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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와 불교생명윤리` 교재 요약
    현대사회와 불교생명윤리Ⅰ. 불교생명윤리 총론1. 불교의 세계관▲ 불교 - 佛法을 신앙하며 신앙과 수행을 통해 離苦入涅槃, 成佛을 목표로 하는 종교.▲ 불법 - 부처님꼐서 발견, 깨우치신 dharma 곧 無我, 無常, 緣起.無我불변한 자아(atman)가 실체로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無常영원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緣起모든 것은 조건(緣, prat?tya)들간의 상호의존적인 화합(sam)을 통해 일어나는 것(起, utp?da)▲ 五蘊無我說 - 나라는 것은 오온이라는 상관관계의 총화로서 잠정적 가합태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설.五蘊다섯가지 집합덩어리(skandha)色 r?pa물질적작용受 vedan?감각작용想 sann?표상작용行 sa?kjar?의지작용識 vinn??a사유식별작용▲ 연기하는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一切皆空이라 할 수 있다.▲ 色=空 → 妙有=眞空 → 如如(tathat?) → 眞如(bh?ta-tathat?) → 如實(yath?-bh?ta) → 諸法實相緣起內緣起세상 모든 현상의 상호의존적 관계성外緣起불교인간관의 기반으로 생사등 일체중생의 고가 어떻게 상관적으로 발생 소멸하는가 각각 앞의 것으로 뒤에 것을 살림을 보이는 것▲ 연기적 세계관 → 인드라망 → 중중무진연기 → 연화장세계 → 법계(dharma-dh?tu)▲ 깨달으면 부처이므로 근본적 가능성인 佛性(buddhatva) → 일종의 법주성(dharma??itat?) → 현상의 규칙성(dharmaniy?ma) → 諸法實相(dharamat?) → 法性 → 법계2. 불교의 인간관생명을 가진 사물이 자신이 지은 행위의 영향력(業力)에 따라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띄고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되풀이하며 흘러 윤회(輪回, sa?s?ra, 흘러감)하는데 그 단계의 六道 가운데 하나인 인(人, manu?ya)이다. 그리고 이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解脫, mok?a, 벗어남)이다. 인간 manu?ya의 manu는 사유를 뜻하지만, 인간은 사유를 무분별지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一切에대한견해有고정적실질적 관념대상 & 물질적 대상六入su??yatana대상인식기관 안이비설신의觸phassa식, 명색, 육입이 접촉하여 화합受vedan?인식결과의 느낌愛ta?h?느낌에 대한 갈망과 욕망取up?d?na갈망 대상에 집착有bhava갈망대상이 실체적 有라 생각, 業이 있게 됨生j?ti업을 인해 일어나는 삶의 전개老死jar?-mara?a늙고 죽는 괴로움▲ 人은 마음가짐(無明하면 미계에 머물고 明하면 오계에 머뭄)에 따라 깨달을 방향성 내재.▲ 轉迷開悟 = 心性本淨 = 性本淨心 = 客塵所染 = 心惱故衆生惱心淨故衆生淨▲ 대승불교의 유식 - 唯識 vijnapti-m?tra 활동의 주체는 마음, 모든 것은 마음작용(vijn?na)에 의해 알려진 내용(vijnapti)에 불과하다.제8식알라야식, 阿賴耶識, ?laya藏심리적 경험에 의해 산출되는 잠재적 형성력(種子, b?ja)들을 축적, 간직하는 의식제7식말나식, 末那識, manas意6식과 8식 사이의 전달하는 의식, 자아의식▲ 유식에서는 객진소염을 강조했다▲ 여래장 - 如來藏 tath?gata-garbha = 진여(tathu)에 도달(agata)한 자 + 태(胎, garbha)▲ 佛性(buddha-dh?tu) → 보는 관점에 따라 佛藏(buddha-garbha), 혹은 佛姓(buddha-gotra) → 연생성의 法性 → 불성=법성=연기성, 공성▲ 공성으로서의 인간관 → 세계자연과의 不二的 연관성의 징표임3. 불교의 생명관생명의 정의서양생기론vitalism‘영혼’같은 신비로운 생명력으로 움직인다 주장.기독교 정신의 유산기계론mechanism생명이 고도의 복합성조직체인 유기체(organism)로 봄.혼돈속에 일정한 질서를 형성하는 創發的 全一性이런 물질주의가 근대과학의 토대가 되었음불교연기론의 해명으로서 조건적 요소론空性을 본질로 하여 감수성(情)과 의지성(行)과 행위성(業)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자(有情)임▲ 기계론의 상호의존적 본질은 불교의 연기적 생명관과 부합함▲ 有情 sattva 情識이나 業識이 있는 것, 즉 감수성(情) 의지성(善악과 대립되는 상대적인 선有漏善衆善奉行自淨其意?불교의 善불교종교성의 핵심선과 악을 초월해서 열반에 도달하는 의미에서 최고의 선勝義善번뇌가 차단되는 무루의 선無漏善是諸佛敎?, ?의 회통개인의 깨달음의 추구, 깨달음의 사회화가 조화됨세간속에서의 出世間化自利利他上求菩提下化衆生▲ 업의 개념 - 業, karma. 어원은 k? ‘하다’, 의도적으로 ‘하다’. 행위뿐 아니라 관련된 원인의 측면(思, cetan?, 의지)와 결과의 측면(영향력)을 포함하는 복합적 개념▲ 업설의 의미 - ? 인간의 자유의지(自業自得), ? 業과 報사이의 3세에 걸친 필연적 인과관계▲ 불교적관점의 윤리관은 善과 惡을 초월하므로 有漏的 시안에 대해 시비선악을 분별하여 한 입장만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 無我와 空의 경지에서 實相을 그대로 如法하게 판단, 반야의 공관을 지침으로 한 자비실현에 기여하는 방편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5. 분야별 요약문생명조작불교적 대전제연기존재의 생성소멸에 대한 관계적 법칙성, 모든 현상(諸法)의 사실성과 진리성공연기하는 존재들의 무실체성중도연기적 지혜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 행위입장견해근거반대배양액속의 배아도 생명체『위방가 주석서』, 『유가사지론』에 근거, 물질적현상의 적절한 조건이 형성되는 순간 정신적인 현상인 알라야식이 동시에 결합하여 생명체가 된다고 봄찬성생명체이나 난치병치료가 급배아도 생명체임은 맞으나 업에 대한 과보의 輕重으로 설명.착상 전 배아는 생명체가 아님태내오위설의 4주째인 가나(ghana) 단계여야 업보체로서의 업력을 발휘한다고 주장▲ 불교는 생명조작에 관해 다양한 입장을 지니고 있다. 어떤 입장이든 연기적 지혜와 중도적 자비행이라는 핵심적인 불교적 준거를 벗어나지 않아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임신중절(낙태)▲ 관점 - 생명체에 대한 불교적 입장은 생명이 시작되는 정(精, 정자)과 혈(血, 난자)과 식(識, 간다바) 세 조건의 상호의존성 위에서 전개된다. 