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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양전지와 관련된 산업공학도의 진출
    태양전지와 관련된 산업공학의 진출 경로태양전지의 소개태양 전지또는 광전지는 태양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 장치를 말한다. PN 접합면을 가지는 반도체 접합 영역에 금지대폭보다 큰 에너지의 빛이 조사되면 전자와 정공이 발생하여 접합영역에 형성된 내부전장이 전자는 N형 반도체로, 정공은 P형 반도체로 이동시켜 기전력이 발생한다. N형 반도체, P형 반도체 각각 부착된 전극이 부극과 정극이 되어 직류전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방법으로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하여 그 발전력과 효율을 이용한 실생활의 접합 , 즉 자연에너지의 사용으로 가져온 전력사용의 예가 태양 전지를 일컫는다.태양전지와 관련된 중요 기술태양전지와 관련된 발전 기술 , 발전 직업은 결국 태양전지의 핵심기술로써 정해질 것이다. 그 핵심기술과 그에 속하는 관련 부속 기술들이 아마 태양전지의 발전 방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양전지 , 태양광 핵심기술은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상업적 실리콘 박막 , 화합물 반도체 , PN집합면 , 모듈 , PCS , 인버터 이러한 방향으로 그 진출을 꾀할 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부속 기술쪽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실리콘 박막 , 화합물 반도체 : 결정질 실리콘이라 부르며 표면의 빛 에너지의 흡수를 통한 친환경 적이고 경제적인 고효율을 이뤄내는 중요 장비라고 할수 있다.- PN집합면 : 빛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교환하기 위한 초기단계의 핵심기술이며 전력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듈 : 태양전지의 최소단위를 셀이라고 한다. 접속된 다수의 셀을 혹독한 환경에서 보호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복수의 셀을 패키지로 한 것을 모듈이라 한다.- PCS , 인버터 : 태양광발전용 전력변환장치로써 받아드리는 모든 직류 전기를 교류전기로 변환시켜 실생활의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단계의 중요 부품 , 기술을 의미한다.- 기타 중요 기술 및 관련 기술산업공학의 진출 한계현실적으로 산업공학은 크게 품질 , 물류 , 생산 , 안전과 관련된 기술들을 발전시켜 이와 접목한 관련 진출 경로를 추구 할 수는 있겠지만 제조 및 연구와 관련된 화합물, 기계장치 개발 ,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는 거리가 조금 먼 듯하다. 핵심기술인 태양전지(박막전지 등)인 셀의 소재 개발과 설계, 태양전지 모듈 연구를 비롯하여 관련 생산설비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 또한 생산된 전력을 전환하는 인버터와 저장하는 축전지 등의 전기장치를 연구하고 개발하는것 그밖에 원자재 개선 및 다른 신재생에너지와의 접목을 통해 태양광모듈의 출력 효율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대부분 재료공학, 화학공학, 전기공학, 전자공학, 물리학 등이 맡고 있기 때문이다.우리 산업공학의 태양에너지 관련 경로를 두고 봤을 때 분명 그 한계는 존재한다. 쉽게 애기하자면 핵심기술개발과 발전에 산업공학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키기에는 큰 한계가 요구되지만 그러한 발전이 있기 위한 초기, 중간, 마지막 단계의 검사 및 생산, 제조 그리고 기타 방면에는 그 발전이 중점적이고 핵심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여겨진다.태양에너지 관련 산업공학의 진출 경로 , 발전 방향 , 관련 업종1. 일반전 생산 , 품질 , 물류 관련- 태양광 생산 및 품질관리자태양광 전지, 모듈 등 관련 소재 및 부품 생산의 전 과정을 관리, 감독하며, 제품규격의 표준화 달성 및 품질 개선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지도, 감독 업무를 수행한다. 태양광과 핵심 기술 및 부속품을 생산하는 그 초기 단계에는 분명 산업 공학은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생산 단계에 그 제조부문에 큰 필요도가 요구된다. 또한 부품의 생산과 완제품의 품질관리는 태양전지의 활성화 부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이며 그 관리와 개선에 적합한 산업공학은 이러한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된다.태양전지, 태양광모듈 , 부속관련품 생산, 제조업체에서 근무한다.- 태양광 물류 관리자태양광은 신재생에너지 관련 부분으로써 그 기술과 제품은 향후 미래 사회에 고갈된 화학에너지를 대체하기 위해서 가장 큰 수요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그 발전과 개발에 가능성이 다부지고 현재의 그 기술과 제품의 희귀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제품과 기술관련 부문의 있어서의 재고관리나 운반 물류 관리의 역할은 중요해 질 것이다.