본질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숀은 윌의 천재성은 물론 윌의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는 윌의 행동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고, 방향의 제시와 조작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윌이 숀 교수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해서, 램보 교수의 교육관이 틀린 것은 아니다. 교육관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램보 교수의 윌에 비해 속도가 빨랐다고 생각한다. 윌은 자신의 천재성을 발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램보 교수는 이러한 준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했다. 학생의 잠재성을 이끌어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자신의 욕심이 투영되어서는 안된다. 램보 교수는 윌의 천재성이 세상에 이로워야 한다는 교사로서의 욕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욕심 때문에 학생을 더욱 다그쳤고, 빠르게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속도는 윌에게 너무 빨랐던 것이다. 그래서 천재성에 대한 욕심이 없고, 그저 윌을 기다려준 숀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학생의 능력을 아는 것만으로 이해라는 단어의 사용은 어려움이 있다. 학생의 능력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램보 교수의 제안을 처음부터 거절하지 않았던 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램보 교수와 함께 문제를 풀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램보 교수가 조금만 더 천천히 윌의 천재성을 발현시키려 했다면 윌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는 윌에게 면접과 다양한 문제들을 주었기에, 미숙한 존재였던 윌의 반응은 반항심뿐이었다. 배움과 행동은 다르다는 것이 교육의 딜레마라고 한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윌의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학생의 자연성 발현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속도는 학생의 발걸음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요즘 영재발굴단이라는 TV프로그램을 즐겨본다. 다양한 재능들과 그 재능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나온다. 바람직한 방법으로 그 재능이 발현되는 경우가 다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아이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아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과도한 교육을 하거나,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님들이 많기 때문이다. 재능에 대한 관점은 아이와 어른과 다르다. ‘아이도 어른과 같겠지’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어렸을 적 아이는 스스로 천재성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흥미’로 인해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천재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재능은 그저 자신의 흥미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은 이것을 흥미를 넘어서 천재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아이의 의도를 무시한다면 천재성만 보고 아이의 흥미와는 다른 교육을 시키거나, 과잉보호로 인해 아이의 흥미를 저하시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아이가 흥미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재능으로도 천재성으로도 어떠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작년 9월 영재발굴단에서 여덟살 화가 김민찬 학생에 대해 다룬 회가 있었다. 김민찬 군의 그림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림 영재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민찬이는 이러한 재능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림을 멀리하게 되었다. 부모는 민찬이의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미술학원을 보냈다고 한다. 미술학원에서는 다양한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지만 획일적이었고, 민찬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심지어 점차 흥미가 떨어져갈 때 즈음 민찬이의 실력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마저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도 안 나온 애가 무슨 그림이냐" 혹은 "분명히 혼자 그린 게 아니야. 누군가가 도와줬겠지" 등 어른들의 말에 민찬이는 상처를 받고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흥미도 없고, 자신의 그림을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나자 민찬이는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민찬이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에는 약 9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민찬이는 집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때 가장 즐거워했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민찬이는 언제 그림을 그리는 거냐"라고 물었다. 이에 민찬은 "마음에 다 담아졌을 때"라고 말했다. "마음은 어떻게 담는 거냐"는 물음에 민찬이는 "귀로도 코로도 온몸으로 느끼는 거예요"라고 답했다.?이렇듯 아이에게 자신의 재능은 교육자로서 방향을 조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그저 흥미이다. 아이가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천재성을 외부로 발현시키는 것이 교사의 몫이다.