불교에서는 ‘뭇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衆緣和合所生)’ 생명체는 수정되는 , 사실에 대한 올바른 사유인 자비정신에서 실천임대승불교보시와 방생의 실천안락사초기불교아라한의 불치병으로인한 자살만 허용대안 - 탐·진·치를 소멸시키는 운동, 자신의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호스피스 운동과 같은 것불교전반일반적 안락사는 불살생계를 범함사형제도▲ 불교적 관점 - 집행자가 다시 살인을 범해 악업을 짓게 되는, 잘못된 사회제도. 죄인이라하더라도 참회나 선행에 의해서 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업설임.▲ 대안 - 사회에서 격리시켜 악행과 업을 정화할 수 있게 가르치고, 선행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이끌어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도소교화활동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조직화,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계율과 불교윤리6장 실천불교윤리우리 사회에서 왜 윤리가 새삼 문제인가▲ 인간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윤리 -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규율 형태로 도덕(道德, moral) 윤리(倫理, ethics)는 관습이나 풍습 법과 구분하기 어려움.▲ 인간의 생존문제로 함몰되지 않는 보편적 의미와 가치를 향한 열망으로 선각자 등장▲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윤리의 현실적인 힘 상실▲ 한반도- 조선조에서 성리학에 기반을 둔 예의가 윤리적 지향의 핵심으로 선비문화 정착. 일제강점기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체제의 도입으로 급격히 훼손되었다. 최근 경쟁의 공정성(fairness)에 대한 관심을 출발로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물음과 회의에 실질적인 관심이 일고, 이중 다수가 종교에서 답을 찾고자 하지만 종교계마저도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윤리란 무엇이고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윤리란- 칸트(I. Kant) - 인간이 하늘로부터 나눠가진 선의지에만 근거해서 세울 수 있는 것- 벤담(J. Bentham), 밀(J. S. Mill)등 공리주의자 - 모두의 쾌락을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해야 하는 공리(公利)의 원칙▲ 윤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력과 성향 성품을 의미하는 덕의 두 차원을 지닌 개념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념라틴어에서 유래일상적 규범으로서의 성격과 실천을 강조▲ 서양적 관점의 상대주의적 경향성은 소크라테스에의해 이의가 제기되었고 다이모니온의 소리를 보편적 진리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플라톤에와서 이데아의 세계로 구체화 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God)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거나 이성에 근거한 칸트적 보편주의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간사회는 반드시 공동체를 규제하는 외적 규범(법, 관습, 도덕)이 있다. 이 도덕규범이 바로 일차적인 윤리이며, 다양한 학습과정을 거쳐 한 개인의 내면속에 가치관의 형태로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외부에 존재하는 도덕규범을 극복하고 자율적인 삶을 찾고자하는 것을 콜버그(L. Kohlberg)는 자율적 도덕성의 단계라고 불렀다.▲ 윤리적이어야 하는 이유- 樂의 지속과 苦의 벗어남을 추구, 삶의 의미와 가치 구현 → 현대 시민사회의 형성 → 시민윤리(경쟁의 공정성 justice, 에티켓)형성왜윤리적이어야하는가관점의견난제윤리적 이기주의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윤리적인 사람이 잘사는가?-윤리가 이익의 문제로 환원 가능?공리주의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일거라는 이기주의-윤리를 이익의 문제로 환원 가능?본질주의인간은 본래 윤리적인 존재- 현실적 설득력 떨어짐유교- 관계의 윤리불교- 지혜와 자비의 윤리윤리학의 기본 개념과 불교윤리의 만남윤리학의 기본 개념분석윤리학자도덕적 언어자체규범윤리학자행위의 선택기준응용윤리학자환경, 생명, 사회정의의 문제옳 음(right)내가 느끼는 것사실영역 표현 개념현실의 차원에 속함옳음도 느낀다는 ‘직관주의 윤리설’과 그게 가능하다는 ‘도덕감(moral sense)’이 있음.좋 음(goodness)느낌여부 무관가치평가적 개념이상과 당위의 영역▲ 자연론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 (위 두가지처럼 비슷한)다른 차원의 개념을 혼동가치와 사실의 얽힘아리스토텔레스 덕윤리공 자화엄철학대윤리
    인문/어학| 2013.03.11| 7페이지| 1,500원| 조회(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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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유의 녹채 해석과 감상문