- 안전관리자에너지를 이용한 기술과 산업에는 분명 많은 위험요소가 발생하게 되있다. 안전관련 산업은 인류의 존재와 기업의 유지가 가능하다면 그의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한 꼭 필요한 필수요소이다. 전기를 활용하는 기술과 업체에서는 그에 대한 안전관리는 대형사고 , 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안전관리는 특히 더 필요 요구 된다. 전기안전관리 , 운전유지 및 유지관리(비) 등 안전관리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태양광 생산기계 조작원태양광발전을 위한 구성품인 태양전지, 태양 모듈 등 관련소재 및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 태양광 생산 장비를 조작하며 생산된 제품의 불량 여부를 검사한다.태양광 생산기계는 기존의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기계 혹은 굉장히 복잡한 제조 단계의 공장기계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기계의 관리와 기계 조작원으로써의 발전도 기대된다.2. 새로운 도전과 발전(신설직업 및 자격증)- 발전 설비 기사태양광발전소나 모든 건물 및 시설 등의 태양광발전시스템의 설계, 인허가 및 시공·작동상태를 감리하고,태양광발전설비의 시공, 감독 및 효율적 운영을 위한유지보수·안전관리 업무 등을 수행하는 직무설계, 시공, 운영, 유지보수, 안전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발전설비산업기사(태양광)태양광발전소나 모든 건물 및 시설 등의 태양광발전시스템의 설계, 인허가 및 시공·작동상태를 감리하고,태양광발전설비의 시공, 감독 및 효율적 운영을 위한 유지보수·안전관리 업무 등에 대한 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직무재생에너지 중 태양광 분야와 관련된 기술기초이론 지식 또는 숙련 기능을 바탕으로 복합적인 기초기술 및 기능 업무 수행 할 수 있다.3. 기타 관련 직종- 태양광 공정 개선자태양전지의 발전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그 발전의 있어서의 손실은 분명 현재의 태양광 발전의 큰 영향과 과제로써 남아있을 것이다. 태양전지, 태양광은 빛 에너지를 전기에서지로 변환 하여 그 효율을 증대시키는데 목적이 있는데 그 부분에서의 손실이 이러나기 때문에 그 손실을 줄이는 방안 과 대책이 요구되기도 한다. 태양전지의 변환 효율을 낮추는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손실들을 열거할 수 있는데, 투과 손실, 양자 손실, 전자-정공의 재결합 손실, 불완전한 P-N 접합에 의한 손실, 태양 전지 표면의 반사손실, 전류 전압 특성에 기인하는 손실 등이다. 변환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손실들이 태양전지의 어느 부분에서 일어나는지 조사하여, 태양전지의 구조설계와 공정개선을 통 해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러한 손실의 최소화는 분명 에너지 효율의 증대를 가져옴으로써 경제적, 친환경적으로 향후 미래에너지, 신재생에너지의 발전과 활용성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그 공정 자체의 개선으로써 그 손실을 막는 분야의 산업공학자들의 공정개선이 크게 필요 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학/기술| 2016.04.29| 5페이지| 1,000원| 조회(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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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사 - 인천상륙작전 평가A좋아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서 개시한 상륙작전.1. 인천상륙작전의 배경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9월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전개한 작전으로서, 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된 유엔 해군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을 인천으로 상륙시킨 상륙작전이다.이 작전에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제90공격부대는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 인천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당일 월미도와 인천시가를, 다음날에는 인천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서울로 진격할 발판을 구축한 다음 미 제10군단장에게 인계하였다.인천상륙작전은 7월 첫주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와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맥아더 장군의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트(Blue Hearts)라는 암호명칭이 부여되었다. 