지난 4월에는 IQ 140 9세 우진이의 사연이 나왔다. 우진이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책을 하루 종일 읽을 뿐만 아니라 읽은 내용을 모두 기억한다. 게다가 수학적 지식도 높아 세 자리 수 곱셈쯤은 암산으로 해버리고 인수분해의 개념까지 알고 있는 아이다.?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우진이가 미래형 인재가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우진이에게 친구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우진이 부모님은 정작 우진이가 왜 친구가 없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우진이의 천재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부모는 우진이를 너무나 과잉보호하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 때조차 우진이 옆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위험한 것은 전부 통제하였고, 때문에 아이는 겁이 너무 많았다. 우진이가 실패하지 않았던 책과 지식만이 우진이에게 안정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사람도 사회도 다른 신체적 활동 모두 우진이는 겁을 내고 있었다. 때문에 우진이의 사회성은 바닥이었고, 학교에서도 언제나 혼자였다. 돈으로 행복을 사고 싶다는 우진이.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에 글쎄요라고 대답하는 우진이. 한 전문가는 “저는 이런 아이들을 대치동 브이(V)라고 부릅니다. 갇혀 있다는 의미죠. 코끼리 다리만 보고 싶으면 다리만 보고 꼬리만 보고 싶으면 꼬리만 보는”이라고 설명했다. 대치동 브이란 지능검사 언어영역에서 이해능력이 현저히 낮아 생기는 모양을 말한다. 우진이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너무 낮아 사회성도 떨어지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잉보호의 원인은 아버지의 욕심이 투영되면서부터였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못했던 아버지는 우진이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야외활동은 줄이고, 야외활동을 하더라도 옆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우진이는 상위 0.4%의 지능을 가졌지만, 전체를 볼 줄 모르는 그저 자신이 보고 싶은 곳만 보는 인공지능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체육특기자 입학 전형 비교지난 2016년 정유라(21) 씨의 이화여대 2015학년도 수시 전형 학사 비리를 통해 우리나라는 체육특기자 전형에 매우 민감해졌다. 예전부터 대부분의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운동선수의 실적으로만 체육특기자를 선발하는 과정에 대해 불안감과 우려를 표했던 필자로서 이 사건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라 생각한다. 대학교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하고 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교육 기관이다. 즉, 대학교는 학문적인 탐구를 위해 진학하는 곳으로 단순히 운동선수의 실적으로만 선발하는 것은 매우 많은 문제점을 만들어 낸다. 중등 교육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고등 교육 기관에서 중등 교육에 대한 평가 없이 선발한 학생(체육특기자)에게 일반 학생과 똑같은 졸업 요건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적인 이야기이다. 대학의 현 체육특기자 제도로 입학한 운동선수들은 제도의 수혜자이자 동시에 제도에 의한 피해자이다. 대학교의 체육특기자 선발방식에 문제가 있으나, 이를 운동선수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미국의 경우 체육특기자 전형이 존재할까? 미국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대학에서 체육특기자라는 특별전형으로 운동선수를 선발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운동 실적만으로 평가하여 선발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운동 실적과 함께 학업 자격 기준과 아마추어 자격 기준 또한 엄격히 적용된다. 또한 대학 진학 후에도 운동 실적이 뛰어나더라도 학업 자격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체육특기자 자격이 박탈되고, 경기 출전 및 훈련 시간에도 규제가 가해진다. 미국과 한국의 체육특기자 전형을 비교해보고, 우리나라의 전형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보자.가. 미국의 대입제도와 체육특기자 제도의 특징미국의 대입 체육특기자 제도는 미국의 대학입학제도 가운데 가장 체계화되어 있으며, 객관성이 높다. 미국 대입제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원자의 대학수학능력과 관련된 다양한 자질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점이다. 수능 점수나 내신 점수와 같이 양적 자료의 학업성적이 중시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다양한 평가 자료를 토대로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진다.¹?미국의 전반적 대학입학제도와는 달리 체육특기자의 대학입시의 경우 지원자의 자격을 공식적 절차와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다.¹? 1890년대 미국 대학교의 미식축구팀 스카우트 경쟁이 과열돼 부정행위가 속출하자 1910년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가 창립돼 이를 관리하고 있다. NCAA는 설립초기부터 학생선수라는 개념을 운동선수에 앞서 학생으로서 권리와 의무에 두었고, 이에 대한 사회전반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데 조적적 노력을 경주하였다.¹? 현재 NCAA는 3개 수준의 디비전(Division) 별 대학스포츠 경기 운영 그리고 학생선수 자격과 관련된 규정과 가이드라인을 제장하고 집행한다. 디비전 1 대학들은 규모가 크고 거의 모든 운동 종목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운동성적도 좋은 편이다. 디비전 2, 3은 1에 비해 규모가 작고 종목도 조금씩 다르다.미국 대학의 체육특기자로 진학하려면, 해당 종목의 전문운동 특기뿐만 아니라 NCAA의 선수 자격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NCAA 디비전 1이나 2의 대학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요건이 충족되어야한다.