    鹿柴(녹채)王維(왕유)空山不見人(공산불견인)빈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但聞人語響(단문인어향)다만 사람 소리만이 들려오네返景入深林(반경입심림)저녁 햇살 깊은 숲에 들어와復照靑苔上(부조청태상) 다시 푸른 이끼 위를 비추네◈ 작가 소개왕유(701-761, 字는 摩詰). 그는 위대한 詩人이었을 뿐 아니라, 논서·서예·음악 등 모든 방면에 정통한 예술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왕유는 21살에 進士로 급제하였고 음율에 정통해 大樂丞으로 임명되지만, 황제의 음악을 몰래 상연한 것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실의와 閑居의 생활을 하던 중 다행히 다시 복직하였으나, 정치적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장구령이 이임보의 모함으로 파면되자 낙담하였다. 이 때부터 隱居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꼬 監察御使란 직책을 받고 변방 凉州로 출사하였는데, 이때 여러 곳을 遊歷하며 변새시가 많이 지어졌다. 장안으로 돌아온 뒤에는 안녹산의 난에 휘말렸으나, 당시에 지은 시 에 담긴 충정과 당시 刑部侍郞이었던 동생의 간청으로 특별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은거하다가 다시 중용되어 集賢殿學士란 명예 직위를 받았고, 대략 이 시기에 왕유는 자신의 망천 별장을 사찰로 개조하도록 시주 청원하였고, 이후로는 계속 장안에서 생활하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61세의 나이로 동생 왕진과의 상봉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감상문과제를 받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인터넷 검색이었다. 시를 보면서 ‘왕유’라는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와는 다르게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고, 그러한 역경이 그를 진취적인 유학자에서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불자로 변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녹채(鹿柴). 단순히 푸른 색감을 나타내는가 했더니, 그것은 그가 장안에 있을 때 구입했던 망천의 별장 중 한 곳의 이름이었다. 어쩌면 시처럼 이 별장이 푸르러서 지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왕유는 이곳에서 詩友 裵迪과 함께 오언절구(五言絶句) 20수를 지어 《망천집 輞川集》에 실었는데, 20수 가운데 제4수가 녹채이다. 망천집은 아직 안녹산의 난 전으로 아직 그가 인생의 풍란을 맡기 전에 지어서인지 매우 감성적이다.고요하고 따스한 저녁 노을빛이 내려쬐이는데, 간혹 사람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들리긴 해도 눈 앞에는 온통 푸른 숲만 가득한 풍경이라니~! 생긱만해도 가슴이 뭉클하고 흐뭇하여 얼굴에 미소가 올라온다. 내 눈앞에 푸르른 그 숲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 하여 기분조차 몽롱할 지경이다. 만일 눈 앞에 푸르른 숲만 있었다면 외롭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따스한 햇살이 비추어 자칫 음침할 수 도 있었던 숲이 밝아졌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림으로서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주었다. 혼자있어도 혼자가 아닌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3.03.11| 2페이지| 1,0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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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사마천
    목차본문·······································································································································1저자································································································································1채택원인································································································································1내용································································································································1서평································································································································1참고문헌·······································································································································2미주·······································································································································2저자>>>>>>>>>>>>>>>>>>>>>>>>>>>>>>>>>>>>>>>>>>>명나라 때의 백과사전 삼재도화에 실린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모습사진출처: 네이버캐스트지식백과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한나라 초기시대 사람으로 아버지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자 그 유지를 받들어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사기’의 완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한 때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아 치욕스런 마음에 자살까지 생각했으나 ‘사기’의 완성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해 고난을 이겨내고 옥중에서까지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BC91년경 ‘사기’를 완성하였다. 사마천은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채택원인>>>>>>>>>>>>>>>>>>>>>>>>>>>>>>>>>>>>>>>>강원에 있을 때 고우영씨의 ‘십팔사략’이라는 만화책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궁형이라는 것은 죽기보다 참기 어려운 치욕이다. 