연구된 상륙작전의 개략적인 개념은, 남부전선에서는 미 제24, 제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고 이와 병행해서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7월 4일 맥아더 장군 참석하에 극동군사령부에서 가진 이에 관한 첫 작전회의에서, 공격부대는 해병 1개 연대전투단 외에 육군으로서는 주일(駐日) 미 제1기병사단을 운용하기로 논의하였고, 상륙일자는 합동작전으로서 준비과정을 고려하여 7월 22일로 정하였다. 이에 미 해병기지에서는 7월 7일 해병 제1사단 예하 제5연대를 주축으로 제1임시해병여단을 창설하고 제1기병사단이 훈련에 들어가는 등 지상군의 상륙준비가 것이 시급하게 되어 제1기병사단도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북한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블루하트계획은 취소되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선상황이 악화될수록 적의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상륙지역으로 인천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연구를 재개하게된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해안지역을 상륙 대상지역으로 검토하고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이름 아래 인천상륙계획(100-B),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D) 등 3개 안을 작성하여 그 개략계획을 7월 23일 미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모부에 회람하였다. 이중에서 인천을 상륙지역으로 하는 계획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이 계획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이동중에 있는 미 제1임시해병여단과 미국에서 일본으로 출발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미 제2보병사단을 상륙공격부대로 운용하고 이들 부대의 상륙과 동시에 지상군이 남에서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작전개념으로 되어 있었다.2. 인천상륙작전 개요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장군의 지휘아래 국제연합군(UN)과 국군이 합동으로 1950년 9월 15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실시한 합동 군사작전을 말한다. 이 작전은 인천과 수원일대를 연합군이 장악함으로써 서울 수복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인민군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함은 물론 적의 군 지휘 및 통신체제를 파괴함으로서 인천과 낙동강 전선 사이에 배치된 인민군의 고립 섬멸을 목적으로 했다.조선인민군은 1950년 6.25전쟁 시작과 함께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과 한국군의 필사적인 방어 노력으로 인해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군(UN)과 국군은 수세에 몰려있던 낙동강 전선을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 1950년 9월 15일 7만 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국 되찾는데 성공했다.3. 인천상륙작전의 진행 과정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할 때 이미 계획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한강전선을 직접 돌아보면서 자신의 참모장인 알몬드 장군에게 상륙작전 계획 수립을 지시했고, 그 결과 합동전략기획단(JSPOG : Joint Strategic Plans and Operations Group)이 설치되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1950년 7월 22일 일본주둔 미군 제1기병사단의 인천 상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Blue Heart” 작전을 수립하였으나, 1950년 8월 12일 맥아더장군은 인천을 상륙작전 지점으로 결정하고, 인천상륙작전 실행을 위한 주력 부대로 미군 제 10군단을 일본에서 창설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공세를 펼치게 될 이 작전의 이름을 크로마이트(Chromite)라 명명했다.맥아더가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최종 낙점한데는 낙동강 전선에 집중된 인민군의 전력 분산효과, 병참선 차단 및 군 지휘체계와 통신체제 파괴를 통한 인민군의 전력 약화 추구, 수도 서울 수복 시 적에게 가할 심리적 타격 등을 고려한데 따른 것이다.미 합동참모본부는 긴급회의 석상에서도 계속해서 맥아더의 인천상륙 계획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출했다. 특히 미 해군참모총장 셔만 제독은 “인천은 평균 간만의 차이가 20.7피트로 세계에서 가장 심한 곳 중의 하나다.