¹?1. 고등학교 졸업장2. 최저 16개 핵심과목 또는 14개 핵심과목의 이수3. 핵심과목 평점평균 기준4. 대학수학능력 표준점수 SAT 또는 ACT 기준 (디비전 2는 SAT 820점 또는 ACT 68점이상)5. 아마추어 자격인증이상의 학업관련 규정과 아마추어 자격규정의 모든 조건을 만족할 경우 체육특기자 신입생은 소속 디비전의 대학스포츠 훈련과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체육특기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체육특기자로 입학하였다고 해서 졸업까지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매학기 NCAA 선수자격 규정을 성공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¹?나. 한국의 체육특기자 제도의 특징과 실태우리나라에서 체육특기자 제도가 도입된 것은 1973년부터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대회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이 국위선양뿐만 아니라 국민 통합에도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운동만 잘하는 선수’를 양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업적주의에 치우친 나머지 학교 사이에 순위 위주의 과당 경쟁이 학업 경시 풍조를 만연시켰고, 이는 차세대 스포츠 리더들에게 스포츠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력이나 창의력을 둔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우리나라의 체육특기자 제도는 대부분 운동실적에 의한 선발 제도이다. 고등학교 학업 성적이나 수능 성적으로 선발하는 학교는 매우 드물며, 학업을 꾸준히 이어간 선수도 극소수이다. 우리나라는 체육특기자 전형을 지닌 모든 학교가 입시요강에 전형에 대하여 구체적인 평가 요소들을 마련해놓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체육특기자는 감독에 의한 스카우트가 우선적이며 이는 실력이 좋은 운동선수들이 소위 말하는 상위권 학교에 진학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 유명대학 체육특기자 선발과정에서 부정과 비리가 개입하여 해당 종목의 감독이나 대학 내 담당 교직원이 구속되어 사법 처리되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반복되어 왔다.²?이러한 입시부정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학벌만능주의, 우수 선수를 유치하여 광고효과를 창출하려는 대학의 상업적 욕구, 그리고 특기자 선발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감독 및 관련 교직원들의 탐욕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발생하는 위법행위라고 할 수 있다.²?우리나라와 미국의 체육특기자 전형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마다 규정이 다르기에 자세한 규정은 대학별 입시요강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전형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운동 실적 외의 것을 보느냐이다. 미국의 경우 체육특기자 자격규정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운동의 특기보다는 오히려 학업능력 요건이다.가. 운동선수 선발 방식 변화 필요정유라 사건 이후로 대학 스포츠 선수들에게 출석, 과제, 훈련 시간에 대한 압박이 매우 커졌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운동선수들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대학을 졸업하기 어려운데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한국의 시스템을 나무랐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애초에 선발 방식이 실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학의 졸업요건 및 선수자격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업성적에 대한 평가를 전혀 하지 않은 채로 선수들을 선발하여 일반학생과 똑같이 평가받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행위이다. 대학에 입학 전 중, 고등학교에서 운동선수의 수업 결손은 평균 50% 정도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대학교는 대학 스포츠 상위 성적 유지 및 광고효과를 위해 중등 교육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없이 선수를 선발하고 있다. 필자는 대학에서 운동선수를 선발하는 방식과 실업팀에서 선수를 선발하는 방식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상위권 대학교의 졸업 선수들의 실업팀 스카우트 현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중지능을 읽고150, 75, 120, 60.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몸무게, 신장, 시험점수 혹은 IQ 등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IQ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제기를 많이 받아왔다. 인간의 잠재성은 2~3자리 숫자로 단정할 수 있을 만큼 편협하고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더 폭 넓은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탄생한 이론이 다중지능 이론이다.어떤 종류의 지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뇌의 부분이 다르다. 뇌 촬영을 통해 지능을 연구한 결과들을 보면 놀라우리만큼 활성화 되는 부분이 다르다. 모든 지능은 뇌에서 작용한다. 이러한 뇌 사진을 통해 지능은 확실히 단일한 차원의 연속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지능이 완전히 별개로 발달하는 것인가. 다중지능 이론에 대해 배우기 전까지는 그러한 줄 알았다. 하지만 뛰어난 운동선수가 과연 신체지능만 가지고 세계 제패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완전히 별개가 아니란 생각이 들것이다. 