그런데, 책 속의 사마천은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을 때, 죽음이 아닌 궁형을 택했다. 과연 그가 절실히 남기고 싶어 했던 역사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남아있어서 역사서적 논평이라는 이야기에 이 책이 생각났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간간히 언급되기도 하여 더욱 흥미를 유발시켰다. 사기는 현재 중국 최고의 역사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모범이 되고 있다. 사기 이후로 ‘한서’에서 ‘청사고’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를 기록하는 기본 체재를 확립하여 24史의 필두로 꼽힌다. 사실 사기는 역사서가 아닌 사마천 개인의 기록이었다. 사마천은 사기를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하였으나 후한시대부터 ‘사기’라고 불려왔다. 그 이유는 사기가 중국 전설 시대로부터 한(漢)나라 무제를 이르는 시대의 유일한 통사이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과거사의 서적이 유실되어 중국 고대시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남아있다. 또한 사기는 현실적인 역사관에 입각하여 쓰였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여 사기를 비판한 반고도 실록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또한 각 편이 끝날 때마다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짧은 평론이 실려 있어 당시의 역사가의 관점으로 본문을 이해하기 쉽도록 되어있다.내용>>>>>>>>>>>>>>>>>>>>>>>>>>>>>>>>>>>>>>>>>>>>>>>>>>>>>>>>>>>>>>>>>>>>>>>>>사기는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본기(本紀)는 역대 왕들의 연대기를 다룬다. 고대의 5제로부터 한무제에 이르기 까지 망라 한다. 기전체와 편년체와 차별되는 점은 편년체가 연도중심으로 기록 되는데 비해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재밌는 점은 매우 현실적인 역사관에 의해 기록되어 황제가 아니었던 항우나 여태후 같은 인물도 실질적인 권력자로 보았기 때문에 본기에 나열했다는 점이다. 또 본기에서 서술 중에 등장하는 별도의 중요인물은 주석을 달아 열전이나 세가에서 따로 다룬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분량을 줄이는 효과도 노리고 본문에 집중하면서 상세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를 배려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둘째, 표(表)는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발생 순서별로 정리하여 보여주는 연대표이다. 마치 현대의 ms엑셀이나 타임테이블형 그래프를 연상시키도록 되어있다. 시대별로 발생한 사건을 순차적으로 나열하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인물, 사건별로 주석을 달아 별도의 문서에서 상세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게 되어있다. ?셋째, 서(書)는 역대의 정책과 제도, 문물의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루었다. 당대와 이전시대의 사회모습과 풍토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당시는 시대의 전환기였다.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시킨 진(秦) 제국은 강권통치에 바탕을 둔 급격한 통일책이 실패로 돌아가며 무너졌다. 고조 유방은 진 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파란을 피하고 안정에 치중했다. 무위를 중시하는 황노사상이 전한시대 초기를 특징짓는 이념이었다. 사마천은 그러한 시대적 변화와 과거로부터 정책과 제도의 흐름을 기록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전망하였다. ?넷째, 세가(世家)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제후들에 대해 다루었다. 다만 한초기의 개국 공신이었던 소하, 조삼, 장량, 진평, 주발 등을 세가에 포함시킨 것과 공자, 진섭, 외척이 세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제후들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을 포함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본기, 세가, 열전의 인물 배치는 당대의 유가사상에 입각한 역사학자들의 관점에서는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마지막 다섯째 열전(列傳)은 사기의 백미로도 꼽힌다. 열전은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 세력, 지역 등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 백이열전부터 시작하여 손자, 노자, 한비자에 백기, 악의, 몽념 같은 장군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자객들을 망라한 자객열전도 있다. 흉노, 남월, 동월 같은 외국에 대한 열전에 우리나라에 대한 조선열전도 있다. 마지막으로 태사공자서로 본인에 대한 열전으로 마무리 하였다. 사기에는 제자백가를 두루 다루려는 학문적 균형 감각이 배어 있다. 즉 사마천은 황로 사상에 무게를 두고, 개방적인 사고로 자객, 광대, 점술가, 의사와 상인 등 당시로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도 과감하게 열전에서 다루었는데, 이는 당시 유가적 사회질서를 세우려 했던 통치권자들에겐 못마땅했을 것이다. 예컨대 사마천은 자객 열전, 골계 열전, 일자 열전, 귀책 열전에서 비정통파나 하류문화 등 당시 사회의 세세한 부분까지 담아내려고 애썼다. 한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자신과 아버지에 대해 비판한 것에 노여워하여 폐기하도록 명했는데 이 때문에 사기는 전한시대부터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세기를 보내야했다. 그러나 사기는 당나라때 부터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되었다.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남)’이라고 평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사기 애호가로서 그것을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마천의 유려한 필체로 사기는 역사서로 뿐만 아니라 문학소설과도 같이 읽히는 것이다.