따라서 만조 시간으로부터 2시간 후에는 상륙정들이 모조리 인천항의 진흙 속에 빠져 해안에 배치된 인민군의 각종 포화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상륙해안의 접근수로를 감시, 제어하는 월미도를 사전에 제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전 늦게 월미도의 저항을 무력화시킨다 해도 오후의 만조시간을 고려한다면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야습에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에 충분한 보급을 추진하기 위한 가용시간은 2시간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상륙작전 지점으로 인천의 부적절함을 역설했다.이와 더불어 미 육군참모총장인 콜린스 장군도 또한 “인천이 작에도 불구하고, 45분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이들을 설득하고 인천을 상륙작전 지점으로 최종 확정하게 된다. 맥아더는 이때 인천 상륙의 위험성을 자인하면서도 오히려 이런 위험성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적의 허를 찔러 기습 효과를 강화할 수 있고, 작전 성공가능성은 높지만 작전 효과가 적은 군산상륙보다 적의 포위섬멸을 통한 전세 역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인천상륙작전을 끝까지 관철시켰다.4. 인천상륙작전의 결과인천상륙작전 수행을 위해 잠정 편성된 제7합동기동부대는 9월 9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수행 명령에 따라 제7함대 사령관이 9월 11일 0시를 기해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상륙 준비를 위해 편성된 병력이 9월 10일 각지에 집결되었는데, 미 해병대 제 1사단은 고베에, 미 육군 제 7사단은 요코하마에 집결하였으며, 미 제 5해병연대와 국군 제 17연대 및 국군 해병대는 부산에, 대부분의 호위선박과 함포 사격지원전대, 기함은 사세보에 집결하였다. 동원된 함정의 총 숫자 약 270척, 병력은 7만여 명에 달했다.또한 합동기동부대가 편성되기 이전에 선발부대 작전으로서 목표지점에 대한 공중폭격 및 기만작전과 양동작전이 사전에 시행되었다. 상륙지역의 고립을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9월 4일부터 10일까지 함재기가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50km이내 지역의 교통로 차단을 위한 폭격이 실시한데 이어, 양동작전 수행을 원산에도 동일한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해병대 항공기도 9월 10일 이후에만 65회의 인천 맹폭격을 실시하였다. 9월 12일에는 미 육군과 영국 해병대가 기만작전 및 양동작전의 목적으로 군산 상륙기습을 감행하였으며,9월 13일에는 동해안 삼척과 서해안 진남포에 대하여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그리고 목표지점에 대한 선견부대 작전으로 9월 15일의 본 상륙에 앞서 9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인천과 월미도의 사전제압을 위해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을 동원한 집중적인 함포사격 및 항공폭격을 가하였다.13일 10시경에 터 순양함들이 인민군 포대 사정권 밖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포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항공기로 월미도를 공격하였다.이후 16시 10분에 다시 30분간 포격을 가한 후 함대는 수로에서 철수하였다. 익일14일엔 11시경 순양함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항공기를 발진시켜 공격하였고, 13시경 구축함도 포문을 열어 포격을 가한 뒤 철수하였다.인천상륙작전은 서울 수복을 포함하면 3단계 작전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가운데 인천상륙 돌격은 2단계로 시행되었다. 지상군 상륙작전의 세부 계획에 따르면, 미 제 5해병연대 3대대(한국군 해병대 1개 중대 포함)가 9월 15일 오전 6시 30분 월미도 ’Green Beach' 지점, 미 제 5해병연대 주력부대(한국군 해병대 제 3대대 포함)와 미 제 1해병연대는 오후 5시 30분 각각 인천북방 ‘Red Beach'지점과 인천 남방 ’Blue Beach' 지점에 상륙하게 되어 있었다.이와 더불어 ‘Red Beach'로 들어간 한국군 해병대는 인천 시내에서 인민군 시가 소탕전을 담당하며, 미 제 1해병사단은 교두보 확보 후 김포에서 서울로 진격하고, 후속 상륙한 한국군 제 17연대와 미 제 7사단 주력 부대는 서울 남쪽 방면을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전력은 수원으로 남진하여 서울 이남에 위치한 적의 퇴로 차단임무를 부여 받았다.지상군의 인천상륙작전의 1단계는 월미도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9월 15일 5시를 기하여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고, 만조시간인 6시 30분경 함포사격 및 항공폭격의 엄호를 받으며 한국군 해병대 1개 중대를 포함한 미 제 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량과 함께 ‘Green Beach’에 상륙, 07시 50분에 소월미도를 포함한 도서일대를 완전 장악하고 소탕전을 실시하였다.지상군의 2단계 작전은 인천반도를 확보하기 위한 본격적인 상륙이었다. 오후 만조시간인 17시 30분경 한국군 해병대 제 3대대가 포함된 미 제 5해병연대가 ‘Red Beach’로 상륙하여 22분 만에 묘지고지를 점령한데 이어 20시에 관측고지를 접수하여 교두보를 다.