운동선수는 영법의 해석, 운동방법에 있어서의 연구, 지도자와의 친화력 등 다양한 지능이 복합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이 신체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재적 음악가도 음악지능만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특정 분야의 뛰어난 영재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이 복합적으로 발달하지 않는다면 창조적 위인은 탄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그러나 학창시절 높은 문제해결력을 보이는 친구들 중 몇몇은 모든 지적 영역에 있어서 평균이상이었다(신체 지능은 예외가 있었다). 그러한 친구들을 보며 지능은 하나의 체계일 것이라 생각하고 운동 능력은 지능과는 거리가 먼 영역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는 다중지능 이론에 동의한다. 다양한 영역에서 두루 뛰어난 지능을 보이는 학생. 나는 이것이 환경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 같다. 나의 친누나를 떠올리면 사교성도 좋고, 학습 성취도도 높으며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 상장이 수두룩했었다. 부모님께서 누나가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하셨다. 그러다보니 일찍이 예체능까지 다양한 지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음악을 접하지 못할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초등학생 신동 화가가 출현한 적이 있다. 만 5세도 채 되지 않는 나이에 그림에 관심이 많은 아이에게 부모는 다른 활동을 강요하지 않고 원하는 것에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TV 출현의 목적은 아이가 훌륭한 화가로 발전할 수 없게 만드는 주변의 반응 때문 이었다. 아이를 의심하는, 상업적 목적으로만 바라보는 등의 주변 반응은 아이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부모는 이러한 아이의 문을 다시 열어주기 위해 방송사와 전문가 등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아이는 다시 마음을 그리는 환경을 제공받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사회적으로 비정상 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했더라도 꿋꿋이 그에게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한 부모가 있었기에 역사의 위인이 될 수 있었다.
몰입의 즐거움을 읽고내가 분명히 이해하기 쉬웠던 것은 책의 제목이자 내용인 ‘몰입’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학생운동선수였던 나는 집중력이 굉장히 필요했다. 운동만 하는 학생들보다는 운동시간이 적었고, 공부만 하는 학생들보다 당연히 공부시간도 적었다. 두 가지를 분명 다해야 했던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은 집중이었다. 운동할 때에는 운동에 너무 몰입해서 부상의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채 훈련하는 순간도 많았으며, 공부할 때에는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몰입해서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경기에 출전할 때에도 몰입했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은 결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1위를 하며 신기록을 작성할 때에는 힘든 줄도 모르고 경기가 끝이 났지만, 내가 몰입하지 못했을 때에는 경기 후반부가 버거웠고, 심지어 관중의 환호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이렇듯 일에 있어서의 몰입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몰입이 언제나 좋은 것일까.무엇이든지 가능한 몰입해서 최고의 결과를 얻어내는 것, 참 이상적이다. 일에 있어서 몰입은 언제나 바람직하다. 일이 여유롭고 자유 시간도 많아 그것을 활용해야 삶의 질적 수준이 높아진다면 여가 시간마저 정력을 쏟아 붓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삶에 여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그것이 여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개인의 성향도 존중해야 할 것 같다. 고단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여가시간 마저도 몰입하여 창조력을 발휘하고 정력을 쏟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고된 하루를 보낸 후 하릴없이 산책을 하고 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 이렇듯 가벼운 여가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에게 질이 낮은 여가를 보내고 있으니 몰입할 수 있는 다른 여가를 찾아보라는 것이 마땅할지 의문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 여가시간만큼은 몰입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삶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촉매제이다.대학에 들어와 학기 초의 나의 생활은 일의 역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경험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시험과 경기의 연속이었다. 즉, 일의 연속이었다(학생으로서). 시즌이 끝나면 학교시험이 기다리고 있었고, 학교시험이 끝나면 시즌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좋아서 했던 부분이 컸지만(운동에 있어서), 과업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과업은 거의 사라졌다. 수험생처럼 소화해낼 공부의 양도 없었고, 부상으로 시즌과 훈련마저도 사라졌다. 매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던 것들이 사라지면 너무나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여태껏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달도 채 가지 않았다. 집중하고 싶었다. 나에겐 나를 자극할 과업이 필요했다. 다시금 과업을 통해 내가 살아있고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 있다가 일을 끝낸 후 한 번에 몰려오는 뿌듯함과 피곤함이 섞인 그런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그리웠다. 그러한 감정폭풍을 겪은 뒤 나는 나를 성장시킬 공부에 다시 빠져보고, 지도자의 길을 택해 가르침에 푹 빠져있기도 한다. 일이 끝나면 피로가 몰려오고 정말 힘들 때가 많지만, 돌이켜보면 일이 없는 것이 더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