    교육학| 2013.03.11| 7페이지| 1,000원| 조회(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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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의 개혁군주 정조
    1. 시작글·····························································12. 생애 및 주요활동··············································2가. 세손 시절2나. 동궁 시절 다. 대리 청정3라. 즉위 직후 마. 홍국영 세도4바. 사도세자 복권 노력5사. 노론, 남인, 소론 중용과 친위세력 구성5아. 노론 벽파 숙정작업6자. 홍국영 숙청과 친정 체제 구축7차. 학문적 치적 카. 정치 문제와 천주교8타. 왕권 강화책9파. 기타 정책 하. 1차 영남만인소10거. 2차 영남만인소11너. 수원 화성 축성12더. 최후 러. 능묘133. 평론······························································14가. 정치 -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시키다14나. 경제 ? 신해통공을 통한 대기업의 독점규제14다. 사회/문화 - 규장각의 설치와 문예부흥14라. 성격 - 어찰첩을 통해 본 정조154. 마침글···························································16참고문헌 171. 시작글언젠가 버스에서 흘러나오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조선 22대 임금이었던 정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방송의 주제는 ‘분노’였다. 인간이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고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에 대해 다양한 예시가 나오던 도중, 정조 임금이 분노를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정조는 나이 11세에 장헌세자, 일명 사도세자로 유명한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던 어린 정조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또한 세손 책봉 이후에도 반대 세력에 의해 여러 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오랜 역경을 견디며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수십 년간 쌓여온 분노를 지닌 채 최고 권력자인 왕이 되었는데 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아마도 모두가 벌벌 떠종통은 비록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를 잇게 되었으나, 사도세자 또한 국왕의 생부로서 존중해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어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 효장대왕으로 추숭하고, 양어머니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상하였으나, 이어 청나라로부터 양부 효장세자에게 내려진 각민왕이라는 시호를 받아들였다. 물론 청나라에서 진종의 시호를 보낼 때 직접 맞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으나, 후일 정조에 대한 사후기록에서 정조는 이 당시의 진종 추숭을 그다지 마땅치 않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후에도 그는 원릉과 함께 사도세자의 묘역인 화성현륭원에는 자주 방문해도 진종의 능침인 파주군 영릉에는 별로 방문하지 않는다.즉위 초 세손 시절 세운 개유와를 본따 규장각)을 설립한다. 규장각의 각신에는 과거 시험 급제자가 아닌 이들도 선발되었고, 서자와 중인 계층에서도 각신이 선발되었다. 이후 규장각은 기존의 노론계열 훈신과 척신들 위주로 채용된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을 대신할 그의 친위 문신세력 양성소가 된다.마. 홍국영 세도정조가 그가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것은 노론대신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갑사 전흥문 등을 시켜 자객을 들여보냈고, 사도세자를 탄핵, 사형에 이르게 한 한사람인 홍계희의 8촌동생 홍계능과 홍계희의 조카 홍상간 등 홍계희 일족이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 하였으며,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 일가가 그를 제거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 또한 정후겸과 그의 수하들 역시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된다. 정조는 홍국영을 각별히 신임하였는데 그를 시켜 이들 외척, 벽파 세력 제거에 착수한다.즉위 초반 그는 세손 시절 세손궁 막료인 홍국영과, 노론 중 사도세자를 지지했던 유척기의 문하생들 그리고 자신의 세손 시절 스승인 김종수를 등용한다. 김종수는 노론이었음에도 원칙론자였고 당론에 반대하고 세손을 지지하였다. 세손 시절 스승이던 김종수는 즉위 초 그에게 아버지이면서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라고 충고한다. 아버지이면서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 숙청과 친정 체제 구축)홍국영에게 숙위소 대장과 승정원도승지를 겸하게 하고 병권까지 부여하였으나 그의 권력 농단이 강해지자 원칙론자인 김종수 등을 통해 비판하게 한다. 