    사회과학| 2016.04.29| 8페이지| 1,000원| 조회(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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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레문화에 대해 평가C아쉬워요
    레포트 - 장례문화목차Ⅰ.서론Ⅱ.우리나라의 장례문화1. 장례문화의 변천과정2. 다른 나라의 장례문화Ⅲ.결론모든 생명체들은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는 자유로운 생명체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고인에게는 이승에서의 마지막으로 가는 길일 것이고, 고인을 보내는 산자의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믿음 일 것이다.나는 살면서 딱 한번 장례식장에 갔었다. 고모부가 한분 계셨는데 위암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돌아가신 거였다. 나는 학원가는 길에 엄마의 전화를 받고 장례식장에 갔었다. 처음 가보는 장례식장은 침통함 뿐이었다. 엄마와 외숙모들은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계셨고 아빠는 조문객들은 맞이하고 계셨다. 나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엄마를 도와 음식을 나르다 집에 간 기억 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장례에 대한 하나 뿐인 기억이다.옛날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고 장례가 끝나면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나 그 근처에 묻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제사를 지내러 할머니 댁에 가면 집 뒤편에 무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장례는 어디서부터 생겨났고 어떻게 그 형태가 발달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장례 문화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우리나라의 죽음에 대한 의미는 전통적인 무속 신앙에서는 사람의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단지 영혼이 몸에서 떠나는 유체이탈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을 안식처로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죽은 사람의 시신 매장과 장례 절차를 잘 행하면, 조상의 영혼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다.이러한 죽음의 의미에 맞춰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죽음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고 특히 죽은 자의 마지막 떠나는 과정인 장례의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좋은 자리에 매장하여 후손 대대로 묘지를 관리하는 관습이 있다.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과 조선 왕릉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상장례 문화를 계승해 오고 있다. 상장례는 사람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는 일체의 의식으로 임종에서 염습, 치장, 대소상, 복제까지의 모든 의식절차를 말한다. 이런 절차는 지역, 가문, 종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돌아가신 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오랜 옛날 부여에서는 주군이 죽으면 그 신봉자까지도 묘역에 동시에 매장했던 순장제도가 있었고, 고구려 때는 늙고 병든 사람을 산채로 광에 가두었다가 죽으면 매장했던 고려장이 있었다. 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후부터는 불교식에 따라 100일 탈상 제도가 있었고, 사회적 신분에 따라 장례 절차가 달라지기도 했다. 고려 말기에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례가 도입되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상례와 제례의 의식절차가 유교식으로 제도화 되었다. 이렇게 장례문화가 각 시대마다 있어서 나는 각 시대별 전통 장례문화를 찾아 간단하게 요약해 보았다.삼국시대 이전19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분묘 유적은 매우 귀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다양한 형태의 장법이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신석기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일정한 크기의 흙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 부장품을 함께 묻어 죽은 뒤의 생활에도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자손들은 조상의 영혼에게 보호를 받는다고 믿은 것이다. 그 후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지석묘와 고인돌이라 불리는 분묘가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가장 일반적인 묘지 형태인 토장 풍습과 일종의 공동묘지 체제를 엿 볼 수 있다.삼국시대1)고구려와 백제초기에는 돌무지무덤(석총)이었으며, 후기에는 봉토분(토총) 형식이었다. 석총을 대표하는 것은 중국 지린성 퉁거우의 장군총이고, 토총으로 유명한 것은 평안남도 용강군의 쌍영총이다. 장군총은 외모가 웅장한 반면에, 쌍영총은 내부구조가 아름답다.2)신라초기에는 움무덤을 축조한 시기이며, 전기(4세기 전반~6세기 초)는 돌무지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이 축조되었다. 마지막 시기(6세기 전반 이후)에는 신라의 주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고려시대국가의 통치 체제는 유교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통치 이념은 불교가 중심이었다. 고려 시대는 장례문화에서도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불교적인 의례와 유교적인 절차가 때로는 각각, 경우에 따라서는 혼합되어 나타났다. 여기다가 장례 날짜의 택일은 역술에 의해서 하고, 묘 자리를 잡는 데는 음택 풍수가 받아 들여졌다. 장법을 살펴보면 화장과 매장은 물론 풍장 등의 전통도 이어지고 있었다.조선시대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고려의 불교문화는 점차 소멸되어 가면서 모든 의식 절차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 의식을 따라 부모의 화장을 엄중히 다스렸고, 조상의 묏자리에 따라 자손에 미치는 음덕이 달라진다는 풍수사상에 의해 대규모 분묘가 설치된 산소분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호화분묘와 조상의 제를 지내기 위한 남아선호 사상도 팽배해지기 시작했다.현대의 장례문화현대에는 화장 문화가 부활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간 매장 위주의 장묘문화의 심각성에 대하여 사회 전체가 그 인식을 같이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및 제도의 변화가 필요함에 공감을 같이하게 되었고, 근본적인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나 인지하게 되었다.