홍국영은 1778년 음력 6월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인 후 왕실의 외척 자격으로 권력을 행사하였고, 왕실 계승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1779년음력 5월 원빈 홍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강화도에 이배된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이게 한다. 노론 대신들은 왕의 나이가 젊음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은 상계군의 양자 입양을 강행했고, 상계군 담은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1780년 원빈 홍씨가 효의왕후의 손에 죽었다고 의심한 홍국영이 나인을 시켜 효의왕후전 수라간과 주변에 독을 풀어놓은 것이 발각되면서 그를 제거한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은퇴 권고로 흑두봉조하를 만들었다가 뒤에 방출시킨다. 이후 그는 김종수와 서명응, 채제공 등을 등용하여 친정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홍국영은 숙청되었으나 왕이 특별히 신임하는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남기게 된다.다른 한편으로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文臣)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해서 평가하였다. 한편으로는 각 당의 원칙론자들을 등용하면서 노론의 원칙주의자도 포섭, 송시열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고 노론의 강경파 중 청렴한 인물인 김종수 등을 신임하기도 했고, 그와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야의 산림학자인 송덕상, 송능상, 김종수의 형 김종후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정조는 개묻혀있던 정치적인 문제들을 언급한 내용으로 기사환국(1689) 이후 영남 남인의 형편과 무신란 당시 영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1792년 윤 4월 영남 선비들은 남인과 가까웠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만인소가 전달되는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전달하려면 관직에 있어야 되거나 근기지역 양반이어야 전달될 확률이 유력하였다. 또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했다. 그러나 상소의 소두 이우는 아버지가 참봉과 교관을 지낸 인물로, 아무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상소가 정조에게 전달되면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한다는 전례가 깨지게 된다.상소의 내용은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반란군과 투쟁하였으며, 반란군은 소론과 남인 과격파이고 영남과는 무관한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점을 전제한 뒤, 영남의 사림들이 임오의리 문제(사도세자 아사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나 노론의 탄압으로 비밀리에 간직하던 중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정조를 여악과 향락을 찾으러 갔다는 유성한의 흉소와 윤구종이 우리 노론은 경종에게는 신하의 의리가 없다는 망언을 전해 듣고 상경했으머, 사도세자의 평소 현명한 언행과 학식으로 보아 정신이상자일 리가 없고 세자와 영조와의 원만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벽파의 반역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이간질당하고 끝내 원통히 죽었으니 마땅히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역도들을 찾아내 처단, 처벌하여야 할 것이며, 임오의리문제는 부자 또는 조손간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는 사안이지만 영조가 금등 문서를 남긴 것처럼 그것은 충역을 가리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차원 높은 효와 의리를 찾을 수 있으며,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잊지 않고 권념해 주시고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시니 영남의 인들은 독과점으로 폭리를 취하고 노론 권세가와 결탁하여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노론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정조는 남의 눈치 안보고 강력한 규제를 통해 중소상인의 숨통을 틀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정치와 경제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점은 현대에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시절은 다른 건 제처 두고라도 경제는 높이 평가된다. 중앙의 권력이 강력하던 시절이라 재벌 대기업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일까. 반면에 요즘은 대기업만 배려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거래의 징벌적 배상제도’가 국정과제에서 슬그머니 빠지는 것 말이다. 정부가 대기업 눈치를 볼 정도면 중앙의 권력이 얼마나 약화되었고 노론 권세가들이 배를 불리고 있는지 알만하다. 어쨌든 신해통공으로 중소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살아났으나 반면 그동안 이익을 독점하던 큰상인과 권세가들의 반발을 억제했기 때문에 정조 사후 세도정치와 함께 양날의 검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다. 사회/문화 ? 개혁의 발판 수원화성정조가 르네상스의 정조, 문예부흥의 왕이라고 불리는 일면에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술과 정책의 발전을 실현한 것이 있다. 세손 때의 스승 김종서로부터 임금과 동시에 스승이 되라고 사사받은 정조는 학문에 대단히 조예가 깊었다. 손수 신하들을 시험을 치며 경연에 참가하여 토론의 주체가 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규장각 인재 육성을 추진하여 이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한 검서관 제도를 두어 서얼신분의 학자들을 등용하였는데, 소외 신분의 고른 등용은 세손시절 정조 자신이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출신적 차별에 대한 반적인 행동이라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밖에도 지방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는데 이는 정국이 서울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을 타파하기 위한 일종의 지방분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서울대 출신만 뽑지 않고 지방대 출신도 고루 등용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공권력은다.
    교육학| 2013.03.11| 18페이지| 1,500원| 조회(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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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팔만대장경과 대장경의 역사와 종류
    목 차1.머리말·······························································································12.대장경이란························································································2가.경························································································2나.율························································································2다.논························································································23.대장경의 역사····················································································3가.최초의 대장경········································································3나.2차적 자료········································································44.세계의 대장경····················································································5가.팔리어삼장········································································5나.중국의 대장경········································································6다.일본의 대장경··과 계급을 초월해서 쓰던 언어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묻어나오는 부처님의 무량한 자비가 오늘날 공부하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가. 최초의 대장경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많은 곳이다. 그 중에 문법 체계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팔리어(Pali)와 범어(梵語, Sanskrit)로이다. 그리고 이 두 언어로서 시기적으로 가장먼저 대장경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다른 대장경들은 이 대장경을 토대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 두 대장경을 1차 자료라고 한다.1) 팔리(Pali)대장경) : 팔리어는 본래 서인도의 방언으로 부처님 입멸 후에 초기 교단이 서인도로 확장됨에 따라 성전의 언어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 삼장의 원어인 티피타카(Tipitaka)는 ‘세개의 광주리’란 뜻이다. 이로 미루어, 논장의 편집이 이루어졌던 제3결집 때 완비되었다고 본다. 이렇듯 삼장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분량이 다른 대장경의 1/10에 불과한 이유는 상좌부(上座部)에 속하는 경전으로서 자파(自派)의 전승을 중요시 여겨서 대승경전과 주석서, 사서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리어대장경은 현재 스리랑카(Sri Lanka), 타이(Thailand), 미얀마(Myanmar) 등 남방에 전해졌다. 남방으로 전해진다고 해서 남전(南傳)장경이라고도 한다.2) 범어장경(梵語藏經)) : 팔리어 경전에 이어 범어 경전이 이루어진 것은 인도 카니슈카왕 때 카슈밀 지방에서였다. 불교경전편찬회의에서 범어를 불교 성전어로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어 범본(梵本) 경전을 편찬한 것이다. 범어는 팔리어와는 달리 인도의 상류층이 사용하던 언어이다. 범어대장경은 극히 일부분의 단편들만이 남아있는데, 팔천송반야심경, 화엄경중 일부, 능가경과 법화경, 비밀대장경, 중관, 유식 등 일부 논서 만이 남아있다. 이 범본 경전이 중국으로 전해져 나중에 한역 경전의 번역 시에 대본이 된다.나. 2차적 자료중국은 한무제(漢武帝) 이래 여러 차례 인도와 문화교류를 하여 오다가를 대장경 혹은 일체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2세기 중엽부터 불전 번역이 시작되어 8세기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나 불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불전 자체의 산일, 번역자나 번역 연대의 불명료, 위경의 출현 등이다. 