※과연 고려장은 있었을까?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에다 버렸다고 하는 장례 풍습으로 효를 강조하는 일부 설화에서 전해지지만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조선 시대 민간에서는 연고를 확인할 수 없는 ‘고분’ 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이러한 설화들이 각 종 설화집과 동화책 등에서 소개되면서 고래장이라는 풍습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다루어지기 시작했지만,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리는 풍습을 소재로 한 설화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이렇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모습은 조심씩 다르지만 전통 장례 문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와 가까운 이웃나라인 중국의 전통 장례문화와 그 이외의 나라도 같이 비교해 보았다.중국의 장례문화중국 역사상 장례 의식은 화장, 매장, 수장, 천장, 수장, 탑장, 암장 등 다양한 형태들이 있었다. 한족은 매장을 가장 선호한다. ‘흙에 묻혀 안식한다.’는 뜻에 따른 것이다. 매장은 절차가 복잡하여 부고(친지들에게 장례 일정을 알리는 것), 봉관(시신을 관에 넣고 봉하기), 경야(자녀들이 관 옆에서 밤을 새우며 지키는 것), 제사(친지들이 빈소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는 의식), 희곡 부르기(극단을 초청하여 2~5일간 중국 희곡을 부름), 발인(관을 묘지에 모시기), 안장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농촌에서는 지금도 대부분 매장을 고수한다. 시신을 7일간 집에 안치하며, 금은 장신구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품을 순장 품으로 함께 묻기도 한다. 장례 이후에는 매년 제사를 지내고 종이로 만든 금은보화, 큰 수탉, 돈 등을 태우며 고인의 넋을 기린다.화장은 전통적으로 널리 행해지지는 않으나, 중국 정부가 농지를 보호하고 장례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려하면서 보편화되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을 제정하여 인구 밀도가 높고 농경지가 적으며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는 화장 장식 이용을 명문화하고, 정부 관료들이 이를 위반하면 처분하기도 하였다.정부의 이런 노력 덕분에 2006년 기준으로 화장 방식의 비중이 53%를 넘어 섰고, 현재에는 6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이외에 티베트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선호하는 장례형태인 천장으로 시신을 하늘의 독수리나 까마귀 등의 조류에게 주는 장례 형식이고, 시신을 절벽이나 동굴 암반에 안치하는 암장이 있다. 춥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시체가 쉽게 썩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또한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썩지 않도록 미라를 만들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저승에서도 영혼이 잠들 육체가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2016.04.29| 7페이지| 1,000원| 조회(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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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국굴기를 읽고
    대국굴기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두 민족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역량에 힘입어 항해모험을 펼쳤다. 엔리케 왕자의 진두지휘 하에 포르투갈의 대를 이은 항해가들은 대서양에서부터 남쪽으로 희망봉을 끼고 인도에 달하는 항로를 개척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금 지원을 받아 콜럼부스는 스페인을 대표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인류 최초의 지구순환 항해도를 완성한 후, 당시까지 분리되어 있던 세계는 지리적 대발견으로 완전한 세계로 연결되었고, 세계를 넘나드는 대국들도 이로써 탄생하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서로 경쟁하면서 세계를 양분하고, 새로운 항로와 식민약탈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전세계에 식민제국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6세기 상반기 무렵에는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해 제1 시기의 세계 최강국들이 되었다.그러나 수탈체제를 통해 신속하게 일어난 이 두 나라는 전쟁 중 자산을 낭비하였고, 상공업을 발전시키지 못해 급속도로 성장한 것과 같이 빠르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결국 세계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처음에 항해의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강대국 중 어떠한 한 나라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라는 점에서 의외였다. 이 당시에는 향신료의 가치가 굉장히 컸다는 것에도 놀라웠다. 그리고 주앙2세가 콜럼버스를 놓친 것이 안타까웠다. 만약 주앙2세가 콜럼버스의 말을 듣고 계약을 체결하였다면 정말 항해의 강대국은 포르투갈이 되지 않았었을까? 라고 생각이 든다.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항해 쪽으로만 너무 관심 갖지 않고 국가부흥을 위한 상공업을 신경 썼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다시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을 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좋은 시각으로 봤을 때 그들의 도전정신과 모험의식에 대한 열정은 본받을 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서 많은 위인들이 배출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묵과해서는 안될 비판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자신들의 나라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희생은 란드인들은 장기적으로 투자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로인해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인으로써 매우 중요한 ‘신뢰’에 대한 문제도 볼 수 있었다. ‘바렌츠’가 선장이였던 상선에서 목숨을 잃어도 고객의 물건을 건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융통성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배울 점을 꼽자면 ‘고객과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바다를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마주보고 있는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세계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중세기부터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주제가 관건이 되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해양탐험과 무역을 장려하고, 낙관적 통치이념과 사회적 문제들을 타협적 수단으로 처리하면서 변방의 섬나라를 찬란한 발전 시기로 인도 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은 찰스 1세 국왕은 군권신수설을 신봉해 13세기 대헌장이 규정한 '국왕은 반드시 법률 규정을 준수해야한다'는 것을 위배하고, 화의 기간 중 4년간에 걸친 내전을 벌였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해 군주입헌제를 설립하고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점을 마련했다.상대적으로 관대한 사회분위기는 영국의 경제발전에 좋은 여건을 마련해주어, 산업혁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이 섬나라가 세계무대 중심위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다. 영국의 식민 확장과 해외시장의 성숙으로 상품 수요량이 점점 확대되었고, 수공업 공장의 생산으로는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발명과 창의를 장려하기 위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특허법을 제정했다. 이런 상황은 영국이 전 국민이 발명과 생산, 무역에 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후, 과학정신은 영국사회로 침투해 들어갔고, 와트가 증기기관으로 가장 핵심적인 동력문제를 해결한 후, 영국의 공업화는 놀라운 속도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아담 스미스가 으로 자유경 위치로 끌어올렸다.그러나 무력 확장만으로는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까지, 프랑스는 독립, 자주의 노선으로 과거의 영광을 다시 회복했다.계속된 혼란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일궈낸 세가지 정신을 잃지 않았다.‘자유’ ‘평등’ ‘박애’의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는 그들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였으며, 지금처럼 다시 세계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해주는 밑바탕이 되었다. 어떤 기업이든 자신들의 기본 이념을 지키고, 초심을 잃지 않고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중요한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유럽 각국이 민족국가를 형성할 때, 유럽 대륙 중부에 위치한 독일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경제를 통일함으로써 정치 통일을 이루자는 경제학자 린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관세동맹이 설립되고 무역장벽이 무너졌으며 독일경제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유럽열강의 틈새에서 생존을 도모하며, 외교적으로 충분히 준비를 마친 후 3차례의 대외전쟁을 거쳐 1871년 독일통일을 이루어내었다. 그는 유럽대국의 균형원칙을 준수, 독일이 평화롭게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교육, 과학기술을 중시해 온 독일은 신속하게 2차 산업혁명의 선봉에 섰고, 30여 만에 영국을 추월하고 유럽 최대 세계 2대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원지가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다시 분열되었으나,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을 통해 독일은 평화적 방식으로 국가 재통일을 이뤄냈다.독일은 그들의 어두운 역사를 받아들였고, 자신들이 세계대전을 일으킨걸 부정하진 않았다. 유태인 대학살의 책임을 미루지 않았으며, 12년간 나치통치를 받은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겸허하게 잘못을 받아들였고, 이는 독일국민들에게 국가의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생각한다. 또한 독일에게 피해를 입은 유태일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교과서에 유태인 학살을 주 내용으로 그 시작이 타국에 의한 강제적인 문호개방이라 하지만 미국에 의해 문을 연 이후 적극적인 자세로 서양의 선진문물을 보고 배웠던 것과 달리 왜 우리나라는 그러하지 못했던가 하는 때늦은 탄식이고 두 번째는 패전 후 원자폭탄으로 인해 그야말로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된 일본이 단숨에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저력이다.원자폭탄으로 국가 기반 시설이 모두 파괴된 상태에서 일본은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복구시키고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물론 하드웨어는 파괴되었을 지라도 소프트웨어 즉 그들의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인재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사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게 모르게 업신여기거나 무작정 싫어해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상당부분 일본을 롤 모델로 발전 시켜 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우리가 그렇게 업신여겨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우리나라 보다 매우 앞선 나라이며 배울점이 상당히 많은 나라임에 분명하다.러시아의 역사는 표트르 1세의 이야기서부터 시작된다. 표트르 1세가 재위에 오를 때에는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 되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많은 영토만 가지고 있을 뿐 주변의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 되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농업에만 의존 하며 상업은 거의 외국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교육은 그리스 정교회의 독점으로 100명의 백성 중 3명 정도만 글을 아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러시아의 모습은 재위에 오른 표트르 1세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하여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대규모 사절단을 조직하여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표트르 1세의 유학은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남들보다 낙후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유학을 가는 표트르 1세의 모습은 러시아 국민들의민족적 우월감을 부숴 놓는 일이였기 때문이다. 