이같은 문제 때문에 한역 불전을 수집하여 정리할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으며, 이를 위해 작성된 것이 경록(經錄) 이라고 불리는 목록이다. 본격적인 목록으로서 유명한 최조의 것은 전진(前秦)의 도안(道安) 스님이 364년에 편찬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이지만, 이것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전체를 8록(錄)으로 분류하여 639부 886권을 수록하였음이 알려져 있다. 이후 계속 작성된 목록들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730년에 지승(智昇) 스님이 편찬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이다. 여러 목록들이 작성되면서 불전의 분류도 일정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는 개원석교론의 입장록(入藏錄)이라는 분류가 특히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이 분류에서는 대장경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으로 위경(僞經)과 의경(疑經)을 그 기준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개원석교록'에서는 1,076부 5,048권의 일체경을 대승경, 대승율, 대승론, 소승경, 소승율, 소승론, 성현집(聖賢集) 이라는 7종으로 분류하였으며, 성현집의 108부 541권 중에 인도 논사들의 전기 종류나 중국인의 저작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된 중국인의 저작은 주로 전기, 여행기, 목록 등으로 그 수는 많지 않다. 이후 빠진 것이 보충되고 새로 번역된 것이 증보되어 한역 대장경은 점점 양적으로 확대 되었으며, 중구인의 저작도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이때까지의 대장경은 거의가 사본이어서 전화(戰禍)나 재해 등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 때문에 영구 보존을 위해 돌이나 목판에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이 간행은 송나라 태조의 발원으로 착수되었다가 12년에 걸쳐 태종 때(971년)에 완성된 촉판(蜀版) 대장경이 최초이다.기 초에 고유의 문자를 제정했던 티베트에서는 779년부터 역경 사업을 착수하였는데, 824년에는 티베트의 불전 목록으로서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덴카르마(Ldan-dkar-ma) 목록’)이 작성되었다. 여기서는 당시까지 번역되었거나 번역중인 대승과 소승 및 현교(顯敎)과 밀교의 모든 경전과 논서의 제목을 23항 734부로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분류 방식은 현존하는 티베트대장경이나 한역대장경과는 현저히 다르며, 티베트와 중국의 현존하는 번역 문헌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문헌명도 기록되어 있다. 티베트에서는 843년에 시작된 왕조의 분열에 의해 역경이 중단되었으나, 11세기 이후 밀교 관계의 경전과 논서들이 번역되면서 적어도 네 차례의 대장경 간행이 있었다. 티베트대장경은 몽고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리하여 1310년에는 30여 명의 학자가 동원되어 티베트어로부터 몽고어로 번역된 대장경이 간행된 바 있고, 또한 1772년부터는 약 20년에 걸쳐 만주어로도 번역된 대장경이 완간된 적도 있다. 티베트대장경이 성립된 데에는 ‘덴카르마 목록’과 같은 목록집 이외에도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과 같은 번역 용어집이 크게 공헌했다. 후대의 번역에서는 ‘번역명의집’에 의해 번역이 개선되거나 번역어가 통일되었다. 현재의 티베트 대장경은 칸규르(Bkah-hgyur, 甘殊爾))와 텐규르(Bstan-hgyur, 丹殊爾))로 독특하게 양분되어 있으며, 수록되어 있는 경전의 수도 여러 대장경 중에서는 가장 많다. 칸규르를 불설부(佛說部), 텐규르를 논소부(論疏部)라고 한다. 여기에 포함된 문헌들의 배열은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742년의 델게(Sde-dge)판을 기준으로 하면 칸규르는 100함 1,108부, 텐규르는 213함 3,461부로 구성되어 있다. 티베트대장경이 처음으로 목판에 의해 인쇄된 것은 13세기 무렵인데, 이것을 ‘나르탕(Snar-than) 고판(古版)’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후 1410년과 1602년에도 다시 판각되었다. 이것이 1730년에는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그림 대장경을 보관하는 서고. 과학적으로 채광과 통풍을 조절하여 7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경판을 뒤틀림 없이 보존한다고 한다.사진출처 장경각 홈페이지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한다.나. 특징해인사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체재와 내용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의 순서대로 배열되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특히 높게 평가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 때문이다. 첫째,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자료이며, 또 없어져 버린 거란판대장경(契丹版大藏經)의 내용도 짐작할 수 있다. 그 예로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1권은 어느 대장경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오직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등 주요한 전적(典籍)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달리다
    인문/어학| 2013.03.11| 17페이지| 1,000원| 조회(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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