표트르 1세가 유학을 가고 러시아 안에서는 반란이 발생한다. 그 소식을 들은 표트르 1세는 모스크바로이 보였다.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어찌 됐든 두 사람 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번 영상을 보면서 다른 나라의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를 비교 하여 아쉬웠던 점들을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였다.소련은 그 국민들의 공동생활에 잘 적응 하는 능력 덕에 사회주의라는 체제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란 유럽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나올 그런 체제라고 하였지만 소련은 그 사회주의를 실현하였다. 볼셰비키가 닦아 놓은 혁명의 길을 레닌은 그래도 물려받았다. 레닌은 전쟁 후 피폐해진 나라를 살리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성장만을 위주로 한 정책이었기에 식량위기를 초래했고 결국 반란까지 초래한다. 그 위기를 타개하기위해 정부는 잉여농산물을 판매가능하게 했고 개인의 사업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소련의 시장경제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 후 미국에서 아먼드 해머라는 사람이 소련에 입국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공산당이었다. 그랬기에 해머는 전부터 소련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많았었고 결국 의료기기를 들고 소련에 입국한 것이다. 레닌은 외국인이 자국인에게 어려운 부분인 경영부문에 합류 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해머는 레닌의 지지아래 소련과 미국의 거래에 중심이 되어서 거래를 주도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의 시행 결과 러시아는 경제적 회복에 성공하게 되고 레닌은 인류에게 다른 생활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레닌이 1924년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스탈린이 러시아의 정권을 잡게 된다. 스탈린은 국가산업화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지도자였고 자산계급과 자원을 제한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를 가속화시키기로 하고, 계획경제를 도입,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5개년 계획을 완성하면서 소련은 단번에 산업 강국으로 도약했고, 당시 경제위기에 놓여있던 유럽과 미주 대륙 각국을 놀라게 했다. 이런 산업화의 괄목할만한 성과는 소련의 지령적 계획경제 모델의 폐단까지도 가릴 수 있었다. 곧 이은 제
    독후감/창작| 2016.04.29| 9페이지| 1,500원| 조회(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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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습관에 대해서 평가D별로예요
    습관이란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95%가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한 사람의 습관, 생활방식을 반복한 수많은 행동의 결과이다. 반복적인 선택은 습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습관을 들이면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습관을 들이면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 나에게 좋은 습관은 항상 메모를 하는 습관이다. 메모를 하면 중요한 일을 잊지 않게 해주고, 하루 동안에 일을 정리해 주기도 한다. 나도 처음부터 메모를 하진 않았다. 고등학교때 친구들 중에 이쁜 수첩을 하나 사서 정리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걸 보고 나도 한번 따라 하다가 어느새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습관이 된 것 같다. 메모를 하기 위해서는 수첩을 항상 몸에 지니거나 가방속에 두고 다녔다가 쓸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꺼내서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의 좋은 습관은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생각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 뿐만아니라 다른사람도 기분좋게 상황을 만들어 갈수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다’라는 말 보다는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평소에 투덜거리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다른사람에게 비난의 분노하는 말을 하지 않아야 된다. 긍정적인 말과 생각은 우리 삶에 아주 강한 긍정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그 에너지를 세상의 좋은 기운을 끌어 당겨 아주 긴 파장을 형성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에 빠질수록 긍정적인 행동이 되고 좋은 생각은 자연스럽게 좋은 일로 연결 된다.반대로 나에게 나쁜 습관은 늦잠을 자는 것 이다. 나는 잠이 많았다. 그래서 지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항상 아침을 바쁘게 보냈었다. 그 결과 항상 피곤하였고 지쳐있을 때 가 대다수 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잠자리에 30분더 일찍 눕는것이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나쁜 습관이 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습관도 있었다. 일을 미루다 보니 잠을 늦게 자서 늦잠을 자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을 미루는 습관을 고치려고 세가지의 노력을 하였다. 첫째는 부정적인 말과 생각 하지 않기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일을 미루는 습관은 언뜻보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밀접한 관련이 있다. 뇌에서 긍정적 마인드를 형성하는 도파민이라는 신경물질이 과하거나 부족하면 집중력이 더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생각이 지속 된다면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하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고 미루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반복될 때 긍정적인 마인드로 그런 생각을 안하게 할 것이다.
    교육학| 2016.04.29| 2페이지| 1,000원| 조회(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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